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MF 경제위기 진행과정

한국 IMF 경제위기 진행과정

작성일 2018.05.02댓글 2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우리나라가 IMF경제위기가 오게 된 원인과 해결까지의 진행상황을 알고싶어서요

꼭 부탁드립니다.

원인부터 해결까지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또 IMF가 올수도 있다는데 어떻게 해야하나요?


#한국 imf #한국 imf 기간 #한국 imf 극복과정 #한국 imf 금모으기 #한국 imf 환율 #한국 imf 디시 #한국 imf 외환위기 원인 #한국 imf 위기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개요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맞이한 최대의 국난
미국은 9.11 테러로, 일본은 거품경제 붕괴로, 대한민국은 이 사태로 21세기를 시작하였다.
1997년 대한민국 각 기업의 무분별한 과잉투자와 이를 방조한 국가의 금융정책, 외국 단기자본의 공격으로 일어난 대규모 외환위기를 말한다. 이때 파산 일보 직전까지 갔던 대한민국 경제는 10년간 호황 경기 시절 동안 쌓았던 자본이 거의 사라졌고, 대규모 실직과 무더기 부동산 매각으로 인해 중산층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뼈를 깎으며 감행한 구조조정의 결과는 전체적으로 자산양극화와 노동양극화가 극심해져, 지금도 대한민국 경제는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청년실업의 만악의 근원.


◇ 배경
먼저 배경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1997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전체에 닥친 것이다! 1997년 여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부터 시작한 외환위기는 같은 해 가을 한국을 연쇄적으로 강타했고, 직접적인 경제위기까지는 아니었던 중국과 일본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 사태를 한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발생한 동일한 사태를 묶어서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라고 칭한다.

1980년대 말 일본의 부흥에 힘입어 동아시아에서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이 그 뒤를 쫓아 치고 오르고 있었고, 그것을 본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이 따라하기 시작한 이른바 안행효과(雁行效果)가 일단 세계적 흐름의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의 버블 붕괴가 시작되면서 3저 호황으로 경제성장률이 오르기 시작했고, 각 나라들이 수출주도형 국가를 꿈꾸며 따라하기를 시작하였는데, 기본적으로 당시 수출주도형 국가들의 시스템은 자기 자본이 없는 국가지만 외국자본을 많이 도입함으로써 자국 화폐 가치를 평가절하해 그 반사이익으로 수출의 증대를 노려 그렇게 생산되는 제품들을 통해 생산기술력 증가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하여 결과적으로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이끌어 내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계속해서 잘 굴러가게 되면 자국의 자본이 적더라도 외국 자본을 통해 외국의 설비를 들여와 자국의 생산기술을 올리며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기초과학과 기본기술을 올려 생산설비의 자체제작도 노려볼 수 있는 괜찮은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미 그렇게 성장해 온 나라로서 일본과 한국, 대만이라는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아주 좋은 케이스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이 경우 수출의 증대 를 통해 자국의 국가경쟁력이 강화 되면 자국의 화폐가 평가절상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경상수지 적자 상황이 나기 때문에 환율조작을 통해 다시 강제적으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시켜야만 다시 수출을 할 수 있게 되고 경제가 굴러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기업고정자본형성라는 고정투자로 투자 증가로 인한 경기확장으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이는 물가안정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경상수지와 경제성장률을 높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은 1996년에 GDP의 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를 맞았고, 정부는 사치성 수입재가 원인임을 해명하며, 투자로 수출을 늘리는 투자조치를 취했지만 실패한다. 게다가 1997년 1월, 미국에서 금리 인상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미국 내수가 축소되는 동시에 미국 수입이 감소되어 수출주도형 국가들이 수출을 할 장소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산된 물품을 판매하는 것은 고사하고, 달러의 금리 인상을 통해 외국자본을 대량으로 유치한 국가들은 갚아야 할 돈이 늘어나는 사태를 맞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수출을 늘리기 위해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 시키는 순간 갚아야 할 돈이 더더욱 크게 늘어나는 상황도 맞게 되었다. 화폐의 평가절하를 못하게 되자, 기업들은 경상수지 악화를 견뎌야만 했고, 일시적인 수출량 부재에 이어 전에 계약해둔 수입물품들의 수입으로 인해 유동자금 경색이 시작되어 재고품을 덤핑 판매로 자금을 수혈했으며, 최후의 보루로 단기부채를 끌어오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외채 상환은 해야 하는데, 당장 갚을 외화는 없어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문민정부가 IMF에다 "돈 좀 빌려주세요. 곧 갚을게요."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2008년 그리스 경제 위기 같은 사건까지는 아니어도 엄청나게 큰 재앙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즉, 외환위기 사태 발생 전인 1996년까지의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라고 불리던 시절을 누렸다. 잃어버린 10년을 겪던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전망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결국 외환보유액 부족과 여러가지 경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게 되면서 현대의 대한민국 경제에 크고 작은 악영향을 끼친다.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면서 자랑했으나 실상은 정부 발표 외환보유액의 5배를 족히 뛰어넘는 17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채가 국민들을 절망케 한 사건이다. 돈을 함부로 빌리면, 그리고 외환을 적정 수준으로 보유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다. 자세한 것은 이 기사를 참고.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0월과 11월 사이 정부는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118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다. 이 통에 대외부채상환용 외환마저 모두 다 써버려서 추후 있는 외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서 말한 300억달러 유지는 사실상 11월을 지나면서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전이었다.

1997년 12월, 사태가 시작되기 직전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98년 1월이 되자 실업률은 한달만에 무려 1.4%P나 폭등하여 4.5%까지 폭등하고 한달만에 무려 3300여개의 기업이 줄도산한다. 다음해 2월이던 1999년 2월, 실업률은 무려 8.7%에 달해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감소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여파가 미쳐 취업난은 한국경제를 괴롭히는 주요 문제다.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직장인과 근로자들이 임금도 못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준다.

경제위기 이전에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던 대한민국은 경제위기 이후 한동안 벼랑 끝으로 추락했다. 단기간에 회복하긴 했지만 사회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후유증을 불렀다. 예를 들면 자살률의 급증, 가정의 붕괴와 이혼, 가족 해체, 출산율 저하, 양극화, 고용불안, 청년실업 등등의 암울한 그림자를 남겼다. 이 문제들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하나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진행형 문제들이다. 이렇게 한 국가의 미래를 한순간에 뒤바꿔버린 사건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외환위기가 거진 20년 가까이 지난 2017년 이후에도 그 원인 규명에 대해서는 다분히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당시 가계저축률 감소 추세를 수치로 보면, 92년에는 17.5%였던 것이 97년 12.6%로 줄었다. 물론 가계저축률 12.6% 수준이 과소비라면 겨우 3% 대를 깔짝거리는 지금은 초 과소비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서민들은 '경기 침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했으나, 현재는 경기침체는 물론이고 가계 소득이 악화되었으며 생필품 가격은 OECD에서도 탑클래스를 달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당시에는 웬만해선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면 오히려 중산층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저축률이 3% 대로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외환위기 이전의 가계저축은 실제로 감소했다기보다 사회보장부담의 증가에 따라 가계저축이 정부저축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부저축률은 1982년에 5.5%를 달성한 이후 1997년에야 겨우 10%였다.


