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모스크바 시베리아횡단철도 운송조정협의회(CCTT) 본부에서 만난 제나디 베소노프 CCTT 사무총장은 한국 정부의 ‘유라시아 철도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CCTT는 TSR의 효율적 화물운송 협력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러시아 철도청의 후원으로 1993년 결성된 국제협의체로, TSR 16개 철도 운영기관과 한국을 포함한 23개국 105개 기업이 회원사로 가입해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유라시아 철도 계획을 위해서는 TKR과 TSR이 연결돼야 한다. 가능성이 있나.
-사실 최초의 아이디어는 2005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우리 협회 총회에서 나온 것이다. 남북한 사이가 어떤지는 한국인들이 더 잘 알 테니 굳이 말하지 않겠다. 언젠가는 실현될 사업이라고 본다.
→철도 연결 사업뿐만 아니라 비자면제협정 등 한국과 러시아의 교류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TSR이 어떤 역할을 할까.
-TSR은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노선이 아니라 부산에서 출발해 독일, 영국,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다. 해상 운송을 주로 이용하는 한국도 TSR을 활용한다면 또 하나의 물류 대안이 생기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천연자원을 수입해 가기가 편리할 것이고, 한국 기업의 러시아 진출이 활발해지고 양국 간 교류도 확대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외교적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TSR은 해상, 항공 등 다른 운송수단에 비해 어떤 강점이 있나.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땅에서도 기차는 늘 시간을 지킨다. 예측 가능하다는 게 TSR의 가장 큰 장점이다. 안정성과 정기성이 탁월한 운송 수단인 것이다. 화물 열차는 전철화된 전 구간을 따라 20분에 한 대씩 정기적으로 운행된다. 지난해 블라디보스토크 일부 지역에 홍수가 났을 때도 트럭 등 다른 운송회사들은 휴업했지만 TSR은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
→해상 운송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는 점에서 TSR 이용을 꺼리기도 한다.
-단순히 비용만 비교해서는 안 된다. 해상 운송은 부산에서 출발해 모스크바 인근까지 40~45일 정도 걸린다. TSR은 부산항에서 보스토치니항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오는 데 17~18일 정도 걸린다. 빠른 운송이 필요한 물건이라면 30% 정도 비싼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TSR을 이용할 가치가 있다.
[서울신문]
부산에서 시작해 북한을 거쳐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유럽의 관문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유라시아 철도).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연결하는 이 사업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꼽힌다. 통일부는 올해 업무보고에서 ‘나진-하산’ 물류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북한 철도 개·보수 및 TKR과 TSR, 중국횡단철도(TCR) 연결도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계획을 밝혔다. 서울신문은 ‘유라시아 루트를 가다’ 시리즈를 통해 TSR 전 구간과 TCR 일부 구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와 중국 훈춘 등 유라시아 루트 주요 도시들의 특징과 발전 가능성에 대해 다뤘다. 기획을 마치며 유라시아 철도 계획의 필요성과 올바른 추진 방향, 개선점 등을 전문가 진단을 통해 짚어 봤다. 김승동 LS네트웍스 사장, 김재진 강원발전연구원 박사, 서종원 한국교통연구원 박사, 이용상 우송대 철도경영학과 교수, 정한구 범한판토스 러시아법인장 등 5명(가나다순)과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지금의 남북관계 및 국제 정세를 고려했을 때 유라시아 철도 계획의 실현 가능성은.
서종원 박사 과거 김대중 정부 때부터 ‘철의 실크로드’ 등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던 숙원 사업이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지금은 중국의 G2(주요 2개국) 부상, 세계 경제 중심이 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했고, 자원수송로의 중요성 인식과 함께 자유무역협정(FTA) 등 국가 간 경제협력 증대가 이뤄지고 있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국가브랜드 및 경쟁력 향상 등으로 유라시아 국가들의 관심이 커가는 상황이다. 러시아, 중국 등의 참여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고 볼 수 있다.
김승동 사장 사업의 핵심 주체인 한국과 러시아만 공감대를 이룬 상황이지만 정부차원의 움직임을 볼 때 실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특히 러시아는 새로운 시장으로 아시아·태평양을 선택한 데다 극동지역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유라시아 철도 계획이 러시아의 개발사업과 맞물려 있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이 사업에 동의하더라도 세부적인 조건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난제들이 많아 시간은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
김재진 박사 실현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이라는 최대 변수가 해결돼야 한다. 북한의 개혁·개방이 전제돼야 하고, TKR과 TSR 미연결 구간의 정치적·군사적 문제에 대해 남북 간 협의가 이뤄져야만 한다
→김 박사의 말처럼 사업의 실현 여부를 놓고 북한이 최대 변수로 꼽히고 있다. 해결방안이 있을까.
