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음악....?

바로크음악....?

작성일 2007.07.18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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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라는음악에 대해 조사를해야하는데

바로크..?이건먼지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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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과 바흐의 바로크 음악


 참 이상하죠?  사람이 기분 좋을  때면 저절로 가벼운 콧노래가 나오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면 웬지 가슴이 답답해지고 크게  소리쳐보고   싶어지는 법이니 말입니다. 사람은 기분에 따라서  다른 소리를 내게 되고 다른 음악을 찾게 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사람의 기분이  달라지듯이, 시대의  기분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자면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우리 민족의 기분은 대체로  침울했다고  하겠지요. 물론 그동안에도 기쁜 일이 있었겠고, 축하할 일도 있었겠지만, 아뭏든 나라를 찾은  다음의 기분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이 부르던 노래와 해방된 후에 부르게  된  노래는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니다. 시대의 기분이 바뀌면  그 시대의 음악도 달라집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기나긴 음악의  역사를 기분이 바뀐 몇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시대에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이런 이름들을 붙여줍니다.


 음악사에서 1600년 경부터 1750년경까지를 '바로크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1백  50년 정도의 기간동안 유럽 사람들의  기분은  대체로 비슷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1백 50년은 상당히  긴 시간입니다.  물론 그 동안에 여러가지  좋은 일, 궃은  일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 시대의 음악에  나타난 공통점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선 '바로크'라는 말부터 살펴봅시다. 이는 본래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루투갈 말이라고 합니다. '일그러진 진주'--.  그러니까 아름답고   예쁜 것이긴 한데, 어딘가 좀   일그러져 있는 모습,  하필이면 왜 그런 말로 그 시대 음악의 특징을 표현하게 되었을까요?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이 일어났는데, 종교 개혁은 곧  '종교 전쟁'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은 참 고약합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라도 서로 '믿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것이니까요. 독일 같은 나라는 이 '믿음' 때문에 30년 동안이나  계속  싸웠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3년 걸렸는데, 30년이나 전쟁이  계속되었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지요. 독일의 이 30년  전쟁에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관계되었습니다. 다들 자기가 믿는 종교 편을 들어 싸움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에서 시작된 싸움이었지만, 전쟁은 전쟁이었습니다. 서로 자기네 나라의 영토를 더 넓히려 했고, 그 전쟁을 통해 더 많은 이득을  보려고 했습니다. 믿음에서 시작되었지만, 참 더러운  이권 다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전쟁을 벌이는 왕이나  귀족들은 더욱 흥청거리고 더욱 권력이 강해졌음에 비해서 힘없는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비참해져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의  분위기에서 음악은 어떻게 바뀌어갔길래 이 시대의 음악이 '일그러진 진주'로 비유되었을까요?


 음악은 돈많고 권력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되어갔습니다.물론 그전에도 편안히 음악을 즐길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지만, 세상이 각박해져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음악을 즐길수 있는 기회는 더욱 줄었습니다.

 

 그 전까지  아름다운 음악을  제공해 주던 교회까지도 이제는 세상 권력과 흡사해져가면서 그곳에서도 높으신 성직자들이 한껏 기분을 낼  수 있는 거창한 음악들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온통 종교때문에 싸움질하고 난리를 치는데, 사람들이  조용히 교회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겠습니까? 교회  음악은 갈수록 그 중요성을 잃어갔습니다.


 악기의 소리도  커지고, 악기편성도  더 거창해졌는가 하면, 음악의 내용도 더 거칠어지고 억세어지고 자극적이 되어갔습니다. 독자 여러분 중에는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바로크 음악, 그러니까 바하나 헨델, 비발디  같은 사람들의  음악을  들으면 거칠거나 자극적이기는  커녕 부드럽고 명괘하지 않나. 하는 의문말입니다.

 

 그렇게  생각되는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바로크 시대 이후에 더욱 요란스럽고 자극적인 음악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바로크 음악이 부드럽게  들린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거칠었던  것이라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처음의 거칠었던 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크 시대에 새로  생긴 것들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음악형태는 오페라였습니다. 오페라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발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예술들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면서 발전되었는데 비해서, 오페라는 그 때까지 없었던 것을 몇사람이 새로 만들어냈다는 말입니다. 그 '발명'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 피렌체에 돈많은 바르디라는  백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자기 집에 시인, 음악가들을 불러 모아  예술에 관한 토론을 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대개 아마추어들이었는데, 방 하나에 다 모일수 있다고 해서 이 그룹을 '카메레타'('카메라'는 방이라는 뜻)라고 불렀습니다.

