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불교 수용

삼국의 불교 수용

작성일 2008.03.24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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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회 발전과 불교사상

1. 머 리 말

인도에서 발생하여 일정한 사회적 . 역사적 조건 밑에서 발전해온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고구려 . 백제 . 신라라는 낯선 나라의 사회에 들어오면서 한국사회의 요구에 어떻게 부합하면서 발전하는가, 또는 한국 사회의 발전사에 있어서 불교의 위치와 의의는 어느 정도인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알아보고자 함에 있어서 문제점은 한국 고대사회의 구조나 형태에 관한 그 면모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삼국의 국가 형성과정에 대하여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막연한 윤곽만 상상할 수 있을 뿐 그 구체적인 해명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그래도 신라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남은 관계로 신라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2. 한국 고대사회의 불교수용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의 일이며, 그 중에서도 중국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북방의 고구려였다. 즉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순도에 의하여 불상과 경문이 전해진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지 12년 뒤인 384년(침류왕 원년)에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에 불교가 들어왔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초 아마도 내물 마립간 때나 혹은 그 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듯 싶다. 파급의 경로는 고구려를 통하여 온 것이었으며, 지금은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 여러 전도자들이 불교의 전파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세기 초의 진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종교로 인정되었다. 이렇듯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특징은 중국의 왕실으로부터 삼국의 왕실로 불교가 전해져서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불교를 처음 환영한 것은 국왕과 그 측근 세력이었다. 불교는 먼저 사회 최상부층에 받아들여져서 점점 사회의 하층부로 번지어 나간 것이다.

삼국시대의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그 배경을 알아보면, 불교가 수용되는 것과 동일한 시기에 율령이 반포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율령이 반포된 것은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3년(373년)이었고, 신라에서는 법흥왕 7년(520년)이었다. 이것은 불교가 공인된 372년과 535년과는 서로 극히 가까운 시기에 속해 있다. 백제의 경우 율령의 반포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연대를 확인할 수가 없지만, 추측하자면 근초고왕(346∼375) 직전에 반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율령은 반포와 더불어 국가의 기본적인 통치체제가 일단 문자화된 형태로 정비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삼국은 작은 성읍국가에서 출발하여 발전한 것으로, 이들은 연맹체를 이루기도 하는 데, 이들 중에서 맹주격인 성읍국가의 왕권이 점점 강대해져 갔다. 율령이 반포되는 시기가 되면 이미 독립적인 성읍국가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가 굳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가의 모든 관리는 왕권 밑에서 하나의 체계로 정리되었다. 이 시기 권력이 성장한 국왕에 의하여 불교가 환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국왕과 불교는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국왕이 불교 수용을 환영하게 됨은 몇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로 불교가 가지는 장엄한 의식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불교의 의식을 통하여 나타낼 수 있다고 믿은 초인간적인 능력에 대한 신앙이 불교의 수용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보다는 국왕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불교가 사상적인 뒷받침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인 타당할 것이다. 기존의 원시적인 전통을 지닌 무속신앙은 개인적인 측면이 강하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담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왕은 새로운 사상체계로써 왕권을 옹호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그 목적에 부응하여 받아들인 것이 불교였던 것이다. 가령 신라의 국왕이 석가의 출신 신분과 같다고 한 것이 그 예가 된다. 단순히 신분이 같다고 할 뿐 아니라 국왕과 그 일족을 바로 석가와 그 일족에 비유하였다.

여기에서 불교가 고대 한국에서 사회적 . 정치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가를 미약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수용을 반대하는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불교수용의 반대는 고구려 . 백제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유독 신라에서만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불교의 수용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국왕의 권력이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으리만큼 성장해 있었는가 어떤가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진국가로서 왕권이 강하지 못했던 신라에서 그러한 반대가 나왔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생각되어진다. 삼국의 국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귀족위에 군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왕권은 크게 성장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귀족세력의 견제를 받는 일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치제도상으로는 신라의 화백제도와 같은 귀족회의의 존재를 그 증거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귀족의 반대속에서는 불교가 수용 발전되지를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가 수용된 것으로 봐서는 귀족세력에게도 환영받을 만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윤회전생사상일 것이다.

