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과학문화재

우리나라의 과학문화재

작성일 2007.12.10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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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판

금속활자

석빙고

첨성대

성덕대왕신종

양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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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대장경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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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국보  제32호
명     칭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량/면적 81,258매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소 유 자 해인사
관 리 자 해인사
일반설명 | 전문설명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 함)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경덕전등재(景德傳燈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불서(佛書)를 섭렵하고 역대의 여러 불조사(諸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만을 초록(抄錄)하여 찬술(撰述)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수신오도(修身悟道)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본서는 우리나라의 학승(學僧)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인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찬자(撰者)인 백운화상(白雲和尙)은 백운이 그의 호이며, 법명(法名)은 경한(景閑)이다.고려 충렬왕 24년(1289)에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출생하여, 공민왕 23년(1374)에 여주(驪州)의 취암사(鷲巖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신 분이다.

화상은 어려서 출가하여 불학(佛學)을 익히고 수도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후에 백운화상은 중국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의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으로부터 직접 심법(心法)을 전수 받았으며, 인도의 지공(指空) 화상에서도 직접 법(法)을 물어 도(道)를 깨달았던 것이다. 귀국한 뒤에는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1382)나 혜근 나옹화상(惠勤懶翁和尙, 1320∼1376)과 더불어 대선사(大禪師)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 해주(海州)의 안국사(安國寺)에서 11년 동안이나 선림(禪林)의 정업(精業)에 전력하였고, 뒤에는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후학들을 계도(啓導)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 해외로 유출된 경위는 조선시대 고종때 주한 불란서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간 장서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그후 골동품수집가였던 앙리베베르(Henry Vever)에게 넘어갔으며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흥덕사(興德寺)의 창건년대와 규모는 알수 없으나, 「불조직지심체요절」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그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이다.

그러나 흥덕사지의 위치를 확인할수 없던 중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북[靑銅禁口]과 청동불발(靑銅佛鉢)에 "西原府 興德寺(서원부 흥덕사;서원은 신라때 청주의 이름)"라는 글자(名文)가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바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흥덕사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는데,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하여 주었고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하였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먹, 즉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석빙고,
 
종    목 보물  제66호
명     칭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449-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동석빙고,
종    목 보물  제305호
명     칭 안동석빙고(安東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성곡동 산225-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안동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특히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어졌다.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안으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중앙에는 물이 강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천장은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무지개모양으로 틀어올린 4개의 홍예(虹霓)를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고, 각 홍예 사이는 긴 돌들을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안의 기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바깥까지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규모는 큰 편은 아니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특히 석빙고는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여 지금은 본래의 위치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왔다. 이전에는 바로 옆에 강이 흘러서 얼음을 운반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경주첨성대,

종    목 국보  제31호
명     칭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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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국보  제29호
명     칭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국립경주박물관
관 리 자 국립경주박물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로 앞으로도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앙부일구,
 
종    목 보물  제845호
명     칭 앙부일구(仰釜日晷)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2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국립고궁박물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전시된 2개의 해시계는 작고 오목한 가마솥 모양에 네발이 있는 우아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작풍과 제작기법이 같다.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고 글자와 선을 은상감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한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유물이다.

휴대용앙부일구,
    목 보물  제852호
명     칭 휴대용앙부일구(携帶用仰釜日晷)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86.03.14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국립중앙박물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앙부일구는 조선 세종 때에 처음 만든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해서 제작되었고 가장 많이 만들어진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궁궐이나 관공서 그리고 때로는 양반들이 집에서까지 널리 사용하였으며, 정원에 설치해 놓고 시간을 측정하는 것과 휴대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에 설치하는 것은 대개 받침대 위에 올려 놓게 만들었는데, 청동제와 돌로 깎아 만든 것이 많은 편이고 자기제품도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아름답고 품위있게 만들었고 조각을 한 돌받침대에 올려 놓는 경우가 많았다. 휴대용은 표면을 반구형으로 오목하게 파고 그 중심에 침을 세우게 되어 있는 간략한 것이 있고, 자석을 붙여 남북을 정확하게 맞춰 시각을 측정하게 만든 정밀한 것의 2종류가 있다.

