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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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9.01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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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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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

석가모니 좀 알려주세요

석가모니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 산스크리트로는 Gautama 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 悉達多)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 '깨달은 자(覺者)'란 의미로 붓다(Buddha)라 불리게 되었다.

붓다란 명칭은 붓다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불'(佛)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석가모니(釋迦牟尼)란 석가(釋迦)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Sa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우리 말로는 "부처" 라 칭한다.

탄생

석가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지금의 네팔과 인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한 지방의 조그마한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카필라바스투였다. 현재의 지명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의 북방이다.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남으로는 갠지스 강으로 유입하는 많은 지류가 있어서 풍부한 물을 이용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국이었으며, 일종의 공화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다만 남쪽의 대국인 코살라국에 인접한 탓으로 주권은 코살라국에 종속되었지만, 자치권은 인정되고 있었다.

그런 석가족의 우두머리인 카필라국의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석가모니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마야(摩耶;Maya)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반왕이라는 호칭에서 나타나듯이 석가족 집단의 우두머리는 라자(raja:왕)라고 불렸지만, 이는 통치자를 의미하는 군주의 칭호가 아니라 단순히 행정상의 수장(首長)이라는 직권을 의미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BC 6세기(560년경) 혹은 BC 5세기(460년경)에 석가족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약 100년의 시차로 견해가 갈리는 많은 이설(異說)이 있고, 특히 남방의 불교도는 BC 624년에 태어난 것으로 믿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은 태몽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석가모니를 낳기 전 아름답고 은처럼 하얀 코끼리가 그녀의 옆구리를 통해서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왕비와 수행원은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데바다하에 있는 친정으로 가던 중에 두 도시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던 룸비니(Lumbini)라는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부인이 살라나무에 오른쪽 팔을 올려 가지를 붙잡았을 때, 그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석가모니가 탄생했다고 한다.

석가족의 토템인 살라나무 숲은 룸비니라는 지모신(地母神)을 받드는 곳이었으므로 출산의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것은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신의 양팔로부터 발생했다는"리그베다 Rigveda" 의 전승과 관련되어, 석가모니가 크샤트리아 계급의 출신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석가모니와 같은 종교적 위인은 보통의 방식으로는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또 인도에서는 오른쪽을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성립했다고도 볼 수 있다.

탄생 장소는 현재 룸민데이(룸비니)라 불리며 네팔의 영토에 속한다. BC 3세기의 유명한 아소카 왕이 그 탄생지를 기념하여 세운 석주가 후대에 그곳에서 발견되어 석가모니의 출생지임이 확인되었다.

출생후 석가모니는 손가락 하나를 높게 들고 동서남북으로 일곱걸음씩을 걸어다니시며 크게 외쳤다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엄하도다)

생후 7일째에 어머니 마야 부인은 산후의 상태가 악화되었던 탓인지 사망했고, 석가모니는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에 의해 양육되었다.

생후 5일째 또는 7일째의 명명식에서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산스크리트로 '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뜻이므로 아마도 후대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의 성(姓)인 고타마는 '가장 탁월한 수소'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부족사회에 있었던 동물숭배, 특히 인도에서의 뿌리 깊은 소에 대한 숭배 관념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의 탄생에 관한 또 하나의 유명한 전설은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의 예언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날의 별자리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으므로 정반왕도 이 방면의 대가들을 불렀다.

아시타는 이 아이는 위대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든가 아니면 부처(覺者)가 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자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성장한 후의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탄생 전설은 석가족의 관심이나 의례를 고대 인도 당시의 표현형식으로 전하고 있는 점이 많고, 경전 역시 마찬가지로 고유한 표현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그 하나하나를 해명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관해서는 2월 8일, 베사카 달의 후반 8일 혹은 후반 15일 등 여러 전설이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를 취급한 것으로서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4월 8일이라 하는데, 이는 번역자가 인도의 베사카 달이 음력 4월에 상당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탄생일로 믿고 있으나, 남방의 불교도는 베사카 달의 보름날에 탄생·성도·열반이 있었다는 전승에 근거하여 '베사카 제(祭)'를 성대히 시행하고 있다(스리랑카에서는 '웨삭제(Vesak (Wesak)'라고 함).

