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산,,,

세계 유산,,,

작성일 2004.08.24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창덕궁, 수원화성, 석굴암&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인돌유적,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 일기

이것들이 한국의 세계유산들 이라는데요,,

이것들에 대해서 특징을 간단히 적어야되요,,

인터넷 활용해서 이해한 것들만 중요한 것만,,,,

몇개만이라도 도와주세요^^^^^

ㄳㄳ


#세계 유산 #세계 유산 등재 효과 #세계 유산 협약 #세계 유산 대한민국 #세계 유산 여행 추천 #세계 유산 뜻 #세계 유산 영어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 #가야 고분군 세계 유산 #한국 세계 유산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창덕궁

昌德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창덕궁의 전경, 사적 제122호, 서울 종로구 와룡동
사적 제122호. 1405년(태종 5)에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인정전(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며, 특히 1833년(순조 33)의 큰 화재 때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이 불탔으나 곧 다시 중건되었다.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복구했다.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인 곳에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과 그 양옆에 월랑(月廊)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이것을 모두 헐어버려 지금은 볼 수 없다. 인정문은 정전의 정문이며 그 양쪽에 있는 월랑은 'ㄷ'자형으로 인정전을 감싸고 있다. ㄷ자형의 마당 안에는 인정문으로부터 시작된 어도(御道)가 있고, 그 북쪽 끝에 있는 중앙의 높은 월대 위에는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인정전 월랑의 동북쪽에는 편전(便殿)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선정전의 주위에는 여러 행각이 있는데, 그 남쪽에 있던 여러 칸의 행각들은 일본인들이 모두 헐어버렸고, 뒤쪽에 있는 행각만 남아 있다. 동북쪽에는 희정당과 내전인 대조전 영역이 서남향으로 지세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궁궐지〉에 희정당은 편전으로, 또 〈동궐도〉에는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모습과 다르다. 희정당으로부터 구름다리 모양의 행각이 북쪽으로 뻗어 희정당 자리보다 높게 자리잡은 대조전은 침전으로 장방형의 행각이 둘러싸고 있고, 이 뒤쪽으로는 아름다운 후정이 조성되어 있다. 대조전 영역의 동남쪽에 내의원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낙선재(樂善齋), 승화루(承華樓), 백칸 안쪽에 이르는 행각들만 남아 있다. 창덕궁의 북쪽에 있는 넓은 터에는 금원(禁苑)이라고 부르던 후원이 있다. 현재 이 궁궐 안에는 건물 13동과 후원의 건물 28동 등 모두 41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인정전(국보 제225호)·돈화문(敦化門:보물 제385호)·인정문(보물 제813호)·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희정당(보물 제815호)·대조전(보물 제816호)·선원전(璿源殿:보물 제817호) 등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조선 후기),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 조선 후기의 건물. 국보 제225호. 평면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중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10년에 중건했고, 1803년(순조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 기단을 쌓고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놓은 다포식 건물이다. 바닥은 쪽마루이나 원래는 전을 깔아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며, 순종 때 서양식 건축의 실내양식이 들어오면서 서양식의 커튼박스·전등시설·전등갓 등으로 장식되었다. 평면의 중앙 어칸 뒤쪽에는 어좌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 일월오악병풍이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특히 중앙에 보개천장을 만들고 봉황새 1쌍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공포는 외3출목·내4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바깥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구름 모양으로 초각되어 기둥 윗몸에 놓은 운공(雲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층 축부의 중앙과 뒤쪽 중앙에 문짝을 달기 위해 문지방만을 놓았으나 나머지 모든 칸에는 소슬빗꽃살창을 달기 위해 높은 머름을 짜넣었다. 상층에는 교창만을 짜넣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합각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 추녀마루 위에는 잡상을 늘어놓아 장식했다. 특히 용마루에 5개의 이화무늬장[李花紋章]의 장식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일제가 설치한 것이다. 인정전과 인정문 사이의 공간에는 중앙이 높고 양쪽이 낮은 어도가 있고, 그 좌우에 18품의 품계석이 있으며 마당에는 넓고 얇은 돌을 깔아 마무리했다.