 

 르네상스 말기였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는 자연히 그리스 연극을  어떻게 재현해 볼 수 없을까 하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그리스 연극에는  합창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분명히 대사를 노래로 하였을텐데, 그  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분명히 여러 사람이 같이 부르는 '여러 소리 음악'은 아니었을 것이고, 독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율은 말의   자연스러운 높낮이와 장단에 잘 어울리는, 낭송하는 듯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주는 노래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을  것이다....이렇게 이야기는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중에 시인도  있고, 음악가도 있으니, 그런 노래를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떠냐? 좋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돼서  실제  그 노래를 만들어 보니 정말 그 때까지 있어왔던  어떤  노래와도  다른, 가사의 내용이 아주 또렷이  전달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노래들을 '홑소리 음악'(monopony)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들은 이 음악을 가지고 옛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연극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음악극'을 시도해본 것이죠. 첫 작품은 그리스의 신  아폴로가 사랑의 신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다프네라는 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1598년 처음 공연되었고 작곡가는 페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페리는 아마추어가 아니고 특별히 초청된 전문적인 음악가였습니다.)  이 작품은 역사상 '첫 오페라'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악보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실제 모습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그 악보가  남아 있어서 역사상 첫 오페라로 기억되는 작품은 페리 곡의 로, 초연된 것은 1600년입니다.


 당시 피렌체를 다스리던 가문은 은행경영으로 큰 돈을 번 메디치  가문이었습니다. 그 집의 딸 마리아가 프랑스의 왕 앙리  4세와  결혼하게 되어 대대적인 결혼 잔치가 피렌체에서 벌어졌습니다. 프랑스의 왕이 결혼을 위해 몸소 피렌체까지 행차했으니 얼마나 큰 행사였겠습니까? 그당시 피렌체가 얼마나 융성하였던가,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얼마나 막강하였는가를 엿볼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국가적인  행사에 오페라가  선을 보였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 새로운 형식이 권세있는 한 나라의 왕과  유럽에서 떵떵거리는 큰 부자인 메디치 가문 앞에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페라는 이렇게 '발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돈 많은 귀족의  후원, 실제  음악은 잘 모르지만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아마추어들의  뜻, 초빙된 전문 음악인의 기술, 크고 화려한 행사를 원했던 권력자의 욕심,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던 것입니다.

 

 '발명'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이 세상에 전혀 없던 것을 갑자기 어느  누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것은 그 전에 전기가 발견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오페라'라는 발명품도  이미  그 전에 오페라에 필요한 음악, 연주의 기술이 어느 정도 발달해 있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권세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음악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아마추어들의 뜻이 이 발명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오페라'를 통해 무슨 큰 이득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페라의 출발이 그랬기 때문에 오페라는 그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격으면서도 그 순수한 정신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고, 오페라가 단순한 여흥거리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새로 태어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오페라는 먼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로 번져갔습니다.


 피렌체에서의 앙리  4세와 마리아의  결혼식에는 여러  지방의 권세있는사람들이  초청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도시 만토바의 공작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자 자기 궁정에데리고 있었던 음악가 몬테베르디에게 비슷한 공연을 만들어 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몬테베르디는 페리에 비하면 훨씬 뛰어난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있어왔던 여러가지 음악형식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았을 뿐더러, 새로  생겨나는 음악들에도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몬테베르디는 힘을 모아  작곡에 임했고, 그래서  오페라 역사에서 첫 걸작품이 만들어 졌습니다. 1607년에 나온 입니다. 이야기도 그리스의   신화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르페오라는 젊은 명가수가 에우리디체라는  아릿다운 아가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들로  꽃을 따러 갔다가 꽃뱀에 물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오르페오는  죽도록 슬펐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저승에  가서 아내를   구해내야지'. 이렇게 생각한 그는 비파를 어깨에 메고 저승으로 떠났습니다.


 저승엔 온갖 무서운 짐승들이 있어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때마다 용감한 오르페오는 음악의 힘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계속 길을갔습니다. 마침내 오르페오는 저승을 다스리는  신 앞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기인 감동적인  노래로 아내 에우리디체를 돌려달라고호소했습니다.


 한 번 저승에 들어온 사람은  다시는 이승으로 갈 수 없는 것이 저승의 규칙이었지만, 저승의 신은 감동을 받아서 에우리디체를 돌려 주기로했습니다. 다만 이승 땅에 도달할 때까지 아내의 얼굴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오르페오는 신이  났습니다. 자신의 음악의 힘으로 죽은 아내를  다시 찾았으니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길을 떠났습니다.


 한편 아내 에우리디체는 사랑하는 남편을 저승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은 내내 자신을 봐주지 않으니 웬일입니까? '혹시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닐까? 아, 그렇구나, 저승에 있는 동안에 내 얼굴이 흉찍하게 변해서 그렇겠구나, 어쩌나 저이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시 살아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차라리 저승 땅에서 떠나지 말고 편안히 지내는게 낫지....'


 가련한 에우리디체의 괴로움을 듣다못한 오르페오는 아내를 봅니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다시 죽고 맙니다. 그리고 신과의 약속을 어긴 오르페오는 아내의 두번째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지옥의 짐승들에 의해 갈 갈이 찢겨 죽게 됩니다.