청년 시절

브라만교의 문화는 이미 쇠퇴해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갠지스 강의 중류지역은 둘째 계급인 왕족과 셋째 계급인 서민들 사이의 신흥계급이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군소국가들이 서로 할거하면서 세력을 다투고, 비정통파의 사상가들도 많이 출현하여 논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왕인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국가를 통일하길 바라는 한편, 사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 즉 붓다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싯다르타가 속하는 나라는 예속적인 국가였으며, 그 세력을 미루어 보더라도 국가를 통일할 만큼의 힘도 없었다. 그는 사색에 잠기길 좋아하는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소극적이었으므로, 정반왕은 그 성격을 밝게 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전설에 의하면, 싯다르타 왕자가 나무 아래 앉아 오랫동안 깊은 명상에 잠겨있으며 주변의 다른 나무들은 시간을 따라 해를 따라 그늘이 옮겨지는데 오직 왕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나무만 그냥 그대로 왕자에게 서늘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다

〈증지부 增支部 Anguttaranikaya〉 경전에 의하면, 싯다르타 자신이 뒷날 그의 양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몹시 세심하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내 아버지의 거처에는 연꽃이 덮인 못들이 있었다. 하나는 푸른 연꽃의 못이고, 또 하나는 붉은 연꽃의 못이며, 다른 하나는 하얀 연꽃의 못이었는데 이것들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카시에서 산출된 최상품의 천으로 내 두건을 만들었고, 카시산(産)으로 내 상의와 속옷과 외투를……나에게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 지낼 곳과 여름에 지낼 곳과 우기(雨期)에 지낼 곳이었다.

비구들이여, 비가 내리는 4개월 동안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오직 악사들에 둘러싸여 즐기면서 궁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반왕은 문무에 걸쳐 특출난 능력을 보였지만, 싯다르타 왕자는 그런 경향을 지니지 않았다. 왕은 그를 결혼시키기로 생각하고 야쇼다라(Yaodhara)를 그의 배필로 맞게 했다.

석가모니의 청년시대를 말하는 전기는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이어서 그 진위를 판별하기란 매우 곤란하다. 경전에는 사촌동생인 데바닷타 등과 무예를 겨루고서 승자가 되어 아내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2가지 혼인방식이 묘사되어 있다. 승자가 됨으로써 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과 많은 여성들 속에서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인도의 서사시에도 자주 등장하므로 오히려 당시의 풍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서사시적으로 각색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도 생각된다.

왕인 아버지는 호사와 안락을 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를 만족시키려고 전력을 다했어도 젊은 왕자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고, 다른 관심사에 몰두했다.

붓다는 나중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스스로 늙어가는 것이며, 그것을 피할 수 없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노쇠함을 보고는 골똘히 생각하여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나 역시 늙어가며 늙음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바로 늙어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늙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이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청년이면서도 청년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 역시 병들 것이며 병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건강하면서도 건강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 역시 죽을 것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생존해 있으면서도 생존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관심사는 다음에 소개할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과 직결된다.

싯다르타는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곤란에 봉착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나자 그는 "라후(障害·惡鬼)가 생겼다. 속박이 생겼다"라고 말한 데서 '라훌라'라고 이름 지었다고 경전에 나타나 있다.

이무렵의 일로 유명한 것이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이다.

어느 날 마부와 함께 동문을 거쳐 외출했을 때, 싯다르타 왕자는 허리가 굽고, 막대기에 의지하면서 걸을 때마다 비틀거리는 백발의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왕자에게 마부는, 그는 늙었으며 모든 사람은 오래 살면 노인이 된다고 했다.

그는 되돌아가서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념은 다른 문으로 나섰을 때 목격한 광경에 의해서도 계속된다.