 

화성

華城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석전교축(石塼交築) 성곽.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성곽. 사적 ...
사적 제3호. 수원성곽(水原城郭)이라고도 한다. 1789년(정조 13) 정조가 생부인 장헌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읍치소(邑治所)는 물론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주시킨 다음 축조하기 시작했다.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이와 관련한 시말(始末)과 제도, 의식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794년 2월부터 축조가 시작되어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둘레는 5,520m이다. 시설물로는 4대문인 팔달문·장안문·창룡문·화서문을 비롯하여 암문·수문·적대·공심돈·봉돈·포루·장대·각루·포사와 성신사·사직단·공자묘·행궁 및 그외 부속건물들이 축조되었다. 그중 공심돈은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인데,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세운 것으로 속이 텅 비어 있어 망루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적대(敵臺)·각루(角樓) 등도 새로운 설비였으며, 옹성(甕城)까지 제대로 갖춘 완벽한 시설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 거중기(擧重器)·활차(滑車) 등 근대적인 기기를 축성공사에 사용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2년 6개월이 소요된 공사에는 기술자 1,820명이 투입되었으며, 석재 18만 7,600개가 채취·운반되었고, 벽돌 69만 5,000여 장이 소요되었다. 연일수는 37만 6,342일, 총경비는 약 87만 3,520냥과 양곡 1,500석이었다. 종래의 전통적인 축성방법을 기본으로 하고 한국 성곽이 갖는 약점을 중국이나 일본의 축성술로 보완한 화성은 그때까지의 축성기법을 가장 잘 집약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성곽발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35년 일본이 '수원성곽'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화성'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석굴암

石窟庵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

1. 석굴암 석실 종단 북벽도 2. 석굴암 석실 ...
석굴암(국보 제24호)의 주실 입구,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국보 제24호.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부속암자이다.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石佛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석굴암은 김대성 개인이 창건했다기보다는 신라 왕실의 염원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석굴암은 여러 개의 판석과 다듬은 돌로 궁륭천장 석실의 비례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역학적으로 축조한 인공석굴이라는 점에서 인도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석굴의 구조는 전방후원식(前方後圓式)으로, 장방형의 전실(前室)과 원형 주실(圓形主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비도(扉道)로 되어 있다. 주실의 가운데 높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의 두광은 뒷벽에 연화무늬로 조각되어 있는데, 예배하는 사람이 전실의 중간쯤 와야 광배의 중앙에 부처의 머리가 놓이고 상의 크기나 몸체의 비례감이 알맞게 보이도록 고안되어 있다. 석굴암 내의 조각상들은 부처가 설법을 할 때 거느리고 다니는 여러 권속들로,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천부상·제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즉 석굴암의 불상은 여러 불·보살·천부상 등이 모여 하나의 작은 불국토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에는 종열(從悅)이, 1758년(영조 34)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서 크게 중수되었으며 그뒤 일제강점기에 1913~15, 1917, 1920~23년 3차에 걸쳐 보수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일본인들의 잘못된 보수는 1962~64년에 정부지원 아래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는 앞으로 문헌자료와 함께 중수과정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만 창건 당시의 석굴암 모습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석굴암불상군

본존불좌상(통일신라), 높이 160cm
석굴암 주실벽에 새겨진 보현 보살 입상, 높이 198cm
석굴암 감실의 보살좌상
석굴암 안에 봉안된 38구의 통일신라시대 석불. 즉 본존불을 중심으로 범천(梵天)구, 제석천(帝釋天) 2구, 보살 3구, 나한 10구, 감실보살(龕室菩薩) 8구, 사천왕 4구, 인왕(仁王) 2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가 배치되어 있다. 우선 전실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갑옷을 입고 암좌 위에 서 있는 4구의 팔부신중상(169~186㎝)이 있다. 원래는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 있었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상(神將像)으로 변한 것으로 부처가 설법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천부상이다. 그 이름은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婆)·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伽)로 알려져 있으나 경전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이 가운데 머리에 용관을 쓴 용, 사자관을 쓴 건달바, 3개의 얼굴과 6개의 팔을 가진 아수라는 쉽게 확인할 수 있으나 나머지 상들은 구별이 어려워 정확한 명칭을 붙이기가 어렵다. 더욱이 입구 양쪽에 있는 각각 2구의 팔부신중은 굴 안의 상들과 비교해 조각수법이 현저하게 떨어져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실에서 원형주실 입구 양쪽에 있는 인왕상은 문지기의 역할을 하는 천부상이다.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고 근육을 자랑하며 바람에 날리는 천의와 치맛자락이 특징적이다. 또한 번뇌와 망상을 깨뜨린다는 상징적인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있어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부른다. 주실로 들어가는 비도 양쪽에는 각각 2구의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갑옷을 입고 손에는 칼이나 창을 들고 악귀를 밟고 서 있다. 이 상들은 불법과 불국토를 사방에서 수호하는 호법신장상이다. 손에 탑을 들고 있는 상은 북방의 다문천(多聞天)으로 석굴암에서는 오른쪽 안쪽에 위치해 있으므로 그 옆의 상은 동방의 지국천(持國天)이다. 왼쪽 입구쪽의 상은 남방의 증장천(增長天), 그 안쪽의 상은 서방의 광목천(廣目天)으로 확인된다.

