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차요.

숨이차요.

작성일 2013.01.1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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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이제스무살도니는여자입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뛰지도않고좀만움직이면 숨이차고 가끔헛기침이나고 가래는모르겠고 가슴이뛰고 숨을허떡거리면서 담배는평소에5~10개사이로핍니다.
이거무슨증상이에요..?많은댓글정확한답변기다립니다.


#누우면 숨이차요 #걸으면 숨이차요 #말할때 숨이차요 #밥먹을때 숨이차요 #밥먹으면 숨이차요 #계단오를때 숨이차요 #가끔 숨이차요 #잠잘때 숨이차요 #임산부 숨이차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심심한 위로에 말씀을 올립니다

담배를 금연하여 보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헬스코치]

'한지붕 두 가족' 폐암,

 두려워 마세요

 

중앙일보

 

 

입력 2011.08.23 15:31

 

암을 이기는 정보
한국의 암을 이야기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늘 가장 먼저 나오는 암이 폐암이다.

유명 코미디언 故이주일씨가 폐암으로 사망하면서

폐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한 때 금연운동이 확산되기도 했다.

폐암은 암으로 인한 사망률 중 가장 높아 일반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만,

실상 폐암에 대한 지식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저 두려움의 대상,

금연만 하면 100% 예방할 수 있는 암 정도로만 알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폐암은 조직학적으로 크게 둘로 나뉜다.
우선 폐암의70% -80%를 차지하며 임상적으로 다양한 진행 패턴을 보이는

비소세포성 폐암(NSCLC ; Non-Small Cell Lung Cancer) 이 있고,

또 하나는 세포 크기가 작아서 이름 붙여진

소세포성 폐암(SCLC ; Small Cell Lung Cancer) 이 그것이다.

이렇게 둘로 나눈 이유는 둘 사이의 병기 구분법이 다르고

치료 원칙이 다르며 결과적으로 예후도 약간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폐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소세포성 폐암은

크게 편평상피암 (Squamous Cell Carcinoma),

선암 (Adenocarcinoma), 그리고

대세포암 (Large Cell Carcinoma)로 대별되는데

편평상피암은 한국에서 가장 쉽고 흔하게 발생하며 흡연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전에 폐결핵을 앓았던 환자에게서 유병율이 높으며 폐의 중심부

 (폐와 폐사이나 종격동 가까이에 위치)에서 흔하게 발생한다.

선암은 특이하게 흡연과 직접 관련이 거의 없고 미국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폐암인데

한국에서도 점차 발생율이 높아지고 있고 다른 폐암이 남자에게서 잘 생기는 반면

선암은 상대적으로 여자에게서 많으며 폐의 중심부 보다는 변연부

 (폐의 주기관지에서 먼 곳에 위치)에서 발생한다.

대세포암은 남자에게, 폐의 변연부에 흔하게 생기며 흡연과 관련이 높다.

비소세포성 폐암의 병기는 미국 TNM

 (T ; Tumor 종양, N ; Lymph Node 림프절, M ; Metastasis 전이)

병기 구분 시스템에 의해 종합병기 (T+N+M) 제1기부터4

전체 폐암 환자의 70% 정도를 차지하기 때문에 예후가 불량한 것으로 나타난다.

초기인 제1기의 경우 수술적 절체가 성공적이었을 경우5년 생존율이80%에 이를 정도로

예후가 좋은 반면,

제3기의 경우 5년생존율은 10%-15%에 불과할 정도로 예후가 불량하다.

한국은 대부분 환자가 병원을 늦게 방문하거나 다른 민속의학이나 대체의학의 유혹에 빠져

대부분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진단을 받기 때문에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상황이다.

비소세포성의 치료 원칙은 초기인 제1기와 제2기는 수술이 가장 효과적이며 표준치료이다.

수술이 어렵거나 당뇨나 고혈압이 심해

수술 자체가 불가한 경우에는 방사선치료가 대안이기는 하지만

수술단독 치료와 방사선단독치료를 비교했을 때

수술 단독치료가 더 좋은 치료 성적을 내고 있다는 것은

여러 임상 논문결과가 증명해주고 있어서 가능하다면 수술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국소 진행 병기인 제3기 (병의 침범 정도에 따라 IIIA기와 IIIB기 둘로 나뉜다.)의 경우IIIA기는

수술이 원칙이고 대개는 방사선치료와 항암제치료가 병용시행되는데IIIB기의 경우는

일부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방사선치료와 항암제치료만으로 치료를 하게 되고

이런 치료 형태가 표준 요법이 된다.

전이 병기인 제4기는 수술이나 방사선치료 보다는 항암제치료가 원칙이며 필요에 의해

증세완화목적의 방사선치료가 시행되기도 한다.

소세포성 폐암은 병기 구분이 비소세포성 폐암과 다른데

일반적으로 TNM 병기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

제한기 (LD ; Limited Disease) 와 확장기 (ED ; Extensive Disease) 둘로만 구분한다.

제한기는 한 쪽 폐를 포함하고 있는 흉곽내에 암이 존재할 경우를 말하며 이를 벗어난 경우

(다른 장기로의 전이가지 포함)를 확장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소세포성 폐암은 흡연과 관련이 있고,

남자에게 많으며 폐의 중심부에 생기는 것이 특징인데 비소세포성 폐암에 비해 빨리 자라고

원격 전이를 더 잘하는 임상진행경과를 보인다.

제한기의 경우 드물게 수술을 시도하는 병원도 있기는 하지만,

표준 치료원칙은 항암제치료와 방사선치료의 병용 요법이다.

그 이유는 수술로 얻는 결과가 항암제+방사선치료 요법에 비해 크지 않으며

소세포성 폐암은 항암제와 방사선치료에 비교적 반응을 잘한다.

즉 반응율이 높다는 이야기인데 이를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소세포성 폐암을 항암제와

병용요법으로 시작하면 암의 크기나 부피가 빨리 줄어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암의 크기나 부피가 줄어든 상태로 암이 완전 사멸하면 정말 좋은데

(물론 완전 소멸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소세포성 폐암들은 이런 치료 반응이

유지되는 기간이 그리 길지가 않다.

이를 치료반응 유지기간이라고 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수개월정도 지나면

다시 국소재발하거나 원격 전이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체적으로 제한기의 소세포성 폐암의

평균 생존 기간은 20-25개월 내외이며 4년 생존율은20% 정도이다.

