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명소와 음식

북한 명소와 음식

작성일 2014.06.0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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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수행평가를 해야하는데
참 애매한 문제입니다
통일이되면 가고싶은곳과 음식을 알아서적으라네요
형식은 자유인데

어떤식으로 쓰고하는게 유용하고 할까..해서 물어봅니다
자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단어나 그곳의 설명을 해도되고
부탁드립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탈북한 함흥사람들이 보고 기겁하는 남한의 함흥냉면 (119)

by 주성하기자   2012-09-10 7:43 am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여름 너무 무더웠죠. 서울도 폭염으로 8월 초에 한 열흘 동안 매우 고생이 많았습니다.

 

여기는 에어컨이라고 찬 바람이 나오는 가전기구가 있어 그나마 좀 낫습니다.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가면 시원하거든요.

 

그런데 선풍기조차 변변히 없는 북녘 여러분은 이런 무더위를 어떻게 견뎠겠나 싶습니다. 하긴 뭐 저도 북에 있을 때는 더워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참았습니다.

 

이렇게 더울 때면 서울에서 제일 잘 팔리는 음식이 뭐냐 하니 바로 평양냉면입니다. 평양에 서울냉면 이런 식당이 있으면 이상하겠지만, 여기 서울엔 평양냉면이 아주 당연하게 있습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정말 여기저기 평양냉면집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냉면 하면 그냥 다 평양냉면으로 통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많은 것이 함흥냉면입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제외하면 남쪽에는 어느 지방을 대표하는 냉면이 거의 없습니다. 평양냉면이라고 하는 집은 서울에도 수백 개가 넘을 것이고, 저기 부산, 대전, 목포 등 한국의 어느 지방에 가도 평양냉면집이 있습니다. 함흥냉면도 똑같습니다.

 

여기서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나 어떻게 구별 하나 하면 평양냉면은 육수에 빠진 메밀국수이고 함흥냉면은 농마비빔국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수에 메밀국수를 말아주는 식당은 평양냉면집, 육수가 없이 양념장에 농마국수를 비벼주는 식당은 함흥냉면집입니다.

 

참 이야기하다 보니 무더운 여름도 다 지나간 지금 철 지난 냉면 이야기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여러분이 방송 듣는 자정 무렵이면 출출하실 텐데 군침이 나오게 먹는 이야기해서도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한국에 처음 와서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길을 지나가다가 함흥냉면집을 보았습니다. 그때 제가 알고 있는 함흥냉면은 농마국수였거든요.

 

그래서 “야, 서울에서 농마국수를 다 먹어 보겠구나”하고 들어갔는데, 이게 나오는 국수가 참 이상한 겁니다. 물도 없고 뻘건 양념장과 배를 썬 것, 계란 반쪽 이런 것이 국수위에 부어져 있는데, 훌훌 비벼먹다 보니 맛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정말 달아서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원래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면 여기 음식이 너무 달아서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합니다. 여긴 음식에 사카린은 안 넣습니다만 사탕가루를 왜 그리 많이 뿌리는지. 저는 10년을 살아 어지간히 입맛이 적응됐습니다만 지금도 어떤 식당에 가면 달아서 못 먹습니다.

 

그 달아서 못가는 어떤 식당 중에 함흥냉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래 제가 알고 있는 함흥냉면은 육수가 있는 감자 농마국수거든요.

 

함흥에 동흥산 아래에 있는 신흥관, 평양 메밀냉면의 중심지가 옥류관이라면 함흥 농마국수를 대표하는 냉면집이 신흥관 아닙니까. 거기 냉면이 왜 남쪽에 와서 이상하게 오리가 아주 가늘고 달달한 회냉면으로 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재료도 고구마의 전분과 서해안의 간재미 회고 어떤 것은 홍어회까지 올라가는 등 함흥에는 없는 재료로 만든 이 국수가 정체가 뭐냐 싶습니다.

 

원래 북한 음식들이 대다수가 1950년대 월남한 실향민들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으니 일제 때 함흥냉면은 비빔냉면이었는지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지금 북한에서 알고 있는 함흥냉면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 북한의 가장 유명한 함흥냉면집인 함흥 신흥관의 함흥냉면과 신흥관 모습.

 

저는 지금 북한의 함흥에서 파는 그런 감자 농마국수를 먹고 싶지만 이상하게 남쪽엔 그런 식당이 없네요.

 

양강도 감자를 수입해서 농마국수를 만들어 팔면 어떨까 싶지만 또 그런 음식은 여기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장사하다간 식당 망할 확률이 높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언감자 국수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구요.

 

함흥냉면에 비하면 평양냉면은 옥류관 국수와 비슷합니다. 물론 제 입맛에는 옥류관 국수가 최고고 여기 냉면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지만, 또 여기 사람들 보기엔 안 그럴 수 있죠.

 

과거 남북회담 때 평양에 취재 가서 옥류관 국수를 먹어본 제 신문사 선배들이 말하는 옥류관 국수는 너무 슴슴하답니다.

 

서울에도 1940년대 해방이 돼서 남쪽에 내려온 평안도 출신 실향민들이 만든, 그때부터 따지면 역사가 70년은 되는 냉면집들이 몇 개 있습니다. 저도 잘 가는데, 가면 젊은 사람들보단 할아버지들이 참 많습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은 슴슴한 평양냉면은 싫고 단 평양냉면이 좋은 것 같은데, 유서 깊은 냉면집들은 맛이 슴슴하거든요. 그러니 옛 맛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 같은 노인들이 많이 오는 것이죠.

 

하지만 40대 넘어가면 이런 음식도 입에 맞는지, 제 회사에서도 이 냉면집파와 저 냉면집파 이런 식으로 냉면 파벌이 존재합니다. 오랜 전통이 있어도 식당마다 맛이 좀 다른데, 그러다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냉면집이 다르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곳에 다 가 봐도 저는 옥류관이 제일 맛있습니다. 제가 옥류관 냉면 처음 먹어본 지도 20년이 넘었는데요.

 

아직도 처음 먹었을 때 너무 맛이 있어서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냉면도 있구나”하고 감탄했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전에 가서 두 그릇 반까지는 먹고 배가 불러 더 못 먹고 두 손을 들었던 기억도 있구요. 제가 평양에 다시 가면 아마 제일 먼저 옥류관부터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1998년인가 어떤 탈북자가 서울에 옥류관이란 이름을 딴 냉면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북에서 대남방송에 대고 “서울에서 옥류관 상표 도용하는 가짜 냉면집이 생겼다”고 불어대서 여기 사람들이 “아, 그 식당 이름만 옥류관이고 가짜구나”하고 알게 되면서 몇 년 못 버티고 망했습니다.

 

이름만 옥류관이면 뭐합니까. 맛도 옥류관이어야 사람들이 오는 것이죠.

 

그렇지만 냉면집으로 유명해진 탈북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까지 하기엔 시간이 모자라서 다음에 마저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9월 7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삶의 질).아 유ok(자아존중 알폰시나)(괴롭혔던 여자애 국정원)(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김정일의 여인’이 밝히는 김정일의 사생활(1부-선발) (76)

by 주성하기자   2010-01-18 5:16 pm

 그녀에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얽힌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김정일의 기쁨조 일원이었다고 주장한 여성은 이전에도 여럿 있었고 새로 들어오는 탈북자
중에서도 자기가 기쁨조였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것은 팩트의 차이다. 아무리 책에서 본 내용을 짜깁기하고
없는 사실을 꾸며대더라도, 자신이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런 말은 조금만
들어봐도 어설프다.

