선교양종무원

선교양종무원

[ 禪敎兩宗務院 ]

요약 조선시대에 두었던 불교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도회소(都會所).

종파(宗派)의 사찰과 승려의 감독을 맡아보던 곳으로 세종 때 두었다. 조선시대는 배불숭유정책으로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7종파, 즉 오교양종(五敎兩宗)을 정비 통합하여, 조계(曹溪)·천태(天台)·총남(總南)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華嚴)·자은(慈恩)·중신(中神)·시흥(始興)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하고, 흥천사(興天寺)에 선종의 종무원(宗務院:도회소)을, 흥덕사(興德寺)에 교종의 종무원을 두었다.

그러나 폭군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 교종의 종무원에 있는 흥덕사를 헐어 그 불상을 원각사(圓覺寺)로 일단 옮기고 삼각산(三角山)을 왕의 놀이터로 삼기 위하여 삼각산에 있는 여러 사찰의 승려들을 몰아낸 데, 이어 원각사의 불상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여 승려를 몰아내고 이곳에 기생을 다스리는 기관을 둠으로써 교종의 종무원은 갈 곳을 잃었다. 또한 선종의 종무원이 있던 흥천사의 불상도 회암사(檜岩寺)로 옮기자, 조선 태조가 세운 서울 장안에 있던 양종의 두 본사(本寺)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에 선종과 교종의 종무원은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로 옮겨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특히 이해(1504)는 3년마다 시행하던 승시(僧試)를 시행할 해였으나, 이를 주관하던 양종의 종무원이 서울에 없었기 때문에 실시가 어렵게 됨으로써, 고려의 광종(光宗) 이후 500년을 이어 오던 승과(僧科)제도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1545년(인종 1) 어린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왕대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攝政)을 맡자 독실한 불교신자이던 왕후는 불교탄압정책을 버리고 봉은사(奉恩寺) 주지 보우(普雨)를 후원하여 불교진흥정책을 쓰면서 선종의 종무원을 봉은사에, 교종의 종무원을 봉선사(奉先寺)에 두게 하였다.

역참조항목

교종, 규정소,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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