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숭조

김숭조

[ 金崇祖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연산군 때 관직생활의 대부분을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으로 보냈는데,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 아래에서 벼슬한 것을 후회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청맹이라 일컫고 두문불출하였다가 다시 관직에 올랐다.
출생-사망 ? ~ ?
본관 광산
희지

본관 광산(光山). 자 희지(禧之). 충손(衷孫)의 아들. 1495년(연산군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의 종9품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이어 정자로 승진하고 1501년 사간원(司諫院)으로 옮겨 정6품 정언(正言)이 된 뒤 관직생활의 대부분을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으로 보냈다. 1504년 사헌부의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 아래에서 벼슬한 것을 후회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청맹(靑盲)이라 일컫고 두문불출하였다.

1507년 사간원의 헌납(獻納)에 기용되어 연산군 치하에서 악행을 저지른 관원들을 징계하였다. 같은 해 성균관사예(司藝)로 재직중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간원의 사간에 올라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대한 논상(論賞)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515년 사헌부의 집의(執義)로 전직하고 이듬해 나주목사로 나갔다. 고종 때 전라도 무안(務安)의 충효단에 향사(享祠)되었다.

참조항목

연산군, 헌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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