어느 날 남문을 거쳐 다시 외출했을 때는 심한 병으로 쓰러져서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허위적거리고 있는 병자를 어떤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았으며, 마부로부터 이는 병든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은 병들기 쉽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서문으로 나섰을 때는 장례식의 행렬과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북문을 거쳐 나섰을 때는 한 사문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사람의 평화롭고 침착한 태도에 감명받은 왕자는 고통 속에서도 그토록 평정함을 견지할 수 있는 연유를 깨닫기 위해 결국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동서남북에 늙음·병·죽음·출가를 배치한 것은 시적인 묘사이겠지만, 세속의 삶과 그로부터의 이탈을 대비하여 출가의 동기를 신묘하게 묘사해낸 것이다.

이 전설에서 늙음·병·죽음은 대체로 인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공통적인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연민에서 그는 출가하여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비록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된 전설이긴 하지만, 석가모니가 인생의 고뇌를 어떻게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출가로 유도하려는 암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석가모니의 젊은시절에 대한 전설은 그가 원래부터 사색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지만, 당시의 약육강식이라는 국가간의 다툼을 보고 석가족의 운명을 생각할 때, 젊은 싯다르타 왕자로서는 아무래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나라는 코살라국에 의해 공략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가 출가한 뒤에는 마침내 코살라국에 병합되었다.

자신의 나라를 둘러싼 불길한 분위기를 석가모니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향락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심증의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혜택을 누리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가정을 버리고 출가 생활을 지향하는 의지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출가 수행

본래 사색적인 성격인데다가 석가족이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점이 그의 출가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여기에 아들 라훌라의 탄생은 출가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더이상 지체했다가는 가정의 속박으로 인해 출가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당연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란 사문이 되는 것이므로, 그가 출가했다는 것은 브라만에 대항하는 신흥사상가들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유행사문(遊行沙門)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항상 편력하면서 숲에서 수행하고, 마을로 가서는 법을 설했다.

석가모니는 "나는 29세에 선(善)을 구하여 출가했다"고 술회했다 하여, 일반적으로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그가 출가하는 정경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자마자 그는 마부이며 시종인 찬나에게 그의 백마 칸타카에 안장을 얹게 하고는 침실로 가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 올 것을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나 찬나가 이끄는 말을 타고서 성문을 나섰다.

그날 밤으로 그는 시종 찬나와 함께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새벽녘에는 아노마 강을 건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장신구들을 찬나에게 주고, 찬나와 칸타카를 아버지에게 되돌려보내 출가의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지나가는 사냥꾼과 옷을 바꿔입어 고행자의 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석가모니의 전기는 그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빔비사라 왕을 만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빔비사라 왕은 그가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교제를 하게 된 인물인데, 여기서 그와의 만남을 전제해 둔 것은 전기작가의 문학적인 복선일지 모른다.

어쨌든 고행자가 된 싯다르타는 남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영적인 고행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그리고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에 도착했다.

라자그리하는 왕사성(王舍城)으로 번역하여 통용되는 지명이며 현재의 라지기르에 상당하는 곳이다.

낯선 고행자의 잘생긴 외모와 침착한 인품에 감명받은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는 언덕 기슭에 앉아 있는 그를 찾아갔다.

왕은 그 고행자가 예전에 왕자였음을 알아낸 후 그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고, 자신의 왕국을 분배하여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싯다르타는 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포기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시는 아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빔비사라는 그에게 깨달음을 성취하면 다시 라자그리하를 방문해주기를 요청했으며, 싯다르타는 이에 동의했다.

싯다르타가 가르침을 구하러 나서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라는 선인이었는데, 그는 명상에 전념하는 수행자였다. 싯다르타는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여 그로부터 대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고 오로지 말로 통하는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다음에는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의 곁으로 갔다. 그에게서는 이전보다 더 높은 신비적 경지를 배웠으나, 싯다르타는 이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경전에서는 알라라 선인이 추구했던 경지를 무소유처(無所有處)라 하고, 우다카 선인의 그것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한다.

