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의 통일 과정

진나라의 통일 과정

작성일 2004.11.12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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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통일 과정과 진시황제 통일 정책 그리고 내외 정책에 대해서 자세히 알

고 싶습니다.

그리고 진나라가 왜 멸망햿는지...

마지막으로 분서 갱유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ㅡㅡ;;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진나라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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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통일정책,내외정책

성 영(). 이름 정(政). 조(趙)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尉)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 천상을 본떠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咸陽]으로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匈奴族)을 격파,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였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와 해남도까지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 그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아방궁(阿房宮)과 리산산[驪山] 기슭의 수릉(壽陵)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수행한 이사와 조고(趙高)는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진나라의 멸망원인
진나라가 망한 원인도 흥한 원인과 같습니다. 원래 진나라는 문명이라곤 없었고, 여러 대신들 (상앙, 장의, 범저, 여불위, 이사 등등) 같은 이들은 모두 다 중원 6국에서 돈과 권력을 쫓아 온 이민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진나라 토착귀족 출신인 환관 조고가 권력을 잡고 여러 대신들을 박해하니, 결국 이들이 떠나가므로 진나라는 그대로 멸망한 것입니다.
또한, 이 때쯤에는 셀레우쿠스 왕국이 페르시아, 인도 접경까지 완전히 통일하고, 불안정하던 인도도 아쇼카 왕에 의해 통일되어,
이들 나라의 왕들이 다시 금은보화를 거둬들이기 시작하니,
다시 금은의 가치는 올라가고 물가도 함께 올라가 민중들이 살기 힘들어진데다,
만리장성, 불로초 같은 불필요한 사업까지 벌여서, 통화의 붕괴로 멸망이 가속화된 것입니다.

분서갱유
요약:책을 불태우고 학자를 생매장한 일

본래 상앙(商)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法家)는 우민 정책과 법에 의한 획일적인 사회 통제를 주장하기 때문에 법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였으며, 특히 선왕 도를 내세워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진(秦)나라는 상앙 변법 이래 법치 노선을 견지하지만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은 변하지 않았는데, 시황(始皇) 34년(BC 213년) 유생이 진제국의 철저한 군현제 강행을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시황제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붙였으나,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李斯)는 그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진기 이외의 사서는 모두 불태우고, 《시》 《서》 백가어를 수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하여 불태우되 이를 어긴 자는 관노 성단(城旦)으로 삼으며, 감히 《시》 《서》를 논한 자는 기시(棄市)에 처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할 것, 단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자, 시황제는 이를 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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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통일과 황제지배의 출현

5.1.1. 황제의 탄생

B.C. 247년 진(秦)에서는 재위 3년만에 급사한 장양왕의 뒤를 이어 정(政)이 뒤를 이었다. 후에 시황제라 칭해지는 그는 당시 13살이었다. 당시 국정의 실권은 본래 한(韓)의 대상인 출신이었던 여불위(呂不韋)가 장악하고 있었다. 진은 이미 상앙변법 이래 구래의 씨족제를 타파하고, 귀족의 특권을 배제하여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꾀했다. 이와 동시에 부국강병책을 실시한 결과 전국 이후 진의 영토는 전 중국의 1/3에 달했고, 그 부는 1/2이 넘었으며, 기마전술로 무장한 군단은 갈수록 무적을 과시했다. 반면 나머지 6국은 정치개혁에 실패하거나 불철저하였기 때문에 진과의 국력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21세가 된 진왕 정은 노애(奴 )의 난의 계기로 여불위를 제거하고, 유능한 인재를 국적에 관계없이 발탁하여 동일정책을 추진하였다. 한나라의 정국(鄭國), 위나라의 위료(慰 ), 초나라의 이사(李斯)가 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사는 유가인 순자의 제자로서 진왕 정을 보좌하여 진의 정책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진왕 정은 내정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각국에 간첩을 파견해 군신을 이간시키는 방책을 채용해 교묘한 외교술과, 기마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무력을 통해 B.C. 230년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필두로 조(B.C. 228), 위(B.C. 225), 초(B.C. 223), 연(B.C. 222), 제(B.C. 221)의 6국을 불과 10년만에 평정하고 통일을 달성했다.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은 먼저 통일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가장 먼저 천하에 오직 하나 군림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권위의 확립에 나서 왕이라는 칭호의 개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답변확정된 것은 황제(皇帝)라는 칭호였다. 청조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약 2,100여년 동안 중국 역대 왕조에서 군주의 정식호칭으로 쓰여져 내려온 황제라는 용어가 이에 탄생되었다. 또한 이와 동시에 군주의 사후에 생전의 업적에 따라 추칭(追稱)하는 시호(諡號)를 불경(不敬)하다고 하여 폐지하였고, 초대는 시황제(始皇帝)로 시작하여 이후 2세황제, 3세황제로 만세에 영구히 전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와 동시에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를 짐(朕)이라 부르며, 황제의 명령을 제(制)라든가 조(詔)라 하여 황제의 전용어로 삼았다.

