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광

김국광

[ 金國光 ]

요약 조선 전기 문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적절한 조치로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 2등에 책록, 좌찬성이 되고 광산군에 봉해졌다. 건주위정벌에도 공을 세워 군공 3등에 책록되었다.
모원재

모원재

출생-사망 1415 ~ 1480
본관 광산
관경
서석
시호 정정
별칭 광산군 ·광산부원군

본관 광산(光山). 자 관경(觀卿). 호 서석(瑞石). 시호 정정(丁靖).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正字)를 거쳐 판관 ·지평(持平)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교리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최옥산(崔玉山)의 살부(殺父)사건이 일어나자, 승문원부지사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이것이 무고임을 밝혀내어, 세조의 신임을 얻어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1460년 오랑캐가 침입하자 함경도경차관으로 적을 회유하고,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우부승지로 신형법(新刑法)을 상정(詳定)하였다. 1467년 우참찬 겸 병조판서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적절한 조치로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 좌찬성이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건주위정벌에도 공을 세워 군공(軍功) 3등에 책록되었다. 1469년(예종 1) 겸병조판서에서 해임, 좌찬성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좌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경국대전》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477년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심한 반발로 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