 

  또 하나. 특히 이러한 주장에는 단 한 곳도 손댄 흔적이 없는 자연적인 미모와 날씬한
몸매, 매력과 같은 결정적인 ‘증거’가 따라야 한다.

 

  그녀가 그렇다. 그녀는 현대의학의 혜택과는 연관이 없는 미인이다. 북한에서 중앙당 소속
사진사가 찍어주었다는 10대 시절 사진 속의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동안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정일의 와병설이 터진 올 초부터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이 글은 그녀와의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내용이다. 김정일의 사생활은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이지만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 글은 그의 사생활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에 의해 일부러 쓰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다.

 

  지금까지 저에게 김정일과 관련됐었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으면서도 굳이 기사화는 피했던 이유가
있나요?

 

  이유를 굳이 꼽아보라면 많죠.

 

  우선은 김정일의 기쁨조였다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싫어서요. 사람들이 마치 저를 김정일의 성노리개였던 것처럼 바라볼까봐 두려웠죠.

 

  저는 김정일과 2년 가까이 함께 했었지만 잠자리까지는 같이 하지 않았었거든요. 그리고 사실 북한에는 기쁨조니, 만족조니 하는 말조차 없어요. 여기서 다 지어서 붙인 것이지요.

 

  그리고 제 신상에 김정일 옆에 더 있기 어려운 일이 터졌을 때, 그가 저는 특별히 살려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어요.

 

  원래 저같이 그의 옆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던 사람은 살아서 그곳을 벗어나기 힘들거든요.어쩌면 김정일이 저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저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볼 수도 있죠.

 

  남한에 입국해 합동심문을 받을 때 과거 경력들을 숨겼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되겠네요. 김정일과 있었던 이야기는 다 숨기고 평범하게 살 다 온 것처럼 이야기 했어요. 국정원에서는
지금까지도 제가 어떤 여성이었던지 잘 몰라요.

 

  예전에 어떻게 하다 보니 해외 언론에 한번 나갔던 적이 있어요. 그 나라 말을 모르다보니 그 곳 언론에 어떻게 소개됐는지 알리 없었죠.

 

  훗날 한번은 사실을 왜곡한 기사가 나가 항의했더니 “그럼 소송거세요. 여긴 외국이라 이기려면 아마 수십 년이 걸릴걸요”하는 거예요. 정말 화가 나더군요. 그런 체험을 통해 언론 기피증도 생겨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은 언론에 나가도 되는가요.

 

   늘 기사를 쓰고 싶어 했잖아요? 제가 결국 항복한거죠.(웃음)

 

  이건 농담이에요. 대신 너무 캐묻진 마세요. 사실 이것이 국가를 위해 중요한 정보인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 불과하잖아요. 제가 사실 입을 열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지금도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고 싶진 않네요.

 

  그냥 김정일이 병에 걸려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니 인생무상이란 말이 떠오르더군요. 어차피 그가 죽은 뒤에 다 공개될 일인데 지금 말하면 어떻고, 말하지 않으면 어떻고, 아무튼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 말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도….

 

  그리고 이제는 시간도 많이 흘러갔어요. 제가 김정일의 옆을 떠났던 때로부터 벌써 12년이 지났어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김정일의 옆에는 어떻게 가게 됐는가요.    

 

  제 의지는 아니지요. 북한에는 매년 중앙당 간부들이 전국의 학교를 훑으면서 학생들을 선발해요. 아마 탈북자들은 누구나 다 알거예요. 이것을 5과에 뽑힌다고 하죠.

 

  5과에 대해선 더 이야기 하지 않을게요.

 

  저도 거기에 뽑혔지요. 5과 대상자 선발은 매년 하는데 중앙당 간부들이 한번 학교를 돌 때마다 3개 학년의 학생들을 둘러보고 찜을 해놔요.

 

  저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예술관련 특목고를 다녔습니다. 저희 학교엔 미모가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어요.

 

 처음에 어떻게 뽑히는가요.    

 

  제가 5학년 때인데 수업시간에 40대 정도의 중앙당 남녀 간부가 들어왔어요.

 

  “너, 너, 저기가 서라”하면서 일단 몇 명을 뽑은 뒤, 뽑히지 않은 학생들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지요. 혹시 빠뜨린 학생이 있나 해서요.

 

  그 다음에 자기들이 뽑은 학생들을 상대로 여러 미션을 시켜요.

 

  “잘하는 것이 뭐냐. 해봐라” “가장 못된 표정을 지어봐” 이런 것들인데, 보면서 저들끼리 낄낄거리기도 해요.

 

  중앙당 간부 앞에 나섰다는 마음으로 긴장한데다, 어떤 때는 정말 난처하고 황당한 미션도 시키고 하니 심지어 오줌을 지르는 학생도 있어요.

 

  저에게는 춤을 추어보라고 하고, 가장 예쁜 표정을 지어보라 하더군요.

 

  그렇게 추려낸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요.

 

  교무실에 가서 부모 이름, 가족사항, 담임선생 이름 등을 다 기록해요. 그 자리에서 그 중년 남자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너 남자랑 잤어, 안 잤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때 제가 만 15살 정도였는데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리고 뽑힌 학생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건강검진을 해요. 병이 없나 이런 것을 검사하죠. 이렇게 최종 뽑힌 학생이 우리 학원에 열 댓 명 정도 됐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몸가짐 잘 하고 남자랑 연애랑 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사라졌어요. 5과 대상자로 뽑히니 그 다음부터 선생들은 “재들은 5과 갈 아이들”이라면서 수업에 안 참가해도 뭐라 안하고, 아무튼 누구도 저희를 터치하지 않았어요.  

 

  뽑는 절차가 그렇게 간단한가요?

 

  당연히 아니죠.  1년 뒤, 그러니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중앙에서 아주 멋진 병원차가 내려왔어요.

 

  이번 검사는 정말 깐깐하게 진행됐죠. 그리고 두 번째 검사에서 저희 학교에선 딱 3명만 선택됐어요.

 

  차라리 1차 검사에서 떨어지는 것이 나아요. 2차 검사에서 떨어지면 남자랑 자서 떨어졌다고 다른 애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아요. 그리고 여자만 뽑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뽑아요.

 

  남자들은 주로 어떤 곳에 쓰나요.

 

  남자도 뽑혀서 위로 올라가면서 부류가 갈라져요. 친위대에 가는 애들도 있고 어떤 애들은 김정일 사냥터에 가서 10년 동안 비밀리에 콩 농사만 짓다가 제대되는 애들도 있어요. 사냥터에
꿩이랑 많이 오게 하기 위해 콩 농사를 지어 수확하지 않고 밖에 그대로 방치해 두거든요.

 

  5과에 가면 휴가도 안 보내고 편지도 집에 못하게 해요. 아예 10년 동안 가족과 단절시키는 것이죠. 그것도 모르고 부모들은 아들이 5과에 뽑혀가서 가서 장한 일 한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거죠.

 

  콩 농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돼지를 치는 5과도 있고, 과수나무 가꾸는 5과도 있고. 아무튼 멀쩡한 젊은 애들을 뽑아서 김정일과 중앙당 간부들 뒷바라지 시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얼굴과 성격, 심성을 가장 많이 봅니다. 내성적인 성격이어도 잘 뽑히진 않아요.