진왕 정이 자신의 칭호를 황제로 택한 이유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황제란 황황(煌煌)한 상제(上帝) 즉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절대신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일찍이 없던 위업을 이룬 진왕은 절대자가 된 자신을 지상에 출현한 상제게 비견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이 상제라면 하늘의 명을 받아 지상을 통치하는 인물 즉 천자(天子)보다 한단계 위인 것이다. 둘째 견해는 삼황오제라는 상고의 군주 칭호에서 따온 것이며, 지상의 최고군주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5.1.2. 진의 통일정책과 법치

6국의 평정 후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이 광대한 영토를 어떠한 방식으로 통치할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조정의 회의에서 승상 왕관(王琯)은 지리적인 광대함과 왕조 수명의 장점을 들어 주대에 행해졌던 봉건제를 채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정위(廷尉) 이사는 제후의 다툼으로 멸망한 주왕실의 멸망원인을 거론하며 진에서 전국시대부터 새로운 정복지를 대상으로 시행하던 군현제를 전 영토에 시행해야 한다고 반론하였다. 시황제는 이사의 견해를 받아들여 군현제를 답변확정하고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현을 두어 통치하였다. 군에는 지방관으로서 수(守), 군수의 보좌역으로서 문서와 사법을 관장하는 승(丞), 군의 군사를 주관하는 위(尉), 군수를 감찰하는 감어사(監御史)을 두었으며, 현에는 령(令)을 두고 그 아래에 현승(縣丞)과 현위(縣尉)를 두어 현의 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군현의 관리는 중앙에서 파견하였고,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는 관리로서 세습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임면권은 황제가 장악하였다. 군현제라는 이 통치방식은 중앙집권체제를 의도한 것이었다. 또한 이와 병행하여 전국을 통치하는 중앙정부의 기구로서 삼공구경(三公九卿)제를 정비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한대의 행정제도와 동일하므로 뒤에서 서술하겠다. 군현제의 시행과 동시에 지금까지 민(民)이라는 호칭을 검수(黔首)로 바꾸었다. 검수란 민이 검은 두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있다고 해서 나온 명칭인데, 인민이 황제의 직접 지배하에 있게 된 것을 확인하는 이 작업을 통해 모든 정치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는 전제적인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군현제의 실시와 더불어 각종 통일정책이 시행되었다. 먼저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전국시대에 각 국가마다 달랐던 도량형을 통일해 진량(秦量)·진권(秦權)이라 불리는 승(升)이나 분동(分銅)을 각지에 반포했다. 화폐도 각지의 포전(布錢)이나 도전(刀錢)을 모두 폐지하고 무게가 반량(약 8g)인 원형방공(圓形方孔)의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하였다. 그러나 최근 출토된 진의 반량전은 크기와 중량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그 출토지도 사천과 섬서를 중심으로 한 옛 진의 영토에 한정되어 있다. 이것은 진이 화폐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철저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멸망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6국의 병합이 불과 10년 정도만에 급속히 추진되었던 만큼 여러 제도의 통일에는 시일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수레의 폭을 6척(약 135㎝)로 통일하고, 전국에 걸친 도로망을 정비하였으며, 문자를 통일하였다. 통일된 수레바퀴의 폭은 한대에도 계승되었으며, 최근 조사된 한대 장안성(長安城) 성문에 남아 있는 바퀴자국의 흔적에서도 이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치도(馳道)를 건설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치도는 수도인 함양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연·제지역, 남쪽으로는 오·초지역에 이르렀다. 중원과 서남지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5척 넓이의 오척도(五尺道)를, 영남과 통하도록 신도를 만들었으며, 북쪽 오르도스지역을 넘어 구원군(九原郡)에 이르는 직도(直道)도 건설하였다. 이는 본래 지방의 반란을 신속한 군대의 이동으로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도로건설 때에 각국이 건설한 방어기지와 성채 등을 부수어 할거의 기반을 없애는 데도 도움이 되었고 이후 교통과 상업의 발달에도 기여했다. 이와 함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 문서의 행정이기 때문에, 문서의 행정에서의 의사소통을 원할히 하기 위해 이사가 고안했다는 소전(小篆, 진전秦篆이라고도 한다)으로 통일하였다.