 역사상 첫 오페라가 오르페오의 아내의  이름을 딴 였고,첫 걸작품이  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였습니다. 그리스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음악가들에게 있어서 그리스의 이야기 중에서도 오르페오의 이야기는  각별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젊고, 패기있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것같이 자신감에 넘치는  음악가, 그를 모델로 삼아 오페라라는 새로운 음악 형식이 야심적으로 그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지요.


 몬테베르디의 가 걸작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전 작품들까지는 노래는 기본적으로 간단한 낭송이었습니다. 물론 관현악 반주도  있었고, 춤도 있었고, 노래다운 노래도 더러 있었지만, 그 기본은 연극 대사를 좀 더 음악적으로 읊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데 몬테베르디는 음악이 연극을  감동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썼습니다.


 다양한 악기들이 동원되어 목가적인 분위기, 무서운 저승의  짐승들, 저승의  신의 엄숙한 명령 등을 생생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래'가 등장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잘 모르더라도, 노래만 들으면 그 사람이 대체로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느끼게 해 주는 힘, 그것은 지금까지 있어온 어떤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오페라가 이 힘을 얻자마자 오페라는 사람의 운명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강력한 예술 형식이 되었고, 거기에 힘입어 유럽 전체에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오페라는 로마로, 베네치아로, 파리로, 빈으로, 뮌헨, 함부르크로 퍼져갔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그 지방의 특성에 맞도록 약간씩 변형되었고, 그  지방에 맞는 기법들이 조금씩 개발되었지만, 그  기본적인 정신은 어디까지나 귀족 중심의 화려하고 구경거리가 많은 이탈리아적인 예술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7세기는 권력자의  힘이 더욱 강해진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절대권력'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유명한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73년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왕은  권력뿐만 아니라 나라의 재산도 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끌어 모았습니다. 물론 훌륭한 예술가들도  다끌어  모았지요.  그리고는 왕의 권세를 자랑할 수 있는 대규모의 호화스러운 건물을 짓고 화려한 행사들을 개최했습니다.  이 행사에 오페라만큼좋은 음악 형식은 없었습니다.


 왕들뿐만 아니라 작은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들도 모두 자기 영토 안에서는 절대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루이 14세처럼 훌륭한 궁전에, 잘 훈련된 관현악단에, 화려한 오페라 공연을 원했습니다. 그래서유럽의 크고 작은 거의 모든 권력자의 궁성에 '오페라'는 뺄 수 없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페라 공연은 원래 돈이 많이 드는 노릇이어서 웬만한  사람들로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요. 사청이 이랬기 때문에 오페라는 삽시간에 그 본래의 고고한 뜻을 잃어버리고  권력자들에게 아첨하는 내용의 요란한 여흥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절대권력자가 없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 지금은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을 석권하고  있었던 흥청거리는 나라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터키에  망한 다음에 지중해 무역을독차지했던 것입니다.


 옛날부터 무역업은 많은  돈을 만지는 사업입니다. 무역선이 한척 돌아왔다 하면 엄청난 재물이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베네치아에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공화국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배자가 죽으면 그 자손이 자동적으로 권력을 상속받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지배자를 시민들이 선출하는 나라였지요. 물론 요즘 기준의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 아뭏든 왕이나 영주가 다스리는 나라들보다는 훨씬 분위기가 자유스러웠습니다.


 오페라가 퍼져 나가자 베네치아의 부자들도 오페라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페라를 만들어 줄 절대 권력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함께 돈을 모아 오페라 극장을 짓고, 요즈음 아파트 분양하듯이, 극장 안에 전용 칸막이 좌석(박스)을 분양했습니다. 아래층의 넓은 공간은 그때 그때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입장권을 사면 들어 올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왕이나 영주가 만든 오페라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구경할 수  없었는데, 여기서는 누구나 얼마 안되는 입장료만 내면 언제든지 오페라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공 오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1637년에 처음 생겼으니까 몬테베르디의 가 나온 후  꼭 3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오페라가 너무 너무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듬해 극장이 또 하나 생기고,  이듬해 또 생기고 해서 이 작은 도시에 오페라 극장이 열 다섯개나 있었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동네마다 영화관이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지요.

 

 공공 오페라의 입장료가  그렇게 저렴할 수 있었던 것은 칸막이 좌석에 투자한 사람들이 모두 부자였는데다가,그들이 칸막이 좌석을  그들의 응접실처럼 사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으니, 오죽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겠습니까?

 

그들은  그곳에서 손님을 맞고, 잡담하고, 술마시고,  음식먹고, 카드놀이를 하다가 유명한 가수가 노래를 할때면  잠시 무대를 보았다가 박수치고는 다시 자신의 일들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유쾌한 응접실이 아니었겠습니까? 공공 오페라 극장의 공연은 그러나 아무래도 상업적인 사업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왕이나 귀족처럼 공연을 위해서 돈을 물쓰듯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주들이 낸 돈의 한도 안에서 공연을 치러내야 했지요. 그래서 베네치아 오페라에서는 돈이 많이  드는 합창단이  없어지고, 관현악단도 최소한의 줄이는 등 제작비를 아끼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대신 요란하고 신기한  무대장치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무역도시의 벼락부자들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들어와서 즐겁게 해주는데는 눈요기거리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베네치아 오페라의 또다른 특징은 아첨할 권력자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권력자가 주관하는 오페라에는 으례 고상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 특히 마음이 바다와도 갈이 너그러운 군주가 등장하기 마련이었는데,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테베르디의 걸작이 여기서 또 나옵니다. 몬테베르디는 자기를 키워주던 만토바 공작이 죽고 나자 일자리를 잃고 베네치아의 성당 음악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공공 오페라 극장이 세워지자 만년의 몬테베르디는 걸작 오페라를 두편 썼습니다. 과 이 그것입니다.


