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용

남유용

[ 南有容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서 영조 때 승지(承旨)·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과 시, 글씨에 능하였으며, 《뇌연집》《명사정강》 등의 저서가 있다.
남유용묘및묘갈

남유용묘및묘갈

출생-사망 1698 ~ 1773
본관 의령
덕재
뇌연 ·소화
시호 문청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뇌연집》《명사정강》
주요작품 <우화교비> <해백윤세수비>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자는 덕재(德哉), 호는 뇌연(雷淵)·소화(小華)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대제학 남용익(南龍翼)의 증손자이고, 동지돈령부사 남한기(南漢紀)의 아들이며,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721년(경종 1) 진사(進士)가 되어 강릉참봉(康陵參奉)·종묘서부봉사·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군자감주부·형조좌랑·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내고,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영조에게 간관(諫官)은 필요하다면 시비를 끝없이 따져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해남으로 찬배되었다. 1743년 홍문관에 등용된 후 부교리·부수찬·응교·교리 등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문학·필선·보덕 등의 직을 거쳤으며 1747년(영조 23) 응교로 있을 때 군덕10조(君德十條)를 진언하여 군주의 성실을 강조하였다. 1748년에 통정(通政)으로 승진하고 승지(承旨)·판결사·형조참의를 거쳐 승문원제조·대사성·예조참판·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754년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세손이었던 정조를 무릎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으며, 이듬해 《천의리편(闡義理編)》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겸직하였다. 예문관제학·비변사제조·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병조참판·대사헌(大司憲)·대사성을 거쳐 1757년 원손사부(元孫師傅)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판·대제학·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역임하고 1765년에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정헌(正憲)으로 승진한 뒤 사직소를 올려 1767년에 봉조하(奉朝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장과 시(詩)에 뛰어나고 서예(書藝)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집에 《뇌연집》, 저서에 《명사정강(明史正綱)》 등이 있으며,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우화교비(羽化橋碑)와 해백윤세수비(海伯尹世綏碑) 등에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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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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