 

  최종까지 올라가면 사진을 정면, 옆, 뒤로 아무튼 다양한 각도로 정말 많이 찍습니다. 검사할 때 자를 갖고 얼굴 비례를 재고, 찍은 사진을 확대해 자로 재는 등 몇 차례나 얼굴을 재서 눈 길이는 얼마고 입과 턱 사이 거리는 얼마고 하는 것들을 정밀하게 기록해요.

 

  키는 158~165㎝ 사이에서 뽑아요. 저의 경우에는 당시 158㎝였는데 신체검사를 한 사람들이 “딱 2㎝가 모자란다”면서 농담조로 “집에 가서 부모들에게 손발을 잡고 쭉쭉 늘여달라고 해라”고 시켰어요. 그러면서 “아직 17살이니 좀 크겠지”하고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았어요.

 

  최종에서 뽑힌 여자애들이 모두 10명이었는데 제 키가 제일 작았어요.

 

  나와 키가 비슷한 애가 한 명 있었고 나머지는 저보다 컸습니다. 다만 165㎝이상은 뽑지 않습니다. 김정일의 키가 작기 때문이죠.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 같다든지, 앵앵거린다든지 해도 뽑지 않아요.

 

  그리고 몸에 흠집도, 얼룩도 없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 최종 단계에서 어렸을 때 넘어지면서 팔에 생긴 흠집 때문에 정말 많이 고민하더군요(그녀의 팔에는 정말 주의 깊게 봐야 보이는 약 1㎝ 크기의 흠집이 있었다).

 

  그래서 저를 김만유 병원과 봉화진료소에 데리고 가더군요. 나이 지숙한 의사들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고 했는데 어쨌든 수술은 하지 않기로 결론 난 것 같아요.

 

  “오랫 만에 북데기에서 진주를 골랐는데, 딱 두 가지(키와 흠집)가 걸리네”하면서 몹시 아쉬워하더군요. 어쨌든 저는 1,2차 시험에는 합격됐어요. 이제 평양에서 전국에서 모집해 온 여성들과 다시 비교한 뒤 최종적으로 선발하는 3차 관문이 남았습니다.

 

(※이번 연재의 주요내용은 신동아 12월 호에 연재됐었다. 그러나 신동아에는 원고지 약 50장에 해당하는 분량이 지면제한으로 잘렸다. 이 글은 신동아에 나가기 전의 초기 원고이다. 특히 이번 글과 다음 글의 선발과정 부분은 이 블로그를 통하여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2부) 혈서로 맹세하고 김정일의 여인으로. (65)

by 주성하기자   2010-01-19 6:05 pm

 (앞글에 이어)

 

 2차에서 통과된 뒤에는 어떻게 하나요.

 

  2차에서 통과되면 집에 가서 한 보름정도 쉬게 한 뒤 다시 불러요.

 

  이때는 전국에서 뽑힌 학생들이 다 평양에 모여 고급 호텔에서 묵어요.

 

  4인1실 씩 쓰는데, 나흘 동안은 별로 큰 일이 없이 지내요.

 

  이때 보면 참 가관이에요. 여자애들 사이에 질투와 경쟁심리가 엄청 강하거든요.

 

  밤새 웃는 훈련을 하는 애도 있고, 오이팩을 바르고 누워있는 애도 있고 아무튼 모두 난리도 아니에요. 빵도 나누어 안 먹고, 화장품도 서로 나누어 쓰지 않고 그래요.

 

  원래 북한에서 학생 때 화장을 못하게 하는데, 예술 분야에서 많이 뽑아서 온 애들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미모가 출중해 제노라 하고 다녔던 애들이어서 그런지 화장에 상당히 눈들이 빨리 튼 것 같았어요.

 

  그때 벌써 오이팩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북한에선 누구도 몰랐는데 말이죠.

 

  기억나는 것이 그때 닭튀김을 주었는데, 처음 먹어봤어요.

 

  북한에서는 닭은 백숙해서 먹지 기름에 튀기질 않거든요. 하지만 맛이 없어서 애들이 고기를 다 버리고 뼈만 씹어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최종 심사는 언제 합니까.

 

  나흘 동안 묵다가 닷새 째 되는 날에 버스로 태워 어딘가 데려가더군요.

 

  전국에서 온 학생들이 대략 30~40명 정도 됐는데, 남자가 15명 정도였어요.

 

  거기서 시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렇게 한해에 많이 뽑아온 일이 없었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최종 시험에선 신체검사는 더 하지 않고, 사진을 엄청 찍어요. 확대사진, 전신사진 등등 많이 찍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을 해갖고 온 애들이 있어요.

 

  그런 애들은 모두 세면장에 들어가 얼굴을 씻고 오게 해요.

 

  그리고 그때 북한에선 머리를 여러 갈래도 따고 잤다가 아침에 풀어놓아 푸시시하게 보이는 그런 머리가 유행했었는데, 그런 머리를 하고 온 애들도 있었어요. 욕을 막 하더군요.

 

  그리고 또 한 명 한 명씩 잘하는 것이 뭐냐고 묻기도 하고, 해보라고 하기도 하죠.

 

  이 최종시험을 총괄하는 여자가 기억나요.

 

  까만 승용차를 타고 왔는데, 까만 색안경을 끼었고, 까만 가죽잠바에 무릎까지 오는 까만 장화를 신었어요. 새파랗게 젊은 여자 앞에서 다른 나이 많은 사람들이 다 공손해지더군요.

 

  마지막 시험에서도 탈락자가 생기나요.

 

  당연하죠. 그러나 누가 떨어지는지는 모르죠.

 

  시험이 끝나면 집으로 돌려보내요. 한 나흘 정도 있다가 중앙당에서 벤츠 승용차가 집에 옵니다. 동네에서 볼세라 밤에 옵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 딸을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게끔 훌륭하게 키워 감사하다는 식의 글이 적힌 감사패를 줍니다.

 

  특이한 점은 돈도 주는데, 당시 노동자 월급과 비교해 보면 거액이었어요. 헌데 그땐 물가가 너무 올라 시장가치로는 거액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요.

 

  어디로 데려가던가요.

 

  저는 그곳이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방에 들어가니 양복을 입고 배가 나온 남자가 앉아있던데, 책상 위에 큰 책이 놓여있었어요.

 

  크기는 이만큼(그녀가 그린 사이즈로 보아 길이가 약 70㎝, 너비가 50㎝ 정도 되는 대형 사이즈였다) 큰 데 표지는 검붉은색이나 자두색 비슷하고, 테두리는 금테를 둘렀어요.

 

  표지에는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5과 위원회’ 하고 그 옆에 무슨 숫자가 있었는데, 제 생각에는 우리 기 번호가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펼치는데 보니 한 사람당 3페이지 정도가 할당돼 있어요.

 

  첫 장에는 저의 이름, 부모 이름, 가족사항, 학교평점, 성적 등등 인적사항이 적혀 있고, 세 번째 장에는 그동안 3차 시험까지의 평가와 신체검사 결과 등이 적혀 있는 것 같았어요.

 

  두번째 페이지를 펼치니 제일 위에 “이 동무는 **학교를 졸업하고 당과 수령의 배려로”하고 시작되는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은 중앙당 간부가 직접 읽어줘요.

 

  그 글 아래에 사진 5장 정도가 붙어있었어요. 그동안 시험 치면서 찍은 사진인데 정면, 옆모습 등 다양한 각도의 사진이 위에 붙어있고, 전신사진은 첫 번째 사진 아래에 붙어있어요.

 

  사진이 붙어있는 모양은 ㄱ자를 돌려놓은 것과 같은 구도죠.

