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

작성일 2018.03.14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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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5 남 인데
궁금한게있는데 베트남전쟁때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을 성폭행했다는데
우리나라는 사과했나요? 했어도 교과서에는 실어야하는게 맞지않을까요? 이러면 일본과 다른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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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어느 전쟁이든 군인에 의한 성폭행은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고대에는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노르망디 상륙작전때도 미군이 프랑스 여자 500명을 겁탈한 일도 있었죠.

전쟁에서의 학살은 적의 병력을 줄인다거나 적의 보급로를 없앤다거나 적의 사기를 낮춘다거나와 같은 군사적인 목적과 직결되어 있으니까 사죄를 하는 것이지만 겁간은 군사와는 상관없는 병사 개인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짓입니다. 대부분의 국가가 겁간을 금지시키고 있고 한국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므로
병사 개인이 명령을 무시한 채 이루어진 겁탈행위를 국가가 사과를 할수는 없어요.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는 국가의 명령체계하에 여자들이 납치되었고 "군수품"으로 취급되어 군함에 태워졌고 전선에 보내졌으니까 일본정부가 사과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1920년대 프랑스점령군에 의한 독일 루우르지역의 집단성폭행사건이나 2차세계대전말기 소련군에 의해 자행된 집단성폭행사건도 국가의 명령 내지는 조직적으로 벌어진 일들이므로 이런 경우에는 사과를 해야 하는거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일본이랑 다른게 뭔가요?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침략을 한것이고요
한국은 북베트남 남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이 침략당한것에대해 '파병' 요청으로
참전한것입니다.

 625때 자유진영국가가 도와줬으니 당연히한국이 도와줘야할상황도 있고
외화벌이라는 기회주의적도 있고 참전으로 전쟁경험으로 인한 군력강화
주한미군이 빠져나가는것 방지차원도 있긴하죠

그럼 그 논리면  한국 625가 남북으로 나눠 한국을 지원해준 un군 소속의 약 20개 국가들은 북한군 죽였으니 인도적으로 나쁘며 북한한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하나요

 그리고 베트남전쟁때 무조건 베트남이 피해자라는것은 '한국은 일본이랑 다를게 없다 반성해야한다'라는 편견으로 베트남전쟁에 실상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으신거같은데

먼저 북베트남 군인들은 양민인척하고 한국군 많이 죽였습니다. 그런상황에서 어떻게 구별하나요

 사이공함락으로 북베트남 군인들이
  남베트남 군가족 공무원 학살당한게 몇백만명이고 살기위해 보트피플이 몇명인건아시나요? 

 

 그렇게 사과 사죄 생각하시는데 2차세계대전에 연합군이 베를린함락하고 처녀들 강간했는데 그럼 연합군은 나치였던 독일한테 무릎꿇고 사죄를 해야하나요?
 
 정작 625때 북한 파병한 중공군이 국민학살한것에대해 관심안갖고 계시는데
우린 베트남 국민을 먼저 생각하기전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어떻게 학살당했는지도 공부하셨으면요


;참고로 저는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좋아합니다. 배낭여행도 갔었고 현지인 친구들 많이 사겼으며 많은 베트남분들과 술도 먹으며 과거사 이야기를 나누었죠

 먼저 젊은 층은 한국을 좋아합니다.  유일하게 다른나라에서 일본보다 한국을 좋아하는 국가이며
호감도가80퍼입니다.  한류도 있고  하노이에는 삼성공장이 있기에 경제를 살려줍니다.(베트남 수출품 2위가 핸도폰 인 이유가 삼성전자가 있어서) 
 또한 경제적 지원많이 해주며 의료 봉사 교육 봉사 많이 와줘요 
 
 그거아세요?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한국 좋아하는거?  할리우드 맥도날드 아디다스 등 이미 미국문화도 자리매김했는데  오히려 싫어하는 나라가  같은 공산국가인 중국입니다.
 베트남전쟁후 중국이랑 국경에서 전쟁도 했었고 지금도 남중국해 국경분쟁으로 싸우고 있죠
아이러니하게 40년전 전쟁했던 미국 .  베트남은 국경분쟁 미국은 중국견제로 서로 군사협약 맺고 있어요  

 이게 현실입니다. 베트남사람들은 베트남전쟁에대해 물어보면 과거 보다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지배로 한국국민들이 일본 과거사에 분노를 느끼지만 
베트남은 침략이 아니고  자기 나라들이 이긴전쟁이기 때문에 신경도 안써요
 왜 자기네들이 이겼는데 미안해 하냐고 합니다

 프랑스부터 일본 대만 미국 한국 캄보디아 등등 수많은 나라에게 식민지 및 전쟁한 나라입니다.

 한국군이 강간했다 학살했다고 무조건 한국은 가해자다 사죄해야한다고 하는 생각 좀 바뀌었으면 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지금부터 약 50여년전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전세계가 공산권과 공산권이 아닌 국가로 나뉘어 대립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념이 다르면 서로 적으로 간주하던 소위 "동서냉전"의 시대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아래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베트남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합니다. 

