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사람들...

한국을 빛낸 사람들...

작성일 2004.12.12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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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좀 도와주세요...

 

노벨상으로 한국을 빛낸 사람들,

-김대중 전 대통령

- 김순권 박사

- 황우석 교수

 

그 외,

- 조수미

- 안철수 소장

- 장영주

- 장명훈

- 정경화

- 정명화

- 김덕수

- 백남준

- 강수진

- 이봉주

- 황영조

- 허영호

 

단체분야

-한국국제협력단

- 한국 국제 봉사 기구

- 세계 청년 봉사단

- 글로벌 케어

- 국제 자원 봉사 협회

- 태평양 아시아 청년 해외 봉사단

 

이예요.

 

빨리 도와주심 감사..

 

참고, 이거 수욜까지 해가야 되서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악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축구선수들 가사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이완용 #한국을 빛낸 사람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 바꾸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패러디 #한국을 빛낸 40명의 위인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김덕수]

 1978년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의 초연을 한 이후로 김덕수라는 이름과 사물놀이는 항상 함께 다녔다.  다섯살때 부친의 손에 이끌려 조치원 난장에서 남사당 무동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선 이후 40년이 넘 는 음악생활 속에서 가장 으뜸가는 업적은 자칫 기억속에 사라져 갈 뻔했던 '풍물' 이라는 전통을 밑 천삼아 사물놀이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농악에 쓰이는 기본적인 타악기인 북, 장고, 징, 꽹과리의 네 악기 (사물) 를 이용하여 마당놀이적 성격이 강한 전통적 농악의 다채로운 음악 재료들을 도회적 무대공간으로 옮겨 재구성하고 재창조하여 양식화시킨 것이 사물놀이이다. 전통의 새로운 해석과 재창조를 통해 20세기 말의 한국적인 상황을 담은 가장 한국적인 심성의 예술이다.

 김덕수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 뿌리는 우리 것, 옛것에 있지만 갇혀있지 않고 항상 자유롭다. 수많은 해외 공연과 다른 나라의 아티스트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과의 만남, 새로운 음악과의 융합을 시도해왔다. 사물놀이는 이미 민속음악이 아니라 보편화된 세계의 음악이 되어가고 있고, 그 중심에 김덕수가 있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 바로 재즈 그룹인 과의 공동작업이다. 은 울프강 푸쉬닉(색서폰), 자말라딘 타쿠마 (베이스), 릭 야나코네 (기타), 린다 샤록 (보컬)로 구성된 세계적인 재즈그룹이다. 과 김덕수는 서로의 음악에 깊은 흥미와 감동을 느끼고 함께 네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1집은  SAMULNORI>라는 타이틀의 음반으로 1989년 POLYGRAM사에 의해 제작되었다. 경기도당굿, 동해안 푸너리 등의 무속장단에 기초한 이 음반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흥분과 에너지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93년에 제작된 두 번째 음반은 라는 타이틀로 ECM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첫 음반은 비엔나에서, 두 번째 음반은 한국에서 녹음했다. 완전히 다른 문화, 다른 기후와 토양에서 만들어진 음악이기 때문에 담고 있는 정서도 완전히 틀리다. 두 번째 음반의 이라는 곡은 춘천의 강변에서 만들어진 곡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로운 마음가짐 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곡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라고 김덕수는 이야기한다. 1995년 한국의 King Record에서 이라는 타이틀로 제작된 세 번째 앨범에는 동살풀이 장단 위에 힙합, 레게, 랩, 재즈와 같은 서양 음악들이 녹아 있고, 판소리가 서양 악기들과 만난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단순히 크로스오버된 음악이 아니다. 우리 장단은 많은 음악을 포용할 수 있을만큼 열려있는 음악이고, 은 그러한 우리 음악을 바탕으로 한 우리만의 새로운 음악이다.
   네번째 음반   음반 전체가 드라마처럼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는 땅을 뜻하고, 마지막을 알리는 징은 하늘을 뜻한다. 그 안에서 자유로이 노는 소리와 연주는 사람의 것이다. 땅을 딛고 하늘을 향하는 (From the earth, to the sky) 웅대한 꿈이 이 음반의 주제이다. 이 음반의 기본 흐름은 그간 사물놀이가 연주해 온 '삼도 농악 가락'이다. 우리 나라 각도의 풍물 가락을 재구성, 하나의 산조와 같은 형식을 갖고 있는 '삼도 농악 가락'은 꽹과리, 징, 장고, 북의 사물에 의해서 연주되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완벽한 구 조와 구성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사물놀이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음악을 잘 이해하고 있는 레드선과의 협연을 통해 더욱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음악에 대한 김덕수의 열려있는 모습은 97년 12월 발매된 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앨범에서 김덕수는 대중음악계의 지인들과 함께 연주를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김광민, 한충완, 정원영, 한상원과 같은 재즈 뮤지션, 유진박과 같은 클래식과 팝의 경계선상에 있는 크로스오버적인 뮤지션들뿐 아니라 넥스트와 같은 록그룹, DJ DOC의 이하늘과 같은 랩퍼도 있다. 이들은 김덕수와 함께 연주함으로써 한국 전통음악의 거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비단 이 음반에서 뿐만이 아니라 서태지 2집에 수록된 에서의 공동작업, 신해철의 동계아시안게임 오프닝 에서의 공동작업, 에서의 구준엽과의 공동 작업 등 김덕수의 음악세계는 경계가 없다. 사물놀이를 통한 전통의 재창조. 만족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다니며 한 곳에 갇히지 않는 김덕수의 음악 여정은 바로 세계로 향하는 한국 문화의 자존심이다.