이것은 초기의 불교사상에서 명상 수행의 정신적 경지를 단계적으로 표시하는 4무색정(四無色定)에 포함되는 것인데, 당시의 명상 수행자들은 여기에 역점을 두어 선정을 닦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도 "잘 정신차려 무소유를 기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함으로써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슷타니파타 Suttanipata〉, 1069)고 하여 무소유처의 명상을 가르치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자도 아니고, 잘못 생각하는 자도 아니며, 생각이 없는 자도 아니고, 생각을 소멸한 자도 아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무릇 세계가 확대되는 의식은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슷타니파타〉, 87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최초의 불교 사상이 발전해가는 과정이 발견된다. 아집을 버리는 무소유의 경지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서, 또는 허무론적으로 이해되는 경향도 있었던 탓인지, 이것도 타파했음이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석가모니는 고행주의자를 찾아 편력한다. 알라라·우다카의 곁을 떠난 석가모니는 마침내 힌두교의 성지인 가야에 도착한다. 네란자라 강 근처에 있는 우루벳라는 마을 부근의 숲에는 많은 고행자들이 있었다. 석가모니는 수정주의로부터 고행주의로 향하는 하나의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경전은 이런 수행의 시기에 대한 석가모니 자신의 많은 회상을 싣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전기(轉機)가 된 하나의 큰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석가모니를 단적으로 묘사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간다라의 고행상(2~4세기)이지만, 경전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모든 수족은 마치 울퉁불퉁한 뼈마디들로 되어 있는 쇠약해진 곤충처럼 되었고, 내 엉덩이는 마치 물소 발굽과 같았고, 내 등뼈는 공을 1줄로 꿴 듯이 불거졌고, 내 늑골은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았고, 내 두 눈의 동공은 마치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물이 반짝이는 양 눈구멍 속에 깊이 가라앉은 듯했고, 내 머릿가죽은 마치 덜 익은 채 잘려 쓰디쓴 조롱박이 태양과 바람에 의해 쭈그러지고 오그라든 것처럼 되어버렸고… 내 뱃가죽은 등뼈까지 붙게 되었다. 내가 대소변 등 생리적 요구로 움직이고자 할 때는 즉시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으며, 내 사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같이 수행하는 석가모니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숫타니파타〉425~449).

고행으로 명상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곁으로 악마 나무치가 다가와 이런 식으로 유혹한다. "그대는 이제 곧 죽을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다. 베다를 학습하는 자로서의 청정한 행동을 하고 성화(聖火)에 공물을 바쳐야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러한 고행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나로서는 세간의 선행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에게는 신앙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라고 답하여 그 결의를 피력했다.

악마와의 문답은 많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바라문 우위의 관습에 대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것들을 초극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볼 수 있다.

다른 악마와의 문답에서도 석가모니 자신 속에 있는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부터 전래된 사상이나 번뇌와의 대결 등이 뒤섞여 있는 갈등이다. 거기서는 탐욕, 배고픔과 목마름, 쾌락 등 여성명사로 표현되는 악마도 보이며, 고행에 대한 석가모니의 고뇌도 묘사된다.

이런 악마의 유혹은 그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절정에 달한다. 악마는 석가모니 자신의 마음에 있는 또다른 일면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혹에 직면할 때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대결하여야 비로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고 석가모니는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도의 고행 생활이 6년간 계속되었다고 말하지만, 더 오랜 기록에서는 7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고난의 수행은 6년 또는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깨달음' 6년 혹은 7년에 걸친 고행이 결국 목적을 달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극도로 여윈 몸으로는 안락을 얻기 어렵다."라고 생각했다.

신체를 고행으로 심하게 괴롭혀도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서 그 고행으로 체험한 결과를 토대로 삼아, 몸은 현실생활의 상태로 두면서 불안을 해소하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강가에서 목욕을 하고 그리고 우루벳라의 세나니라는 마을에 사는 처녀 수자타(Sujata)가 올린 우유죽을 공양한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모순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고행을 편력하면서도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음을 알고 수정을 하게 된 것이다. 우유죽을 먹은 것도 이런 입장에서 이해된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체험은 나중에 그의 교리에서 중도(中道)로 반영된다.