연인원 약32만명, 최대주둔병력 5만명의 대규모 병력 이었습니다. 


2. 베트남전중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트남전중 미군 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또는 점령지에서의 잔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 성폭력을 포함한 잔혹행위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일부는 피해자측에 의해서 과장된 면도 없지 않겠지만

객관적인 자료로 잔혹행위가 실제로 존재하였음이 입증된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생존자나 목격자, 또는 희생자의 가족등의 증언도 많으며

한국군 참전지역인 베트남 중부 지역 마을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는 곳도 있습니다.



 

3. 베트남 전쟁은 적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게릴라전이 많았습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피해자 입장에서는 잔혹행위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작전을 수행하는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일부는 정당한 작전수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마을 주민중 누군가가 베트콩과 내통하거나, 지뢰나 부비트랩등을 설치하여

한국군을 죽거나 다치게 했기때문에 

민간인 학살은 잔혹행위가 아니라 정당한 공격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베트남전에서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미군과 한국군을 돕는 민간인들도, 갑자기 돌변하여 베트콩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특히, 한국인이 주둔하던 베트남 중부지방은 북베트남의 비밀군사통로인 호치민루트를 통해

베트콩이 많이 침투하는 지역이었습니다. 







4. 월남전 당시 한국군의 범죄는 엄격하게 처벌되었습니다


전쟁은 잔인하고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현상이 흔하게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때 발생한 문제니까 

잔혹행위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우리나라의 군형법 84조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84 (전지강간) 전투지역 또는 점령지역에서 부녀를 강간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전항의 죄에 대한 공소에는 고소 를 요하지 아니 한다.

  

 처벌조항이 사형 밖에 없다는 점이나고소가 없어도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은

 일반 형법과 비교하면 매우 엄격한 법조항입니다

( 요즘은 좀 달라졌지만, 원래, 강간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했습니다. )

 

그러면, 이 법조항이 실제로 적용되었을까요?

물론입니다. 실제로, 월남전중 이법에 적용되어 사형에 처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군법때문에

월남전중 잔혹행위가 절대로 없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군에 의한 성폭행 범죄가 일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한국군을  성폭행범으로 보는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전쟁터가 아닌곳에서도 성폭행이나 살인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죠.

따라서, 일부, 한국군의 성폭행 행위가 있었다고, 

그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5. 월남전중 잔혹행위는 국가차원의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월남전중 한국군의 잔혹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는 범죄로 취급되었지만,

이 때문에 그런 잔혹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군의 문제가 되는 잔혹행위가 국가의 지시에 의한 국가차원의 범죄가 아니라

일부 지휘관이나 지휘관의 통제를 벗어난 개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2차대전중 일본은, 국가가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해서 부녀자를 속이고 

심지어는 납치해서 성노예로 만든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겁니다


신문에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벨 수 있는지 경쟁하는 기사를 공공연하게 보도하면서,

국가차원에서 잔혹한 행위를 찬양하고 부추겼던 일본과는 분명히 다른 겁니다. 




 

6. 진정한 사과가 없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국가간의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하여 사과와 배상요구가 계속되는 것은 

상대방이 똑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를 수도 있다는 불신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식민지배와 2차세계대전에 대하여 여러 차례 사과를 했다고 말합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말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나라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수긍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인 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사과는 커녕 사실인정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한국과 일본사이에 똑같은 불행한 역사가 반복될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겁니다

 

7. 한국과 베트남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월남전의 앙금이 없을 수 없겠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이 똑같은 잘못을 할 것이라고 걱정하지 않기때문에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과거사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베트남의 공식적인 사과요구가 없었지만

한국군에 의한 월남인의 피해에 대해서 유감의 뜻을 표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베트남이 월남전의 과거사 문제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한다면

사과를 해야 맞습니다

필요할 경우 배상도 해야하고, 재발방지 약속도 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민간단체는 성금을 모금해서 

불행했던 과거사를 치유하기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지에 희생자들의 위령탑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기도하고

희생자들의 추모행사에 참여해 베트남인들을 위로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마을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거나 장학금을 주는 사람도 있고

특히, 대학생이나 젊은이들 중에는 개인 또는 단체로 

그곳을 방문해서 진정으로 사과의 뜻을 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얼마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표현했던 것도

불행한 과거사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입니다

베트남의 공식적인 사과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유감을 표시한 점이 

일본의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와 180도로 다른 겁니다. 


8. 사과의 횟수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언제까지 베트남에게 사과를 해야하나요?