확장기의 경우에는 항암제가 표준 치료이며 전이된 장기의 증상에 따라

증세완화 목적의  방사선치료가 시행되기도 하며

평균생존 기간은1년 내외,

2년 생존율은 5% - 10% 에 불과하다.

폐암은 아직도 무서운 암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초기진단이 가능하다면

수술에 의해 5년 생존율이70% - 80% 에 이를 정도로 치료성적이 나쁘지 않다.

폐암만의 특별한 증상이 없어서 진단이 늦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지만,

평소에 자기 몸에 관심을 갖고 병원에서의 검사에 인색하지 말고

금연을 생활화하면 보다 높은 생존율이 기대되는 암이다.
암이란닷컴 최상규 대표
'암을 이기는 정보' 칼럼 더 보기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최철주 칼럼니스트

[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

 

시계 작은바늘 100바퀴만 돌면 난 저세상에…

 

 

 

기사입력 2012-10-09 03:00:00

기사수정 2012-10-09 21:01:30

 

 

 

<8>무의미한 연명치료하다 죽는 사람 매년 3만 명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서울대병원은 우리나라 의료 권력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도에서 당일치기로 드나드는 해녀에서부터 장차관과 국회의원,
전현직 대통령이 기꺼이 진료를 받는다.
전국에서 몰려든 환자들로 병원은 언제나 남대문시장처럼 북적거린다.

이곳에서 ‘의사 3분 진료’를 거친 후 느끼는 허망함과 쓸쓸함을 털어내지 못하는
환자들이 본관 앞 나무그늘에서 온갖 상념에 젖은 채 앉아 있다.
금연구역인데도 꾸역꾸역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사람도 있다.
가을 날씨를 만끽하기 위해 링거병과 항생제 등
각종 의약품을 주렁주렁 거치대에 달고 산책하는
환자들이 맨 먼저 마주치는 것은 본관 앞 시계탑이다.

여론조사에선 “연명치료 중단 찬성”
그들이 올려다보는 시계탑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2년 전이었다.
내 옆에 있는 중년의 남자 환자가 아내로 보이는 여성에게 턱으로 시계탑을 가리키며
저 작은 바늘이 100여 바퀴를 돌 때쯤 자신은 딴 세상에 가 있으리라고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내 아내도 귀담아들었다.
시계의 작은 바늘이100여 바퀴를 돌면 두 달이 채 못 되는 세월이다.
아니야,
1000여 바퀴야,
왜 그리 마음이 약해,
하고 여자가 남자를 쳐다보며 정정해 주었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1000여 바퀴?
그러면1년 반 정도로 수명이 늘어난다.
그 말기 환자가 세상을 떠나는 시간을 계산할 때 일반 환자들은 삶의 시간을 셈할 것이다.
시계탑은 생사의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저리도
다른 계산법을 주었나 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쯤 낯익은 노년의 신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더위가 시작된7월 중순이었는데
그는 검은 중절모를 깊이 눌러 쓰고 검은 겨울 외투에 가죽장갑까지 끼었다.
면도도 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부도난H그룹 C회장이었다.
대장암 판정을 이유로 형 집행정지 결정이 내려진 시기였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바로 시계탑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때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으로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으나 아내의 신경을 건드릴까 봐 그만두었다.
재벌과 권력 돈과 명예 그리고 삶이란 주제들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로부터 다시2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허대석 종양내과센터장과의 인터뷰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 쉼터에 앉았다.
1세기 전에 세워진 시계탑은 수많은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허 교수는 벌써 수천 명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잊어버린 죽음은 이의 몇십 배에 이를 것이다.
본관에 있는 그의 연구실은 각종 데이터로 넘쳐 났다.
그는 얼마 전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며
응급환자를 봐 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우리들은 너무 죽음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독특한 문화 때문에 삶이 고달프다고도 했다.
온 가족이 동으로 서로 뛰어다니면서 끝까지 환자를 치료하려고 명의에게만 매달리는
우리의 임종문화에 어떤 모멘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다가 사망한 환자가 한 해에 벌써3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죽음 문화의 실상을 알려주는 숫자입니다.
매년 총사망자25만 명 중18만 명이암 등
만성질환자인데 그중 18% 정도가 연명치료를 받은 셈이지요.
국민건강보험공단의2007년도 자료를 기준으로 분석해 낸 것입니다.
실제 이 자료에 잡히지 않는 것까지 감안하면 사망자는 훨씬 많아요.”

중환자실이 없는 요양시설이나 자택에서 사망하는 연명치료자도 허다하다.
동네마다 알게 모르게 간병을 받고 있는 이른바 식물인간까지 감안하면
무의미한 연명치료 사망자는 더욱 늘어난다.
우리의 임종문화가 매우 거칠고 환자의 존엄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족이 받은 상처도 엄청 컸으리라고 짐작이 간다.

허 교수는15년 전부터 사전의료의향서
(이전에는 생전 유언 또는 사전의료지시서로 불렸다) 쓰기 캠페인을 벌여 왔다.
그가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을 겸임하고 있었던
2009년에는 이 의향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바탕을 마련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환자는 단순히 죽음의 시간을 연장하는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가 희망하면
사전의료의향서를 제출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공공의료기관으로서의 롤모델이 되는 기회였다.

죽음 맞닥뜨리면 환자-가족이 반대
“여론조사를 하면 대부분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찬성하면서도
막상 죽음과 맞닥뜨리면 환자나 가족이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의료진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냥 마지막까지 치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고 있어요.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동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겐 그게 없어요.
TV에 의학 드라마는 엄청 늘어났는데
죽음 문제 처리는 어디까지가 최선인지 아직 정리가 안 됐어요.”

