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서린
[ 孔瑞麟 ]
- 요약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다. 승지로서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하여 여러 번 삭직되었다. 김안로가 죽은 뒤 경기도관찰사·대사헌,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출생-사망 | 1483 ~ 1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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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창원(昌原) |
자 | 희성(希聖)·응성(應聖) |
호 | 휴암(休巖) |
시호 | 문헌(文獻)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정치 |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자는 희성(希聖)·응성(應聖), 호는 휴암(休巖)이다. 공의달(孔義達)의 아들로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배우면서 조광조(趙光祖)와 친교가 있었다.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509년(중종 4) 좌랑으로서 정전예연(正殿禮宴)에서 여악(女樂)을 쓰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1511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홍문관부수찬·수찬·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으며, 1516년 장령(掌令)으로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언로(言路)의 확장을 주장했다.
1518년 승지(承旨)로서 대관을 논박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1519년 다시 좌승지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 뒤 시사(時事)에 대해 분격하여 재상을 공격하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하여 여러 번 삭직되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가 죽은 뒤, 1538년 경기도관찰사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이듬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