 


-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경기도당굿)

1957년 아버지 김문학에 의해 남사당 입문
1957년∼64년 남운용, 양도일, 송순갑, 최성구, 이원보, 송복산 등 명인들에게 남사당 전종목 사사
채상근 명인에게 호남좌도농악 사사
 
갈래갈래 찢겨진 우리의 음악문화에서 김덕수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는 한마디로 일본 제국주의 문화와 해방이후 밀어닥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문화의 일방통행 속에서 의문으로 가득 찬 현대적인 한국음악 문화의 정체성을 전통의 재해석과 다양한 실험을 통해 규명해나가는 현재진행형의 예술가이다.
우리 음악의 불행은 근대라는 이십세기의 지평선에서 홍난파와 현제명 같은 유학파를 중심으로 한 서양음악 진영이 전통음악의 미학 체계를 '원시적이고 열등한'것으로 몰아 전면적인 부정과 격하를 단행하는 한편으로(그 중에서도 안기영과 김순남, 이건우 같은 인물은 예외였지만), 일본 음반산업 자본에 기초하여 새롭게 부상하던 대중음악권 역시 '저질과 퇴폐'의 낙인을 찍으며 역사의 종시성과 각 장르간의 공시성의 급격한 단절을 불러왔다. 서로는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소 닭 보듯이 쳐다보는 동안 강대국에 의한 한국 음악의 '분할통치(divide&rule)는 역설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다.
분단 이후 근 오십년이 흐르는 동안 이 세 진영의 균열을 통합하려는 작지만 주목할만한 극복의 노력이 있어왔다. 멀리 독일에서는 윤이상이, 그리고 국내에서는 황병기가 그렇다. 대중음악의 영역에 있어서도 멀리는 신중현과 김수철에서 가까이는 90년대 최대의 문제아 서태지와 아이들의 두 번째 앨범속의 와 신해철이 이끄는 넥스트가 사물과 대고(