 특히 은 잔악한 황제 네로가 어떻게 포페아라는 요부에게 넘어가서 정실 부인을 쫓아내고 요부를 황제비로 대관시키는가 하는 내용으로서, 고상한 신화의 세계로부터 사람들의  추악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보여준  명작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따금씩 공연되어 감동을  주는 이 작품은 1642년 몬테베르디가 일흔 다섯살 때 만든 작품입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오페라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새로  생겨났습니다.예    를들어 소나타, 칸타타, 푸가, 심퍼니, 콘체르토 등등.... 또 바이올린, 첼로, 하프시코드, 피아노 그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오늘날과 같은 관현악단이 그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바로크 시대였고, 편균율  조율법이 생긴 것도, 음악이 장조와 단조가 뚜렷히 나누어지게 되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알게 모르게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아주 빠를수도 있고 아주 느릴 수도 있고 아주 많을 수도 있고 아주 적을 수도 있지요.


 바로크 시대에 달라진 것들을 꼽아 보니까 이 시대는 아주많은 것이  아주 빠르게 변했던 시대였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같은 기간동안 우리나라 안에서 여러가지 변화에 비하면  그때의 유럽 사회는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중세 천 년 동안 사회가 비교적 느린 속도로 변해갔던 데 비하면 이 시대의 변화는 숨 가쁜 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약간 생각을  달리하면 이렇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유럽   사회는 르네상스 이후에 매우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많은 것이 새로 생겼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런데 바로크 시대에 새로 생겨났던 것  중에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 많다, 그래서 오늘날 돌이켜보면 그 시대가 가장 급격하게 달라졌던 시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시대의 특징을 정확히 알아내고 말로 옮긴다는  것은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아뭏든  우리는  오늘날까지 바로크 시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들을 거의 그대로 쓰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많은 것들이  멀지 않은  장래에 없어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만들어진  연주법이나 음악형식, 악기들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그 때  만들어진 많은 음악들이 아직도 우리를 즐겁게  해줄수 있다면, 우리는   바로크에서 시작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야할 지 모릅니다. 바로크 시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4백년도 채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봅시다. 몸통 길이가  35.5cm, 무게가 400g밖에 안되는 이 작은 악기에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소리가 쏟아져 나올 수 있는지요. 바이올린은 고도로  정교한 악기 공학이 만들어낸 놀라운 예술품입니다.


 바이올린이 생기기 전에도 '비올' 계통의 여러가지 비슷한 악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이는 강력한 바이올린이 만들어진 것은  바로크 시대였습니다.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슈타이너 등의 뛰어난  장인들이 만들어낸 악기들은 오늘날까지  그 소리의  아름다움을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음향학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악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그들의 진짜  공헌인것입니다.


 이러한 바이올린의  발달은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이올린의 갖가지 새로운 연주법도 이곳을 중심으로 생겨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음악을  열심히 찾아 듣는분들이라면 귀에 익었을 작곡가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코렐리, 비탈리, 알비노니, 비발디, 나르디니, 타르티니 등등.... 이 중에서도 특히 코렐리는 그 당시까지  개발된 많은 바이올린 기법들이 모두 동원되는 바이올린  소나타들을 썼는데, 이것들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마치 바이올린  교과서와 같은 구실을 했습니다.


 합주, 그것은  많은 악기들이  같이 연주하는 것을  이릅니다. 그런데 악기  종류가 많으면 그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소리가 나올것  같은데  그게 꼭 그렇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지요. 글쎄, 이런  비유가 적당할 지  모르지만 밥상위에  반찬이 아무리 많아도  정작 '밥'이 없으면 어딘간 허전한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 전까지의 합주는 아무리 규모가  큰  것이었다고 해도 여러가지  현악기, 건반악기, 관악기 등을  잡다하게 모아  놓은 것이었을  뿐,합주의 '주된 소리'를  이루는 악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이 생기면서 합주의 '주인'이 생겼습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바이올린과 음색이 같은  비올라, 첼로 등의 현악기  가족이  합주음악의 '주된 소리'를  이끌어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합주의  주인이 생겼다는 것은 음악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합주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큰 규모로 키워 나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아주 작은  규모로도 알찬 합주단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절대 왕권의 시대, 절대 군주의 상징이었던  프랑스의 루이14세는  정치권력에서뿐만  아니라 온갖 문화 활동에서도  유럽의 모든 군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루이14세는 춤을 굉장히 좋아해서  이탈리아 출신의  춤꾼인 룰리라는 청년이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룰리는 춤도 잘추었지만 음악에도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었고 아첨과 권모술수에도 능했습니다. 그는 왕실에 악단을  만들고 악단의 폭군이  되어 맹훈련을  시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 14세의  악단은 전  유럽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악단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왕의  스물 넷 이올린'--. 이  이름이 음악의 역사에 처음  나오는 '악단'의 이름입니다. 왕의  악단이 겨우 스물  넷? 그러나 그  당시로 봤을 땐 굉장히 큰 규모였고, 무엇보다도 그  스물 넷의 악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쏟아내는 통일된 '소리'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던 것입니다.


