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수련하는데요 너무열나요 ㅠㅠ 내공80겁니다

호흡수련하는데요 너무열나요 ㅠㅠ 내공80겁니다

작성일 2009.05.1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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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수련하고있습니다  8일짼데요

 

호흡수련할때 

 

물속에서 방구끼면  물방울이 뽕하고 터지면서 수면으로 올라가듯이

 

호흡에집중하면 미간에서 인당혈쪽으로 공기방울같기도하고 젤리같기도한것이 윗쪽으로

 

흘러가거든요  첫날 천문까지 흘러갔고    둘째날   백회까지 흘러가고등등...

 

앞쪽으로도 흘러서 배곱정도까지 느낌이납니다  어째든 이게 뭔지는 모르겠고요

 

문제는 어제 뒷쪽으로 허리까지 흘러갔는데  그때 부터 호흡수련하면 허리에서부터 열기를 동반한 공기방울같기

 

도하고 젤리같기도 한것이 위쪽으로 올라오는데  뒷목 바로밑까지 올라오는데 열이 너무 많이납니다

 

혹시 이게  상기병인지 상기증인지 하는거 아닌가요 ㅠㅠ

 

고수님들 도와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님은 아마도 기감을 느끼시는 것 같은데요. 처음엔 열감이 나다가 나중에는 시원한 액체로 느낌이 바뀔거에요.

근데  열이 심하신가봐요. 제 경우는 시원하면서 따뜻하고 포근한 기감이었는디..

 

상기병을 염려하신다면 아마도 머리가 띵하거나 어지럽거나 그랬을 것 같은데요. 뇌가 손상될 수 있어요 

누가봐도 매우 위험해보이네요.

 

특히 기감이 미간에서 백회로 올라가는 건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아니 벌써 일이 터진 것일 수도 있어요.  머리가 띵하면 호흡 중단하시고 편히 쉬시던가 그냥 주무세요. 걱정되네요...아무일도 없어야 할텐데..

 

머리가 띵하거나 멍하거나 그러지 않다 하더래도 혼자하는 것은 매우매우 위험하고 도장에 다니는 것도 위험하고 아무리 최고스승에게 지도 받아도 위험하고 ...그냥.. 하지 마세요.. 아님 죽던말던 해보시던가. 어짜피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인생 짧아요.

 

 

 

아래는 참고자료 올립니다. 인터넷에서 모은 거에요.

 

 

 

크게 보아서 기수련은 호흡 수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단전호흡, 뇌호흡 등 모든 수련단체들이 호흡 위주로 명칭을 붙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거니와 실제 도인체조, 심신이완법 등 수련의 예비동작 모두가 호흡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인 것이다. 따라서 호흡과 관련한 문제는 이 논문의 핵심주제이므로 좀 장황하게, 그리고 해부학적 및 수련적 모든 관점을 망라하여 논해 보고자 한다.
 
 
  1. 호흡의 생리학적 전개149)
 
 
인체가 필요한 산소를 받아들이고 대사과정에서 생성된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과정을 호흡이라고 한다. 호흡활동은 횡격막, 늑간근 등의 호흡근육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吸氣 시에는 횡경막과 외늑간근의 수축으로 인해 흉곽용적이 커지게 되고, 흉곽 용적에 반비례하여 흉곽 내 압력은 감소하게 되므로 쉽게 공기가 폐 내로 유입된다. 반면, 呼氣 시에는 횡경막과 외늑간근이 이완하여 흉곽 내 용적을 감소시킴으로써 공기가 쉽게 폐로부터 배출된다.

폐포와 폐포 모세혈관, 조직과 조직 내 모세혈관 사이에 일어나는 가스교환은 확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확산은 분압차에 의해서 생긴다. 즉 폐포 내의 산소분압은 폐포 모세혈관을 흐르는 혈액의 산소분압에 비해 높기 때문에 폐포 내에서 폐포 모세혈관 내로 산소가 확산되어 들어간다. 이산화탄소의 확산은 산소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 분압차 이외에 가스 교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확산 경로의 길이, 폐포 주위 모세혈관의 혈류량, 혈액 내 적혈구 수 및 헤모글로빈 농도, 폐포 환기량 등을 들 수 있다.
 
 
2. 수련적 의미로서의 호흡
 
 
수련에 있어서의 숨쉼은 단순한 가스교환이라는 생리학적 관점 이외에 천지자연과 나와의 교류로 본다.150) 우리가 생각하는 인체는 외부로부터 단절된 별도의 육체인 것 같지만 피부 내면을 자세히 보면 온통 구멍 천지이다. 남자는 약 70조 개, 여자는 약 60 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 몸이기에 각각의 세포와 외부와의 교환은 어느 때든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단지 코와 입으로 들이쉬는 숨의 양이 피부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고, 또한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에 입과 코로 숨쉰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151)

숨이란 생명활동의 내적 흐름이다. 여기에도 길이 있고 운동이 있으며 대사활동을 한다. 시작하는 머리와 끝나는 꼬리가 있고, 들어오는 내용물과 나가는 폐기물도 있다.152) 외부의 氣가 들어와 내부의 폐기물과 동화하는 과정을 거친 후 배출하는 일련의 과정을 김시습과 정북창, 권극중은 火候라고 표현하였고 文武의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문무의 방법이란 움직임과 고요함을 뜻하는 것으로써 동작과 호흡의 일치를 정의한 것이다.

전통 동양학에서는 숨쉼을 통해 入出하는 기를 6개로 구분하였는데, ‘風, 寒, 署, 濕, 操, 火’가 그것이다.153) 이것은 존재는 있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고, 6氣는 결국 인간의 몸을 이루는 4대 구성, 즉 ‘氣, 水, 火, 土’의 성분이 된다는 것이다.154) 따라서 숨을 쉰다는 것은 외부의 천지 기운을 내 몸과 함께 동화하는 행위인 것이므로 수련의 핵심이 호흡, 그 중에서도 내호흡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셋이 하나가 되게 한다는 신고에서의 의미로서 볼 때, 정기신을 하나로 합하게 하는 행위의 처음과 끝이 숨쉬기임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 기본 원리, 자세, 調心과 調息의 방법과 느낌
 
 
인체를 수련적 의미에서는 精과 氣(몸), 氣와 神(마음)으로 구분하여 논한 바 있지만, 실제의 방법론은 자세와 호흡, 뜻으로 설명할 수 있다.155) 偶人과 法光, 百石은 스스로의 경험과 느낌 세계를 위와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였으며,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하여보면 신고에서 말한 원리와 동일하였다. 방법에 대한 질적 연구자 세 사람의 제시 내용을 권극중과 정염, 김시습 등이 기록한 조선시대 문헌과의 비교 결과 핵심 방법론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가 가능하였다.
 
<기본 원리>
 
ㆍ고요한 마음 상태가 가장 우선한 다음, 호흡에 임한다.
ㆍ자세는 단아하게 앉아라.
ㆍ뜻을 집중하여 숨쉬기를 하되, 각 단전의 자전축을 찾아라.
ㆍ몸의 움직임(도인)과 호흡, 의념은 항시 통일되어야 한다.
ㆍ수련의 처음과 끝은 호흡을 축으로 하고, 생각과 동작은 보조이다.
ㆍ세단전을 완성한 후 하나로 통일 시켜라.

<자세의 기초>
 
ㆍ반가부좌, 결가부좌를 하되 회음혈이 바닥에 닿아야 한다.
ㆍ허리는 세우고 눈은 코를 보며 코는 배꼽을 향한다.
ㆍ손은 바닥이 위로 향하되, 무릎에 놓거나 배 밑에 포개 놓는다.
 
<호흡의 방법론>
 
ㆍ숨길에는 병풍을 치듯하고 입은 닫아라.
ㆍ실꼬리의 처음과 끝을 가지고 아랫배까지 끌어 내려라.
ㆍ혀끝은 입천장 돌기에 닿아서 숨길을 터주어라.
 
위에서 말하는 수련원리와 자세, 호흡의 방법론은 설명이 길게 되나 실천의 입장에서는 간단하다. 마음과 호흡, 집중을 위한 단전의 자전축을 찾는 방법 위주로 세 사람의 질적 연구자가 제시하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호흡 이전에 실시하는 練, 즉 몸의 유연성이나 호흡의 깊이를 하기 위해 導引으로 충분히 몸이 건강하게 된 상태 다음이라야 한다. 인체의 火氣가 위로 뜬 상태라든지, 감정이 수시로 변하여 생각이 많다든지 하는 부적절한 상태에서는 수련을 금해야 함은 물론이다.

우선 기초 준비는 반드시 고요한 마음상태가 전제 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氣가 변화하거나 氣質이 탁한 것은 한의학 교과서에서 너무나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즉 분노하는 감정은 기가 위로 뜨고(怒氣上), 슬픈 기운은 울을 맺고(憂氣鬱), 비통한 기운은 흩어지며(悲氣消), 기쁜 기운은 늘어지고(喜氣緩), 고민하는 기운은 뭉친다(思氣結)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에 뿌리를 둔 감정, 즉 희노애락의 일반 감정 자체를 없앤 다음에 호흡에 들어가라는 것은 기본으로서, 이는 調心에 해당한다. 그러나 감정 자체를 다스리기 어려운 초보자는 생각으로 생각을 죽이기 어렵기 때문에 호흡을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숨에 정신을 집중하고 숨길을 따르는 길을 찾는 방법이 수련으로 설명될 수 있고, 숨쉼을 통해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調心과 調息은 결코 구분되어 설명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닌, 동시 진행형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아하게 앉아라는 의미는 자세의 기본이다. 몸의 균형이 비정상적인 사람, 예컨대 아랫배가 나왔다든지 비대한 사람은 단아하게 앉지를 못한다. 생활습관이 육체의 요구대로만 움직인 사람도 신체의 불균형으로 단아하게 앉는 것이 어렵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가를 정신 집중이란 원래의 의미가 아닌 몸만을 위한 체조로만 인식하거나 수련을 기체조로만 알고 있는 사람도 허다하다. 단아하게 앉을 수 있는 선결조건이 몸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앉는 기준은 몸안에서 찾아라고 선인들이나 현재의 수련자들은 똑같이 이야기 한다.156)

즉, 하 ․ 중 ․ 상 단전이 서로 포개져서 기울임이 없어야 하는데, 수직으로 세 덩어리가 바로 선 상태이다. 우선, 다리를 가부좌 또는 반가부좌 상태로 놓고, 엉덩이 사이의 회음혈(항문과 성기 사이)이 바닥에 닿도록 하체가 고정되어야 한다. 다음에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턱을 앞으로 당기며 머리, 가슴, 아랫배가 일직선상으로 놓이게 된다. 구체적인 중심점을 놓고 설명하면 회음, 단중, 백회의 세 혈자리가 수직으로 서게 된다는 뜻이다.

세 번째, 각 단전의 자전축을 찾는다는 의미는 앞서 김시습이 말한 內觀法이다. 즉 내 몸 속을 본다는 듯인데 이는 기의 드나드는 구멍에서부터 연결되는 축, 여기서 파생되는 중심에너지의 자전과 공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하단전의 자전축은 중심자리로 가는 미려(꼬리뼈)와 요추 2ㆍ3번 사이의 명문혈이다. 즉 명문혈에서 시작된 축의 극이 배꼽 아래 극까지를 연결하는 선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초보자의 수준에서는 느끼기 힘들다. 고요한 마음상태에서 꼬리뼈에 콧구멍이 뚤려 있다고 상상하고 그리로 숨의 시작을 잡고, 배꼽 부위까지 일직선으로 들이쉰 다음 숨의 끝을 배꼽 아래에 두면 점차로 축을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은 자전의 의미로서 배꼽 아래 하단전의 중심이 원을 그린다는 것과 그것도 아주 미세한 떨림의 형태로서 시계 방향으로 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 떨림의 자전이 하단전의 중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꼬리뼈와 요추까지 연결되어 전체의 덩어리가 파동으로 전해지는데, 이를 진동이라 하여 수련 입문단계에서는 대단히 중요하게 강조하기도 한다.157)

또한 하단전이 자전하기 전 진동은 단전 그 자체로서 펄떡이기도 하는 바, 앉은자리에서 엉덩이에 강한 충격형태로 전해져 가부좌 상태에서 마치 개구리같이 점프를 반복하기도 한다. 보통의 형태는 강한 내부의 힘이 아랫배 뭉치에서 폭발의 형태로 온몸으로 전해지는데, 이 때 코로부터는 강한 “킁”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중단전의 자전축을 찾는 것은 하단전을 알고 느낌이 있으면 의외로 쉽다. 배꼽과 명치, 가슴 중앙과 등뒤의 견갑골 아래 부위까지를 상호 연결하는 직선의 집합이 중단전의 축이다. 실제 중단전이라 부르는 마음의 가장자리는 횡경막을 둘레로 하여 등 뒤, 목 아래 부분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으로서 명치 윗 부분과 목 아래 천돌혈까지를 일컫는 원의 중심점을 일컫는 말인데, 한의학에서는 전중 또는 단중혈이라 부르는 곳이다.158) 통상 수련단체에서는 이곳을 「임맥이 막히는 핵심」으로 보고 있으며, 인체의 火氣, 즉 불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곳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중단전의 자전축을 찾는 것은 하단전을 알고 느낌이 있으면 의외로 쉽다. 배꼽과 명치, 가슴 중앙과 등뒤의 견갑골 아래 부위까지를 상호 연결하는 직선의 집합이 중단전의 축이다. 실제 중단전이라 부르는 마음의 가장자리는 횡경막을 둘레로 하여 등 뒤, 목 아래 부분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으로서 명치 윗 부분과 목 아래 천돌혈까지를 일컫는 원의 중심점을 일컫는 말인데, 한의학에서는 전중 또는 단중혈이라 부르는 곳이다.158) 통상 수련단체에서는 이곳을 「임맥이 막히는 핵심」으로 보고 있으며, 인체의 火氣, 즉 불기운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곳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축을 찾는 내관법은 숨길을 통해 하는데, 하단전의 중심에서 서서히 위로 올라오는 숨길, 등 뒤 神道혈과 丹中혈을 연결시키는 숨길, 天突혈과 丹中혈을 연결시키는 숨길 등이 있다.

초보시절에는 각각의 길을 따로 찾으나, 어느 정도 집중이 된 상태에서는 세 길이 동시에 하나의 점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수련이 가능하다. 어느 정도 고요한 상태에서 내관이 이루어질 경우 가슴이 마치 박하향기 같이 달콤하고 화~한, 그러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오는데, 어떤 경우는 본인의 감정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고 한다. 즉 하단전의 진동파장이 가슴을 울려 숨길이 열어지면 독맥의 물(水)기운이 작동하여 눈물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상단전의 자전축은 이마 중앙 하단의 印堂혈과 뒤통수의 玉針혈을 연결하는 축과, 머리 정중앙 百會혈과 印堂혈을 연결하는 두 축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百會혈로부터 오른쪽으로 도는 원추 모양으로 자전하는 형태의 축이다. 실제 하단전과 중단전의 느낌이 없이 명상만으로 수련하는 경우 상단전의 감각이 오는 경우가 많은데, 원추모양의 빛이나 쐐기형태의 묵직한 기운이 짓누르는 느낌으로 온다고 한다. 무속에서의 신내림 현상은 상단전과 중단전의 연결 통로가 없이 머리부위에서만 느끼는 감각으로서, 가슴과 머리가 따로 분리된 형태이기 때문에 몸이 아픈 것이다.

상단전의 중심은 인당혈에서 안으로 한 치 정도159) 들어간 자리이다.

정수리의 백회와 뒤통수의 옥침이 상단전의 중심과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점으로서 느껴질 때는 인당혈이 수축운동을 반복한다고 한다. 중국에서 기공수련을 오래한 사람은 인당혈의 피부 빛깔마저 푸르스름하게 변한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160) 원리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인당혈의 수축운동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하단전의 중심과 연결되는 경우는 대폭발, 즉 빅뱅(Big Bang)이 일어나게 되는데, 빅뱅 이후의 색깔이 자색으로 은은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발은 하단전과 상단전에서만 일어날 뿐이고 중단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단전은 파동의 결집, 즉 열의 형태로서 주변 온도까지 상승시키고, 상단전은 고도의 밝은 흰빛으로 폭발한 후 고요와 정적의 상태로 남게 된다. 이른바 명상의 기본조건이 형성되는 셈인 것이다.

이러한 단계별 단전의 연결축이 완성된 것이 1차 변화이다. 김시습은 앞서 아홉 번의 변화가 있어야 仙의 대열에 낄 수 있다고 하였고, 권극중 또한 上仙의 경지는 육화된 몸이 아닌 결집된 빛의 에너지 상태로 말한 바 있으므로 변화의 아홉은 수긍이 가는 일이다.161)
 
 

제3절 몸의 변화 및 부작용
 
 
권극중은 수련이 진행될수록 호흡상태가 변하고, 정염은 몸에서 느끼는 감각의 변화를 제시하였다.

즉 권극중은 일반호흡(丹息)⇒배호흡(服息)⇒없는 호흡(無息)으로 진행되는 호흡의 변화를 제시하였고 정염은 허리가 끓는 느낌, 열감이 전신으로 확산, 하단전의 결태(丹)등을 제시하였다. 부작용에 관해 세밀히 기술한 바는 없으나, 초보단계에서 느끼는 가슴 통증, 풍사와 고황 등의 질병원인이 기의 작용이라는 본질만을 논한 바는 있고, 납과 수은으로 만든 丸을 복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162) 중독으로 사망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偶人과 法光은 실제로 수련 도중 氣의 흐름이 역행할 때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 경험을 가지고 있어 그대로 수록하기로 한다. 다만 개인의 변화를 일반화하기에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나, 이러한 형태로 되리란 것은 유추가 가능하므로 인용하는 것이다.
 
 
1. 하단전(精) 수련과 변화, 부작용
 
수련의 방법론에서 밝혔듯이 하단전, 즉 精의 수련은 호흡과 의념을 배꼽 밑 한 치에서 안으로 세 푼 정도 들어간 곳에 호흡의 끝을 담아야 한다고 하였다. 지속적으로 실시할 경우 최초 단계는 따뜻한 熱感으로부터 시작된다. 열기가 느껴지면 점차 가슴, 얼굴들이 후끈거리게 되는데, 초보의 경우 아픈 곳이 많이 느껴지는 특징이 있다. 정염은 “가슴이 지끈거리고 통증이 온다”는 것을 말한 바 있는데,163) 가슴뿐만 아니라 어깨, 목 및 天突혈까지 답답한 증세가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명현이라 하여 몸 속에 있는 탁한 에너지의 반발로도 설명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음식으로 인해 구성된 몸이 호흡으로 인해 맑아질 때 일어나는 최초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원래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무리한 호흡을 계속하면 기막힘 현상이 머리로 올라와 두통이 굉장히 심할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 수련을 멈추어야 한다. 명현과 주화입마를 구분하지 못할 경우 요절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즉 수련의 전제조건이 練己나 導引이 불충분하여 호흡 수련을 시작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허리주변의 帶脈으로 돌아가는 따뜻한 기운이다. 호흡이 깊어져 열감이 어느 정도 뭉치면 소위 하단전이 살아난다고 하는데, 마치 배속에서 뱀이 꿈틀거리듯 하다가 무겁지도 않으면서도 무겁고, 무거우면서도 밝은 느낌의 일정한 結胎가 느껴지면서 동시에 옆구리에서 허리로 돌아가는 氣의 느낌이 감지된다. 통상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허리까지가 먼저 돌고, 나중에 왼쪽 옆구리로부터 허리까지 돌아가는 단계적 느낌이 일반적이나 한번에 같이 도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맥의 뜻이 허리띠의 맥이란 의미로 보면, 氣가 돌아가는 부위는 혁대를 매었을 때의 부위 전체를 일컫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결태의 이동이다. 통상 메추리알 만한 정도의 胎는 명치부근이나 치골 위까지 이동이 있다. 별도의 의념 집중이 없이도 어떤 경우는 치골 위에서, 어떤 경우는 좌우 옆구리나 명치까지 오르내리거나 멈춰져 있는 상태에서 느껴지기도 한다. 정염의 용호비결에서는 이를 주역 8괘로 하여 이중에서 감중까지의 이동 통로로서 명시하고 하였다.164)

네 번째 단계는 허리로부터 시작하여 견갑골 사이까지의 후끈거리는 열기의 확산이다. 통상 소변을 보고 난 다음 몸이 떨리는 부위가 여기인데, 소변 후의 떨리는 느낌보다 더욱 뜨거운 기운이 허리로부터 시작하여 등 위까지 주기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른바 火候라고 표현한 정염의 이론인데, 실제 명문혈에서 시작된 따끈한 기운은 척추 위로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후끈 후끈하며 달아오른다. 이 정도 되면 입안에 단침이 가득 고이고, 머리는 아주 청량해진다. 또한 혀끝을 상악골(입천장) 안쪽에 계속 댄 상태에서는 입안 가득히 전기가 통하는 느낌의 강한 전류가 오기도 하고, 입안 양쪽에서 나오는 침이 고농도 설탕같이 달다.

그러나 하단전 위주의 호흡 및 의념 수련시 몸의 경락이 제대로 소통되지 아니한 상태거나, 충분한 도인 체조없이 곧바로 호흡 수련을 시작할 경우는 심각한 부작용이 오게 된다. 즉 음식으로 배가 찬 상태에서는 그냥 폐로 하는 일반적인 숨쉬기를 해야 함에도 호흡의 끝을 아랫배로 무리하게 끌어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때 소위 아랫배가 나오는 것이다. 달마그림에서의 아랫배가 볼록하게 된 것은 眞氣로 가득 찬 상태를 그린 것임에 반해, 練己없이 실시하는 복식호흡은 아랫배만 나오고 숨이 가빠진다. 더하여 얼굴이 벌개지고 귀에 소리가 나게 되며 눈까지 침침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달리기 운동보다 못한 역효과가 나게 되는 것이 이 경우이다.
 
 
2. 중단전(氣, 또는 命)의 수련과 변화, 부작용
 
중단전 수련은 별도로 하는 것이 아님을 옛 선인들은 강조하고 있다.165) 단지 의념, 즉 마음수련을 호흡시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서 어디까지나 마음이 主이고 호흡은 從이다. 왜냐하면 마음에 대한 구조나 생각의 흐름이 어떻게 숨길을 따라가야 하는지 확실한 개념을 알고 수련에 임해야 하기 때문에 별도로 서술하는 것이다.

생각이나 감정의 흐름을 經絡이라고 한다.166) 생리적 기능의 흐름이 아닌 감정과 무형의 氣 통로를 일컫지만, 어떤 경우는 氣가 피를 타고 흐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무형의 통로하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경락이 숨길을 따라 육체화 된 몸을 돌되 마음에 따라 움직임이 진행된다. 즉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중단전 수련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마음의 구조는 프로이드나 융같이 생각의 생각을 검증한 사례도 있으나, 수련적 의미는 불교의 修心論이 가장 검증된 이론이다.167)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은 육체에 뿌리를 두고 육체가 조종하는 마음이다. 이는 육감으로써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서 얻는 정보과 뇌에 전달되어 내 나름대로의 선악이나 추하고 아름다움, 옳고 그름 등의 분별력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천부경에서는 이를 큰 氣가 합해지면 6개가 생긴다(大氣合六生)고 하였는데,168) 6개의 기운이란 것은 인간의 몸에만 적용할 경우 감정, 즉 분별력까지를 일컫는다. 따라서 육체는 감정이 판단하는 곳으로 움직이게 되므로 내가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인은 싫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 근본되는 육체에 뿌리를 둔 감정의 제거야말로 마음수련의 핵심인 것이다.169)

방법론에 있어서는 목표를 무념에 둔다. 숨쉬기를 가늘고 길게 하되 각 감정을 숨길에 실어 하단전으로 보낸 다음, 하단전에서 그 감정을 불태우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분노하는 기운은 위로 뜬다는 한의학의 교과서대로 그냥 두면 위로 뜨는 火의 기운을 의식적으로 하단전으로 끌어내려야 하는데, 단순한 생각만으로는 아래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숨길을 따라서 내려오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마음 수련에 있어서의 최초 마음은 분노, 슬픔, 기쁨 등 육체에 뿌리를 둔 감정의 제거가 1차 목표이고, 하단전에 胎가 형성된 다음에는 감정자체가 생기기 않도록 하는 2단계, 감정이나 생각 등 기본마음이 육체를 주관하도록 하는 3단계로 진행하는 것이 옳으며, 최종단계는 상단전의 神과 합해져 육체와 마음이 완전한 하나로 되어 근본자리와 통하게 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호흡과 생각을 일치시켜 하단전으로 내려 보내는 방법을 잘못 이해하여 중단전 수련이 가슴의 丹中穴 호흡으로 진행하는 경우는 폐에 종양이 생기기도 한다. 앞에서 설명한 단전의 자전축은 꼬리뼈에서 배꼽, 배꼽에서 田中으로 진행하는 것이 기초임에도 丹中穴을 통한 기의 입출을 시도하면 최초에는 가슴이 열리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을지는 모르나, 수련이 진행될수록 목밑의 天突穴이 꽉 막히게 되고 쇄골 부위로 뚝뚝거리는 소리와 함께 숨이 답답해진다. 초보자가 하단전의 기운없이 마음수련만 계속할 경우 감정이 예민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유 없이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고함ㆍ욕설 등을 터뜨리기도 한다. 일견 쌓인 감정의 해소로 인한 카타르시스 효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이는 순간일 뿐이다.

사이비 종교의 경우 이러한 카타르시스적 느낌을 강요하기 위해 웃음ㆍ박수 등을 통한 몰입으로 유도한 후 외부로의 감정 유출을 통한 성령의 은혜를 강조하기도 한다. 마음수련에 있어서의 목적만 순수하다면 이러한 방법도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수련의 방법론 중 또 다른 하나는 소위 음성진동 수련이다. 불교의 염불, 민족종교에 있어서의 呪文 등이 이러한 예로서 소리를 통한 집중과 이완, 호흡의 평정 등이 그 기본이다. 神誥에서의 性, 命, 精이 외부로 표출될 시는 光, 音, 派로 된다고 함은 앞에서 설명하였거니와 이 때의 音은 곧 소리를 통한 수련방법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실제 正易을 창시한 일부 김항 선생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성수련만으로 주역을 터득하였고, 이후 정역을 창시한 道人으로 불렸다. 그는 ‘음, 아, 이, 오, 우’의 오음만으로 수련을 하였다고 한다. 陰의 소리인 ‘이’와 ‘우’, 陽의 소리인 ‘아’와 ‘오’를 번갈아 한 후, 중성음인 ‘음~’소리를 통해 하단전의 파장을 가슴으로 진동하도록 하여 神인 상단전을 터뜨리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효과가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당연히 잡념이 없이 집중이 잘 될 것이며 의념 자체가 진동의 느낌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기공에 있어서 六字潔 수련도 여섯 개의 소리를 번갈아 가며 내고, 자세와 의념을 집중하는 방법을 추가한 것으로서 이른바 마음수련의 한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아사하라가 창시한 옴 진리교의 경우는 ‘옴’ 소리를 통한 수련을 핵심으로 하는데, 이는 상단전을 위한 음성수련법이다. 옴은 우주음이라 하여 앞의 음, 즉, ‘아, 이, 오, 애, 우’의 다섯 소리를 합한 音으로써 생명의 진동을 강하게 하여 죽어가는 생명도 살리는 氣가 있다고 한다.170)

물론, 옴 진리교는 동경역 독가스살포 집단으로서 전 세계로부터 사이비 집단의 대명사로 불리는 교주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수련 방법만으로는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3. 상단전(性) 수련 및 느낌과 부작용
 
神의 수련은 집중과 이완이 핵심으로 일반적으로 명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은 하단전 수련에 중심을 둔 집중과 몸ㆍ생각ㆍ호흡자체를 완전히 끊어 놓는 상태에서 수련자 스스로가 자기의 주관을 끈으로 놓지 않고 있을 때의 이완을 병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집중은 긴장과는 전혀 상반된 개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생각의 집중은 몸에 뿌리를 두고 있어 호흡의 끝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긴장을 동시에 가져오기 때문에 신체 어느 부위에 굳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통상 의념을 하단전에 두고 호흡의 끝을 집중한다고 하면 아랫배에 근육의 긴장을 가져와 복근단련 정도의 굳음을 가져오는 경우가 허다한 경우가 그것이다. 실제 수련자들이 혼동하는 경우가 하복부의 단단함을 마치 內功의 완성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집중이 아닌 긴장을 통한 근육의 굳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극중의 性命雙修論은 두뇌와 마음수련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맑은 생각의 집중과 호흡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근육을 완전히 이완한 상태에서 하단전의 결태가 느껴지면 이를 온몸으로 周天하고, 이어서 맑은 호흡으로 인당(양 눈썹 위) 혈의 전방에 빛의 세계를 둔 상태에서 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스스로를 던지면 일순간 번쩍하는 폭발(Big Bang)이 오는 경우가 있거나 오로라의 출렁거리는 빛을 보게 된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는 상태인데, 의식으로 느껴질 수도 없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차원의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경험자의 설명에 의하면 인당의 집중된 빛의 느낌은 황홀 그 자체라고 한다. 또한 오로라의 빛 형태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출렁이며, 좌우 또는 상하로 움직이거나 온몸을 감싸고, 어떤 경우는 일정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통상 사람의 형태로 나오는 경우는 조상이라 하여 여자의 경우는 할머니, 남자의 경우는 할아버지가 보이기도 한다지만, 검증되지 아니한 경험론으로써 수련자가 가지는 일종의 주관이나 환영같은 경우가 아닐까 한다.171) 왜냐하면 독실한 신앙인의 경우는 예수나 마리아, 또는 부처가 미소 짓는 형태가 나타난다고 하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호흡의 집중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경우, 인당(이마)이나 백회(정수리), 옥침(뒤꼭지)을 연결하는 삼각축이 수축과 이완의 느낌으로 온다고 보면 될 것이다. 즉 백회(정수리)는 신생아가 갓 태어났을 때 볼록거리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알 수 있지만 그러한 느낌으로, 인당(이마)은 구슬을 박아 놓은 듯한 묵직함으로, 옥침(뒤꼭지)은 지르르한 퍼짐의 형태로 먼저 느껴지고, 이어 세 삼각형이 연결되어 회전하며 자전의 느낌으로 한곳에 모이게 된다. 이것이 백회 아래 前丁으로 모여 폭발의 기초를 다지게 되는 것이다. 즉 정수리에서 이마 쪽으로 2~3cm 전방에 약간 꺼진 부분이 있는데, 이곳에는 수련이 어느 정도 진행될 때 압력을 외부로부터 받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어떤 경우는 마치 샤워 시의 시원한 물줄기 같은 느낌으로 쏟아져 내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뱀의 머리가 꿈틀거리듯 움직이기도 하며, 어떤 때는 원추형의 삼각빛이 꽉 박히는 듯한 느낌으로 뚫리기도 한다. 개인마다 느낌의 차이는 있으나 상단전(神, 性)수련이 진행될 때 받는 감각은 대략 위와 같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면 될 것이다. 결국은 폭발의 기초로서 오는 징후인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수련자들이 각종 이상 체험을 하게 되며, 잘못될 경우 무속인이 되기도 하거니와 더 심할 경우 환시, 환청, 노이로제 등 정신 이상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정상적으로 진행되면 빛의 형태로 먼저 나타나지만, 이상하게 진행될 경우는 공포 체험, 머리의 공명 현상, 귀의 이명 현상, 눈의 환시 등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른바 귀신들림이라고 하는 다중인격의 현상도 이 때 나오게 되는 것이다. 法光은 이러한 잘못된 현상 때문에 과거 선인들이 방법론을 일반에 제시하지 못하고 비밀스럽게 전승되어온 이유라고 하여, 반드시 단계별로 진행하여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하단전이 강화되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을 때만이 이러한 이상 현상을 극복한다고 하였다. 하ㆍ중ㆍ상단전으로의 변화를 다른 말로 하면 練精化氣, 練氣化神이다. 이는 정이 기로 변하고 기가 신으로 바뀐다는 말로서 하단전 강화, 즉 정의 수련이 기초가 되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것으로써 수련의 처음과 끝이 호흡을 다스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앞에서 논한 상ㆍ중ㆍ하단전의 수련을 결코 각각으로 하는 방법이 아님을 각 수련자들은 강조하고 있다.

