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

김창준

[ 金昌俊 ]

요약 기독교인으로 종교활동을 하였고, 3.1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말년에는 좌익활동을 하였다.
출생-사망 1889 ~ 1956

평안도 강서군 중산면 출생으로, 강서군 반석면의 소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수료하였다.

18세 때 미국인 선교사인 문약한(文約翰, Moore, J. W.)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평양 중앙교회, 박구리 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 전날인 2월 28일 함태영(咸台永)으로부터 독립선언서 900매를 건네받아, 이 중 600매를 이갑성(李甲成)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300매는 경성화상점 사무원 이계창(李桂昌)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가져가 나누도록 하였다.

삼일독립선언서에는 예수북감리교 전도사 신분으로서 기독교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당시 30세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는 독립선언서 발표 모임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1년 12월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이종일, 최린(崔麟), 함태영, 한용운 등과 함께 가(假)출옥하였다. 그 후 그는 서울 감리교 중앙예배당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였다. 목사로 있는 중앙예배당 뿐만 아니라, 서울 상동교회, 성북동교회, 석교교회 등을 돌며 설교 및 강연활동을 계속하였다.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의 순회 강연 등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에서 1926년까지 한 때 미국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광복후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하여 좌익활동을 하였고, 1946년 2월에는 좌익계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및 중앙상임위원직을 수행하였다. 1948년에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직에도 올랐다. 6.25전쟁을 겪은 후 북한을 선택하고 월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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