 룰리는 실은 프랑스 오페라를 오페라답게  만든  작곡가로서 음악사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국제적으로 보면 '현악 합주단'을 조직해서 혹독한 훈련을 시켜 그때까지 누구도 꿈꾸어보지 못한 '소리'(사운드)를 만들어낸 것이 어쩌면 더 중요했을 지도 모릅니다.


 절대왕권시대였으니까 누구나 짐작하는  일이겠지만 궁정안에 여러가지 화려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악단이 필요한 행사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오페라 반주도 해야됐지만, 높으신 분들이 밥먹고 담소할 때 배경음악도 필요했지요.

 

 예를들어 귀한 손님이 찾아 오셨을 때의 영접음악, 높은  사람이 파티장에 나타났을 때의 팡파레, 저녁에 정원을 산책할 때, 저녁 시간에 심심할 때,  춤출때...., 이럴때 모두 악단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그때 그때 악단의 전단원이 나와서 연주할 필요는 없었겠지요.


행사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서 그에 알맞은  인원이 동원되고, 알맞는 음악형식이 선택되었지요.  아니, 선택된 것이 아니고, 거기에 알맞는 음악 형식이 '개발'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많은 음악형식이 개발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협주곡(Concerto)과 조곡(Suite)을들 수 있겠습니다.


 '콘체르토'를 우리는 '협주곡'이라고 번역합니다. 서로도와 음악을 만들어가는 곡이라는 뜻일텐데, 본래의 말에는 '서로 싸운다, 경쟁한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서로 돕는다는 것과 서로 싸운다는 것은 전혀 반대되는 뜻인데, 어떻게 같은 말 속에 포함될 수 있을까요?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반대되는  것같은 두가지가 사실은 하나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것이 결국  서로 돕는 일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사이 좋게 오손도손, 큰 소리내지 않고 사는 것이 꼭 좋은 게 아니지요. 서로 다투고 니것 내것 따지고 그릇 깨지는 소리도 좀나고 때로는 소매 걷어 부치고 싸우는 가운데 서로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상대방의 좋은  점을 알고 그래서 사는 데 힘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정신-서로 경쟁하게 다투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힘찬 활기, 그것이 바로크 음악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가 어렵고 어지럽다  하더라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협주곡은 크게 나누어 합주협주곡(Conserto grosso)과 독주협주곡이 있습니다. 합주협주곡이란 둘  이상의 연주자들이 따로 그룹이 되어서 전체 악단과 협주하는 형식이고, 독주 협주곡은 물론 독주자 한명이 전체 악단과 협주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독주협주곡이 합주협주곡보다 나중에 생겼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중세에 독창보다 합창이나 중창이 더 널리 불리어졌던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요컨데 '여럿'이 하는 음악으로보터 '혼자' 앞에 나오는 음악이 점점많이 생겨나서 그 후 19세기에는 많은 연주자들이 소위 '스타'가 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도 유럽 사회의 '개인주의'의 진전과 관계가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또 하나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형식으로 조곡(Suite)을들고 싶습니다. 조곡은  여러가지 춤 음악을 한 조(組)로 역는 음악입니다. 춤 음악을 역을 때 빠른 춤 다음엔 느린 춤, 힘찬 춤 다음엔 조용한 춤, 이렇게 서로 대조되는 순서로 엮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요. 이렇게 당시에 유행하던 춤곡들을  배열하다 보나까 자연히 일정한 공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레만드-독일의 느린 춤, 쿠란트-이탈리아의 빠른 춤,사라반드-스페인의 느린 춤, 지그-영국의 빠른 춤, 이렇게 네가지 춤이 기본이 되고 그  사이에 다른 춤들을 끼워 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열이 처음보터 음악적으로 계산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귀족들이 사교적인 무도회에서 실제로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었기 때문에 처음보터  음악적으로 계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무도회의 분위기를 다양하고 활기차게 이끌어  나가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갖춰지게 된 형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음악을 어디까지나  실용(實用)음악이었고, 그래서 그 구성원리가 하나도 엄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러춤곡이 이어진다는 것은 곧 한 곡이 여러 악장(樂章)으로 구성되는 원리가 되었습니다. 여러 악장들은 각각 빠르기, 분위기 등이 달라야 했읍니다. 그렇지만 다른 가운데서도 뭔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으면 한 곡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다르긴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있어야한다. -  말장난같이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이 점이 바로크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음악가들이 해결해내야 하는 작품구성의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다양성속의 통일성, 또는 통일성을 잃지않는 다양성, 말을 어떻게 붙이든지 간에 음악가들에게 어려운 과제임은 분명합니다.