북창 정염은 폐기를 강조할 때 기와 신을 한번 더 내리라고 하였고, 권극중은 仙丹互修, 性命雙修 등의 이론을 내세워 동시 진행형임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즉 인체의 중심뿌리를 하단전에 두고 모든 수련은 여기를 기준으로 하여 호흡이든 의념이든 동작이든 간에 축을 찾는 과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몸에서 받는 느낌 자체가 氣의 감각으로써 이해되어야 하며, 기의 질이 탁하냐 맑으냐에 따라 느끼는 감각의 순도가 달리 느껴지게 된다고 하였다. 마음을 닦아 가는 과정이야말로 氣感의 순화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몸은 정과 기, 마음은 기와 신으로 이루어졌기에 몸의 정화와 마음의 정화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호흡은 변화하며, 호흡을 의식적으로 맑고 장하게 할때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관계로 이 둘은 상호 결합적이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동시 수련이야말로 삶 자체가 청정무위하게 변화되어 간다는 논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수련을 통해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욕심과, 이를 통해 내가 어떤 모습으로 남에게 비춰지길 바란다는 마음은 탁한 氣로 되어 수련의 성취가 있을 리 없다고 보는 것이다.
 
 
 
제4절 소결론 (수련 결과)
 
 
이상에서 제기한 수련의 방법과 느낌은 결국 삼일신고에서 제기한 본래의 세 자리, 性, 命, 精을 찾는 몸의 느낌세계이다. 하단전의 精氣보전, 중단전의 命(氣)이해, 상단전의 性通이 그러한 것이다. 개인의 체험은 이보다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기본 전제인 건강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고, 열정은 있되 매달리지 않는 자들이 느끼는 공통점만 기술한 것이다. 수련이 올바르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논리로 이해하면 되는 수준으로써, 변화의 감각을 기술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하단전 精氣의 완성은 우선 에너지가 온몸에 넘친다는 것이다. 한겨울에도 춥지 않으며 눈 위에서도 눈이 녹을 정도의 강한 열이 몸에서 나온다고 한다. 일반인의 경우 이불을 덮지 않고 자는 버릇이 생기며, 몽정을 경험할 정도로 정력이 강해진다고 한다. 피부의 빛깔이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점차 변해가며 손에는 氣의 덩어리를 달고 다니는 느낌과 함께 걷거나 달릴 때 숨이 차지 않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 음성이 굵어지며 목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극히 편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色慾이 없어지는 것도 공통된 현상이다.
중단전 命의 완성 느낌은 감각의 개발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온몸이 아프거나 두들겨 맞은 듯한 피곤함으로 몽롱한 상태가 되며, 일대일로 사람을 만나면 상대의 감정이 전이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수련자끼리 만나면 증폭되는 에너지의 감각을 확연히 체험하게 되는데, 그냥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더불어 상대가 아프면 내가 같이 아픈 관계로 ‘萬物唯我同根’, 즉 모든 물질의 뿌리는 하나라는 체험이 있게 되는 경지인 것이다. 이 단계는 육체에 뿌리를 둔 감정이 제거되고 청정한 에너지만을 가지게 되는 수준으로서 호흡이 아닌 에너지 자체가 숨쉬는 단계로 이해된다. 즉 내부의 에너지가 외부 氣와 동화되어 피부로 하는 호흡, 氣息이 되는 것이다. 이때는 음식 생각이 나지 않아 하루 한 끼, 그것도 지극히 적은 분량의 식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상단전, 通性은 한마디로 깨우침이다. 빛의 세계와 절대자리를 체험하고 나란 존재의 근원을 알게 된다고 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 그 자체임을 터득하고 나면 육체의 한계를 초월, 사물이 있는 그대로가 진리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삶과 죽음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함을 깨닫는 되는 것이다. 존재의 뿌리가 근원되는 하나에서 나옴을 체험하므로 통찰력이 생기고 영성의 삶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감각의 수준에서는 수면욕이 없어지고 머리가 항상 맑은 상태로 있어 소위 “깨어있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수련의 궁극이 위 상단전을 통함으로서 얻게 되는 절대의 체험이라면 사회 각 분야의 투쟁과 반목, 욕심은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본다. 생존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는 수준은 육체에 한정된 삶의 근본을 바꿈으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性通功完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제6장 결론 및 제언
 
 
 
수련의 고전적인 지침서를 오늘에 되살리는 이유는 단순한 맹종의 경우가 아닌 初發心의 의미를 집단의 의미에서 되살려 보고자 하는 의미 때문이다. 발해 이전의 神仙圖에는 분명 장엄한 정신세계가 있었고, 그 세계는 오늘날 물질문명의 고도화로 인해 잃어버리고 퇴화된 기능을 살려줄 寶庫라고 여겨질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인적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히 육체적, 감각적, 쾌락적인 기능만 강조하고 연구하는 오늘날의 학문은 분명 한계가 있다고 본다.
 
특히 오늘날의 문명은 음식 위주의 자기보존 본능만 존재하고 생명 저 너머의 세계를 하나의 신비주의로 단정해 버림으로써 문명 그 자체가 동물적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접근법은 기계론적 결정관이 아닌 유심론적 초감각의 개발이다. 마음자리의 근본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새로운 사상이나 문명의 창조가 아니라, 인류가 생겨났을 때부터의 가치관인 동양적 道 사상을 되살리면 될 것이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실천론적 입장인 수련사상의 행동화를 접목했을 때만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三一神誥’의 사상을 분석한 결과 여기에서는 우주적 본체를 하나로 보고, 거기서 파생된 세 원소를 性, 命, 精이라고 하였다. 인간자체도 우주의 본체와 동일하며, 내부를 구성하는 性, 命, 精이 있으며, 이를 통합하는 완성된 하나를 수련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신고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대에 精氣神論으로 발전한 바 있으며, 후한 환제 시대 때는 위백양에 의해 참동계로써 비법이 전파되었다고 본다면 極卽反, 原始反本의 진리에 따라 神誥를 재조명할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의 검증을 위해 조선시대의 세 사람이 실천으로 기록한 전통 선도사상의  문헌을 분석하여 보았다. 김시습, 권극중, 정염의 수련법이 그것이다.

김시습의 수련론 중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내관법이 주목할 만하였다. 모든 수련의 핵심은 몸을 주체로 하여 마음을 대상으로 탐구해 들어가는 과정인데, 이는 집중과 이완의 조화를 통해 하는 것이다. 이 중 집중의 방법이 소위 내관법이다. 내 몸속의 오장과 기혈의 흐름을 본다는 뜻으로서, 경락이 흐르는 길로 집중하되 스스로가 체험해야 하는 것이 그 요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정염은 단 한 마디로 閉氣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기를 닫고 몸 내부에 기로 형성된 태, 즉 단을 만들어 이로써 숨쉼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폐기가 되면 氣息을 할 수 있게 되고, 이어서 無息(호흡 자체가 없음)으로 이어진다 하였으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명상이 바로 이러한 단계까지 섭렵해야 가능한 것이다.

권극중은 여러 가지 수련법을 이론과 함께 설명하였지만 練己에 대한 과정을 중요시하였다. 이는 수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道보다도, 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의 건강함을 강조한 내용이다. 즉 몸이 주체이고 대상이 마음이라면 몸을 그릇으로 보고 몸을 통한 행위의 신선함이 우선되어야 수련에 입문한다는 전제조건을 이야기한 것이다.

선인들이 강조한 수련방법은 이미 ‘삼일신고’에 담겨져 있었다. 5장 진리훈에는 자연과 인간, 우주와 인간의 본체에 대한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하늘이 함께 존재한다는 간단한 원리를 제시한 다음, 그리로 통하는 방법 3가지를 제시하였다. 바로 감정을 그치고(또는 감각을 추구하고), 숨쉼을 고르게 하며, 부딪힘을 금하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일견 문자의 뜻만으로 보면 단순하지만 글자 내면의 오묘한 철학세계는 평생을 수련해도 그 뜻을 깨우치기 힘든 것이다.

止感(감각의 추구)이란 느낌의 작용을 멈추어 마음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외부 감정의 인식으로 몸의 포로가 되면 인간은 마음이 황폐하여지고 이어 수명도 단축된다는 것이니, 수련에 임하는 사람은 당연히 육체적인 욕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禁觸(부딪힘을 금함)은 나와 만물이 그 뿌리를 같이 함에도 나라는 편협한 몸에 갇혀 대상을 추구하거나 괴롭힘이 있으니, 대상과의 마찰을 없애라는 것이다. 대상은 외부로부터 인식되는 사물뿐만 아니라 내 마음 속의 갈등 요소도 포함하는 것도 물론이다.

調息(숨쉼을 고르게)이야 말로 수련의 핵심이다. 調息은 지감이나 금촉의 방법론으로, 이는 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감정과 욕심의 통제는 숨쉬기로서 가능하다는 뜻이다. 숨은 곧 氣로써 오늘날 모든 수련을 기수련이라 하는 어원이 되었고 스스로가 느끼는 세계의 조절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숨쉼은 음식이 주관하는 육체의 기질을 호흡이 주관하는 마음의 기질로 바꾸어 나가는 핵심인 것이다.
 
왜 오늘날 각박하고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사회 환경을 바꾸어야 하는가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고매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의 삶과 환경을 파괴해 왔다. 이러한 우매함을 고치는 수단은 인간 스스로의 개혁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구의 기계론적 결정관으로 건설된 오늘날 문명사회의 문제점 해결을 묘하게도 비과학적, 비논리적 사고라고 일컬어진 동양적 사유관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동양적 마음의 수련은 충분히 그 해답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본질 속에 흐르는 계속성의 법칙, 전체성의 과학, 총체적 학문을 학문이라고 이름 붙이기 전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점도 그 때문이다. 아쉽게도 그 철학적 깊이와 의학적 실용성에도 불구하고 현대 문명이 현대과학에 대한 방어적이고 해명적인 위치밖에 머물지 못한 것은 수련문화가 외부의 조건으로 닫혀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련자는 혼란에 빠진 인간 본성의 영역을 되찾고 미래과학에 대한 선도적 역할, 구체적인 기틀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한 시대적 사명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수련자들은 줄기는 제쳐두고 가지만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현대인들의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지식들이란 겨우 사물의 현상만을 추구할 뿐, 본질을 등한시하는 학문의 사조 때문에 수련을 연구하는 학문마저 현상위주로 흐르고 있는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오로라 측정, 뇌파 연구, 킬리언 사진 등으로 얻는 것은 결국 수련의 대중성 확보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인류혁명의 목적과는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 오용되지 않을까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사회문화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개인혁명은 호흡법으로 완성하고, 사회혁명은 功完으로 완성하며, 인류혁명은 수련을 통한 靈性의 일반화가 되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추후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하는 것은 인류 지성의 나태함 중 가장 연구가 미흡했던 정신세계를 더 이상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남겨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주창조의 비밀을 종교의 영역으로만 방치한다든지, 과학의 한계에 대한 수련적 깨우침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질병의 원인이 마음에 의해 생기는 것을 장기간 수련자들이 경험적으로 증언한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도 그것이다.

연구 결과 느낌 고감도의 세계는 우리의 인식 저편이 결코 도사나 신선의 영역이 아닌 우리의 3차원 공간에 있음을 결론지을 수 있었다. 과학과 신비의 영역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모든 이들이 다차원을 공유하여 함께 참 본성의 세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부  록
 

1. 수련시 나타나는 초능력에 대한 견해

2. 시공간, 절대의 세계에 대한 체험
 
偶人과 百石, 法光은 수련시 나타나는 일종의 체험을 일반인들이 초능력이나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수준에 대해 주목할 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과학으로 검증이 어려운 분야로서 개인의 체험에 대한 보편성도 문제가 되지만 실제로 연구자 자신도 느낀 세계이므로 그들의 증언에 대해 일체의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였는지, 아니면 주관적인 착각으로 환시나 환청에 주화입마한 사람들인지 알기 위해 질적 연구자들의 견해를 수록하였다.
 
 
제1절 수련시 나타나는 초능력에 대한 견해
 
 
  통상 염력, 투시, 텔레파시, 醫統 등 여러 종류의 초능력은 마치 수련만 하면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고 있으나, 장기간 수련자들은 수련이 진행됨에 따라 겪게 되는 현상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약간의 체험에 의존하여 이를 상업주의로 전환, 혹세무민하는 자세는 본인을 망칠 뿐만 아니라, 요절하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정염같은 이도 “하늘을 나는 술법이라 하여도 이는 바른 자세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만큼, 설령 일반인이 보기에 신비한 그 무엇이 있어도 사용하지도 자랑하지도 말 것을 계속 강권하였다. 특히, 논문으로서 학계에 처음 보고하는 관계로 자칫 학문의 길에 방해가 될까 우려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특히 의통 분야에서 조심스럽게 다룰 것을 당부 하였다. 기의 고수라고 소문날 경우 암환자, 당뇨, 비만 등 현대의 고질병 환자들이 스스로의 습관으로 생긴 병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힘을 빌어 낫고자 하는 욕심을 경계한 때문이다.

醫統은 중단전까지 열린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맑은 상태가 되면 타인의 氣質이 나와 함께 하나가 되어 수련자가 느끼게 되는 상태를 말함이다. 즉 같이 있는 사람의 몸 상태가 그대로 전이되어 수련자가 알게 되는데, 오장육부의 건강상태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그냥 알게 되는 것이다. 무속인의 경우 이러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고, 한의학자인 김홍경씨도 그의 저서 「내몸은 내가 살린다」에서 말하기를 환자가 들어오면 환자의 아픈 부위가 자신이 아파지는 경험이 숱하게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느낌 강도가 진해질수록 몸의 혈자리가 열리게 되어 감각을 회복한다는 신고의 止感이 진행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偶人은 중단전이 열리면 알게 되는 각 장부의 느낌을 의통의 초기상태라고 정의하면서 각 장부의 느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五藏 중 腎藏이 안 좋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나의 腎藏이 뜨겁게 느껴진다. 肝藏이 안 좋은 사람은 무겁게 느껴지나 肺가 좋지 않은 사람은 내가 답답하다고 느낀다. 心藏의 경우는 팔딱팔딱하는 느낌이 강하게 오고, 특히 흡연자의 경우 기관지가 가래 끓듯 하여 기침이 나오기도 한다. 胃藏은 더부룩하며 트림이 올라오는데, 처음에는 신기하여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시험하여 보기도 하였다. 아마 五藏의 진단에서 한의사의 진맥이나 내시경, X-ray 촬영 등이 오차가 있다면 수련자의 진단은 100%이다. 환자가 아픈 곳이 내가 아픈데 틀릴 리가 있는가.」
 
초기 의통 단계에서 상단전 수련까지가 진행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상태까지 그대로 전이가 되어 오는데, 소위 칠정인 喜怒愛樂 哀惡慾 전부를 같이 느낀다고 한다. 감정의 파장은 뇌파로써 뿐만이 아니라 소위 심장의 고황부분에서도 같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특이 자기장의 생성을 유발하게 되어 주변부까지를 같은 場의 범주로 감싸안게 되어 수련이 고감도로 진행된 사람은 그것이 감지된다고 하는 것이다.

法光은 수련자가 일정 수준이 되기까지는 상가집에 갈 것을 삼가라고 권고하고 있는데, 이는 소위 죽은 자의 감정 파장이 그대로 남아 있어 파장에 동화될 경우 소위 빙의 또는 다중인격이 될 확률이 높음을 암시하였다. 따라서 수련이 단계별로 진행되어 하단전의 丹이 형성될 경우는 부정적인 에너지 파장을 수련자의 의지로 태울 수 있지만, 단전이 부실한 가운데 상단전만 밝게 하는 기도나 또 다른 형태의 정성만으로 수련시 부정적 파장의 공세에 방어할 힘이 없다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醫統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소위 氣를 손으로 放射할 수 있는 수준인데, 이는 타인의 잘못된 에너지 파장을 순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丹이 형성될 때 손과 발 등, 인체의 나뭇가지 수준에서는 뜨거운 열감이 감지되고 실제 온도도 올라가는데, 이때 손이나 이마 등에서는 특이 자기장이 방출된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보면 기 치료는 허황된 소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기치료의 수준에서는 시술자 자신의 파장으로 타인의 잘못된 파장을 순화시키는 관계로 시술자도 상당한 파장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더구나 고감도의 수련자는 기치료 자체가 일종의 邪術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관계로 시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시도를 한다고 해도 피시술자가 2 ~ 3일 정도는 효과를 보지만 이후는 원래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는 점을 미리 경고해 두기도 한다.
 
透視는 육안이 아닌 心眼으로 보이는 상태를 말함인데, 상단전의 폭발(Big Bang)이 있고난 다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물의 경계나 대상의 好 ․ 不好가 없는 상태에서 수련자가 원하는 대상의 형태가 흐릿하다가 점차 또렷이 드러나는 상태로 되어간다. 실제 法光은 이 현상을 명상으로 경험한 바 있으며, 그 수준에서의 감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거울같이 맑아졌다고 느끼면서 話頭를 잡고 씨름하던 중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고 환해졌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의 벽은 없고 대신 바깥 풍경이 확 드러났다. 울타리 옆의 나무와 나무 위의 구름까지도 선명히 보이는데, 하도 신기하여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푸른 하늘까지도 보이는 것이다. 재미있어 옆을 봐도 인접스님이 졸고 있는 모습, 멀리 신자들이 걸어오는 모습까지도 보이는데, 아마 시공간의 개념을 극복한 것이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결국 시간이나 공간이란 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 수준에서 박힌 개념일 뿐, 모든 사물이 한 뿌리라는 말의 의미를 이때서야 깨달았다.」
 
염력에 관한 논리는 인체의 에너지가 파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이해하면 그리 신비한 수준은 아닌 것이다. 물질도 고유한 파장을 가지고 있고, 인체내부의 파장도 생명체로서의 파장으로 근본 속성은 같다고 할 수 있다. 파장에 대한 응용을 아는 정도의 수련자들은 염력도 수련 중에 발생하는, 그냥 지나치는 일종의 단계로 이해하고 있었다. 百石의 경우 염력의 초기단계를 연습하던 중 스승에게 혼나고 그만 둔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음식단계의 몸을 극복하고 숨쉼 단계로의 몸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쯤, 마음이 몸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마음먹은 대로의 물질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향의 연기를 변화시켜 보았는데, 놀랍게도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연기가 변화하는 것이었다.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연꽃 모양으로 상상을 집중해 본 결과 향의 연기가 조화를 부려 연꽃 형태로 확실히 변화하고 있었다. 옆의 촛불을 대상으로 실험을 변화하였는데, 더 강한 집중으로 불의 방향을 눕혀 보았다. 결국 염력이란 것은 만물의 파동을 나와 일치시켰을 때 그 파동의 변화가 주관자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본다. 소위 근대 물리학자가 말하는 나비 이론, 즉 캘커타의 나비 날개바람이 뉴욕의 태풍으로 바뀐다는 것도 만물의 근본이 상호간에 파장의 공유로 인한 결과론일 뿐, 신비한 것도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닌 것이다.」
 
미국이나 소련에서 초능력을 연구한 결과 실제로 군사에서 응용한 사례가 최근들어 속속 밝혀지기도 하는데, 1979년도 이란 미대사관 인질 사태시 초능력자의 투시로 현장을 그려서 특수부대를 투입시킨 사례라든지, 소련의 KGB에서는 미국의 우주전쟁에 대비하여 인간의 염력으로 미사일의 방향전환을 실험하였다는 사례는 인간 정신 영역의 무한대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제2절 시공간, 절대의 세계에 대한 체험
 
 
절대의 세계란 인간이 의식하는 수준으로 볼 때 시공간이 없는 무의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초월의식, 깨우침의 세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동양적 無의 체험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실제 偶人은 수련중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는 경험에 대해 최초의 두뇌폭발이후 경험한 세계를 한마디로 이야기 하였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이다. 스스로가 만든 틀 속에 있기 때문에 3차원적인 생노병사에 헤맬 뿐, 근본은 절대자리와 통한다.」
 
「상단전 수련으로 두뇌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느낌이 있을 때 그 현상 자체를 관조하던 중 최초의 인당혈 빅뱅이 있었다. 번쩍하는 섬광 이후 머리가 환해지는데, 시간이 밤 12시가 넘어 있고 방에 불이 꺼져 있음에도 너무 환한 나머지 누군가 형광등을 켠 줄 알았다. 잠시 눈을 떠 보니 방은 그대로 어둡고 두뇌 쪽만 환해져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다시 명상에 들어가 빛 자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때 색깔 있는 파동이 사인곡선을 그리며 출렁이고 있었다. 파동의 색은 노란색에 초록빛이 함유되어 있고 파동의 바탕은 아마 자주색이었던 것 같다. 일렁거리기도 하고 옆으로 움직이기도 하는데, 어느 순간에는 사람 얼굴 모양을 하였다가 또 어느 때는 멀리 떨어져 있는 빛의 상태로 나를 비추기도 하였다. 이때의 감정상 기분은 황홀 그 자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계속 그 기분을 유지하고 싶어 깰까 두려웠다. 한편으로 이 상태가 죽음너머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그냥 스르르 깨어났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5분 정도 쯤 이 세계를 경험했나 싶었는데,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오전 8시를 조금 넘어 있었다. 빛의 세계에서 놀았던 것이 내 인식상으로는 몇 분이었지만 우리가 정해놓은 직선적 시간개념으로는 8시간을 지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1981년도 미 의회 학술 연구국의 보고서에서 그 객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즉「인간의 의식은 타인의 의식이나 물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자연계에서는 실제로 이와 같은 상호 연관성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고, 이는 인간의 의지나 감정에 의해 증폭되기도 한다.」는 것이 그 것이다.
 
 
 
                   Abstract
 
 
  Understanding Methodology & Modern Interpretation
  on Training Principle Of Samilshingo
  Limitation cannot but exist in expressing Training and Accomplishment in the language. Because training itself is the world of personal experience which is obtained by sensibility. But there is a natural law in the world of experience which unreliability dominates and a certain law which dominates a flow in the midst of chaos of universe change.
  Therefore, in this thesis, I tried to look into how to get the essential qualities to training through literature in the ancient times such as Samilshingo, and to systematize training principle by means of the depth personal interview on long-term trainers compared with contents written in the literature regarding training in Chosun Dynasty.
  In the view of the results on Samilshingo which I studied, I think it looks upon the nature of universe as one, and it gave three primitive elements the name of nature, life, and spirit, and consider human beings as a completed one who integrated them. In addition, in the aspect of function I found out modern training method of combining process that in the basic Samilshingo teachings that human beings were divided as three factors such as body, energy, and nature. That is, training is the process which is unified as one by human trisection constitution, and the methodology for them is to explain the pursuit of sensibility, prohibition against conflict, and breathing evenly. 
  The pursuit of sensibility is to pursue the peace of mind by stopping action of feeling. The person who is absorbed in training naturally has to get out of physical desire because human mind will be devastated and human life will be also shortened by being a prisoner of the body by recognition on external emotion.
 Prohibition against conflict is to get rid of conflict against objects because we are apt to pursue objects or to be troubled by being kept in the narrowed body even though everything has the same roots as us. Naturally objects include conflict factors within our mind as well as things which are recognized by the outside.
  Breathing evenly is the core of training. This means the possibility that every emotion and desire can be controled by breathing. Breath is the Gi(Energy & Spirit), and the term became the etymology of Gi-Training which every training is referred to as. This is the measure of the controlling the world which they feel by themselves. Therefore, Breathing is the core which physical disposition will be changed into mental disposition which breath is in charge of.
  As the results of collection and testimony of long-term trainers for this study, the method is to train through breathing which human will can control, and final step is to do human beings good after unifying heaven and human beings. The core is breath, not breath of chest but hypogastric breath which is breathing by the lower abdomen, then enters from the state without breathing completely to the inside of nature.
  Finally, I think the solution through training should be spread widely from the standpoint of today's civilization which is constructed by mechanical determinism seeking the answer in oriental meditation which is called as unscientific and illogical thought. 
  Personal revolution will be able to be completed by breath exercise, social revolution will be completed by sincere efforts, and human revolution will be attained by generalizing the nature of soul through training. Later I'd like to study further to be awakened the world of the true nature along with sharing the world of high sense which long-term trainers witn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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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전 호흡과 정신문화
출처 : http://kr.blog.yahoo.com/hammomo1961/1015?frommode=c
차례

제1편 단전호흡의 실상
좌선(坐禪) 1
좌선(坐禪) 2
폐목법(閉目法)
수인법(手印法)
박찬호의 좌선
궤좌법(궤坐法)
세 가지 원칙
삼단전(三丹田)
축기(築基)
토납법(吐納法)
(이하생략)

제1편 단전호흡의 실상

좌선(1)
요즘 부쩍 좌선 또는 참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좌선방법을 설파한 고전으론 흔히 (좌선의)가 손꼽힌다.
중국 송나라 때 나온 이 책은 좌선방법을 매우 구체적으로 쓴 것이 특징이다. 이 책에서는 좌선의 기본자세를 대충 여섯 가지로 집약해서 풀이하고 있다.

첫째는 등줄기를 곧게 세우라는 것이고,
둘째는 코끝과 배꼽을 마주보게 하라는 것,
셋째는 귀와 어깨를 수직이 되게 하라는 것,
넷째는 혀끝을 입천장에 대라는 것,
다섯째는 입술과 이를 맞닿게 다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여섯째는 배꼽 밑의 단전에 힘을 주고 앉으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여섯 가지 말고도 앉는 자세에서는 흔히 반가부좌와 결가부좌가 중요하다고 일컬어진다.

반가부좌란 한쪽 발바닥이 천장을 향하게 해 반대쪽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아 한 발바닥이 천장을 향하게 하는 앉음새를 말하는 것이고,

결가부좌란 반가부좌의 자세에서 나머지 한쪽 발바닥마저 반대쪽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아 두 발바닥이 모두 천장을 향하게 하는 앉음새를 말하는 것이다. 이 좌법을 초심자가 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느 정도의 수련기간을 겪지 않고는 그런 자세란 체질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심자에겐 반가부좌가 어떤 의미에서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좌법으로 앉든지 그 자세로 심신통일을 이룰 수 있느냐에 있다고 하겠다. 나의 수련 경험으로 말한다면, (좌선의)에서 풀이한 그런 방법으론 그것이 어렵다는 결론이다. (좌선의)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반드시 올바른 자세는 아니란 이야기다.

좌법이 올바른 것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간단한 테스트로 쉽게 판별할 수 있다. 좌선하고 있는 사람의 앞가슴을 뒤로 밀어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밀어서 가볍게 뒤로 넘어지면 그것은 분명 좌법이 잘못됐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른바 선정이란 부동심과 부동체의 반석같은 자세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심신이 통일된 상태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법이다. 조금만 밀어도 흔들리는 그런 좌법으론 아무리 오랜 기간 수련을 쌓아도 부작용만 일어날 뿐이다. 오늘날 많은 수련장에서 수련하고 있는 이들의 고생과 고민의 출발점은 바로 '좌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선(2)
(좌선의)에 보면 '결가부좌'를 할 때 반드시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먼저 올려놓은 다음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다리 위에 놓아야 한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반가부좌로 앉을 때엔 왼쪽 발을 오른쪽에 올려놓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반가부좌'를 할 경우 항상 (좌선의)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초심자가 그렇게 앉도록 길들면 골반에 이상이 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좌법은 결과적으로 부작용을 수반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왼쪽과 오른쪽 발을 번갈아 가면서 균형을 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좌선의)가 밝힌 좌선방법 가운데서 내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이밖에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코끝과 배꼽을 마주보게 하라는 대목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수련 관계 서적에선 이것을 마치 금과옥조인양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게 하는 방편으로 친다면 그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을 성싶다. 수련을 진지하게 해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코끝과 배꼽을 아무리 마주보게 하더라도 심신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 방법보다는 두 눈썹 사이의 인당과 배꼽 밑의 단전을 마주보게 하는 것이 훨씬 공효가 크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인당은 물론 상단전이고, 배꼽 밑의 단전이라 함은 하단전을 뜻한다. 상단전과 하단전을 일치시켜 심신통일을 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런 것도 아니다.