본존상이 모셔져 있는 원형의 주실 벽에는 15구의 부조상이 있고 벽 위에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이 가운데 2곳은 비어 있고 나머지에는 8구의 보살좌상(86~95㎝)이 있다. 우선 입구쪽에서 가까운 벽부터 보면, 양쪽의 처음 두 상은 범천과 제석천(213㎝)으로 원래는 인도 아리안계의 브라마(Brahma)와 인드라(Indra)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수호와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천부상이다. 범천은 오른손에 번뇌를 털어내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번뇌를 씻어준다는 물병인 정병을 들고 있다. 제석천은 무복(武服)을 입고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 쓴 높은 관이나 늘어진 옷주름선과 천의 표현은 정교하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회화적인 표현을 보는 듯 섬세하다. 이 두 천부상 옆에는 조그만 잔을 들고 서 있는 상과 길고 네모난 지물을 들고 서 있는 보살상이 있는데 그 명칭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길고 네모난 물건을 들고 있는 상은 지혜제일의 문수보살(文殊菩薩:198㎝)로 경권(經卷)을 들고 있으며, 그 반대편 상은 문수보살과 짝을 이루고 부처를 보좌하며 보살행을 실천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198㎝)로 추정된다. 부드러운 천의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듯 가벼운 느낌을 주며 영락장식과 군의(裙衣)의 늘어진 주름이 서로 겹치면서도 입체감과 부드러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보살상 다음에는 양쪽으로 5인의 나한상(213~218㎝)이 각기 다양한 자세로 지물을 들고 서 있는데 10대 제자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자들의 명칭은 경전을 통해서 알 수 있으나 석굴에 표현된 상들과 관련하여 각각의 상에 이름을 붙이기는 어렵다. 각 나한상들은 사색하는 듯한 얼굴표정에서 수행자의 모습을 느낄 수 있으며 몸체와 가사의 주름처리는 다른 조각상들과 마찬가지이다. 이 10대 제자 사이로 뒷벽 정면에는 정교한 조각수법으로 마치 회화작품과 같이 섬세하게 표현된 십일면관음보살상(218㎝)이 있다. 관음보살상은 보살들 중에서 자비를 상징하는데 그 자비를 베푸는 대상에 따라 구제와 교화하는 방법이 다양하며 보살이 지닌 여러 감응력을 상징하기 위해 여러 개의 얼굴과 팔로 표현된다. 이 십일면관음보살상은 그 표현이 정교하고 조각기술이 완벽해 석굴암 불상뿐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정수를 대표한다. 주실의 윗벽 감실에 있는 8구의 상들은 모두 좌상이며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중 나한과 같이 승려머리를 한 상은 저 세상에 태어난 중생의 정토왕생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로, 현존하는 최초의 지장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쓴 보관에 아미타화불이 있는 상은 관음보살상, 뒷벽 중앙의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대담하는 상은 왼쪽이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 오른쪽이 문수보살로 확인되나 나머지 상들은 그 명칭을 알 수 없다.

