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지

김여지

[ 金汝知 ]

요약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고려말 조선 초에 관직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언사(言事)로 유배· 파면 ·좌천 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로서 하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예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참찬에 올랐다.
김여지 선생 묘

김여지 선생 묘

출생-사망 1370 ~ 1425
본관 연안
사행
시호 문익
활동분야 정치, 행정

본관 연안(延安). 자 사행(士行). 시호 문익(文翼). 1389년(창왕 1)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규정(糾正)에 임명되나, 곧 언사(言事)로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다시 우정언(右正言)으로 등용되어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다가 파면되었고, 뒤에 예조좌랑 ·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 등을 지냈으나 정도전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뒤에 복직되어 우헌납(右獻納)으로 있던 1402년(태종 2) 언사로 창평(昌平)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곧 복관되어 병조 ·이조의 정랑(正郞)에 이어 정4품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으나, 다시 언사로 순금사(巡禁司)에 갇혔다가 봉주지사(鳳州知事)로 좌천되었다. 1410년 정3품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나, 1413년 고려 종실의 후손인 왕걸오미(王乬吾未)의 동정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다. 1414년 다시 예문관제학으로 기용된 뒤 충청도관찰사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417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예조판서 ·한성부판사를 역임하고,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판서를 거쳐 종1품 의정부참찬에 올랐다. 충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역참조항목

연안김씨

카테고리

  • > > >
  • > > >
  • > > >
  • > > >
  • > > >

관련이미지

김여지 선생 묘

김여지 선생 묘 경기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양평군 향토유적 제4호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