(좌선의)의 좌법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 또 하나는 하단전에 힘을 주고 앉으라는 것이다.
흔히 좌법을 취할 때 하단전에 무게를 실을수록 안정감을 갖는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단전에 힘을 주거나 무게를 싣는 자세는 결코 올바른 좌법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힘을 주거나 무게를 싣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련을 그런 좌법으로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위험이 크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싶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단전은 힘을 주거나 무게를 싣는 곳이 아니다. 그 곳은 의식을 싣는 곳 또는 마음을 집중시키는 곳임을 명심해야 한다.

흔히 하단전은 달걀 크기만 하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의식을 집중할 때 달걀 크기만하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단전 가운데서 하나의 점을 찾아 그곳에 의식을 두도록 하는 것이 정도이다.

폐목법

좌선할 때 눈을 뜰 것인가, 감을 것인가?

우리 나라에서 출판된 대부분의 지침서에선 눈을 감지 말고 뜨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로는 대개 두 가지가 열거된다.

첫째, 눈을 감으면 졸음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둘째, 그런 자세로는 헛것이 감은 눈 속에 나타나 마음을 산란케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것이다.
심지어는 폐목, 즉 '눈을 감고 좌선하면 캄캄한 산이요, 귀신의 소굴일 뿐'이라고 경고하는 책도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전통수련법을 집대성한 (삼법회통), (수진비록)을 보면 '폐목'하라고 쓰여 있다.

나도 좌선할 때 눈을 감고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할 이유로 대충 두 가지가 손꼽힌다.

첫째, 눈을 뜨고 수련하면 눈앞의 세계만이 자기 것인데 비해 눈을 감으면 온 우주가 자기 것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눈을 감으면 우아일체, 즉 우주와 내가 하나로 된다는 점이다.

둘째, 눈을 감으면 외부의 빛을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련한다는 것은 외부에서 빛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빛을 찾는 행위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 뜻에서 '폐목'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눈을 뜨느냐, 감느냐의 여부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절대적이라고 고집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령 눈을 뜨고 좌선할 때 반개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는 '폐목' 법에 못지 않은 공효가 있다. 흔히 반개법이라고 하면 눈을 반쯤 내려 뜨고 약 1m 전방을 바라보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침서에 보면 바라보는데 있어서 응시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도대체 응시하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일까? 나는 그것을 시이불시, 즉 '보되 보지 않는 것'으로 풀이하며 반개법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시이불시의 상태라면 눈을 뜬 채 외부의 빛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폐목한 것이나 진배없는 셈이다.

그런데 폐목할 땐 눈을 어떻게 감느냐에 따라 전혀 효과가 달라진다. 대개 폐목하라고 하면 눈까풀에 무게가 실려 눈을 꼭 감아버리고 만다. 심한 경우는 양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상태로 눈을 감기도 한다. 이런 자세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잘못된 것이다.

폐목의 올바른 방법은 관세음보살의 미소나 모나리자의 미소 같은 그런 화기를 얼굴에 가득 담고 살짝 눈을 감는 것으로 집약된다.

수인법

좌선할 때 손을 어떻게 놓아야 할 것인가? 대개의 지침서에선 법계정인을 가르치고 있다.

이 방법은 두 손바닥을 위로 가게 하여 왼손을 오른손 위에 얹고 양쪽 손의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가볍게 맞닿게 한 뒤 아랫배 쪽으로 끌어당기는 자세를 일컫는다.

이 때의 양쪽 엄지손가락은 배꼽과 일직선이 되게 하고 두 손은 자연스럽게 다리 위에 올려놓는다. 이렇게 하면 두 손의 모양은 타원형처럼 된다. 배꼽 밑 단전의 위치는 바로 이 타원 속에 있게 마련이다.
법계정인은 약칭으로 '정인'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흔히 표준형 수인법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수인'이란 두 손으로 꾸며진 여러 가지 모양을 뜻하는 것이다. 수련의 세계에선 수인을 매우 중하게 여긴다.

뿐만 아니라 '인'이란 글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인'이란 한자는 도장을 뜻하는 글자다.

수련할 때의 '인'은 '하늘과 나' 또는 '부처와 나'가 일체가 되도록 보장하는 도장으로 풀이된다. 심지어 수인을 가리켜 우주의 에너지를 받는 손 안테나로 규정하기도 한다.

좌선할 때 어떤 손 모양의 수인을 하느냐에 따라 몸 에너지와 우주 에너지의 교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선 '정인'이라면 으레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인도 같은 곳에선 우리와 정반대다. 다시 말해서 오른손을 왼손 위에 올려놓는 것이 정측이라는 이야기다. 인도에선 오른손을 청정, 왼손을 부정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아가 오른손은 부처, 왼손은 자기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왼손이 오른손 위에 놓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선 왜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는 것일까. 전통적인 음양 사상에 따르면 오른손은 양으로 동을 상징하고, 왼손은 음으로 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조용히 앉아 심신통일을 하려면 '정'으로'동'을 눌러 진정시키는 것이 첩경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인'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다.

한데 우리 겨레의 오랜 '수인법'은 '악고법'과 '합장법'으로 집약된다.
'악고법'이란 어린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의 주먹쥔 손모양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인간에게 베푼 최초의 수인법이다.
'합장법'이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두 손을 모아 하늘에 비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살이의 온갖 풍상 속에서 하늘과 나를 하나 되게 하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박찬호의 좌선
얼마 전 중앙일보 스포츠면에 박찬호의 좌선 모습을 담은 사진이 크게 실려 눈길을 끌었다. 사진과 함께 보도된 '참선으로 만드는 20승' 예고기사는 어떤 의미에서 단순한 스포츠 기사의 차원을 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 기사와 관련해 몇 분의 독자로부터 질문이 있었다. 질문의 요지는 대충 두 가지다. 하나는 박찬호의 '좌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박찬호가 과연 참선으로 20승의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사진에 나타난 박찬호의 좌선 모습을 완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파이크를 신은 채 하는 좌법치고는 무난한 것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게다가 두 눈을 살짝 감고 목과 어깨에서 힘을 뺀 채 허리를 곧게 편 박찬호의 앉음새는 그의 기수련 정도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특히 박찬호가 왼손의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왼쪽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의 손바닥을 오른쪽 무릎 위에 놓은 자세를 취한 것은 좌법을 제대로 배운 결과라고 하겠다.

왼손은 음이기 때문에 손바닥을 위로 하여 양인 하늘 기운을 받게 하고, 오른손은 양이기 때문에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음인 땅 기운을 받게 하여 천지의 기운을 사람에게 합일시키는 것이 바로 이 좌법이 지닌 핵심이다.

그렇다면 박찬호는 20승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렇다'이다.
한데 거기엔 전제조건이 붙는다. 그 조건은 박찬호가 진정으로 '기가 실린 볼'을 던지는 방법을 터득했느냐의 여부다.

흔히 명투수의 자격 요건으론 이른바 강속구가 첫 손가락에 꼽힌다. 그러나 '기가 실린 볼'은 단순한 강속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느린 볼일 수도 있다. 던지는 볼 하나 하나에 투수의 기가 담겨 있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 볼은 여간해서 안타나 홈런을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투수가 볼에 기를 싣는 순간 이미 타자를 정복한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볼에 기를 싣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심신통일의 호흡법으로 투구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무의식으로 호흡의 리듬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련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호흡은 곧 타자보다 숨이 긴 호흡이므로 타자를 지배하게 된다.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의 승패는 호흡이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호흡, 곧 기는 건강과 성공을 가름하는 변수이다.

궤좌법

기수련을 하는 입장에서 늘 우리의 전통적인 좌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는 모두 역사의 뿌리를 인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수련법을 교시한 '삼일신고'에 보면, 반드시 궤좌의 자세를 취하라고 쓰여 있다. 궤좌란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로, 흔히 정좌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오랜 옛날부터 무릎꿇고 앉는 자세가 바른 자세라고 여겼기에 생겨난 말이다.

수련하는 이들에게 정좌하라고 가르치면 일본식 좌법이 아니냐고 묻는다. 물론 정좌가 일본식 좌법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뿌리가 우리의 역사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데 같은 정좌라도 일본식 좌법과 우리의 전통 좌법인 궤좌와는 앉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일본식은 무릎을 꿇고 두 발바닥을 포개던가, 아니면 엄지발가락을 살짝 겹치게 해 앉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정좌법은 무릎을 꿇고 앉되 두 발의 엄지발가락이 서로 맞닿게 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와 아울러 두 무릎과 두 발의 발가락을 땅에 닿게 하여 엉덩이를 발뒤꿈치에 싣는 앉음새도 전통 궤좌법의 하나로 꼽힌다.

궤좌, 즉 정좌와 결가부좌 또는 반가부좌는 수련의 공효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초심자가 수련할 때 결가부좌는 힘들기도 하거니와 균형과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 반가부좌는 쉽다곤 하지만 역시 좌우의 균형을 잡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이에 반해 궤좌는 앉기도 쉬울 뿐 아니라 균형과 중심을 잡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으면 절로 하단전에 기운이 모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수련 효과가 어느 좌법보다 빠르게 나타난다.

하루종일 궤좌로 앉아 90평생을 수행한 다석 유영모는 이 좌법을 '하나'를 찾는 '일좌'법이라고 했다.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은 '씨 ' 사상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일좌'의 수행으로 몸 생명에서 얼생명으로 솟았다고 추앙 받았다.

다석은 '일좌'와 태식으로 '참'의 경지에서 이승을 떠났다. 그런데 다석이 추구한 '하나'는 바로 일시무시의 그 '하나'였다. '하나'는 우리 겨레뿐 아니라 인류의 시원을 뜻하는 거룩한 '하나'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일좌법, 곧 궤좌법은 천부의 좌법인 셈이다.

세 가지 원칙

기수련을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으로 흔히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바른 자세 또는 바른 좌법,
둘째는 바른 숨쉬기,
셋째는 바른 마음 갖기다.

우리 겨레의 전통수련법을 풀이한 삼법회통에서는 이를 이른바 삼법이라고 해서 지감, 조식, 금촉으로 나누고 있다.

지감이란 한자의 뜻풀이대로 느낌을 끊는다는 것인데, 수행의 방법으로 바른 자세 곧 바른 좌법의 시종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이란 숨을 고른다는 뜻인데, 바른 숨쉬기와 숨고르기가 한 축에 있음을 일컫는 것이다.

금촉은 부딪힘을 금한다는 뜻인데, 수행방법으로 말하면 합장법으로 상징되고 마음공부로 요약된다.

세 가지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조식법이다. 숨고르기, 곧 바른 숨쉬기는 사실상 기수련의 알파이고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쉬기를 바로 할 수 있으려면 거기에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조건은 자세 곧 좌법이 올바로 돼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바른 숨쉬기는 바른 좌법이 이루어질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바른 좌법을 설파한 우리 나라 최초의 기록은 고구려 재상 극재사가 쓴 (삼일신고독법)이라고 일컬어진다. (독법)에서 극재사는 무릎꿇는 정좌법이 지감법의 근본임을 강조한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좌법을 해서는 안된다고 고집할 이유는 없다. 어떤 좌법을 택하든 배꼽 밑 하단전에 중심이 제대로 잡힐 수 있는 것이면 바른 좌법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수련에 있어서 좌법은 빌딩 건축에서 기초공사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좌법을 바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기초공사를 잘못한 채 건물을 짓는 꼴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오늘날 기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따지고 보면 그 대부분이 부실한 기초에서 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초의 부실은 비단 좌법의 잘못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하단전의 위치조차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마저 보기 드문 게 현실이다. 부정확하게 풀이한 책을 읽고 수련에 임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다.

하단전의 위치를 어림짐작해서 느낌만 갖고 수련하는 이들은 우선 그 위치부터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단전의 위치

단전의 위치는 어딜까. 어떤 책에는 '배꼽 밑 한치 다섯푼'이라고 쓰여 있는가 하면, 다른 책에는 배꼽 밑 세치인 부위라고 한다.

심지어는 배꼽 자체가 단전이란 설도 있고 배꼽 안쪽으로 한치 세푼인 곳에 단전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단전은 배꼽과 신장 사이의 전칠후삼의 부위의 공혈이란 설도 있다.
이뿐이 아니다. 단전은 배꼽 밑 한치, 두치 네푼, 두치 반등 각양각색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단전의 위치에 여러 설이나 주장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단전이 이른바 해부학적으로 규명되지 못했다는 것이 원인의 한 가닥을 이룬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설이 분분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둘째, 단전의 위치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혼란을 가져온다고도 할 수 있다. 단전은 사람의 키나 체형에 따라 다르고, 남녀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일컬어진다.

셋째, 한 치 또는 두 치 하는 치수의 계산방법이 고정된 길이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치는 몇 cm라고 고정돼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인데 치수의 계산법은 그렇지가 않다.

한치의 단위는 골도법에 의해서 가운뎃손가락의 가운데 뼈마디로 규정돼 있다. 따라서 손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은 한치의 크기가 차이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언뜻 불합리한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사람의 몸에 맞춰 제각기 알맞은 계산 방법을 찾아낸 옛 사람들의 슬기를 깨닫게 해 준다.

넷째는 기수련을 지도하는 이른바 도인이나 사범 가운데 사이비가 많은 데서 오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전의 개념이나 위치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행세한다는 것은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정확한 단전의 위치는 어디고,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의 연구와 수련을 바탕으로 설명한다면 단전은 배꼽 밑 세치의 부위이며 그곳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배꼽 밑에 두 손바닥으로 역삼각형의 꼴을 만든 채 몸을 굽히면 나타나는 주름의 위치에서 약간 안쪽이 단전의 바른 자리다. 이곳을 골도법으로 셈하면 배꼽 밑 세치가 되며, 혈 자리로 치면 관원과 일치한다.

둘째는 바로 선 자세에서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내리면서 땅에 발이 닿지 않도록 하면서 중심을 잡는 방법이다. 이때 아랫배에 잡히는 중심점이 바로 단전인데, 이곳은 곧 배꼽 밑 세치와 일치한다.

삼단전

단전은 하단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단전과 중단전도 있다.

한데 상단전이나 중단전의 위치를 에워싼 여러 가지 이설 앞에선 당혹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 따라선 상단전을 머리정수리에 위치한 백회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인당 또는 조규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당은 두 눈썹의 중간에 있는 혈을 뜻하는 것이고, 조규는 두 눈 사이의 중간점을 뜻하는 것이다.

중단전의 위치에 대해선 그것이 배꼽 자체라는 주장과 함께 단중 즉, 명치 끝자리라는 설명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상단전을 인당, 중단전을 단중 자리로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렇게 위치를 잡고 하단전을 중심으로 기초적인 기수련을 쌓으면서 상단전, 중단전으로 수련단계를 옮겨가는 것이 순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상중하의 세 단전은 약칭으로 삼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전이란 말과 함께 삼관이란 말도 쓰인다. 삼관이란 미려관, 협척관, 옥침관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이란 글자는 기가 통과하는 관문이란 함의를 지닌다.

삼전과 삼관을 살피면 미려관과 하단전, 협척관과 중단전, 옥침관과 상단전이 대칭을 이룸을 알 수 있다.

단전이란 말은 글자 자체가 지니는 뜻으로 말미암은 혼란도 적지 않다고 일컬어진다.
붉다는 뜻의 단자에다 밭을 뜻하는 전자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단전을 면적의 개념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엄밀한 의미에서 단전 자체를 지칭하는 '혈'이나 '규'는 면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점의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기의 시원을 이루는 중심점과 기장이 형성되는 것을 착각해선 안될 일이다.

우리 옛 선도에선 단전을 '밝'을 받는 '돌단자리'라고 했다. 이 말의 참뜻은 하느님을 표상하는 하나의 귀결점인 배꼽의 '씨앗'이란 뜻임을 알아야 한다.

축기

이른바 '축기'라는 말처럼 기수련 입문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도 흔치 않을 성싶다. 축기라면 으레 기의 축적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데서 오는 현상일 듯하다.

마치 돈을 저축하듯 기를 쌓으면 단전자리가 달걀 만하게 뭉쳐지거나 아랫배가 무쇠처럼 단단해진다고 가르치는 스승이나 사범도 적지 않다.

실제로 우리 나라의 고명한 B도인은 축기가 잘 돼 아랫배가 돌처럼 강해졌다고 큰소리치다가 병원 신세를 진 일이 있다. C도인은 중국인 기공사 앞에서 단전이 주먹만한 크기로 형성됐다고 자랑하다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사실 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안다면 그런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건지 구태여 설명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기란 막힘없이 유통되는 성질을 지닌다. 한데 그것이 한 곳에서 뭉치거나 굳어졌다면 잘못됐어도 한참 잘못됐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기의 세계란 생명에너지의 세계인 동시에 의식의 세계이기도 하다. 의식의 세계에선 생각하기에 따라서 느낌이나 현상이 변화하는 법이다. 기수련을 할 때 기가 뭉친다는 생각을 반복해서 의식하면 마침내 그런 결과가 일어난다.

이것은 올바른 단전자리를 찾아 수련함으로써 생기는 기감이나 기의 팽창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말사전에 보면 축기라는 말의 뜻풀이를 '호흡할 때에 최대한도로 내쉴 수 있는 공기의 양'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 어디에도 기를 축적한다는 풀이는 없다.

이것은 결국 축기란 호흡의 길이 또는 호흡의 양과 관련된 말임을 웅변해 주는 셈이다.

비록 우리말사전엔 없지만 선도 관련 고전에 보면 축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기서 축기란 기초를 '쌓는다'는 뜻이다. (낙육당어록)이란 책을 보면 축기란 기수련의 기초를 닦는 공부로, 밖으로 몸을 닦고 안으로 마음을 닦으면서 호흡으로 단전자리를 닦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보면 기수련 초보자가 축기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기수련의 초보단계인 축기 과정은 대개 백일축기라고 해서 석달 남짓이다. 백일기도하는 자세로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 그 과정 속에 담겨 있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축기' 다음의 과정은 이른바 소주천이고, 그에 이어서 대주천의 과정으로 접어드는 게 수련의 순서라고 할 수 있다.

토납법

기수련 초심자가 익혀야 할 첫 단계의 호흡법은 '토납법'이다. 이른바 조식법은 그 다음 단계의 호흡법임을 알아야 한다.

흔히 조식법이라고 하면 숨을 고르는 것이어서 다짜고짜로 조식부터 익히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숨 고르기의 본질과 조식법의 참뜻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할밖에 없다.

오늘날 기 수련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부작용도 따지고 보면 호흡법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한 데서 오는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납법에서 말하는 토납이란 토고납신의 준말이다.
낡은 기운, 즉 고기를 '뱉고' 신선한 기운, 즉 신기를 '들이마신다'는 뜻이다.

문헌상 이 말을 최초로 쓴 장자는 토고납신을 호흡 자체라고 규정했을 정도다.

토납법은 한마디로 깊은 숨쉬기, 즉 심호흡과 아랫배 숨쉬기, 즉 하복부 호흡이 한 덩어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토납법은 뱉는 호흡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호흡이란 말에서 날숨을 뜻하는 호자가 들숨을 뜻하는 흡보다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토납법에서 숨을 뱉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입으로 내뱉는 것과 코로 내쉬는 것이 그것이다.

두 가지 가운데서 어느 방법을 취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그러나 건강이 나쁜 사람에겐 입으로 뱉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해 두고싶다.

토납법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네 가지다.

첫째, 허파에 있는 낡은 기운, 즉 탁기를 모두 뱉어낸 다음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숨을 뱉을 때 배꼽 밑 아랫배를 최대한 움츠리고, 들이쉴 때 아랫배를 팽창시키는 동작을 의식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셋째, 숨을 뱉을 때는 혀끝을 아랫니의 뒤편에 대고 숨을 들이쉴때는 혀끝을 윗니 천정에 댄다는 점이다.

넷째, 숨을 들이쉴 때 기운이 하단전에 닿는다는 이미지를 갖도록 한다는 점이다.

토식법은 자칫 '복식 호흡법'과 혼동하기 쉽다. 복식호흡법은 호흡할 때 배 전체를 수축 또는 팽창시키는 것을 일컫는 데 비해서, 토식법은 아랫배에 국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호흡의 모양

수련방법을 기록한 옛 문헌에 보면 호흡의 모양 또는 호흡의 상태를 사상이라고 해서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풍상, 천상, 기상, 식상이 그것이다.

호흡할 때 풍상이란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들숨과 날숨을 콧속에서 느낀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숨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숨소리가 나는 호흡은 모두가 '풍'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상'에서 '천'은 '헐떡인다'는 뜻이다. 천식을 일컬을 때와 같은 뜻이다. 그러나 호흡 모양을 나타내는 '천상'은 천식과 구분된다.

'천상'의 뜻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고,
둘째는 들숨과 날숨이 막히고 끊기는 일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기상'에서 '기'라는 글자는 '숨' 자체를 뜻하는 것이다. 수련과정에서 '기상'을 판정하는 기준으론 세 가지가 손꼽힌다.

하나는 무성, 즉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 둘은 들숨과 날숨이 막힘과 끊김이 없이 통창, 즉 시원하게 뚫린다는 점, 그리고 셋은 호흡이 불세, 즉 가늘지 않다는 점이다.

'식상'에서 '식'이라는 글자는 '숨쉰다'는 것을 뜻한다. 글자꼴로 볼 때 '식'이라는 글자는 육체로서 자기와 마음이 합쳐진 것으로, 숨쉬기의 본질을 뜻하는 것이다.

수행할 때 호흡상태가 '식상'에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는 호흡이 불성 즉 소리가 없어야 하고,
둘째는 불결 즉 맺히지 말아야 하고,
셋째는 불조 즉 거친 호흡이 아니어야 하고,
넷째는 세세면면 즉 가늘기가 솜털 같은 그런 숨쉬기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약유약무 즉 있는 듯 없는 듯한 숨쉬기의 모양새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풍', '천', '기', '식'의 네 가지 가운데서 수행하는 이들이 피해야 하는 것은 앞의 세 가지 호흡이다. '풍'은 기운을 흐트러지게 하고, '천'은 그것을 막히게 하고, '기'는 피로를 몰아오기 때문이다.
옛 선인들은 한결같이 가장 바람직한 호흡법은 '식'을 이루는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식'을 이룬다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의 경지에 들었음을 말해 준다.
첫째는 조식 즉 숨 고르기를 할 줄 안다는 것이고, 둘째는 선정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조식법

조식법은 자연호흡으로 입문하는 것이 순서이다. 자연호흡이란 지금 숨쉬고 있는 그대로 하는 호흡을 뜻한다. 따라서 조식법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조식법의 함정이다.
기수련 초심자가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자연호흡을 하면서 조식법을 한다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대체로 초심자들은 숨쉬기의 상이 나쁘고 폐활량도 적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 터에 숨 고르기의 조식법부터 한다면 폐활량은 더욱 위축되고 숨쉬기의 상태는 약해지게 마련이다. 기수련을 하거나 좌선하면서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는 대개 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아는 S도인은 조식법에 들어가기 전에 무려 6년이나 토납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의 스승은 토납법으로 호흡의 자리가 잡히기 이전에는 조식법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호흡법의 기초는 바로 토납법이며 기초가 튼튼하지 않고는 진경이란 있을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조식법이란 토납법을 완전히 익힌 다음 자연호흡의 상태에서 숨 고르기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때 숨고르기를 하는 방법으론 네 가지가 손꼽힌다.

첫째는 '세'이다. '세'란 '가늘다'는 뜻이다. 숨을 가늘게 쉰다는 것은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숨고르기를 할 때 콧속의 털이 미동도 하지 않도록 가늘게 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숨쉴 때의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숨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둘째는 '장'이다. 한 호흡의 시간은 길수록 좋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호흡 주기는 3초~4초인데 이것을 될수록 길게 하라는 것이 '장'이 지니는 참뜻이다.

흔히 1분 호흡을 하라는 것도 '장'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숨을 참는 폐기를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셋째는 '심'이다. '심'의 1차적 목표는 숨을 하단전까지 깊게 내리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2차로 회음혈까지 내리고 3차로 발바닥의 용천혈까지 내리도록 해야 한다.

넷째는 '균'이다. '균'이란 들숨과 날숨의 유량이 균일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호흡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식

기수련자 사이에서 개념상 혼란을 겪고 있는 낱말의 하나가 '지식'이다. '지'는 '그치다' 를, '식'은 숨을 뜻한다. 이 때문에 '지식'이란 으레 '숨을 그치는 것' 또는 '숨을 오래 참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런 풀이에 근거해서 호흡수련을 할 때 날숨과 들숨 사이에 '지식'을 하도록 가르치는 곳도 적지 않다고 들린다.

그러나 이런 수련은 자칫 큰 위험이 따른다. '지식'을 한다고 숨을 억지로 참으면 무엇보다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 쉽다. 몸에 힘이 들어가 경직되면 수련의 역효과를 자아낼 뿐이다.

또한 숨을 멈추고 참으면 얼굴이 상기되고 땀이 솟아나기도 한다. 게다가 몸에 진동이 오는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환각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환각상태에 빠지는 경우는 최악의 조짐을 예고해 주는 것이다.

숨을 멈춘 데 따른 산소결핍이 뇌신경을 자극하거나 손상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수련자들은 이런 환각작용으로 '무엇'이 보이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마치 도의 길목에 들어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다가 도인이 되기는커녕 건강을 완전히 망치고 폐인이 되기 일쑤다.

기수련 초심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숨을 억지로 참거나 끊어지는 호흡법을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점이다.

호흡수련에서 들숨과 날숨을 이어지게 하다 보면 저절로 '머무는 상태'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지식'이다. 중국의 '설문해자'에 보면 지란 발바닥 모양을 본뜬 것으로, '발을 멈추다'란 뜻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선도에선 그렇게 풀이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사람안에 머문다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지식'이란 하늘 기운을 내 몸 안에 있게 한다는 뜻인 셈이다.

참선할 때의 '지'는 눈이 멈추는 곳이지 숨이 멈추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좌정하여 눈이 멈춘 곳에 집중이 이루어져 고요의 경지에서 숨이 있는 듯 없는 듯한 것이 바로 지식이다.

따라서 지식이란 의식적으로 하는 호흡이 아니다. 무의식적인 행위인 동시에 호흡수련의 귀착점이다.

조식법의 완성은 지식에서 판가름나는 법이다. 지식이 이루어지면 태식의 경지는 어림할 수 있다.

도인체조

'도인체조'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대개 '도인이 하는 체조'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인과 도인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잘못이다.

우리말 발음은 비록 같을지라도 전자와 후자는 전혀 뜻이 다르다.
전자의 도인은 도를 닦는 사람 또는 도사를 뜻한다. 그러나 후자의 도인은 수련방법을 뜻하는 것이다.

도인의 수련방법과 원리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구태여 체조라는 말을 덧붙여 도인체조라고 부를 까닭도 없다. 도인과 체조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 보면 도인의 도는 도기령화, 즉 기를 이끌어 고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인은 인체령유, 즉 몸을 길게 뻗어 부드럽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것은 도인이란 기(호흡)와 몸동작을 일치시키는 수련방법임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수련할 때 호흡과 몸동작을 일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의 전통선도에선 그 원리를 간단하게 여덟 글자로 설명하고 있다.

'승개후흡'과 '강합전호'가 그것이다. 승개후흡은 들숨과 일치시켜야 할 몸동작을 말하는 것이고, 강합전호는 날숨과 일치시켜야 할 몸동작을 일컫는 것이다.

'승'은 위를 향해 몸이나 팔을 올리는 동작을 상징하는 글자다. '개'는 팔을 벌리거나 가슴을 펴는 동작을 말한다. 그리고 '후'는 몸을 뒤로 젖히는 동작을 뜻한다. '흡'은 들숨이다.

'강'은 선 자세에서 무릎을 구부리거나 팔을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나타내는 글자다. '합'은 손바닥을 마주해서 합치거나 가슴을 오므리는 동작을 뜻하고, '전'은 몸을 앞으로 수그리는 동작을 일컫는다. '호'는 날숨이다.

도인할 때 틀리게 해서는 안된다. 물론 몸동작을 아무렇게나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호흡과 들어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킬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원리에 맞지 않는 호흡과 동작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뿐이다.

일부 수련장에서는 이런 원리와는 달리 힘을 쓸 때나 팔을 뻗을 때 '호', 즉 날숨을 하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이것은 무술을 연공할 때의 호흡동작임을 알아야 한다.

무식

의식을 아랫배 단전에 두고 호흡수련을 얼마간 하면 단전자리에 뜨거운 기운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선인들은 발열 또는 발화라고 표현했다.
발열이란 열이 생겼다는 뜻이고, 발화란 불이 붙었다는 말이다. 사람에 따라선 단순한 열감이 아닌 뜨거운 불기운을 느끼기에 생겨난 말이 바로 발화다.

한데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달리 중단전이 먼저 뜨거워진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며 수련이 정상궤도에 접어들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기수련에선 남녀의 공법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음양의 법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수인법을 예로 들더라도 손잡는 방법에서 남녀는 각기 반대로 잡아야 한다. 가령 남자의 왼손으로 오른손을 밑받침하는 법계정인도 여자라면 바른손으로 왼손을 밑받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남녀의 기운행 방향은 다르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기수련은 단전자리에서 발열 또는 발화하는 시점부터 다져지는 법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수련자들은 단전자리에 의식을 집중하고 열심히 호흡을 하는데도 전혀 열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겐 무식법을 권하고 싶다.

무식법이란 한마디로 강하게 하는 호흡법을 일컫는 말이다. 강하게 한다고 해서 몸에 힘을 주면서 호흡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몸의 자세는 어디까지나 유연하고 자연스런 것이 기본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강하게 하는 호흡법인가.

그것은 토납법을 할 때 아랫배의 팽창과 수축이 최대로 되게 하는 그런 호흡을 말한다.

만약 이런 호흡으로도 발열이 되지 않는다면 '역토납법' 또는 '역복식 호흡법'을 하는 것이 좋다.

역토납법이란 토납법과 반대의 개념으로, 아랫배를 들숨에 수축하고 날숨에서 팽창하는 것이다.

