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병자호란

임진왜란과병자호란

작성일 2009.04.2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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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반에서 임진왜란과병자호란 조사하라는데

답변 부탁드려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간략하게

⑴임진왜란이 일어난 당시 조선의 사정 - 당파싸움으로 정신없었음

⑵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일본의 사정 -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하고

반대세력을 견제하기위해 쳐들어올 준비

⑶임진왜란 에서 활약한 조선의 군사 - 기록상으로는 정확한군사수는 않나왔지만 

피해상황이30만이라니깐 대략피해상황보다두세배는 많지않았을까?

⑷임진왜란 에서 활약한 조선의 의병들 - 의병들  임진왜란 대표적 의병하면 홍의장군으로

알려있는 곽재우가 유명하죠

 

*** 상세내용은 아래 참조 

 

⑴임진왜란이 일어난 당시 조선의 사정

왜란 초기의 조선의 상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잘못된 판단으로 늦장대응과 미봉책으로 임란에 임했다. ‘ 가 적당할 것이다. 1590년을 전후하여 조선에서는 일본의 대륙 침략 가능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에 왜로 사절을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은 전쟁 여부에 대해 서로 엇갈린 의견을 내 놓았으나 ‘농번기에 군사훈련을 할 수 없다‘, 와 ’민생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 라는 이유로 전쟁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쪽으로 조정의 여론이 형성되어 결국 조선은 전쟁준비를 소홀히 하게 된다. 여기서 조선은 두 가지 과오를 범하게 되는데 첫째는 나라 내부의 결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왜의 정황에 대하여 자의적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문제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 조선은 내부적 문제와 외부의 문제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각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는데 ’정중지와(井中之蛙)‘와 같은 판단을 내리고만 것이다. 개인의 측면에서도 5분전부터 일을 준비하는 경우와 5분후에 허겁지겁 일을 시작하는 경우에도 10분이라는 절대적 시간 차이보다 갑절의 성과차이를 보이는데, 하물며 한 국가의 늦장 대응은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조선의 왜란 직후의 숱한 미봉책들은 연전연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늦장대응은 문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 
 조선의 나약한 지도부는 주체적으로 왜란에 맞서지 못하고 명의 눈치를 살피며 의존적 태도로 일관하였다. 송상현, 정발 등의 장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장수들은 꽁지 빠지게 도망가기 바빴으며 우매하고 거만한 신립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닌 불리한 형세에서 전투에 임하다가 최후를 맞는다. 또한 불가피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선조가 임난 후 체 한 달이 되지 않아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는 사실과 앞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문무를 막론하고 조선의 지도부 전체가 얼마나 나약하고 무능력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평양까지 도망한 선조는 구원병을 파견해준 명나라의 눈치는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그들로 하여금 핍박당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외면했을 것 같아 애석할 따름이며. 만약 도망하였던 여러 장수들과 선조에게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면 한양을 그렇게 맥없이 함락 당하진 않았을 것이란 사실에 더욱 당시의 조정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저자인 유성룡께서도 이 점을 반성하기 위해 왜의 병사들과 명의 병사들의 만행을 감정이입 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하시어 간접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조정의 과오를 꾸짖으려고 하신 것 같다.


 왜란 중에도 조선의 지도부는 좌충우돌과 모함을 거듭하였다. 이는 원균의 모함으로 발단이 된 이순신 장군에 논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모함과 관련하여 징비록 중에서 저자는 자신과 친하지 아니한 자들은 이순신을 공격했다고 서술한 부분과 김응서가 오시라의 간계를 조정에 고하였지만 이를 이순신이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다시 이순신을 하옥하고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우리의 지도자들이 전란 중에도 자신들 간의 파벌과 세력 싸움에만 열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⑵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일본의 사정

이 무렵 일본에서는 100여 년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을 도요토미가 평정하여 통일하였다. 이에 도요토미는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 시키려 조선과 명에 대해 대대적인 침략 준비를 하였다. 도요토미는 우선 조 선에 정탐사를 보내어 조선의 조정을 몰래 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사 신을 보내 조공을 바칠 것을 조선에 요구하기도 하였다. 조선 측은 도요토미 의 요구가 너무도 무례한데 분개하여 거절하였다. 더구나 변장한 왜인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길과 강, 산, 동네의 숫자까지 적어 가지고 가다가 발각 되어 맞아 죽는 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나 민심은 더욱 어지러웠다.

