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니뮈스 보스

히로니뮈스 보스

[ Hieronymus Bosch ]

요약 네덜란드의 화가.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작품 또한 동시대 다른 화가들의 경향과 뚜렷한 차이가 있어 미술 역사상 가장 신비에 싸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기괴하고 충격적인 이미지와 기묘한 상징성은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결부된 환상의 세계는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출생-사망 c. 1450 ~ 1516. 8. 9
본명 히로니뮈스 반 아켄(Jheronimus van Aken)
국적 네덜란드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네덜란드 스헤로토헨보스
주요작품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Christ Crowned with Thorns》(c. 1480),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Four Last Things》(c. 1480~1490), 《건초 수레 The Haywain》(c. 1500),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ement》(c. 1504),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c. 1510)

히로니뮈스 보스(Hieronymus Bosch)는 1450년 경 오늘날 네덜란드 남부에 속하는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에서 태어났다. ‘보스’라는 그의 이름은 필명으로 출생지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실제 성(姓)인 반 아켄(van Aken)은 그의 가족이 독일의 아헨 출신임을 나타낸다. 그의 할아버지 얀 반 아켄(Jan van Aken)과 아버지 안토니우스 반 아켄(Anthonius van Aken) 역시 화가로 일했다. 그의 생애와 예술 활동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거의 없어 스헤르토헨보스 시(市)의 문서와 그가 속한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회계 장부에 의존할 뿐이다.

보스의 이름은 1474년 시(市)의 문서에 그의 두 형제와 한 명의 누이와 함께 처음 언급되었다. 그리고 1479년에서 1481년 사이에 그보다 몇 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여성은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보스가 비교적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었다. 실제로 보스가 낸 세금 영수증을 보면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편에 속했기 때문에 화가로서 생계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재정적인 여유로움이 그가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 달리 독특하고 기괴한 주제를 선정할 수 있었던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보스는 1486년에서 1487년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회원으로 등재되었다. 보스의 초기 작품들은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회원이 되면서 주문받은 것들이다. 비록 이 때 형제회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작품들은 1566년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성상파괴운동으로 모두 유실되고 없지만, 개인회원들이 주문한 몇몇 작품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성모 마리아 형제회가 상류사회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단체였기 때문에 보스는 조신들이나 네덜란드 귀족들과 교제할 수 있었고, 이들이 그에게 작품을 주문했다. 보스의 세 폭 제단화 《최후의 심판》(1504년 경)은 카스티야의 미남왕 펠리페 1세(Felipe I)가 주문했고, 또 다른 세 폭 제단화 《세속적 쾌락의 정원》(1510년 경)은 나사우의 백작 헨드리크 3세(Hendrick III)가 브뤼셀에 있는 그의 성을 위해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가 그린 종교화들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환상적인 이미지와 기묘한 상징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작품은 성경에 나오는 성인들의 일생과 종교적 믿음, 민속 노래와 문학 작품, 점성술, 연금술, 마술 등에서 영감을 받은 환상적인 장면들이 서로 얽혀 있다. 이러한 복잡한 이미지들은 그 해석이 엇갈리고 정확한 의미를 밝혀내지 못해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한때 보스가 이단 종파의 추종자였으며, 자신의 종파에 대한 숭배를 목적으로 그림을 제작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그림이 염세적이며 세기말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세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모든 성상학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전적으로 새 시대에 속한 인물이었다.

보스의 생애는 1516년 8월 9일 그의 사망 기록으로 끝을 맺는다. 이날 마리아 형제회의 회원들은 성 요한 교회에서 그를 추도하는 장례 미사를 엄숙하게 거행했다. 보스의 작품은 당대에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후에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20세기 초반에 재발견 되었다. 그의 독특한 상상력과 표현 방식은 16세기 농민화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에게 이어졌고, 후대에 이르러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를 비롯한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상당한 영감을 주었다. 그의 작품은 원작을 복제하거나 모방작이 많아 실제로 그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대략 25점에 불과해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희귀하다.

주요 작품에는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Christ Crowned with Thorns》(c. 1480),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Christ Carrying the Cross》(c. 1485~1490),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Four Last Things》(c. 1480~1490), 《바보 치료 The Cure of Folly》(c. 1480~1490), 《바보들의 배 The Ship of Fools》(c. 1490), 《건초 수레 The Haywain》(c. 1500),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ement》(c. 1504),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Temptation of St. Anthony》(c. 1505),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c. 15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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