그리고 가계저축률 하락에 발을 맞추듯 총저축률 역시 감소추세에 들어가고 있던 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부동산 상황을 보면서 부동산 광풍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것이 1996년도를 제외하면 주택가격이 그리 오르지 못했다. 이는 1990년대 이후로 신도시 건설을 통해 주택이 대거 공급되면서 80년대 후반의 부동산 상승세가 진정되면서 주택가격이 안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단, 상승세가 진정된다고 높아진 가격수준이 낮아지고 물류비용이 감소하는건 아니다.) 부동산 광풍이 원인이라면 차라리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경제성황이 어려워졌어야 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임금 인상투쟁이 상당히 벌어졌고 그 덕분에 고용도 안정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정부와 언론사들은 파업에 대해 우호적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내수는 급속히 신장되긴 했다. 하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이러한 진단 때문에 오히려 현재에도 별로 안 좋게 작용하는 것도 많다.


◇ 원인

1. 정권 홍보차원의 다량 외화방출
김영삼 정부는 1995년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996년에는 이른바 '선진국 모임'이라 부를 수 있는 OECD에 가입하였다. 이를 정권차원의 치적으로 여기고 있는 김영삼 정부는 국민소득 1만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원화가치 고평가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환율시장에 개입하여 수시로 다량의 외화를 시중에 방출하였다. 1997년 10월말에 외환보유고는 305억 달러였으나 12월 말에는 204억 달러로 무려 약 1백억 달러가 줄어들었는데 원화고평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방대한 외환보유고를 시중에 푼 것이다. 당시 외국인투자는 일본이 가장 많이 하였는데 외환위기의 징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은행들은 채권을 회수하여 달러로 바꿔가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에 덩달아 다른 나라들도 채권회수에 열을 올려 달러부족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2. 대기업의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화
외환위기의 주범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그로 인한 금융기관의 부실화였다. 그러니까 교과서에서 지껄이는대로 서민들 탓이 절대 아니다. 서민들이 소비를 많이하면 그만큼 경제가 살아나면 살아났지 무너질 이유가 없다. 대기업이 얼마나 빚에 의존해서 경영을 했는지는 30대 재벌 기업의 평균부채 비율이 자기자본의 5배를 넘었다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1998년 4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총 자산을 기준으로 삼아 30대 기업집단을 새로 지정해 발표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들 신규 30개 기업집단의 1997년 말 총 자산은 435조 3천억 원으로 1년 동안 24.96% 증가하였다. 이는 환차손에 따른 부채 증가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자기자본은 오히려 1조 8천억 원이 줄었다.

이에 따라 30대 재벌 계열사 중 금융/보험사를 뺀 804개의 부채 총액은 1996년 말 269조 9천억 원에서 1997년 말에는 357조 4천억 원으로 급증하였다. 평균 부채비율이 386.5%에서 518.9%로 치솟았던 것이다. 반면 총 자산에서 자기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20.6%에서 16.2로 급하락하였다. 이 중 한라(-5천 7백억 원)와 진로(-5천 3백 60억 원)는 자기 자본이 마이너스 상태이며 뉴코아(1,793%), 해태(1,507%), 아남(1,275%) 등은 부채 비율이 1천%를 넘었다. 이에 비해 롯데는 부채 비율이 216.45%로 가장 낮았으며, 동국제강, 동부, 동아, 삼성, 쌍용, 한솔, 강원산업 등이 300%대를 나타내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00%의 부채비율은 결코 건실한 것이 아니다. 부즈/앨런&해밀턴의 <한국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개혁을 이룬 국가에서 우량기업은 대부분 부채 비율이 100% 이하라고 한다. 외환위기 뒤 들어선 김대중 정부조차 재벌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출 것을 요구했는데, 최소한 200% 이하로 낮춰야 무한 경쟁의 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단 얘기다. 이런 식으로 보아 한국의 재벌들은 국민이 저축한 돈을 끌어다 덩치만 키운 부실 덩어리, 즉 '허풍선'에 불과했던 것이다.

재벌들이 허풍선에 불과하단 것은 기업의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당장에 나온다. 단적으로 1998년 3월 20일 증권거래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2월 결산법인 510개사는 평균적으로 1997년에 1천원어치를 팔아 10원을 손해 보는 헛장사를 했다. 이들 기업의 전체 매출은 1996년에 비해 19.5% 늘어난 441조 2,743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순이익은 1996년 3조 8천여억 원 흑자에서 4조 5천 5백43억 원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이 중 26개 은행의 적자 규모가 3조 8천여억 원에 달해 전체 적자의 84%나 차지하였다. 기업의 차입 경영과 연속되는 부도에 따른 은행 경영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실제로 1997년 말 조흥, 한일, 제일, 상업, 서울, 외환, 신한, 국민은행 등 8개 시중은행의 무수익 여신은 35조 7천 7백억 원으로 은행 총 여신 2백 52조 5천 8백억 원의 14.2%를 차지하였다. 그만큼 부실채권을 떠안고 있어 은행 대출이 위험하다는 증거이다.

국내 은행들의 부실한 경영 상태는 외국계 은행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997년 한해 동안 국내 우량은행으로 손꼽히는 주택, 국민, 신한은행의 당기 순이익은 각각 1천 83억 원, 1천 44억 원, 5백 33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세 은행의 당기순이익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의 흑자를 미국계 은행인 시티은행이 냈다.

은행감독원과 금융계의 자료에 따르면 1997년 국내 26개 은행 중 18개 은행이 무더기 적자를 낸 것과 달리, 외국계 은행들은 사상 유례없는 흑자를 기록했다. 시티은행은 당기순이익이 2천 6백억 원에 육박하여 1996년에 비해 186%의 증가율을 기록했으며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당기순이익이 9백 80여억원으로 전년도 대비 307%, 체이스맨해튼 은행은 750여억원으로 46% 가까이 증가했다. 하지만 97년이면 닷컴버블붕괴 전이며 당시에 엔론과 월드컴과 같은 에너지,통신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해가며 부풀린 매출로 잘나갔던 버블기였으니 단순히 미국은행들의 경영상태가 한국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라곤 보기 어렵다. 1997년 한 해 동안 기업 부도가 도미노 현상처럼 이어지고 경기와 주가가 바닥을 치는데도 외국계 은행들의 순이익이 급증한 것은 무엇보다도 달러화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경영 기법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문민정부 5년 동안 국내 은행과 이들 은행의 순이익 추이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내 시중은행의 순이익이 1994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하강한 반면, 위의 외국계 은행들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유지한 것이다.

국내 은행들의 이런 경영 부실화는 기본적으로 관치금융에서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은행 등 금융권은 그 자체가 금융산업이기보다는 경제 개발을 위해 일반 기업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관치금융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WTO 체제와 같은 무한 경쟁의 국제화 시대를 맞아 국내 은행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금융산업으로서의 경쟁력과 경영 노하우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바로 국가와 금융기관의 신인도와 연결되었고,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렇듯 한국 경제의 추락은 약간 멀리서 보면 일본 노무라증권 금융연구소의 분석가 히라누마 마코토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1987년 6.29 선언 뒤의 자유화와 자율화 10년간 근육질의 경제 구조를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업들이 자유화 후 국제 경쟁력을 높이지 못한 게 결정적 요인인 것이다.