또한 도로망의 건설에서도 나타나듯이 군사력을 국가가 독점하고 지방 반란 가능세력의 근절에 노력하였다. 민간의 병기를 몰수하여 함양에 모아 종거(鐘 )의 금인(金人) 12개를 만들었다. 종거란 악기인 편종을 걸어두는 지주를 말하는데, 그것을 청동으로 만든 인간의 모습이었고 하나의 무게가 약 30톤이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전국의 부호 12만호를 수도인 함양의 주변에 강제로 이주시켜 세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함양을 번영시키려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통일적인 법가적 통치정책은 더 나아가 역사상 악명높은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일컬어지는 사상의 통일로까지 발전했다. 분서란 서적을 불태워버린 것을 말하며 갱유란 자신의 통치이념에 반대하는 학자를 땅속에 묻어 죽인 것을 이른다. 학자 중에는 진의 획일적인 법치에 불만을 품고 옛 것을 찬미하며 시황제의 정치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B.C. 213년에 이사의 건의에 따라 직의 역사서와 의약, 복서(卜筮), 농업 이외의 서적을 몰수하여 30일내에 소각하였다. 그리고 이후 고서(古書)에 대해 논의하는 자는 사형, 옛 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 전체를 죽인다는 금령을 내렸다. 이 분서령은 이미 상앙의 변법을 통해 진국 내에서 실시되던 것인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사상을 법가로 일원화하는 정책은 결코 아니었다. 그 목적은 민간 소장의 서적과 사학(私學)을 금지하고 그것을 관이 소장하며 관학으로 일원화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분서령이 반포된 이후에도 수도 함양에는 여전히 유가의 경전이 소장되고 있었으며, 박사들에 의해 정리·연구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갱유는 시황제의 신선술에의 동경이 그 계기가 되었다. 분서의 다음해 자신을 속인 방사(方士) 노생(盧生)에 대한 화풀이에서 유학자를 포함한 460여명의 학자들을 함양에서 파묻어 죽였는데, 이것은 학자와 학문에 대한 탄압책으로 후세에 시황제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었다. 시황제의 장자인 부소(扶蘇)는 학자풍의 인물로서 갱유사건 때 시황제에 간언하였지만 도리어 부친의 노여움을 사 북변에 주둔중이던 몽염(蒙恬)을 감독하라는 명목으로 북변으로 쫒겨났다. 시황제의 주변에는 이제 그의 통치에 대한 비판자가 없게 되었다.