석굴암의 여러 상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은 원형주실의 본존불상(326㎝)으로 주변 모든 상들의 구심체이다. 대좌까지 합쳐 약 500㎝나 되는 큰 상이며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부드럽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본존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의를 걸쳤으며 두 다리는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모아진 두 다리의 중앙에 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간략한 옷주름 표현은 상 전체의 단순한 조형성을 강조해주며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긴장감과 신비한 종교성이 어우러져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종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본존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수인(手印)에 의해 인간세상에 태어나 득도(得道)한 석가모니불이라는 설과 부석사 무량수전 항마촉지인의 본존불이 아미타불인 것처럼 이 석굴암 본존불도 김대성을 비롯한 신라 왕실의 정토왕생을 바라는 의미에서 조성되었으므로 아미타불이라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불국사가 화엄종의 사찰이고 8세기 중엽 화엄종이 유행함에 따라 석굴암의 본존은 〈화엄경〉에 나오는 첫 장면을 나타낸 것으로,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석가모니가 부처의 형상으로 여러 대중과 보살들에게 그 깨달음의 황홀함을 보여주면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통해 〈화엄경〉을 설하는 장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항마촉지인의 부처 모습은 석가모니불뿐 아니라 모든 부처가 깨닫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단계를 상징하는 손 모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석굴암의 본존과 같은 항마촉지인의 불좌상 형식은 이후 통일신라 후기 및 고려시대까지 크게 유행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석굴암 불상조각은 정교하고 완숙한 조각기술과 신라인의 미적 감성이 반영되어 이루어진 이상적인 불상으로 8세기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의 절정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중국·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불교미술에 보이는 국제적인 성격의 불교 조각양식 형성에 통일신라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증명해주는 예이다.

 

불국사

佛國寺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에 있는 절.

불국사의 전경, 경북 경주시 진현동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국가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는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인 영제부인(迎帝夫人)이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를 창건하고 574년(진흥왕 35)에 중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라 역사와 모순된 것이며 〈삼국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듯한 대목도 있어서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적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주요건물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놓아 불국사의 원형복원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주요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된 것이다. 석탑을 포함한 석조물은 병화를 입지 않아 신라시대의 원형을 유지한 것들이 꽤 남아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0년의 대대적인 복원공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염원한 이상의 불국토(佛國土)를 3갈래로 구현한 것으로 〈법화경 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의 사바세계는 대웅전으로, 〈무량수경 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극락전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는 비로전으로 대표된다. 즉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石壇)에 의하여 단상(壇上)의 불국토와 단하(壇下)의 속계(俗界)로 양분된다. 크고 작은 돌을 빈틈없이 쌓아올려 만든 석단 위에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칠보교(七寶橋)·연화교(蓮花橋)라는 2쌍의 다리를 놓았다. 청운교·백운교는 자하문(紫霞門)을 거쳐 석가모니의 사바 세계인 대웅전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과 다보탑(多寶塔)은 서로 마주 서 있는 쌍탑구조이며, 뒤편으로는 경론(經論)을 강술하는 무설전(無說殿)을 두고 대웅전 일곽을 동·서 행랑으로 에워싸고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安養門)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르게 되며 그 안에 금동아미타불좌상을 안치했다. 무설전 뒤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한 비로전이 있다. 이외에도 토함산 일대에는 몽성암(夢成庵)과 보덕굴(普德窟)을 비롯하여 불국사 부속암자들이 다수 있다. 칠보교 아래에는 2쌍의 당간지주와 석조(石槽)가 있고, 5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불국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국보 제26호. 높이 177㎝. 두 손은 가슴 쪽으로 올려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의를 입고 결가부좌의 자세를 하고 있다. 지권인은 본래 밀교에서 금강계만다라의 주존인 대일여래(大日如來), 즉 마하비로자나가 취하는 수인으로 이때 대일여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영락으로 장식한 보살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이 불상처럼 나발이 있는 육계에 부처의 형상으로 지권인을 한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지권인과 달리 오른손은 아래로, 왼손은 위로 올라가 극락전의 아미타상처럼 두 손의 위치가 바뀐 것도 특이한 점이다. 얼굴의 표정 자체도 근엄하지만 넓은 어깨에 허리를 곧게 세워 배가 약간 나온 자세는 더욱 위압감을 준다. 두 무릎의 폭이 넓어 안정된 느낌을 주지만 허리가 길어지고 얼굴과 드러난 오른쪽 어깨의 살은 약간 탄력감을 잃은 듯하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은 불신(佛身)에 밀착되어 허리와 배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데 도드라진 옷주름의 표현은 도식화된 편이다.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주는 이 상의 제작연대는 그 양식에 의해 8세기말로 보는 견해와 〈불국사사적기〉 가운데 최치원이 쓴 〈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 毘盧舍那文殊普賢像讚〉에 근거해 9세기말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원래 대웅전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중수할 때 극락전으로 옮겼다가 1973년 복원공사 후 다시 비로전으로 옮긴 것이다.