또 그는 1992년 이후 재벌을 필두로 경제 전체가 단기외화 차입에 지나치게 의존한 게 중기적 요인이라 하며 "철강 분야의 포항제철이 한국의 유일한 세계 유일의 초일류기업일 뿐, 그 외엔 세계적 기업이 없다"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아무리 반도체나 자동차 분야가 기간산업이라 하지만 세계적 메이커랑 거리가 멀다고 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기간산업을 재벌에 의존해 재벌들이 모든 업종에 손을 대는 이른바 '풀세트주의'로 사업을 구상하는 바람에 우량 전문화 기업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다.

그는 재벌 그룹들이 기술자립을 위한 독자적 연구개발(R&D) 대신에 "기술은 사오면 된다"식의 손쉬운 기술도입을 통한 성장전략을 택한 것 역시 대기업 실패의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으며, 더불어 재벌들의 방대한 상호지급 보증과 재벌총수에 의한 봉건적 경영이 파탄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하였다.

3. 원화가치 고평가와 경상수지 적자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국의 금리인상과 이에 따른 달러인덱스의 동향은 원화가치 하락을 예상케 했는데, 당시 김영삼 정부는 원화가치를 방어하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화가치를 방어한다는 말은 달러보유고를 내다 팔아 시장에서 원화가치를 지킨다는 것이었고, 달러보유고는 결국 무역수지 흑자와 외국자본의 투자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금리인상은 기본적으로 달러의 유출에 무게를 얹는 신호였다.

이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원화의 평가절하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회의적 예측을 하게 만들었다. 또 원화가치 고평가는 한국 기업들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수출부진에 따라 현금흐름에 위기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의 경상수지는 1996년 - 229억달러로 막대한 적자규모를 기록하게 된다. 이러한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은 외국 투자자들이 국가경제의 펀더멘털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만들었다. 이러한 회의감이 누적된 차에 태국의 바트화 위기가 심리적 트리거로 작용하면서 투자 자금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었고, 이에 한국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원화 가치 붕괴와 연쇄도산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4. 외환보유고의 비상식적 운용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한국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돈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앨런 그린스펀(美연방준비위원회 의장)

각국의 중앙은행은 갑작스러운 대외결제의 증가에 대비하여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행은 보유외환을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보유하지 않고 시중은행에 예치하였고, 시중은행 역시 이를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운용하지 않아 한국은행이 이를 국제결제에 사용할 수 없었고, 신용공급이 중단되자 갑작스런 외환부족에 대처할 수 없었다.

5. 외화자산과 부채의 만기갭(maturity gap)
당시 난립했던 비은행금융기관, 이른바 종금(종합금융회사)들은 단기자본을 도입하여 장기대출로 자금을 운용하였다. 이와 같이 자금의 조성과 운용의 만기가 불일치하는 것을 자산-부채 미스매치라고 하는데, 이 때 단기차입자금의 만기가 도래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만기불일치는 당시 외환업무에 경험이 없었던 종금사들의 경험부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장기 외화차입보다 단기 외화차입이 금리가 싸고 차입이 쉬웠기 때문에 단기 차입금의 리스크도 제대로 모르고 닥치는대로 차입해서, 다시 수익성이 높은 장기대출사업에 사용했던 것이다. 외화유동성 부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동남아 외환위기의 여파가 한국으로 다가올 때, 종금사들의 자금난은 한국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은행들의 단기차입마저 끊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 IMF의 구제금융과 가혹한 구조개혁 요구

정부는 1997년 11월 12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동년 12월 3일 IMF는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승인했고, 더불어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개발은행이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여 총 350억 달러의 국제기관의 지원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12월 4일 긴급히 55억 달러가 공수되었다. 그리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가 지원을 결정함으로 200억 달러가 추가로 지원되어 총 550억 달러를 지원 받았다. 이 중 일본은행에서만 100억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다. 여기까진 '국제통화기금' 이라는 단체명에 걸맞는 아주 시기적절한 조치였다. 하지만 IMF의 구제금융 210억달러가 한국에 유입되는 조건이 세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고금리, 다른 하나는 구조조정, 또 다른 하나는 공공재 영리화이었다.

첫째, 고금리. 시중 은행의 금리를 연 29.5%까지 올려야 했다. "고금리로 자본유입을 늘린다."는 명분이었지만, 무수한 기업이 도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금리가 인상되면 시중의 화폐유통이 경색되어 단기적으로 경기가 악화된다. 물론 실물경제 자체가 파탄나지 않는 한 단기적 악화는 원상회복이 될 수는 있으나 당장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 언제 원상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시까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확장을 거듭해온 국내기업들에게 초고금리는 기업의 부채상환부담을 가중시켜 연쇄부도를 발생시키고, 대량의 실업과 경기후퇴를 유발하였다. 결국 고금리정책은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정부는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에서 인수 가능하게끔 하는 금융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IMF와 재협상해 이율을 낮추는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고금리정책의 이론 상으로는 "경기과열로 인한 물가상승 방어" 혹은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된 국가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약"이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확인사살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극약처방이기도 하다. 또한 고금리 기조로 부채는 그 6개월간 오히려 더 늘었으며, 명예퇴직 후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개인사업자들은 높아진 이자를 갚기위해 차환기채를 할 수밖에 없을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채권시장은 "미약하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어려울만큼 비활성화 되어있었으며, 여기에 투자자들의 자본 유출이 애초에 금리때문이 아닌, 동물적 감각에 의한 위험회피 목적임을 감안하면 현실성, 적절성 측면에서 비판이 나오는게 자연스러운 일. 결정적으로 애초에 당시 죽을 쑤고 있던 주식시장으로 유입된 극히 소소한 외환이 고금리로 채권시장에 유입된 양보다 많았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한지... (결론적으로 외국 자본의 배만 불려준 셈) 게다가 고금리는 외자가 급했던 DJ정부의 다른 정책과 맞물려 현재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일본 대부업자본에 한국 시장을 열어준 것이다. 이 시기 일본정부는 때마침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쿠자들의 자살보험 이용을 막기 위해 이자제한법을 만들었고, 그 영향으로 야쿠자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사채 사업의 수익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 구미는 전통적으로 사채 관련 사업에 영향력이 있었던 나고야 계열 조직들의 입지를 크게 흔들었다. 야마구치 구미는 일본내에서 재일교포의 비중이 높았고, 이들 조직원과 간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보유한 한국 내 커넥션을 활용하여 한국 사채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이자제한법 폐지를 진행하였고, 살인적인 고금리와 맞물려 일본계 사채업자들은 야쿠자조직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토종 대부업체들을 싸그리 밀어내버리고 사업을 독점하게된다. 실제로 당시 가장 먼저 한국에 진출한 기업중 하나인 아프로파이낸셜 대부(현재는 러시앤캐시로 유명한 기업)는 J&K 캐피탈이라는 일본쪽 페이퍼컴퍼니가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곳의 최윤 회장은 현재는 한국인임을 전면에서 강조하고있지만, OK저축은행 문제로 국적건이 논란이되기전만해도 나고야 출신 및 나고야 대학원을 다녔다는 기록이 계속 남아있었다. 결국 20년 정도가 되어 가는 2010년대에는 상장기업을 인수 경영하고, 기업인수합병의 큰 손으로 행동하고 증권, 저축은행을 인수해 경영하는 데에 이르렀다.