통일제국의 황제로서 시황제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태산에서 봉선을 실시하여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였다. 판도도 확정되고 국내통치가 본궤도에 오르자 통일한 다음해부터 순행(巡幸)에 나서 병사하기까지 10년 동안 치도를 통해 총 5회의 순행을 했다. 중국 고대에서는 천자가 천하를 돌며 지방정치나 백성을 생활을 시찰하였는데 이를 순수(巡守)라 하였다. 또한 태산(泰山) 등의 명산에 올라 통일과 민생안정에 대한 자신의 공적을 찬미하는 비석을 새겨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2차부터 5차까지의 순행의 의도에 대해서는 불로장생을 구하는 신선사상과 결부해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순행 도중 태산에서 천명을 받은 왕이 그 공업의 완성을 천지의 신에게 보고하는 제사인 봉선(封禪)을 거행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시황제의 순행도 형식적으로는 순수였지만, 정복지의 백성에게 황제의 위엄을 과시함으로서 통치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했다. 그러나 하루에 약 30㎏이나 되는 문서를 결재했을 정도의 정력가였던 시황제는 점차 노쇠해가면서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게 되었고, 장생을 기원하고 불사의 비약을 추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것이 진제국의 멸망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5.1.3. 진승·오광의 농민반란

진시황은 B.C. 210년 순행 도중 산동성 사구(沙丘)에서 병사하였다. 사망에 임박했음을 느낀 그는 장자인 부소의 제위 계승을 지시한 조칙을 남겼지만, 환관 조고(趙高)는 이 조칙을 묵살하고, 이사와 막내 호해(胡亥)를 끌어들여 조서를 위조하여 부소와 몽염에게 불효와 불충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내리고 호해를 즉위시키려고 획책하였다. 그 결과 부소는 자살하였으나 승복하지 않던 몽염은 체포되어 이후 자살하였다. 호해는 이세황제로 즉위하였고, 이듬해 조고를 낭중령(郞中令)에 임명하여 조고가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장악한 조고는 반대파인 종실과 고관을 숙청하였고, 이후 음모에 가담하였던 이사도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아방궁의 축조 등의 대공사에 동원되었으며, 요역의 징발과 가혹한 법치는 계속되었다. 이에 진제국에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다.

그런데 시황제는 생전에 세 가지 대토목공사에 착수한 바 있었다. 첫째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북방에 대해서는 B.C. 215년에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흉노(匈奴)를 정벌케 하였다. 흉노는 북방의 몽골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종족으로서 당시 군장인 선우(單于)의 지휘하에 부족이 통합되어 점차 남하하고 있었다. 몽염은 흉노를 황하 북쪽으로 쫓아내고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고 죄수 등을 강제로 이주시켜 수비를 굳건히 하는 한편, B.C. 214년부터 이 지역을 영구히 확보하고 흉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요동(遼東)에서 농서군( 西郡, 감숙성 임조臨 )에 이르는 총 5천여 ㎞의 장성을 쌓았다. 장성은 흙을 쌓아 굳힌 토성인데, 전국시대부터 연·조·진(秦) 등에서 북방 유목민을 막기 위해 쌓았던 것을 보수하여 연결한 것이다. 장성은 단순히 대립하는 두 세력의 경계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농경세계와 유목세계라는 자연조건을 기준으로 한 생활문화의 경계이기도 하였지만, 역으로 장성의 축조는 스스로의 세계에 대한 한계를 정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시황제는 B.C. 214년, 현재의 광동과 광서 및 베트남 북부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남월(南越)에 군대를 파견하여 진의 지배하에 복속시켰다.

