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반란

뮌헨반란

요약 1923년 11월 히틀러가 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
원어명 München Putsch
언제 1923년 11월 08일
어디서 뮌헨
누가 히틀러
무엇을 반란
어떻게 600명의 무장돌격대(SA)와 함께 뮌헨 뷔르가브로이하우스를 습격
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항

비어홀폭동 ·히틀러폭동이라고도 한다. 20년 카프반란 뒤 바이에른에서 왕당파(王黨派)정권이 성립하여 뮌헨은 전독일 반동파의 근거지가 되고, 나치스도 그들로부터 무기 ·자금원조를 받아 발전하였다. 그러나 바이에른 지배계급은 비델스바흐왕가(王家) 부활과 베를린으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한 분리파로, 나치스는 루덴도르프 이하의 극우 비합법 군사단체와 동맹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공화제(共和制)를 타도하려 하였으므로, 왕당파와는 목적과 운동방법이 달랐다.

그러나 나치스는 강력하지 못하였으므로, 바이에른 군부(軍部) 지지가 필요하였으며, 바이에른 지배자들도 나치스의 대중조직을 그들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이용하려 하였다. 23년 10월 세력을 증대한 독일 육군사령관 제크트가 바이에른 군부와 분리파에게 대탄압을 가하려 하자, 바이에른 왕당파는 나치스가 필요하였다. 결국 제크트 세력의 압력을 눈앞에 두고, 바이에른 왕당파와 나치스가 최후투쟁을 전개하였다.

11월 8일 밤 히틀러는 600명의 무장돌격대(SA)와 함께 뮌헨 뷔르가브로이하우스를 습격하여, 거기서 대집회(大集會)를 연 G.카르(1862∼1934) 이하의 바이에른 지배자들을 체포하였다. 권총으로 협박한 끝에 그들을 히틀러의 ‘군민혁명(軍民革命)’ 반란에 협력하게 하였다. 루덴도르프도 회장에 나타나 히틀러에게 협력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바이에른 구왕가(舊王家)와 가톨릭 추기경 일파는 루덴도르프가 지도한 반란에는 절대반대를 표명하여, 카를 일파는 반란 반대로 전향하였다. 또한 베를린에서도 제크트가 곧 반란 반대를 표명하므로, 반란파들은 고립되었다. 11월 9일 히틀러의 일파는 형세를 호전시키기 위하여 무장 데모대 약 3,000명으로 시위를 벌였다. 대열이 시의 중심부로 진출하였을 때에, 경찰의 일제사격을 받아 패퇴 ·사산(四散)한 결과로 끝났으며, 나중에 히틀러는 5년 형을 선고받았고, 루덴도르프는 무죄가 되었다.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