둘째, 구조조정.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굵직한 공기업들을 민영화 함과 동시에, 당시 공공부문 전체 인력의 20%인 14만 1천 명을 감원 하였다. 그리고 대기업에서도 구조조정의 이름을 내걸고 명예퇴직,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나올만큼 한국이 정말 막대한 빚으로 망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2008년 ~ 2015년 연간의 일부 유로존 국가들처럼 진짜 돈이 없는 경우와, 돈은 있는데 당장 상환할 외화만 부족했던 경우가 다를 수 밖에 없는 만큼, 그 적절성 여부를 놓고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전 산업계에 걸친 구조조정 유행으로 나온 것이 사내하청과 아웃소싱이다. 직영과 정규직을 줄이고 다단하청과 파견직과 비정규직을 대폭 늘리게 되었으며, 9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하던 낙수효과를 완전히 끊어 소득 양극화를 뚜렷한 사회현상으로 노출시켰다. 2010년대 노동관계 부조리의 많은 내용이 여기서 시작한다. 다소 성과가 있었던 부분은 해외 빚쟁이들 채권자들, 특히 일본과의 채무조정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IMF가 한 역할은 미미하며, 포항제철 시절부터 대표적인 지일(知日) 인사인 박태준 전 국무총리가 협상에 나서서 이끌어낸 성과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금융가 어르신들의 탁상공론의 끝을 보여줬으며 차라리 채무재조정 외에 자금수혈. 만약 그것이 안되더라도 거시경제적으로 방임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돈 주고 너희 알아서 해결하고 돈 갚아라 하는게 상책이었다는 소리 고금리 정책이 아니었다면 비록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6.9%라는 재앙적 수준은 아니었을거다. 경제회복은 어차피 드라마틱하게 폭등해준 환율이 수출을 통해 이끌어 내주었을 것이고...

셋째, 공공재 영리화. 이집트의 빵 보조금 폐지, 볼리비아 수도 영리화 등에서 보듯 한국에서도 전기, 가스, 수도, 의료, 철도 등의 공공재를 정부가 아닌 기업에서 운영하도록 하였다. 참고로 이 부분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상태다.

이렇듯 가혹한 구조조치로 인해 오죽하면 사람들이 IMF를 조선총독부에, 감독관을 총독에 비유할 정도였다.



◇ 영향
1. 경제적 영향
IMF 주도의 신자유주의 처방을 받으면서 혹독하게 경제체질이 바뀌었다. 문민정부는 '세계화'를 외치며 신자유주의를 따르자고 했지만, 정작 한국 내의 모든 경제주체는 아무 준비도 없이 정부주도 하에 무한경쟁하는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구조조정을 통해서 많은 기업들이 망했지만 살아남은 기업들은 더욱 강해졌다. 이 시기의 대기업들에 대해서는 "저승사자"라 일컬어졌던 이헌재 금융감독원 위원장이 악역을 맡아, LG반도체 정리, 삼성자동차 매각 등 대기업들이 "확실한 시행이 전제된" 자체 구조조정계획을 세우도록 강하게 압박, 30대 그룹 전원이 5일 만에 구조조정 계획수립 및 제출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계획을 다시 이헌재가 수장을 맡은 은행감독원에서 심사해 미비점을 보완하도록 독려(?)하였다.

하지만, 공적자금 180조원이 투입되었는데, 그 중 70조원이 회수 불가 처리가 된 흑역사도 생겼다. 살려서 회수한 돈이 더 많았지만, 그 중에 살리는 데 실패했거나 일부는 제도 미숙으로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적자금 지원의 목적은 회사를 살려 업주에게 돌려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고용을 유지하고 산업생태계를 유지해 국가경제를 굴러가게 하며 회사를 살리는 데 있기 때문이었다. 회수 못 한 공적자금이라도 노동자 월급주는 데 들어갔다면 목적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쨌든 최선은 회사가 자립하도록 하고 고용을 늘리면서 지원자금도 회수하는 데 있으니까.

삼미그룹, 청구그룹, 해태그룹, 한라그룹, 한보그룹, 진로그룹, 쌍용그룹, 대우그룹 등 유명한 재벌기업들도 이 때를 계기로 모두 망하거나 해체되었다. 그리고 정주영의 현대그룹도 회사가 분할화되어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산업개발,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등으로 계열분리가 되어서 지금은 현대엘레베이터가 지주회사 역할을 맡고 있지만 현대자동차그룹에 아예 재계순위나 지위에서도 밀리는 편이다. 그 밖에도 동화은행, 대동은행, 평화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보람은행 등 여러 은행들도 모두 부도했거나 다른 은행과 합병되어 사라지기도 하였다.

다만 살아남은 기업들에게는 뼈아픈 충고가 되었다. 정말 300%~400%라는 (2010년대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부채율을 가진 건실한 기업들은 부채의 감축에 온 역량을 퍼부어 현재는 건실한 기업치고 100%를 넘는 곳이 드물고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면역력과 긴축경영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잃은 것에 비하면 적은 소득이지만...

다만, 외환위기 이전 시대 회사들의 수백 %가 되던 부채비율은 IMF이후 세대가 보면 기절할 노릇이지만 숫자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시각이다. 그런 부채비율을 가지고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과 매출과 고용이 계속 확장되던 때가 개발시대의 국내외 경제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 그것이 불가능해지고 있는데도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며 그런 부채비율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수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의 신흥국 시장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로 부채비율 하나에만 매여 있지 말고 그 나라 자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2. 정치적 영향
이로 인해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공약 당시 한국병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주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오히려 임기말에 한국병을 고치기는 커녕 한국병을 부르게 한 원흉으로 전락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아가며 퇴임하였다. 대선을 앞두곤 신한국당 지지자들이 YS 화형식까지 펼치며 현직 대통령을 당에서 쫓아냈다. 사실상 외환위기가 김영삼의 정치생명에 사형선고를 내린 결정타였던 것이다. 퇴임 이후에도 김포공항에서의 빨간물 계란투척 사건, 고려대학교 특강 무산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심지어 퇴임 뒤인 1998년 3월 당시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7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영삼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1위에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대통령 임기 초기인 1993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을 제치고 무려 인기유명인 1위에 올랐던 것을 생각한다면, 김영삼은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급전직하한 것과 다름없었다.

1997년의 이 참사는 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신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통해 IMF를 비롯, 국제 외교로 경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부분과 자신이 이미 대중참여경제론 같은 경제학 책까지 집필한 전문가였다는 것을 어필했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 하에서 정리해고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 진행되었다. 1996년 연말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로 도입된 유연화된 노동제도도 원래대로라면 다시 재검토 되어야 했지만 이 위기로 인해 일시적 유예만 거치고 즉각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 일시적 유예가 20년이 됐다(...)

정리해고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이전,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해 1997년 대선 유력 후보 3인(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모두에게 다음 대통령이 되면 IMF가 요구한 신자유주의적 조치를 따르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놓았던 데다가, IMF의 구제금융을 무조건 받아야만 국가 신용이 유지되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당선되었더라도 정리해고 조치와 공공재 영리화를 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빚쟁이의 말로 국민투표 해놓고 유럽의회가서 무릎꿇은 치프라스를 봐라

곁다리 얘기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내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가장 크게 내홍을 겪은 곳은 인도네시아로, 30년간 독재를 해온 수하르토 대통령이 시민혁명에 의해 물러났고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됐다. 인도네시아 치하에서 억압을 받던 동티모르가 독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덤이다.