처음부터 함께 수행해 온 5명의 동료는 그가 우유죽을 먹는 것을 보고서 혐오하며, 그는 탐내고 노력하길 포기했다고 말하며 떠나 버렸다.

석가모니는 보드가야의 아사타 나무(보리수(菩提樹)) 아래서 명상에 잠기신지 7일 되는 날 새벽 동녘에 떠오르는 샛별의 모습을 보시고 우주와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대도를 성취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드디어 붓다(Buddha)가 되신 것이다.

정각(正覺)을 이룰 때 욕망 세계의 지배자요 유혹자인 악마 마라가 나타나 그를 굴복시켜 깨달음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큰 무리를 이끌고 석가모니에게 접근하여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지만, 석가모니는 전혀 동요됨이 없이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어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정진에 관한 가르침'인 〈파다나수타 Padhanasutta〉에 의하면, 마라는 그에게 접근하여 "당신은 야위었고 창백하며 거의 죽을 것 같다. 살아라, 그대여, 삶은 더 좋은 것이다. 가치있는 행위를 하라! 그러한 분투노력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욕망은 첫째, 너의 군대, 둘째, 고결한 삶에 대한 혐오, 셋째, 굶주림과 목마름, 넷째, 갈망, 다섯째, 무감각과 게으름, 여섯째, 겁많음, 일곱째, 의심, 여덟째, 위선과 냉혹함, 아홉째, 칭찬과 명예와 그릇된 영화, 열째,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다. 마라여, 이들이 너의 대군들이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그들을 이겨낼 수 없으나 오직 그들을 정복함으로써만 사람은 최상의 기쁨을 얻는다. 나는 네게 도전하노니, 만약 패배한다면 내 삶을 비난하라! 싸움에서 죽는 것이 패하여 사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결국 마라는 낙담하고 사라졌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날을 베사카 달의 보름날이라 하는데, 태양력으로는 5월경이 된다.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 하지만, 이는 음력 12월 8일에 상당하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날을 성도일(成道日)로 경축해왔다.

석가모니의 나이 35(또는 36)세였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진리(法)를 과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인다.

그러자 '범천'으로 번역되는 브라마 신이 나타나 빨리 설법하기를 권한다. 소위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전설이다.

새롭게 발견한 법에 대한 기쁨을 음미하면서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고 설법을 하기 위하여 다시 명상에 잠긴다.

석가모니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전들마다 설하는 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다. 전통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12지인연,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관철하여 깨달았다고 한다. 이 도리에 의해 그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고서,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불변하고 항구적인 것 또는 사람의 안이나 밖에 영혼이라든가 자기 또는 자아와 같은 절대적인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게 된다.

석가모니 생존시에 체계화된 연기설이 성립되었을 것임은 확실하지만 당시는 훨씬 간단한 연기관(緣起觀)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달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조직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45년 동안 전도의 과정에서 성숙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현실의 생활 속에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거기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고자 노력했다.

여러 전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석가모니가 인간의 이법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법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 그 자체에 입각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중에 불교사상이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는 그 맹아가 여기서 발견된다. 석가모니가 항상 고정된 방식으로 설법하지 않고, 때에 따라 설하고 삶에 부응하여 설하는 소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중에 체계화되어 가긴 했지만, 연기의 본질적인 사고방식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당연했다.

석가모니의 교설

붓다의 교설은 그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첫 설법 내용인 사성제와 팔정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석존의 교설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붓다는 첫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고에 관한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색(色 rūpa)·수(受 vedanā)·상(想 samjñā)·행(行 samskāra)·식(識 vijñāna)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설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 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常 anitya)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五蘊)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의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한다. 붓다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인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anātman)고 한다.