 

종묘

宗廟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가(王家)의 신위(神位)를 봉안한 사당.

종묘 정전, 국보 제227호, 서울 종로구 훈정동
사적 제125호.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 정전,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과 공신당(功臣堂)·칠사당(七祀堂)·재궁(齋宮)·전사청(典祀廳)·향관청(享官廳)·제문(諸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종묘의 기원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392년(고구려 고국양왕 9)에 종묘를 수리했다는 기록이 최초로 보인다. 그밖에 시조묘·동명묘·국모묘도 모두 종묘에 해당하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그러한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종묘의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비되었다. 고려의 종묘는 9실(室)로 되어 있었으나 때로는 5실로 하고 동서에 협실을 두기도 했으며 종묘 정전 이외에 별묘를 설치하기도 했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고려의 종묘를 철거하고 새로 지었는데 새 종묘가 완성되기까지는 태조의 4대 조상 신위를 임시로 효사관에 봉안했다. 종묘가 낙성된 것은 공사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1395년(태조 4) 9월이며, 그 위치는 한성부 동부 연화방으로 지금 종묘가 있는 곳이다. 이때 종묘의 규모는 태실(太室 : 정전) 7칸, 좌우 익실(翼室)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으로 모두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담 밖에는 행랑과 재궁을 비롯한 건물들이 자리잡았다. 종묘가 준공된 이후에도 각종 보완공사가 행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고 1593년(선조 26) 10월에 환도해서는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 5월에 종묘가 중건되었는데 그 규모는 병화로 소실되기 직전의 그것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뒤 병자호란으로 종묘의 신위를 강화도로 옮겨갔으나 다시 서울의 시민당(時敏堂)으로 옮기고 29신위를 모두 개조, 태묘와 영녕전에 봉안하고 파손된 신위는 종묘 뒤에 묻어 봉안했다. 1870년(고종 7) 1월에 종묘와 영녕전의 신위를 창덕궁으로 옮겨 봉안하고, 개수공사에 착수해 그해 3월 공사를 완료한 다음 신위를 본처에 봉안했다. 지금의 종묘 태실 19칸은 이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종묘 안의 부속건물로는 태실 서쪽에 지어진 영녕전과 역대 왕의 공신을 배향한 공신당, 그밖에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고인돌

dolmen

(웨)cromlech.

선사시대 돌무덤 유적.

탁자식 고인돌, 전북 고창군 아산면 상갑리
바둑판식 고인돌, 경남 창녕군 영산면
흔히 뚜껑 구실을 하는 넓은 덮개돌[蓋石]을 여러 개의 굄돌[支石]이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일종의 무덤방[墓室]으로 꾸민 이 구조물은 유럽 신석기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돌멘'(dolmen)이라는 말의 뿌리는 켈트어이며 브르타뉴어는 아닌 것 같다. 고인돌은 굄돌이 뚜렷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서 한국·만주·일본 등을 비롯하여 유럽, 영국 제도, 북아프리카에 분포한다.

한국의 고인돌

고인돌 부분명칭도
고인돌 분포도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한국 선사시대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분포관계를 보면, 주변지역인 중국에서는 산둥 반도와 랴오닝 지역의 남부 저장 성 부근에서 가끔 보이며, 일본은 규슈 지역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들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基)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퍼져 있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며, 주변의 자연지세에 걸맞는 골짜기 방향이나 강·해안선을 따라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자연숭배 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강 옆의 들판이나 바닷가 부근에 있는 것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고, 수적으로 많이 분포하는 평안·황해·전라지역은 서해안이라는 점에서 바다와 고인돌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목된다. 기능면에서 볼 때, 당시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어떤 대상이나 자연의 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의식을 거행하던 '제단고인돌'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하여 만들었던 '무덤고인돌'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무덤고인돌이다. 무덤고인돌의 형식을 보면, 먼저 밖으로 드러난 모습인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며, 덮개돌 밑에 있는 무덤방의 짜임새는 만든 방법과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탁자식고인돌(북방식·전형)은 4개의 판판한 돌을 세워서 지표 위에 네모꼴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덮개돌의 하중을 받고 있는 긴 벽은 그대로 있지만, 고인돌을 만든 다음 나들이문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되는 짧은 벽은 거의 파괴되어 없어진 상태이다. 이러한 형식은 황해·평안도의 서북지역에 많이 있고 전라남도 나주, 경상남도 거창에서도 드물게 나타난다. 바둑판고인돌(남방식·기반식)은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땅 속에 있는 무덤방은 구덩이·돌널·돌덧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구덩식고인돌(무지석식·개석식)은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분포하고 있어 고인돌의 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하며, 전북 고창지방에 있는 것은 덮개돌이 무려 170t 가량 된다.