3. 사회적 영향
3.1. 철도 및 항공 교통계
IMF 사태를 겪으면서 서울 3기 지하철 계획이 9호선과 3호선의 오금 연장을 제외하고 전부 폐지되었고, 부산 4호선과 5호선, 대구 3~6호선, 대전·광주 2~5호선, 인천 2~3호선, 부산 3호선 반송선(이후 4호선으로 분리된 그것) 등 수많은 계획들이 지연 및 변경되거나 폐지되었다. 많은 비용이 드는 당시 대부분의 지하 유인 운전 중전철 계획들은 현재 지상 무인 운전 경전철(모노레일 포함) 계획으로 대체되어 각지에서 건설되거나 운행되고 있다. 신남역같은 막장환승역이 생기게 된 건 이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같은 경우는 1호선을 추후 계획 노선들의 환승용 보조 노선으로 먼저 착공하였지만, 2~5호선의 추후 계획이 전부 취소됨에 따라 1호선만 제대로 추진되어서 공기수송하는데 재정 부담의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 지금 광주광역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2호선이 개통되면 1호선 상황이 달라질수도..? 또한 고지가 눈앞이던 경부고속선 공사 또한 외환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고속선 완공을 제시간에 이루지 못하였으며 대구~부산 구간은 도중 예산 절감으로 인해 고속선에 쓰이는 CWR공법을 쓰지않고 기존공법으로 레일을 깔았으며 이 구간의 고속선 공사가 끝날때까지 기존 경부선을 전철화시켜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가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래도 다른 국가,도시철도 계획들은 모조리 취소되었지만 고속철도 계획만큼은 정부에서 되도록이면 살리려 했다고 한다.

사실 국제통화기금이 전면적으로 각 지방자치단체의 도시철도 계획을 철폐한 것은 아니었다.지자체들이 도시/광역철도를 계획할 때 민자사업을 유도하여 당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구제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민자사업을 할 수 있을 법한 수준의 기업들이 외환위기 과정에 줄줄이 쓸려 나갔으므로 추진 주체가 없어셔 무산된 것. 나중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출자한 서울 지하철 9호선 정도만 부활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정부가 국고에 돈이 없는데 공공사업을 벌여 경기순환을 진작시킬 필요는 있었기에, YS정부때 시작된 민자사업 형태의 공공사업 집행을 DJ정부때 크게 확대해 도로망을 확충하는 등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시행착오가 많아서 눈뜨고 코베이는 상황을 자초하기도 했고, 지역 정치인과 발주자와 채권자와 평가용역기관이 돈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것은 DJ정부 말기에 가서 고치기 시작했고, 이후 정부는 민자사업을 엄격하게 심사하고 이미 집행된 사업에 대해서는 부채 재조정 등 뒷처리에 힘쓰는 처지가 되었다.

항공 교통 측면에서도 타격이 심했는데 수 많은 외국 항공사들이 이 당시에 한국 노선을 단항하거나 운항 횟수 또는 운항 항공기 규모를 축소시켰다. 이 때 철수한 다수의 외국 항공사들은 IMF 사태가 극복되고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후 하나둘씩 한국 노선 운항을 재개했지만 아직도 여러가지 이유(대형 한국 국적사들의 텃세,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보다 작은 시장 규모, 안보 리스크 등)들을 이유로 복항하지 않고 있는 항공사들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콴타스와 에어 뉴질랜드 등이 있다. 그리고 대형 한국 국적사들도 이때 이용률이 저조한 상당수의 노선들을 정리했다.

3.2. 스포츠계
KBO 리그의 경우, 모기업이 직접 부도를 당한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를 팔아서(혹은 선수 임대) 연명했고, 이 때문에 하위권을 전전했다. 해태는 2001년 시즌 중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되어 KIA 타이거즈로 재탄생했고, 쌍방울은 아예 팀이 해체되어 SK그룹이 자유계약이 된 쌍방울의 선수단 및 지명권을 인계하고 SK 와이번스로 재창단했다. 즉 실질적으로 쌍방울을 흡수했으나 형식적으로는 구단 자체를 인수한 게 아니다. 이 때문에 인천 야구의 정통성 논란이 터지게 되었다. 

K리그의 경우 부산 대우 로얄즈가 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됐다. 부산 아이파크는 대우 로얄즈 시절 축빠이던 대우의 김우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안정환, 김주성 등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앞세워 K리그 최고의 인기구단중 하나이자 강팀으로 군림했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의 도산으로 구단 해체 위기까지 갔다가 간신히 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된 이후로는 기업구단답지 않은 투자로 점차 상위권에서 밀려나더니 끝내는 2015년, 기업구단 최초로 2부리그인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됐다. 야구도시로 알려진 부산이지만, 롯데 자이언츠 이상의 인기를 누리던 90년대 대우 로얄즈를 생각해보면...

대전지역의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창단했던 대전 시티즌도 계룡건설을 제외한 다른 구성 기업들의 도산으로 계룡건설의 후원으로 근근히 버티다 끝내 2006년, 완전한 시민구단으로 전환했다. 시민구단화 이후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역시 2부리그나 들락거리는 신세. 이 여파는 실업축구라고 안심할 수는 없어서 1997년에는 국민은행 축구단과 한일은행 축구단, 기업은행 축구단, 이랜드 푸마가, 1998년에는 (구) 할렐루야 축구단과 한일생명 축구단, 주택은행 축구단이 모두 각각 해체되었다.

프로농구의 광주 나산 플라망스도 역시 모기업이 망해서 이후 골드뱅크-코리아텐더로 2단 변신 후 2003년 말 KT에 인수되게 된다. 한편, 여자농구의 경우 남자농구가 프로화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로화에 의지가 없는 팀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프로화를 준비했으나 IMF 이전에 13개 팀이었던게 5개 팀으로 반토막 이상이 나는 후유증을 겪게 된다. 실업 리그였지만 거의 프로리그나 다름없었던 배구 역시 전설의 남자배구팀인 고려증권 배구단이 모기업의 부도로 1998년을 끝으로 해체됐고, 여자배구는 더욱 더 심한 상황이었던지라 9개 팀이 5개 팀으로 쪼그라드는 암흑기를 맞았다.

민속씨름(프로씨름)의 경우 1997년에 부산조흥금고 호랑이, 세경진흥 사자(구 삼익가구 사자)가, 1998년에 일양약품 원비, 청구 청룡, 1999년에 동성 백호(구 한보 멧돼지), 진로 두꺼비가 각각 해체되었다.