大鼓), 그리고 여성 창()과 동반하여를 연주하는 충격적인 무대를 제공하는데 이르기까지, 비록 단속적이긴 했지만 우리의 호흡을 복원하고 더욱 창조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려는 몸부림들이 이어졌다.
지만 1978년 농악의 네 개의 타악기를 무대음악화한 사물놀이의 등장만큼 일파만파의 충격을 제공한 것은 없다. 그것은 마음속에 우리 전통음악의 숨결을 망각한 한국의 음악수용자들에게 유구한 리듬 감각을 일깨워 놓음과 동시에 그 어떤 진영의 음악도 수행해내지 못했던 우리 음악의 세계진출과 세계음악과의 수평적인 교류를 획기적으로 열어놓았다.
그러나 정작 이땅의 우리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힐끗 바라보았을 따름이다. 사물놀이가 유엔의 총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쳐도 정작 국내에서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성공한 소프라노인 조수미의 음반에는 '국가와 민족 차원의' 후원의 열광을 보여주면서도 세계에 떳떳이 내놓을 수 있는 우리의 독창적인 것에는 무심하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가장 먼 이상한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음악의 주인이 서구의 음악인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발라드, 댄스뮤직, 로큰롤, 재즈에 이르는 중심적인 대중음악의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 음악의 시장도 만만찮다. 온전히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전통음악은 레코드 가게의 한 구성에서 초라하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거나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사각 지대에 배치되는 푸대접을 감수해야 한다.
요 및 판소리, 시나위와 산조 같은 혁혁한 평민음악에서 시조와 제례악 같은 귀족음악에 이르는 우리의 전통음악이 20세기로 올바르게 이행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전통문화의 단절을 강제적으로 집행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있다. 그러나 과연 조선총독부에게만 모든 책임이 있을까? 우리의 식민지 기간은 34년이 조금 넘는다. 그렇다면 영국의 전통음악이 아예 흔적도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서구 음계에 입각한 '학교 종이 땡땡땡'을 교육받는다. 해방이 된지 오십년이 지났지만 초중등 음악교육 과정에 국악이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교육의 담당자들이 교육받지 못했으니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전통문화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행에 옮겼던 선구적인 교사들은 사상이 불온한 것으로 의심까지 받아야 했으니 본말이 전도되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의 것에 대한 이와 같은 적대적인 무의식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 음악의 세계화는 없다. 이것은 몇몇의 천재적인 음악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이 지금 당장 옛날의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이해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통음악을 낳았던 사회적 조건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음률 정신을 되살린다는 것은 고고학적이 발굴이 아니라 전통과 현대라는 두 긴장의 축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적 질서를 창출해내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작업이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 이상의 지속적인 실험과 연구의 연대기를 요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덕수는 단순한 외형적 제스츄어로서가 아니라 음악적 통찰력의 너비에서 '열린'음악가이다. 그 열림의 세계안으로 수많은 음악의 갈래들이 기꺼이 입장하여 새로운 미의식을 창출해낸다. 그것은 세계에 자랑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부심을 지녀아 하는 당애의 유산인 것이다.
극심한 수입역조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문화산업이 세계 시장의 한 귀퉁이라도 파고 들기 위해선 이 공룡같은 시장의 작은 빈 곳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냉정한 시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취향에 부응하려는 허망한 놁보다는 그들에게 결여된 것을 보편적으로 제련하는 노하우를 쌓는 것이 지름길이다.
우리는 영어권 문화를 모방한 일본의 문화를 또한 베껴대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나아가 이기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는 후안무치의 게임의 법칙아래 이 천박한 문화적 범죄에 대해 최소한의 죄의식도 표명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 대중문화의 내면이 이렇게 곪을대로 곪아가면서 세계시장 운운하는 것은 일종의 블랙 코미디이다.
리가 세계 시장으로 내놓을 수 있는 문화상품은 어설픈 영어를 흉내내는 것도 아니며 메이저 수준의 제작비를 '베팅'하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사소한, 그러나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로컬 상품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이와 같은 국면에서는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되는 한탕주의의 메커니즘 자태를 비판적으로 전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를 궁극적을 말살시키는 밀리언 셀러의 향방보다 독창적인 작은 호흡의 탄생에 더듬이를 곧추 세워야 한다.
몇몇 천재적인 아티스트가 나타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우리의 문화가 주류의 일방통행이라는 동맥경화로부터 구출되는 것은 우리의 시장을 정상화하는 길이자 우리 문화상품의 다양화를 꾀하는 열쇠이며 나아가 세계시장을 타진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고리이다.
김덕수는 바로 이 세기말의 바로 글 노루목에 우뚝서서 호탕하게 웃고있는 우리의 대표선수인 것이다.

-------------------------------------------------------------------------------------도움이 되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백남준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비디오 예술의 아버지, 작곡가, 행위 예술가, 테크놀로지 사상가이다. 백남준의 예술은 세계성과 한국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세계 속에 우뚝 서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치열하게 실천한 위대한 예술가이다.