베트남이 제발 사과 좀 그만 하라고 사정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겁니다


사과의 횟수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사과의 진정성이 있다고 믿어지면 단 한번의 사과로도 충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과를 하지 않아도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9.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답변자는 2000년 1월 중국에 있는 난징 대학살기념관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1937년 중국의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해 불과 2주사이에 

약 30만명의 중국인이 살해 되었던 "난징 대학살에 직접 참가했던 일본군 두 명이 

자신의 과오를 중국인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편지를 중국인에게 보내고, 

난징을 방문해서 피해자를 찾아 사과했던 적이 있습니다

답변자가 방문했을 때, 그 나이 많은 일본군에관한 사진,편지, 관련기사들이

그 곳 게시판에 전시해 놓은 것을 아주 인상깊게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지 얼마후, 

일본 정부는 난징대학살에서 자신의 잔혹행위를 개인적으로 사과한

늙은 일본군 병사 두 사람을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형사 재판에 넘겼습니다. 


두 사람은 5년이 넘도록 일본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하며 고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 자세히는 모르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이렇듯, 일본인은 국가차원에서 자신의 과오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자격으로 사과하는 것도 국가차원에서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은 절대로 잘못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민족이라고 믿는 경향이 많습니다. 

축구 응원단의 이름이 울트라 니뽄이죠, 너무너무 뛰어나고 우수한 일본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일본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데, 사과를 했을리가 없죠.


1,2차 세계대전의 전범 국가인 독일의 태도와 전혀 다르죠.

독일은 지금도 틈만 나면, 2차대전의 과오를 사과하곤 합니다. 

수상이 외국을 방문할 경우, 무릎꿇고 사과의 뜻을 표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입니다.


10. 기회가 되면 베트남을 꼭 방문해 보세요. 


답변이 너무 길어졌네요. 


우리나라는 1992년 베트남과 수교를 하면서, 

전쟁피해 배상을 위한 조사를 베트남 정부에 먼저 제의 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당국의 반대로 이에대한 진상조사나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한국은 베트남에 많은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이 주둔했던 베트남 중부지방에 큰 병원을 여러 개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국은 베트남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 현재, 베트남 과학기술원 (VKIST) 설립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은 한국과학기술원 (KIST)의 공헌이 큽니다. 이런 한국의 개발 경험을 베트남에 아낌없이 전수해 주고 있습니다. << 아래 인터넷 기사 참조하세요. >>




그 밖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민간 기업차원에서 한국과 베트남은 전방위적으로 경제적인 협력 관계에 있습니다. 즉, 2018년 현재, 베트남에 가장 많은 투자와 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 

베트남과 협력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베트남의 교역상대국 1위는 중국이고, 2위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2017년 베트남 최대 투자국도 역시 대한 민국입니다. 

우리나라의 2017년 수출대상국 1위는 중국이고, 2위는 미국, 3위가 베트남일 정도입니다. 

베트남 투자액, 교역량은 매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과거사 문제가 남아있다면 과연 이런 관계가 가능할까요?


11. 북베트남 전쟁영웅 보 구엔 지압 장군의 발언을 참고할 만 합니다.  


북베트남이 미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북베트남 최고의 전쟁영웅인 "보 구엔 지압"장군의 3불전략 이라는 뛰어난 지략 때문이었습니다. 


즉,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다음과 같은 3불전략에 따라 전투를 했습니다. 


(1)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는다. 

(2)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는다, 

(3) 적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싸운다. 


베트콩은 이런 3불전략을 철저히 따랐기 때문에 

미군이나 한국군이 민간인과 쉽게 구분하기가 어려웠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시간에  전혀예상하지 못하는 장소에서 베트콩의 공격을 받곤 했습니다. . 


이런, 3불전략의 창시자였던 "보 구엔 지압" 장군과 

국내 모 언론사의 면담 보도에 따르면,


지압장군은

"베트남전 중에 한국군이 한 일을 잘 알 고 있지만, 나쁜 감정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답변자는 한국과 베트남간에 미해결된 역사적인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베트남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다면 대한민국은 100만번이라도 사과하고 배상해야 합니다. 




12. 답변자는 2018년3월18일 하미마을 한국군 학살피해자 위령비에
    개인적으로 참배하고 왔습니다.

진실은 감춰지지 않습니다. 
사과할 것은 깨끗이 사과해야 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시가전 중 사로잡힌 베트콩 장교로 추정되는 응우옌 반 램(Nguyễn Văn Lem)을 남베트남 경찰서장 응우옌 응옥 로안(Nguyễn Ngọc Loan)이 즉시 자신의 권총으로 사살한다. 경찰서장과 같이 있던 AP통신 사진작가 에디 애덤스와 NBC 취재팀이 그 현장을 취재하였지만 한국군인의 시민총살장면으로 탈바꿈 해버림 >


전쟁의 특성상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현재 진보성향 단체 등지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근거가 희박하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과장된 측면이 있다. 신뢰할만한 공식 문서에 남은 학살 기록은 거의 없으며, 베트남 정부가 거부하여 정확한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고의로 판정된 민간인 사살이나 범죄등은 편찬 연구소에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당연히 가해자들은 즉시 총살되거나 한국으로 귀국후 군법으로 처벌 되었다.