 왕이나 귀족들이 돈이 많다고는 하지만 전속  악단을 거느리는 것은 여간  돈이 많이 드는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악사들 봉급을 주어야 되는 것 이외에도 악기   구입과 관리, 악보관리 들들 돈 쓸 일이 끝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영주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악단의 수효를 줄이려고 했겠지요.  인원은 늘리지  않고, 행사는 자꾸 많아지고....,  악사들의 생활은   바쁘고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행사들에 일일이 새 음악을 써서 대야 한다는 것은  크나큰 부담이었습니다.


 작곡가들은 편법을 생각해났습니다. 제일 중요한 높은 선율과 베이스 선율들만  악보에 표시하고 나머지 음들은  연주하면서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채워 넣는 방법이었습니다. 나머지 음들을  찾는 방법은 베이스  선율 위에 간단한 숫자와 기호로 표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수자 적힌  베이스'라고 부릅니다.


 이 방법을  쓴 결과 또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선율은 연주하다가 술 수도 있는데 베이스만은 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음들을 채워 넣을  수가 없게 되니까요. 그래서  이런 기법을 '지속되는 베이스'라고  부르기도합니다.


 그럴 뿐더러  베이스는 다른 악기들이 연주하면서 충분히 잘 들을수 있을 만큼 소리가 커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이스는 하프시코드나 오르간의 저음에 첼로 같은 베이스 악기가 나란히 달리는 연주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베이스가  유별나게 강조되는 기법은 사실 편법에서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바로크 음악 전체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을 부여해줍니다.


 '바로크 시대의 한 특징은 사람들이 새로운 도악을  끊임없이 요구했다는 데  있다'고 어느 역사가는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로크 시대만의 특징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고전시대, 낭만시대에도 그런 현상은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바로크 이전, 그러니까르네상스시대에도 그런 현상은 있었습니다.


 전에 쓰여진 음악을 또 연주하고 또 연주하는 일은 19세기 중반이후 오늘날까지, 그리고 르네상스  이전 시대의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옛 음악을 되살려서 즐기는 일은 늘 계속되어  오던 일인데,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유럽에서는 새로운 음악이 끊임없이 요청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이래 서구의  문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팽창해 나갔고, 이렇게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빠른 팽창을 보였던  시기에는 사람들의 정신도 그에  못지 않게 활발하여, '음악'조차도 새로운 것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었다구요. 그런데 이렇게 한창 일어나던 서구  문명의 기운이 한풀 꺾이면서 또 다른 사람들은 '전에 만들어진  음악'을 들으면서 만족하게 되었다구요.


 하기야 오늘날에도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새 음악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예술음악'의 창조력이 쇠퇴하게 된 원인은  여러 곳에서찾을 수 이겠지만, 아뭏든 오늘날의 예술 음악은  활발한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는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새 음악이 끊임없이 요청되던 시대에 작곡가들은 작품을 많이 써야 했겠지요. 작곡가들의 펜은 바빴습니다. 또 그러자니 매우 빠른  속도로 써야 했겠지요. 그들의 펜은 빨랐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또 한가지 빼놓지 말아야 될 일이있습니다. 그시대의 작곡가들은 작품을 후세의 사람들에게  남기기위해 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청중이 옛 음악을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들으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들은 단지 자기 시대의 청중들에게 봉사하기만 하면 되었고,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음악을 썼던  것입니다.


 바로크 시대가 이러했기  때문에 작곡가도, 작품도 오늘날의 기준으로따져보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음악은  다 그 시대  사람들만을 위해 빠른 속도로 양산(量産)되었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음악도 많았습니다.

 