고·무상·무아는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로서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이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갈애(渴愛)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집착(取)을 일으켜 행위(業)를 하여 그 결과(業報)로써 사후에 또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같은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갈애 또한 원인을 갖고 있다. 갈애는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無明)와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석존은 이와 같이 고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集起)들을 분석적으로 설했으며 이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 불렀다. 무지와 갈애로 인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 세를 통해 끊임없는 생사(生死)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3번째 진리로서 붓다는 이러한 고가 멸한 상태, 즉 무지와 갈애가 멸한 상태에 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했다. 이는 고가 멸한 상태(nirodha)가 있다는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탐욕(貪)·성냄(瞋)·무지(痴 moha)의 3독(三毒)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열반은 과거세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석존이 성도했을 때처럼)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 후자를 반열반(般涅槃 Parinnirvana)이라고 부른다. 붓다의 입적시에 실현된 경지이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존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현세에서 열반을 실현한 여래(如來 Tathagata)가 사후에 존재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붓다는 이에 대하여 가부를 논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그가 대답을 거부한(無記) 것으로 전해지는 14가지 사변적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붓다는 열반이라는 초월적 실재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4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또는 줄여서 도제(道諦)를 설했다. 즉 고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 팔정도에 관한 설법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 된다.

도덕적 행위와 삶(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붓다는 팔정도를 설함과 아울러 쾌락을 탐하는 삶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의 양극을 피해 중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가르쳤다. 중도는 8가지 수행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태도인 것이다.

붓다는 이같은 고락의 중도 외에 단상(斷常)의 중도, 혹은 유무(有無)의 중도도 가르쳤다. 즉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도 석존은 거부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업보도 내세도 없다는 단멸론(斷滅論)도 거부했다.

그러나 존재의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서 존속한다. 열반이란 이렇게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하고 괴로운 인간존재 자체가 완전히 극복된 무조건적인 세계이며, 팔정도는 무지와 탐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을 극복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다. (출처: 브리태니커)

설법과 전도

석가모니는 7주간의 명상 끝에 이 법을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두 선인과 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미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베나레스로 떠나 갔던 5명의 동료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법을 전하고자 전도 여행길에 나섰다.

당시의 베나레스 교외에 있는 프르가다바는 녹야원(鹿野苑)으로 번역되는 곳으로 현재의 사르나트인데, 이곳은 수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거기에 와 있던 옛 동료인 5명의 수행자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석가모니가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맞이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깨달은 법을 정식으로 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설법이었다. 예전의 동료였던 5명은 그 법에 귀를 기울여 부처와 동일한 경지를 깨닫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유명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수행자에게 법을 설하여 그것이 이해되자, 석가모니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하기에 이른다.

이 베나레스에서 상인의 아들인 야사와 그의 친구 3명, 다시 그들의 친구 50명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서 출가했다.

그러나 사문은 한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한 길을 둘이서 가지 말라"고 설하여 각각의 제자들을 전도의 여행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그 자신도 몇 사람의 제자들을 데리고 편력한다.

드디어 불을 섬기는 브라만으로서 마가다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카사파라는 이름의 3형제와 그들의 무리 1,000명을 귀의케 했다. 또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도 귀의하여 증대하는 불교 수행승들을 위해 나중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또 가섭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카사파도 제자로 삼았는데, 그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불교 교단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의 명성을 떨치게 했던 사람은 2대 제자로서 유명한 사리불(舍利弗 riputta)과 목건련(目連 Moggallana)의 귀의였다.

이들은 당시 불가지론자인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스승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사지라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탁발하며 지나가는 것을 본 사리불은 탁발이 끝나길 기다려 그에게 질문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일단을 설하는 그의 말에 감복하여 사리불과 목건련은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이끌고 집단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산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본래의 불교가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넘어 회의론 및 불가지론을 일단 통과한 입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이미 유명하던 사리불과 목건련이 석가모니 곁으로 무리를 끌고 전향했던 사건은 마가다에서 석가모니를 일약 유명하게 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받고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는 단서가 되었다.