 

  그리고 사진을 붙이고 남은 공간에 불러주는 대로 글을 쓰라고 하더군요.

 

  군인선서와 비슷한 충성 맹세였어요. 그런데 북한에선 이러루한 선서에는 꼭 김일성의 이름이 들어가는데 이 선서에는 김일성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좀 다른 점이었어요.

 

  글을 예쁘게 잘 쓰라고 자꾸 강조하던 것이 생각나요. 아마 김정일에게 올라가는 책이었을 거예요.

 

  다 쓴 뒤 그 아래에 혈서를 쓰게 해요.

 

  혈서까지 쓰게 한단 말인가요?

 

  난생 처음 혈서를 써서 그랬는지 그때 생각이 생생하게 나요.

 

  처음에는 혈서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간부가 먼저 이렇게 물어요.

 

  “손에서 가장 소중한 손가락은 어느 것인가요. 만일 손가락 하나만 남긴다면 어느 손가락을 남기고 싶습니까.” 참, 최종까지 올라오면 간부의 말투가 공손해지죠.

 

  그때만 해도 저는 그냥 이것도 테스트 과정인 줄 알고 잠시 생각에 잠겼어요.

 

  제일 먼저 약지를 제외해 버렸어요. 그리고 다음엔 중지를 제외시켰고요. 그리고 엄지와 검지, 새끼손가락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어요. 새끼손가락을 제하고 싶었지만 그것 없으면 귀를 파지 못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거예요. (웃음) 제가 그땐 그렇게 철이 없었어요.

 

  결국 새끼손가락도 제외하고 참, 기자님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어느 것을 고르시겠어요. (저요. 음…저는 검지를 선택하겠네요.) 그래요. 저도 결국 검지를 골랐어요.

 

  그랬더니 한 뼘 정도 길이의 칼을 소독 솜으로 쑥쑥 문지르고 저에게 주는 것이에요.

 

  이 칼로 혈서를 쓰라는 거예요. 그 칼이 너무 멋있었어요.

 

  (커터칼처럼생긴 것입니까?) 아니에요. 북한산이 아니고 수입품이었는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지만 날이 상당히 예리하고 너무 화려한 칼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칼로 손가락을 벤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칼로 약지를 긋긴 했는데 피가 적게 나는 거예요. 다시 하라고 해서 눈을 감고 이를 악문 채 속으로 ‘엄마’를 부르며 다시 그었어요.

 

  그리고 그 간부가 불러주는 대로 ‘충성으로 복무함’이라는 일곱 글자를 썼죠. 그 다음 간부가 그 아래에 무슨 도장을 꽝 찍었어요.

 

 혈서를 썼으니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혈서를 쓴 다음에 벤츠를 타고 어디론가 데려가요.

 

  운전기사가 앞에 있고, 뒷좌석엔 저와 안내인이 함께 탔어요.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엔 레이스가 달린 커튼이 있어요. 그리고 옆에도 다 커튼이 쳐 있고요.

 

  그러니 밖을 내다 볼 수도 없거니와 운전기사도 저의 얼굴은 볼 수 없는 구조예요. 물론 커튼은 닫았다 폈다는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승인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이후에도 차를 많이 타고 다녔는데, 제가 타고 다닌 벤츠는 거의 다 커튼이 쳐 있어요.

 

  물론 커튼 색깔이랑 두께는 차마다 달라요.

 

  외국 정상들이 북한을 방문하면 리무진을 타고 가잖아요. 그 리무진도 탄 적 있어요.

 

  벤츠가 멈춘 곳은 평양의 한 교외입니다. 산으로 둘러싸 있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곳입니다.

 

  한적한 교외로 나무로 둘러싸인 곳이었는데 층고가 높은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었어요.
훗날 교육받으면서 보니 지하에도 3개 층이 있었어요.

 

  건물 모양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처럼 둥근 반달 모양입니다.

 

  그 가운데 김정일 동상이 있고 그 아래 학교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판이 있어요. 김정일 동상은 살면서 거기서 첨 봤어요.

 

  건물 길이는 100m가 넘어요. 그땐 그게 무슨 건물인지 몰랐는데, 지금 보면 중앙당 5과 건물인 것 같아요.

 

  도착하자마자 저를 어떤 방에 데리고 가더군요. 이제부터 지낼 곳이라면서요.

 

 (다음호에 계속)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3부) 반 년간 교육받고 김정일과 면접을 하다 (87)

by 주성하기자   2010-01-22 6:17 pm

 (앞글에
이어)

 

  신분이
달라졌으니 으리으리한 방이 기다리고 있겠네요.

 

  아니요.
방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화장실과 이불만 있고 정말 하나도 없어요.

 

  아주
작은 뙤창문이 하나 붙어있는데, 제 키로는 밖을 내다볼 수 없었어요. 몇 층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상 반 지하방 아닌가 기억돼요.

 

  밤에는
밖에서 이상한 새소리들과 벌레 소리들이 나서 무서웠어요. 사람을 볼 때는 어떤
남자가 밥을 날라 올 때뿐이죠. 그나마 말도 못해요. 그리고 계속 책을 가져다 줘요.
읽어보라고요.

 

  김일성,
김정일 노작, 혁명역사 등 밖에서도 봤던 책들이고 소설책도 있었어요.

 

  책을
읽고는 반드시 감상문을 써야 해요. 책 하나를 놓고도 감상문을 몇 가지로 쓰라고
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고여 놓고선 창밖을 내다볼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방의 천장에 감시카메라까지
붙어있어 그럴 엄두는 못 냈어요. 이건 뭐 감옥과 똑같았죠.

 

  머리가
정말 복잡하더군요. 남들이 다 좋은데 간다고 했는데 내가 왜 이런데 와 있나,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정말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랬어요.

 

  감옥은
아니겠다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 끼니때마다 밥을 날라다 줄 때였죠.

 

   세계
여러 나라 음식들이 다 있었어요. 정말 구경도 못했던 음식들을 먹었어요.

 

  저는
제가 간첩으로 키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왜냐면 제가 들어간 학교
이름이 **군사학교이기 때문이죠. 학교 이름은 쓰지 마세요. 이 학교의 존재는 아직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가 이름을 밝히면 훗날 이 학교 출신이라고 사칭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아요.

 

  감금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졌나요.

 

  한
달이요. 한 달쯤 지난 뒤 저를 불러 나갔더니 어떤 방에 데려가는 거예요.

 

 그
자리에는 저처럼 뽑혀온 여성 10명이 와있었어요.

 

  얼굴을
처음 보는 애들도 있고 3차 시험에도 본 애들도 있어요. 모두 전국에서 고르고 골라
뽑아온 나름 개성 있는 미인들이죠. 외국 여자같이 생긴 애도 있어요.

 

  나이는
제가 제일 어린 또래 같지만 서로 정확한 나이는 몰라요. 서로 말을 안 하거든요.

 

  2년
동안 초보적인 말을 빼고는 거의 말을 서로 안하고 살았어요. 그리고 위에 학년도,
또 후배도 없어요. 받은 애들을 졸업시키고 그 뒤에야 새로 받는 것 같았어요.

 

  어떤
간부가 나와서 이제부터 학교 입학식을 한다고 하면서 군복도 내주었어요. 넥타이도
붙어있는 인민군 협주단 군복 비슷한 것을 주더군요.

 

  입학식이
끝나고 다시 제가 있던 방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요.

 

  우선
외출이 허용됐어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평양에 나갑니다.