다음으로는 여산릉(驪山陵)과 아방궁(阿房宮)을 건설했다. 아방궁은 B.C. 212년 효공 이래의 수도였던 함양이 좁다는 이유로 새로운 궁전의 조영을 개시하였다. 아방궁이란 그 전전(殿前) 부분인데, 그 지명을 취한 임시호칭인데, 준공되기 전에 진이 멸망해버렸기 때문에 정식명칭은 없다. 그 규모는 동서 약 690m, 남북 약 115m로서 1만 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궁이었다. 아방궁이 지상의 궁전이라면 지하궁전으로서 시황제의 즉위와 동시에 착공된 것이 여산릉이다. 소위 시황제의 능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묘는 거대한 분구(墳丘)로서 높이가 100여m, 한변이 500m인 정방형으로서 깊게 판 묘실안에는 궁전이 건조되고 백관의 자리도 정해져 있었으며, 사후에도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현세를 그대로 재현해 작은 중국세계를 만들었다. 1974년에 묘의 동쪽 약 1.5㎞ 떨어진 지점에서 유명한 병마용갱(兵馬埇坑)이 발견되었다. 이들 도용(陶俑)은 실물크기의 약 1.5배인데, 형태나 방향으로 보아 시황제의 묘를 지키는 친위군단으로 무장하여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지금까지 총면적 2만 ㎢에 달하는 병마용갱 안에는 7천 개에 달하는 도용이 매장되어 있다고 추정되는데, 발굴된 병마용갱이 시황릉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는 엄청나다.

만리장성과 치도의 건설 등은 통일중국의 유지와 미래를 위한 사업이었지만, 아방궁과 여산릉은 확실히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약간의 사치적인 성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들이 약 10년이라는 단기간에 대규모로 진행됨에 따라 엄청난 국력의 소모가 있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막대한 비용은 농민에 대한 중과세로 나타났고, 노동력은 의무적으로 강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여산릉과 아방궁의 건설에 죄수 70만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토목공사까지 합치면 연인원 300만 정도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당시 진의 호구수는 4백만 호, 2천만 명 정도였다고 추산되므로, 약 15% 정도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더욱이 노동가능한 연령층이 동원된 것을 감안하면 1호당 1명 꼴로 징발된 셈이다. 이세황제는 이러한 토목공사를 계승하였으며, 가혹한 법치와 함께 과도한 중세와 징발에 따른 농민의 부담은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진에 대한 반항의 기치를 든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두 빈농이었다. 이세황제 원년(B.C. 209)에 회수에서 가까운 대택향(大澤鄕)에서 두 사람은 북변을 수비하기 위해 징발된 농민 9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가혹한 진의 통치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다. 두 사람은 모두 초나라 출신이었으므로 초나라를 확장한다는 의미의 장초(張楚)를 국호로 삼아, 사방에 봉기 참여를 호소하였다. 과중한 노역과 가혹한 법치에 시달리고 있던 농민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살해하고 이에 호응하였다. 이 중 강소성 패현(沛縣)에서 병사를 일으킨 유방(劉邦)과 강소성 소주 부근 오중(吳中)에서 거병한 항우(項羽)가 가장 유력하였다.

그러나 진승과 오광의 봉기는 주력군이 진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함으로써 불과 반 년 만에 살해되고 그들이 세웠던 농민정권은 붕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봉기는 각지의 반진(反秦) 봉기를 유발하여, 마침내 B.C. 206년 진은 멸망했다. 또한 단기간이지만 왕조를 수립한 진승의 행동은 이후 유방에 의한 한왕조의 성립의 선구가 되었다. 진승의 장초정권이 멸망하자 항우와 유방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을 지냈던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신장이 8척(184㎝)이고 괴력을 지녔다고 한다. 유방도 초나라 출신이기는 하지만 농민 출신이었다. 어릴 때 유협(游俠)이 되어 떠돌아 다니다가 향리에 돌아와 치안을 담당하는 정장(亭長)을 지냈지만, 후에 군도(群盜)의 수령이 되었다.