역복식 호흡법은 배 전체를 역토납법처럼 수축 또는 팽창하는 방법이다.
선도문헌을 보면 무식법은 무화연단, 즉 '강력한 의식의 호흡으로 단을 만드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무식 또는 무화의 반대개념은 문식 또는 문화이다. 문화란 밥 지을 때 뜸들이는 온양의 불. 다시 말해서 약한 불을 뜻한다. 따라서 문식이란 약한 호흡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식법의 조식과 같은 차원의 것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소주천(1)

기수련의 첫 단계 완성은 이른바 소주천에서 이뤄진다. 소주천이란 사람을 하나의 작은 우주로 본 옛 선인들의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옛 선인들은 우주의 운행원리와 인체의 순환원리를 같은 것으로 파악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나 한얼이 우리의 머릿골 속에 내재해 있다는 사상은 모두 이런 사고의 틀 속에서 배어 난 것이다.

한데 주천이란 말은 크게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하늘이 둥글게 돈다는 뜻이다. 우주를 커다란 일원으로 본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주의 이치에 맞는 호흡은 둥근해와 둥근 달처럼 둥근 호흡이어야 한다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우주의 운행이 끊어짐이 없는 것처럼 사람의 호흡도 끊어짐이 없어야 진정한 의미의 주천 호흡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천에 대한 또 하나의 풀이는 그것이 하루해의 운행을 뜻한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하루의 시간을 십이지, 즉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로 표시했다. 이런 원리에 따라 사람 몸의 임맥과 독맥에 있는 십이경혈을 우주의 운행원리인 십이지에 맞추었다.
임맥이란 사람 몸의 전면 정중앙선을 흐르는 경락의 큰 줄기를 말하는 것이고, 독맥은 머릿골에서 후면의 가운데를 흐르는 큰 줄기를 뜻하는 말이다.

흔히 소주천이라고 하면 바로 임맥과 독맥에 기가 흐르는 상태 또는 기가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그런데 소주천을 단순히 기의 흐름을 느끼는 것으로 착각하는 일도 적지 않다. 이런 착각은 절대로 금물이다.

기수련을 제대로 하게 되면 얼마 있지 않아 단전자리가 뜨거워지게 마련이다. 이때 단전에 계속 의식을 집중하면 단전 주변에 뜨거운 기운이 팽창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사람에 따라선 뜨거운 기운이 회돌이쳐 진동이 일어나는 수도 있다. 이런 상태는 모두 기수련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징표다.

단전자리에 감돌던 기운은 이윽고 성기와 항문의 중간 지점인 회음으로 내려가서 뜨거운 기운을 미려관으로 휘몰아간다. 드디어 주천의 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등마루뼈 끝에 있는 혈인 미려관은 소주천 수련에서 맞는 최초의 관문이다.

소주천(2)

소주천 수련의 첫 관문인 미려관을 통과하는 일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미려관으로 뜨거운 기운, 즉 양기가 휘몰아쳐 올라가면 그것이 스무스하게 통과하도록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대부분의 지침서에선 미려관을 통과하는 호흡방법으로 무식, 즉 강한 호흡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호흡방법은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다. 무리하게 강한 호흡을 하다간 심신에 해로울 뿐이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무식이 아니라 문식, 즉 약하고 자연스런 호흡이다. 미려관에 가볍게 의식을 집중하면서 호흡을 자연스럽게 가다듬는 것이 요령이다.

미려관으로 휘몰아친 양기는 비록 가벼운 의식일지라도 의식이 가해지면 더욱 큰 힘으로 미려관을 치받게 된다. 이때 미려관에 진동이 일어난다. 이런 진동은 양기가 미려관을 통과하려는 조짐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진동이 일어나면 의식을 하단전에 옮겨 집중해야 한다. 이때의 의식은 강한 의식이어야 하고, 호흡도 의식에 맞춰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이윽고 양기가 미려관을 통과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했는데도 양기가 미려관을 통과하지 않는 수가 있다. 단 한 차례의 시도로 뜨거운 기운이 미려관을 통과하는 일이란 매우 예외적인 것으로 얘기된다.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만약 한 차례의 시도로 통과하지 못했다면 단전에 집중했던 강한 의식을 풀고 다시 미려관에 가볍게 의식을 두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미려관에 다시 진동이 일어난다. 진동이 일어나면 다시 의식을 단전으로 집중시킨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양기는 반드시 미려관을 통과하게 마련이다.

미려관이 첫 관문이라면
둘째 관문은 협척관이고,
셋째 관문은 옥침관이다.

협척관은 등 뒤 두 겨드랑이 밑 연결선의 중앙에 위치한다. 그곳은 앞가슴의 단중 또는 중단전과 대칭을 이룬다.

옥침관은 머리 뒤통수에 위치하며 인당 또는 상단전과 대칭을 이룬다. 미려, 협척, 옥침의 세 관문은 소주천 수련의 성패를 가늠하는 삼관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일단 양기가 미려관을 통과하면 명문을 거쳐 협척관으로 휘몰아친다. 이때 관문 통과를 위한 의식 집중과 호흡방법은 미려관을 통과할 때와 똑같다.

소주천(3)

양기가 옥침관을 통과하면 이윽고 정수리 쪽에 시원한 기운이 감돌게 된다. 정수리 쪽의 혈을 일컬어 백회 또는 니환이라고 한다.

백회를 중심으로 기운이 올라오면 그곳에 가볍게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 이때 호흡은 자연스럽고 약하게 하는 것이 포인트다. 이렇게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선 백회 언저리에 진동이 심하게 일어나는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은 양기가 백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조금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의식을 단전에 강하게 집중시키면서 호흡을 조절하면 쉽사리 양기가 백회를 통과하게 된다.

이렇게 하더라도 기운이 백회를 무사하게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절대로 무리를 해서는 안된다. 백회와 단전을 번갈아 가면서 의식을 집중해야만 한다. 요령은 삼관, 즉 미려와 협척과 옥침관을 통과할 때와 똑같다.

양기가 백회를 통과하면 순식간에 인당 즉 상단전으로 내려간다. 백회로 상승한 양기는 이곳을 정점으로 하강국면에 접어든다. 선도의 옛 문헌을 보면, 백회까지 양기가 올라가는 것을 진양화라고 표현했고 그 이후의 하강국면을 퇴음부라고 했다.

양기가 백회를 통과함에 따라 인당 언저리엔 시원한 기운이 감돌게 된다. 이때 인당에 가볍게 의식을 두면서 호흡을 가다듬으면 그곳에 양기의 집중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이 어떤 한계에 다다르면 인당 주변에서 진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백회를 통과할 때처럼 의식을 단전과 인당에 번갈아 두면서 호흡을 조절해야 한다.

인당을 통과한 양기는 계속 내려가서 단중 즉 중단전에 이른다. 이때 단중엔 시원한 기운이 휘몰아쳐 온다.

이 기운을 부드럽게 통과시키려면 역시 가벼운 의식과 약한 호흡, 즉 문식으로 대처해야 한다. 이때도 단중에 진동이 일어나는데 놀랄 필요가 전혀 없다. 여태까지 해 온대로 단전에 의식을 두면서 적응하면 된다.

단중을 통과한 양기는 드디어 단전, 즉 하단전으로 내려온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약간 강하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단전에 의식과 호흡이 함께 집중됨으로써 진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 진동은 단전에서 시발한 양기가 다시 단전으로 귀착한 이른바 소주천의 일회전을 입증하는 것이다.

소주천의 완성

소주천 수련과정에서 흔히 빚어지는 개념상의 혼란은 대충 네 가지가 손꼽힌다.

첫째는 감각적인 소주천과 진짜 소주천을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각적인 소주천은 기가 몸통을 도는 듯이 느껴질 때 주천이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이를 두고 옛 선인들은 '공하거'라고 했다. 여기서 '하거'라는 말은 기가 수레바퀴처럼 돌고돌아 단을 이루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하거'란 아무리 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진짜 소주천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소주천 느낌은 물론 확실하게 양기가 몸통을 주행해야 한다. 그것도 단 한번의 회전으로 주천이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는다. 수련을 반복해 언제든지 뜻하는 대로 기를 돌릴 수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온양'과 '채약'의 참뜻을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온양'이란 경락상 주요 관문에 양기를 머물게 해 호흡으로 뜸을 들이는 행위를 일컫는다.

소주천 과정에서 주요 관문은 전삼관과 후삼관, 그리고 백회와 회음이다. 전삼관은 상, 중, 하 단전을, 후삼관은 미려, 협척, 옥침관을 뜻한다.

'채약'이란 양기가 주천해 단전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온양함으로써 마무리짓는 것을 일컫는다. 단전에서 마지막 뜸을 들이다 보면 흰빛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채약'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다.

셋째는 '규혈'과 '경혈'을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혈'이란 양기를 온양하면서 호흡으로 뚫은 기혈을 뜻한다. 이에 비해 '경혈'은 침을 놓는 자리다. 그래서 '규혈'과 '경혈'의 위치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넷째는 '자오묘유' 공법을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오' 공법이라면 대개 한밤중인 '자시'와 한낮인 '오시'에 하는 수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묘유' 공법이란 아침 '묘시'와 저녁 '유시'의 수련법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주천에서 '자오' 공법은 회음을 '자시' 즉 저점으로 삼고 백회를 '오시' 즉 정점으로 삼는 수직적인 순환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묘유' 공법이란 협척을 '묘시'로, 단중을 '유시'로 삼은 수평적인 기의 흐름, 다시 말해 좌우 회전을 지칭하는 말이다.

수련중 함정과 유혹

소주천이 이루어지면 몸과 마음이 말할 수 없이 건강해진다. 어지간해서는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설령 걸렸더라도 기의 왕성한 순환이 가져다주는 자체 치유력으로 쉬 낫는다.

비록 소주천이 되지 않았더라도 호흡수련을 꾸준히 하는 것은 건강을 보장하는 지름길의 하나다. 대개 병약한 사람의 호흡 모양을 보면 빠르고, 약하고, 얕은 게 특징이다. 이에 반해 건강한사람의 호흡은 느리고 깊고 힘찬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병약한 사람은 호흡법부터 바꿔야 한다. 호흡수련을 하게 되면 누구든지 소주천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여기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하나는 바른 호흡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른바 한탕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탕주의란 결국 분수에 넘치는 욕심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기의 세계에선 욕심은 금기이다. 초능력이나 신비주의를 탐하는 지나친 욕심은 자칫 파멸의 길로 접어들게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수련을 하다 보면 한 두 고비의 함정과 유혹을 겪게 된다. 첫 번째 고비는 이른바 기감을 느낄 때다. 사람에 따라서는 기감이 예민해 흥분하기 일쑤다가 마침내 기지상주의자가 돼 버린다. 그러나 기감을 느꼈다고 해서 흥분할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더욱 차분하고 이성적이어야만 한다.

둘째의 고비는 기수련이 진경을 이루어 이른바 기의 엑스터시(ecstasy)를 느낄 때다. 이때의 희열은 성교에서 오는 환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국부적인 진동이 일으키는 쾌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몸에 진동이 와서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지게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엑스터시에 홀딱 빠져서는 안된다. 기수련이란 어디까지나 진정한 심신의 건강을 찾는 것, 나아가서 자아 발견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기에 의한 진동이나 초상현상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법륜공(1)

이홍지가 창시한 법륜공에 대해 많은 독자로부터 문의가 있었다. 뉴스만으로는 그 공법의 핵심이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문제가 됐는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궁금증을 완벽하게 해소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법륜공을 풀이해 볼까 한다.

나는 이홍지를 직접 만난 일은 없지만 그의 제자들과 교류를 갖고 있으며 법륜공의 수련을 경험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홍지의 저서들을 모두 읽기도 했다.

특히 이홍지에 내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가 전수받은 주요 공법이 우리 겨레의 전통수련법과 직, 간접으로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이홍지는 1951년 지린성의 한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네살 때부터 전각법사라는 큰스님으로부터 진선인의 최고법문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무려 8년 동안이나 이홍지를 지도한 전각법사는 이른바 밀교 독전대법의 제10대전인이었다.

이홍지는 12세가 되던 해 도가의 팔극진인을 만나 내외공을 비롯한 여러 공법을 배웠다.

그리고 1972년 장백산(백두산)에서 내려온 대도의 스승 진도자에게서 내수공을 배웠는데, 이때 혹독한 심성 수련을 받았고, 이른바 주의식을 끌어내는 완성의 경지를 이뤘다고 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밝민족의 수련법을 일컬어 대법 또는 대도라고 한다. 이홍지의 스승 진도자가 바로 대도의 전인이라는 것은 매우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홍지의 출생지가 백두산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다 백두산의 수련대법까지 전수 받았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가 조선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백두산에는 진도자의 큰 스승인 백봉신사가 아직도 건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봉신사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홍지에게 대법을 전한 진도자는 백봉신사의 명을 받고 그렇게 한 것 같다.

법륜공(2)

법륜공은 1992년 5월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의 직속공파로 인정됨으로써
정식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당초부터 이홍지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활동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공이란 이름을 빌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점은 그의 저서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기공이란 말은 역사적 전통에 반하는 것이며, 그것은 문화대혁명 때 극좌사상에 영합하기 위해 생겨난 산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기공이란 말보다는 전통적으로 쓰여 온 '수련'이란 말이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수련'은 마음을 닦는다는 뜻의 '수'와 몸을 닦는다는 뜻의 '련'을 합친 것이기 때문에 훨씬 합리적이라는 설명이다.

뿐만 아니라 이홍지는 오늘날 중국사회에 풍미하고 있는 이른바 '기공'의 잘못을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단을 가르친다면서 연단이나 채단으로 공을 이루고 오를 열게 해 준다고 사람들을 현혹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기란 우주의 이치에 따라 흐르는 것이므로 자연스런 호흡으로 우주의 리듬에 맞추면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이 이홍지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물론 그의 스승들의 가르침이 밑받침된 것이다. 파룬궁은 바로 그런 이치를 다섯 가지 동작으로 엮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홍지의 이런 생각과 행동은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기공단체와 지도자들의 맹렬한 반발에 부딪쳤다. 오늘날 중국정부의 법륜공 탄압에 이런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홍지는 법륜공의 이론체계를 법륜대법이란 이름으로 정립했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의 기존 불교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중국불교계의 심한 반발에 봉착했고 이른바 사교로 몰리는 요인의 하나가 됐다.

이홍지는 불교의 우주원리를 표상하는 법륜, 즉 파룬을 내세우면서도 그 공법은 석가모니 이전의 법문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전통적인 대법과 연결고리를 이룬다.

법륜공(3)

법륜공의 다섯 가지 동작은 매우 간단하고 익히기 쉬운 게 특징이다. 다섯 가지 동작 가운데 네 가지는 서서 하는 공법이고 한 가지는 좌선이다.
서서 하는 동작의
첫째 공법은 불전천수법이다. 백맥을 여는 데 공효가 있다고 한다.

둘째는 법륜장법이다. 생혜증력 즉 지혜를 생기게 하여 공력을 증가시키는 공법이다.

셋째는 관통양극법이다. 몸 안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공법이다.

넷째는 법륜주천법이다. 온몸에 기를 순환시키는 공법이다.

다섯째의 공법은 좌선하는 것인데, 신통가지법이라고 부른다. 이 공법은 비록 앉아서 하는 것이지만 앞에 한 네 가지 입공의 공력을 높이면서 신통력을 얻게 하는 전반적인 수련공법이라고 일컬어진다.

법륜공의 다섯 가지 동작은 수련의 원만을 얻는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원리는 진선인을 최고 가치로 추구하고 수련을 통해 그것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진'은 도가에서 말하는 '참'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선'은 불가의 자비 또는 자선과 같은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인'은 이른바 대도의 덕목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퇴계 선생의 양생수련법에 보면 '인'을 으뜸으로 손꼽고 있다.

'인'은 참는다는 뜻을 지닌 한자지만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차원 높은 '마음공부'로 승화돼야 한다는 것이 '대도'의 가르침이다.

한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인'을 추구하는 법륜공 수련자들이 참지 못하고 집단시위를 벌임으로써 급기야 중국당국의 불법화 철퇴를 맞았다.
물론 법륜공의 시위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려 1억 명에 달할 정도로 수련자가 엄칭나게 늘어난 것이 정치적 파장으로 귀결된 셈이다.

이홍지는 1995년이래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이미 그때 중국 기공과학연구회도 탈퇴했고 법륜대법연구회의 독자성을 대내외적으로 선언했다.

주화입마(1)

수련하는 사람이 가장 피해야 할 것이 이른바 '주화입마'이다. '주화입마'란 결국 수련을 올바로 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수련하는 사람이 '주화입마'에 빠지면 수련을 차라리 하지 않았던 것보다 못한 결과가 되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옛 문헌에 보면 "주화란 연공의 방법이 잘못돼 몸 안의 기가 순환이 안 되던가 난조를 이루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 '입마'는 "연공하는 가운데 이환작진, 즉 환각을 진짜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입마'는 심한 경우 정신착란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주화입마'를 오늘날 중국 기공에서는 편차라고 부른다. '편차'란 "수치나 위치, 방향 등이 일정한 기준에서 빗나감"을 뜻하는 과학적인 용어라고 일컬어진다. 이런 용어는 기공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반 위에 세우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생겨난 말로 볼 수 있다.

'주화입마'가 생기게 되면 서둘러 이를 극복하던가 치유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대충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련을 지도하는 사범이나 스승으로부터 교정을 받는 일이다. 경험이 많고 공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화입마'를 어렵지 않게 치유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주화입마'가 잘못된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처럼 심각한 일도 없다.

그런 사범이나 스승에겐 '주화입마'가 오히려 돈벌이(?)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화입마'를 제 노력으로 극복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수련방법이 올바른 것이고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만약 수련방법이 올바른 것이라면 절대로 '주화입마'란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화입마'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경우는 대개 수련의 기본원칙을 충실하게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린 데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고 원칙으로 회귀하는 것이 바른 치유방법이다.

'주화입마'가 심한 경우엔 일시적으로 수련을 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주화입마(2)

주화입마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이른바 태산압정이 손꼽힌다. 태산압정이란 태산같은 큰산이 머리의 정수리를 누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정수리에 위치한 백회혈을 중심으로 무엇인가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 태산압정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머리가 무거워져 수련을 제대로 할 수 없을뿐더러 일상생활에도 막대한 지장을 받는다.

태산압정이 일어나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욕심이 지나쳐 의식적으로 기감을 느끼고자 애씀으로써 기가 머릿골로 상승하는 경우다.

둘째, 경락의 정상적인 흐름이나 법칙에 반해 기를 잘못 돌림으로써 정수리에 기의 정체가 일어나는 경우다. 특히 이 경우는 수련에 갓 입문한 사람이 소주천을 한다고 기를 억지로 돌리려고 할 때 흔히 일어난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소주천은 기가 임독맥을 순환하는 단순한 느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요한 기혈을 숨쉬기로 하나씩 개혈 하면서 순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때의 개혈을 선도에선 규혈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침구학의 혈자리와 구분된다.

아무튼 수련자들은 소주천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바른 수련으로 착실하게 기초를 닦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대개 수련을 통해 기감을 느끼면 남보다 빠르게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덤비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지고 머리의 통증을 호소해 오곤 한다. 머리로 기가 올라가거나 성급한 소주천행공으로 두중 또는 두통이 일어나면 그것은 곧 수련이 잘못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때의 교정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기를 의식적으로 아래로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기란 마음이 가는 곳으로 움직이므로 하단전으로 의식을 집중시키면 내려가게 마련이다.

만약 이렇게 해도 쉽사리 내려가지 않는다면 발밑의 용천혈로 의식을 집중시키도록 해야 한다. 특히 심할 때는 손으로 발밑의 족심, 즉 용천혈을 마찰하면서 기를 발밑으로 뺀다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두통이 심하게 와서 못 견딜 지경이면 즉시 수련을 중지하고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켜야 한다. 이때 두 손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가볍게 두들겨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주화입마(3)

'주화입마'에 빠지기 쉬운 사람으론 대개 세 타입을 꼽는다.

첫째는 몸이 허약하거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신체조건과 병의 증상에 따라 알맞은 수련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덮어놓고 수련에 임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만약 그 수련방법이 몸에 맞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더욱 건강을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병약한 사람은 공력이 높은 사범의 지도 아래 확실한 프로그램을 갖고 수련해야 한다. 일시적인 호기심으로 수련하던가 한탕주의로 건강회복을 꾀해서는 안된다.

둘째는 이른바 기감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다. 호흡수련을 한참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몸에 진동이 일어난다. 이런 진동이 일어나면 어떤 희열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기감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진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식적으로 강한 진동을 일으켜 더욱 큰 만족감을 얻으려고 한다.

이것은 스스로 '주화입마'에 빠져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찬가지로 수련 중에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춤사위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지나친 춤추기는 결과적으로 주화입마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열감을 추구하다가 단전이나 회음 또는 몸 전체가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는 수도 있다. 이런 현상도 역시 맹목적인 기감 추구에서 일어난다.

셋째는 수련을 기계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수련은 호흡과 몸동작을 잘 맞춰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기계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자연스러움과 유연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기계처럼 딱딱하게 수련하여 온몸이 굳은 상태가 된다면 그것처럼 심각한 일도 없다. 수련이란 모름지기 몸의 긴장을 풀고 이완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몸 전체가 이완되어야 하는데도 신체의 어떤 부분에 의식이 집중돼 그 부분에 긴장이 가중되어 딱딱해지는 수도 있다. 이런 현상도 주화입마에 빠져드는 증거라고 일컬어진다.

어떤 경우든 간에 '주화입마'란 원칙과 금기를 어기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가령 수련한 뒤 몸의 땀을 씻으려고 냉수로 샤워하는 것은 절대 금기에 속한다. 이것을 어기면 심각한 중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

혀의 위치

수련할 때 혀의 위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이에 대한 해답은 두 갈래다.

하나는 혀끝을 입천장에 밀착시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숨을 뱉을 때는 혀끝을 아랫니 쪽에 붙이고 들이쉴 때는 입천장에 붙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가운데 어떤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수련방법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가령 토납법에선 호흡에 따라 혀끝을 위아래로 움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흡 관련 교과서에선 혀끝을 입천장에 붙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혀의 위치에 대한 이런 지침은 혀가 수련에서 차지하는 세 가지 기능과 연관된다.

첫째의 기능은 잡념을 배제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수련할 때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러 방도가 강구된다. 의식을 호흡에 맞춘다던가 신체의 어떤 부분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 등은 그 한 가닥이다.

여기에 혀끝을 호흡에 맞추어 위아래로 움직인다던가 혀끝을 고착시키는 데 의식을 집중하면 잡념을 배제할 수 있다. 혀끝에 대한 의식의 집중은 이른바 입정에 더욱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해 주기도 한다.

둘째는 침의 분비가 왕성해진다는 것이다. 혀끝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경우 또는 혀끝을 입천장에 붙이는 경우 침이 풍부하게 샘솟는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선도에선 이런 침의 분비를 매우 중요시한다. 침을 일컬어 금진옥액이라고 할 정도다. 이때의 침은 달콤한 맛이 날수록 건강과 수련의 진도가 보장되는 법이다.

셋째는 이른바 소주천과 혀의 작용이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점이다.

소주천이란 기의 흐름이 몸의 등줄기인 독맥과 앞줄기인 임맥을 순환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때 임맥과 독맥의 연결고리를 이루는 것이 다름 아닌 혀, 다시 말해서 혀끝을 입천장에 붙임으로써 입천장 쪽에서 끝나는 독맥이 임맥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옛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천교 또는 작교라고 했다. 천교란 하늘 기운을 잇는 다리라는 뜻이고, 작교란 칠석의 오작교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혀로 하늘 기운을 연결하는 비전의 방법은 혀끝으로 입천장을 위아래로 살짝 자극하여 생기는 민감한 반응점에 혀끝을 밀착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화후

수련을 하다 보면 누구나 이른바 '화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화후의 사전적인 의미엔 세 가지 풀이가 있다.

첫째는 불의 심지를 크게 하거나 작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단약을 제련하는 것이고,
셋째는 학문과 수양을 쌓는 것이 그것이다.

화후의 세 가지 뜻은 넓은 의미로 수련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말한다면 화후의 참뜻은 단약을 제련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선인들은 단약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다. 외단과 내단이 그것이다. 외단이란 이른바 불로장생의 약을 몸밖에서 만드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내단이란 그것을 몸 안에서 찾는 것을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내단술에서 말하는 단약은 몸 안의 내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단약을 제련하기 위해선 불과 바람이 중요하다고 강조된다.

수련할 때의 '불'은 의식 또는 의념을 말하는 것이고, 바람은 호흡을 뜻한다. 불과 바람의 관계는 외단술에서 단약 제련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그렇기 때문에 옛 선인들은 단약을 만드는 용광로의 풀무질을 비법 중의 비법으로 숨겼다.

이 점은 내단술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내단술에선 사람 몸을 용광로로 보고, 거기에 의식(불)과 호흡(바람)으로 풀무질을 하여 단약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불을 얼마나 강하게 또는 약하게 지피고, 바람을 그에 맞추어 어떻게 불어넣느냐를 가름하는 것이 다름아닌 화후의 방법이다.

이것은 의식 또는 의념과 호흡을 어떻게 배합하고 조종하느냐에 따라 선도수련의 진경이 판가름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도 남는다.

옛 글에 보면, "성인전약불전화"라고 했다. 풀이하면, 성인같이 훌륭한 도인도 '약'은 전할지언정 '화'는 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약'은 수련방법 또는 경전을 말하는 것이고, '화'는 화후를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인들은 경전과 수련방법은 가르쳐 주지만 비법 중의 비법인 화후의 방법은 숨겼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옛이야기일 뿐이다. 이제는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서 비법의 베일이 벗겨지는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바른 마음으로 바른 수련을 배운다면 누구든지 화후의 문제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천목

수련이 진척을 이루면 이른바 '천목'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천목이란 영안을 뜻하는 것인데, 흔히 제3의 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육신의 두 눈 이외에 뇌 속에 또 하나의 눈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천목의 실재 여부는 현대과학의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뇌 속에 있는 송과체의 앞부분이 눈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여기에 어떤 자극을 주면 물체를 투시할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긴다는 것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송과체에 어떤 자극을 주는 방법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로 모색되어 왔다. 가령 티베트 불교에서는 천목을 개안하는 방법으로 이마의 천목혈에 특수금속으로 제조된 아주 가늘고 날카로운 장침을 꽃아 송과체를 자극했다.

달라이 라마의 영안도 이렇게 해서 개안했다고 전해진 바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큰 스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우리 나라의 전통선도에선 티베트 불교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방법을 모색해 왔다. 천목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열리는 것이 아니라 선천 기, 즉 하늘 기운에 의해 열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선천의 기와 대칭되는 개념은 후천의 기인데, 호흡함으로써 얻어지는 기운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목이란 후천의 기만으로는 결코 열릴 수 없으며, 선천의 기를 운용할 줄 알 때 비로소 열리게 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비록 선천의 기를 운용할 줄 알더라도 정작 천목을 스스로 힘으로 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천목혈의 위치뿐만 아니라 송과체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명확한 개념 파악이 선결 과제다. 여기에 더하여 심성과 덕성을 갖추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다.

물론 천목의 개혈은 이른바 명사의 지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여기서 명사란 달마조사와 그 후계자를 포괄하는 고승을 지칭한다.

달마조사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해서 직접 손으로 사람의 천심, 즉 천목을 열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비법을 전한 바 있다.

천목은 어떤 경우든 간에 수련자의 욕심대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욕심이 클수록 앞이 캄캄할 뿐이다. 무욕으로 이타와 홍익할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

황정

뇌 속에 있는 이른바 송과체를 전통선도에선 '황정'이라고 불렀다. '황정'에서 '황'은 가운데 자리의 노른자위 색, 즉 황색을 뜻하고, '정'은 사방의 한가운데를 뜻한다. 머릿골 한가운데의 가장 귀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옛 선인들은 선도수련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할 책으로 (황정경)을 손꼽았다. '황정경'을 모르고는 이른바 상승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고 했다. '황정경'은 '비문' 또는 '금서'라고 여길 정도였다.

(황정외경경) 첫머리에 보면, "상유황정 하관원"이란 말이 나온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위에 황정이 있고 아래에 관원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황정'은 머릿골 속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고, '관원'은 하단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황정과 하단전이 선도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심지어는 '황정'이 곧 '상단전'이고 진단전이라고 쓰여 있는 선도의 비서도 있다.

여기서 '진단전'은 바로 가짜 단전의 존재를 일컫는다. 진짜 단전을 모르고는 천목, 즉 '제3의 눈'이나 '개오',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선도에선 머릿골 수련을 포괄적으로 '구궁수련'이라고도 부른다. '구궁'이란 구중궁궐처럼 깊숙하고 오묘한 곳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머리의 내부구조가 9개의 궁으로 이루어졌다는 선인들의 인식을 드러낸다.

구궁의 구체적 풀이를 보자.

'현관'이라고 일컬어지는 입구는 '현묘'에 이르는 관규의 준말이다. 현관의 위치는 두 눈썹 사이이다. 이곳에서 한치 들어간 곳을 명당궁이라고 부르며, 두치 들어간 곳을 동방궁, 세치 들어간 곳을 단전궁이라고 부른다. 네치 들어간 곳은 유주궁, 다섯치 들어간 곳은 옥제궁이다.

명당궁 위의 한치 자리를 천정궁, 동방궁 위 한치를 극진궁, 단전궁 위의 한치 위치를 현단궁, 유주궁 위의 한치는 태황궁이다. 여기서 단전궁의 위치는 바로 머리 정수리의 백회와 현관을 잇는 한가운데로 이곳을 중심으로 해 '구궁'을 명확하게 아는 것만이 수련의 지름길이다.