경전에서는 "1,250명의 제자와 함께 머물고 계셨다"는 표현이 정형화되어 있는데, 그 숫자는 카사파 3형제가 이끄는 1,000명과 사리불 등을 비롯한 250명을 총칭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항상 전도 여행을 계속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舍衛城), 여기에 인접하는 바지국, 그리고 석가모니 생존시에 코살라국에게 멸망된 석가족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당시 갠지스 강 중류지방에는 사문들의 탁월한 지도자 6명이 잇달아 출현했다. 불교측에서는 이들을 '6사외도'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제자들과 문답하여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제자들 속에는 사촌동생인 아난(阿難 Ananda)과 아나율(阿那律 Anuruddha), 자신의 외아들인 라훌라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왕인 정반왕과 자신의 부인이자 라훌라의 어머니인 야쇼다라도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불교의 이단자로 간주되었던 사촌동생 데바닷타도 제자가 되었으나, 그는 실천에 관해 가장 보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불교에서는 가장 사악한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부처가 되기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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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를 개조해 불교를 만든인물.

고타마 싯다르타 가 본명에 가까운 발음이고 별명으로는 샤카무니 - 샤카일족의 왕(위대한자) 이 있는데 이건 그가 샤카왕국의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임. 이 샤카무니를 중국식 한자로 쓴걸 한국식으로 읽으면 석가모니.

기본적으로 업보와 윤회는 힌두교에 있던 것이고 인간은 영원히 죽었다 살아나는걸 반복하며 그 운명을 받아들여 착하게 살라는게 힌두교지만,

불교에선 단순히 운명을 받아들이는게 아닌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괴로움의 뿌리인 욕심을 버리고 좋은 업보를 쌓아 최종적으론 욕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방법을 깨우친 자 - 붓다(중국식 한자로 쓰고 한국식으로 읽으면 부처) 가 되는걸 목표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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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룸비니에서 태어난 석거는 부처가 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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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은 간단히 말해

괴로움으로 부터 탈출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알려주신분

자기가 알아낸 방법대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니 그분들도 같은 효과 나타나고

아라한 까지되신 분은 1250여명

저도 해보니 괴로움 사라집디다

한번 시킨 대로 해보세요

부처라는 것은 자신의 법명을 그러게 불러 달라고 한것이니

이름 가지고 시비걸일은 아님

그분이 어떻게 살았든 사실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이 중요

실은 엄청 진실된 삶을 사심

불교 수행이 전부입니다

불경은 대부분 99% 꺠달음에 이르게하는 수행에 관한 이론서입니다

그리고 노래처럼 같은 내용이 장소와 소재만 바뀌고 반복됩니다

그러니 한번만 읽어보고 그대로 해보는 거죠

참선도 마찬가지 용어나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입니다

내용이 다르다면 불교가 아님

행동을 알아차리는것이 있어야 수행이 제대로됩니다

그것을 념(念)이라고 합니다

또는 자각, 수의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는 MINDFULNESS, awakeness

한글로는 알아차림, 새김, 마음챙김, 주의깊음, 강력한 알아차림, 등 많습니다

인도 빨리어로는 sati라고합니다

같은 경의 이름에 안반수의경 호흡새김경 호흡식념경

다 같은 것입니다

8정도의 정념입니다

불교는 이 념의 힘 sati 힘을 기르는 것을 통해 꺠달음에 이른 것이라고 보면됩니다

아래를 읽어보고 해보세요

반야심경을 수행을 하는데

제대로 하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반야심경은 한번만 읽고 그대로 하는 것

핵심은 "조견오온"인데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자기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