 

   나갈
때는 아주 멋진 양복차림으로 나가요. 가서는 좋은 곳도 구경시켜주고 좋은 식당도
데려가죠. 제가 즐겨 가던 옥류관에 귀빈용 방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향만루
같은 고급 식당도 갔는데, 가기 전에 미리 방을 다 예약해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게
하지 않아요.

 

  나갈
때 2~3명 씩 조를 이뤄 나가는데 조 구성은 나갈 때마다 다 달라져요.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그런 데 나가서도 서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아요. 워낙 주의를 받았고 학교
분위기도 그렇다 보니 그렇죠.

 

  그리고
한 달 지나서부터 사진을 엄청 많이 찍어요. 중앙당 사진사가 찍는데 아마 김정일에게
가나 봐요. 그리고 사진사가 인심 좋게 이건 보관하고 있으라면서 사진을 주기도
해요. 그때 받은 사진을 남한에 몇 장 갖고 왔어요.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이를테면 교육과정이라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뭘
배워주고, 어떻게 배워주고 하는 과정안을 상세히 말하려면 끝이 없어요.

 

  그건
줄이기로 하죠. 그냥 공부도 하고 사격이나 수영도 시키고, 비디오도 보고, 예능
훈련도 하고, 식사예절 등등 아무튼 여러 가지를 배우죠.

 

  참,
제가 있던 건물은 구조가 아주 특이해요. 공부하려 갈 때는 같은 층에 가면서도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가요.

 

  한마디로
구조를 알 수 없는 미로처럼 만들었죠. 실제 있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상상이 안
돼서 그 구조를 그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건물의 방음이 너무 잘돼 있어요. 정말
조용해요.

 

 앞에서
미옥 언니라는 이름을 말했는데, 교관인가요?

 

  예.
교관이라면 교관이고, 선생이라면 선생인 그런 언니들인데, 저희를 가르치는 언니들은
모두 3명이었습니다. 미옥 언니는 그 책임자 격이었죠.

 

  학교생활을
시작해 3달쯤 됐을 때 저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더군요. 그 방은 2층입니다. 예전에
있던 방은 건물의 날개 부분에 있었는데 옮겨간 방은 건물 중심 쪽에 있었습니다.

 

  제가
혼자 있던 방보다 훨씬 크고 내부도 잘 돼 있죠.

 

  장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했는데, 침대는 없었어요.

 

  심심할
때는 컴퓨터에서 게임도 했는데, 이런 게임도 있어요.

 

  게임
제목이 ‘장군님 보위하리’인가 그런 것인데, 적을 죽이면서 미션을 수행하고 끝까지
가면 머리가 곱슬머리이고 잠바를 입고 배가 나온 작은 사람이 나와서 “쫙쫙쫙”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어요. 누가 봐도 그 캐릭터가 김정일인걸 알죠.

 

  박수를
치면 주변 배경음악으로 “만세”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무튼 게임까지도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이라니깐요.

 

  그게
1990년대 중반인데 그런 게임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걸요.

 

  그
방에도 혼자 있었나요.

 

  아니요.
저는 그 방에서 미옥 언니와 함께 지냈어요. 그 언니는 저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요.
누구나 자매 같다고 했어요. 키도 저랑 거의 비슷하고요.

 

  그
언니는 소좌(소령)였어요. 그렇지만 군복을 입은 모습은 본적 없습니다. 그때부터
어딜 갈 때마다 그 언니와 항상 함께 했어요.

 

  교육받으려
갈 때도 그 언니가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할 때가 많았죠. 저희 기 10명 중에 다른
언니와 함께 생활한 것은 함흥예술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뽑혀 온 영미라는 애와
저 두 명뿐이었어요.

 

  두
명 뿐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죠.

 

  교육받을
때 강의실에 대개 저희 두 명이 먼저 가 있어요. 그리고 1~2분 뒤 나머지 8명이 우르르
들어와요. 교육이 끝나서 나갈 때도 저희 두 명이 먼저 빠져 나갑니다.

 

  저희는
2층에서 살았고, 다른 8명은 1층에서 있었어요. 그래서 질투 섞인 시선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
김정일과 만날 때도 항상 그 언니와 함께 동행 했어요. 그리고 영미와 그 영미와
함께 생활하는 교관인 미소 언니 이렇게 저흰 보통 4명이서 김정일을 만났거든요.

 

  물론
저와 미옥 언니만 만날 때도 있었고요. 미소 언니보다는 미옥 언니가 더 높았어요.
최종 지시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저희
두 명만 특별히 언니들과 생활한 것은 아마 10명의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서 올려간
뒤 김정일이 저희 두 명을 최종 낙점했고 그래서 저희만 언니들과 특별히 생활한
것 같아요.”

 

  김정일을
처음 본 것이 언제죠.  

 

  1995년
늦여름쯤이었어요.  학교생활을 시작해 반 년이 안 됐을 때입니다. 갇혀서 지내다보면
시간 개념이 없어져요. 그래서 저도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 안나요.

 

  이틀
전에 미옥 언니가 저와 영미를 불러다 아주 엄숙하게 이야기 해주어요.

 

  “너희들은
장군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일을 맡아서 할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주의사항을 자세히 알려줘요.

 

  우선
예전에 장군님 뵌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저는 어려서 설맞이공연에 나가 김일성과
김정일 앞에서 공연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래서
공연장에서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고 영미는 처음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영미에게
더욱 조심하라고 당부하더군요.

 

  주의
사항으로는 너무 과잉반응하지 말고 차분하게 행동하라는 것, 장군님의 말씀이 끝나면
자기가 하는 대로 따라서 박수를 치라는 것 등을 말해주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한밤도 못 잤어요.

 

  말해준
그날부터 마사지를 받게 하고 머리도 손질시키고 그랬어요.

 

  당일
날에 분장을 다 시켜요. 저는 10대이니 그 나이에 맞게 화장도 아주 살짝 하죠.

 

  거기선
매일 아침 입을 옷을 지시해줘요. 군복을 입으라고 하면 그날을 군복입고, 사복 중에서
어떤 것을 입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입어야죠.

 

  그런데
그 날은 옷을 새로 가져다주었어요. 저희 신체 사이즈는 이미 다 파악돼 있기 때문에
훗날 말만 하면 어디서 저의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어 와요.

 

  어디서
만났나요?

 

  커튼을
내린 차를 타고 가다보니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 지하는 아니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저까지 모두 다섯 명이 와있었어요.

 

  미옥
언니와 저, 미소 언니와 영미, 그리고 또 한 얘가 있었는데, 그 얘는 함께 온 언니는
없었어요. 그리고 이후에 저희가 김정일 만날 때 다신 나타나지 않았었습니다.

 

  아마
김정일이 사진을 보고 저희 두 명은 물론 그 얘까지도 한번 보자고 했던 것인데 결국
최종 낙점이 되진 않았던 것 같았어요. 물론 그 얘도 미모는 출중했고, 어딘가 모르게
북한 영화배우 오미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얘였어요.

 

  그
다섯 명이 입은 옷은 다 달랐어요. 아마 각자 개성이 맞게 입게 한 것 같아요.

 

  어떤
방문 앞에 이르더니 미옥 언니가 먼저 들어갔다 나왔어요. 그리고 우리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 김정일이 앉아있었어요. 어떤 사람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우리가 들어가자 그 사람은 나갔어요.