2009년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에 대한 존엄사 판결은 회생 가능성이 없을 경우
환자의 삶의 가치를 요구하는 가족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정부는 후속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계속 손을 놓고 있다.
2000년의 대만처럼 존엄사 관련법을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고
2007년 일본처럼 정부 가이드라인을 고시할 엄두도 내지 않는다.
정부가 존엄사 논쟁을 피해 다니는 모습이다.
최철주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7>멋진 죽음은 없다

 

 

2012.10.03 : 03:00:00         

2012.10.03 :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멋있는 죽음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은 7년 전 내가 호스피스 교육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실습을 나갔을 때도 그랬다.
그 이후 죽음교육 강의를 할 때는 환상을 부수라는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영화나 TV 드라마에는 이런 장면들이 허다했다.
말기 암 환자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된 주인공이 어느 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얼굴이 쪼그라들도록 쇠약한 모습으로 분장한 주인공이 간신히 입을 열며 짤막한 유언을 남긴다.
그가 드디어 고개를 떨어뜨린다.
침대 옆에 있던 가족들이 일제히 오열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장중한 음악이 흐르고
‘그가 눈을 감은 뒤…’라는 내용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웰다잉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이나 나이 지긋한 중년의 수강생들조차
그런 모습에 익숙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두가 인생 최후의 장면으로 그리고 있는 이미지는 별개의 세상이었다.
더 의외의 일은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죽음을 맞는 장면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버리다니요”…한 아들의 눈물 왜?

2012-09-25 03:00

 

 

2012-09-25 17:15

 

<6>아버지, 아버지를 버리다니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연극배우가 된 지 17년째에 접어든 박용범 씨(43)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경기 포천시에 있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너,

나를 그곳에 버리려고 그러지.

” 아버지의 시선은 처져 있었고 목소리는 맥없이 가라앉았다.

그는 심한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자동차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화가 치밀어서 계속 핸들을 잡을 수 없었단다.

“2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어요.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했습니다.

어느 날 의사가 아버지를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서

편안한 마무리를 해 드리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물어 왔습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선 그 길로 포천에서 작은마리아 수녀회가 운영하는

말기 환자 병동으로 달려갔습니다.

한번 둘러보고 다시 보고 해서 모두 네 차례나 사전 답사를 했습니다.

그때 그곳 책임자인 카리타스 수녀가 저한테 그랬어요.

미리 답사해서 조사한 사람치고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는 없더라고요.

그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따끔했어요.

그런데 그 병동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말기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

이런 곳이면 괜찮겠다’ 싶어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지요.

이렇다 저렇다 말씀이 없었습니다.

본래 부자 사이란게 좀 그렇잖아요.

아버지가 동의하시는 줄 알고 포천으로 모시고 가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의 시선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의 눈이 내게 말했습니다.

‘나,

그냥 이렇게 가는 거야?

죽으러 가는 거냐고?’ 하고 말입니다.

가슴이 덜컥했지만 못 본 체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선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마침내는

‘너, 정말 날 버리려고 그러는 거지’라고 한마디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면 누구나 가슴이 미어 터졌을 것입니다.

화도 나고요.

그렇게도 아들의 마음을 몰라주다니.”

내가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중견 배우의 이력을 추적한 것은 카리타스 수녀를 통해서였다.

2년 전 늦가을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된

‘죽이는 수녀 이야기’를 관람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연극이 화제의 인물로 등장한 아들 박용범 씨가 제작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죽음의 문제를 무대에 올려놓고 객석에서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버지의 그 시선이 되살아나서였다.

내가 공연장에 갔을 때 그는 배우로 분장해 말기 암 환자의 아들로 무대에 섰었다.

배우이자 제작자이며 좋은 죽음의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연극은 그해 벌써 3차 공연까지 갔다.

나는 그를 다시 수소문해 한 카페에서 만났다.

비에 젖은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작은 배낭을 어깨에 매단 채 나타났다.

똑같은 제목의 연극을 올겨울 다시 무대에 올리기 위한 준비에 몸이 축났단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던 당시 아버지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이라면 진절머리를 냈어요.

거기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호스피스 병동에 모시고 가려 했더니 그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거죠.

병동에 도착한 첫날은 시무룩하시더니 그 다음 날부터는 표정이 달라졌어요.

수녀님들 간호사 간병인 봉사자들이 정말 잘해 주니까 얼굴이 환해졌어요.

일류 호텔 주방장을 지낸 아버지는 거기서 병원 관계자들에게

요리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지내다 정말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연극 ‘죽이는 수녀 이야기’는 그런 장면을 담았어요.”

그러나 이 중견 배우의 삶은 평화가 아니었다.

연극을 하면서 주유소 종업원을 거치고 짝퉁 가방을 팔러 다녔는가 하면

지하철역에 매대를 깔아놓고 모자를 팔았다.

그리고 밤에는 무대에 올랐다.

언제나 관객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그리웠다.

수입이 적을 때는 새벽에 우유를 배달해 가족의 생계에 보태 썼다.

당시 72세의 아버지는 고급 호텔에서 받는 월급 대부분을 술 마시는 데 써 버리고

집에서는 폭력을 일삼는 난폭한 가장이었다.

아들 4형제 가운데 그를 뺀 3형제가 가출했다.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를 보다 못해 결투를 신청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대결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아들의 비장한 마음을 보여 주어야 아버지가 정신 차릴 것 같았다.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가 야산을 골랐다.

그런데 덤벼라 하고 큰소리치던 아버지가 갑자기 주저앉더니 눈을 감아 버렸다.

부자간 결투는 시작하자마자 끝났다.

“그 뒤 아버지가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투병 기간 중에는 연극도 장사도 모두 집어치웠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그동안 고생한 엄마와 함께 동해로 서해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가장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 아버지였지만 죽음에 직면한 당신을 보면서

내가 연극을 통해 무엇을 관객에 전달해야 할 것인지를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배고픈 연극인이지만 호스피스 봉사, 사별 가족 모임을 통해 사랑을 배웠습니다.

내 연극을 본 한 노부부가 정답게 손을 잡고 

눈 내리는 밤거리로 사라지는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그는 11월과 12월 인천 부평과 강원 춘천시 등지의 지방 공연을 통해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어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시 던질  예정이다.

 

 

 

<5>아내가 세상을 떠난 방법

2012-09-18 03:00

 

 

2012-09-18 03:00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서울이나 지방 소도시에서 갖는 웰다잉(well-dying) 강의에는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진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주제가 등장하다 보니 분위기는 다소 무겁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가 자신들의 문제로 느껴지면 참석자 모두들 눈을 반짝인다.

궁금증이 가득 찬 시선이 몰려온다.

첫 번째 질문이 터진 후에야 쑥스러워하던 표정이 풀어진다.

그들이 진짜 본심을 보이며 내게 다가올 때는 강의가 끝난 후 커피 타임에서다.

질문의 종착점은 내 아내에게로 돌아온다.