이 사태로 인해 올림픽에서 매회 금메달 따는 비인기 종목들도 안전할 수 없었다. 1997년에 국민은행은 테니스팀과 사격팀을, 기업은행은 자사의 사격팀을, 해태그룹은 자사 역도팀을, 동아그룹은 자사가 자랑하던 동아생명 탁구단을, 외환은행이 여자 탁구팀을 각각 해체한 걸 필두로 1998년에 제일제당은 자사의 마라톤팀, 쌍방울은 자사의 마라톤팀과 석탑건설 아이스하키단을, 조흥은행은 사격팀을, 1999년에 주택은행은 자사의 사격팀을, 2000년에 대우중공업은 자사 테니스팀을 각각 해체했다. 그 여파 때문인지 몰라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평소 10위권보다 낮은 종합 순위 12위라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3 문화계
문화계도 심한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 산업 특성상 국민생활이 윤택해야 꽃피는 게 문화인데 이 때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특히 환율에 영향을 받는 외국 뮤지션 공연의 경우 갑자기 뛰어오른 환율 때문에 공연기획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물론 1998년 메탈리카 내한 때처럼 기획사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개런티를 25만 달러나 깎아주는 대인배적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 분야는 투자자나 유통사들이 대거 발을 빼면서 기존의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겪기도 했다. 특히 1998년에 방송된 국산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의 경우, 당초 반응이 좋으면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한 시즌 2 제작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흥행도 좋은 편이었으나 이 사태의 여파로 인해 그대로 시즌 2의 계획이 엎어져버렸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TV 방영을 시작한 바이오캅 윙고는 삼성그룹 계열의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였지만 역시 외환위기로 삼성그룹이 해당 사업을 접게 되면서 이후 VHS 타이틀로만 출시되고 DVD로는 아예 출시조차 되지 않은 채 잊혀졌다. 출판만화의 경우는 청소년보호법 파동의 여파와 외환위기 콤보로 1998년에는 성인만화잡지 <미스터 블루(세주문화)>, <매주만화(트루패밀리, <투엔티 세븐(도서출판 대원)>이, 2000년에는 <빅 점프(서울문화사)>까지 각각 폐간되었다.케이블 TV, 비디오 유통, 게임, 영화배급 등의 문화산업에 참여했던 여러 대기업들도 관련 사업을 접는 상황이 벌어졌다. 별도로 미디어그룹을 만들어 운영했던 삼성그룹도 케이블 TV를 중앙일보로 넘겼고 영화, 음반, 비디오 부문을 정리하거나 분사하였다. LG그룹 역시 게임사업부를 분사하여 현재의 한빛소프트로 분할 설립하였으며 비디오 부문은 정리하였다. SK그룹 역시 계열사 SKC 사업분야 중 하나였던 게임사업도 위자드소프트란 업체로 분사시켰으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비디오사업부는 정리되었다. 대우그룹도 비디오나 케이블 TV 관련 부문 역시 정리하거나 다른 기업으로 매각했다. 이후 CJ그룹 같은 기업 정도가 그나마 문화산업에 힘을 싣고 있으며, 당시 소규모였던 몇몇 연예 기획사들이 잇따른 아이돌 그룹의 대히트로 대형화된 상태다. 또한 대종상의 후원기업인 쌍방울이 부도나면서 1998년에 대종상이 일시적으로 폐지된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특기할만한 점은, 나라종금 등등 일부 종금사들이 일본에서 끌어온 단기 차관을 연장시킬 방안으로 일본에 문화시장을 개방해야 했다는 것이다. 경제난으로 투자 활력이 떨어진 문화산업계였던만큼, 이 조치는 큰 폭탄과 다름없었다. 이 무렵에는, 만화 분야처럼 사실상 준개방 상태에 있는 분야가 적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흡수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저력을 대통령 및 정부 관계자들이 언급하곤 하였다. 빚쟁이인 일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조처가 몇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 믿을 것은 우리 국민들밖에 없다는 걸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만큼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인 흐름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경제적 부흥에 힘업고 '신토불이' 등의 레토릭으로 서서히 강해지고 있던 일종의 국수주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걸 들 수 있다. 개인주의를 서구의 퇴폐적 풍습으로 여겨 배척하던 사회적 풍토가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않다. '한국적인 가치'에 대한 선호가 완전히 박살나면서 자국혐오나 미국병도 심해졌다.

그리고, 1980년대를 비롯한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레전드였던 가요톱10이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IMF 외환위기(구제금융) 때 "국민이 절망에 빠져있는데 연예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종영시켰다. 그 후 시청자들이 KBS에 전화를 하면서 항의를 하는 등, 후폭풍이 엄청나게 안 좋게 되자 KBS에서는 땜빵용으로 <브라보 신세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방송했지만 당연히 인기를 끌지 못했고, 다시 가요톱10의 뒤를 잇는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 뮤직뱅크가 신설되어서 1998년 6월 16일부터 현재까지도 방송을 하고 있다.

4. 취업시장
취업 시장은 구조 자체가 달라졌다. 원래 공무원은 대기업 직원보다 급여가 적어서 인기도 낮았는데, 외환위기 때문에 기업들이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직원들을 해고하는 일이 터지자, 어지간해서는 해고될 여지가 없는 공무원으로 돌아섰다. 한때는 경쟁률이 1:1도 되지 않았던 순경도 안정성 하나 때문에 사정이 달라졌다. (노량진에 집중되어 있는 여러 경찰학원들이 이를 입증해준다.) 이제는 공무원이 대기업 직원보다 어려운 지경이다. 직업군인도 신청만 하면 대부분 장기복무를 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경쟁자가 넘쳐나고 말았다.  2010년대에 국가직 9급공무원 지원자만 20만 명이 몰린다는 현상이 빙하기같은 취업시장의 모습을 방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경찰대학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인기가 상승하였다. 그리고 IMF 사태 이전에 몇몇 유명 기업 생산직들은 산업체 부설학교를 통해 고등학교 학력을 주는 조건의 중졸 사원 모집으로도 원서만 넣으면 합격을 넘어서 한번에 수십명이 미달이 날 정도였으나#, IMF 사태 이후로는 경쟁률이 크게 올라서 고졸은 물론이고 대졸자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실직자들은 자신이 애써 실직당했다는 것을 자신 혹은 주변에게 부정하고 싶어서 아침에 양복차림으로 출근하는 척하고 산에서 지내다 다니던 직장 퇴근시간 될때쯤 귀가하는 이른바 등산출근 현상이 언론지상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등산'을 '오락실'로 바꾸면 한스밴드의 히트넘버 '오락실'의 가사내용이 된다.
이 시기 이후로 대부분의 기업이 45세 전후로 차장/부장까지 승진을 못하면 명예퇴직을 강요했다.
당시의 취업시장 충격은 90년대나 2천년대 초반에 태어났거나 어린이였던 사람들에게는 그 여파가 청년실업 등으로 현재진행형이다. 더구나 호황이 아닌 불황과 어려움, 경제난 등만 겪으며(...) 양극화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세대는 위축된 가치관 문제가 심각하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 심각할 정도의 안정지향성 추구 등은 2018년 현재에도 계속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명문대 → 교사·공무원…'꿈'은 사치가 된 아이들, 극단적인 안정성의 추구로 어린 학생들의 선호직업도 10년째 교사가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꿈이나 소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상태이다. 반상진 전북대 교육학과 교수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IMF 이후 학생들은 꾸준히 공무원, 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됐고 최근 양극화 현상의 가속화와 맞물려 과도한 안정성을 추구하게 됐다”고 한다. 교육부가 발표한 조사결과에서도 청소년의 꿈은 행복보다는 ‘안정’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5. 물가
이 사태 이후로 그전까지 고정되었던 과자 등의 식료품 가격이 크게 인상됐으며 이는 훗날 과대포장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식료품의 가격인상, 과대포장, 가격담합 등의 문제점들이 IMF 사태가 일어난 해부터 크게 급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시 말해 이 사태로 청년 실업이 크게 늘어났는데 식료품 등의 가격도 덩달아 올라가버린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요식업계에는 IMF국밥 등 IMF 수식어를 단 염가메뉴들이 생겨났고(대표 유행 음식물로 롯데리아(대한민국)의 IMF버거),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IMF 드립도 성행했다. 반대로 고가의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 등 고급 식당들은 철수하거나 문을 닫았다.