관천법

달마대사의 최상승법을 일컬어 관천법이라고 한다. 관천이란 '하늘을 뚫다'는 뜻인데, 하늘의 기운이 사람의 기운과 하나로 합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관천 또는 관천법을 안다는 것은 곧 견성 성불의 현관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관천법은 도맥의 핵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이천세계의 경계에 들어섰음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관천법을 도맥의 핵심이라고 하는 까닭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법을 모르고는 절대로 깨달음이나 해탈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이 법은 석가모니 부처에서 비롯된 이심전심의 정맥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달마대사의 관천법은 하나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출발점이다. 달마대사는 일찍이 하나는 무극 가운데 한 점인 영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가 전한 진경중의 진경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 하나는 동녘 땅에서 비롯된 것으로 만물은 모두 이것에서 생성된다고 밝혔다. 나아가 삼계는 하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갈파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이치 또는 하나의 깨달음은 (천부경)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부경)은 일시무시와 일종무종이 모두 하나임을 깨우쳐 준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천부경을 제대로 풀이한 책이 흔치 않다는 사실이다.
풀이는커녕 (천부경)을 읽는 방법조차도 올바로 가르쳐 주고 있는 곳이 드물다. 이런 사실은 결국 수많은 수련자들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심각한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말해 주고도 남는다.

달마대사는 단순한 동방선종의 개조가 아니다. 선과 선, 그리고 도와 불을 하나로 묶은 도맥을 이어받아 전한 큰 스승이다.

뿐만 아니라 동방에서 비롯한 하나의 도맥을 다시 동쪽으로 회귀시켜 도반을 굳게 한 역사적 존재이다.

바로 그 하나의 도맥은 관천법을 말하는 것이고, 그 하나의 연원은 다름 아닌 (천부경)이다.

달마의 한자표기는 달마라고도 쓰인다. 마로 쓸 때는 역사적 실재 인물의 뜻이며, 마의 표기는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식법

기수련의 호흡법과 관련해서 적지 않은 오해와 착각이 있음을 보게 된다. 가령 좌선이 건강에 좋은 까닭은 앉아서 심호흡을 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설명한다.

좌선을 통해 많은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한껏 토해 내는 것이 신진대사를 촉진하기 때문에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단전호흡이나 복식호흡을 할 때 횡격막의 움직임이 커지기 때문에 폐활량이 커지고 그에 따라 산소의 흡입과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원활해져 신진대사를 촉진해 건강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물론 호흡의 건강효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앞에 말한 두 가지 설명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심호흡, 횡격막 그리고 폐활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구태여 기수련이나 좌선을 할 필요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건물의 층계를 1층부터 10층까지 뛰어올라 가는 쪽이 횡격막이나 폐활량, 나아가서 심호흡에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에어로빅 같은 유산소운동을 하는 쪽이 신진대사를 훨씬 촉진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논리를 전개하다 보면 일반적인 스포츠와 기수련의 차이가 무엇인지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수련의 호흡법은 스포츠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신진대사의 속도라는 측면에서 말한다면 기수련의 호흡법은 어떤 스포츠보다도 촉진속도가 느리다.

평소 호흡보다도 더 느린 것이 기수련의 호흡법이다. 호흡을 가다듬어 길고 느리고 가늘게 하면 심박수는 완만하게 되게 마련이다.

이른바 입정 상태에서 신체의 산소 소비량은 잠잘 때보다도 적은 것으로 측정됐을 정도다. 이것은 기수련의 호흡법이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스포츠에선 몸 안의 에너지 연소 촉진에 목적을 두는 반면 기수련에선 그것을 절약하고 축적하여 수명을 연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선 흔히 치타가 가장 빠르고, 거북은 가장 느린 것으로 손꼽힌다. 거북은 장수의 상징물이지만 치타는 그렇지 못하다.

일반적인 스포츠가 치타적인 것이라면 기수련은 거북을 겨냥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선이나 기수련의 수행자는 스스로 거북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구식법은 불로장수법의 으뜸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종식법

구식법에 대해 독자문의가 적지 않았다. 구식법이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거북 시늉으로 숨쉬기를 하는 공법이다. 이 공법은 우선 정좌와 정식이 기본이다.

조용히 앉아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한 호흡으로 시작해야 한다. 정좌에서 숨을 뱉으면서 이마가 땅에 닿도록 완전히 몸을 숙이고 끝까지 토해낸다.

그 다음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숨을 들이마신다. 이때 마치 거북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고개를 쳐들어 끝까지 숨을 들이마시고 처음의 자세로 돌아온다.

이어서 입안의 혀를 돌리면 자연히 침이 샘솟게 되는데 이것을 천천히 마신다. 이때 의식은 단전에 두도록 한다. 이를 반복하는 것이 구식법의 요령이다.

구식법은 상반신을 수그릴 때나 바로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느리게 하면서 동작에 호흡을 맞춰야 한다. 동물 중에 가장 느리고 긴 호흡을 하는 거북이 무병 장수하듯 사람도 그런 동작의 일치가 있어야만 오래 산다는 것이 옛 선인들의 생각이었다.

선도에선 숨쉬기를 가장 길게 하는 이를 일컬어 진인이라고 한다. (장자)에 보면 가장 긴 숨을 쉬는 방법으로 종식을 손꼽고 그것은 진인의 호흡법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진인과 대칭되는 개념은 이른바 중인이다. 중인은 후식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장자는 지적했다.

여기서 종식이란 발뒤꿈치로 호흡한다는 뜻이고, 후식이란 목구멍으로 호흡한다는 뜻이 다.

발뒤꿈치로 숨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첫째로 구식법보다 더 긴 숨쉬기를 상징한다.

폐호흡보다 아랫배 단전으로 숨 기운을 내림으로써 긴 호흡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것을 발뒤꿈치까지 내리면 호흡이 최대로 길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로 발뒤꿈치로 호흡하는 것은 곧 코로 숨쉬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처럼 숨을 쉰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 전통선도에선 도를 일컬어 종음이라고 했다. 발뒤꿈치의 소리라는 뜻이다.

종음을 들을 줄 알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불가에서 도명을 세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종식과 대칭되는 후식은 짧은 숨쉬기를 나타내는 말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숨은 빠르고 짧게 마련이다. 이것을 길고 느린 호흡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기의 건강법이다.

약해진 우뇌

이른바 컴퓨터 혁명은 생활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컴퓨터 혁명은 기본적으로 좌뇌 혁명의 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컴퓨터는 우리들의 추상적인 논리와 사고 능력을 엄청나게 넓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컴퓨터는 좌뇌가 하는 일을 상상할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처리해 주기 때문에 좌뇌 혁명을 가속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지나치게 좌뇌 혁명 쪽으로 편향돼 생기는 문제도 적지 않다. 우선 컴퓨터가 인간의 우뇌기능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른바 '우뇌 혁명'이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뇌가 지닌 직관성과 창조성의 기능을 최대로 활성화시켜 좌뇌와 균형을 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만약 일상적인 업무나 쉬운 사고 패턴마저 컴퓨터에게 넘겨 버리면 인간의 우뇌는 위축되기 십상이다. 그럴 경우 궁극에는 타고난 인간성이 상실될까 염려스럽다.

우뇌 혁명을 일으켜 좌뇌와 우뇌의 균형을 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호흡법과 명상법을 결합한 일련의 기수련 이외에서는 찾을 길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우뇌 혁명은 컴퓨터 시대의 건강법을 가름하는 핵심인 셈이다.

또 하나, 요즘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깨와 목이 뻣뻣하게 굳는다고 호소한다. 심지어는 두통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흔히들 이를 직업병의 하나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그러나 기의 세계에서 보면 이것은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첫째, 컴퓨터 앞에서 작업할 때 앉는 자세를 바르게 해야한다.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척추와 골반에 이상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건강장애의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릴 때 손과 손가락의 중심이 바르게 놓여야 한다. 무게의 중심은 손바닥과 손가락의 아래쪽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게의 중심이 위에 있어 그것이 어깨와 목으로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셋째, 이른바 전자파에 대한 마이너스 인식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호흡수련을 통해 기의 흐름을 운용할 줄 알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감기 다스리기

바른 호흡법을 익히면 쉽사리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설령 감기에 걸렸더라도 금세 낫는다.

감기를 다스리는 호흡법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 코로 숨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 숨을 들이쉰다.

특히 감기에 자주 걸리는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일을 하던가, 잠잘 때 입을 벌리고 자는 수가 많다. 심지어는 걸을 때도 입을 벌리고 걷는다.

옛말에 '입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 말의 참뜻은 입으로 숨을
쉼으로써 병에 걸리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흡기관은 코이지 입이 아니다.

둘째, 편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앉거나 눕거나 간에 편안한 자세가 호흡법보다

먼저다. 사실 자세가 편치 못하면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렵다. 숨쉬기로 감기를 다스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숨을 천천히 들이쉰 다음 될 수 있는 데로 숨을 오래 멈추도록 한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숨을 오래 참아서는 안된다. 그런 다음 천천히 숨을 뱉고 이어서 바로 들이쉬고 다시 멈춘 다음 뱉도록 한다. 흡-지-토의 순서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호흡을 20회 정도 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를 끝낸 다음 잠시 정상적인 숨쉬기를 하다가 이번엔 반대의 호흡을 20회 정도 한다. 먼저 숨을 뱉고 멈춘 다음 들이쉬는 호흡법이다. 토-지-흡의 순서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호흡법을 끝낸 후 마음과 몸을 편하게 한 채 한동안 기다린다. 여기서 '한동안의 기다림'이란 종전에 했던 호흡법을 다시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뜻이다.

충동이 일어나면 두 가지 호흡법 가운데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호흡법을 하면 된다.

다시 시작한 호흡법이 끝나면 또 충동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충동이 일어나면 호흡법을 되풀이하는 젓이다.

이렇게 하다가 보면 어느덧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가 감기가 떨어져 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처음 20회씩의 호흡법을 한 다음 아무리 기다려도 충동이 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호흡법으로 감기가 다스려졌음을 일러주는 것이다.

여단전

선도의 고전을 읽다 보면 자주 '정', '정기', '정로'라는 낱말이 나온다. 정은 솥을, 정기는 가마솥, 정로는 화로를 말한다.

선도수련에서 '정' 이란 글자가 등장하는 까닭은 이른바 성단의 과정을 밥짓기와 같다고 보는 데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수련은 의식과 숨기운으로 불을 지펴 뜸을 들이는 과정이라는 이야기이다.

전통선도에서 '정'이라고 하면 으레 '삼정(세개의 가마솥)'을 포괄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사람 몸에 세 개의 가마솥, 즉 뜨거워지는 부위가 세 곳이나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삼전과 같은 것으로 풀이한 책도 적지 않다. 삼전은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의 약칭이다.

그러나 삼정과 삼전을 똑같다고 보다간 낭패 보기 쉽다. 특히 여자의 경우는 삼전과 삼정의 위치가 남자와 전혀 다르다. 남자의 경우 '삼전=삼정'이란 등식이 성립될 수 있지만 여자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그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남녀의 이른바 음양의 차이,
둘째 남녀간의 신체구조의 차이다. 삼정은 대개 상중하로 나뉜다.
여자의 상정은 두 젖꼭지의 중간 지점이다. 중정은 배꼽 밑에 위치하고, 하정은 자궁 자리이다.

하정은 대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자궁이 다른 '정', 즉 상정이나 중정보다 크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여자의 상정은 남자의 단중의 위치에 해당한다.

중정은 남자의 하단전 자리이다. 여자의 하단전은 자궁 그 자체이다. 이것은 결국 여자의 단전의 위치가 남자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준다.

흔히 단전이라고 하면 마치 하단전이 대표성을 지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다. 여자의 경우 단전의 대표성은 상정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의 상정은 여단전이라고 정의된다. 여단전의 정확한 위치는 이른바 단중혈 안쪽 한치 세푼이다. 여단전은 그곳에 지름 한치 두푼의 둥근 원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전통선도에서는 이 자리를 여자의 중심점으로 본다. 바로 이런 차이 때문에 수련과정에서 여자는 뜨거운 기운을 먼저 가슴에서 느끼게 되고, 남자는 아랫배에서 느끼게 된다.

여자의 수련방법에 세심한 배려와 차별화가 있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활자시

'자시' 수련 또는 '활자시'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자시란 오후 11시~오전 1시를 가리킨다.

한데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나라의 본래 표준시로 셈한 자시는 23시 30분부터 1시 30분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표준시간은 1960년대 이후 일본 표준시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선도 지침서에서 자시 수련을 하라는 뜻은 두 갈래로 풀이된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자정에 일어나 수련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시는 음극양생, 즉 천기가 음에서 양으로 시동하는 때이기 때문에 여기에 맞추어 수련하면 몸 안의 양기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자시 수련에 관한 풀이는 시간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이다. 사람 몸통의 주요 규혈을 12지지로 구분하여 하단전 또는 회음을 자시로 하고. 머리 정수리에 있는 니환을 오시로 규정하여 수련하는 방법 가운데 한 가닥이라는 설명이다.

이때 하단전에 뜨거운 기운이 발생하면 그것이 바로 자시 수련의 시발을 알리는 것이며, 그 기운을 12지지에 맞추어 한 바퀴 돌림으로써 이른바 소주천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활자시'는 흔히 자시를 활용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활'은 본디 '생기가 있다'는 뜻이다. 전통선도에서는 남자의 양물이 발기하는 것을 활이라고 하며 그 시점을 활자시라고 일컫는다.

남자는 36세까지는 자시에 양기가 동한다고 한다. 그리고 37 ~ 54세는 축시(오전 1시30분 ~ 3시30분)에, 55세 이후는 인시(오전 3시30분 ~ 5시 30분)에 양기가 동한다고 한다.

만약 인시에도 양물이 발기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급격하게 건강이 쇠퇴해 수명이 짧아지는 조짐이 나타난다고 한다.

양기가 생기는 시점은 그것이 어느 때든 간에 활자시로 파악하고 수련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 조사들의 가르침이다.

이런 뜻에서 활자시란 성욕 없이 양물이 발기하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수련 방법은 들숨일 때 항문을 오므리면서 하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면 된다.

여자의 경우는 '여단 활자시'라고 해서 생리주기에 맞추어 수련해야 한다고 (곤원경)에 쓰여 있다. 여자의 몸 안에서 생기는 양기는 혈해에서 비롯되며, 이 양기가 생기는 시점이 여자 성단의 활자시라고 규정하고 있다.

좌망과 심제법

장자의 숨쉬기를 말할 땐 으레 종식법을 들먹인다. 그러나 (장자)를 읽어보면 종식법 외에 두 가지의 조식법이 쓰여 있다. 좌망법과 심제법이 그것으로 이는 종식법을 능가하는 최상승의 공법에 속한다고 일컬어지고 있을 정도다.

한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장자는 좌망법과 심제법을 말하면서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의 대화를 예증으로 삼고 있다. 이 대화는 실제로 있었다기보다 장자의 상상력으로 실화처럼 꾸민 것으로 말해진다.

어느 날 안회가 공자에게 "스승님 드디어 좌망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좌망이 무엇인데?"라고 반문했다. 안회가 대답했다. "자기의 지체를 잊고, 생각을 멈추고, 현실적인 존재감이 없어지고 도에 융합하여 일체가 된 것, 그것이 바로 좌망입니다."

이런 안회의 대답은 좌공의 수행 방법과 경지를 말해 준다. 몸을 바르게 하고 조용히 앉아 숨을 고르는 것이 좌공의 기본이다. 이때 잡념을 완전히 없애 이른바 입정 상태가 되지 않고는 좌망의 경지를 이룰 수 없다.

심제법의 설명은 안회가 공자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안회가 "심제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리고 청식법을 행하여 숨소리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나아가서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로 들어야 한다. 귀로도 듣지 않고 마음으로도 듣지 않도록 생각을 멈추면 허의 상태가 된다. 기라는 것은 허의 상태에서만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도는 허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바로 그 허가 심제이니라."

이런 공자의 대답으로 미루어 심제법은 좌망법보다 한 단계 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망이 아니고서는 심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심제의 수행 방법은 세 단계다.
첫 단계는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식으로 들어가는 것,
둘째는 청식법으로 숨소리를 마음으로 듣는 것인데,
이 단계에선 반드시 일정기간(1개월 ~ 3개월)의 수련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진전을 이루면 마음 아닌 기로 숨소리를 듣는
셋째 단계의 수행으로 들어간다.
기로 듣는다는 것은 청각과 생각이 멈추는 느낌에 휩싸이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지식과 폐식

어느 정도 기수련의 진경을 이루면 이른바 지식과 폐식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지식'이라고 하면 으레 '숨을 멈추는 것'으로 풀이한다. 마찬가지로 '폐식'도 '지식'과 같은 차원에서 '숨을 끊는 것'으로 풀이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런 풀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잘못된 개념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수련상의 폐해는 심각한 실정이다.

'지식'은 숨을 멈추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가늘게 이어지는 호흡 상태로 파악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식'은 유식 또는 유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유식, 유기는 '숨이 머문다'는 뜻이다. 숨이 '멈춘다'는 것과 '머문다는 것은 말의 뉘앙스 차이 이상으로 오묘하다.

'지식'의 정확한 뜻은 숨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숨과 숨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신이 멈추는 것이다.

전통선도에선 지의 참뜻을 마음의 눈이 멈추는 곳으로 풀이한다. 불가에서 '지'를 선정의 뜻으로 풀이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폐식'은 '폐기'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결코 숨을 멈추거나 끊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수련으로 입정에 들어간 후의 호흡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호흡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수련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폐기 또는 폐식은 호흡의 경지를 일컫는다.

이런 경지에 접어들게 되면 단전이 기로 가득 찬 느낌이 들면서 숨쉬는 것조차 잊게 되는 법이다.

조선조 우리 나라 단학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정북창의 (용호비결)에 보면 '폐기'가 수련의 목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용호비결)에서 '용'은 원신을 뜻하는 것이고, '호'는 원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용'은 물을 표상하고 '호'는 불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런 뜻에서 (용호비결)이란 물과 불의 상승작용으로 귀결되는 선도수련의 본질을 표방하고 있는 셈이다.

정북창은 '폐기'를 '복기' 또는 '누기''와 같은 뜻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복기'란 단전에 기를 모은다는 뜻이고, '누기'란 원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는 뜻이다.

보통사람과 성인 내지 선인의 구분은 폐기=복기=누기가 됐느냐의 여부에서 판가름난다고 (용호비결)은 적고 있다.

호주흡종

정북창의 (용호비결)은 이른바 폐기의 설명에 이어 태식과 주천화후를 풀이한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태식'은 태아의 숨쉬기를 말하는 것이다. 태아는 어머니 뱃속에서 입이나 코로 호흡하지 않고 탯줄에 연결하여 숨 기운을 받는다. 이때의 숨 기운을 흔히 진기라고 일컫는다.

태아가 세상에 태어나 탯줄이 끊어지면 비로소 호흡을 한다. 태아는 첫 울음으로 숨을 뱉으면서 폐 속에 고여 있던 양수를 토해 낸다고 한다. 이때의 뱉는 숨이 바로 호이다. '호흡'이라는 낱말에서 '호'가 앞에 나오는 까닭이다.

따라서 '호'는 삶을 상징하는 것이며 음양의 '양'에 속한다.
이에 반해 들숨인 흡은 '음'에 속하고 이른바 '죽음'을 상징한다. 사람이 삶을 마감할 때는 '흡'으로 숨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호흡수련 내지 기수련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 반드시 뱉는 숨부터 수련을 시작하고 들이쉬는 숨으로 갈무리해야 한다. 옛 선인들은 이 원칙을 호주흡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용호비결)은 태식하던 태아가 세상에 나와서 호흡에 들어가면 차츰 진기가 소모되기 때문에 귀근복명의 길을 터득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귀근복명'이란 호흡의 근본인 태식으로 되돌려 명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일찍이 노자는 진인을 정의하여 '비무출입 기식심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코로 숨쉬지 않는데도 숨을 깊게 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숨쉬기란 태식 이외에서는 찾을 길이 없다. 태식은 진기를 보장하는 진식인 셈이다.

태식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까?

태아의 태식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무의식의 호흡으로 선천의 호흡이다. 코나 입으로 숨쉬는 것은 후천의 호흡이다. 의식을 한곳에 모으는 이른바 의념의 호흡수련은 의식적인 호흡이다. 한데 후천호흡이나 의념호흡으론 아무리 해도 태식이 이루질 수 없다.

흔히 단전호흡이란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참뜻의 단전호흡은 단전마저 잊어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폐기한 상태에서 호흡이 머무는 곳이 바로 단전이다. 이때 단전에서는 진기가 태동하여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고 이어서 진기의 주천이 시작된다.

벽곡

선도수련에서 제기되는 문제의 하나는 이른바 '벽곡'이다. 전통선도에선 벽곡을 두 갈래로 풀이하고 있다.

하나는 곡식을 안 먹고 솔잎, 대추, 밤 등을 조금씩 먹고사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절식을 말하는 것이다. 전자의 풀이는 생식과 관련이 있고 후자의 풀이는 단식과 관련 이 있다.

(용호비결)에 보면 달마가 9년 동안이나 면벽할 수 있었던 것은 벽곡과 태식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태식법은 모태를 통한 숨쉬기를 말하는 것인데 선천의 진기를 호흡하는 폐기의 경지에 이르면 절로 이루어진다.

달마가 벽곡과 태식을 함께 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벽곡은 단식을 하든 안하든 간에 일상적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인데, 그 결과 음식에서 얻는 기가 자연히 줄어들게 된다. 그 부족분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건강이나 수련에서 큰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태식법을 통해서 진기를 흡수할 능력이 생기면 벽곡=절식=단식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실제로 선도수련의 진전이 이루어지면 음식 섭취의 양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숨쉬기를 통해 '진기'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는 세끼 음식을 먹는 것은 짐승의 식사법이고 두끼 음식은 사람의 식사법 그리고 한끼 음식은 신선의 식사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일일식을 평생토록 했다.

(용호비결)에서 정북창은 숨 공부가 숙달되면 현빈일규를 얻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태식하고 화후주천도 이루어진다고 했다. 여기서 현빈일규란 하단전의 한 구멍, 즉 하단전을 강조한 말이다.

노자는 현빈을 일컬어 하늘과 땅이라고 했다. 단전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모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화후'라고 하면 흔히 불처럼 뜨거운 기운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화의 참뜻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나아가 신을 말하는 것이다. 후는 식, 즉 숨쉬기의 뜻이고 나아가 숨쉬기를 고른다고 풀이된다.

따라서 '화후'란 마음으로 숨을 고른다는 이야기이다. '주천'이란 숨기운을 운행하는 것을 말한다.


정심 호흡

선도에선 거짓 또는 거짓말을 만악의 근원으로 여긴다.
비단 선도뿐만 아니라 세상 만사에서도 거짓말은 악의 뿌리라고 일컬어진다. 이 세상 모든 악 중에서 거짓말이 으뜸이라고 손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호흡의 측면에서 보면 거짓말하는 사람은 바른 숨쉬기를 하지 못한다. 거짓말과 잘못된 숨쉬기는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이룬다. 따라서 어느 것이 먼저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이의 숨쉬기를 살피면 무엇이 먼저인지 짐작이 간다.

갓난아기의 숨쉬기는 아랫배 숨쉬기이다. 선천적으로 어머니 뱃속에서 익힌 호흡이다. 이것은 태식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기가 차차 커감에 따라 호흡의 부위가 올라가 폐호흡을 하게 된다. 어린이는 폐호흡을 시작할 때부터 거짓말을 하게 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선천호흡을 벗어나 후천호흡을 익힘으로써 세상의 거짓이 스며든다는 이야기다.

사람의 일생을 호흡 패턴으로 도식화하면 아랫배 숨쉬기에서 목구멍 숨쉬기로 수직선을 그릴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호흡이 최저점이라면 죽을 때의 숨쉬기는 최정점이 되는 셈이다. 사람이 죽을 때 목구멍으로 숨을 거두는 것은 호흡의 최정점이 곧 최후임을 상징한다.

숨쉬기와 거짓말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숨의 속도와 깊이에서 드러난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숨이 빠르고 얕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짓말을 하려고 머리를 굴리면 뇌파가 빠른 파장으로 변한다. 빠른 뇌파는 빠른 숨쉬기를 유발한다. 뿐만 아니라 빠른 숨쉬기는 얕은 숨쉬기가 아니면 충족될 수 없는 법이다.

이에 반해 거짓말과 거리가 먼 참 사람의 숨은 느리고 깊은 게 특징이다. 일찍이 장자는 진인의 호흡을 종식 즉 발뒤꿈치 숨쉬기라고 했다.
건강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병자의 숨은 빠르고 얕은 가파른 숨쉬기로 설명된다. 거짓말하는 것을 정신질환의 하나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의 설명이 가능하다. 환자가 건강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숨쉬기의 패턴을 바꾸어야만 한다.

선도에선 정심호흡을 매우 중시한다. 바른 마음과 바른 숨쉬기를 같은 차원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른 마음의 자리는 바른 자세, 바른 걸음걸이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거짓말하는 사람치고 자세를 바로하고 바른 걸음걸이를 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몸 자세는 마음 자리의 나타냄이다. 마음 자리는 호흡에서 가다듬어 지는 법이다. 바른 숨쉬기, 바른 마음, 바른 몸가짐은 한 틀이다.

해맞이 수련

새해의 해맞이, 떠오르는 태양 앞에 간절한 소망을 담는다. 이것을 누가 시켜서 하겠는가. 절로 그렇게 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하게 된다. 그것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전적 소인의 나타남이다.

우리 겨레의 전통선도에선 이른바 해맞이 의식을 중요한 수련법의 하나로 손꼽는다. 달맞이 수련과 북두칠성 수련을 합쳐 최상승의 3대 공법이라고 부른다.

해맞이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천부경)이다. (천부경)은 일시무시일, 즉 '하나의 비롯과 비롯 없음은 하나'라는 글귀로 시작해서 일종무종일, 즉 '하나의 마침과 마침 없음은 하나'라고 마무리 지은 81글자의 경전이다.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과 함께 천지인의 이치를 가르친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천부경)이 81글자로 되어 있는데 비해서 (도덕경)은 81가름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해맞이 수련과 '천부경'의 연관성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천부경)의 해독을 바로 하는 일이다. 읽기와 뜻풀이가 제대로 되지 않고선 올바른 수련이 기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천부경의 호흡법을 올바로 터득하는 일이다. 천부경 호흡법은 어떤 의미에서 단전호흡법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부경 호흡법의 요령은 글귀의 행간을 제대로 끊으면서 토식과 독송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셋째는 (천부경) 안에 해맞이 공법의 진수가 쓰여 있음을 바로 아는 일이다. 그 내용은 '본심본태양 앙명인중 천지일'이다. 여기서 '본심'은 천심의 뜻이다. '천심'은 조심 또는 도심으로 풀이된다.

'본태양'은 진화, 즉 원초적인 불덩이의 뜻이다. '앙명'은 회광내조, 즉 '진화'가 사람의 내면세계를 비춘다는 의미다. '인중'은 건천곤지의 '중극'을 일컫는 것인데, 중극은 다름아닌 기해, 곧 단전이다. 천지일은 이른바 천성지명이 귀일한즉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백두산의 큰 스승인 백봉신사는 일찍이 민족 고유의 해맞이 수련법을 비전한 바 있다.

그 수련법의 순서는 (1)해돋이 앞의 합장 (2)왼손을 단전 위에 댄다 (3)바른손의 엄지와 중지로 원을 만들고 검지로 중간선을 삼아 거기에서 생긴 반원을 통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4)천부경을 외운다 (5)입 안에 생긴 침을 햇빛과 버무려 삼킨다 (6)다시 합장하고 '앙명인중'한다.

기수련과 귀

도올 김용옥의 TV 노자 강의가 자못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난해한 '노자'를 대중적 인기로 몰고 간 도올의 탤런트도 탤런트려니와 그 인기 속에 어떤 시대적 변화의 용트림이 보인다.

한데 '노자'를 제대로 알려면 이른바 기 측면에서의 접근이 필수적이다. 우리 나라의 현대사상가 가운데 기사상을 아우르면서 '노자'를 완벽하게 풀이한 이는 다석 유영모였다. 다석은 '노자'를 '늙은이'라고 이름붙이고 (도덕경) 전문을 순 우리말로 엮어 냈다.

도올이 TV에서 '노자'를 공개 강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석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걸쳐 YMCA에서 공개 강의했다. 물론 그때는 TV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곳에서 청강한 이들은 함석헌을 필두로 재재다사였다.

다석은 '노자'를 강의하면서 조금도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기는 수련을 통해서 몸으로 터득하는 것이지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를 터득하면 기운을 쓸수록 더욱 기운이 왕성해진다. 강의나 설법을 하면 할수록 입안에시 침이 샘솟는다. 그 침을 일컬어 금진옥액이라고 한다. 다석의 입 속은 금진옥액으로 충만했다.

'노자'의 성은 이이고 이름은 이, 자는 담이다. 흔히 노자는 '노담'이라고도 불린다. 한데 노자의 이름이 귀를 뜻하는 한자인 '이'로 지어졌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자까지 귀를 뜻하는 '담'이 붙여졌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담'이라는 한자는 귀가 두툼하여 귓바퀴가 없을 정도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노자 귀의 생김새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선도의 세계에선 특히 귀를 중시한다. 성인이란 말에서 '성'이란 글자도 귀가 전제로 된다. 노자의 귀는 이름 그대로 성인을 상징하는 셈이다.

선도에서 귀를 중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귀가 선천성을 상징할 뿐더러 생명기능의 근원과 직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의 귀는 개나 고양이의 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물론 예외적인 사람도 있지만 그런 부동성은 유전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귀가 생명기능의 근원과 직결되는 것은 그것이 신장과 심장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호흡에 맞추어 귀를 매만지면 신장이 튼튼해지고 나아가 심장의 기능이 강화된다.

노자와 기
(노자) 81가름 가운데 이른바 기에 관한 언급은 세 대목뿐이다. 10가름의 전기치유, 42가름의 충기이위화, 55가름의 심사기왈강이 그것이다.
'전기치유'란 오로지 기를 모아 부드러움을 이끈다는 뜻이고, '충기이위화'는 텅 비어 있는 기운으로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풀이된다.

그리고 '심사기왈강'은 마음이 기를 부리는 것을 일컬어 억셈이라고 한다는 이야기이다.