 그 많은 작곡가들 중에서 바흐와 헨델은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그토록 빠른 속도로 쓰여진, 그토록 많은  그들의 작품들이, 그토록  빼어나서, 2백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청중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흐와 헨델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둘 다 1685년생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살아간 길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바흐는 독일에서 태어나 평생 독일 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는데 헨델은 역시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결국은 영국으로 귀화해 영국에서 죽은 국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시골뜨기였고, 한 사람은 국제신사였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들의 음악도 그들의 사람됨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바흐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모든 종류의 음악을 다 썼는데, 오직 오페라만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골사람이었으니까요. 이에 비해  헨델은 바로 그  오페라를 가지고 국제적인 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바흐가 항상 작은 악단, 작은 합창단을  위해 작품을 썼던데 비해, 헨델은 대도시의 큰 악단, 큰 합창단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이밖에도 두 사람의 대조되는 모습을 찾아보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 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이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오늘날의 청중은 바로크,고전,낭만,현대음악을 다 접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두 사람의 음악이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았다는 것은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까지도 덮어주는 효과가 있음을 봅니다.
 작곡을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겠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다른 작곡가들이 무엇을 해왔고 지금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아는 일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다른 사람의 음악을 레코드로 듣기도 하고,  출판된 악보를 사서 보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없던 시대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바흐는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헨델은 그 일을 위해 이탈리아까지 여행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출판된 악보가 귀하던 시절 그들이 다른 사람의 음악을 접하는 또 다른 길은  악보를  베끼는 일이었습니다. 바흐는 거의  평생을 남의 악보를 베끼면서   배우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헨델도 같은 방법으로  음악을  배웠지만, 바흐처럼 집요하게 계속하지는 않았지요.)바흐가 베낀 악보들은 대개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음악의 선진국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비발디의 음악을 많이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이탈리아적인활발함, 화려함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독일적인 강건함, 신중함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흐가 이탈리아와 독일적인 것만 공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음악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정말 우수하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던 것입니다.


 우수한 학생은 어떻습니까? 남에게서 배울 것은 모두 배우되, 그 배운 것을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소화해내는 사람이 아닙니까? 바흐는 자기식의 표현과 기법을 개발해내는 데도 늘 부지런했습니다. 그래서 바흐의음악은 당시의 모든 국제적인 흐름들을 다 흡수해서 하나로 만든, 큰 강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음악은 종류도 많습니다. 기악 분야를 보면 서곡과 푸가들,  각종 소나타, 토카타, 평균율 클라이버, 조곡, 변주곡, 협주곡들이 있고, 성악 분야로는 우선 2백곡이 넘는 칸타타들, 모테트, 마태와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등이 있습니다. 그 어느 분야에서도 바흐는 그때까지 그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깊이 있는 작품을 썼습니다.


 '깊이 있는  작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음악을 들으면 우리는 어떤 자극을 받습니다. 어떤 가락을 콧노래로 따라 부른다거나, 발로 장단을 맞추는 것은 벌써 그 음악에서 자극을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음악에서 받는 자극은 여러가지 양상을 띱니다.

 

 어떤 때는 큰 소리로 따라 부르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같이 뛰며 춤을 추게도 됩니다. 어떤 때는 알게 모르게 슬픈 기분을 즐거운 기분으로 바꾸어 놓기도 하고,반대로 더욱 슬픈 기분으로 몰아 넣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게도 합니다.


 또 음악은 이런 효과도 냅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효과 말입니다.  달콤한 음악은 예쁜 아가씨를 생각나게도 하고, 슬픈 음악은 지난날의 슬펐던 기억을 되살려 내기도 합니다. 물론 가사나  줄거리가 있는 음악을 대할 때는 그 가사나 줄거리와 연관된 생각을 하면서 그 음악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나 생각이 음악을 듣는 그 순간이 지나면 곧 잊혀지는 것이 있고, 오랫동안 계속되는 음악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딘가 가슴  속 깊은 곳을 흔들어 놓는 음악이 있습니다.음악을 들으면서 생각났던 것들이 점점 더 발전해서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뭔가 달라져야하겠는데....',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그 결과 살아가는 방식에 변화를 주는 그런 음악도 있습니다.


 음악의 효과는 이련 여러가지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만들어내는 어떤 것입니다.  음악이 그날 그날 우리의 기분에 작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작용하기 시작할 때 음악은 일단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은 사실 깊거든요. 누구의 마음 속도 깊습니다. 깊은 우물 속처럼 깊은 마음을 누구나 갖고 있고 그 속에는 누구나 말 못할 사연들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말  못할 사연들일 뿐  아니라, 우리 가족, 우리 조상, 우리 민족의  말 못할 사연까지 다 갖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런사연들을 누구나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어서 어떤 계기를 만나면 솟구쳐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우물의 깊은 곳에는 우리들의 '혼'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 이 '혼'이라는 것은 깊은  우물과같은 우리들의 '마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뭏든 '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우리들 사람의 전체를 놓고 볼 때, 어떤  음악이 우리들의 마음의 깊이 어느 곳까지 작용하느냐에 따라 어느 만큼 '깊이 있는 음악'이냐를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흐의 음악은 그런 의미에서  깊은 음악, 우리들의 혼을 그득하게 울려주는 음악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세요? 바흐의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재미 하나도 없던데요,  졸립기만 하던데요'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또는 '바흐의  음악, 활기차고 듣기 좋고, 뭔가 깊게  느껴지는 점은 있지만, 무슨 혼을울려요? 그건 좀  지나친 표현이예요.  그건 그냥  음악일 뿐이지요....,'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그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서요. 20세기 한국사람이 듣느냐, 20세기 독일 사람이 듣느냐, 바로크 시대의 음악양식에 익숙한 사람이 듣느냐, 바흐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듣느냐에 따라 그  음악의 효과는 차이가 납니다.