 

(다음호에
계속)

 

(3부) 반 년간 교육받고 김정일과 면접을 하다 (87)

by 주성하기자   2010-01-22 6:17 pm

 (앞글에
이어)

 

  신분이
달라졌으니 으리으리한 방이 기다리고 있겠네요.

 

  아니요.
방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화장실과 이불만 있고 정말 하나도 없어요.

 

  아주
작은 뙤창문이 하나 붙어있는데, 제 키로는 밖을 내다볼 수 없었어요. 몇 층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상 반 지하방 아닌가 기억돼요.

 

  밤에는
밖에서 이상한 새소리들과 벌레 소리들이 나서 무서웠어요. 사람을 볼 때는 어떤
남자가 밥을 날라 올 때뿐이죠. 그나마 말도 못해요. 그리고 계속 책을 가져다 줘요.
읽어보라고요.

 

  김일성,
김정일 노작, 혁명역사 등 밖에서도 봤던 책들이고 소설책도 있었어요.

 

  책을
읽고는 반드시 감상문을 써야 해요. 책 하나를 놓고도 감상문을 몇 가지로 쓰라고
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고여 놓고선 창밖을 내다볼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방의 천장에 감시카메라까지
붙어있어 그럴 엄두는 못 냈어요. 이건 뭐 감옥과 똑같았죠.

 

  머리가
정말 복잡하더군요. 남들이 다 좋은데 간다고 했는데 내가 왜 이런데 와 있나,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정말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랬어요.

 

  감옥은
아니겠다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 끼니때마다 밥을 날라다 줄 때였죠.

 

   세계
여러 나라 음식들이 다 있었어요. 정말 구경도 못했던 음식들을 먹었어요.

 

  저는
제가 간첩으로 키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왜냐면 제가 들어간 학교
이름이 **군사학교이기 때문이죠. 학교 이름은 쓰지 마세요. 이 학교의 존재는 아직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가 이름을 밝히면 훗날 이 학교 출신이라고 사칭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아요.

 

  감금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졌나요.

 

  한
달이요. 한 달쯤 지난 뒤 저를 불러 나갔더니 어떤 방에 데려가는 거예요.

 

 그
자리에는 저처럼 뽑혀온 여성 10명이 와있었어요.

 

  얼굴을
처음 보는 애들도 있고 3차 시험에도 본 애들도 있어요. 모두 전국에서 고르고 골라
뽑아온 나름 개성 있는 미인들이죠. 외국 여자같이 생긴 애도 있어요.

 

  나이는
제가 제일 어린 또래 같지만 서로 정확한 나이는 몰라요. 서로 말을 안 하거든요.

 

  2년
동안 초보적인 말을 빼고는 거의 말을 서로 안하고 살았어요. 그리고 위에 학년도,
또 후배도 없어요. 받은 애들을 졸업시키고 그 뒤에야 새로 받는 것 같았어요.

 

  어떤
간부가 나와서 이제부터 학교 입학식을 한다고 하면서 군복도 내주었어요. 넥타이도
붙어있는 인민군 협주단 군복 비슷한 것을 주더군요.

 

  입학식이
끝나고 다시 제가 있던 방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요.

 

  우선
외출이 허용됐어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평양에 나갑니다.

 

   나갈
때는 아주 멋진 양복차림으로 나가요. 가서는 좋은 곳도 구경시켜주고 좋은 식당도
데려가죠. 제가 즐겨 가던 옥류관에 귀빈용 방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향만루
같은 고급 식당도 갔는데, 가기 전에 미리 방을 다 예약해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게
하지 않아요.

 

  나갈
때 2~3명 씩 조를 이뤄 나가는데 조 구성은 나갈 때마다 다 달라져요.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그런 데 나가서도 서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아요. 워낙 주의를 받았고 학교
분위기도 그렇다 보니 그렇죠.

 

  그리고
한 달 지나서부터 사진을 엄청 많이 찍어요. 중앙당 사진사가 찍는데 아마 김정일에게
가나 봐요. 그리고 사진사가 인심 좋게 이건 보관하고 있으라면서 사진을 주기도
해요. 그때 받은 사진을 남한에 몇 장 갖고 왔어요.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이를테면 교육과정이라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뭘
배워주고, 어떻게 배워주고 하는 과정안을 상세히 말하려면 끝이 없어요.

 

  그건
줄이기로 하죠. 그냥 공부도 하고 사격이나 수영도 시키고, 비디오도 보고, 예능
훈련도 하고, 식사예절 등등 아무튼 여러 가지를 배우죠.

 

  참,
제가 있던 건물은 구조가 아주 특이해요. 공부하려 갈 때는 같은 층에 가면서도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가요.

 

  한마디로
구조를 알 수 없는 미로처럼 만들었죠. 실제 있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상상이 안
돼서 그 구조를 그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건물의 방음이 너무 잘돼 있어요. 정말
조용해요.

 

 앞에서
미옥 언니라는 이름을 말했는데, 교관인가요?

 

  예.
교관이라면 교관이고, 선생이라면 선생인 그런 언니들인데, 저희를 가르치는 언니들은
모두 3명이었습니다. 미옥 언니는 그 책임자 격이었죠.

 

  학교생활을
시작해 3달쯤 됐을 때 저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더군요. 그 방은 2층입니다. 예전에
있던 방은 건물의 날개 부분에 있었는데 옮겨간 방은 건물 중심 쪽에 있었습니다.

 

  제가
혼자 있던 방보다 훨씬 크고 내부도 잘 돼 있죠.

 

  장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했는데, 침대는 없었어요.

 

  심심할
때는 컴퓨터에서 게임도 했는데, 이런 게임도 있어요.

 

  게임
제목이 ‘장군님 보위하리’인가 그런 것인데, 적을 죽이면서 미션을 수행하고 끝까지
가면 머리가 곱슬머리이고 잠바를 입고 배가 나온 작은 사람이 나와서 “쫙쫙쫙”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어요. 누가 봐도 그 캐릭터가 김정일인걸 알죠.

 

  박수를
치면 주변 배경음악으로 “만세”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무튼 게임까지도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이라니깐요.

 

  그게
1990년대 중반인데 그런 게임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걸요.

 

  그
방에도 혼자 있었나요.

 

  아니요.
저는 그 방에서 미옥 언니와 함께 지냈어요. 그 언니는 저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요.
누구나 자매 같다고 했어요. 키도 저랑 거의 비슷하고요.

 

  그
언니는 소좌(소령)였어요. 그렇지만 군복을 입은 모습은 본적 없습니다. 그때부터
어딜 갈 때마다 그 언니와 항상 함께 했어요.

 

  교육받으려
갈 때도 그 언니가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할 때가 많았죠. 저희 기 10명 중에 다른
언니와 함께 생활한 것은 함흥예술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뽑혀 온 영미라는 애와
저 두 명뿐이었어요.

 

  두
명 뿐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죠.

 

  교육받을
때 강의실에 대개 저희 두 명이 먼저 가 있어요. 그리고 1~2분 뒤 나머지 8명이 우르르
들어와요. 교육이 끝나서 나갈 때도 저희 두 명이 먼저 빠져 나갑니다.

 

  저희는
2층에서 살았고, 다른 8명은 1층에서 있었어요. 그래서 질투 섞인 시선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
김정일과 만날 때도 항상 그 언니와 함께 동행 했어요. 그리고 영미와 그 영미와
함께 생활하는 교관인 미소 언니 이렇게 저흰 보통 4명이서 김정일을 만났거든요.