학살의 '증거'가 되는 것은 북베트남의 공식문서[5], 윌프레드 버쳇 등의 언론인들의 증언[6],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부 증언[7]정도이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뒤에도 계속 찾아가 무릎을 끓고 사죄를 드리고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시민단체서는 피에타를 설치하고 있고 근레에 와서는 지뢰 철거작업을 도우기로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매년 한국의 봉사단이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김대중 대통령 때에는(1998, 2001년)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베트남 정부에 사과를 했었으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사과에 반발하며 김대중 대통령을 규탄했다.

==베트남 측 반응 ==
 "우리가 승전으로 끝난 전쟁이므로 사과는 필요없고, 전쟁으로 인해 정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
게다가 1992년 베트남과 수교당시 과거사는 더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상황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소위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동 조사를 통해 배상하고 싶단 의사를 전달한 바가 있는데 베트남 외교부는 우린 지나간 일에 관심이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한국이 돕고 싶거든 투자를 통해 현실적으로 도와달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매년 우리나라 대통령이 찾아가 사죄의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비방하시는분들 비방 하실려면 자료쫌 찾아보시고 비방 하세요.

5.1. 논란이 된 주요 사례[편집]

5.1.1. 김종수 소위 학살 사건[편집]

현재 법정에서 사실임이 확인된 학살사건 중 알려진 유일한 사건.
김종수 소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야간 매복 작전에서 베트남 민간인 6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후에 15년형으로 감형되었지만 당시에는 군법재판에 회부시켜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종수 소위 본인은 야간 매복작전에서 적을 사살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재판에서 인정되지 않았으며, 후에 김종수 소위는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戰 '민간인사살']유죄 金목사 피맺힌 31년
[베트남戰 '양민학살'판결]당시 주심 유재방씨
[베트남戰 '양민사살']인터뷰/채명신예비역중장


5.1.2. 고자이 마을 학살 조작 사건[편집]

구수정이 밝혔다는 고자이 마을 학살 사건#은 번복되는 기사 내용으로 인해 조작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폭격기로 학살했다고 주장하였다가 한국군은 폭격기를 쓰지 않았다는 반론에 폭격기는 쓰지 않았다고 기사 수정을 하였다. 학살 사건의 날짜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막연하게 1966년이었다가 나중에 1966년 6월이었다가 현재는 한국군 비호 6호작전날로 계속 바뀌는 실정이다.





고자이 마을에 있는 위령비에 있는 그림에 맹호마크를 단 군인을 한국군으로 생각하고 학살사건의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맹호부대 마크라기 보다 오히려 남베트남 레인저 부대마크라고 봐야된다. 하지만 이 부분은 맹호부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생긴 해프닝이라고 볼수도있으니 확실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구수정이 2000년대 초반에 한겨레21에 기고한 고자이 마을 학살사건 주장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독가스'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구수정은 한국군이 베트남인들을 모아놓고 기관총을 난사하거나 구덩이에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하여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전자는 몰라도 후자가 사실이라면 한국군 전체가 전범이 된다.


[총 쏘고 칼로 찌르고 독약 먹이고1시간 만에 380명 살육한 한국군(오마이 기사 제목)]
오마이뉴스 김 *성 기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1109


베트남에 가져가지도 않은 독가스를??

독가스는 현지에서 즉석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군수물자로 보급이 이루어져야 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측도 방호복을 착용해야 한다. 즉, 파월 한국군의 보급 담당은 물론이고, 말단 전투원까지 독가스의 존재를 알고, 방호복도 입고 다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보병이 휴대하는 독가스병기라면 저격이나 포격에 의해 용기가 깨지거나 손상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는 보병들은 모두 그 위험을 알고 있어야 하며, 유사시 즉각 방독면 착용 등을 해야 하는데.... 그런 증언은 어디에도 없으며, 증거도 없다. 시간대나 다른 내용들은 계속 번복하며 바꿔 말하고 있다지만, 한국군 전체를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파렴치한 전범으로 몰아간 것에 대한 구수정의 사과나 정정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후속기사에서 독가스 사용을 공식화하며 한국군이 고의적으로 학살을 하고 다녔다는 논거로 삼기도 했다.

또한 한겨레에서는 고자이 사건 당시 "맹호부대 2개 소대와 2개 보안대대와 2개 민간자위대대"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적었다. 보안대대와 민간자위대는 월남군 소속이다. 민간자위대는 (Regional Force 혹은 Popular Force)라고 볼수 있는데, 이들은 도시에서 떨어진 마을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민병대 수준 자위부대이다. 그렇다면 고자이 마을의 소속도 있을것이고 아니면 근처 마을 출신들이 있을것이다. 이들이 외국인들이 자기 가족이나 이웃들을 살해하는데 동참했거나 묵인했다는 뜻이다 만일 한국군 규모가 훨씬 컸다면 두려워서 묵인했다고 볼수 있지만 규모도 중대-연대 차이가 나는데 그냥 있었다는게 말이 안된다. 그리고 4개대대 이상 규모이니 거의 연대규모가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눈에 띄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영어 위키백과에도 고자이 학살이 등재되어 있었지만 몇몇 위키러들이 위에 같은 비판과 의문점 등을 소개하자 토론 끝에 근거 부족으로 지워졌다.