항우와 유방은 초의 회왕(懷王)을 맹주로 하고 먼저 진의 수도인 함양에 입성하는 사람이 진의 본거지인 관중(關中)의 왕이 되기로 약속하였다. 항우는 진의 주력군을 격파하면서 진격하였지만, 유방은 진왕실의 내분을 틈타 먼저 함양에 도착하였다. 유방은 진의 궁전이나 창고에 봉인을 하여 이를 보전하는 데 주력했고, 또한 진의 가혹한 법치에 시달렸던 사람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법삼장(法三章)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법삼장이란 진의 법률은 모두 폐지하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상해입힌 자와 도둑질을 한 자는 각각 정도에 따라 처벌한다는 원칙이자 약속이었다. 유방보다 1개월 늦게 함곡관에 도착한 항우는 4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자웅을 겨루려고 하였다. 열세인 상황에서 유방은 항우의 진영으로 나아가 홍문에서 회견하였다. 이를 역사상 유명한 홍문지회라고 하는데, 항우는 결국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유방을 죽일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이후 함양으로 진격하여 진왕조를 멸망시켰다.


5.2. 한 제국의 건설과 한 무제의 중앙집권화

5.2.1. 고조의 즉위와 군국제의 실시

진을 타도한 후 항우는 진시황이 수립한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전국시대의 옛 체제에 대한 부활을 꾀했다. 회왕을 의제(義帝)로 옹립한 후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팽성(彭城, 강소성 銅山縣)에 도읍하고, 공적이 있던 나머지 18명의 장군을 왕으로 삼아 전국에 분봉하였다. 또 약속과는 달리 유방을 한중(漢中, 섬서 남부와 사천 북부)의 왕으로 삼았지만, 시세에 역행하는 분봉제는 새로운 전란의 씨가 되었다. 분봉된 지 1개월만에 제의 일족인 전영(田榮)이 반기를 들었고, 항우가 진압에 나선 틈을 타 유방은 관중으로 진격하여 그곳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항우와 대결하였다. 초와 한은 이후 수년간의 사투를 계속하였지만 관중이라는 천하제일의 후방기지를 확보하고 있던 유방이 병력이나 보급면에서 우위를 점하였으며, 결국 항우는 B.C. 202년에 자살하였다.

B.C. 202년 유방은 여러 왕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였다. 초대 황제가 된 고조 유방과 그를 받들어 한왕조를 창업한 집단의 대다수는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다. 한의 대신 가문인 장량(張良)을 제외하면, 패현의 서기 출신인 소하(蕭何)와 감옥간수 출신인 조참(曹參)이 가장 학문이나 지위가 있는 편이었고, 개도살꾼이었던 번쾌(樊 ), 행상이었던 관영(灌 ), 장례식 나팔수였던 주발(周勃), 마부였던 하후영(夏侯 ), 무직의 무뢰배였던 노관(盧 ) 등은 모두 유협과 무뢰 출신이었다. 유방과 이들 신하들을 결합시킨 것은 혈연관계나 지연관계를 넘어선 개인과 개인의 신의관계이며, 전국시대부터 사회적 습속으로 자리잡아 가던 임협적(任俠的) 결합관계였다. 즉 고조집단은 임협집단이었던 것이다.

황제로 즉위한 고조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이 집단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는데, 항우를 타도하기 위해 협력한 공신 7명은 왕으로 봉하고, 거병 이래의 공신들을 열후(列侯)로 봉했다. 열후에게는 1현을 단위로 한 봉읍이 지급되어 그곳에서 징수된 조세가 그들의 수입이 되었다. 이들 공신에 대한 처우는 한제국내에서의 공식적인 신분과 지위를 결정짓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임협적인 결합관계를 통일제국내에서의 황제와 신하와의 관계로 정산하는 것이었다. 반면 제후왕의 왕국의 크기는 큰 왕국의 경우 몇 개의 군, 몇 십개의 현에 이르렀고, 독자적인 기년법(紀年法)을 사용하였으며, 독립된 관료기구를 지니고, 중앙정부는 태부(太傅)와 행정을 총괄하는 상국(相國)의 임명권만을 가질 뿐이어서 독립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왕국과 후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진대의 군현제를 답변확정했는데, 이렇게 봉건제와 군현제를 병용하는 통치구조를 군국제(郡國制)라 부른다. 한초에는 103개의 군국이 존재했는데, 그 중 한 조정이 직접 장악했던 것은 15개 군에 지나지 않았고 왕국의 크기는 한 전체 영토의 2/3를 점했다.