1592년 4월 왜선700여척이 부산에 상륙하였습니다.

⑶임진왜란 에서 활약한 조선의 군사

조선의 기본적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 하는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로 구분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전제로 하여 군은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구분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3년(1394)부터 세조초년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및 고급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 및 북방 변경 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병력 부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향리 관노, 무직 백성, 공노비 등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의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 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병마절도사가 지휘)과 수영(수군절도사가 지휘)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 처의 요충지에 거진(첨절제사가 지휘), 진(동첨절제사가 지휘)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 현의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답변확정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부터 근 1백여 년 동안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진관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조선군

조선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음,
명나라
1차 원병 (1592–1593)
43,000명
2차 원병 (1597–1598)
100,000명


피해 상황
조선

군인 합계 300,000여
명나라
군인 합계 30,000여 명

 

 조선수군

경기수영 : 9,500명
강원수영 : 4.600명
충청수영 : 13,000명
황해수영 : 7,900명
평안수영 : 14,000명
함경수영 : 6,200명
전라좌수영 : 9,000명
우수영 : 9,000명
경상좌수영 : 10,000명
우수영 : 10,000명
합계 : 93,200명으로 편성

조선 장수들

육군

권율 -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원수(총사령관). 본래 광주목사였으나 몇 안되는 조선군을 이끌고
이치고개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가 이끄는 일본군을 박살냄. 행주산성에서는 우기다 히
데이가 이끄는 일본군을 아주 개박살냄(물론 백성들, 특히 부녀자들의 협력이 없었으면 불
가능)
김시민 - 임진왜란 때 조선의 진주목사.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며칠동안 잘 막아냈으나
전투마지막날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사망. 하지만 진주성을 지키는데 성공.
이일 -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순변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신립과 함께 북쪽에서 여진족을
여러번 무찔러 명성이 높던 장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경상도를 장악하자 순변사가
되어 일본군과 싸웠으나 대패하여 어디론가 도망감.
신립 -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도순변사. 이일이 패배하자 조선 조정은 조선 제일의 명장이라고
소문난 신립을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한다. 신립은 기병을 잘 지휘하기 때
문에 탄금대전투에서 기병을 중심으로 싸우나 늪지대인 탄금대의 특성때문에 말이 제대로
달리지를 못해서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자살함.

 

수군

이순신 -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며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준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만들어냈다.

그 후 전쟁이 터지자 옥포해전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일본함대를 무찔러 연전연승을 기록하던

일본군에게 첫패배를 안겨주었으며 그 후 사천, 한산도, 부산포 등지에서 연전연승한다.

 일본군이 잠시 물러간 후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전멸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명량에서 12척으로 일본함대 133척을 무찌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전사.
원균 - 임진왜란 때 조선의 경상우수사. 임진왜란 초기에는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하였으나 이순신
과 협력하여 여러 해전에서 공을 세운다.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파직된 후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나 칠천량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전멸당하고 자신은 전사함.
이억기 - 임진왜란 때 조선의 전라우수사. 이순신, 원균과 협력하여 각지에서 공을 세운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함.
이운룡 -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부하장수. 각지에서 공적을 세웠으며 임란 후에도 계속 벼슬직에있었음.
이영남 -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부하장수. 역시 공을 많이 세웠으나 노량해전에서 전사.
정운 -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부하장수. 이순신의 부하들 중 제일 용맹하여 가장 많은 공적을 세우나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함.

의병

곽재우 -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 임진왜란이 터지자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붉은 옷을 입고 의병을 지휘해 홍의장군이라 불렸다. 첫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가 이끄는 일본군을 대파한 후 진주성전투에서 김시민을 돕는가 하며 각지에서

              일본군을 무찔러 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인물. 전쟁이 끝난 후 벼슬을 사양함.
조헌 - 임진왜란 때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금산에서 영규대사와 함께 700명의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하지만 단 한명의 병사까지도 싸워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줌.
정문부 -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덕령 - 전라도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용맹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나 모함을 받고 잡혀가

               고문 끝에 사망.
고경명 - 전라도 장흥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활약
김천일 - 전라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2차진주성전투에서 전사.
사명대사 - 임진왜란 때 승병 사령관.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임란 후 일본에 건너가 포로를

                데려오는 등 외교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서산대사 - 임진왜란 때 승병 총사령관. 얼마 후 사명대사에게 총사령관직을 물려주고 병으로 죽음.
영규대사 -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조헌을 도우나 결국 전사함.
처영 - 전라도에서 승병을 이끌고 싸웠으며 행주산성에서도 권율을 도와 공을 세움.