이 휴대용 앙부일구는 세로 5.6㎝, 가로 3.3㎝, 두께 1.6㎝의 돌로 만들었으며, 서울의 위도를 표준으로 하였다. 또한 제작자의 이름과 제작 연대(1871)가 새겨져 있어 해시계로서의 학문적 가치를 높여준다. 반구형 해시계 면의 직경은 2.8㎝이고, 나침반의 직경 1.9㎝로 주위에 24방향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낮 시간과 시각선이 새겨져 있고 24절기와 절기선들도 새겨져 있다.

이런 휴대용 해시계는 만든 솜씨가 뛰어난 매우 드문 유물로 조선시대 과학기기 제작기술의 정밀함과 우수함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루각자격루,

종    목 국보  제229호
명     칭 보루각자격루(報漏閣自擊漏)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궁중유물전시관
관 리 자 문화재청
일반설명 | 전문설명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창경궁 명정전 뒤에 2개가 남아 있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대구선화당측우대,
종    목 보물  제842호
명     칭 대구선화당측우대(大邱宣化堂測雨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460-18 기상청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기상청
일반설명 | 전문설명
측우기는 땅 속에 스며들어 정확한 빗물의 양을 잴 수 없었던 그때까지의 부정확한 강우량 측정방법에서 벗어나 한층 발전하여, 빗물을 일정한 그릇에 받아 측정한 과학기기이다. 이러한 측우기를 올려 놓고 측정하던 대(臺)는 측우기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귀중한 유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 측우대는 가로·세로 37㎝, 높이 46㎝의 화강암 기둥으로 가운데 직경 16㎝ 길이 4.3㎝의 구멍이 있고, 앞면 한 가운데에는 “측우대(測雨臺)”뒷면에는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고 새겨져 있어서 영조 46년(1770)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과 함께 제작된 측우기는 모두 7기였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1950년 서울 국립기상대(현재 기상청)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전쟁 때 총격으로 몇 군데 총탄 자리가 남아 있지만 제작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측우대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금영측우기,
종    목 보물  제561호
명     칭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71.12.21
소 재 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460-18 기상청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기상청
관 리 자 기상청
일반설명 | 전문설명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헌종 3년(1837)에 만들어진 측우기가 유일하다.

높이 31.5㎝, 지름 15.3㎝의 이 측우기는 원통형의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눈에 띤다.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주척이라 부르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다. 중앙의 두 마디 사이에는 6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반환된 문화재이다. 공주 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사각형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해인사대장경판,
<script language=JavaScript> </script>
종    목 국보  제32호
명     칭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량/면적 81,258매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소 유 자 해인사
관 리 자 해인사
일반설명 | 전문설명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 함)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경덕전등재(景德傳燈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불서(佛書)를 섭렵하고 역대의 여러 불조사(諸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만을 초록(抄錄)하여 찬술(撰述)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는 수신오도(修身悟道)의 명귀에서 채록한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直視)하면,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본서는 우리나라의 학승(學僧)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대표적인 학습서인 것이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의 찬자(撰者)인 백운화상(白雲和尙)은 백운이 그의 호이며, 법명(法名)은 경한(景閑)이다.고려 충렬왕 24년(1289)에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출생하여, 공민왕 23년(1374)에 여주(驪州)의 취암사(鷲巖寺)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신 분이다.

화상은 어려서 출가하여 불학(佛學)을 익히고 수도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후에 백운화상은 중국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庵)의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으로부터 직접 심법(心法)을 전수 받았으며, 인도의 지공(指空) 화상에서도 직접 법(法)을 물어 도(道)를 깨달았던 것이다. 귀국한 뒤에는 태고 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 1301∼1382)나 혜근 나옹화상(惠勤懶翁和尙, 1320∼1376)과 더불어 대선사(大禪師)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 해주(海州)의 안국사(安國寺)에서 11년 동안이나 선림(禪林)의 정업(精業)에 전력하였고, 뒤에는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후학들을 계도(啓導)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 해외로 유출된 경위는 조선시대 고종때 주한 불란서대리공사로 서울에서 근무한바 있는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간 장서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그후 골동품수집가였던 앙리베베르(Henry Vever)에게 넘어갔으며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장은 없고 2장부터 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흥덕사(興德寺)의 창건년대와 규모는 알수 없으나, 「불조직지심체요절」하권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그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이다.