6. 사회현상
IMF 사태 이후 한국은 매우 각박한 사회가 되었다. 청년층은 대규모 청년 실업에 마주치고 N포세대로 몰렸으며, 가족해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황금만능주의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인터넷 문화에 대한 얘기까지 곁들이자면, 사회학적 관점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막장스러운 인터넷 문화가 탄생하게 된 원인이 바로 이 사태 때문이라는 얘기까지 있다.

IMF 이후 출산율이 급전직하하게 되면서 초저출산 기조를 현재까지 유지하는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출산율 문서를 참조 바란다. 당장 1998년 신생아 출생이 1997년에 비해 3만여 명이 줄긴 했지만 다시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는가 싶더니 외환위기가 진정된 2000년 신생아(일명 즈믄둥이) 63만여 명을 끝으로 근 20년 가까이 신생아 60만 명선은커녕 오히려 2017년 현재는 40만 명선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결국 2017년 들어서는 우려대로 35만으로 떨어졌다. 물론 출산율 급락의 원인에는 육아시설 부족, 과도한 사교육 열풍 등의 원인도 있으나, 당장에 청년실업이 주는 충격 하나만으로도 출산율 저하의 큰 요인 중 하나임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 때문에 인구는 줄고 저성장이 예견되는 상황이라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노후 돈이 없으면 갈 곳이 없으니 절대 돈을 쓰지 않으며, 청년들은 돈이 없어서 못 쓴다. 이렇게 투자 가치가 높지 않은 시장인데다 일자리에 대한 수요는 공급을 한참 초과하고 있어 기업들은 인건비를 높여줄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다. 장기적인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갖고 있는 자산도 중국이나 미국 등지로 돌려야 할 판이다.

국내에는 최소한의 투자조차도 꺼리지만 반대로 중국이나 제3세계 신흥국들에는 대기업들이 앞다퉈 투자하는 것이 명백한 증거다. 기업은 장기적인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며 신흥국이라는 대안도 존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동안 가장들의 수입으로 가정 경제를 꾸려가던 구조였으나, IMF를 기점으로 하여 주부들이 취업시장에 대거 뛰어들게 됐다. 그래서 IMF 이후에는 맞벌이가 이전 시대와는 달리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부모님이 돈을 벌러 나가게 되면서 아이들만 집에 남게 되는데,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게 엇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심각한 경우는 가장의 경제적 무능이 큰 문제가 되어 부부간의 이혼이 늘어나 가족 해체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 당시 초중고교를 다녔던 1980년대~1990년대 초반 태생의 사람들은 이 시기에 본인의 가정에건, 주변에서건 IMF 때문에라는 이유로 여러 안 좋은 일을 겪거나 봤던 경험이 한 번쯤은 다들 있던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파급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진짜 막장이었던 사건들은 바로 자해를 한 뒤, 폭력 범죄의 피해자인 것처럼 신고해서 보험금을 받으려다가 들통나버리는 사건도 많았다는 것이다. 한 택시 기사는 택시 강도를 당한 뒤 범인들이 자신의 발을 기차 선로 위에 고정시켜 놓고 도망가는 바람에 발이 잘렸다고 해서 뉴스에 실렸으나... 결국은 얼마 못가 자기가 보험금을 노리고 한 짓이었음을 자백하고 말았다.

또, 1998년에 경남 마산의 한 가정에서는 아빠와 어린아들만 있던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돈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다가 그 집 아빠가 돈이 없다고 하자 진짜로 자르고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도 알고 보니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가 친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뒤 강도 사건처럼 신고했다는 게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IMF에서 금융위기에 빠진 우리나라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 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이자율 상한선 폐지를 권고하자 이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고리 대금업이 성행하여 엎친데 덮친격으로 돈없는 서민들이 더욱 고통을 입었다. 얼마나 심했으면 연 2000%가 넘는 살인적인 이자율이 나왔을 정도. 

1998년에는 금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또한 국민들이 동전 모으기 운동에 동참해 너도나도 집안 곳곳에 있는 동전을 모으다 보니 동전이 쏟아졌고, 그 여파로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에는 오백원 주화가 전체 통틀어서 8,000여개 밖에 발행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 외국인이나 한국은행 직원들에게 주는 민트세트로 발행하였고, 현재는 수집상한테서 대략 기본 5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특히 사용하지 않은 것은 10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이외에 교육 분야에서도 대다수의 초, 중, 고교들이 통폐합되거나 분교장으로 격하되었는데, 특히 1999년도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외에 대학교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없어진 대학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전문대학인 세무대학이 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1999년을 끝으로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고, 최종적으로 2001년에 폐교되었다. 그리고 국군간호사관학교도 같은 이유로 사라졌다가 2001년에 되살아났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도 이 무렵에 회자되었다. 정확히는 "total crisis"라는 영어의 번역. 이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표현과 더불어, 언어의 마술사 박희태 전 대변인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 말을 그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며 그냥 이 무렵부터 유명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세기말과 엮여서 그런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는 말도 자주 쓰이기도 했다. 사실 1997년의 외환 위기가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국가가 위기에 대응하지 못한 무신경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후에 IMF를 가까스로 넘겼으나 오히려 사회적으로 비윤리적인 사건이 증가하게 되면서 '모럴 해저드'를 많이 언급하곤 했다.

이미 언급했지만 7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외환위기의 원인이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정부와 기업의 잘못, 그리고 사치품 수입과 해외여행 자유화를 앞장서 누린 부유층의 "과소비"를 애꿎은 일반 국민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오히려 이 짤에는 소비가 늘어야 돈도 돌고 경제도 좋아진다는 진리가 쏙 빠져있다. 부실한 교과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제공해야할 교과서가 되려 거짓선동을 하는 판이다. 이 항목을 쭉 읽으면 알겠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국민 개개인의 과소비가 원인이 아니라, YS 정권의 '세계화' 정책의 대응 실패, 즉 시장개방에 따른 정부의 대응 미흡, 재벌들의 정경유착, 국가 경제체제의 구조적인 문제(펀더멘털)와 국제 투기자본의 자본 유동이 주 원인이라고 봐야 합당할 것이다. 그 덕분에 2010년도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수정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30대인 85~86년생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졸업예정이어서 수학여행을 가야하나 나라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학여행을 가지못하고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86년생들이 피해를 많이 봤다. 어찌보면 사회문제로 청소년들이 피해본 상황인것.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태어난 97~99년생들 또한 다른 심각한 문제들로 인해 초, 중, 고등학교의 수학여행이 계획만 세우는 단계에서 아예 없어져버리는 일을 겪게 되었다. IMF로 나라가 힘들던 시기에 태어나 또 다른 심각한 한국의 병폐로 인해 고통받게 된 케이스. 그 중 가장 심각한 일로 꼽히는 세월호 참사는 정부 관료의 입이나 언론에서 IMF와 엮여 표현되기도 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1997-1998년생이었으니...