일본군 

육군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군 제1사령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부산, 동래를 무너뜨리고 탄금대 전
투에서 신립을 이겼으며 한양, 개성, 평양을 함락시킴. 그러나 이순신의 활약
으로 보급로가 끊어지자 결국 퇴각함.
가토 기요마사 - 일본군 제2사령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 동부 지방을 쓸었으며 함경도를
공격하여 조선의 왕자 두 명을 붙잡음. 일본 장수들중에서도 제일 용맹하여 호랑
이를 잡을 정도였음. 전쟁 막바지에 조선,명 연합군에 포위되어 죽을 위기도 겨우 넘김.
고바야카와 다카카케 - 일본군 장수. 일본군을 이끌고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나

곽재우한테 깨지고 이치에서는 권율에게 깨짐.
우기다 히데이 - 일본군 장수. 행주산성을 공격하나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에게 크게 대패하고 부상까지 당함.

수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 일본군 수군 사령관. 일본 최고의 수군장수였으며 용인전투에서 1600의 기병
으로 조선군5만을 박살낸 용장. 일본수군이 이순신에게 연달아 패하자 남쪽
으로 내려가 이순신과 맞서나 한산도전투에서 크게 패함.
도도 다카토라 - 일본군 수군 장수. 옥포에서 이순신에게 깨져 일본군 최초의 패전지장이 됨.
구키 요시토키 - 일본군 수군 장수. 그 당시 부산포에 진주해 있던 일본군을 총지휘함.
구루시마 미치후사 - 일본군 수군 장수. 명량해전에서 도도 다카토라 등과 함께 이순신과 싸우나
133척으로도 12척을 이기지 못하고 대패함.

 

 

⑷임진왜란 에서 활약한 조선의 의병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낙동간연안을 오르내리며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왜군을 물리쳐 낙동강의 수운을 봉쇄하였다.

한편 의령,삼가,합천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우도가 그의 보호아래 있게되었다. 그는 싸울때마다 붉은 옷을 입어 모두 홍의장군이라 불렀다.

그무렵 충청도 옥천에서 조헌이 기병하였다. 그는 승병장 영규가 이끄는 승군과 합세,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을 격퇴하고 청주를 수복하였다. 그뒤 금산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을 무찌르고자 하였으나 그를 비롯한 700명의 의병은 전사하였다(700의총).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기병하여 북상하던중 금산성에서 주둔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같이 금산에서는 전투가 잦았는데 그것은 금산이 호남방면을 지키는 중요지 였기때문이다.

김천일은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과 함께 합세하였으나, 고경명이 전사한 뒤 수원독산성과 강화도로 부대를 옮겨 가며 부근의 왜적을 소탕하였다.

전 연암부사 이정암은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연안부를 굳건히 지켰다.

 

의병중에서는 승군의 활약도 컸는데 묘향산의 서산대사 휴정이 수천의 승군을 이끌고 각 사찰에 격문을 띄었다. 이에 제자인 유정(사명대사)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처영은 호남에서 각각 숭군을 일으켰다.

 
병자호란 (조선 역사)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淸)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발생배경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금은 조선침략의 다음해에 내몽골의 챠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베이징[北京]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또한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때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인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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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침입
병자호란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도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태종은 명나라가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을 못하게 하기 위해 별군(別軍)으로 랴오허[遼河] 방면을 지키게 하고, 12월 2일에 만주족·몽골족·한인(漢人)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때 청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 침략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했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만 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만 4,000여 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 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감에 따라,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 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청태종은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청의 진영에 보냈는데,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그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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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과 강화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椵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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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대청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가 심각했다(→ 속환문제).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북벌론, 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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