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화

백동화

[ 白銅貨 ]

요약 1892년 전환국에서 발행한 액면가 2전5푼(二錢五分)의 동전.

개항 이후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민씨정권이 이를 타개하려는 수익사업의 하나로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조세금납화의 조치로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에 따른 은본위제가, 1901년에는 화폐조례(貨幣條例)에 의한 금본위제가 실시되면서 이 화폐는 보조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궁핍으로 본위화폐가 거의 주조되지 않는데다 이를 뒷받침할 금융기관 ·징세기구 등이 발달하지 못하여 화폐제도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특히 정부가 수익만을 위해 백동화를 남발한 탓에 엄청난 양의 불법 ·불량 백동화가 유통되면서 가치하락은 물론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주조방식에는 정부에 주조액의 3분의 1에서 2분의 1을 내기로 하고 공공연하게 주조특권을 얻어 주조하는 특주(特鑄), 왕실에서 상납전을 받고 ‘개(啓)’라는 글자가 적힌 특허장을 주어 주조를 묵인하는 묵주(默鑄), 내외국인이 원료와 기계를 구입하고 전환국에서 사용하는 백동화 판형을 몰래 입수하여 위조화폐를 만드는 사주(私鑄)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청(淸)국 ·일본 ·독일 ·영국인 등 외국인이 위조한 화폐를 국내에 밀수입하여 사용하여, 서울과 평양의 경우 위조화폐량이 전통화량의 각각 20~30 %, 80 %를 차지할 정도로 위조화폐 문제는 심각하였다.

때문에 백동화의 가치가 급속히 하락하여, 백성들은 백동화의 소유를 꺼리고 왕실과 관청에서조차 상납금을 주로 일본 화폐로 받아들이면서 한국의 화폐제도는 사실상 일본의 화폐제도에 종속되어 갔다. 이와 같이 백동화는 국내 화폐의 유통질서를 어지럽히고 물가상승과 그에 따른 민중생활의 궁핍을 가져왔지만, 정부는 백동화의 발행이 왕실과 국가의 재정수입에 큰 몫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1904년 전환국이 폐지될 때까지 쉽사리 화폐제도를 개혁하지 않았던 것이다.

참조항목

동화, 화폐

카테고리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