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창의진

산남창의진

[ 山南倡義陣 ]

요약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정용기(鄭鏞基) 부자가 영천(永川)에서 포수와 농민들을 주축으로 조직한 항일의병부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의병을 일으키라는 고종의 명령을 받은 정환직은 허위(許蔿)의 도움으로 마련한 군자금 2만 냥으로 중국인 왕심정을 통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정용기는 친구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1906년 3월 영천 부근에서 산남창의진을 결성하고, 자신은 대장에 추대되었다. 4월 28일 당시 동해안 일대에서 활약한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 협력하여 청하(淸河)를 공격하려고 출전하던 중 정부군의 계략에 빠져 정용기가 체포된 뒤, 결국 7월 하순 해산되었다.

그해 9월 아버지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다시 의병을 일으켜, 먼저 강릉으로 북상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8월 죽장면 매현리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격전 끝에 정용기·이한구·손영각 등이 전사하자, 정환직이 다시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들은 청하순검분파소(9월)·흥해분파소(10월)·신령분파소(11월)·영덕일본군헌병분견대(12월)를 잇따라 습격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계속된 전투로 탄약이 떨어지는 등 싸울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정환직은 강릉에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부대를 해산하였다.

정환직은 강릉으로 가던 중 청하에서 12월 11일 일본군에게 체포, 처형되었다. 그뒤 산남창의진에 참가했던 의병은 남은 세력을 추슬러 각처에서 활동하였다.

참조항목

정환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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