아내의 그 ‘종이딱지’(사전의료의향서)가 어떻게 쓰였는지,

그 서류에 요청한 것처럼 실제로 연명치료가 중단됐는지 설명해 달라는 것이다.

이때마다 나는 늘 난감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

아내가 떠날 때의 모습을 그리기 싫어서였다.

묻는 사람들도 내 상처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궁금해한다.

나는 다 털어놓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악성 종양 수술 이후 상태가 더 악화되어 2년 전 여름 말기 상태로 넘어갔다.

집에서 고열에 시달려 응급실로 실려 다니기를 여러 차례.

 

응급실에 가면 전쟁터 야전 병원에서처럼 복도 바닥에 누워 있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어떤 때는 꼬박 이틀 동안을 그랬다.

누구나 보잘것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아내는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동물적 감각으로 느낀다.

환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간호사의 느린 목소리,

레지던트가 가슴에 밀어 넣는 청진기의 이물감, 백혈구 수치의 위험도를 설명하는

응급실 주치의의 피로에 지친 얼굴을 뒤로하고 병원을 떠난다.

집에서 조리하는 게 낫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을 때마다

휠체어에서 차에 옮겨 탄 뒤 아내가 다시 꺼낸 말은

‘내가 서류에 사인한 그대로 해줘요’였다.

‘내가 불치병에 시달리며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를 대비해

나의 가족과 나를 담당하는 의료진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로 시작되는

아내의 선언서를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불교도인 아내가 작은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경기 포천시의 호스피스 병동에 가자고 조른 것은

응급실 수난을 여러 차례 겪고 난 후였다.

아내가 아프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여러 차례 그곳에 들러 수녀들의 세상 이야기를 듣곤 했다.

사실 아내가 그곳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나는 호스피스 병동의 ‘호’자도 들먹이질 못했다.

너무 예민한 언어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말에 ‘꺼져 가는 인생의 종점’이라는 의미를 얹어 썼다.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비밀스럽고도 어두운 암호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호스피스 병동의 평화와 사랑을 깊이 알고 있었다.

입원하던 날 아내는 인공호흡기 사용과 심폐소생술 시술을 거절하는

서류에 또 한 번 서명했다.

이곳에 있는 거의 모든 환자가 신용카드 입회원서를 작성할 때 그러듯

삶을 마무리하는 ‘안녕 카드’를 마주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거침없이 이름을 적었다.

카리타스 수녀는 어느 날 새벽,

병동 언저리 사찰에 있는 비구니 스님을 병실까지 모셔와 아내를 온종일 들뜨게 만들었다.

그 스님은 아내의 침대 앞 벽에 커다란 연꽃을 달아 놓았다.

병동의 모든 수녀가 그 연꽃을 소중히 여겼다. 종교를 넘어선 봉사였다.

노래 솜씨가 좋은 아내는 앞을 보지 못하거나 몸이 마비된

다른 말기 환자들의 병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황성옛터’에서부터 ‘칠갑산’, ‘사랑을 위하여’에 이르기까지 신청곡을 모두 소화하는

노래봉사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밤에는 침대에 누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더러 잘 지내라며 손을 잡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내는 못 견디게 집을 그리워했다.

전혀 내색하지 않았던 아내였다.

몸은 점점 말라 갔다.

아내에게 남아 있는 세월은 기껏해야 한 달이었다.

어느 날 원장수녀에게 아내를 퇴원시켜 집에서 간호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서울 한 병원 의사의 왕진과 가정간호사의 도움으로 아내의 통증도 잘 조절되었다.

아내는 집에서 7개월을 더 지냈다.

아내의 모든 애장품은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이곳저곳에 기증되었다.

아내의 몸이 타들어 갈 때였다.

아내의 뜨거운 체온 때문에 주치의에게 전화하면 나에게 놀라지 말라고 당부했다.

스스로 연소하며 소멸하는 중이었다.

 

의사가 권장한 대로 나는 아내의 편안한 임종을 위해 앰뷸런스를 부르지 않았다.

아내가 좋아하는 시를 낭송해 주었다.

그러고도 3일이 지나갔다.

내가 우유를 사러 간 사이 도우미 아줌마의 숨찬 목소리가 휴대전화에서 울렸다.

급히 달려온 아들에게 손목을 맡긴 채 아내는 눈을 감았다.

모든 건 순식간에 벌어졌다.

숨을 거둔 아내를 병원 응급실로 옮기면서 그동안 치료해 준 의사의 소견서와

아내가 작성한 사전의료의향서 파일을 건넸다.

당직 여의사가 아내의 시신을 들여다본 후 옆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했다.

“환자가 존엄사 선언을 하셨군요”라고 말하며

‘병사(病死) 처리’ 하라고 전공의에게 지시했다.

만약 임종하기 직전에 아내를 응급실에 데려갔더라면 그의 영혼은 심폐소생술 등에

시달려 지금도 나를 끝없이 원망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아내 베개에 놓여 있던 손수건을 다  적셨다..

 

 

<4>생명연장을 거절하겠어요

 

 

 

2012-09-11 03:00

 

2012-09-12 06:29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8월의 무더위에도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렸다.

두 차례의 태풍경보에도 전화는 더 요란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8월 하순 나는 서울 신문로에 있는 각당복지재단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들의 전화 응대에 귀를 기울였다.

아름다운 이별을 도와주는 곳이냐고 묻는다,

편안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서류를 마련해 달라고 애원도 한다.

심폐소생술도 싫고 인공호흡기 같은 것도 달지 않고

조용히 하직하고 싶은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느냐며 캐묻는다.

이틀째 되는 날도 이런 전화는 이어졌다.

봉사자들이 제때 식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화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악천후의 날씨일수록 마음을 털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일까.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절절한 내용은

창밖에서 쏟아지는 폭우만큼 세찬 인생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부부가 고생하면서 살아온 이야기,

그러나 이제는 깨끗한 인생 마무리를 위해 준비해야겠다,

무엇보다 내가 죽을 때 고통받고 싶지 않다,

자식들에게도 부담되기 싫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맹세를 했다,

저런 식의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절대 안 한다는 소박한 시민들의 이야기는 참 명쾌하기도 하다.

그 끝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봉사자 모두가 지칠 때쯤 나는 일어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가 가끔 환청으로 나타났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은 언제부턴가 변해 버린 것 같다.