고인돌은 상당히 일찍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옛 기록으로는 BC 78년 〈전한서 前漢書〉에 처음 나타나며, 우리나라에서는 1200년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금마군(지금의 익산군)의 고인돌이 소개되었다. 광복 이후 발굴된 여러 유적 가운데 고인돌의 수가 가장 많다. 제천 황석리와 양평리, 달성 진천동 유적에서는 사람뼈가 나왔다. 껴묻거리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토기가 있는데, 간혹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도 나온다. 석기는 대부분 간돌검[磨製石劍]·돌촉[石鏃] 등이다. 가끔 청동유물을 찾을 수 있는데, 최근 여천 적량동유적에서는 한 유적에서 여러 점의 비파형동검이 나와 주목된다. 드물게, 꾸미개인 곱은옥[曲玉]과 대롱옥[管玉]이 나오고 사슴이나 소과[牛科]의 동물, 돼지 등 짐승뼈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고인돌을 만들 때 치렀던 제의나 묻힌 사람의 영생을 바라는 내세에 대한 믿음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인돌사회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X'자가 새겨진 자갈돌이 옥천 안터유적과 화순 대전유적에서 나왔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값이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발굴조사에서 찾은 껴묻거리를 통하여 대강 연대를 살펴보면, 양평 양수리의 연대측정값이 3,900±200BP로 드러났고 안터고인돌에서는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담양 문학리, 충주 하천리, 제천 함암리 고인돌에서는 이른 철기시대의 토기와 쇠똥[鐵滓]을 찾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늦은 신석기시대부터 조금씩 만들어지다가 청동기시대에 널리 퍼졌고 이른 철기시대까지도 지역에 따라 가끔 만들었던 것 같다.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바다를 통해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점과 축조연대가 이르다는 점에서 주변지역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어 아직까지 뚜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커다란 덮개돌을 옮겨 고인돌을 만드는 데는 훌륭한 기술과 많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노동력은 선사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지금까지 밝혀낸 당시의 여러 생활상으로 보아 고인돌을 만들 때는 사회적·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공동체의식 속에서 마을 전체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훈민정음

訓民正音

조선시대에 한글이 창제·반포되었을 당시의 공식 명칭, 또는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

개설

, 국보 제70호, 간송미술관 소장
1443년(세종 25년) 완성되어 1446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0월 상순)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말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한때 언문(諺文)·언서(諺書)·반절(反切)·암클 등으로 낯춰 불리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 한글'이라고 한다. 문자체계의 특징은 한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이면서 음절단위로 적는 음절문자의 성격을 함께 지닌 점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체계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으나, 그중 초성의 ',,ㅿ'과 중성의 ''가 폐기되어,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그밖에 28자를 이용한 병서(竝書)·연서(連書) 문자가 쓰였으며, 성조를 표시하는 방점이 쓰였다.

창제 목적 및 과정

〈훈민정음〉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랏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이런 젼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내 이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노니 사마다 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미니라"라는 서문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함께 새 글자 창제의 바탕을 이룬 정신이 나타나 있다. 즉 첫째 우리가 중국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중국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한 점에 민족자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어린(어리석은) 백성'이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민본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제과정은 조선시대의 일종의 연구소인 집현전의 학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지속적으로 세종의 사업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당시의 유일한 언어학이었던 중국 운학(韻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중국 운학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로서 그 주된 목적은 운서편찬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 운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문적 경향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었고, 그것이 국어의 표기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이어진 결과 훈민정음 창제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세종이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의문나는 점을 물었고,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랴오둥[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찾아가서 음운에 관하여 물어보게 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세종은 3년간의 보충연구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는 한편,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조선 태조(太祖)에서 철종(哲宗)에 이르는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편찬·기록한 책.