김승동 사장 북한은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어 점진적 개방 없이는 자생이 불가능하다. 이미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협력을 통해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했던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번 사업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제안이다. 특히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러시아나 중국 등 주변국의 상황과 명분이 있다면 충분히 사업에 참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종원 박사 우선 한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경제적인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줘야 한다. 북한도 남북한 철도 연계가 통과 비용 등 북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최근 북한·중국 고속철도 건설합의, 북한 조국통일연구원 부원장의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긍정적 입장표명 등은 이러한 북한의 관심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해상·항공 운송이 존재하고 있고, 북한이라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유라시아 철도 계획을 추진할 필요성이 있나.
서종원 박사 유라시아 철도와 관련해 ‘가격 경쟁력은 해상운송보다 낮고, 속도는 항공보다 느리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뒤집어보면 ‘가격 경쟁력은 항공보다 월등하며, 속도는 선박보다 휠씬 빠르다’로 해석된다. 화물의 품목별로 각각 요구하는 운송시간과 비용 등 적합한 운송 수단이 다르다.
정한구 법인장 기업 입장에서 보면 물류 수단이 하나 더 생긴다는 것은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기존의 해상, 항공 운송과 철도 운송이 경쟁이 되면서 안정적인 루트 개발 등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단순히 운송 수단이 늘어난다는 것 외에도 부산항의 중요성 증대와 열차가 통과하는 강원 지역의 발전 등 새로운 경제적 효과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이용상 교수 단기적인 관점에서 경제성의 논리로만 본다면 유라시아 철도 계획은 타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러나 철길 하나가 연결됨으로써 러시아, 중국, 몽골, 카자흐스탄 등 선로를 지나는 국가들과의 사회·문화적 교류와 인적·물적 교류가 증가하게 된다. 섬나라처럼 막혀 있던 우리가 육로를 통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통일을 위한 선제 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필요성이 높은 사업이다. 단순한 물류 운송이 아니라 유라시아 루트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에서 원자재가 가공·개발되거나, 자원의 운송과 재가공 등 협업 모델도 가능해진다.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올바른 추진방향과 갖춰야 하는 경쟁력은.
김승동 사장 정부 간 협약으로 루트가 조성돼도 실질적인 사업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기업들이 참여할 수 없다. 업계에서는 한국, 북한, 러시아의 통관절차 간소화가 곧 경쟁력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즉 유라시아 철도를 통해 제품을 보내야 할 동기를 부여해 줘야 한다.
서종원 박사 우선 남북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 안전하고 지속적인 북한지역 통과 보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개성공단과 같은 파행이 이어진다면 운송수단이라는 특성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기차 궤도가 다른 점 등 기술적인 문제는 환적 설비구비, 궤간가변기술(궤도 사이 간격을 변화시키는 기술) 등이 이미 많이 연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을 바로 사용가능할 수 있게 현실에 적용하는 작업도 준비해야 한다.
이용상 교수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 및 국제협력 강화도 염두에 두고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특히 러시아, 중국, 북한을 포함하는 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인 철도협의체인 국제철도협력기구(OSJD)에 가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국토교통부가 올해 안에 OSJD 가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처럼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계획이 성공한다면 효과 및 파급은?
서종원 박사 우선 동북아시아~유럽 간 철도운송체계 구축 현실화를 통해 물류량은 점진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유럽, 중앙아시아와 우리나라 간의 자동차 부품 등 중간재나 전자 제품 등 비교적 운송시간의 탄력성과 부가가치가 높은 품목의 수요가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유럽,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물동량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다만 유럽행 화물에 비해 다시 돌아올 때 발생될 수 있는 공컨테이너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김재진 박사 TSR을 이용한 철도 물류루트 이외에 우리나라와 태평양 국가들의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유럽을 대상으로 경쟁력 있는 철도와 해상 복합 운송루트 구축이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벨라루스공화국, 카자흐스탄 등 과거 CIS(독립국가연합) 국가로의 진출이 용이해질 것이고, 북방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 역시 기대해 볼 수 있다.
김승동 사장 장기적으로 북한의 경제 회복에 따른 자생력 확보로 향후 통일비용 감소 효과 및 남북관계 개선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 역시 장기적이고 규모가 큰 사업을 함께 추진하고, 이를 통해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등 외교적·경제적 성과도 기대된다.
