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금고법

서얼금고법

[ 庶孼禁錮法 ]

요약 조선시대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가는데 일정한 제한을 두었던 신분차별제도. 유교적 관념과 양반중심의 신분사회에서 양반의 특권을 독점적으로 강화 유지하려는 자기도태적 제도.

조선의 사회는 전 왕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신분차별사회로서, 각 출신 신분에 따라 사회진출의 기회도 차등을 두어 주어졌다. 가장 높은 지위는 왕족 다음 상류층인 양반 신분이 독점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양반들이 첩(妾)을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천한 신분의 여자를 첩으로 맞아들이는 경우가 많아 그 소생을 천하게 여기는 의식이 확산되었다. 이것은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부계가 양반이라도 모계가 천인이면 그 소생도 천인으로 분류되었고 사회적으로 차별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주자학의 본격적인 도입으로 예무이적(禮無二嫡)이라는 예교사상이 팽배해지고 일처주의(一妻主義)가 정착되면서 처가 많은 경우 본처 외에는 모두 첩으로 간주되었고 첩의 소생은 모두 차별을 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역(役)을 담당할 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종부법(從父法)이 채택되었다(태종 14, 1414). 따라서 천첩(천한 신분의 첩)의 소생이라도 부계가 양인이면 양인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역을 질 의무도 함께 가졌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양첩(양인신분의 첩)의 소생까지도 모두 차별하는 관행이 확산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첩 소생이 일정한 현직(顯職)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재수단에서 출발하기도 하였다. 즉, 서얼차대를 통해 사족(士族)의 지위권한을 고수하려는 지배자 집단 중심의 신분질서 유지가 강조됨으로써 서얼차대정책이 성립되었다.   

첩의 소생인 서얼(庶孼)들에게 명시적으로 차별하게 된 것은 1415년(태종 15) 서선(徐選)의 건의에 따라 '서얼에게는 현직(顯職)을 금한다'는 규제가 성문화된 뒤부터이다. 그 후 세조·성종 연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되어 법제화됨으로써 구체적으로 제도화되었다. 《경국대전주해》에 서얼신분의 적용은 자자손손에 이른다고 하였고, 양첩의 소생은 '서'(庶), 천첩의 소생은 '얼'(孼)이라고까지 구분하였다. 나아가, 사회진출에 대한 제한(禁錮)이 가해졌는데, 서얼금고에 대하여 《경국대전》의 예전(禮典) 제과조(諸科條)에 서얼은, 죄를 범하여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과 손자 등과 함께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서얼신분이라도 능력 있는 사람은 발탁하여 임용하기도 하였는데,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부계의 신분과 양첩 천첩에 따라 그 자손들을 서용하는 상한선을 규정해놓았다. 그리하여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진출을 할 수 없도록 큰 차별과 제약이 따랐다.  

그러나 서얼 출신이라 하더라도 유능한 인재가 많았고 사회적으로 진출한 경우도 있었다. 서얼 출신 어숙권(魚叔權)이 그의 저술 《패관잡기》에서 서얼들의 사회 진출을 아예 차단한 것은 경국대전 편찬 후부터라고 지적한 것을 보아도, 그 이전에는 어느 정도 벼슬을 한 자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일부 지각있는 자들이나 또는 서얼 출신들이 단체로 상소를 올려 서얼들에게도 벼슬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허통주의(許通主義)를 주장하였다. 중종때의 개혁주의자 조광조(趙光祖)가 이를 주장한 바 있고, 명종때에 서얼들이 양첩손의 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567(선조 즉위년)년에 서얼 1,600여명이 허통 상소를 올려  서얼차대의 철폐, 서얼의 문무핵심 관직 진출의 허용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1583(선조 16)년에 병조판서 이이(李珥)도 군인력의 확보를 위해 허통을 주장하여 일정한 군공헌을 쌓은 자에게는 과거 응시 자격을 주자고 제안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으로 미곡을 받고 또는 일정한 전공을 쌓은 자에게 그 포상으로 허통해주기도 하였다.

1695(숙종 21)년에 영남지방 서얼 988명이, 1724(영조 즉위년)년에 전국 5,000여명의 서얼 출신들이 상소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 덕에 차별대우가 여전한 가운데에도 일부 허통의 사례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1597(선조 30)년부터 1735(영조 11)년 사이에 문과급제자가 42명이나 나왔다. 영조 대에는 더욱 발전하여, 서얼을 청요직에도 서용한다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리고 서얼을 위한 직책을 신설하였고, 그 결과 서얼은 1772년(영조 48)에는 문과의 양사(兩司)와 무과의 선전관(宣傳官)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서얼차별제도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정조 때에는 전조에 미흡했던 점을 더욱 강력히 개선하여 실질적으로 서얼 출신들이 청직에 서용될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 

생진과 출신들도 그 치적 정도에 따라 부사까지 오를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였고, 1777년(정조 1)에는 수임(首任)직을 제외한 지방의 향임직에도 임용될 수 있었다. 1779(정조 3)년에는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두고 유능한 서얼 출신자를 등용하였는데, 유득공(柳得恭)·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는 4검서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조선 후기 선조 이후 영·정조대를 거치면서 왕 자신도 적자(정비) 소생이 아닌 서출이 많았고, 실학사상의 확산 등이 영향을 주어 이러한 허통의 분위기는 전기보다 더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실행되지 못하여 일부 서얼들은 순조 초년에 만연하던 천주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일부는 가문의 차별과 사회적 멸시에 반발하여 19세기에 빈발한 역모사건이나 당쟁에 가담하였다. 또한 소청운동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자 19세기 전반에도 많은 서얼이 참여하는 대규모 소통운동(疎通運動)이 계속되었다. 1823(순조 23)년에는 1만여 명에 달하는 서얼 출신 유생들이 허통요청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계미절목(癸未節目)을 반포하여 서얼들에게 종2품까지의 한품(限品)과 청환(淸宦)으로서 사헌부의 관직이 허용되고, 승정원에도 서얼 출신을 배정하는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하였다. 서얼 출신들의 상소를 통한 허통운동은 계속되었고(1848, 1851), 그 영향으로 하나씩 성과를 거두어갔다. 1857(철종 8)년에는 가장 큰 쟁점이었던 이른바 '문괴무선(文槐武宣)'의 청요직까지 차별이 철폐되었다. 이로써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서얼금고 조항은 법제상으로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서얼차대의 사회적 통념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개화기를 맞아 선진문물이 들어오면서 1894년에는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추진되어 다방면의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사회면의 주요 과제였던 신분차별의 제도 역시 상당수준 개선되었다.

참조항목

서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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