, 국보 제151호, 부분, 규장각 소장
1,893권 888책. 태조·정종·태종까지의 실록은 필사본, 세종실록 이후는 활자본. 책 이름을 〈태조실록〉·〈세종실록〉 등으로 부르기도 하나 원래는 해당 왕의 묘호(廟號)·시호(諡號) 등을 합해 완전한 책명으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사체(史體)는 각 왕을 중심으로 연월일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기록 형식은 일찍이 중국의 양(梁)나라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는 대대로 이 선례를 따라 실록을 편찬했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편찬하여 사고(史庫)에 보관해왔으나 〈고려왕조실록〉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실록의 편찬과정

실록은 일정한 시기에 일괄적으로 편찬한 것이 아니고 전왕(前王)이 죽은 뒤 다음 왕이 즉위하면서 실록청을 개설하여 전 왕대의 여러 기록을 수집해 편찬한 것이다. 최초의 조선왕조실록은 1409년(태종 9) 태조가 죽은 지 1년 후에 태종이 하륜(河崙)에게 〈태조실록〉의 편찬을 명함으로써 편찬이 시작되었다. 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춘추관 내에 임시로 실록청 혹은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고 영의정이나 좌의정·우의정을 총재관(摠裁官)으로 삼고 대제학과 문필로 이름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도청(都廳) 및 각 방(房)의 당상(堂上)으로 임명했다. 방의 구성은 해당 왕의 재위기간이 길 경우는 6방이지만, 대체로 3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실록을 편찬하는 기본자료는 시정기(時政記)와 사관(史官)의 사초(史草)이다. 기타 해당 왕의 재위기간 동안 각 관청의 기록인 〈각사등록 各司謄錄〉·〈승정원일기〉 등 각 개인의 일기·문집도 편찬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등록〉·〈일성록〉도 자료로 사용되었다. 각 방의 당상과 낭청(郞廳)은 이들 자료를 수집하여 연·월·일순으로 분류한 다음 편년체 형식의 실록 초초(初草)를 작성하여 도청에 넘긴다. 도청에서는 낭청에서 작성한 초초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거나 보충하여 2차 원고인 중초(中草)를 작성한다. 중초를 바탕으로 총재관과 도청당상이 교열하여 문장과 체제를 통일하고, 최종적으로 수정·필삭(筆削)하여 정초(正草)를 만들게 된다. 이 정초본으로 실록을 인쇄하여 사고에 봉안하게 된다. 실록의 기본자료로 이용한 사초나 초초·중초·정초는 모두 물에 씻어 없애는데 이것을 세초(洗草)라고 한다. 세초는 실록편찬에 소요된 종이의 양이 많기 때문에 그 종이를 다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고려의 고승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이 저술한 책.

2권 2책. 원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약칭으로 〈직지심경〉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여러 문헌에서 선(禪)의 깨달음에 관한 내용만을 뽑은 것으로, 내용면에서도 고려 선종사에서 귀중한 문헌이지만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더 유명하다. 1372년(공민왕 21)에 저술되었는데, 1377년 청주목의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현재 이 책의 하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도서의 해 기념전시회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았다. 사찰 나름의 재래방법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것으로, 목활자가 섞이고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으나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1623년(인조 1) 3월부터 1894년(고종 31) 6월까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출납, 제반 행정사무, 다른 관청과의 관계,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기.