노자라고 하면 대개 '기'의 비조쯤으로 여긴다. 그런데도 불과 세 대목밖에 '기'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다. 그러나 장자에 이르러서는 '기'에 대한 이야기가 무려 39차례나 나오고 '선'에 대한 뚜렷한 풀이가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노자를 무조건 '기'의 원조로 추앙하는 데는 문제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중국 사람들은 황로학이라고 해서 노자가 황제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나 '선도'는 황제와 노자가 큰 줄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흥의 (포박자)에 보면 황제가 동방 청구에 가서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얻고 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자부선생은 선계의 총부라고 지칭되고 있다. 우리의 전통선도에선 자부선생을 겨레의 큰 스승으로 섬긴다.

노자의 10가름은 어떤 의미에서 기수련을 포괄적으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백미를 이룬다. 10가름의 첫머리는 재영백포일능무리호로 되어 있다.
여기서 영백은 혼과 백을 뜻한다. 이 대목은 기수련의 출발이 혼백을 하나로 할 수 있느냐의 여부, 즉 심신통일의 여부에서 판가름난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그에 이은 대목이 '전기치유', '능영아호'이다.
오로지 숨쉬기를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심신통일 다음 단계의 태식을 말해 주는 셈이다.

이어서 척제현람이란 구절이 나온다. '현람'이란 마음을 뜻하고 '척제'는 닦아 냄을 뜻한다. 태식에 이어 마음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다음 단계가 '천문개합능위자호'이다.

'천문'은 상단전을 뜻하고 '천문개합'은 상단전 즉 천목이 열린 단계를 일컫는다.

'능위자호'의 '자'는 암컷의 뜻인데 '천문개합'과 이른바 방중술의 연관성을 시사해 준다.

장생구시

노자의 수행법의 하나로 흔히 '장생구시'가 손꼽힌다. '장생구시'란 (도덕경) 59가름에 나오는 대목이다. 다석 유영모는 이것을 풀어 '길이 살아 오래 보는 것'이라고 했다.

'길이 사는 것' 또는 '오래 사는 것'은 유사이래 인간이 희구해 왔던 바였다. 한데 '오래 보는 것' 즉 구시가 여기에 덧붙여진 까닭은 알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장생'을 결정하는 비밀의 열쇠는 '구시'하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시'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구시'란 눈을 깜박이지 않고 오래도록 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수련할 때 눈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매우 초보적이면서도 궁극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초심자는 으레 눈을 반개 하던가 또는 살짝 감으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눈을 뜨고 좌선에 임하라는 소리는 여간해서 듣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을 뜨고 좌선하는 단계는 그 자체가 매우 높은 경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달마가 면벽구년한 것은 눈을 감고 한 것이 아니라 '구시'를 한 것이었다. 이때의 '구시'는 '시이불시' 즉 '보아도 보지 않는 것'이요 '평시' 즉 '초점을 맞추지 않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풀이는 결국 '구시'가 우주와 하나되는 방법임을 일깨워 준다.

선경에 보면 '욕득장생 선수구시'라는 대목이 나온다. 오래 살기를 바라면 먼저 오래 보기부터 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세 가지를 손꼽고 있다.

첫째는 구시상전위신장생이다.
상단전을 구시하면 정기신 가운데서 '신'이 장생한다는 뜻이다.

둘째는 구시중전위기장생이다.
중단전을 구시하면 '기'가 장생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구시하전위형장생이다.
하단전을 구시하면 몸, 즉 '정'이 장생한다는 이야기다.

노자의 장생구시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사기)에는 노자가 1백60여 세 또는 2백여 세 살았다는 설과 함께 이것이 수도양생으로 말미암은 장생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무위수행법

노자사상의 에센스는 '무위이무불위'라고 일컬어진다. 서계 박세당은 이것을 풀어 '하는 것 이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한데 '무위'란 단순히 '함이 없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선도에선 '무위'를 풀이할 때 네 가지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이야기한다.

첫째는 '무욕'이다. '무욕'이란 욕심을 버림, 또는 욕심이 없음을 말한다.
둘째는 '부쟁'이다.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셋째는 '불추구'이다. 무리하게 무엇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넷째는 '순응자연'이다. 자연의 이치에 따른다는 뜻이다.

'무불위'는 '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하는데 '무위'와 대칭을 이룬다. 그러나 '무위'의 궁극적인 존재의의는 '무불위'에 있다고 풀이된다. 선도에선 '무불위'를 자연의 법칙, 즉 도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에 임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수행법으로서의 '무위'는 욕심내지 않고 남과 견주지 않으면서 무리 없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무불위'는 올바른 수행 방법에 따라 매일 정진하면 자연히 성과가 나타나 무엇이든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론 '무위'와 '무불위'는 수행 또는 수신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나 천하대사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한다.

가령 노자의 셋째 가름에선 '무위'의 다스림을 말하면서 '허기심'하고 '실기복'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음을 비우고 뱃속을 채우라는 뜻이다. 위정자가 마음을 비우고 백성들의 뱃속이 채워지면 그것이 올바른 정치라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한데 선도수련의 차원에서도 '허기심'과 '실기복'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수련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마음 비우기는 잡념을 없애고 욕심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과 상통한다.

'실기복'은 한마디로 기침단전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랫배 하단전이 기로 채워져아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기 위한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흡법이고 또 하나는 의념법이다. 호흡법은 숨 기운을 아랫배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의념법은 의식을 하단전에 둠으로써 내기가 그곳에 모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을 꾸준히 실천하면 절로 기가 아랫배에 가득 채워지고 건강장수의 길이 열린다고 한다.

수현법

노자전기에 보면 도덕경을 저술한 내력이 자못 신이스럽게 쓰여 있다. 청우를 탄 노자가 함곡관을 지날 때 그곳 관령 윤희가 간청하여 도덕경을 남겼다는 이야기다.

선도에선 노자와 '청우'의 관계를 매우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래로 검은 소를 '청우'라고 썼다. 검은색은 겨울과 북쪽,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흑우라는 말을 기피했다. 그 대신 봄과 동쪽을 상징하고 생명을 나타내는 '청'이란 글자를 선호했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이런 글자의 쓰임새를 풀이하면서 그것은 우리 겨레 고유사상의 한 가닥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오행사상의 뿌리도 우리의 옛 사상속에서 찾아진다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청우'란 말이 지니는 또 다른 의미는 그것이 이른바 '원신'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선도에선 '원신'을 머릿골 또는 한얼로 인식한다. 그리고 정과 기를 주재하는 무위 그 자체라고 풀이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노자가 청우를 탔다는 것은 수행을 통해 '원신'을 닦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노자는 원신을 닦음으로써 방안에 앉아서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별자리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멀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가보지 않고도 알 수 있고, 사물의 모양을 보지 않고도 본체를 알 수 있고, 추구하지 않고도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다."고 장담했다.

'원신'을 닦는 수련법은 흔히 '수현법'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수'란 '지킨다'는 뜻인데, 의와 기를 한 곳에 모아 지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이란 현모의 준말인데, 하늘을 뜻하는 것이고 생각의 경계가 깊고도 멀다는 것을 표상하는 글자다.

그렇다면 '현'을 '지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의 머릿골 속 깊숙이 자리한 얼을 생각하면서 그곳에 '의'와 '기'를 모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의'와 '기'를 모으는 표피의 자리를 일컬어 '현관'이라고 한다. 현관은 사람 얼굴의 두 눈 중간에 있는 규혈을 말하는 것이다.

'수현'의 전제 조건은 긴장을 풀고 바로 앉아 잡념을 없애는 일이다. 그런 다음 호흡과 마음을 합치시키고 의식을 현관에 두는 것이 '수현'의 핵심이다. '수현'은 견성의 길잡이이기도 하다.

성명쌍수

도가에선 성명쌍수의 원류를 노자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명쌍수라는 말처럼 개념상의 혼란이 일고 있는 것도 그리 흔치 않다.

성명쌍수에서 '성'은 흔히 심과 신을 포괄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리고 '명'은 정과 기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을 닦는 이른바 '성공'은 마음 공부쯤으로 치부한다. 아울러 '명'을 닦는 '명공'은 몸공부의 대명사로 여긴다.

일반적인 이런 해석들은 언뜻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성명'의 참뜻과는 거 리가 멀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이란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지신'을 이르는 말이다. '지신'이란 인간 생명 활동의 주재자를 가리킨다.

'명'이란 이 세계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어온 '지정'을 뜻한다. '지정'은 인간 생명 활동의 근원적 에너지인 셈이다.

물론 이런 개념에 따른다고 할지라도 '성'이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명'의 움직임과 몸의 관련성은 밀접하다. 하지만 이 둘은 별개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인 것이다.

한데 대개의 경우 '성'과 '명'을 따로 떼어 정신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보기 일쑤다. 서양의 사상체계 속에선 이런 이원론이 정통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양의 사상체계 특히 전통선도의 틀 속에선 이런 이원론은 비정통일 수 밖에 없다.

전통선도에서 육체와 정신의 수련이라고 말하지 않고 특별히 '성명쌍수'라고 표방한 까닭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심신수련'으로 대표되는 마음 공부와 몸 공부는 '성명수련'에 비하여 저차원이다.

심신수련과 성명수련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데서 일어나는 문제도 적지 않다. 가령 몸공부, 즉 '경공'이 먼저냐 마음공부, 즉 '성공'이 먼저냐의 논란 따위는 그 한 가닥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옛 문헌에 보면 '도가'는 명종의 교의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종'이란 '명공'을 으뜸으로 삼는 종교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서 불가를 일컬어 '성종'이라고 했다. '성공'을 으뜸으로
여기는 종교라는 의미다.
우리 전통선도에선 '명'과 '성'을 구분해 수행하면 어려움이 따른다고 가르쳐 왔다.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수행법은 그것을 뒷받침한다.

진단전호흡

'전통선도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전통선도를 규정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우선 손꼽히는 조건은 이른바 '신불시대' 이래의 선맥을 이었느냐의 여부다.
'신불'은 흔히 '신시'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신불'을 '신시'라고 부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것은 식민사학이 만들어 낸 역사왜곡의 한 가닥이기도 하다.

강희자전에 보면 '불'이란 글자에 대한 풀이가 쓰여있다. '불'은 우리 옛말의 '부르'에서 나온 것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발', '벌', '불'이란 말은 모두 한 묶음을 이룬다.

'불'이란 한자의 자의는 '하나', 즉 하늘 또는 한얼과 땅의 테두리가 관통했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꿰뚫린 글자가 불인 셈이다. 이런 뜻의 글자를 저자거리, 즉 시장으로 풀이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옛 문헌에 보면 고불교를 나타내는 본래의 글자도 불교였다고 한다. 이것이 인도에서 불교로 표현되고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오늘날의 불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불'은 물론 '밝음',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고 옛말 '부르'의 차음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단전호흡만 하더라도 전통선도의 개념 규정은 독특하다. 흔히 단전호흡이라고 하면 아랫배 호흡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나도 단전호흡을 처음 배우는 이들에겐 아랫배 호흡을 권한다. 그리고 숨쉬기를 하면서 아랫배 단전의 위치에 의식을 두라고 가르친다.

기의 세계에선 의식은 불의 작용을 한다. 의식을 집중한다는 것은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효과와 같다. 따라서 아랫배 단전 자리에 의식을 두고 숨쉬기를 하면 단전 자리에 뜨거운 기운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것을 일컬어 흔히 단전호흡이라고 말하곤 한다. 건강의 차원에선 이런 개념의 단전호흡이 매우 효과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태여 이견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도의 차원에선 그렇지가 않다. 이때는 전통선도에서 말하는 참뜻의 단전호흡을 터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랫배 숨쉬기는 호흡 구조로 볼 때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폐호흡과 복식호흡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허파의 숨쉬기와 아랫배 숨쉬기가 함께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참뜻의 단전호흡, 즉 진단전호흡에선 폐호흡이 배제된다. 이때의 단전호흡은 바깥 공기의 숨쉬기가 아니라 내기의 호흡이며 진기의 호흡이다.

삼법수행

도올 김용옥은 TV 노자 강좌 마지막 회의 첫머리를 '홍익인간' 이야기로 장식했다.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은 "이 지구상의 어느 민족보다도 웅혼하고 진취적이며 역동적인 보편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하느님의 영감(Divine Inspiration)"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기나긴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보편주의를 실천해 온 자랑스런 시간의 족적을 남겼다."고 자부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우리 겨레의 시원적인 건국이념이 홍익 '민족'이 아닌 홍익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범상스런 것이 아니다. '민족'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보편주의를 뛰어 넘는 것이기도 하다.

한데 '홍익'이란 말을 '널리 이롭게'로 풀이하는 것은 스스로 '이기'의 테두리에 얽매이게 하기 십상이다. 참뜻의 '홍익'엔 '이기'가 조금도 함유되지 않는다.

일찍이 민세 안재홍은 '홍익인간'을 풀이하여 '성통공완'한 사람이라고 했다.

성통공완한 사람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통공완은 이런 차원에서 전통선도의 으뜸가는 수련 목표라고 일컬어져 왔다.

민세는 성통공완, 즉 홍익인간이 되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는 삼법수행을 정진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선봉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삼법수행에서 삼법이란 지감, 조식, 금촉의 세 가지 수련법을 이르는 말이다.

지감이란 느낌을 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흔히 마음 공부라고 말하기도 한다.

조식이란 숨을 고른다는 뜻인데, '숨 공부'라고 일컬어진다.
'금촉'은 부딪침을 금하는 것으로, '몸 공부'로 풀이하기도 한다.
삼법수행의 구체적 방법이 쓰여 있는 책으론 (삼일신고)가 손꼽힌다. 이 책을 보면 세 가지 공부는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묶음으로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셋(삼법)이 하나라는 가르침을 전통선도에선 유일무이의 정법으로 여긴다. 달마대사가 제자 신광에게 삼일이 정법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선봉행'은 이른바 이타행을 포괄하는 말이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돕는 선봉행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통공완의 나타남이다. 삼법수행과 선봉행은 홍익인간의 표리인 셈이다.

좌방

전통선도의 도맥을 이야기할 때 으레 등장하는 말이 '좌방' 또는 '좌도방'이다.

'좌방'의 개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명확한 것이 달마대사의 풀이라고 일컬어진다.

무려 49년 동안이나 불도를 닦은 고승 신광이 달마대사를 찾아 진법의 가르침을 애원했다. 그러나 달마대사의 반응은 냉담했다. 정도를 구하고자 하면 무엇보다도 '좌방'을 끊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 말을 들은 신광은 갖고 있던 계도로 자기의 왼쪽 팔을 잘라 버렸다. 피를 흘리는 신광의 처절한 모습에서 법기의 크기를 확인한 달마는 신광을 제자로 삼았다. 바로 이 신광이 달마의 법통을 이은 혜가다.

한데 '좌방'을 끊으라는 달마의 말에 신광이 왼팔을 베어 낸 것은 아이러니다. 왼팔을 뜻하는 좌방이 '좌방'과 발음이 같은 데서 말미암은 착각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달마는 신광의 상처를 치료해 준 다음 '좌방'의 참뜻을 이야기해주었다. 도를 닦는 데는 3천6백의 방문과 72종의 좌도가 있으며, 이것을 통틀어 '좌방' 이라고 부른다는 설명이었다.

여기에는 이른바 '술', '류', '동', '정', '사과'의 문이 전부 포함된다고 했다.

'술'이란 법술을 이르는 말이다. 부적, 주문, 둔갑술 따위는 모두 이에 속한다.

'류'는 주류의 준말이다. 산을 다니면서 기도하고 불상을 예배하러 다니는 것은 이에 해당한다고 달마는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의술, 복술, 점성술, 관상술도 여기에 포함시켰다.

'동'은 행동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른바 팔단금같은 도인체조가 여기에 속한다. 오늘날의 기공을 포괄하는 셈이다.

'정'은 고요함, 즉 정적을 대표하는 말이다. 암자나 동굴 속에 틀어 앉아 공을 구하고 숨을 헤아리고 염을 그치고 벽곡을 하는 따위는 모두 '정'에 속한다.

이런 설명을 들은 신광은 비로소 '좌방'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좌방'을 추구하면 자칫 인간의 생사를 그르치기 십상일뿐더러 그 죄 또한 무겁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달마는 '좌방'이 아닌 정도는 오직 '하나' 뿐이라고 가르쳤다. 그 '하나'는 '일시무시일'의 하나이고 삼진귀일, 만법귀일의 '하나'이다.

현관

달마의 이른바 '하나'의 가르침은 '현관일규'를 여는 것으로 비롯된다.
'현관'이란 지현지묘지관문의 준말이다. 지극히 오묘한 기운이 출입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사는 집의 경우 현관을 통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몸에도 현관이 있어 오묘한 기의 출입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일규'는 한 구멍이라는 뜻인데 출입구가 하나임을 이른다.
전통선도에서는 '현관일규'의 위치를 두 눈썹 사이의 한가운데라고 풀이한다. 그 한 구멍을 바르게 개혈함으로써 비로소 '자성구자'의 옳은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자성구자'란 스스로의 본성 속에서 씨앗을 찾으라는 뜻이다.

달마는 바로 '현관일규'를 혜가에게 명지해 줌으로써 도를 잇게 했다. 이것을 일컬어 교외별전, 직지인심,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교외별전이란 경전에 기록되지 않고 따로 전해져 내려온 것을 말한다. 직지인심이란 그 방법을 손가락으로 직접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고, 이심전심은 도법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 졌다는 이야기다.

현관일규는 선천의 기를 받아서 견성하는 통로이다. 선천의 기란 수태한 태아가 출산하기 전까지 어머니 뱃속에서 받는 생명의 진기를 일컫는다.
이에 반해 후천의 기란 이 세상에 태어난 뒤 받는 기, 다시 말해 호흡이나 음식을 통해 얻는 기다. 후천의 기를 받아 건강을 도모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단전호흡수련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선천의 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운용할 줄 모르면 어떤 경지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현관일규를 도외시하면 아무리 수련의 공덕을 쌓아도 '자성구자'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옛 선인이 이르기를 "상단전을 닦으면 성인이고, 중단전을 닦으면 현인이며, 하단전을 닦는 이는 범인"이라고 했다.

여기서 상단전을 닦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현관일규의 한 구멍을 여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범인 즉 보통 사람은 하단전 수련 내지는 단전 호흡수련의 본질과 한계를 명확히 알고 수련에 임해야만 한다. 바른 지침이 없이 상단전 수련을 하는 것은 금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달마 주천법

달마가 비전으로 가르친 수련법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이른바 현관에 선천의 기를 관통시키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선천의 기로 주천을 이루는 방법이다.

특히 후자의 주천법은 도가나 요가(YOGA)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도가나 요가는 호흡의 기운, 즉 후천의 기로 주천을 하기 때문이다.
후천의 기로 수련을 하면 열감, 다시 말해 뜨거운 기운을 느끼게 마련이다.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면 하단전이 뜨거워지고 그것이 기맥을 따라 이동한다. 이런 열감은 건강 차원에선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선도수련에서 열감은 건강 차원 이상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후천의 기로 연성된 열감이 직접 상단전으로 올라가게 되면 자칫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후천의 기와 선천의 기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첫째, 전자는 열감을 수반하는데 비해 후자는 청량감을 수반한다.
둘째, 전자는 기의 파장이 거칠고 진폭이 불규칙함으로써 이른바 나쁜 영파를 일으킨다.

이에 반해 후자는 기의 파장이 순하고 진폭 또한 규칙적이며 전기의 흐름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기의 파장이 거칠거나 진폭이 크면 필연적으로 심신을 해친다. 그것을 막기 위한 방편의 하나가 바로 숨을 고르는 조식이다. 하지만 조식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후천의 기에만 의존하면 본성을 찾을 길이 요원하다.
달마의 주천법은 그와 같은 폐해를 막고 깨달음의 길에 접어드는 불이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주천의 시발점부터 특이하다.

먼저 현관에 선천의 기를 느끼면 이 느낌이 강하게 오래 지속되도록 상단전에 집중을 한다. 그렇게 하면 증폭된 선천의 기가 자연히 현관에서 얼굴과 목을 거쳐 중단전과 하단전으로 내려간다 이때 의식을 중단전과 하단전에 차례로 옮겨가면서 기의 흐름을 이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해서 기가 하단전에 모이면 절로 등줄기를 따라 상승함으로써 다시 현관으로 회귀한다. 현관에서 현관으로 주천하는 방법이 바로 달마가 가르친 비법이다.

도태

선도수련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의 하나로 이른바 도태를 꼽는다. 도태란 호흡으로 얻어지는 기의 탯줄을 말한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탯줄에 매달려 성장하듯 수련도 도태가 이뤄져야 비로소 본궤도에 들어설 수 있는 법이다.

전통선도에선 삼법수행을 제대로 하면 누구나 도태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삼법수행은 지감, 조식, 금촉 등 세 가지 방법에 의한 수련을 이른다. 삼일신고에 보면 오로지 삼법수행을 함으로써 성통공완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이것은 삼법수행으로 도태가 이뤄진 다음 수련이 완성 단계로 접어들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삼법수행은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지감법은 정통궤좌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궤좌란 무릎꿇고 앉는 자세다. 여기서 정통궤좌란 두 엄지발가락을 평행으로 맞닿게 하고 앉는 것을 말한다. 이 좌법은 두 발바닥을 포개서 앉는 일본식 정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둘째 금촉법은 이른바 천부합장법을 기본으로 삼는다. 두 손바닥을 마주하는 합장법은 어떤 의미에서 수인법의 표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천부합장법은 일반적인 합장법과 전혀 다르다.

이 방법은 일반적인 합장법처럼 두 손을 마주하되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평행으로 맞붙이고 검지의 두 손가락으로 삼각형을 만들면서 손바닥 사이가 타원형의 공간이 되게 하는 것이특징이다. 이는 예로부터 비전되어 온 천인합부의 뜻이 담긴 합장법이다.

셋째 조식법의 기본은 산택통기법이다. 여기서 '산'은 코를 뜻하고 '택'은 입을 상징한다.
산택통기란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토해 내는 호흡법이다. '산택통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코로 들이쉰 진기를 그대로 날숨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입으로 탁기를 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정통궤좌와 천부합장을 하면서 산택통기법으로 단전수련을 하면 일정 기간 안에 반드시 도태가 이뤄진다.
이때 생기는 도태의 문양은 마치 우리의 전통적인 삼태극의 형상이다. 이 문양은 체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안으로도 식별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태극도태' 또는 '삼도태'라고도 부른다.

선도와 요가

선도와 요가는 어떻게 다른가.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면 선도의 알파와 오메가는 호흡법인데 반해 요가의 그것은 명상법이다.

선도와 요가는 나름대로 풍토적 특성을 담은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것이 사실이다. 선도의 시원은 백두산 또는 옛 태백산이 중심이고, 지역적으론 온대지방인 한반도와 중국을 포괄한다. 요가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열대지방 또는 아열대지방의 특성에 맞도록 개발된 수련 체계이다.

흔히 요가의 수련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고도 일컬어진다. 하나는 좌법 즉 앉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조식, 즉 숨쉬는 방법이다. 이 점은 선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좌법과 조식의 방법에서 선도와 요가는 다르다.

요가의 좌법은 반가부좌, 가부좌 등 여러 가지다.

그러나 공통적인 특징은 열대지방의 뜨거움을 극복하기 위한 앉음새라는 점이다. 요가는 좌법과 호흡법을 한 묶음으로 수련함으로써 우주의 기와 몸 안의 기를 합일시키고 나아가 몸 안의 기를 우주의 기로 환원시키는 것에 역점을 둔다.

요가에선 사람의 몸에 일곱 개의 차크라, 즉 생명중추가 있다고 여긴다. 요가는 일곱 개의 차크라 가운데 맨 밑바닥의 '무라다라 차크라(생식기와 항문의 중간 위치)'에서 '쿤다리니' 즉 우주의 잠재 에너지가 마치 뱀이 기어가듯 머릿골을 향해 올라간다고 명상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몸을 정화 내지 영성화하고 나아가 해탈과 법열을 이룬다고 한다. 말하자면 요가란 명상을 깊이 함으로써 '쿤다리니'를 머릿골까지 올려 우주로 통하게 하는 기의 상승 시스템이라는 이야기다.

이와 견줄 때 선도는 근본적으로 그 체계가 다르다. 선도에선 명상이나 해탈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 선도는 고유의 호흡법을 통해 선인의 길을 추구한다.

물론 선도에도 요가의 '차크라'와 비교될 수 있는 생명중추의 혈은 있다. 이른바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의 삼단전과 백회, 회음 등의 혈자리가 그에 해당한다. 그러나 단전을 운용하는 선도의 수련은 '기'의 하강 시스템이다. 그것은 선도수련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선도에선 상기, 즉 기를 올리는 것을 금기로 여긴다. 궤좌법과 '기'의 '내림'이 선도수련의 열쇠다.

원방각

전통선도에선 원방각을 이른바 천부삼인의 표상으로 여긴다. '원'은 둥근 하늘을 나타내는 것이고. '방'은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각' 은 사람의 머리와 두다리를 나타낸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바탕에서 '원방각'은 성명정, 즉 삼진을 이루는 것이고, 이것이 삼묘가 되어 만유만상의 근본원리가 된다는 설명이다. 뿐만 아니라 '원방각'은 셈과 헤아림의 근원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둥근 '원'은 하나, 네모꼴 '방'은 둘, 그리고 세모꼴 '각'은 셋의 나타냄이라고 한다.

흔히 일컬어지는 천일, 지이, 인삼이란 말도 그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원'은 동그라미로 에워싼 옛 됫법의 비롯을 상징하는 것이고, '방'은 두 줄을 가로 세로로 맞추는 잣법을, '각'은 세 점의 맞음으로 이루어지는 저울법의 생김을 의미한다고 한다.

전통선도 수련방법의 특징은 바로 이런 '셈'과 '헤아림'을 구체적으로 공법에 도입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의 이치가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그것이 수학의 원리와 일치한다는 것이 옛 조사들 생각의 근본 틀이었던 셈이다.

가령 조식법만 하더라도 '원방각'의 세 가지 방법이 모든 호흡법의 대종을 이루는 것으로 가르쳤다. 여기서 '원'의 호흡법이란 둥근 모양의 꼴을 이루는 숨쉬기를 말한다.

'원'의 호흡법은 근본적으로 우주와 태양, 그리고 달과 별의 일원상이 숨쉬기를 통해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원'의 호흡법은 우주의 운행에 끊어짐이 없듯 숨쉬기에도 끊김이 없는 순리의 자연호흡법을 기조로 삼는다. 거기에 더하여 호흡이 둥글게 이루어지는 것을 의식하고 나아가서 주천을 이루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방'의 호흡법은 숨쉬기에 이른바 지식을 도입하는 호흡법을 일컫는다. 하늘에 끊어짐이 없는 것과는 달리 땅 위의 창조에는 끊어짐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이 숨쉬기의 기본 생각이다.

'방'의 호흡법은 한마디로 흡지호지의 네모꼴을 이루는 숨쉬기라고 하겠다.
'각'의 호흡법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 끊는 숨을 함으로써 세모꼴을 이루는 숨쉬기를 말한다.

여기서 지식, 즉 끊는 숨은 호흡공부의 묘리에 속한다. 공력이 높아질 수 있는 방편이긴 하지만 위험스런 함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빈일규

우리의 전통 선도는 '현묘지도'라고도 불린다. 신라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은 유불선을 아우르는 것이 현묘지도라고 했다. 다시 말해 유가와 불가, 그리고 선가의 원리가 모두 '현묘지도'에 내포돼 있다는 이야기다.

현묘지도의 '현'은 '검은 것' '아득함' '고요함'을 뜻하는 것인데 하늘 또는 우주의 신비로움을 상징한다. '묘'라는 글자는 하늘과 우주의 신비로움이 '교묘하다'고 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현묘지도란 현묘의 길 도는 현묘를 깨닫는 가르침이라 하겠다.

'현묘'를 아는 방법의 키워드는 이른바 현빈일규다. 현빈일규에서 '현'은 곧 하늘을 뜻하고 '빈'은 땅을 의미한다. 현은 양을 상징하고 빈은 음을 나타낸다. '일규'란 '한 구멍'을 말한다.

현빈일규를 한 묶음으로 풀이하면 '천지를 꿰뚫은 한 구멍'이라는 뜻이 된다.

한데 '천지를 꿰뚫은 한 구멍'의 참뜻은 과연 무엇일까. 선도에서 '규' 즉 '구멍'이라는 글자를 수련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혈' 즉 구멍과 엄격하게 구분한다. 따라서 현빈일규의 '일규'는 수련의 결과 얻어진 '한 구멍'을 뜻하는 것이다.

그 한 구멍이 천지를 관통한 것이 바로 현빈일규인 셈이다. 말하자면 하늘기운과 땅기운이 사람몸 속에서 합일하는 한 구멍을 여는 것이 현빈일규라는 이야기다.

선도수련에선 이 한 구멍이 열리면 백규개통 즉 모든 구멍이 뚫리는 최고의 경지에 들어선다고 가르친다. 석가, 노자, 공자도 바로 현빈일규를 얻음으로써 대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들 삼성은 결국 '현'으로 표상되는 진기와 '빈'으로 대표되는 진정의 묘합으로 '한 구멍'을 열어 인류의 스승이 된 셈이다.

'한 구멍'은 안타깝게도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빈일규엔 이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도로 수련한다면 그 '한 구멍'이 어느 자리인지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삶은 달걀을 까보면 오목 들어간 빈 공간이 있듯 분명한 '한 구멍'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 선도에선 이 '한 구멍'을 빈궁 또는 빈부라고도 한다. '기'와 '신'이 머무르고 교감해 오르내림이 그치지 않는 곳이란 뜻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삼육대례

전통선도의 으뜸가는 공법의 하나는 절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보면 삼육대례라고 해서 절하는 방법부터 그 의미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옛 천제가 어떤 모습의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뿐만 아니라 선도의 원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절공법은 비단 선도수행 뿐만 아니라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의 수행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령, 불교의 '백팔배', '삼천배'라던가 티베트 밀교의 오체투지법 같은 것은 절수행의 정형을 보여 준다.

절수행의 참뜻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절을 함으로써 우아일체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절을 하는 신앙 행위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부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둘째 절수행은 단전 강화 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절을 하기 위해 몸을 수그리면 자연히 아랫배에 힘이 실리고 결과적으로 단전 자리가 잡힌다.

셋째 절수행을 하여 심신일체가 이루어지면 그 공효 또한 엄청나게 커진다는 점이다. 절수행을 통해서 나타나는 이른바 유체이탈 같은 것은 그것을 말해 준다.