즉 현세의 모든 사실들을 전세에서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전생에서 6도의 어디엔가 있다가 그 때의 공덕으로 현대에서 인간으로 전생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같은 공덕사상 혹은 인과응보 사상에 근거를 둔 윤회전생사상은 골품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긍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지배귀족들이 이 윤회전생사상을 그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해 주는 이론으로 받아들였을 것임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윤회전생사상은 신라의 골품제도를 강력히 뒷받침해 준 이론으로서 신라의 지배세력인 진골귀족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귀족들이 불교의 수용에 찬동하였고, 또 그를 발전시키는데 협력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국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 한국에서 불교는 왕권과 결합하여 수용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고대국가 성장과 불교

고대국가형성 초기의 사회가 왕권을 중심한 귀족연합사회였다면 이차적 전개를 보인 사회는 전제왕권이 강화되는 경향을 나타내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전제왕권을 강화되는 때가 언제부터인가를 불교사상의 사회적 전개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신라는 선덕여왕대, 백제는 무왕대라 생각된다. 귀족연합사회로서의 초기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로서는 미륵사상이 근본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전제왕권이 강화되기 시작되면서 신라에서는 화엄신앙으로 전개되고 백제에서는 미륵상생신앙에서 하생신앙적 전개를 보이게 됨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초기불교는 미륵사상을 중심으로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그 사회적 전개를 보게 되지만 진평왕 때가 되면 중국을 다녀온 원광법사에 의하여 세속오계를 통한 보다 폭넓은 계층에 불교가 수용되어졌다. 그것은 진흥왕대의 불교가 왕실측과 귀족층에 미륵사상이라는 공동의 기반이 있었지만 왕실측에서는 전륜성왕사상에 의거한 다르마정치외 현실을 강조하고 있었음에 반하여 귀족층은 신분적 품위를 높인다는 신앙동기를 지니고 있어 상호 차이점을 나타나고 있었다. 자장에 의한 신라 화엄사상수용은 신라왕권의 존엄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즉 화엄불교시대의 신라국왕은 전륜성왕으로 상징되었거나 화엄사상의 수용은 신라의 왕을 석가불에 비기게 되어졌음이 그것이다. 불교 왕권의 상징이 전륜성왕에서 석가불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한 이유는, 삼국에 불교가 수용된 초기의 국왕이 전륜성왕으로 상징되기 위해서는 阿育王설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듯이 미륵불을 알기 위해서는 석가불을 알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미륵사상에 의해 뒷받침 받던 전륜성왕보다는 미륵사상이 있게 한 근원으로서의 석가불로 되돌아간 존재로 국왕을 비유함으로 해서 더욱 왕권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는 것이다.