‘나는 맑은 정신을 가진 성인으로 나 스스로의 뜻에 따라

사전의료의향서(事前醫療意向書)를 작성합니다’를 선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지난 반 년 동안 줄곧 이곳에서 일했던 연구원 김예슬 씨(23). “50대, 60대 분들도 있지만

70대가 더 많아요. 어떤 날은 90대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세요.

‘사람은 죽어 가는데 병원에서 쓸데없는 치료받지 않도록 해 주는

운전면허증 같은 거 해 준다면서요’라고 물어요.

그래서 이건 운전면허증 같은 게 아니고 회복이 아주 어려운 상태에서는

생명연장장치를 사용하지 않도록 의료진에게 요청하는 서류에

서명하면 이를 확인해 주는 증명서를 다시 보내 드리는 거라고 답변하지요.”

“또 어떤 분은 거기가 안락사 업무 보는 데냐고 물어요.

큰일 났다 싶어 아주 자세히 설명해 드리지요.

절대 그런 데가 아니고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하는 분들을 도와 드리는 거라고요.”

시골에서는 ‘사전의료보관확인증’을 지갑에서 꺼내 자랑하고 다니는 노인도 꽤 있었다.

그것이 어느 날 ‘생명의 운전면허증’으로 표현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대충 맞는 것 같다.

인간이 더는 치료할 수 없는 말기 상태에서는 내가 고통스러운 곳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치료 운전을 잘해 주십사 하고

의료진에게 부탁하는 소박한 당부가 그 카드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홍양희 회장은 이곳으로 걸려 온 전화의 특징을 요약해 주었다.

경기 성남시 분당과 용인시 수지,

고양시 일산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서류 작성에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다.

서울 서초구와 강남구 주민들이 뒤를 이었다.

부산 창원 울산 지역도 많았다.

생활이 안정되고 소득이 높은 지역,

은퇴자 인구가 많은 지역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여성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훨씬 적극적이었다.

남성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가정 안팎에서 관련 정보 접근에 뒤지고

사교성이 떨어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류를 작성할 때는 집안 가장이 참석한 가족회의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의견을 나눠 본 후 결정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서류접수 업무는 이달부터 각당복지재단에서 연세대 보건대학원 안에 있는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02-2228-2670)으로 이관되었다.

업무 폭주로 정부 지원을 받는 별도의 민간기구도 지난 주말에 발족했다.

국민의 적극적인 관심을 재빨리 반영한 것이다.

4, 5년 전만 해도 차마 꺼내지 못했던 죽음 이야기가

곳곳에서 화제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대단한 변화이다.

수도권과 지방에서는 사전의료의향서 서류가 동이 날 정도였다.

내가 아내와 함께 이 의향서에 서명한 것은 4년 전이었다.

아내의 암 발병 사실을 통보 받기 2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웰다잉 강사활동을 하면서도 그 서류를 아내에게 빨리 내밀지 못했다.

그때는 그 서류를 ‘존엄사 선언서’라고 불렀다.

 

아내를 더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잘 아는 아내도 내심 모른 척했다.

언제부턴가 아내의 베개 옆에는 늘 나비 자수가 들어간 하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잠자기 전에는 곱게 접혀 있었던 손수건이 아침에

어느 날 수건이 놓여 있던 자리에 한 장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

현재의 의학에서 볼 때 제가 불치의 상태에 있고,

죽음이 다가왔다는 진단이 내려진 경우에는

제 생명을 연장시키는 조치를 일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을 포함한 몇 개 문장 뒤에 아내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아내는 그날 오전 내내 깊은 잠에  빠졌다.

 

 

 

<3>암을 이긴 사람들 100만 명 시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열정이 보인다.

자신과 똑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보면

스스로 구원의 손길을 뻗쳐 따뜻한 곳으로 안내하려고 하는 것이다.

암 환자들의 이 유별난 심리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치료기간이 끝난 후 5년 동안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아

‘생존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늘 나를 놀라게 한다.

이화여대 목동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은 김옥수 씨(49)는 4년 전 사선(死線)을 넘었다.

인생이 끝났다며 눈물 흘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

그가 걷기 시작한 제2의 인생은 다른 환자들을 돕는 봉사의 길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역시 유방암 치료를 받은 백주현 씨(50)도 그와 동행했다.

‘나를 좀 어떻게 해주세요’라고 호소하는 듯한 암 환자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몸 안에서 뭔가 끓어오른다고 한다.

“도와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이라면서 말이다.

그는 다른 암 환자들을 찾아가 죽음의 두려움,

투병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고 자질구레한 불편사항도 해결해주는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고 봉사활동에 나선 이정순 씨(69)는 림프암을 앓고 있는

젊은 남자 환자를 재기시킨 것을 여생의 보람으로 삼는다.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다른 환자를 도울 수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내 투병 경험을 거울삼아 다른 암 환자의 건강을 관리해주고

코칭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게 느껴져요.”

중소기업 간부였던 김상곤 씨(68)는 위암을 극복했고,

여성 의류점을 경영하는 유선주 씨(55)는 유방암을 털고 일어났다.

두 사람도 서울아산병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한다.

‘인생이 끝났다’며 삶을 포기했던 암 환자는 수도 없이 많다.

이 중 생존자 대열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100여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일부가 현재 투병 중인 환자들에게 스스로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이들은 내게 자신의 이름도,

과거의 병력을 밝혀도 좋다고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보면 이승의 다툼이나 저승의 두려움도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지 이들은 전혀 모르는 이웃 환자를 돕는 데서 생활의 활력을 느낀다.

자신감 넘치는 생사관을 지녔다.

2년 전부터 생존자들에게 다른 암 환자를 도울 수 있는 기본 교육 프로그램을 짜서

진행해온 주인공은 서울대병원 암병원 통합의료센터 윤영호 교수이다.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장윤정 박사도 돕고 있다.

스스로 생존자라고 부르는 봉사자들은 서울과 지방의 주요 병원에서 추천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엄격한 심사절차를 거쳐 워크숍에 참석하고 전화상담 방법 및

건강 코칭 교육을 받은 후 다른 암 환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건강 파트너’ 수료증을 받는다.

윤 교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성공한 암 환자들의 습관이 무엇인지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나는 지난가을에 이들의 수료식을 지켜본 적이 있다.

눈물과 환희의 현장이었다.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안고 있는

환자들을 도울 자격을 얻었다는 데서 오는 긍지와 희열이 넘쳤다.