홍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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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거라곤 "스바씨바"... 눈앞이 하얘졌다
[오마이뉴스 정대희 기자]
2013년 1월,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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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어버린 바다, 그리고 배 러시아의 추위는 바닷물도 얼 정도입니다. 블라디보스톡 항구에 정박한 배와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얼음조각 모습 |
ⓒ 정대희 |
2013년 1월 14일.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은 한산했다. 인기척이 없으니 화창한 날씨가 되레 을씨년스럽다. 여객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깥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곳곳에 하얀 피부의 코 큰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소리에 실내가 어수선하다.
막상 홀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몰려온다. 오만 가지 잡생각들이 머리에 가득하다. 초조한 나와 달리 배웅하러 쫓아온 가족들은 신이 났다. 조카들은 터미널 안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뛰어다니기 바쁘다.
조카들뿐만 아니다. 누나들과 매형들, 남동생은 오랜만에 나선 가족여행에 들떠 있다. 아까부터 날 배웅한 뒤 찾아갈 밥집을 결정하느라 한참 토론중이다. 스무 명 남짓한 대가족 출연에 외국인들도 구경거리가 생긴 듯 자꾸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나 홀로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는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승선권을 발급받았다. 매표소로 가서 예약확인서와 여권을 제출하자 매표소 직원이 선박용 보딩 패스를 건네주었다.
배를 타고 러시아행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비용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산 가격에 러시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배를 타기로 결정했다. 동해항에서 출발한 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할 예정이다.
여행계획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이다. 유럽에서의 일정은 차츰 계획하기로 하고 일단 여행을 떠났다.
당차게 내딛은 첫발, 검색대 거치며 '멘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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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행 승선권 동해항 국제터미널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크루즈의 승선권 |
ⓒ 정대희 |
승선권을 받아들자 환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터미널 건물을 빠져 나와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환전소로 향했다. "러시아 돈으로 환전 좀 해주세요"라고 말하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호주머니에서 두툼한 지폐 뭉치를 꺼냈다.
"얼마나 바꿔 줄까요?"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나 환전을 해야 하는 것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었다. 일단 한화로 10만 원을 남기고 나머지 40만 원을 중년 사내에게 건넸다. 능숙하게 지폐를 세던 그는 또 다른 호주머니서 동전을 꺼내며 말했다.
"1000원에 38루블이니까..."이 말을 듣고야 나서 러시아 화폐단위가 '루블'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기본적인 정보도 알아오지 않는 허술한 여행준비가 들통 나는 순간이다. 어처구니없는 나의 용기에 피식 헛웃음이 절로 났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환전한 루블 뭉치와 동전을 받아들고 다시 터미널 건물로 향했다.
두려움과 설렘 사이를 오가는 복잡 미묘한 기분에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지 못했다. 괜스레 터미널 곳곳을 서성이다 마침내 배낭을 짊어졌다. 어깨에 와 닿는 무게감이 커 순간 움찔했다. 80리터 크기의 배낭을 짊어진 모습에 이목이 집중됐다.
오후 2시, 출발에 맞춰 승선하기 위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하고 출국심사대로 향했다. 드디어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떨리는 감정을 숨기고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가족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당차게 출국심사대 걸음을 옮겼지만 곧바로 위축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가방이 검색대를 지나자 보안검색요원이 짐을 풀어보란다. 걱정스런 얼굴로 서둘러 가방을 풀어헤쳤다. 문제는 흔히들 '맥가이버 칼'이라고 부르는 다용도 칼이 원인이었다. 보안검색요원은 휴대가 불가능하니 배 안의 안내 데스크에 맡기고 하선할 때 찾아가란다. 첫발부터 삐걱된다.
다시 짐을 싸고 가방을 짊어지고 터미널을 빠져나오자 항구에 크루즈가 보인다. 생각했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크다. 다소 불안해 보이는 사다리를 엉거주춤 지려밟으며, 크루즈에 승선한다.
안내에 따라 실내에 들어서자 예상과 달리 배 안이 넓다.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좌석을 찾아갔다. 2층 침대들이 즐비한 선실에 들어서자 외국인들이 가득하다. 문 앞, 침대칸에 짐을 풀었다. 바로 밑 침대칸에는 외국인이 누워 있다. 눈인사를 하고 대충 짐을 풀었다. 그리고 곧장 갑판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몸에 찌릿한 전류가 흐른다.
멀미에 '죽을 맛'...호된 신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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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실 풍경 배 안에는 면세점과 식당, 편의점, 안내데스크, 샤워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
ⓒ 정대희 |
"못할 게 없다. 할 수 있다."갑판에 서서 멀어져 가는 항구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의지를 다진다. 한참을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차디찬 날씨에 이내 실내로 다시 돌아갔다.