그러나 흥덕사지의 위치를 확인할수 없던 중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북[靑銅禁口]과 청동불발(靑銅佛鉢)에 "西原府 興德寺(서원부 흥덕사;서원은 신라때 청주의 이름)"라는 글자(名文)가 음각되어 있어 이곳이 바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흥덕사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 책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는데,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하여 주었고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하였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먹, 즉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석빙고,
 
종    목 보물  제66호
명     칭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449-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동석빙고,
종    목 보물  제305호
명     칭 안동석빙고(安東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성곡동 산225-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안동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특히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어졌다.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안으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중앙에는 물이 강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천장은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무지개모양으로 틀어올린 4개의 홍예(虹霓)를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고, 각 홍예 사이는 긴 돌들을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안의 기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바깥까지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규모는 큰 편은 아니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특히 석빙고는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여 지금은 본래의 위치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왔다. 이전에는 바로 옆에 강이 흘러서 얼음을 운반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경주첨성대,

종    목 국보  제31호
명     칭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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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국보  제29호
명     칭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국립경주박물관
관 리 자 국립경주박물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로 앞으로도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앙부일구,
 
종    목 보물  제845호
명     칭 앙부일구(仰釜日晷)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2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국립고궁박물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전시된 2개의 해시계는 작고 오목한 가마솥 모양에 네발이 있는 우아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작풍과 제작기법이 같다.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고 글자와 선을 은상감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한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유물이다.

휴대용앙부일구,
    목 보물  제852호
명     칭 휴대용앙부일구(携帶用仰釜日晷)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86.03.14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국립중앙박물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앙부일구는 조선 세종 때에 처음 만든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해서 제작되었고 가장 많이 만들어진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궁궐이나 관공서 그리고 때로는 양반들이 집에서까지 널리 사용하였으며, 정원에 설치해 놓고 시간을 측정하는 것과 휴대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에 설치하는 것은 대개 받침대 위에 올려 놓게 만들었는데, 청동제와 돌로 깎아 만든 것이 많은 편이고 자기제품도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아름답고 품위있게 만들었고 조각을 한 돌받침대에 올려 놓는 경우가 많았다. 휴대용은 표면을 반구형으로 오목하게 파고 그 중심에 침을 세우게 되어 있는 간략한 것이 있고, 자석을 붙여 남북을 정확하게 맞춰 시각을 측정하게 만든 정밀한 것의 2종류가 있다.

이 휴대용 앙부일구는 세로 5.6㎝, 가로 3.3㎝, 두께 1.6㎝의 돌로 만들었으며, 서울의 위도를 표준으로 하였다. 또한 제작자의 이름과 제작 연대(1871)가 새겨져 있어 해시계로서의 학문적 가치를 높여준다. 반구형 해시계 면의 직경은 2.8㎝이고, 나침반의 직경 1.9㎝로 주위에 24방향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낮 시간과 시각선이 새겨져 있고 24절기와 절기선들도 새겨져 있다.

이런 휴대용 해시계는 만든 솜씨가 뛰어난 매우 드문 유물로 조선시대 과학기기 제작기술의 정밀함과 우수함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루각자격루,

종    목 국보  제229호
명     칭 보루각자격루(報漏閣自擊漏)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궁중유물전시관
관 리 자 문화재청
일반설명 | 전문설명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창경궁 명정전 뒤에 2개가 남아 있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대구선화당측우대,
종    목 보물  제842호
명     칭 대구선화당측우대(大邱宣化堂測雨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460-18 기상청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기상청
일반설명 | 전문설명
측우기는 땅 속에 스며들어 정확한 빗물의 양을 잴 수 없었던 그때까지의 부정확한 강우량 측정방법에서 벗어나 한층 발전하여, 빗물을 일정한 그릇에 받아 측정한 과학기기이다. 이러한 측우기를 올려 놓고 측정하던 대(臺)는 측우기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귀중한 유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 측우대는 가로·세로 37㎝, 높이 46㎝의 화강암 기둥으로 가운데 직경 16㎝ 길이 4.3㎝의 구멍이 있고, 앞면 한 가운데에는 “측우대(測雨臺)”뒷면에는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고 새겨져 있어서 영조 46년(1770)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과 함께 제작된 측우기는 모두 7기였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1950년 서울 국립기상대(현재 기상청)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전쟁 때 총격으로 몇 군데 총탄 자리가 남아 있지만 제작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측우대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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