수료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가족과 동료들이 보내는 박수가 요란했고

여기저기서 오래도록 포옹이 이어졌다.

한때 사선에서 피눈물을 쏟았던 사람들의 감정은 보통 사람의 그것보다 몇 배 증폭된다.

내빈 속에 끼어 있던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눈시울도 젖어 있는 것을 그때 보았다.

그의 남편도 암 투병 중이었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재산이 많거나 적거나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생과 사의 경계선에 서게 된다.

오직 자신만이 예외라고 생각하거나 잊어버릴 뿐이다.

시간이 흘러도 ‘건강 파트너’ 봉사자들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지난주 그들의 1차 활동이 끝난 것을 자축하는 모임에서는 계속 교육받고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희망자가 대부분이었다.

너도나도 어린이들처럼 손을 높이 쳐들었다.

생존자들과 암 환자들 사이에 만들어진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공감대가

그들의 봉사정신에 불을 지폈던 같다.

그것이 암으로부터 해방된 자와 지금 암에 속박된 자

양쪽의 삶의 질을 높여주었음에 틀림없다.

세상의 희망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한번 사선을 넘은 생존자들은 다음에 경험할지 모르는

또 다른 사선을 준비하면서 남을 도우며 열심히 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도 중단될 위기에 빠졌다.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투병 중인 암 환자들의 사회 적응과 재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유방암을 이겨낸 강경화 씨(52). 그는 시아버지의 암 투병도 지켜보았다.

“지금은 생존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환자에게도 다가가서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들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이야기 상대가 필요하잖아요.

내가 건강도 챙겨줄 수 있어요. 교육도 더 받으면 좋겠고요.

내 삶의 보람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 그녀도 계속 구원의 작은 물결에 몸을 싣고 싶어 한다.

 

<2>광화문에서 보는 생과 사

 

 

 

2012-08-28 03:00 2012-08-28 07:39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내가 언론사에 몸담아 일했던 36년 가운데 28년간은 청와대 뒤편에 있는

서울 종로구 세검정을 중심으로 살았다.

1960년대 중반 봄철 한때에는 청와대가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벚꽃 구경을 할 수 있었고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는 이곳에서 데이트도 즐겼다.

참으로 오랜 세월 아침저녁으로 자하문 고개를 거쳐

청와대 옆 도로를 지나고 광화문과 세종로 사거리,

시청을 눈여겨보고 다녔으니 내 기억에 쌓여 있는 광화문의 역사는 길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효자동 근처에 살면서 우리나라 권력의 심장부를 둘러싸고 있는

 주요 골목골목을 이따금 산책한다.

 

몇 년 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괴담이 퍼지면서

촛불 시위대가 광화문 주변 도로를 점령해 10·26사태 이후 가장 험악한 분위기가 빚어졌다.

요즘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청와대 주변에는 1인 시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판사, 검사, 경찰의 비리를 고발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대기업 총수에 대한 특혜 판결을 바로잡아 줄 것을 촉구하는

종이판을 목에 걸고 땡볕에 서 있는 사람도 목격된다.

그뿐 아니다.

광화문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4대국 대사관 외교관들의 나들이를 매일 목격하며

그들의 힘의 대결을 상상하기도 하고 청와대와 경복궁을 둘러보기 위해 몰려드는

수많은 나라 관광객들 사이에서 세계의 숨결을 느끼기도 한다.

나에게 기자 근성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내 나름대로

사물을 눈여겨보는 습관이 붙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헛것이었다.

나는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봐 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광화문도 죽음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오직 권력과 돈과 생존을 위한 경쟁만이 있다고 여겼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광화문의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응급 앰뷸런스가 앵앵거리고 장의차도 수십 대가 경복궁 앞을 오간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울대병원이나 세브란스병원 응급실과 영안실에서 나오는 차들이다.

전국에 수많은 환자들이 이들 병원에 몰려들고 있다는 것은 소문난 일이다.

나도 환자를 태우고 응급실에 달려가기를 수십 차례,

역사와 권력의 심장부 광화문을 지나갔다.

마침내는 세상을 하직하여 영혼으로 간직하게 된 가족을 장의차에 태우고

역사와 권력의 심장부 광화문을 지나갔다

그때 뒤숭숭한 내 머리를 스쳐 간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음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광화문도 경복궁도.

그 오랜 세월 자하문 고개를 지나다니면서

청와대 서쪽 담장 옆 불과 10m 거리에

요양시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한참 후 일이었다.

호스피스 강의를 시작하면서 내 눈이 열리고 귀도 뜨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환자들이 청와대 울타리 옆에서 보호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네 삶의 흐름을 상징하고 있었다.

세상의 권력을 손톱만큼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요양소 근처를 서성거리게 될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100m 떨어진 효자동 사거리에 장애인을 위한 푸르메센터,

그리고 그 옆에 붙어있는 국립맹학교와 농학교,

다시 이곳에서 400m 거리에 청각장애인들이 운영하는 예쁜 찻집이 있다.

사직로를 건너면 경희궁 옆에 죽음교육센터 또는

호스피스교육센터로 불리는 각당복지재단이 있다.

이렇게 하나 둘 짚어 보면 병들고 몸이 불편한 우리의 이웃,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군상,

어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 길을 찾아나서는 청춘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이 이 나라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및 각부 장관의 집무실 부근인

광화문과 경복궁 근처에서 살고 있다.

조선왕조시대에도 왕궁 근처에는 서민 구휼기관이 몰려 있었다.

육조거리는 생과 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의 모습을 쳐다볼 수 있도록 삶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지금의 삶은 반쪽짜리다.

삶을 비춰 줄 거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세상을 떠난 지도자들은 많은데 죽음의 표지석이 별로 없다.

1970년대 이후 이곳에서 박정희, 윤보선, 최규하, 노무현, 김대중 등의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저격당하고 투신자살하고 오랜 병고 등으로 고생하다 떠난 전직 대통령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청와대 옆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장소에조차

표지석이 없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죽음은 아픔이다.

아픔이 없는 죽음이 어디 있는가.

수많은 관광객은 그가 저격당한 청와대 앞 무궁화동산을 무심하게 지나친다.

나는 국내외 관광단 사이에 끼여서 가이드의 설명에 몇 차례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안내 깃발이 청와대 정문과 영빈관을 반 바퀴 돌면서

드디어 무궁화동산을 가리켰을 때 나는 역사적 중대 사건에 관한 설명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며 까치발로 가이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곳에 공중화장실이 있습니다.