참고로 이 학살의 진범은 남베트남군 레인저 부대이다.
고자이 마을에 새겨진 벽화를 보면 오른쪽 견장에 흑표범 얼굴이 그려진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불태워 죽이는 그림이 있는데, 오른쪽 견장 부분에 흑표범 얼굴이 정면으로 새겨진 군복은 당시에 남베트남 레인저부대가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 맹호부대로 오해받게 된 케이스.

5.1.3. 린선사 스님 학살 조작 사건[편집]

구수정이 밝혔다는 린선사 스님 학살 사건 같은 경우에는# 정작 한국군에게 누명 씌우기 위한 베트콩의 계략임이 수십년전에 밝혀 졌음에도 지금도 버젓이 사실인양 인용되고 있다.

5.1.4. 퐁니-퐁넛 마을 학살 논란[편집]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전략촌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우발적인 학살(70여명)을 당했다는 논란이 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2000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진상조사를 벌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8] 해당 진상 조사 보고서에서는 학살 사건의 근거로 2000년 6월 1일자로 기밀해제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조사보고서[9]를 제시했다.

미군 조사 보고서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군번 2302735, 미군 해병 연합행동소대 Delta-2 소속 본(J. Vaughn) 상병의 증언


2월 12일 월요일 13시 30분경 CAP D-2 해병대와 Sylvia 대위 그리고 Seacrest 하사관은 CAP D-2 서쪽의 제1 루트를 통해 Phong Nhi 마을에서 작전 수행을 하고 있는 한국 해병대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한국군은 마을에 포격을 가한 다음 자동화기로 습격을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집이 불타고 마을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민병대원 하나가 부상당한 소년과 여자를 소대로 데리고 왔을 때 비로소 나는 한국군이 마을의 민간인에게도 총을 겨누고 있고 따라서 더 많은 부상자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5시 경 우리는 Phong Nhi와 Phong Nhut으로 들어가 도와주라는 허락을 받았다. 우리의 경비대는 5명의 미해군과 26명의 민병대 그리고 S-3로 구성되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사진 연구를 위한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우리는 동쪽 경로의 잠복을 고려해 Phong Nhi 근처의 넓은 루트를 선택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사진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 A: 처음으로 간 집
사진 B&C: 타버린 집들
사진 D: 잿더미에 묻힌 채 죽어 있는 마을 주민
사진 E: 마을 주민 두 사람이 이 불에 타 숨진 채 이 집에서 발견되었다
사진 F&G: 가슴이 도려진 채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사진 H: 가장 큰 여자들과 아이들의 집단. 거의 모두 죽었음. 오른쪽 위의 여자와 아이들은 아직 살아있음. 사진 F & G에 있는 여자도 이 집단에서 찾았음
사진 I&J: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은 여자와 아이. 아이의 머리에 난 총상이 증거
사진 J1&J2: 사진 I&J에 있는 여자와 아이가 발견된 집단
사진 K&G: 볏짚에 가려진 채 도랑에서 발견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
사진 M: 이 아이는 몸 어느 곳에도 상처가 없다. 근처 연못에서 익사된 것으로 보임
사진 N: 총에 맞은 채 연못에서 발견됨. 사진 가운데 임신한 여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에 총을 맞음. 머리 앞이 날아감. 왼쪽 위의 아이는 사진 M과 동일 인물
사진 O&P: 20대 초반 여자 두 손 모두 손가락이 찢어지고 왼쪽 팔에 부상 당함. 미군 병사가 치료하고 있음

마을을 돌며 사진을 찍을 때 발견한 이상한 점 중 하나는 시체 더미 주위에서 총알 자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마을 주민 모두가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거나 총검에 찔렸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진술서는 1968년 2월 17일에 미군해병 J. Vaughn 상등병에 의해 작성되었다.

J.M. Campanelli, 미군해병 소령

위 진술서의 내용은 당시 한국군과 별개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미군의 분견대의 병사가 작성한 것으로, 최초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 부대가 마을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관측을 계속하며 대한민국 국군 부대가 마을을 습격하는 지켜본 뒤 마을로 진입하여 부상자 치료 및 사진 촬영 등을 했다는 것으로 이 진술서의 내용을 기초로 미군 측이 한국군을 제외하고 조사를 벌였던 사건이다.