 

  물론
저와 미옥 언니만 만날 때도 있었고요. 미소 언니보다는 미옥 언니가 더 높았어요.
최종 지시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저희
두 명만 특별히 언니들과 생활한 것은 아마 10명의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서 올려간
뒤 김정일이 저희 두 명을 최종 낙점했고 그래서 저희만 언니들과 특별히 생활한
것 같아요.”

 

  김정일을
처음 본 것이 언제죠.  

 

  1995년
늦여름쯤이었어요.  학교생활을 시작해 반 년이 안 됐을 때입니다. 갇혀서 지내다보면
시간 개념이 없어져요. 그래서 저도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 안나요.

 

  이틀
전에 미옥 언니가 저와 영미를 불러다 아주 엄숙하게 이야기 해주어요.

 

  “너희들은
장군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일을 맡아서 할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주의사항을 자세히 알려줘요.

 

  우선
예전에 장군님 뵌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저는 어려서 설맞이공연에 나가 김일성과
김정일 앞에서 공연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래서
공연장에서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고 영미는 처음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영미에게
더욱 조심하라고 당부하더군요.

 

  주의
사항으로는 너무 과잉반응하지 말고 차분하게 행동하라는 것, 장군님의 말씀이 끝나면
자기가 하는 대로 따라서 박수를 치라는 것 등을 말해주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한밤도 못 잤어요.

 

  말해준
그날부터 마사지를 받게 하고 머리도 손질시키고 그랬어요.

 

  당일
날에 분장을 다 시켜요. 저는 10대이니 그 나이에 맞게 화장도 아주 살짝 하죠.

 

  거기선
매일 아침 입을 옷을 지시해줘요. 군복을 입으라고 하면 그날을 군복입고, 사복 중에서
어떤 것을 입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입어야죠.

 

  그런데
그 날은 옷을 새로 가져다주었어요. 저희 신체 사이즈는 이미 다 파악돼 있기 때문에
훗날 말만 하면 어디서 저의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어 와요.

 

  어디서
만났나요?

 

  커튼을
내린 차를 타고 가다보니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 지하는 아니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저까지 모두 다섯 명이 와있었어요.

 

  미옥
언니와 저, 미소 언니와 영미, 그리고 또 한 얘가 있었는데, 그 얘는 함께 온 언니는
없었어요. 그리고 이후에 저희가 김정일 만날 때 다신 나타나지 않았었습니다.

 

  아마
김정일이 사진을 보고 저희 두 명은 물론 그 얘까지도 한번 보자고 했던 것인데 결국
최종 낙점이 되진 않았던 것 같았어요. 물론 그 얘도 미모는 출중했고, 어딘가 모르게
북한 영화배우 오미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얘였어요.

 

  그
다섯 명이 입은 옷은 다 달랐어요. 아마 각자 개성이 맞게 입게 한 것 같아요.

 

  어떤
방문 앞에 이르더니 미옥 언니가 먼저 들어갔다 나왔어요. 그리고 우리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 김정일이 앉아있었어요. 어떤 사람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우리가 들어가자 그 사람은 나갔어요.

 

(다음호에
계속)
(이은주 서운 김정남).

 

 

 

유럽여행가실 생각은 없으세요?

 

북한하고 통일하면 기차타고 유럽까지 갈쑤있나요?

 

북한사람들은 북조선.. 자기들이 살고있는 나라가 지상에서 가장 살기좋은 나라.. 천국이라는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제가 케이블에서. "천국의 국경을 넘는다"라는 다큐메타리를 케이블에서 봤거든요.
북한에서 러시아쪽으로 탈북한 새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메타리였어요/

그런데.. 거의 대부분 탈북자들은 중국을 통해서 한국으로 탈북하잖아요..
그래서 사회과부도에 있는 지도를 보니까.. 북한하고 러시아하고 연결되어 있더라구요.
그렇타면.. 나중에 김정일 죽고김정은 후계에 실패한다면..통일되면.. 북한에 붙어있는 러시아
쪽을 따라서 유럽을.. 비행기가 아닌전철? 기차? 이런걸 타고.. 유럽을 여행할쑤 있는건가요?
전 개인적으로 네덜란드,독일,덴마크,스위스 등에 가고싶은데

제가 상상한게 실제로 북한과 통일한다면 가능한 일인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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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북한하고 러시아하고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러시아로 넘어가는 두만강 철교는 러시아 국경까지 넘어가는데 천천히 가도 고작 7분정도 밖에

안걸립니다.

기차를 타고 철교를 건너 러시아로 넘어가면 러시아 국경 마을 명칭은 하싼이라고 합니다.

벌써 오래전에 러시아와 북한은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TSR)를 한반도 종단철도(TKR)로 연결할데

대한 사업토의를 하였습니다. 이 사업이 원만하게 진행되면 북한은 물론 한국에도 큰 경제 문화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가는 모든 수출품들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나호드카

항까지 철도운송을 해서 다시 하차작업을 하고 배에 싣는 작업을 해서 해상운송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번 하적선적작업에 해상운송비도 많이 들어가기때문에 러시아 한국 수출에 운임비 물류비용이

배로 들어간다고 봐야죠.

하지만 러시아 하싼 국경을 통하여 두만강 철도로 운송할 경우 두세번에 걸치는 하적 선적작업이 없어지고

해상운송비의 절반도 안되는 철도 운임비로 물류비용을 대폭 줄일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모든 수출품들도 유럽에서 화물열차에 실어 러시아를 통해 북한의 두만강 철교를 건너 한국의 부산까지 갈 수가 있게 됩니다.  한마디로 엄청난 물동량을 기차로 수송하게 되는거죠.

이런 경제적 효과성과 함께 문화적 효과성도 대단히 크다고 봐야죠.

결국 북한이 두만강 철교만 한국까지 개통시키면 한마디로 시베리아횡단열차가 대륙횡단열차로 될 수 있

는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즉 부산에서 철도를 타면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을 열차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인들이 그처럼 타보고 싶어하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바이칼호나 러시아의 여러

지역들을 여행하고 그대로 유럽까지 갈수가 있습니다.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북한의 두만강 철교를 넘어

러시아 전지역을 거처 유럽으로 가게 되는 그야말로 대륙횡단 여행을 할 수 있는거죠.

낭만적이고 편안하고 열차를 타고 세계를 보게 됩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벅차죠.

근데 북한은 그 7분밖에 걸리지 않는 두만강 철교를 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만 열면 어마어마한 경제적 이윤을 북한자체가 얻을 수 있고 대륙간 횡단 여행을 통한 엄청난 이윤을

볼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안하는지 아십니까.  그 철도를 열어 개방하면 여지껏 세상과 꽁꽁 닫아놓고 있는 문이 열리게

되므로 세계를 모르던 북한 사람들이 눈과 귀가 열린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렇게 눈과 귀가 열리게 되면 북한이 얼마나 못살고 독재 세상인가가 들창나기 때문이죠.

그래서 방법은 딱 하나 현재의 김정일 정권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북한이 개방되고 두만강 철도에서

만 벌어들이는 엄청난 이익으로 북한경제자체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될겁니다.

남북 모두 큰 경제적 이윤을 보게 되고 통일된 우리 한국은 더 발전된 세계 강국으로 될겁니다.

그래서 우리 남북은 하루빨리 더 통일을 앞당겨야 합니다.

자고로 러시아와 북한은 두만강 철도 연결 사업을 내적으로는 완전히 합의 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몇년사이에 아마 정일이가 살아있어도 북한은 두만강 철도를 열지 않으면 안될수도 있습니다.