이용하실 분은 지금 다녀오세요.

” 나는 한 방 얻어맞은 사람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별난 경험이었다.

경복궁 북쪽의 건청궁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있다.

경희궁 옆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암살된 사회혼란상을,

청와대 서쪽 담장 옆 최규식 경무관 순직 안내문은 북한의 호전성을 폭로하고 있다.

그런 죽음이 우리 옆에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어디 광화문만 그렇겠는가.

깨치지 않으면 죽음도 한낱 (공중)화장실이 되고 말 것이다.

 
<1>나는 왜 ‘웰 다잉’ 강사가 되었나
 
2012-08-21 03:00

2012-08-22 05:20

 

 

<1>나는 왜 ‘웰 다잉’ 강사가 되었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오늘부터 화요일자 오피니언면에 ‘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올해 70세인 필자는 몇 년 전 딸과 아내를 잇달아 암으로 잃은 뒤

‘웰 다잉(well dying)’의 문제를 파고들어 말기 암환자들이 편안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는 호스피스와 웰 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 경제부장, 일본총국장, 편집국장 등을 지낸 칼럼니스트입니다.

편안하게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죽음 복(福)’을 부러워하면서도

그 복을 받기 위한 준비에는 소홀한 게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그의 글을 통해 ‘잘 죽는 법, 잘 사는 법’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여름이 지나갈수록 나는 심한 갈증에 시달린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들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는 초가을까지 그 증상은 더 심해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의 목마름은 울창한 숲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허전함을 메우지 못해 나타난 신체적 반응이다.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추억은 여름 땡볕에서도 시들지 않다가

이 계절의 막바지에 달궈져 더 큰 갈증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행에 나설 때는 두 사람의 추억을 안고 간다.

등에 멘 하늘색 배낭은 작년에 세상을 떠난 아내가 즐겨 쓰던 것이고

그 안에 챙겨 넣은 검정 털모자는 7년 전 숨을 거둔 딸의 애용품이다.

이 유품을 통해 두 사람에게 세상의 구석을 보여 줄 수 있어서 나는 덜 외롭다.

작년 여름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 산골짜기에서

딸의 털모자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낮에는 무덥고 밤에는 우박과 눈비가 쏟아지는 곳에서도 목이 말랐다.

이번 여름 바이칼 호수에서 보낸 짧은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민족의 시원지를 바라보며 수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우리의 생과 사를 어떻게 들여다보아야 할까,

그들의 삶의 방식은 자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를 생각했다.

내가 호스피스 강사가 된 것은 두 사람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자궁경부암으로 투병 중이던 딸은 말기 상태에서 수술을 거부하는 소동을 몇 차례 벌였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막무가내로 거부해 가족을 자주 울렸다.

더는 치료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고통이나 마찬가지라고 딸은 메모지에 적었다.

영양 급식 튜브가 목을 가로질러 꽂혀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 대신 메모지에 눈물 젖은 문자를 날리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것은 형벌이었다.

당시 32세이던 딸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기를 기다리는 보통의 주부생활에

흡족해 하다가 어느 날 암 진단을 받으면서 수난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 젊은 여성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빨리 무너지는지를 아빠인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 사용도 거부하는 서류에 서명했던 날

딸은 호스피스 아카데미 교육을 받아보라고 나에게 권했다.

입원해 있던 국립암센터가 국내 여러 병원에 있는

의료진이나 성직자 등에게 시행하는 특별교육이었다.

병원 복도에 붙어있는 모집광고를 눈여겨본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의사도 이 교육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딸은 입원 중에 터득한 것이라면서 어떻게 투병생활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

삶의 좋은 마무리라는 게 어떤 것인지 고통 받고 있는

환자와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말기환자에게도 무조건 수술을 권장하는 것은 좋은 간병이 아니라고 핀잔을 주었다.

6개월 동안 계속된 호스피스 고위과정에 들어간 후

세 번째 주에 딸은 병실에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의 호스피스 교육에도 난 빠지지 않았다.

죽음 교육을 잘 받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전문 강사들이 암환자의 통증이나 존엄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어느 날부터는 강의실 맨 뒷줄에 앉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꺼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를 나는 늘 생각했다.

우리 주변에서 보는 추한 죽음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사회는 어떤 제도를 갖춰야 할 것인가를 더듬기 시작했다.

국내 여러 지역을 관찰하고 미국과 일본 등을 방문취재했을 때 아내를 동반했다.

4년 전에 ‘해피 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라는 책을 쓰기 위해

아내가 딸의 죽음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미국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있는 많은 환자를 보고 나서였다.

그 뒤로 아내는 ‘딸이 편안하게 갔다.

잘 갔다.

그것도 제 복이지’라고 자주 중얼거렸다.

그러다 자신에게 큰일이 벌어졌다.

나는 시민단체나 대학교 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호스피스 강사로 활동하면서

가족의 비애를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했으나 아내는 너무 허약했다.

딸을 먼저 보낸 슬픔이 쌓이고 쌓여 독이 되는 것을 풀지 못했다.
 

아내에게 난소암 말기 판정이 내려진 것은 딸이 떠난 지 6년 후.

이미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아내는 투병 중에도 내가 호스피스 강사로 나가는 일을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가

어느 때는 몹시 씁쓸하게 여기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몸이 여위어 갈수록 감정의 기복도 커졌다.

그러나 아내는 단 한 차례도 중환자실을 드나들지 않았으며

딸과 똑같은 인생 마무리를 하고 내 품에서 떠났다.

숲 속의 이끼가 되었다.

나는 아내와 딸에게서 배운 인생의 일부,

그리고 국내외 여러 현장에서 겪고 목격한 것을

다른 호스피스 강사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죽음교육 강사이기도 하고 호스피스나 웰다잉 강사이기도 하다.

삶에 대해 그러하듯 죽음도 조금씩 들여다보며 생각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다.
최철주 호스피스·웰다잉 강사

 

 

[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

 

<18>

위암 말기 엄마에게 세 아들이 한일은…‘충격’

 

 

기사입력 2012-12-18 03:00:00

기사수정 2012-12-18 14:23:53



최철주 칼럼니스트

 
30대 젊은 남자 환자가 경기 성남시 보바스기념병원 완화의료센터로 들어온다.
말기암 환자는 보통 20여 일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입원한 지 한 달이 넘도록 부모는 쉽게 아들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며느리도 집요하게 남편의 연명 치료에 매달리며 중환자실을 드나든다.