그렇다면 현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구나 하고 있는 그대로 보고 있으라는것

그리고 감정이 일어나면 감정이 일어나는대로 그대로 보는것

이렇게 하는 것을 조견오온이라합니다

모든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대로 보며 알아차리면

모든 현상이 사라집니다

이것을 공이라합니다

조견오온 개공이라고 되어 있지요

읽고 외우고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해보는 것

자세한 것은 아래 참고

BUDDHA 수행법 BUDDHAPALA저 를 추천합니다

읽기전에 간단히 아래와 같이 해보면서 읽어보셔유

부처님은 법의 상속자가되라 고 강조하셨으므로

부처님이 알려준 방법을 먼저하시고

그것을 가르쳐주는 절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보세요

갈애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을 해탈이라합니다

갈애가 떠오르면 알아차림하면

생각이 갈애로 부터 알아차림으로 바뀝니다

계속 떠오르면 계속 알아차림하면 안 떠오릅니다

마음이 그게 안되니까

이번에는 다른 것을 가지고 마음을 휘두릅니다

거기에 끌려가면 실력이 올라가지 않죠

원전을 잘 읽어보시고 이해하십시요

마음강화 하는 훈련이 불교 수행법입니다

아래와 같이 열심히 훈련해보세요

(1~5분 해보면 금방 알거예요)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미래를 생각하면 두렵고 불안하죠

생각은 꼬리를 물고 끝없이 몰려와요

그래서

현재에 머무르는 훈련을 해야해요

몸을 편안히 한다음 움직이지 말고

눈을 감고

숨이 들어오면 하나

나가면 둘

하나 둘 하나 둘

다른 생각이 들어오더라도 무시하고 또는 빠르게 알아차리고

다시 하나 둘 하나 둘

그렇게 하면 그생각이 안 떠로르죠

그렇다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예요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귀찬아지지 않아요

느낌 같은것 들더라도 무시하고

계속 하나 둘 하나 둘 하세요

(응용해서 무자화두를 든다면

숨이 들어오면 무, 나가면 무, 무, 무, 무, 무,

생각이 들어오면 무, 나가면, 무, 무, 무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 마음의 변화가오죠

잠이 안오더러도 하나 둘 하나둘

우울한 생각이 들더라도 무시하고 하나 둘 하나 둘

안되면 소리 내면서 하나 둘 하나 둘

지루하면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드는데 엄청 편해져요

걸어갈 때는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

https://sati.center/

1. 유일한 길 :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 깜맛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바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정신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身隨觀)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satipatthana Sutta)

부처님의 육성이 생생히 살아있는 초기경들 가운데서

실참수행법을 들라면

본경 「대념처경」과,

「중부」의 「들숨남숨에 마음챙기는 경」(Anapanasatii Sutta, 出入息念經, M118)과

「몸에 마음챙기는 경」(Kayagatasati Sutta, 念身經, M119)의 셋을 들 수 있다.

물론 「중부」의 「염처경」(M10)도 들어야겠으나

「염처경」은 사성제에서 고성제에 관한 부분만 제외하고는 본경과 그 내용이

일치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세 경들(대념처경,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경, 몸에 마음챙기는 경)을

초기경들 가운데서 실참수행을 설하신 수행삼경(修行三經)이라 불러도 괜찮다.

이 가운데서 본경은 수행법을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의 네 가지 주제 하에 집대성한 것으로

초기 수행법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경이며 그런 만큼 유명한 경이기도 하다.

마음챙김으로 대표되는 초기불교 수행법은

이 경을 토대로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남방의 수행법으로 알려진 위빳사나 수행법은 모두 이 경을 토대로 하여

가르쳐지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본경은 「장아함 」에는 실려 있지 않고 「염처경」(念處經)으로 옮겨져서

「중아함」의 98번째 경으로 중국에 소개되었다.

2-1. 몸을 관찰(身隨觀): 들숨날숨에 마음챙김

2.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아래 기거하거나, 외진 장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겨 숨을 둘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하면서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도공의 도제가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고 꿰뚫어 아는 것처럼,

그와 같이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하면서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2-2. 몸을 관찰: 자세四威儀)에 마음챙김

3.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있으면서 '서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 있으면서 '앉아 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으면서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2-3. 몸을 관찰: 거동에 마음챙김

4.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갈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의복·발우를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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