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제

산신제

[ 山神祭 ]

요약 마을의 수호신으로 믿는 산신에게 마을사람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동제(洞祭). 산제·산치성·산제사.
계룡산 산신제

계룡산 산신제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덕적산(德積山)·백악(白岳)·송악(松岳)·목멱산(木覓山)의 산신에게 매년 봄·가을에 내시(內侍) 및 무당과 여악(女樂)으로 제사하게 하였는데, 이를 기은(祈恩)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산신제의 풍속은 계속되었는데, 사악신(四岳神)으로 남은 지리산, 중은 삼각산(三角山), 서는 송악산(松岳山), 북은 비백산(鼻白山)을 정하여 제사하였다.

또 산천신(山川神)으로서 동은 치악산(雉岳山), 남은 계룡산(鷄龍山)·죽령(竹嶺)·우불산(于弗山)·주흘산(主屹山)·금성산(錦城山)·한라산(漢拏山), 중은 목멱산, 북은 감악산(紺嶽山)·의관령(義館嶺)·백두산(白頭山)에 제사하였다. 위의 산악신과 산천신 제사는 나라에서 관장하였는데, 대개 제단을 마련하거나, 단이 없으면 3칸의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모두 각각의 신위(神位)를 두어 신좌(神座)는 북남향으로 하고, 중춘(仲春)·중추(仲秋) 두 번씩 한재·수재·병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사하였다.

한편 민간에서는 각 주·읍에 반드시, 그 북쪽에 진산(鎭山)을 정하고 그곳에 산신당을 지어 진호신(鎭護神)을 모시고 봄·가을과 정초에 제사하는 풍속이 있었다. 지금은 정초부터 대보름 사이에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봄·가을에 지내기도 한다.

제를 지내기에 앞서 먼저 제관을 선정하는데 집안에 초상이나 해산 등 부정한 일이 없는 모범 주민 중에서 결정한다. 제관은 1~3명, 또는 5명에서 많게는 12명까지도 뽑는다. 그 외 축문이 있으면 축관을 선정한다. 제일이 정해지면 마을 입구와 산신당, 제관의 집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을 막는다. 제물비용은 집집마다 추렴을 하거나 동답(洞畓), 마을 공동재산에서 낸다. 제례는 밤에 마을대표들이 모여 제물을 올리고 절하고 축문을 읽거나 비손을 한 뒤 소지(燒紙)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면서 마을회의를 하여 종교적 일체감을 생활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부락제(部落祭)》에 의하면 전국의 부락제 522개 중 산신제에 해당하는 것이 176개나 되는데, 산신제의 풍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