서울. 거부의 아들로 태어남


백남준은 1932년 7월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백낙승(白樂承) 씨는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며 홍콩을 무대로 한 무역상이었다. 그의 부친은 당시 종로 5가와 동대 문 일대 포목상의 절반 이상이 백씨 집안의 소유였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대부 격이었다.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임


백남준은 애국 유치원과 수송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남자가 시끄럽게 피아노를 뚱땅거리면 못쓴다\"는 부친의 엄격한 훈계 때문에 공식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큰누이 희득(熙得)의 피아노 레슨 시간을 이용하여 어깨너머로 슬금슬금 피아노를 배웠다. 그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게 된 때는 경기 공립 중학교(당시 6년제)에 진학하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경기 중학 음악 교사는 피아니스트 신재덕(申載德) 선생(전 이화여대 음대학장, 89년 작고)이었다. 신재덕 선생은 재주덩어리인 백남준에게 피아노뿐만 아니라 작곡과 성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음악 수업을 시켰다. 특히 이 시기에 작곡가 이건우(李建雨)를 만나 백남준은 음악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된다. 백남준은 음악에 대한 재질은 뛰어나서 이건우로부터 사사 받고 있을 무렵에 다섯 개의 간단한 곡을 작곡할 정도였다.


일본으로 유학


6·25사변이 터지자 그의 집안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거기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백남준은 집안의 대이동 등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1951년 도쿄대학 미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거기서 백남준은 전후 일본의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타케우치 토시오(竹內敏雄) 교수로부터 미학을, 노무라 요시오(野村良雄)로부터 음악학을,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郎), 시라이시 아키오(白石顯雄) 교수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특히 노무라 요시오 교수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드물게 기독교인에다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던 경력을 가진 평화주의자였다. 백남준은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는 도쿄대학에서 총명한 학생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주로 음악 서적과 철학 서적을 읽었다.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할 즈음, 백남준은 당시 현대 음악의 메카로 알려져 있던 독일로 유학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뮌헨 대학 대학원의 음악과 석사 과정에 응모하여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독일에 도착한 56년에는 백남준은 뮌헨 대학에서 음악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작곡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백남준은 당시 준비 중이던 안톤 베버른에 관한 음악사 석사 학위 논문을 중단하고 보수적인 뮌헨을 떠나 보다 전위적인 음악이 환영받던 프라이부르그로 옮겨버렸다. 그 곳에서 백남준은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로부터 작곡의 기본에 관한 다양한 사항들을 배었다.


뮌헨대학에서 존 케이지를 만남


58년에는 존 케이지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예술 인생은 큰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케이지는 서양 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18세기 악기가 내는 소리만을 음악의 영역으로 설정하는 고정 관념에 대하여 반기를 든 가장 적극적인 전위 음악가이다. 그는 종래 음악의 정의를 폭넓게 해체시킨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백남준이 서양의 전통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면서 공격적인 행위 음악을 전개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2년 5월에 백남준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어느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플럭서스 그룹을 창시한 조셉 보이즈을 만났다. 보이즈는 낯선 독일에 살던 한국인 백남준을 극진히 보살펴주며 동시에 퍼포먼스를 함께 열어 자신과 동반자 관계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지켜주었다. 이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보이즈가 백남준의 첫 전시에 느닷없이 개입하고 난 뒤부터였다. 백남준과 보이즈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퍼포먼스를 함께 하였으며 특히 보이즈 신화의 대부분에 백남준이 관여되어 있다.


독일 부퍼탈에서 음악을 전시함


63년 백남준은 독일 유학 시절에 부친이 보내주는 학비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5·16군사혁명이 나면서 재산이 몰수되는 등, 집안이 어렵게 되자 부친은 학비를 더 이상 부쳐줄 수 없다는 연락과 함께 마지막 송금을 하게 되었다. 그 마지막 송금액으로 그는 텔레비전 13대 샀다. 그리고 3월에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에서는 텔레비전 13대가 동양의 젊은 예술가 백남준에 의하여 호되게 괄시 당하고 억압당하는 매우 공격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에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발상에다 그 전시가 전자 텔레비전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이 전시는 오늘날 비디오 예술의 첫 전시회로서 백남준 신화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는 역사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 전시회는 당시까지 음악가나 행위 예술가로 알려져 있던 백남준이 텔레비전이라는 예술 영역을 새로 개척한 이벤트인 동시에 비디오 역사의 장을 연 문제의 전시이다.