자식들 체면치레 위해 병원 순례
환자가 노인이라면 분위기가 좀 달라진다.
할머니가 말기인 경우 배우자인 할아버지는 애정밀착형이 된다.
할머니를 떠나보내기 싫어 계속 치료를 서두른다.
이에 비해 자녀들은 차분한 모습이다.
엄마를 편히 보내 드리기 위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이 병원의 호스피스 전문의 박진노 내과과장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환자의 증상이 더욱 나빠질 개연성이 높으므로

보호자가 임종을 준비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가족의 합의로 환자가 편안하게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길을 찾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박 과장은 환자에 대한 효도가 어디까지여야 하느냐를 늘 생각한다.

자칫 ‘지나친 효도’가 환자를 힘들게 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임종을 앞두고 있는 말기 환자 부모를 우겨 가며 다른 대학병원으로 옮겨 가는 자녀들도 있다.

부모에게 잘못했던 죄책감 때문에 연명치료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국회의 고위직을 맡았던 유명 정치인의 가슴 아픈 참회를 기억하고 있다.

암으로 다 죽어 가는 어머니를 수술하고 또 수술하도록

의사에게 맡겼던 불효를 지금까지도 씻어 낼 수 없다는 고백이다.

자신은 그게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깨닫고 보니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병원에서나 인간이 소멸해 가는 과정을 우리는 지켜볼 수 있다.

가족의 반응도 다양하다.

현대 의학의 모든 수단이 동원되어도 차도가 없을 때 목격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최후의 문제가 등장한다.

가족 구성원의 생각이 모아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

환자가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지 않았거나 평소에 남긴 유언마저 없다면 뒤처리가 더 어렵다.

더구나 환자가 재산과 명예를 많이 쌓은 사람이라면 자녀들 사이에 효심 경쟁이 엿보인다.

누군가 ‘우리 부모님을 이렇게 팽개칠 수는 없지 않으냐’라고 말을 꺼내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가족 중에서도 가장 무게 있어 보이는 웃어른이 편안한 마무리를 설득해 주지 않는다면

환자는 무작정 ‘연명 치료’에 들어가기 쉽다.

이때 어떤 길이 효도이고 불효인지 마음 속 갈등이 커진다.

“최고의 모든것 해드렸다”자기만족
오래전 K 장관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아들간의 송사도 그와 같은 마찰에서 빚어진 것이다.

재산 상속을 둘러싼 효심 다툼과 겹쳐 아버지의 명예를 먹칠한 사건이다.

사랑이 흐르지 않는 가족에겐 이상한 일이 꼬리를 문다.

엄마 아빠를 계속 중환자실에 둘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의견 대립이 날카로울수록 진짜 효심을 읽기 어렵다.

중환자실이나 호스피스 병동에서 엿볼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현상이 하나 있다.

그동안 환자 간병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친인척이 어느 날 나타나서

요란하게 울거나 큰 소리로 다른 보호자들을 야단치는 일이다.

‘환자를 이렇게 버려 둘 참이냐’라고 호통이라도 치게 되면

그동안 다른 가족이 쌓아 놓았던 화합과 인내라는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만다.

이미 결정했던 호스피스 치료마저 중단 위기에 빠진다.

사전의료의향서 등도 휴지 조각이 될 위기에 직면한다.

큰 목소리의 주인공이 과시하는 효심이 더 애절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불효자로 누명을 쓰게 될지도 모를

다른 가족은 항상 마지막에 나타나는 돌발변수를 경계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결정을 둘러싸고 동생이 형이나 오빠 누나와 의견을 달리한다면

대개는 손위 형제들이 난감한 처지에 몰린다.

동생들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덜 깨쳤기 때문일까.

인간은 누구나 깨끗한 마무리를 하고 싶어 한다.

다만 실행이 어려울 뿐이다.

그래서 부모나 배우자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도움이 필요하다.

종양 전문의인 L 교수는 효도의 재발견을 주장한다.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암 말기인 엄마에게 마지막까지 심각한 증상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그들을 설득해도 막무가내였어요.

환자에게도 인생을 정리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세 아들이 똑같이 엄마에게 사실을 알리면

충격을 받아 돌아가시니 비밀로 해 두자고 합니다.

결국 환자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 버렸어요.

그게 무슨 효도인가요.

불효막심한 거지.

지금 이 시대에는 죽음을 둘러싼 올바른 효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무심한 효도나 무식한 효도에 대한 걱정이 앞서고 있다.

S대학의 P 교수에 따르면 지식층의 자녀들 사이에 부모에게 ‘최선을 다했다’라든가,

 ‘최고의 모든 것을 해 드렸다’라며 자기만족을 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말기 상태라면 이미 의학적 의료적 치료는 끝난 셈이지요.

그런데 그 단계에서도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가며

환자를 외국 병원에 모시고 오가느라 모두가 지쳐 있어요.

그런 최선의 노력은 환자를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자식의 체면치레를 위한 것일까요?

그런 부모를 이곳저곳 모시고 다니는 행위는

환자를 괴롭혀서 빨리 돌아가시게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효자라면 부모 인생 마무리 도와야
환자가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 경우

화목한 집안은 환자에게 시선을 맞추고 그를 중심으로 간병한다.

환자가 생각해 온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평화로운 인생 마무리를 도와준다.

우리가 기억할 만한 효도 방식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눈에 띄는 다른 가족의 모습은 어떤가.

초기 증상 때는 멀리 제주도 등지에서부터 비행기로 환자와 동행한다.

병이 점점 악화되면서 가족의 관심은 멀어진다.

핵가족화로 구성원의 사회생활이 힘들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자에 대한 투자도 줄어든다.

환자가 말기에 가까워질수록

가족은 더욱 그의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오히려 멀어지기 쉽다.

효도는 이때부터 시험대에 오른다.

불효도 시험 받는다.

효와 불효는 환자에게 보여 주는 사랑의 깊이에 따라 달리 반응한다.

죽어 가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그 깊이를 이야기할 수 없는 채 떠나 버린다.

남아 있는 우리는 이 시대의 효자인가 불효자인가?

왜 우리는 늘 죄책감을 갖는가?

떠나간 영혼이 대답할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최철주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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