백제는 신라와 같게 미륵불교를 갖고 전단계에서는 상생신앙을 다음 단계에서는 하생신앙을 전개시키고 있음이 다르다. 백제는 미륵상생신앙을 하생신앙화하면서 미륵사상의 대중적 전개를 기하고 신라는 미륵사상에서 화엄사상을 수용하여 전통문화의 포용과 불교의 대중화를 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에서 미륵하생신앙이 왜 대중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느냐 함이 문제로 남는다. 그것은 상생신앙이 귀족층이 아니면 지킬 수 없는 까다로운 계율을 필요로 하지만 하생신앙은 그와 같은 것이 없다. 누구든지 미륵에게 예경만 하면 미륵하생시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생신앙에 의하여 도래되는 세계는 평등한 세계로서 누구든지 화평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데서 대중적인 환영을 쉽게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백제의 무왕은 백제의 중흥을 기하여 힘을 기울인 왕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중흥의 뜻을 펴기 위해서는 백제에는 만인이 모두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미륵의 세계가 곧 도래한다는 미륵하생신앙을 유포시키고 그를 앞당길 수 있기 위해서는 무왕 스스로가 전륜성왕이어야 한다는 윤리를 전개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상생신앙에 의한 전륜성왕은 율령사회 즉, 법치국가의 운영을 그 이상으로 하는데 반하여 하생신앙에 의한 전륜성왕은 미륵의 세계가 곧 도래한다는 혁신적 의미를 더 강조하게 됨이 다르다. 그리고 이같은 혁신성에 의한 전제왕국의 건설은 왕실의 존엄성과 세련된 문화 등을 통하여 국민을 계도한다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백제문화의 목적성이라 할 수 있다. 신라나 백제는 다같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사회적 전환을 기하게 되지만 이시기에 신라의 국왕은 전륜성왕적 상징을 벗어나고 있었던데 반해서 백제는 오히려 전륜성왕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4. 맺 음 말

이제까지 한국 고대사회에서의 불교의 수용과 그 전개과정을 대략 살펴보았다. 요컨대 삼국의 국왕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건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씨족사회 및 부족사회를 기반으로 한 원시적 전통은 청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불교라는 사상체계가 이미 중국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삼국의 국왕들은 불교에 관심을 보이고 귀족사회와의 일정한 타협속에서 불교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교수용은 종교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정치 . 사회 . 문화의 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특히 불교의 수용기가 삼국의 사회변동기와 그 괘를 같이 한다는 데서 더욱 두드러진 양상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불교의 수용을 사회전반기의 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하게 한다.

신라나 백제가 초창기에 사회적 의미를 갖고 전개시킨 불교는 미륵불교였다. 이같은 신라나 불교의 미륵신앙은 전륜성왕사상에 의한 정법왕국의 건설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신라는 화엄사상의 수용으로 발전시키게 되고, 백제는 미륵신앙의 하생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그치게 된다. 이러한 상이한 불교의 발전단계는 후에 국가의 성격을 상이하게 하게 된다는 데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고대 한국에서의 불교의 의의를 살펴봄에 있어서 외래문화의 수용이라고 해서 낮추어서 볼 성질의 것이 못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의의는 한국 고대사회의 발전 기여도에 관한 문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한국 고대사회에 발전을 분명히 전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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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소수림왕때에 전진의 왕이 보낸 승려 순도와 아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임.-> 372년

백제

*침류왕때에 불교를 받아들임 -> 384년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불법을 전하였음.

신라

*법흥왕때에 불교를 공인함 -> 527년

*이차돈이라는 승려의 희생으로 공인됨

 

불교 전래의 영향

1. 왕권을 강력하게 해 주었습니다.

2.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에 이바지하였습니다.

3. 찬란한 불교 문화의 발전으로 학문과 예술이 발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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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수용한왕: 소수림왕
-전한사람: 중국 북조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보내 전파시킴. (당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잇따라 패하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의 동요가 일어나고 점차 통제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미 민중에서는 불교가 들어와 있었고, 사람들은 왕실의 불교 공인을 요구하고 있었다. 소수림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단결시키며, 또 통제하기 위해 불교를 선택했다.)
-연도: 소수림왕 2년 (서기372년)

백제
-수용한왕: 침류왕
-전한사람: 중국 남조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전래.
-연도: 서기 384년

신라
-수용한왕: 법흥왕 (연맹국가 탈피+중앙집권과 삼국통일을 위한 사상적 통일과 안정을 위해)
-전한사람: 눌지왕 시대, 아도화상 (공인한 왕은 법흥왕)
-연도: 서기 527년

 

            수용한 왕            전한 사람               연도
            고구려        소수림 왕  중국의 왕이 보낸 사신,승려               372년
             백제             침류왕  중국 남도 승려 아라난타               384년
              신라              법흥왕            아도 화상               5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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