이에 대해 당시 파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자체 보고서를 통해 한국군이 퐁니 퐁넛 마을을 지나가기는 했지만, 미군 분견대가 관측하던 시점에서는 이미 마을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고,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는 아예 다른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일지기록) 또한 학살의 주체는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이라고 주장했으며,[10] 한국군 부대의 이동상황은 현재 공개된 베트남전사에도 시간대별로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군은 파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의 주장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a) 작전에 투입되었던 한국해병들의 진술의 진의가 의심된다. 그들이 지휘그룹과 마을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12시간동안 1번 도로에 남겨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중대의 이동이 여러 마을과 관련해서 구분짓지는 않는다.
b) 증언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의 가치를 갖는다.
1. 한국해병은 소총과 포를 발사했다.
2. 한국해병 중대는 민간인 학살이 행해졌던 그 지역에 있었으며, 그리고 그 일이 있었던 밤동안 퐁니 북쪽 600미터 인근에 배치되었었다.
3. 한 해병에게 침묵을 지키라는 경고를 한 것은 미해병 연락부대로부터 제2한국해병여단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c) 조사보고서나 또는 추가보고서에 포함되었던 미해병연락부대의 장교로부터의 증언이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미군 보고서가 공개된 2000년 이후로 사건의 1, 2 소대장은 학살 주체가 한국군일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으며, 3소대장과 중대장은 모른다고 했다가 3소대장은 이후 앞의 소대에서 저질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

또한 당시의 수사계장은 "베트콩의 소행으로 조작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조작했다."는 증언을 했으며# 학살의 주체는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이라고 주장했던 채명신 장군또한 베트콩이 했다는 주장을 하는 대신 당시 한국군이 했을 수도 있다는 언급을 했다. #.

이와 다르게 당시 2여단장 김연상 준장은 학살이 있었을 가능성만을 인정했고, 최종적으로는 포병과 베트콩에 의한 피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 베트남 민간인이 증언하였고, 보고서 공개 후에는 한국군 1, 2, 3 소대장도 한국군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중대장 및 채명신 장군도 인터뷰에서 베트콩이 했을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으며, 당시 조사를 맡았던 조사계장도 베트콩의 소행으로 하라는 지침에 따라 조사했다는 증언을 했다는 점에서 확실한 물증만 없을뿐 한국군의 학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건이며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1, 2, 3 소대장은 서로 다른 소대가 했을 것이라고 증언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사건을 오랫동안 다뤄온 한겨레21의 고xx씨조차 한국군의 어느 소대, 어느 분대가 학살의 주체였는지는 확정하지 못했고 미군 조사관들 또한 퐁니-퐁넛 마을에서 작전을 펼치던 한국군 부대가 학살을 했다는 것을 법정에서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보인다. #

2004년 6월,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는 성금을 모아 관련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다. #.

6. 학살 주장에 대한 비판적 견해[편집]

또한 대체적으로 주장되는 학살지역들은 "꽝나이 성" 과 "꽝남 성". 특히 꽝나이 성의 경우 게릴라가 매우 많고 주민들도 게릴라에 협조하는 친게릴라 성향이라서 작전지도에 핑크색으로 칠해져 있을 정도로 게릴라 준동이 심했다. 그래서 미군들이 "핑크빌(공산주의자 마을, 해방구)"이라고 불렀던 곳이다.[11] 유명한 "미라이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도 꽝나이 성으로 미라이 사건을 벌인 켈리의 소대가 포함된 중대는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부비트랩만으로도 부대원의 상당수가 전사 피해를 입은 후,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꽝나이, 꽝남을 비롯한 베트남의 중부 동해안은 베트남 공화국(당시 북베트남 공화국)에서도 인정하듯 혁명가(공산주의자)들의 산실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산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지역 장악도가 심했다. 게다가 꽝나이 성은 라오스를 타고 내려오는 호치민 루트가 처음으로 남베트남의 내륙 평야지대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그만큼 게릴라는 많았고 게릴라에 협조하는 주민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권헌익 교수도 1995년 하미라는 마을의 전쟁 당시 이장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장의 말로는 전쟁당시 하미에는 베트콩들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조사를 해보니 공산주의자들이 아주 많았고 베트콩과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또한 Ha Gia 라는 마을의 여성이 베트콩 협력자로 추정되어 체포할때 그녀는 베트콩이 아니라고 했지만 집 벽뒤에 숨겨둔 카빈 소총 한정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 현지인들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주둔군과 현지인들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 그의 논문의 따르자면 학살이 일어난 지역들은 대다수 이미 한국군이나 미군, 혹은 월남군과의 교류가 있던 마을이었고 여기서 갑자기 전세가 뒤집히거나 주둔군이 손실을 입으면 그 마을들이 제일 먼저 베트콩 협력자의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주둔군들은 여부가 사실이든 아니든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베트콩 협력 마을이 맞는지 아닌지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학살이 일어나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꽝남 성, 꽝나이 성 그리고 그 위쪽으로 꽝찌 성까지의 북베트남 접경지대는 베트콩이나 베트콩 협조자를 뺀 순수 민간인은 없다고 평가받는 지역이었다. 파월 한국군이 초창기 주둔했던 푸옌, 카인호아 등 안남 동부 해안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한국군을 칭송하고 이동하자 이동반대 시위를 할 정도였는데,[12] 이후 이동한 중동부 베트남 지역에서는 한국군 증오비가 설치되었던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 이것이다. 이들 지역 주민들은 한국군이 만행을 저질러 증오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북베트남에 충성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적인 한국군을 증오한 것이다.