한데 삼육대례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절법인 동시에 수행법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수행법과 확연히 구분된다.

삼육대례에서 대례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큰 절을 이르는 말이다. 삼육은 절의 내용과 형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육은 세 번 절하고 난 다음 여섯 번 절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첫 번째로 하는 삼배, 즉 세 번의 절은 천지인의 삼신에 경배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계에 대한 절이라고 일컫는다.

두 번째로 하는 육배, 즉 여섯 번의 절은 동서남북의 사방과 상하에 경배한다는 뜻을 지닌다.
삼배와 육배를 합치면 구배가 된다. 구배에서 아홉이라는 숫자는 열에 이르는 완전수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구배는 성취를 의미하며, 절을 통해 하늘과 사람이 하나됨을 말해 준다는 이야기이다.

이때의 절은 방법 자체가 특수하다.
첫째 공수, 즉 손잡는 방법은 자해법으로 한다.
둘째 고두, 즉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한다.
셋째 절할 때는 완전히 지식, 즉 숨을 끊는다.

선맥의 숨은 역사

도교의 세계는 크게 두 교파로 나뉜다. 하나는 천교이고 또 하나는 절교이다. 이 두 개의 큰 세력이 형성된 마당에 불교가 교묘하게 배합된 것이 도의 세계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곤륜산에서는 불교를 인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방'에 본거지를 둔 '인도', 즉 불교는 선도나 도교와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선계에는 불교와 인연이 있는 선인이 적지 않았다. 특히 동방선인에 그런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 도교에서는 불교와의 미묘한 관계를 청산하자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옛적에 곤륜산의 선계 본부에서 벌어진 선계 재편성 계획의 한 가닥도 바로 이런 연유를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봉신연의'에서는 천교와 절교를 선인들의 출신 성분에 의한 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천교는 일반적으로 제대로 배운 인간이 마침내 도를 얻어 불로 불사를 이루고 도술도 마음대로 부리는 선인의 경지에 다다른 육체성선의 집단을 일컫는다.

이에 반해 절교 집단의 구성원은 대부분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금수, 옥석, 수목이 어떤 계기에 혼돈의 현기와 접하여 천지의 영기와 일월의 정기를 받게 됨으로써 도술을 터득하여 인간으로 화한 화체성선의 집단이 바로 절교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육체성선'이란 육신의 몸으로 신선이 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화체성선'은 육신의 몸이 아닌 물체가 육신으로 변화하여 신선이 됐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천교는 본거지가 곤륜산에 있었기 때문에 '산악파'라고 불렸다. 마찬가지로 절교가 '해도파'라고 불린 까닭은 그 본거지가 '금오도'나 '봉래도' 같은 바다 가운데 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오도나 봉래도는 동쪽에 있는 섬인데 제주도의 옛 이름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아가 옛날의 우리 나라 자체가 신선의 나라였기 때문에 그것은 배달의 나라를 뜻하는 것이라고 지적되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동쪽의 신선들을 비하하기 위해 절교라고 이름 붙이고 화체성선의 집단이라고 불렀다. 곤륜산의 신선만이 사람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을 터이다.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김시습이 (금오신화)라는 소설을 쓴 것은 바로 우기 나라의 선맥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선도의 세계에서 천교와 절교를 구별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신선의 경지에서는 어느 쪽에 우열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대등한 것이다. 그러나 천교는 스스로 정통파라고 주장하면서 절교를 이단시하고 차별하려 애썼다. 그것은 절교의 입장에서는 몹시 불쾌한 일이었고 우리 선맥의 처지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무한

'기'라는 글자는 구름 기운을 나타내는 '기' 밑에 쌀을 나타내는 '미'자를 받쳐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쌀로 밥을 지을 때에 끓으면서 증발하는 증기를 뜻한다는 이야기이다. 증기는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가 된다고 해서 기는 순환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전통선도에서는 그렇게 풀이하지 않는다. 또 그런 풀이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선도에서는 구름 기운을 뜻하는 기라는 글자를 하늘기운과 같은 것으로 풀이한다. 뿐만 아니라

밑의 미를 쌀로 보지 않고 빛을 나타내는 형태로 풀이한다. 말하자면 하늘 기운과 빛이 일체를 이룬 것이 기라는 이야기이다.

쌀로 밥을 지을 때 증발하는 기라는 뜻과 하늘 기운과 빛을 나타내는 기라는 뜻 사이에는 그야말로 천양지차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미라는 글자의 자원을 살펴보면 그것이 빛의 존재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미는 장소를 나타내는 십자에 쌀알이 사방으로 흐트러진 모양의 글자꼴이지만 쌀의 존재는 자연과 빛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빛을 나타내는 '광'이라는 글자와 미와의 관련성을 말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광'이라는 글자는 기가 내포하고 있는 '빛'이라는 뜻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광'은 '화'와 '인'의 합성인데, 이 글자가 지니는 참뜻은 사람이 치켜든 횃불이 밝게 비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비해 기라는 글자의 선도적인 풀이인 하늘빛과 하늘 기운은 횃불의 빛으로는 짐작 할 수도 어림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할밖에 없다.

흔히 선도라든가 기 이야기를 하면 노자나 장자를 들먹이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것 같다. 그러나 노자의 (도덕경)에는 기라는 말이 세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도덕경)은 모두 81장, 5천 글자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가운데 기라는 글자가 의외로 적다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인지도 모른다.

(도덕경) 제10장에 보면 전기치유 능영아호, 즉 "기를 오로지 함으로써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기처럼 될 수 있는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기를 오로지 한다는 말은 몸 안의 정기를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을 도가적으로 표현한다면 양기, 즉 기를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기를 하면 마음과 몸이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워져 마치 갓난아기 때 같은 생생함이 생긴다고 노자는 보았던 것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기에 관한 두 번째 대목은 제42장에 적혀 있다. 충기이위화, 즉 충기로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여기서 충기란 허무의 기운을 말한다. 그런데 허무의 기운이란 아무 것도 없는 빈탕이란 뜻이 아니라 텅 비어 가득 차 있는 기운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충기라는 말의 앞 대목은 도덕경을 상징하는 글귀라고도 할 수 있는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이 나온다. 풀이하면, "한얼이 태극, 즉 하나를 낳고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천지인의 셋을 낳고,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 만물은 음을 짊어지고 양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보면 텅 비어 가득 차 있는 기운인 충기는 안으로 음기와 양기를 가진 이른바 충화된 기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조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인 셈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기에 관한 세 번째 대목은 제55장의 심사기왈강이다. 풀이하면 "마음이 기를 부리는 것을 일컬어 '강'이라고 한다."이다. 도대체 마음이 기를 부린다는 게 무슨 뜻인 가. 마음이란 욕심과 통하는 것인데 욕심이 생명의 바탕을 이루는 정기를 부린다는 뜻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음양의 조화에 무리가 와서 심신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이런 상태를 '강'이라 하는데 '강'은 도가 아닌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기를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생명 에너지로서의 기이고 또 하나는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우주 에너지로서의 기이다. 전자를 말하는 것이 제10장과 제55장이고, 후자를 말하는 것이 제42장의 내용인 셈이다.

비록 노자의 기에 대한 인식의 일단이 (도덕경)에 보이기는 했지만 선도의 측면에서 본다면 노자가 그 비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도덕경의 어느 구석에도 선인이나 신선 또는 선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상대문헌에도 신선이나 선인의 설이 없다. 12경인 시, 서, 역, 예, 춘추, 논어, 맹자, 주례, 효경, 중용, 대학 등에는 선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이른바 춘추시대까지도 없었고 (장자)에 비로소 선인, 신인설이 비치고 (초사)에 그것이 나온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전국시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가. 그것은 이른바 선도가 중국에서 시원을 이룬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 준다. (포박자)에 보면 중국의 황제가 청구를 지나다가 풍산에 이르러 자부진인에게서 삼황내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황제가 옛 배달땅의 자부진인에게서 선도의 전수를 받았다는 것을 전해 주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우리의 전통선도에서는 자부진인을 단군과 맥을 잇는 중요한 인물로 손꼽는다. 뿐만 아니

라 중국의 문헌에서도 단군을 선인이라고 적고 있다. 단군을 성인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선인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선인과 성인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인이 속세의 사람인데 비해 선인은 비속의 사람인 것이다.

전통선도에서는 (천부경)을 으뜸가는 경전으로 여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원리를 밝힌 (천부경)은 모두 81자로 이루어져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천부경) 81자와 노자의 (도덕경) 81장을 대비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일시무시일로 시작해서 일종무종일로 끝나는 천부경은 온통 기 자체를 풀이해 주는 최상승의 법문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일시무시일은 하나의 비롯과 비롯 없음이 하나임을 말해 주고, 일종무종일은 하나의 마침과 마침 없음도 하나임을 뜻한다. 이것은 우주에 가득 찬 기가 무시무종, 즉 시작도 없고 그침도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전통선도에서는 (천부경)과 함께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을 긴요한 수련지침서로 삼는다. (삼일신고)는 모두 366자로 이루어진 경전이고, (참전계경)은 인간사를 366개의 장으로 나누어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여기서 366이라는 숫자는 기의 측면에서 천지순환의 이치와 사람 몸의 운행이 일치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천부경)이나 (삼일신고)를 보면 우리의 선인들이 기의 측면에서 하늘과 사람이 하나임을 믿었고,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을 인식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노자와 장자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천동설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 비추어 크게 주목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천동설의 전통은 오늘날의 중국 기공에 그대로 맥맥히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나라의 아류 선도가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동설의 입장에서도 물론 기를 천지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로 보고 있다. 이것은 지동설 적인 입장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기를 초능력과 연관시킨다든지 성기니 쇠기니 하는 도가적인 인식은 영락없는 천동설이다.

'성기'라는 것은 기가 모여 왕성해진다는 뜻이고 '쇠기'란 기가 흩어지면 기울어진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기공에서는 몸 안에 기를 모으라고 가르치고 배꼽 밑 하단전에 기를 모아 절대로 누기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를 흡수한다던 지, 그 기를 몸 속에 충전하여 남의 병을 치료하는 데 쓰는 비법(?)을 가르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런 기공적인 사고방식은 결국 기가 천지에 충만하다고 말하면서도 기유한론으로 귀착되고 만다. 남에게 자기의 기를 주면 손기가 되고 남의 기를 흡수하면 익기가 된다는 것은 그같은 기유한론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오늘날의 중국 기공에서는 기를 유물론적으로 보고 있다. 기라는 글자를 옛날의 기로부터 기로 바꾼 것도 그 한 가닥이라고 할 수 있다. 하긴 기공이란 말을 사용한 것부터가 유물론적 바탕에서 우러나온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본래 선도에서도 그렇거니와 도가에서도 기공이란 말은 없었다. 따라서 쓰이지도 않았다.

옛날에는 수련이라든가 토납, 도인, 양생이란 말이 쓰였다. 기공이란 말은 중국 대륙이 사회주의 국가로 된 다음인 1953년부터 쓰였다. 종래의 기 개념이 지닌 물심 양면적인 것에서 심을 배제한 것이 기공이다. 이것은 유심론을 배격하고 유물론을 숭상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든 조어인 셈이다.

유물론이나 물질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물질유한론으로 귀결되며 그런 이론적 바탕이 계급투쟁론으로 발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실제로 기란 그런 것이 아니다. (천부경)에서 말한 대로 기란 비롯도 없고 끝도 없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우주 자체만 하더라도 천동설에서 보는 것처럼 유한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 그 자체이다.

(천부경)은 모든 것을 '하나'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는 '한얼'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시'와 '종'이 없는 그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는 우주가 질적으로 균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란 어떤 한 점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하늘과 땅 전후좌우 어느 쪽으로도 무한하게 펼쳐진다. 거기에서는 어떤 한 점을 취하든 간에 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하고 아무런 편재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의 기도 마찬가지다. 사람 몸 안의 기나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기는 우주의 기의 부분이고 무한한 존재이다. 그것은 쉼없이 사람 몸 안을 돌고 사람 몸의 안팎을 넘나드는 것이다. 하늘의 기가 사람의 기이고, 사람이 곧 하늘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전통선도에서는 기가 나가는 것을 결코 '손기'라고 보지 않는다. 기가 나가면 그 자리에 새로운 기로 채워지는 것이 우주의 이치로 보기 때문이다. 비우면 비울수록 채워지고 천지 기운의 교류가 활발해진다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생각이었다.

이에 반해 중국의 기공에서는 기를 몸 안에 가두는 것을 양생의 으뜸으로 여긴다. 이것은 수련자에게 이기적인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중국 기공이 유물적이고 이기적으로 흐르는 데는 이런 원천적 이유가 있다. 이것이 도가적인 뿌리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에 반해 우리 선도는 이타적인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은 바로 그 이타적인 것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군이 말하는 홍익인간의 참뜻은 성통공완한 인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성통공완이란 기수련의 최고단계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단계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기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비우고 베풂으로써 이루어지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것, 그것은 기를 운용하는 것이며, 우주와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숨은 생명이고 그것은 동시에 우주 에너지이다. 과학자들은 기를 우주에 가득 찬 무한소의 에너지로 정의하고 있다. 그 무한소의 에너지는 아직도 완전히 확인 또는 확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비과학적인 것이 기인양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선진국의 동향을 살펴보면 비단 인체의 기뿐만 아니라 우주에너지로서의 기의 실체를 밝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일부 기를 연구하는 이들의 입에서 비과학적인 것이 과학이고 과학적인 것이 비과학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전통선도와 현대 첨단 과학의 기 인식이 일치할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법륜공의 도맥적 고찰

필자가 이홍지와 법륜공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 겨레의 전통 기수련과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내가 구태여 일반 매스컴에서 쓰는 표기법인 '리홍즈' 또는 '파룬궁'이라는 용어를 제쳐놓고 한자의 우리말 발음대로 쓰는 까닭도 우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사실 이홍지 자신 이름의 영문표기를 Li Hong Zhi 즉 '리홍지'로 쓰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의 매스컴이 왜 '리홍즈'라고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파룬궁'만 하더라도 그렇다. 법륜공의 고유성을 나타내기 위한 표기 또는 현지 발음대로의 표기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법륜'이란 말을 오히려 우리말 발음대로 쓰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법륜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쓰는 용어다. 법륜이란 쉽게 풀이해서 불법의 핵심으로 우주의 순환원리를 뜻하는 것이다. 우주의 창조나 우주의 순환이 둥근 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이 바로 법륜이다.

법륜을 우리 나라 선도에서는 '주천'이라고 부른다. '주천'이란 천도를 돈다는 뜻이다. 법륜과 마찬가지로 우주를 둥글게 회오리 하는 것이 바로 주천이다. 선도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대우주와의 연관 속에서 수련하도록 하고 있다. 우주에서 기운이 주천하듯 사람의 몸에서도 기운이 원만하게 돌도록 해야 득도할 수 있다는 것이 선도의 가르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도에서는 이른바 소주천과 대주천을 매우 중요한 공법으로 손꼽는다.

소주천이란 몸통에 기운이 도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단전호흡을 통해 연정화기가 돼서 기운이 단전으로부터 하강하여 성기와 항문 사이의 회음을 통과하여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머릿골 정수리의 백회를 지나 인당을 거쳐 앞가슴 중간과 배꼽으로 내려가 단전이 이르는 과정을 소주천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대주천이란 기가 비단 몸통뿐만 아니라 전신을 두루 도는 것을 뜻한다. 소주천이 기수련의 기초과정이라면 대주천은 그 다음 단계의 중급과정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이홍지가 법륜공이란 용어를 고집하는 이유

이홍지의 법륜공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천공이랄 수도 있다. 그런데 이홍지가 주천공이란 말 대신 법륜공이라고 쓴 까닭은 두 가지 점에 연유한다. 첫째, 일반적으로 선도에서 말하는 주천은 상하의 운행을 뜻하는 것인데 비해 이홍지의 법륜은 좌우의 평면적인 원 운동을 뜻하는 것이다. 이홍지의 법륜공은 불가와 도가 그리고 대도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비전의 공법을 통합해 새롭게 만든 것이기 때문에 법륜공이라고 표방했다는 이야기다.

이홍지가 오랜 수련 끝에 세상에 나와 그의 공법을 밝히면서 펴낸 (중국법륜공)이란 저서에 보면 그의 수련 전 과정이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이홍지는 1951년 5월 13일 중국 지린성 궁주링시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이홍지의 생일과 관련, 지금 중국의 공안당국은 맹렬하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다. 중국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이홍지의 본래 생일은 1952년 7월 7일이었는데 1994년에 호적을 정정했다는 것이다.

이홍지가 그렇게 고친 까닭은 1951년 5월 13일이 음력으로 석가탄신일인 4월 8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국 당국의 설명이다. 다시 말해 이홍지 스스로 석가모니의 환생임을 내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생일까지 뜯어고쳤으며 그로 미루어 봐도 사교의 교주가 분명하다고 중국 당국은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홍지 측은 필자에게 보낸 해명을 통해 중국 당국의 설명이 전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인구가 10억명이 넘는 중국에서 신분증이나 호적의 날짜가 잘못 기재되는 실수는 비일비재하며 이홍지의 경우도 그런 경우에 해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뿐만 아니라 이홍지의 생일은 문화혁명의 와중에 잘못 기재되어 군에 입대했을 때 정정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94년 창춘시 공안당국에 의해 정식으로 정정됐다고 한다.

이홍지의 생일이 음력으로 석가탄신일과 같은 점을 비난의 첫 대상으로 삼는데 대해 이홍지 측은 두 가지 점에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날짜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날 태어난 사람이 무려 10만 명이 넘는데 그날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둘째, 부처의 깨우침 정도의 수준에 이르려면 반드시 부처와 같은 생일이어야만 하는가. 호적 정정의 실무적인 차원의 것을 억지로 문제삼는 것이 어처구니없다는 주장이다.

(2)이홍지의 3단계 수련 과정

이홍지는 네 살 때부터 수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불가의 독전대법 제10대전인 전각법사가 친히 전수한 공을 받아 이른바 '진, 선, 인'이라는 최고의 법문을 수련했다고 한다.

이때 전각법사는 세 글자의 참뜻을 깨우쳐 주었는데 '진'이란 바로 진실한 일을 하며, 진실한 말을 하며,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으며, 일을 잘못했어도 감추지 않고 장래에 반본귀진에 이르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선'이란 바로 자비심이 있어야 하고 남을 얕보지 않으며 약자를 동정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남을 돕는 것을 즐기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스승은 가르쳤다. '인'은 곤란할 때나 굴욕을 당했을 때 널리 생각하고 견디어 내며 원망하지 않고 마음에 품거나 보복하지 않으며 고생 중의 고생을 겪으면서도 보통 사람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내는 것을 일컫는 것이라고 스승은 풀이해 주었다.

어린 이홍지는 8년 동안이나 전각법사의 수련을 받았다. '진, 선, 인'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때 이홍지는 득도하기 위한 심성의 기초를 단단하게 닦았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상승대법과 대신통을 구비하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승대법'이란 삼승법의 최고 경지를 뜻하는 것이다. '삼승'이란 하승, 중승, 상승으로 구분되는데 '하승'이란 기초적인 공법을 뜻하는 말이고, '중승'이란 중승공법, '상승'이란 최고의 공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통'이란 이른바 천안과 천이가 열리는 초능력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이홍지가 12세 되던 해 첫 번째 사부가 떠나갔다. 그는 떠나면서 "또 다른 사부님이 와서 너를 가르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두 번째 사부는 주로 그에게 도가의 공부를 가르치면서 주먹 쓰는 권법과 발로 차기, 그리고 창검술도 연마시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내, 외공도 동시에 수련시켰다고 한다.

두 번째 사부는 2년간에 걸친 혹독한 수련을 끝마치면서 "나는 팔극진인이라 부른다. 구름처럼 사해를 떠도니 정처가 없다. 내가 간 후 사회에 큰 재난이 있을 것인즉 너는 그에 구애받지 말고 열심히 연마해야 하느니라."하고 훈계했다고 한다.

(3)천안과 천이가 열리는 초능력의 경지

이홍지가 세 번째 사부를 만난 것은 1972년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이 스승은 도호를 진도자라고 하며 장백산, 즉 백두산의 대도를 전하러 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도자는 앞의 두분 스승과는 달리 도복이나 도포를 입지 않고 보통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어디에 거주하는지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는 데도 종적이 없었고 가는 데도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나 엄했는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심한 체벌을 가했다고 한다. 진도자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주로 내수공이었는데 이를 통해 주의식을 연마했다고 한다. 대도에서는 몸을 단련시키는 외공보다 심성과 덕을 닦는 점수을 중시하며 특히 심성수련을 일상생활 중에서 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대도의 진도자는 1974년 떠나갔고 그 뒤에도 여러 분의 사부 들이 잠깐씩 다녀갔다는 것이 이홍지의 수련 경험담이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세 번째 사부인 대도의 진도자이다. 왜냐하면 백두산에서 내려온 대도의 진도자라고 밝힌 것은 바로 우기 겨레의 전통적인 도맥과 연결고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이홍지의 법륜공이 우리의 전통수련법과도 직, 간접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중국당국이 이홍지를 비판한 문서를 보면 이홍지가 배운 장백산(백두산)의 공법은 그곳에 고래로 창궐했던 샤머니즘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이홍지가 내세우는 법륜도도 태극과 불교의 불차를 접합시킴으로써 샤머니즘의 정형을 나타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4)천하 도맥을 양분해 온 백두산과 곤륜산

역사적으로 볼 때 배달민족 또는 밝민족의 도맥은 백두산이 중심을 이룬다. 이에 반해 지나족 또는 한족의 도맥은 중심을 곤륜산에 두고 있다.

오늘날의 중국은 물론 다민족 국가이기는 하지만 주류는 한족이 차지하고 있다. 한족은 역사적으로 그들의 조상을 황제라고 일컫고 도맥 역시 황제에서 비롯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황제는 선도를 동쪽 땅의 자부선인에게서 배웠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여기서 자부선인은 다름 아닌 우리의 조상이며 동쪽 땅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식자들은 이 점을 애써 부인하려 든다.
자부선인에게서 배운 황제의 선도는 자연히 종주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곤륜산에 중심을 잡았고, 이어서 천축, 즉 인도로 전파됐다.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출현으로 절정을 이룬 뒤 달마선사의 동행으로 다시 회귀해 온 것이 그 동안의 선맥 흐름의 한 가닥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인도의 상황을 예외로 친다면 오늘날 동양의 선맥 또는 도맥은 양대 산맥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 틀림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양대 산맥의 중심은 바로 장백산(백두산)과 곤륜산이다. 지금도 이 두 산에는 최고의 신선 또는 큰 스승으로 추앙 받는 두 분의 신사가 건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두산의 큰 스승은 백봉신사라고 불린다. 물론 이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름으로도 불린다. 곤륜산의 큰 스승은 소륵신사라고 부른다.

백두산의 백봉신사에게는 9명의 수제자가 있고 9명의 제자가 각각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면서 도맥을 관장하고 있다. 백봉신사는 한말인 1905년 홍암 나철에게 백전을 통해 단군의 가르침을 도맥으로 전한 바로 그분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백전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백봉신사의 수제자의 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5)백봉신사 명에 따라 이홍지에 대법 전수 가능성

예나 지금이나 백두산의 백봉신사는 그곳에서 천하의 운기를 조율하면서 좀처럼 거동하지 않는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그 제자들이 큰 스승의 명을 받고 도맥을 전수하고 행공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른바 도의 세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도를 전수받는 것은 매우 예외에 속하는 일이다. 대개 스승이 제자를 골라 '법'과 '인'과 '결'을 전수하여 도맥을 이어가게 한다.

이렇게 볼 때 이홍지에게 대법을 전수한 진도자는 백봉신사의 명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점은 이홍지 자신도 분명하게 밝힐 수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진도자가 이 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 설령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더라도 이홍지가 밝힐 입장이 아닐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이홍지는 스승 진도자가 떠난 뒤 군에 입대하여 지린성 삼림경찰총대의 나팔수로 근무했고 1982년에는 창춘시에 있는 한 식품회사의 보안계에서 일했다. 그 동안에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1984년부터 당대의 기공에 대한 본질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부 기공전수반에도 참가하여 체험을 쌓았다.

이런 이홍지의 경력과 관련해 중국 공안당국은 철저하게 신상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홍지가 네 살 때부터 세 사람의 큰 스승에게서 배웠다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며 자기를 신격화하기 위한 조작극이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성적표까지 공개하면서 평범한 아이였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이홍지가 성장할 때의 이웃 사람들의 증언과 사회에 진출한 뒤의 생활 내용도 밝히고 있다.

중국 당국은 이홍지의 기공에 대한 경력을 1988년 이후부터였다고 공개했다. 기공 경력이 짧은 사감이 초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어릴 때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속이고 있다는 것이 중국 당국의 공식 견해다.

이런 중국 당국의 발표에 대해 이홍지 측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소에 부치고 있다. "거짓말은 영원히 거짓말"인데 어떻게 '참'을 수련하는 사람이 속임수를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이홍지에게 큰 가르침을 전수한 스승들은 남들이 알 수 없게 은밀하게 공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런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베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부연된다.

이 밖에 이홍지의 법륜공에 대해서는 그의 성장 본거지인 창춘에서 기공 수련을 받은 일부 제자들의 내부고발이 있었던 것으로 발표되었는가 하면 기존의 기공단체나 지도자들의 비난과 비판도 있었고 종교단체들의 반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법륜공처럼 단시일 안에 광범위한 회원의 증가가 있게 되면 부작용이란 으레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법륜공의 회원은 중국본토에서만 약 1억 명이고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1억명이라는 숫자는 1998년 말 현재의 중국공산당원 6천 1백만 명보다 많은 숫자이며 법륜공 회원 가운데는 다수의 공산당원이 가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 당국은 1차적으로 법륜공에 가담한 회원들을 탈퇴시키면서 대대적인 법륜공 탄압을 시작했고 드디어 불법화 조치를 단행했다. 장쩌민 중국국가주석은 법륜공같은 "전통적인 미신활동의 확장을 방치하면 우리 당의 진지, 즉 설 땅이 없어진다."고 밝혔다고 한다. 중국 당국은 유심론과 유신론은 유물론과 무신론을 바탕으로 한 마르크스주의의 적이며 중국 정부가 과감하게 공격해야 할 반역사적 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6)중국공산당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에 따라 지금 중국공산당은 전 당원에 대한 '유물론'과 '무신론' 교육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 인민일보에 실린 논문을 보면 '이홍지의 사설을 비판하는 일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무신론 교육을 보급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고 정의할 정도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들은 오늘날 중국의 위기가 어디에 있는지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중국의 역사에서 의화단이나 백련교 같은 비밀결사 또는 신흥종교의 발호가 청나라의 패망을 재촉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법륜공 사태가 어떻게 귀결될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 당국이 그처럼 위기의식을 갖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홍지와 법륜공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응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비정상적이다. 사람들에게 좋은 마음을 갖고 건강을 지키라고 가르치는 비정치적인 단체를 탄압한다는 것은 동서고금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도 집회, 표현,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방식이 문화대혁명 때를 방불케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수많은 죄없는 수련자들을 체포 감금하고 기공서적들을 불태우는 양상은 마치 2천 년 전 진시황의 폭력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바야흐로 이홍지의 법륜공은 중국 내부의 문제에서 국제문제로 부상하고 있으며 인권문제의 본질을 되묻게 해 주고 있다.

이홍지는 1995년 이래 중국을 떠나 미국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홍지에게 영주권을 주어 그의 신분과 활동을 보장해 주고 있다.

이홍지는 마치 오늘의 사태를 예견한 듯 피신(?)한 셈인데 정작 이홍지 자신의 해명은 그렇지 않다. 이홍지는 1992년 닻을 올린 법륜공이 3년 만에 중국 내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졌기 때문에 세계로 전파하는 출발점으로 미국에 자리잡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중국 내에서의 세 확장은 엄청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법륜공은 기간조직으로 법륜대법연구회가 있고 그 밑에 법륜공 총지부가 39개소이고 그 아래 1천 9백여 개의 지부와 2만8천여 곳의 수련장을 갖고 있으며 총 수련인원 약 1억 명에 핵심회원이 2백만 명이라고 한다. 이같은 숫자는 기존의 중국 기공단체 가운데서는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된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도 이른바 기공사 가운데는 엉터리가 적지 않고 사교와 사설로 사람을 현혹하기 일쑤다. 특히 중국에서는 기공사가 수련을 전수하는 곳이 대부분 공원이나 공공장소로 국한되어 있고,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공공집회를 허가 받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기공사들이 공원이나 광장에서 강습비를 받고 기공을 가르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엉터리 기공사들은 처음에는 무슨 큰 공력이나 있는 듯 큰소리 치면서 사람들을 모아 강습비를 받아 챙기고 줄행랑을 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홍지의 법륜공을 이런 엉터리나 사교 집단으로 보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법륜공은 종래의 기공과 한 획을 긋는 차원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법륜공은 종래의 기공이 지닌 문제들을 해소하면서 한 차원 높은 심신수련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종교적 색채 뚜렷한 법륜공

아무리 가짜가 판을 치고 사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엉터리 기공이 단시일 안에 1억 명이 넘는 회원을 갖기란 불가능한 일에 속한다.

그런 뜻에서 이홍지와 법륜공은 무게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법륜공의 엄청난 확산력에는 이홍지의 카리스마적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법륜공의 공법이고 공법이 갖는 효과다.

법륜공은 매우 단순한 다섯 가지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익히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다섯 가지 동작 가운데 네 가지는 이른바 입공으로 서서하는 동작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좌공 즉 앉아서 하는 좌선으로 이루어진다.

서서 하는 동작의
첫째 공법은 불전천수법이라고 부르며 사람 몸의 이른바 백맥을 여는데 공효가 있다고 한다.
둘째는 법륜장법이라고 한다. 이 동작은 생혜증력, 즉 지혜를 생기게 하여 공력을 증가시키는 공법이다.
셋째는 관통양극법이다. 몸 안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공법이라고 일컬어진다.
넷째는 법륜주천법이라고 부르는 동작이다. 이 공법은 온몸에 기를 돌리면서 순환시키는 것이다.
다섯째의 공법은 신통가지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좌선으로 일관하는 방법이다. 비록 앉아서 하는 것이지만 이 공법은 앞에 한 네 가지 입공의 총력을 높이면서 신통력까지 얻게 하는 전반적인 총정리의 수련법이라고 일컬어진다.