저는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그 두만강 철교를 두번 건너 봤습니다

 

러시아에서 핀란드 국경 넘을쑤 있나요?

제 콩글리시로 표현하자면 ;;...

나중에.. 2052년쯔음.. 싸우쓰코리아(대한민국)이 노우쓰 코리아(북조선)이랑 통일 하면,..

한반도에서 열차타고.. 유럽으로 여행을 갈껀데.. 한국에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6박 7일 걸린다네요..

그래서.. 일단 핀란드 국경을 넘고 싶은데..

핀란드에서 스웨덴.. 스웨덴에서 노르웨이.. 노르웨이에서 덴마크.. 덴마크에서 독일.. 독일에서 네덜란드..

네덜란드에서 스위스..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

이렇케 연결된곳을 통해서 여행을 할껀데.

제 상상이 맞는건가요?

 

1.러시아에서 핀란드로 국경 넘어갈쑤 있나요?

re: 러시아에서 핀란드 국경 넘을쑤 있나요?

 

저번에는 제가 질문자의 의향을 잘 파악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답변 올립니다.

 

러시아에서 핀란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4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비행기편입니다.

우선 에어플로트 핀에어 항공편이 매일 모스크바에서 헬싱키로 가는데 비행시간은

1시간 40분 걸립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기존 레닌그라드)에서 헬싱키 항공편이 있는데

비행시간은 55분 걸립니다.

 

다음 기차편입니다.

모스크바에서 핀란드로 가는 기차편은 매일 3개의 기차가 있습니다

그중 예를 하나 들자면 모스크바에 핀란드로 떠나는 기차 레브 톨스토이를 들수 있습니다

레브 톨스토이가 세계적인 대문호인것은 알고 계실거구요

기차운행 소요시간은 약 15시간 걸리며 가격은 85유러이구요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도 떠나는 기차가 있는데 매일 두개의 기차가 있습니다.

단 침대칸이 아닌 그냥 앉아서만 갈수 있는 기차이고 소요시간은 6 50.

가격은 38유러로 시작합니다.

 

다음 배편입니다.

실리아 라인 비킹라인 두개의 배가 있는데 스톡홀름에서 핀란드로 오는데 소요시간은

 16시간 걸립니다. 기타 카펠리스커에서 떠나는 배운항 소요시간은 약 11시간이구요.

가격은 15-30 유러부터 있는데 조금 더 지불하면 배안의 아늑한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버스도 있습니다.

저렴한 가격으로 핀란드로 갈수 있는 운송수단이죠.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모스크바 역"

기차역 맞은켠 "옥챠브리" 호텔에서 매일 저녁 떠나며 헬싱키에서 오는 관광버스는 많습니다.

가격은 왕복 12 유러구요 기타 택시형 운송수단도 있습니다.

 

후진타오..절실하게 절박하게 노력한 흔적이 있었는데.. 탈북자 북송반대 주느세하 통일설계사 주성하기자.


 
 

아시아 아르젠토 에이지아 이창동.나벌리스트 홍석중 해신 정화 수애 가을동화 송혜교.(소신이 있고 장저티

엔,저우동위,공리,장쯔이.. 고고하고 하야트 부수라 박지아 줄리엣 비노쉬..)


 

 

싱가폴 에릭 클랩튼 김정철(봉쇄된 국경 김문수 러브 인 아시아 나라문을 꽁꽁 걸어잠구고 글로벌빌리지 위 아 더 월드 프라이데이 w 닉 부이치치(비고모텐슨 존 레논 이매진 오노 요코).


 

 

굿바이 평양 so 왓 camera셧다운 코리안걸 선화 레미제라블(홍석천 앤 헤서웨이).이태원 한지민(소피 애들린 에이드리안).


 

 

힐링캠프 안철수 자살률 1위 쑤어싸이드(지사쓰) 딩크cafe 태어나지 않케 해달라고 덜 슬픈 장소.탈북자 북송 반대.. 강원도 고성(굿바이 코리아 우리나라 말레이시아 소피아,아비가일,이다도시..).

그곳에선 ...

 

 

 

 

아직도 고구려의 기상이...

 

 

 

 

살아 남아 숨쉬고 있는듯 했다...

 

 


 

 


 

 


 

 


 

 


 

 


 

 


 

 


 

 

 

 

 

(괴롭혔던 여자애 국정원)(용인 살인 사건 감정이 메말랐다 사이코패스 치료)(

 

언제쯤 평양에서 베토벤 합창이 울려퍼질까? (6)

by Jim Raynor   2012-10-06 3:29 pm

 

유투브에서 떠돌아 다니는 동영상들 중 의미있는 것을 골라왔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베토벤 9번 교향곡이 연주된 바 있습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동독과 서독,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동독과 서독의 합창단을 이끌어 만들어낸 콘서트입니다.

 

이 공연은 우리나라에서도 방송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제가 이 공연이 있는 후에 태어난지라..)

아마 많이들 감격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 공연 이후 20년이 넘도록 남북간 통일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네요.

북한 주민 대다수가 베토벤을 모르는 건 더 안타까운 일이죠.

부디 김씨왕조 망해서 평양땅에 베토벤 9번이 연주되는 날이 오기를 바랄뿐입니다.

 

June Anderson
Sarah Walker
Klaus Konig
Jan-Hendrik Rootering

Leonard Bernstein (conductor)
Chor des Bayerischen Rundfunks · Mitglieder
des Rundfunkchors Berlin (DDR) · Kinderchor
der Philharmonie in Dresden · 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und
Mitglieder der Staatskapelle Dresden,
Orchester des Kirow-Theaters Leningrad,
London Symphony Orchestra,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e de Paris

 

녹음: 1989/12/24 Stereo, Digital(사라 장 라이프 스타일)(권하자 스테파니 파커 너무 예쁜)(아무르 조력자살)(루슬라나 코슈노바 워쇼스키 통일)(

 

북한 사진 사진&동영상

북한의 최신 헤어 스타일 (4)

by 사막의향기   2012-07-21 3:55 am

 

올봄 징 메오씨기 평양 미장원을 방문 했을때 사진 입니다.

젊은이들은 없었고 전부다 중년층 아줌마들만 있었다고 하네요.

 




 최신 북한에서 유행하는 헤어 스타일 총집합 ! 

예전 보다는 그래도 많이 세련된듯 해 보입니다

 

 

안철수(힐링캠프 이경규 한혜진 김제동)(자살률 1위 초저출산률)(산업 인력 공단)(민기우현 지옥)김문수 일자리.(실업).

평양시 상흥아동공원 재단장 (10)

by 주성하기자   2012-11-19 2:54 pm


 


 


 


 


 


 


 


 


 


 

평양시 보통강 기슭에 위치한 상흥아동공원의 개건보수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상흥아동공원의 개건보수공사 역시 인민군에 의해 이루어 졌습니다.

 

북한 당국은 군인들이 “단숨에의 공격정신으로 1만 6,000㎥의 굴착 및 성토 작업,보도 블로크 깔기, 잔디, 나무 심기 등을 단 며칠동안에 해제끼는 성과를 이룩하였” 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양의 잘 정돈된 아동공원에는 선택받은 평양의 아이들 만이 웃으면서 뛰어 놀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보여주기 식 인민편의시설 ‘공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인민들을 편하게 해주는 ‘정치’의 변화일 것입니다.

최근 중국 관광객이 찍어 온 북한 모습 (3)

by 주성하기자   2012-11-06 2:2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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