실내는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마다 객실이 있으며, 2층에는 안내데스크와 면세점 서너 개가 들어서 있다. 2층 편의점 옆으로는 바와 레스토랑도 있다. 1층과 3층에 있는 휴게실과 샤워장도 눈에 띈다.
실내구경을 거의 마칠 즈음, 갑자기 속이 메스껍기 시작했다. 머리도 어지럽다. 순간, '아차' 싶다. 그제야 가방에 고이 넣어둔 멀미약이 떠올랐다. 동해항 출발 5시간, 멀미가 찾아왔다.
서둘러 약을 찾아 먹었지만 이미 발발한 멀미 증상에 몸이 축 늘어지고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샤워를 하면 괜찮아질 것 같아 몸을 씻어보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바람을 쐬기 위해 다시 갑판으로 향했다.
시나브로 약 기운이 몸에 퍼지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아. 그때, 반대방향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인 맞으시죠. 반갑네요.""네, 반갑습니다. 배타고 러시아 가는 한국 사람이 저 말고 또 있네요.""저도 저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전 바이칼 호수까지 갑니다. 어디까지 가세요?""러시아를 횡단해 유럽으로 갈 예정입니다. 알혼섬도 가 볼 예정이고요."여행객이란 공통점 때문인지 그와 금방 친해졌다. 통성명을 통해 그의 이름이 '전동환'이라는 사실과 개명을 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린 그렇게 서로의 여행계획을 공유하고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면서 무료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중에 스물다섯 살의 '조항근'이라는 친구를 만나 셋이서 수다를 떨며, 러시아로 향했다.
이튿날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27시간 배를 타고 오면서 동환이와 항근이 차례대로 배 멀미로 고생을 했다. 나와 똑같이 그들도 멀미약 먹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씁쓸한 일도 있었다. 동환과 갑판에서 대화를 하는 도중 2명의 러시아인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러시아인들이 동환의 핸드폰을 빼앗듯 가져갔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국제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둘 다 어이가 없어 제대로 응수도 못했다. 또 한 차례 러시아인이 누군가와 통화를 시도하려는 찰나, 나는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채 동환에게 돌려주었다.
순탄치 않은 입국,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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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보스톡의 국제여객터미널 전경. |
ⓒ 정대희 |
배가 항구에 도착했지만 하선하기까지는 약 2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우리 셋은 갑판으로 나와 배가 접안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바다 위에는 얼음조각이 둥둥 떠있다. 항구에는 수많은 배와 컨테이너들이 뒤엉켜 있고 그 뒤로는 눈 덮인 도시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말로만 전해 듣던 러시아의 추위는 잠시 노출했을 뿐인데 뺨이 아플 정도로 춥다. 서둘러 다시 실내로 들어갔다.
하선을 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한 외국인 탑승객이 즉석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셋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연주에 맞춰 박수를 쳤다. 자연스럽고 자유스런 분위기에 심장이 요동쳤다.
출국할 때도 순탄치 않더니 입국하기도 힘들다. 나만 입국 심사대에서 걸렸다. 이번에는 입국 신고서가 문제였다. 아는 러시아말이라고는 배에서 공부한 "쯔드라스부이쩨(안녕하세요)", "스바씨바(감사합니다)"가 전부였다.
호기롭게 입국 심사를 하던 중년의 러시아 여성에게 입국 신고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내게 입국 신고서를 돌려주었다. 눈치를 보니 다시 써오라는 것 같다. 작성요령을 재차 확인했지만 러시아어로 설명이 돼 있어 도통 알아볼 수가 없다. 세 번째 그에게 다시 입국 신고서를 내밀자 끝내 그는 내 여권을 받아들고 직접 작성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국 심사를 마쳤지만 검색대에서 또 다시 가방을 풀어헤쳤다. 이번엔 '핫팩'이 문제였다. 몸 이곳저곳에 핫팩을 갖다가대며 할 수 있는 뜨거운 표정을 죄다 지어보였다. 다행히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산 너머 산이라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또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영문 표기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사방에 온통 러시아어뿐이다. 우리 셋은 굳어진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곧 다시 돌아가야 하는 참극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동해-러시아 크루즈 이용정보 |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러시아로 떠나는 크루즈는 동절기과 하절기로 나뉘어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동절기는 매주 월요일 오후 2시 출발이며, 하절기는 일요일 오후 2시 출발입니다.
항공탑승과 마찬가지로 출발 2시간 전에 도착해 출국수속을 밟아야 하며, 시차는 블라디보스토크가 2시간 더 빠릅니다. 두 나라를 오가는 선박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해당 크루즈를 운행하는 업체의 누리집을 방문하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동해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객터미널까지의 거리는 약 7킬로미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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