거기에 IMF 사태가 일어난 것을 노조가 노사분규를 일으키고 과도한 임금상승 등의 압력을 넣어 기업의 비용부담을 증가시킨 것이라는 식의 교육을 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남탓하기의 끝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사태의 파장으로 저 바다건너의 먼 나라에서 또 다른 사태가 벌어졌다.


◇ 세계경제계의 변화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심한 구조조정 요구에 시달린 탓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역통화기금 창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통화기금 출범을 주창했을 정도. 그러나 IMF도 지역단위의 통화기금 체제가 들어서는 데에 딱히 찬성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어서 아시아만 통화기금기구 창설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2010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한중일이 공동으로 조성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 Mai Initiative)라는 금융협정이 공식출범하게 되었다. 총 기금 1200억 달러 중 중국, 일본이 각각 32%, 한국이 16% 그리고 동남아 10개 국가가 총 20%를 분담한다. 물론 구제금융이라는 것이 아무 조건 없이 제공될 수는 없겠지만 대안이 존재하다 보니 그리스처럼 진짜 작정하고 막장짓만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필요한 수준 이상의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구조조정 요구나 IMF가 작정하고 해당국가를 파산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IMF의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상기에서도 언급됐듯, 좁게는 대한민국이 맞이한 외환위기였지만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에 불어닥친 외환위기였을 만큼 그 후폭풍은 대단했다. 이 외환위기로 IMF의 개혁요구를 충실히 따른 대한민국의 사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국고를 풀어 내수진작에 힘을 쓴 말레이시아의 사례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간에 동아시아 각국은 외환보유고에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을 하게 되며, 2000년대 중후반 들어 전 세계의 달러화, 미국 국채 등을 거의 폭풍흡입하듯이 빨아들였다. 당장에 달러 보유고 상위 10위권 국가의 다수가 동아시아 국가다.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2000년대 들어 소위 BRICs라 불리는 신흥국들이 IMF의 현 체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기존에 유럽의 독식으로 덕좀 보는 체제였는데 신흥국이 경제강국이 되었으니 미국과 유럽이 독식하던 IMF와 IBRD의 총재 자리를 넘보고 있다. 특히 2011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前 IMF 총재가 성추행혐의로 자리를 비우자 유럽과 제3세계는 서로 총재자리를 차지하려고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2008년 이 사건보다 더욱 큰 부도 사태가 일어났었고, 그리스 발 유럽연합 위기로 서구권의 세계 통화 패권에 대해 더욱 더 불신이 깊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기존 기득권 층은 '지금 유럽에 IMF위기가 도래했으니 차기 총재도 유럽인이 해야 그리스 위기를 쉽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미 유럽이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신흥국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커져 있다.

결국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지분의 6% 이상을 신흥국에 넘기고 유럽 이사 2명을 줄여 신흥국의 참여권을 확대하는 구조개편이 합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최국인 대한민국의 역할이 매우 컸고, 대한민국 역시 IMF 쿼터에서 과소평가를 받았던지라 2010 G20 재무장관 회의를 통해 IMF 쿼터를 늘리게 됐다. 또한 2012년에는 그동안 관례적으로 미국이나 서유럽국가 출신이 맡아온 IMF 사무총장으로 중국 경제학자 린젠하이(林建海)를 임명했고, 뒤이어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Jim Yong Kim) 전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임명했다. 이젠 미국과 유럽도 신흥국가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는 셈.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IMF란?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으로 세계무역 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금융기구입니다.

 
IMF경제위기내용 

 IMF경제위기란 외환보유고가 부족하여 발생한 것입니다.

 그 원인으로는

 

그 동안 이룬 경제적 성장에 만족하여 국제적인 경제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경제 문제의 심각성에 바르게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기업들은 금융 기관에서 많은 돈을 빌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였고, 금융 기관은 갚을 능력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해외 여행이 급증하고 사치품의 소비가 늘어나는 등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IMF경제위기 극복방법

 

1.국민들의 노력

금모으기 운동: 외국에 진 빚을 갚기 위한 금모으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

절약하는 생활: 아나바다 운동과 같은 절약 운동과 씀씀이를 줄이는 등 아껴 쓰는 생활을 실천함.

국산품 애용: 우리 기업을 살리기 위하여 외국 상품 대신 국산품을 애용함.

회사 살리기에 동참: 직장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근로자들은 임금을 줄이거나 반납하면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함.

 

2.시민 단체의 노력

시민 운동 주도: 아나바다 운동{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운동}과 헌 옷가지를 모아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시민 운동을 전개함.

금모으기 운동의 전개: 금모으기 운동을 전개하여 전 국민의 참여를 이끌어 냄.

 

3.기업의 노력

구조 조정: 이익이 남지 않는 사업과 인원을 과감히 축소하여 불필요한 비용을 줄임.

연구.개발 노력: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연구.개발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

 

4.정부의 노력{기업과 금융 기관이 빨리 경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관리.감독을 강화했습니다.}

일자리 제공: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공공 근로 사업등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해 줌.

제도 개선: 기업들이 보다 자유롭게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여건을 마련해 줌.

앞으로 또 다시 경제위기가 올 지 안 올지는 모르는 일이고, 제 예상엔 최소한 특별한 경우가 없는 이상 1997년 IMF사태만큼 심각한 경제위기가 금방 찾아오긴 어려울 것 같네요

IMF 경제위기

IMF 경제 위기의 대해서 5~10줄로 요약해주세요!!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겠습니다!! 한국 IMF 외환위기의 원인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정부가 보증을 서주고 금융기관은 정확한...

한국 IMF 외환위기에 대해서

... 구조적 위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우, 한보 등의 기업들이 도산하였고, 수 많은 경제 주체 및 개개인들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IMF로부터...

imf 경제위기처럼

imf경제위기처럼 큰 위기가 와서 우리나라 증권사... 축적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상승폭발의 기가 쏠리는... 없이 진행되어왔다는 점이다. 또한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120일...

IMF 경제 외환위기에 해당하는 44

IMF 경제 외환위기에 해당하는 44개월간의 동안은요... 지식인 (한국사 분야) 금융감독원(FSS) 2019's 최우수... 바닥나 IMF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2.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IMF경제위기(외환위기)

... 있는데// IMF경재위기 에 대한 모든것을 알려주세요 이제까지... IMF후의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거두 절미하고 한국IMF발생 원인과 파급효과 그리고 휴유증을...

한국 외환위기 IMF에 대해서...

... 1) 외환위기의 원인 2) 외환위기의 극복과정 3) 외환위기 극복 후 한국 경제 상태 그리고 한국에서 IMF가 몇년동안 지속되었나요? 안녕하세요 ~ 파워지식인 은하신...

IMF경제위기극복사례빨리요~(내공있어욜!)

... IMF경제위기 극복사례 알려주세요!! 꼭 극복사례에요!!... 극복과정 정부는 부실기업을 정리하거나 건실한... 2001년 8월 23일 오전, 한국 은행 총재가 국제 통화 기금에서...

imf(우리나라 경제위기)

... 상황과 IMF후의 과정들을 교과서처럼 설명하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5~60년대 전후... IMF경제 위기 극복과정 IMF위기는 곧 외환 위기였다. 한마디로, 국내에 달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