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케임브리지대 물리학 교수 스티븐 호킹 박사는 루게릭 이란 장애를 극복하고 '우주 팽창, 블랙홀 증발 이론' 등 우주에 관한 연구로 '우주의 비밀에 가장 근접한 과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목표는 우주는 어째서 존재하고 우주에 시작이 있는가, 시작이 있다면 언제 어떤 모양으로 시작됐는가, 우주는 왜 다른 형태를 취하지 않고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됐는가 등을 밝혀 보는 일이라고 하였다.
스티븐 호킹은 1942년 4형제 중 장남으로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출생했다.
열대병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0세 때부터 과학자가 될 꿈을 가졌다.
하지만 학교공부는 별로 두드러지지 못했다.
그의 친구들은 “학교공부는 썩 뛰어나지 못했지만 한없이 공상에 잠기기를 좋아했고 운동에도 만능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낙관적으로 보는 성격이었지요” 라고 회고한다.
1959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한 스티븐 호킹은 물리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물리학 문제는 계산을 하지도 않고 풀어버렸다.
스티븐 호킹이 온몸이 굳어 가는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에 걸린 것은 그가 대학 졸업반 학생이었던 21세 때였다.
걸음을 걷기가 힘들어지더니 스스로 넥타이나 구두끈조차 맬 수 없을 정도로 손발이 굳어져 갔다.
의사는 그의 병이 전신의 신경이 마비되고 온몸이 굳어지다가 결국은 죽게 되는 대단히 드문 병이라고 진단했다.
의사의 말처럼 스티븐 호킹의 병은 나날이 심해졌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자유로운 생각과 도전정신만 있으면 연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그는 장애를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스티븐 호킹은 병세가 날로 심해져 가는 상황에서도 연구에 몰두해 1973년 블랙홀 증발 이론을 발표했다.
이 이론은 블랙홀의 정체를 밝혀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밖에도‘빅뱅이론’ 등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우주 탄생의 비밀을 풀어갔다.
이같은 공로로 1974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이례적으로 영국왕립협회 회원으로 선출됐다.
‘시간의 반전’이론 발표 후에는 뉴튼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학자로서는 최고직인 ‘루카시언’ 교수가 되었다.
1985년에는 기관 절개 수술로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됐지만 그는 전세계를 돌며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한 강연을 계속해오고 있다.
헬렌켈러
헬렌켈러는 1880년 6월 27일에 태어나 1년 8개월만에 뇌막염??에 걸려서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못하게됬지만 설리번 선생님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으로 장애인들을 위해 일을하였다. 그녀는 오늘 날에 빛의 천사라 불리고 있습니다.
베토벤
베토벤은 독일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던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열 네 살 때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열 일곱 살에 빈에서 온 발트시타인 백작의 추천으로 빈에 가서 하이든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고, 겉으로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은 싫어했으며 마음속의 감동을 중시하였다.
그러다 스물 여섯 살 때 병을 앓아 마침내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서른두살 때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괴로움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귀를 즐겁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대예술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가 청각장애인이 되고 난 후 작곡한 불후의 명곡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어보라! 그것은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음악이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의 32대 대통령)
갑작스럽게 찾아온 소아마비를 딛고 링컨과 함께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남는 인물이죠.
부유한 가정에 때어나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젋은 나이때부터 사람들로부터 앞날이 촉망되는 미래의 정치가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1920년엔 39세의 젋은 나이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까지 선출이 되는등 탄탄대로의 인생길을 걸었음. (당선이 되지는 못했음) 그러다 1년후에 휴양중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난 뒤 고열과 전신 통증을 격게됩니다.
루스벨트를 치료하러 온 의사는 루스벨트의 병을 척수 손상으로 오진을 하고 그의 아내에게 강한 안마를 귄합니다. 사실 루스벨트의 증상은 소아마비였고 의사의 안마 처방은 그 증상에 최악의 치료법이었음. 이 오진으로 루스벨트는 회복이 불가능해지고 하반신이 마비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그덕분에 무거운 쇠 보호대 없이는 걷지도 못했고 부축 없이는 서 있지도 못할정도 였음 그럼에도 루스벨트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아내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7년동안 재활치료를 받습니다.
그 기간동안 루스벨트는 큰 인간적 도약을 이루게 됩니다. 루스벨트의 젋을때의 부유한 환경은 그를 대중과는 거리가 먼 삷을 살게하였지만. 소아바미를 통해 그는 전에 없던 정신력과 용기를 갖게 되고 삷이 근원을 생각하게 되괴 무한한 인내와 의지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얻게됩니다. 소아마비로 인한 신체마비를 어느정도 극복하고 혼자서 대중연설을 할수있게 되자 그는 다시 정계에 도전을 하여 1928년엔 뉴욕주지사에 당선이 되죠.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해 1 명중 4명이 실업자로 살고 있었음.(IMF때 우리나라 실업율이 두자리도 안된걸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임). 루스벨트는 당시 앞장서서 실업자들을 위해 일자리와 복지사업을 재공하였고 그 정책들로 인해 그는 1932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이 되고 결국 당선이 됩니다. 그의 취임연설에서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할것은 우리 자신안의 두려움밖에는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로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국난동안 4선 임기를 치뤘고 그동안의 루스벨트의 수많은 업적들 가운데 중대한 몇 가지를 꼽자면 뉴딜정책과 미국 경제 회복, 소외 계층 밎 장애인을 위한 복지, 인디안 보호정책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루스벨트가 장애를 통해 시달리는 민중들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이차대전동안 미국을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승리로 이끌었고 국제연합을 창설합니다. 대통령으로써 12년간동안 엄청난 피로가 누적되었고 1945년에 임기중 뇌졸증 발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었을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국가가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대외적으로는 독재국가들이 판을 치고있었죠. 그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미국이 세계초강대국이 되어있었습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이었을 당시에 자신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은 소아마비를 정복하겠다는 인생을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38년에 마치 오브 다임스라는 재단을 창설하여 소아마비 예방접종연구개발을 본격적으로 지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