또한 몇몇 학살에서 학살 주장 지역과 주월 한국군 주둔지역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로 맹호부대가 벌였다는 고자이 양민 학살 사건 같은 경우 그 당시 한국군은 다른 지역에 주둔하고 남베트남군의 관할이었는데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발생되기 어렵다.

학살 주장에는 한국군이 월남전에 가져다 쓰지도 않은 독가스, 심지어 보유한적조차 없는 B-52 폭격기를 몰고 죽여댔다는 주장들도 있어서 신빙성을 더욱 떨어트리고 있다. 학살을 숨기기 위해 전차로 시체를 짓뭉갰다(...)는 이야기도 클리셰 수준으로 자주 나오는데, 주월 한국군은 장갑차는 있어도 전차(tank)는 단 한대도 없었다. 전투에 쓸물건도 없는데 시체 뭉게는데 쓸 전차가 있을리가 있나? 학살 숨기는 데 쓸 정도로 전차가 남아돈다면 수기사가 뭣하러 두코 전투에서 미군 기갑부대에게 지원을 받았겠나? 더군다나 시체를 파묻는 것도 아닌 짓뭉개는 것으로는 당연히 학살을 숨길 수 없다.

한국군이 했다는 명확한 증거 역시 부족하다. 베트남의 전장은 남베트남군, 북베트남군, 미군,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 소수민족군, 민병대들이 얽히고설킨 전장이었으며 서로의 군복으로 위장하는 일이 잦았다. 부락인으로 가장하여 VC를 생포하는 한국군[13] 특히 당시 베트남에서 유행한 타이거 스트라이프위장복은 미군 특수부대부터 남베트남군, 한국군 까지 대량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심지어 시장에서도 굴러다닐 정도였다. 누구든지 돈만내면 입고다닐 수 있었던 것으로 심지어 북베트남군도 애용하여 2010년대인 현재 북베트남 특수부대도 여전히 그 위장복 색상과 패턴을 사용중이다. 이런 판국에 학살한 주체가 누군지 식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14] 이러한 상황에서, 월맹과 베트콩들도 양민이나 포로학살에 대해 깨끗하지 못했다. 베트콩 경우는 "공포 정책"을 실행하며 친미/친정부 마을에서 인민재판이나 학살을 벌인적도 있으며 구정공세 당시 월남 고위간부나 군경의 가족들을 몰살하고 다녔다.관련 사진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진[15] 후에(Hue)도시 경우는 베트콩들과 월맹군에게 장악당한후 수천명의 포로들, 민간인들이 고문이나 강간당한후 학살당했고 또 수천명이 강제 월북당했다. 현재 베트남 정부는 이 사건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숫자를 축소시키고 있어 해외 망명한 베트남인들에게서 진실규명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한국군 군복만으로 한국군 학살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퐁니-퐁넛 학살관련 미군 조사 문서를 보면 베트남군 민병대와 남베트남군 증언으로 베트콩들이 한국군 얼룩무늬 군복이나 월남군의 군복을 입고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http://vietnamvoices.org/wp-content/uploads/2015/10/US-Army-IG_ROK-Marines_Report_1969.pdf [16]

현 베트남 정부의 학살 사건에 대한 태도도 이런 깨끗하지 못함에 기인한다. 현 베트남 정부(당시 북베트남)가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못하는 것은 승전의 우월감도 있겠지만, 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잡던 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 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북베트남의 공포심 활용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도덕성 역시 훼손되기에 함부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북베트남이 학살을 적극 주도한 북한 같은 급은 아니었다지만 베트콩을 어쨌든 우군으로 활용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17]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학살 사건에 대해 배상을 하고 싶단 뜻을 전달하자 베트남 정부는 즉각 과거의 일은 관심없으니 투자나 해달라는 반응을 보였다.

베트남 전쟁박물관 사진이 학살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나, 베트남의 전쟁박물관에는 왜곡된 사진들이 걸려 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베트콩 포로를 압송하는 사진을 (이것은 명백히 종군기자가 찍으면서 설명한 사진에다가 어디서 찍혔는지, 무슨 부대 소속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다.) 몬타크나드족들을 수용소에 압송한다고 왜곡시키거나 베트콩 여자를 심문하는 사진을 "후옹 디엔 학살"이라는 거짓말을 짤막하게 적어 놓은 경우도 있으니 베트남측 자료는 상당히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어떤 베트남 자료에는 한국군 700여명(!)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다.[18]

캐스트 "그 시절 그 이야기"에서도 한국학살이 언급된 적이 있다. 동아일보 출신에 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닌 민병욱 기자에 따르면, 1966년 12월 6일 빈 호아사 꺼우 마을에서 131명을 살해한 것이 1983년 외국 언론의 보도로 밝혀졌다고 보도했으나, 정작 그 외국 언론 보도의 기사 원문이나 링크는 없다.링크