법륜공의 이 다섯 가지 동작은 어디까지나 수련의 원만을 얻기 위한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원리와 추구하는 목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진, 선, 인'을 최고 가치로 여기고 심성을 닦고 덕을 쌓음으로써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법륜공은 1992년 5월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의 직속공파로 인정받아 공식활동에 들어갔으나 1995년 이 단체를 탈퇴했다. 중국당국에서는 제명했다고 하지만 이홍지의 탈퇴 주장을 들으면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이미 그때부터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홍지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에 걸쳐 수많은 수련회를 열었으나 자발적으로 열었다기보다 기공과학연구회의 주관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3년 동안의 수련회를 통해 중국에서의 공법 전수는 완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홍지가 기공과학연구회를 탈퇴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단체가 진정으로 기공을 연구하고 보급하기보다는 돈벌이에만 열중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다.

이홍지는 기공을 가르치는 사람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되고 최소한의 비용을 수련자에게 부담하게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홍지는 제자들에게 교재비 이외의 별도 수련비를 받는 사람은 자기의 제자가 아니라고 파문선언을 했다. 어쨌든 이홍지는 법륜공을 수련하거나 전수하는 이들에게 엄격한 규율과 바른 심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홍지의 이런 가르침이나 행동양식은 기존의 기공 지도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기공에서는 애써 피하는 정신적인 요소와 영적인 문제를 법륜공에서는 과감하게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이홍지는 법륜공이 불교는 아니지만 불가의 공법을 공개한 것이며 그 공법은 석가모니 이전의 법문에 속하는 것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불법과 대법을 아우른 이홍지의 법륜대법연구회는 스스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인 중국에서 용인 받을 수 없는 신흥종교의 색채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홍지의 주요 저서인 (중국법륜공)과 (전법륜)을 찬찬히 읽어보면 종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만약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됐더라면 당초부터 종교를 표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홍지의 법륜공은 세기말적인 현상의 하나라는 점에서도 귀추가 주목된다.

배달민족의 삼법수행

우리 민족의 전통 수련법을 알기 위해 흥암 나 철 대종사의 수행방법을 중심으로 우리 배달민족의 전통적인 수련법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뜻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철 대종사가 대종교의 중광에 나선 계기는 물론 구한말의 시대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백두산에서 도천하고 있던 백봉 신사의 명과 영계를 받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백봉 신사는 신비에 쌓인 인물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종교적 차원에서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자료를 토대로 살펴본 결과 그는 실존인물이 분명하며 아직도 생존해 있는 젓으로 확신한다.

나 철 대종사가 백봉 신사의 제자인 두암 백전으로부터 삼일신고와 신사기 등의 책을 전달받았을 때 두암의 나이는 90세였는데 백봉 신사의 나이는 1백세가 훨씬 넘었다고 했다. 내가 갖고 있는 기록으로 셈하면 당시의 백봉 신사의 나이는 1백89세였고 올해 2백82세의 수를 누리고 있다.

백봉 신사의 수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백봉 신사는 인간이란 56억 7천만개의 소신 즉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며 수련을 통해 그것을 회광시키면 대우주와 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백봉 신사가 단군성조 이래의 인연을 말하면서 배달민족의 고난은 지난날의 죗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배달민족을 회광시키고 단군의 가르침을 중광시킬 주역으로 나 철 대종사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수련이나 수도의 경험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도의 세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제자를 선택하는 법이다.

스승이 도맥을 이을 제자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하늘의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스승이 제자에게 도맥을 잇게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진언을 내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책이나 문서를 전하는 것이다.

백봉 신사가 나 철 대종사를 선택해서 도맥을 잇도록 한 것은 후자의 방법 즉 책과 문서를 전하는 방법이었다. 나 철 대종사가 전달받은 삼일신고나 신사기 그리고 단군교포명서 등은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와 도맥 그리고 수행방법의 모든 것을 담은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가운데 나 철 대종사의 유서가 있다. 나 철 대종사는 54세가 되던 병진년 음력 8월15일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조천하면서 여러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특히 '도감'이란 이름으로 쓰여진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유일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도감'이란 문자 그대로 '수도하는데 거울'을 삼으라는 뜻이고 '수행의 핵심을 깨우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감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삼일신고의 신훈에 있는 자성구자 강재이뇌라는 말이다. 둘째 부분은 지감 조식 금촉으로 수행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일신고 진리훈에 나오는 말이다.
이 두 부분은 믿음 곧 신앙과 수련 곧 수도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알파이고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성구자' '강재이뇌'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자성구자'란 '자기의 본성'에서 하늘 또는 한얼의 '씨앗'을 찾으라는 뜻이고 '강재이뇌'란 그렇게 찾으면 '너희 머리 속'에 '내려와 있느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자성 즉 자기의 본성이란 자기의 진성을 말하는 것이며, 뇌란 머릿골 즉 신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사상 내지는 전통신앙의 근본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과 내가 하나이고 하늘의 씨앗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내 머리 속에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한얼과 참은 내 안에서 구하는 것이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훈'에는 '자성구자' '강재이뇌'라는 말에 앞서서 성기원도 절치견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나타난다'는 뜻에서 '견'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현'이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잘못된 주장도 있다. 첫째의 잘못은 삼일신고의 원전을 철저하게 고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의 잘못은 수련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데서 온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성기원도'의 참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신지성'하고 '견신지기'하기 위한 기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의 기운을 보기 위한 기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절기하면 불견진부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소리와 하늘의 기운을 떠나거나 끊고는 참의 모습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기원도'하면 반드시 하늘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절친견의 참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기원도'란 어떻게 하는 기도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오음오기'로 하는 기도이다. '오음오기'로 하는 기도는 '단전'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이고 온몸을 진동시키는 기도이다. 그 기도는 하늘의 파장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소리와 하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기원도'란 희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현재완료형의 기도'이고 '감사의 기도' 내지는 '성취의 기도'인 것이다.

이 기도는 삼일신고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최고의 기도 또는 기도의 진수 내지는 참기도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종교이든 간에 이런 기도와 수행 방법이 아니고는 공효가 이루어질 수 없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나 철 대종사가 '도감'에서 일깨워주고 있는 수행법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감' '조식' '금촉'이다. 이것을 일컬어 '삼법수행'이라고 하거니와 이 세 가지 방법의 수행은 모든 종교의 수행방법을 아우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단군은 공자나 노자, 석가보다 훨씬 앞서서 세상에 뜻을 펼쳤으며 유교는 그 뿌리를 '지감법'에 두고 있고, 도교는 그 뿌리를 '조식법'에 두고 있으며, 불교는 그 뿌리를 '금촉법'에 두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일컬어 풍류라, 삼교의 근원이 선사에 상비하였으니 실로 삼교를 포함한 군생을 접화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연원과 내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지감법'이란 글자 그대로 느낌을 끊는 것을 이르는 것인데, 느낌에는 기쁨과 두려움, 슬픔과 성냄, 탐냄과 싫어함의 여섯 가지가 있다. 공자는 이 느낌을 정심 즉 바른 마음과 수신으로 그치게 하고 제가하고 치국평천하하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조식법'이란 숨쉼을 고루하는 것을 이르는 것인데, 숨쉼에는 맑은 김과 흐린 김, 찬김과 더운 김, 마른 김과 젖은 김이 있다. 노자는 여섯 가지 숨쉼에서 허심으로 숨을 고루고 세상을 초탈한 자연양생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금촉법'이란 부딪침을 금하는 것인데, 부딪침에는 소리와 빛깔, 냄새와 맛, 음탕함과 살닿음이 있다. 석가는 정심 곧 고요한 마음으로 부딪침을 다스리고 유물적인 부귀를 멀리하면서 유심적인 자타일체의 경지를 가르쳤던 것이다.

지감법은 한마디로 좌법 즉 앉는 자세에서 좌우되고, 그것은 충서공부이고 예의로 귀결된다. 조식법은 한마디로 어떤 호흡법을 하느냐에서 판가름 나고 그것은 흔히 일컬어 신선공부라고도 하는데 조식법의 귀결은 조화이다. 금촉법은 한마디로 수인법에서 좌우되고 그것은 참선공부이고 자비로 귀결된다.

이 세 가지 수행법은 각각 따로 할 수도 있지만 삼일신고에서는 반드시 같이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종교 가운데 이 세 가지를 같이 수행하는 곳은 극히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에 집중하여 2천년, 3천년의 세상제도를 했지만 아직도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것은 세 가지 방법을 하나로 묶는 '삼법귀일'일 수밖에 없으며, '삼법귀일'이면 곧 만법귀일로 귀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지감법이 좌법 즉 앉는 자세에서 판가름난다면 어떻게 앉아야만 할 것인가. 흔히 수도하는 기본 좌법을 말할 때 반가부좌나 결가부좌를 필수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런 좌법이 나름대로의 뿌리와 전통이 있는 것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 배달 민족의 전통적인 좌법으로 정통성을 갖는 것은 그런 좌법이 아니다.

우리의 정통좌법은 천부좌법 또는 일자좌법이라고 일컬어지는 궤좌 즉 무릎을 꿇고 앉는 좌법이다. 삼일신고의 독법을 쓴 고구려의 마의극재사는 단정히 꿇어앉는 '궤좌'야 말로 우리의 정좌법임을 밝힌바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정통좌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른바 양반다리 좌법으로 앉던가 반가부좌나 결가부좌가 좌법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나는 좌법이나 자세가 개인의 수도 또는 수행을 좌우하는 기본조건이라고 강조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좌법이나 자세는 나라와 민족의 흥망과도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의 고난은 우리 민족의 좌법 내지는 자세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법이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바른 생각과 건전한 육체를 보지 할 수 없는 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지도자들의 좌법이나 자세가 바르지 못한 것을 보면 가슴이 절로 무거워진다. 더군다나 수많은 청소년들의 좌법이나 자세가 비뚤어지고 있는 상황은 바로 교육부재의 위기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바로 잡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좌법과 자세를 바로잡는 것에서 시발을 찾아야 하리라고 믿는다.

꿇어앉는 궤좌는 사사로운 마음이 나오는 육체를 굴복시켜서 우리의 한얼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첩경인 것이다. 앉는 자세 그 자체가 큰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식사를 할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식사한다면 음식 맛도 맛이거니와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게 마련이다.

수신 즉 몸을 닦는 길은 무엇보다도 정심으로 하여야 되는 법이다. 꿇어앉는 자세인 궤좌는 바로 정심공부의 첫 단계라고 강조해두고 싶다.

조식법이 숨쉬기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라면 어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가. 숨쉬는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 무수히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흡 방법의 차이에 따라서도 도가에서는 수많은 유파가 생겨났으며, 종교나 종파에 따라서도 호흡의 방법을 달리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공효를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호흡 방법이 판이하다. 무도나 차력술을 하는 경우에는 이른바 지식 즉 숨을 끊는 방법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심을 이룬다. 이에 반해 일반적인 의미에서 수도하는 호흡은 끊어지지 않는 자연 호흡이 주종을 이룬다.

그렇다면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조식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순리에 맞는 자연 호흡법을 기조로 삼는 것이다. 순리의 자연 호흡법이란 끊어지지 않는 일원을 이루는 숨쉬기를 말하는 것이다. 하늘도 둥근 일원이고 해도 일원이다. 지구도 일원이고 달도 일원이고 별도 일원이다. 그런 일원의 호흡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호흡법은 천부의 호흡법이라고 일컬어진다. 천부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은 천인합부 즉 하늘과 사람이 하나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단군 이래 전해 내려오는 천부경은 바로 '천인합부'의 가르침을 말해주는 경전이다. 그것은 하늘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땅도 사람도 모두 하늘의 이치와 상통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하늘의 운행과 땅의 운행 그리고 인체의 운행이 모두 같은 이치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천부경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시무시로 시작해서 일종무종일로 끝나는 81자로 이루어진 경전이다. 여기에서 일은 억천만물의 본이면 시이며 종수이다. 일은 둥그렇게 구부리면 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에서 종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부경은 법륜운화운전의 법리를 밝힌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천부경은 천도와 지구가 불식 즉 쉬지 않고 순환하는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인체의 기와 혈도 불식 순환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천부경은 비단 우주의 대도뿐만 아니라 사람의 수련 특히 호흡을 통한 운화운전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원리는 모른채 천부경이 있으니 지부경도 있고 인부경도 있다는 사설이 횡행하고 잘못된 호흡 수련법으로 세인을 현혹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늘의 운화와 순환은 길고 멀고 느린 것이 특징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량 무강 무한한 것이다. 이에 비해 사람의 운화와 순환은 상대적으로 매우 짧고 급하고 빠른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사람의 운화와 순환을 하늘의 법도에 맞추려면 호흡을 길고, 멀고 느리게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하늘 이치에 맞는 호흡법은 곧 여천합덕하는 것이며 하늘이 곧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울러 하늘의 운화와 순환이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사람의 호흡도 그 운화와 순환이 인체의 중심 곧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부경에서는 그것을 본심 본태양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단전을 뜻하는 것이다.

금촉법이 수인법에서 좌우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불가에서는 수인법에 따라 공효가 다르다고 보기 때문에 수많은 방법을 답변확정하고 있다. 특히 밀교의 경우는 3백가지 이상의 수인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인 수인법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하나는 악고법이고 또 하나는 합장법이다.

악고법이란 어린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태어날 때의 주먹 쥔 손의 모양을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준 최초의 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합장법이란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두 손을 모아 하늘에 비는 자세를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온갖 고난에 시달리면서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궁극적인 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는 육체의 오관이 소리와 빛깔, 냄새와 맛, 음탕함과 살닿음의 촉각으로 말미암아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사후의 영혼까지도 이것으로 결박당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요히 앉아 합장하므로 불성을 자각하여 금촉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삼일신고에 보면 금촉법으로 삼일신고를 반드시 읽으라고 되어 있다.

"깨끗한 방을 가려 진리도를 벽에 걸고 세수하고 몸을 깨끗이 하며 옷깃을 바로 하고 비린내와 술을 끊으며 향불을 피우고 단정히 꿇어앉아 한얼께 묵도하고 굳게 맹세를 지으며 모든 사특한 생각을 끊고 삼백예순여섯알의 단주를 쥐고 한마음으로 읽되 원문 3백66자로 된 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주에 맞추어 끝마칠지니라"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삼일신고를 읽는 회수에 따라서 나타나는 공력을 말하고 사특한 생각으로 읽는 형식만 취하면 오히려 수명과 복록이 줄게 되어 재앙을 입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지감' '조식' '금촉'의 세 가지 방법은 결국 하나를 생각하는 궤좌와 하나로 이루어진 둥근 호흡과 하나되기를 비는 합장으로 상징된다고 할 수 있다. 삼일신고는 지조금의 삼법을 오로지 힘쓰게 되면 '성통공완'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성통공완'이란 수행의 목표인 동시에 최고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삼일신고의 가르침은 성통공완이란 결국 수련과 봉행을 함께 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아무리 수련에 온 정성을 기울인다고 할지라도 수련에만 시종하면 소승독선에 그쳐 대도에 어그러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봉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련과 표리를 이루고 본말을 이루는 것으로 선행과 음덕 그리고 호사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성통공완'한다는 것은 홍익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홍익인간'이란 말의 참뜻은 '성통공완'으로 표상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백두산의 백봉 신사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수행은 '내수'와 '외자'라고 말한바 있다. '내수'란 곧 내적인 수행을 일컫는 것인데 그 내용은 좌법과 호흡과 독경이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외자'란 자선사업뿐만 아니라 음덕과 선행을 쌓는 것이다. 백봉 신사가 말하는 홍익인간의 근본정신은 일개인이나 일개의 국가 또는 하나의 사상이나 하나의 종교의 테두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얼의 뜻을 받들어 무사의 정신으로 대도를 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 철 대종사의 수행법은 삼법수행과 함께 세 가지의 특징이 크게 부각된다. 첫째는 단군 유적지 순례를 통한 수행이고 둘째는 만주 무송의 백두산 밑에서 72일간의 단식 수행을 한 것 그리고 셋째는 구월산 삼성사에서 수행의 최고 경지인 절식으로 순명 조천한 것이다.

특히 72일간의 단식수행은 그것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법 자체로서도 크게 기록되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종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의 40일간의 광야에서의 단식 기도가 괄목할 만한 것이고 석가의 단식고행이 수련의 수범이 된 바 있다.

그러나 일찍이 72일간의 단식이란 기록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나 철 대종사의 그런 기록은 엄동설한의 겨울철에 그것도 만주땅 백두산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거의 기적 같은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누구나 죽었으리라고 생각하던 혹한의 상황에서 몸에서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72일간의 단식 수행을 마무리 지은 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런 단식 수행을 두 가지 각도에서 풀이한다.

첫째, 나 철 대종사의 인연이 남달랐고 단군 이래의 수련비법을 전수 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만약 수련 비법인 해의 기운과 달의 기운 그리고 북두칠성의 기운을 운화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 나 철 대종사가 좌정했던 무송의 영산은 백두산의 영기를 받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곳은 기록에 따르면 단애 윤세복 종사가 대종교 시교당과 학교를 세운 곳이기도 하지만 백봉 신사가 백두산 밑의 수련 거점으로 지정한 곳이기도 했다.

만약 백두산의 영기가 스며 있는 곳이라면 그 앉은 자리에서 더운 기운이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까닭이 없을 것이다.

나 철 대종사가 스스로 숨을 끊은 절식으로 순명했다는 것은 종교의 역사로나 수행의 역사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석가는 수를 다해 열반했고, 공자는 병사했고, 노자는 우화등선했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인간의 죄를 대속했다.

그러나 나 철 대종사는 스스로의 숨을 끊어 버린 것이다. 수련의 경지에서 말한다면 숨을 스스로 절식하여 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코나 입으로 숨을 쉬지 않고 끊는다고 할지라도 체호흡 내지는 세포호흡을 하게 되면 죽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 다다른 경우일지라도 세포 하나 하나에게 숨을 끊도록 하는 공력을 갖고 있다면 물론 숨은 끊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상상하기는 어려운 경지이다. 바로 이런 경지를 나 철 대종사는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아래는 요가에서 말하는 차크라.

 

 

 

차크라chakras는 산스크리트어로 '바퀴', 또는 '원형'을 의미한다. 우리 몸의 구성 입자는 모두 둥근 형상을 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 운동의 중심센터들을 차크라라고 부르는 것이다. 
차크라는 구체적 형태를 가진 기관이 아니며, 물질적 혹은 정신의학적 견지에서는 정확하게 규명할 수 없는, 영적 에너지와 신체적 기능들이 통합되는 영역이다. 일곱 개의 차크라가 깨어남으로써 본래 인간이 가진 자연치유력이 극대화되고, 의식의 완전한 평정상태에 이르게 된다.
 
 
 
물리학자 브라이트 클레인은 ‘인간의 물리적인 육체 이면에 영적인 신체가 있는데, 영적 실체는 빛의 진동에 의해 구성되고, 7단계의 다른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몸의 구조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구성된 에너지체體(Energy body)가 존재하며, 에너지체는 일곱 개의 차크라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중심부 즉, 차크라들은 항상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교감신경계와 부교감신경계, 자율신경계를 비롯한 우리 몸 구석구석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우주에너지의 상승경로
차크라는 깨어나지 않은 우주에너지, 쿤달리니의 상승경로이다. 쿤달리니는 우리 몸의 회음부(생식기와 항문 사이) 부근에 뱀이 또아리를 튼 모양으로 잠재되어 있는 에너지이며, 이 모양은 나선형, 즉 우주의 생명에너지를 의미한다. 인간 안에 내재된 쿤달리니가 깨어나지 않는 이상 에너지체의 하부는 닫혀있는 상태이다. 인도의 고전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수행을 통해 각성된 쿤달리니는 에너지 바디에 각인된 일곱 차크라를 차례대로 경유하여 마지막 최고의 상승단계에 이르러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우주의식과의 합일을 이룬다고 한다. 쿤달리니의 잠자는 힘을 일깨워 그것을 차차 보다 높은 단계로 이끌어냄으로써 에너지체는 완전한 균형상태에 이르게 된다.
일곱 개의 차크라
각각의 차크라는 아랫부분부터 무라다라 차크라(muladhara chakra), 스바디스나타 차크라(svadhishana chakra),마니푸라 차크라(manipura chakra), 아나하타 차크라(anahata chakra), 비슈다 차크라(vishudda chakra),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 사하스라라 차크라(sahasrara chakra)이다. 이들은 위치와 특징에 따라 각기 다른 장기와 신경계와 연관되어 있어 감정을 주관한다.

제 1차크라에서 깨어난 쿤달리니는 각 단계별로 에너지 변화를 통해 상승한다. 각각의 단계를 지날 때마다 육체와 감정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차크라는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에너지를 느끼면서부터 인식되고,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차크라의 경험은 자신의 본성과 내재되어 있는 능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눈에 보이는 육체 너머의 그 무엇을 느끼고 인식하게 됨으로써 그것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체에 깃든 우주의 원리
엄밀히 말하자면 차크라는 정신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3차원의 현실세계에서 이해되지 않는 정신이라는 개념을 차크라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4차원의 우주적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상징이다. 따라서 쿤달리니가 각 단계의 차크라를 지나는 동안 하위의식은 보다 상위의식을 위하여 준비되고 변형되어 궁극의 자리에 다다른다. 그러나 각 차크라에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곱 개의 시스템은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체계, 누구라도 수행과 명상을 통해 단계를 밟아 가면 다다를 수 있는 잠재된 에너지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 무라다라 차크라(muladhara chakra)
흔히 근본 차크라라고 부르며, 척추 맨 아래 생식기와 항문사이, 즉 회음부에 위치하고 있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내재해 있는 자리. 테스토스테론호르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특히 남성의 성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내재된 감정은 안정의 욕구이다. 육체 수준의 에너지이다.
 
 
 2. 스바디스나타 차크라(svadhishana chakra)
생명이 잉태되는 자궁이 있어 때론 영혼의 자리라고도 부른다. 배꼽아래 세 치 되는 부위 즉, 단전에 위치하고 있다. 에스트로젠, 프로제스테론 같은 여성호르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유전자 코드나 형질, 난자 정자의 생성에 영향을 미치고, 비뇨기 계통을 관장한다. 1, 2차크라가 약하면 삶의 의욕을 잃기 쉬우며, 내재된 감정은 성에 대한 집착과 가족에 대한 애착이다. 영체 수준의 에너지이다. 
 
 
 3. 마니푸라 차크라(manipura chakra)
태양신경총 차크라라고 하며, 동양의학에서 중완이라 하는 배꼽자리에 위치해 있다. 부신, 취장, 비장, 위장, 간장 등 신체 내의 모든 중요한 생리기관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위장기능이 떨어지며 의욕이 감퇴된 1, 2차크라가 생의 욕구에 대한 의욕 상실이라면, 3차크라는 일에 대한 의욕 상실이다. 내재된 감정은 영생과 권위, 명예에 대한 집착이다. 천체 수준의 에너지이다.
 
 
 4. 아나하타 차크라(anahata chakra)
심장 차크라라고 하며 가장 중추적인 차크라이다. 앞의 1, 2, 3 차크라들은 외부로부터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 신체에 축적하는 것에 반해, 아나하타 차크라는 축적된 에너지를 외부로 투사하는 첫단계로 알려져 있다.가슴의 한복판, 중단전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늘날 심령과학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초능력은 이 제 4차크라를 통해서 나타난다. 심장과 폐장을 관장하며, 4차크라가 약하면 항상 불안하고 초조함을 느낀다. 내재된 감정은 사랑, 믿음, 헌신이다. 균형적 수준의 에너지이다.
 
 
 5. 비슈다 차크라(vishudda chakra)
목 차크라 또는 힘의 차크라라고 한다. 인후부에 위치하며, 갑상선, 상피소체, 타액선을 관장한다. 모든 에너지를 순화하고, 머리로 이동시키는 다리 역할을 한다. 갑상선은 감정변화에 민감하다. 따라서 5차크라가 약하면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기 힘들어진다. 내재된 감정은 지성이다. 인간적 수준의 에너지이다.
 
 
 6. 아즈나 차크라(ajna chakra)
흔히 제3의 눈이라고 하는 영안의 차크라이다. 상단전(미간)에 위치해 있고,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정수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이다. 타인의 에너지를 읽거나 투시하고, 미래를 보는 예지능력 등이 이 차크라에서 나온다. 제 5까지의 차크라들에 의해 잘 운행되고 조정되어 승화된 쿤달리니를 빛으로 전환시켜 온 우주에 번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내재된 감정은 실현과 엄격, 통찰과 직관력이다. 회개와 금욕수준의 에너지이다.
 
 
 7. 사하스라라 차크라(sahasrara chakra)
우리말로는 두정 차크라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왕관차크라라고 부른다. 머리의 중앙 백회에 위치해 있고, 송과체와 시상하부를 관장한다. 6개의 차크라들이 잘 운행되고 조절되면 스스로 빛을 발한다. 성인들의 머리 주위에 비치는 후광은 사실 이 제 7차크라의 빛이며 오라(aura)라고도 한다. 요가를 행하는 이들이 이르고자하는 최고의 자리이며, 쿤달리니가 백회를 뚫고 나가 우주에너지와 일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재된 감정은 완전한 합일이다. 진리에 다다른 수준의 에너지이다.
 
*각 단체마다 상징빛깔이 조금씩 다르다.
 
 
 준비수련

① 자리에 누워서 양다리를 천장을 향해 들어올린 후, 발끝을 몸쪽으로 당긴다.(이때 배와 다리가 90도가 되도록 한다.)
② 그대로 아랫배에 집중하고 약 5분정도 멈춘다.(여러 명이 함께 할 때는 번갈아 가면서 죽비 같은 것으로 발바닥을 쳐주는 것도 좋다.)
③ 천천히 다리를 내려놓고, 아랫배를 시계방향으로 쓸어준다.
 
진동수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단전에 집중해 복압력을 키워서 진동수련시 집중력을 키우고, 기운이 뜨지 않게 돕는다. 또한, 다리 뒤쪽 방광경을 자극해서 하체 기혈순환을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다.
1-5번 차크라 깨우기

① 양다리를 어깨넓이 만큼 벌리고 양어깨에 힘을 뺀다. 입끝을 당겨 얼굴의 긴장을 푼다.
② 천천히 양무릎에 가볍게 반동을 주며 점점 허리, 가슴, 어깨로 동작을 키워간다. (이때 의식은 용천에 집중한다.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박자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좋다.) 
 
③ 어느 정도 진동에 익숙해지면 의식을 용천에서 다리를 타고 회음, 제 1차크라에 집중한다. (집중이 잘 안되는 경우 마음속으로 ‘회음, 회음’하고 부르거나, 해당 차크라의 빛깔을 떠올리면 효과적이다.)
④ 회음에서 제 2차크라 단전으로 의식을 옮긴다. 단전 - 배꼽 - 가슴 - 목까지 각 차크라별로 2∼3분정도 집중한다.
⑤ 목까지 집중한 후에는 용천에서 목까지 에너지가 흐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몸에 집중한다.
(전체 진동시간은 개인에 따라 다르나 15분-20분 정도면 적당하다.)
⑥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자리에 편하게 앉는다. 양손은 무릎 위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놓는다.
⑦ 다시 한번 1번부터 5번 차크라까지의 움직임을 느껴보고, 5번 차크라에서 마음을 어깨로, 어깨에서 팔을 타고 손바닥 손끝으로 보낸다.
⑧ 손바닥과 손끝에 에너지가 모이는 느낌에 집중한다.
⑨ 천천히 숨을 입으로 들이마시고 손끝으로 내쉰다고 생각한다. 약 3∼4회 반복한다.

※ 6, 7번 차크라를 깨우는 뇌간 진동수련은 해당 차크라 기사와 함께 실립니다.
 

 

 

 

 

 

흠 저도 선도,무속,기공 공부를 하다보니 어느정도 알게됫는데

 

인도에서는 차크라를 말할때 팔문을 자주 씁니다.

 

 

항문 차크라 [기본차크라] - 골반 바로 아래에 위치.

 

천골 차크라 [단전 차크라] - 자궁 높이에 위치

 

배꼽 차크라 [ 복강신경조직 차크라 ] - 복강신경조직 높이에 위치.

 

심장 차크라 - 심장 높이로 신체의 정 가운데인 흉골에 위치.

 

목 차크라 - 후두 높이에 위치.

 

이마 차크라 [ 미간 차크라 ] - 양 눈썹 사이에 위치. (일명 제 3의 눈)

 

정수리 차크라 - 머리의 정수리 지점에 위치.

 

로 나타납니다

 

경혈 또는 경락은 몸 전채에 엄청 복잡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몸가운대 급소라고 해도 됩니다.

 

경혈을 자극 하면 기의 흐름이 원활해 지고 한의학에서는 침이나 뜸으로 자극을 하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경락 마사지도 그 예로 말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차크라가 몸에서 기가 모이는곳이나 기가 잘 움직일수 있는 대로나 광장이라면

 

경혈은 온몸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중국에 내가기공을 수련하면 소주천이라는 것과 대주천이라고 하는것이 있는데

 

소주천은 기를 임맥 독맥 대맥 충맥을 따라서 도는데 독맥은 척추를 따라 흐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소주천을 하면 차크라가 말하는 길도 자연스럽게 따라 흐릅니다.

 

소주천을 계속하면 머리쪽에도 기감이 생깁니다. 이때 미간차크라와 정수리에 차크라도

 

자극하게 되는거죠.

 

대주천은 전신에 미새기맥까지 소통하는것인데 이것을 하면 20분만 해도 전신에

 

활력을 되 찾습니다. 이때 경혈을 흐르게 되는겁니다.

 

참고로 서양의 마법에도 차크라를 사용하는데 각각 문화권 마다

 

차크라의 설명 위치가 다릅니다.

 

어디는 정수리 미간 목 심장 명치 단전 음부 발바닥 을 말하는 곳도 있고요

 

어디는 척추에만 다섯개 이상이 배치된 곳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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