 바흐는 독일의 종교개혁이 만든 경건한 사회 분위기에서 자라나고 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여러나라의 음악을 섭취하였다고는 하지만 , 그 모든 것들을 독일의 기독교, 루터파 교회의  분위기 속으로 흡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혼이 울릴 수 있는 사람은 18세기 초의 서양음악에 가장 익숙한 독일의 기독교인들일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바흐 음악의 '깊이'는 '18세기 독일의 기독교인'으로부터  딸어져 들을수록 그 느끼는 정도가  약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20세기 한국의 비기독교인, 더구나 서양음악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바흐의음악은 거의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혼 깊은 곳을 울려줄 수 있는 음악을 가진 사람들, 또는 그런 민족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음악의  깊이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바흐의 음악을 열심히  듣고, 그정신 세계를 이해하려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혼의 울림'에 어느 정도 가까이 갈수 있다. 그러므로 그 '깊이 있는 음악'은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는 바흐의 어느 작품에 못지 않게 깊이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바흐의 어느  작품보다도 를  통해서 혼의 울림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는 더 넓습니다.  바흐의  음악을듣고 조는 사람들도 헨델의 를 들으면 정신이 납니다.

 

그리고 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내용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면 서양  음악의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도 감동을 느낍니다. 혼의 울림까지경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왜 그런 것일까요?


 헨델의 음악이 보다  직접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음악이 갖는 보다 폭넓은 효과는 헨델이 살아온 내력, 그가 이 작품을 쓰게된 동기를 알지 않으면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헨델은 독일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오페라에 심취하여 처음에는 독일에서, 다음에는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제작에 관한 온갖 기술을 연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영국에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새로 크게 일어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특히 새로운 시민 계급이 건강하게 자리잡아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헨델은 이런 영국의 중심지 런던에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이탈리아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가수들을 불러다가 이탈리아어로 공연하는  오페라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국제적으로 가장 화려한 공연물이었고, 여러나라의 궁정에서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국제적인 추세에 발맞추는 의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에도 귀족들이 있었고, 돈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런던 같이 국제적인 도시에 국제적인 예술이 빈약하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헨델은  그런 영국의 '후진성'을 보고 한심스럽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어쨋든 헨델은 약 30년에 걸쳐 수많은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써서 런던에서 공연을 시켰습니다.  물론 귀족과 부호들의 후원을 받았고, 그들에게서 그의 작품들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지만, 런던의 일반 시민들은 냉담했습니다. 그러나 헨델은 굽히지 않고 이탈리아식 오페라단을 이끌어나갔습니다.


 하지만 파산의 위기를 격기까지 하면서 투쟁하다시피  계속된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극장을 좋아하는 영국사람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심지어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조롱하는 작품인 '거지 오페라'가 공전의 성공을 거두면서 헨델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헨델은 좌절했습니다. 그에게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건강한 시민계급의 성장은 음악의 세계에서는 합창운동으로 나타나고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음악의 경험을 나누어 가지는 합창이야말로 건강한 시민 생활에 큰  즐거움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활동을 통해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같이 음악 만드는 것이 좋아서 벌이는 활동일 뿐이었습니다.


 헨델은 이들에게 맞는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뜻도 모를 이탈이아어가아닌 그들의 말, 영어로 된 '오라토리오'였습니다. 그것은 뜻밖의 호응을 얻었고, 좌절했던 헨델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좋은 작품이 여럿 나왔고, 그 중 가장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 였습니다.

 

 를 쓸때  헨델은 눈물을 흘리면서 썼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평생동안  그 탁월한 재능을 낭비해온 것에 대한 회개의 심정이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면 지나친 속단일까요?


 는 이렇듯이 국제적인 대도시의 건강한 시민들이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목소리로 간절한 심정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음악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 한정되지 않는 혼의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헨델의 오페라들은 헨델의 재능의 낭비만은 아니었습니다.헨델은 오페라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극한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의 심정을 정확히 포착, 그 성격과 상황에 너무도 정확히  맞는 음악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헨델의 오페라들은 이제는 더 이상 상연되지 않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들을 수없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유명한 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전혀 개성이 다른 두 위대한 작곡가 바흐와 헨델이 활동했던 시기는 사실상 바로크 시대의 말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때까지의바로크가 창조해낸 온갖  정신과 기법을  하나로 묶어 바로크  음악의 최고의 결실을 맺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한창 활동하고  있을 동안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작고 소박하고 절제된 음악이었는데, 이런  음악이 다음  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민사회에 더 어울리는, 시민사회를 위한 음악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좀 길긴 하지만 요약은 님한테!!  이상 허졉 답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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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까지 성행한 유럽에서 일어난 음악의 한장르입니다.

바로크시대에는 다성음악이 완성되고 성행하였으며

반주와 멜로디가 합쳐진 화성음악이 발달하였습니다.

오페라와 칸타타, 오라토리오등 종교음악과 세속적음악이 많이 발달하였구요,

모음곡, 협주곡 등의 형식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기악곡이 많이 작곡되고 연주되었습니다.

바로크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바흐, 헨델, 비발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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