/////////////////////////////////////////////////글 참조함 ///////////////////////////////////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로 가고 있었던 1972년 7월31일 <에이피>(AP) 통신은 맹호사단에 의한 양민 학살 문제를 보도했다. 2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으며, 사망한 남성 9명, 여성 13명, 그리고 아이들 7명 명단이 키엠 수상에게 제출되었다. 명단에 따르면 다낭의 팜쑤언후이에서 발생한 이 사건에 86살의 할머니가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1살도 되지 않은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이상 http://www.newspapers.com/newspage/45678523/)
. (“양민학살 보도 해명 전보”, 주월대사. 1972, 외무부 문서) 맹호사단의 ‘장비 2호 작전’ 시 한국군의 공격으로, 에이피 통신의 보도와 비슷한 수의 부락민이 피살되었다. 남베트남의 일부 국회의원들이 이 내용을 왜곡 기술하여 신문사에 배부하였다.
주월한국대사는 사전에 보도를 만류하는 한편 8월15일에서 17일까지 자체 조사를 한 뒤 주월한국군사령부에 조사를 다시 의뢰했다.

<조사내용 >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이 각각 3명의 장교(반장 중령)를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동 부락은 본시 베트콩 통제하에 있었으며, 전투는 적의 사격으로 아측이 전사 2, 부상 6명의 피해를 입은 후 일어난 우발적인 것이었으며, 촌락에 대한 공격은 지방 책임 관리의 사전 동의 아래 실시된 작전상의 타당성이 있는 전투이고, 의원들의 비난과 같은 양민 집단학살 및 암매장은 없었다는 데 합의를 보았음.”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조사 결과 양민 학살은 사실무근이었다.


////////////////////////////////////////개인적 생각 ///////////////////////////////


전 전쟁중에 사람이 안죽었다고 생각 하지도 않습니다. 살인또한 없었다고 생각 하지도 않구요.

 하지만 학살의 개념과는 다르다고 생각이 듭니다.

일부인들은 일본인의 학살과 비교를 하시는데 2차대전 당시 사령부에서 위안부를 만들고 민간인 생체 실험과 학살까지 직접 명령 했던 일본군의 경우와 한국군의 경우는 분명히 다릅니다.애당초 연합군이나 한국군이나 군 수뇌부 차원에서 아니면 현지 사령부 차원에서 또는 국가적인 결정과 정부차원의 조직적인 학살 명령으로 학살을 한적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개인이 저지른 사건은 있었겠지만 일본의 경우와 같은 명령된 학살은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민간인을 살리는 것을 우선하라고 명령을 하였답니다.

한국과 베트남의 조사내용을 아직도 부정 하시나요?

일부 언론사와 단체들은 정치적 성향땜에 국민을 세뇌하는 짓은 이젠 그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일부 단체와 구수정측의 내용들이 조작들로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무슨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조작들은 조금씩 내용이 바뀌고 사람조차 매수하는등 사실인 마냥 다시 보도 되고 있는데 희생된 군인들에게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 또한 언론의 글만 믿고 베트남에서 무작정 학살이 가해졌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학살 자료 모집중 왜곡된 부분이 많아 우리가 일부 언론에 세뇌되어 휩쓸려 가는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 하더군요.

그래서 검색도 해보고 여러곳에 자료를 요청하여 보니 내가 몰랐던 부분들을 알게되고 내가 믿었던 부분들이 모두가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죄를 안했다구요? 김대중 정부측의 공식적 사과 이후 대통령마다 사과를 드리고 있으며 베트남의 경제 개발을 위해 우리가 스스로 힘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해는 지뢰제거 작업까지 도와 주기로 약속 했다는데 국내에 한국군인을 욕하는 그런분들이 베트남에 수두룩 하다면 차라리 물자도 모든 지원도 안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전 모두가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라는건 아닙니다.
정치적 성향아래 감춰진 진실들은 어차피 수면위로 더러나게 되어 있으니깐요.

그리고 사진출처 아래에 적혀 있습니다.

출처도 모르고 저런 사진들을 올리며 한국군을 가해자로 내몰지 마십시요.

그리고 재향군인 그들도 만나 보십시요.구수정씨가 존경받는 옮바른 인권 운동가라면 왜? 재향군인을 위한 모금은 안합니까?

그들은 아직도 전쟁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눈길을 돌려 주십시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성폭행 사실에 대해서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국가 분쟁에서 발생된 성폭행에 대해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한 것은 없습니다.

한 건이 있는데 그 것은 독일이 이스라엘에 한 것입니다.

독일은 이스라엘 외에 폴란드나 러시아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매우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열강나라들이 크게 머라하지 않는 것은

그들도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분쟁에 있어서는 절대 선과 악에 또는 도덕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이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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