3,047책. 필사본. 본래 조선왕조는 초기부터 왕명출납과 관계된 기록을 남겼는데, 인조 이전의 것은 여러 차례에 걸친 병화(兵禍)로 소실되었다. 1894년 이후에 승정원이 승선원(承宣院)·궁내부(宮內府)·비서감(書監)·비서원(書院)으로 바뀌면서 〈승정원일기〉도 그 명칭이 바뀌어 1910년까지 존속하게 된다. 본래 3,047책으로 되어 있었으나 제 2454책과 제2465책이 결본이어서 모두 3,045책이 남아 있다. 1894년 이후의 것까지 합하면 3,245책이다. 승정원의 직제는 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동부승지 등 승지 6명(정3품)과 주서(注書) 2명(정7품),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명(정7품), 서리(書吏) 35명, 사령(使令) 35명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일기의 찬자는 승사(承史)라 하여 승지와 주서가 담당했는데 모두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논의된 사실을 정리할 수 있었으며 백관회의(百官會議)에도 참석하여 그 내용을 기록했다. 그리고 주서는 고려조 이래의 당후관의 후신으로 반드시 문신이 임명되었으므로 주서가 쓴 사초(史草)는 보통 ' 당후일기'라고 칭해졌으며, 주서를 지낸 사람의 문집에 넣어져 출판되기도 했다. 한편 승정원에는 가관(假官)·분관(分官)으로서 가승지·가주서가 실관(實官)의 임무를 대리하기도 하고, 분승지·분주서는 각 전(殿)의 거동이나 임시적인 행사에 차출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에 관한 일을 기록하기 위하여 설치된 사변가주서는 전쟁 후에도 계속 설치되어 실관의 지위를 차지하고 군무(軍務)·칙사(勅使)·국안(鞠案) 등에 관계된 일을 맡아보게 된다. 승정원에서 관계한 일이 계품(啓稟)·전지(傳旨)·청패(請牌)·제추(諸推)·정란(呈亂)·상소(上疏)·선유(宣諭)·전교(傳敎) 등에 관련된 일이므로 일기에 수록된 내용은 왕명출납(王命出納)·궐문감약(闕門監)·등연(登筵)·입시(入侍)·추국(推鞫)·정사(政事)·포폄(褒貶)·과시(科試)·병무(兵務)·제향(祭享)·동가(動駕)·의절(儀節)·사대(事大)·교린(交隣), 승정원과 다른 관직인 의정부(議政府)·대신(大臣)·사관(四館)·사관(史官)·옥당(玉堂)·분사(分司)·승전색(承傳色)·사알(司謁)·선전관(宣傳官)과의 관계 등이었다. 주서가 기록한 매일의 일기는 1개월분을 다시 정리하여 왕에게 재가를 받았는데, 재가가 있기 전에는 일기가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금지했다. 일기는 재가를 받은 뒤에 일기식으로 1개월에 1권을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내용이 풍부해져 2권이 작성되기도 했다. 기재방식은 1개월을 기준으로 각권 서두에 월별근강(月別勤講)·소대(召對)·개정(開政) 및 내전(內殿)의 동정을 적고 그 다음에 승지와 주서의 명단,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 실태를 적었다. 이어서 승정원의 구체적인 업무현황, 국왕 및 내전의 문안, 국왕의 경연(經筵), 승선원의 인사관계와 각 분방(分方)을 통한 품계와 전지(傳旨)를 실었다. 조선 전기의 〈승정원일기〉처럼 조선 후기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부분적으로 소실되거나 분실되어서 그때마다 보수되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가 사료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원래 주서는 재임 당시 공적으로 〈승정원일기〉를 만들어둘 뿐만 아니라 나중에 실록의 편찬에 이용할 수 있도록 사적으로 사초를 만들어두었고, 또한 보수에는 사초 이외에 〈일성록〉과 조보(朝報)·각사등록(各司謄錄) 등 기본사료와 관인의 일기·문집 등이 이용되었으며 항목마다 그 출처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원래의 것보다는 소략하겠지만 어느 면에서는 원본에서 누락된 부분이 보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일성록〉·〈비변사등록〉과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에 기본 자료로서 이용되었고 실록에 앞서는 1차 사료로서 평가되고 있으며, 〈일성록〉에 비해 분류는 산만하게 되어 있지만 매일 국정 전반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을 전부 알려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잠정 목록은, ㅇ강진 도요지,ㅇ설악산 천연보호구역,ㅇ남해안...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이유

위 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기준에 따라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유 밑에꺼 제외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의 ‘가야고분군’이...

세계 유산 보호와 보존을 위한 현재

세계 유산 보호와 보존을 위한 현재 국가에서 진행되는 연구 방안들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세계 유산 보호와... 이러한 연구들은 세계 유산을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북한에 세계유산이 있나요?

북한에 세계유산이 있나요?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요? 안녕하십니까. 통일부... 북한의 세계유산으로 고구려 고분군(2004), 개성 역사유적지구(2013)이 등재되어 있으며...

갯벌이 세계유산등재되려면 어떤 과정

갯벌같은건어떤과정을 통해서 세계 유산등재가 되는 거에요? 세계유산등재는 다음의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1. 제안 및 신청: 세계유산 등재를 원하는 지역이나 문화유산은...

이것도 세계유산 인가요?

... 이것도 세계유산인가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세계유산 알려주세요 [질문]... 이것도 세계유산인가요? [답변] 질문자 분께서 문의 하신 세항목 모두 세계유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