 그는 13대 가운데 12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면서 텔레비전의 기능을 온전히 살려둔 것은 거의 없었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기능을 하도록 조작해 놓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조작하여 하나의 가느다란 선으로 묘사하였고 이것을 \'tv 참선\'으로 제목을 붙였다. 배치 방법도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게(우연적으로) 유도하였으며 관객이 접근하여 매만지거나 건드려야 작동되도록, 즉 tv 문화를 관객의 지배 하에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전시회의 기본적인 개념은 60년대 대중문화의 성상이며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라디오+그림\'으로 해석해 볼 때 음과 이미지의 결합은 예술에서의 혁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관객이나 언론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감사점수 원츄♥ 도움 되셨길 바랍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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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Korea which is an active duty successive highest homerun hitter unique existence and With the homerun king of Asia 56 homeruns 9 years to hit with period 324 homeruns The MVP5 it shone in the sliced raw fish and the Japanese first year should have been written E to the car to clean 2 lwu others, It participates tus it did but from 2006 WBC conference which fights Korea 7 conditions 6 monks 1 phay the outdoors in 5 homerun 10 other point Japanese conditions to contribute reversal contest decision other point In American condition money thu leyl Wil li su from as for solo homerun at the time of the next other three To go out with a deliberation four nine and most huy before the United States Sub to become the stepping stone of 3 homeruns victory To receive the new appointment of the do to do supervision, became the bedspread American our non-concurrence 4 hitter That bedspread American us to do khwu step, Dacca it did and it fought with extra prize Did squaring Yub with participating which is dazzling fight alone with 0.323,41 homerun,108 other points Leads bedspread American us with victory and it was a want of ability which is burnt The mountain range of this year the bedspread American our team which receives a highest treatment from Japan The league squaring Yub who wins cannot go mad to the expectation with 0.27430 homerun 74 other points It will grow, from emacs series it gives 3 phay it did in. It is a bow which cleans 115 homeruns from 324 homerun and Japan from Korea The Yankee of Japan su from the team which is bedspread American we who are with tactics 4 hitters It is a bow which also business trip recording h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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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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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점수 ㅋㅋ

한국을 빛낸 사람들(내공 100)

방학숙제로 한국을 빛낸사람들조사하는데요, 김연아 박태환 박지성 강수진 이분들에대해 네줄정도로 한국을 빛낸 점좀 알켜주세요 내공100이요!!급해요!! <한국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

... 근데 말 그대로 한국을 빛낸 사람들을 말하는건데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배신자인데 왜 있는거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예술, 경제 등...

한국을 빛낸사람들

저는 6학년 인대요 한국을 빛낸사람들 좀 알려주세요 이럼건 안되요 김덕수 김연아 조장희 조수미 백남준 김순권 등 많이 유명한 사람 들 사절 입니다 급합니다. 7:30까지...

세계에 한국을 빛낸 사람들

세계에 한국을 빛낸 사람 (1명이라도 자세히)좀 갈켜주세요.내공은 적당히 60겁니다.내공얌얌은 신고고요. 정 명 훈(1953 ∼, 서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겸...

세계에서 한국을 빛낸 사람들

사회 시간에 '한국을 빛낸 사람들' 좀 찾아 주세여 이상한거 다 신고 함. 빨리 올려주세욧!!!!! 정 명 훈(1953 ∼, 서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겸 상임지휘자...

세계에 한국을 빛낸사람들

세계에 한국을 빛낸 사람들 2명 골라서 보고서 써가야 하는데여 T_T 한사람당 A4한쪽씩해서 길게 써야 하니까 길게 좀 부탁드려요 !!!!!! 정 명 훈(1953 ∼, 서울) 아시아...

세계에 한국을 빛낸 사람들

... 한국을빛낸 사람들.. 거창한 물음같지만 우리나라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한국을 빛내고 있는건 아닐까요? 각자 자기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기에 세워져있는 한국인 것...

한국을 빛낸 사람들(내공 팍팍)

... 한국을 빛낸사람을 많이 알려주세요. 단 사회책에 있는거 말고요., 멋지게 답변해주시면 추가내공과 감사내공도 드릴꼐요 안냐세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하나...

한국을 빛낸 사람들

... 한국을 빛낸 사람들을 알아오라고 하는 데요. 그냥 찾기가 귀찮아서 여기에 올려요. 내용은 많을 수록 좋구요 A4용지 한 바닥을 채울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리고. 사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