그렇다면 봉건제의 부활이나 다름없는 군국제를 왜 채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여기에는 두가자 원인이 있었는데, 하나는 진이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종실을 우대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울타리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며, 보다 중요한 원인으로는 유방이 반란군을 조직할 때부터 이미 각지에 독립된 왕국이 존재하고 있어 이들을 왕으로 추인해 주면서 통일을 성취한 한왕조 성립과정의 문제였다. 따라서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이들 왕국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수도는 장안으로 정했는데, 그 이유는 위수(渭水) 분지가 비옥하다는 점과 그 서남쪽에 사천 분지를 끼고 있으며, 위수와 황하를 이용한 조운(漕運)이 편리하였다는 점 등과 함께 산과 강으로 둘러쌓인 천연적인 요새라는 지형적 요인을 감안한 것이었다. 장안은 군사적 성격을 갖는 고대도시의 전형이었다고 하겠다. 이와 더불어 소하와 숙손통(叔孫通) 등에게 한나라의 문물과 제고를 제정하게 하였다. 한왕조는 입협관계를 기반으로 성립하였기 때문에 전투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만 통일제국을 운영하는 데는 적합치 않았기 때문이다. 신생국가인 한은 행정능력에서 법치를 시행한 진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에, 건국초 그 대부분은 진대의 것을 계숭하였다. 그러나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진의 법술통치가 재등장하게 되었고, 무질서한 군신관계도 재정립하고 황제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지배왕조로서의 통치도 점차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어서 착수한 것은 장기에 걸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경제이 재건이었다. 진의 가혹한 법치로 궁핍해진 농민은 진한의 교체기에 벌어진 전쟁으로 유랑민이 넘쳤으며, 농경지는 황폐한 채 방치된 상태였다. 고조는 농민생활의 안정과 농업생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전쟁에 종군했던 군대를 해산하여 병졸을 귀향시키고, 그 공적과 연공에 따라 노역(勞役)을 면제시키거나 소규모의 토지를 주어 농업에 전념토록 하였다. 또 전란을 피해 도망했던 유랑민에게 원래의 경지와 택지의 소유를 인정하고 노비를 해방시켜 농경과 개간을 장려하였다. 특히 진의 가혹한 법도 대부분 폐지하고 관리들에게 관대하게 대처할 것을 명령하는 등 농민의 보호와 육성에 진력하였는데 이것이 백성과 더불어 휴식을 취하는 정책이었다.

국내통치의 기반을 수습한 고조에게 가장 현안으로 대두한 것은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며 자치가 인정된 이성(異姓) 제후왕국의 존재였다. 지방분권적인 이들의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고조는 모반을 구실로 삼아 차례로 이들을 억제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결국 즉위 후 수년 사이에 7명의 이성 제후왕 중 거리가 멀고 국력이 약했던 장사왕(長沙王)을 제외하고 모두 소멸되었다. 대신 이들 지역에는 종실인 유씨 일족을 봉건함과 동시에 "유씨가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을 남겼다. 이성 제후왕은 고조 시대에 모습을 감추었지만 동성 제후왕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진이 통일을 달성한 후 이사가 지적했던 봉건제도에 내재된 위험성 그것이었다.


5.2.2. 한대의 행정제도

고조가 죽은 후(B.C. 195), 장자인 혜제(惠帝)가 즉위하였지만, 병약하여 일찍 죽고 황태자가 없어 고조의 처인 여후(呂后)가 후궁의 아들을 내세워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였다. 여후는 이러한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여씨 일족을 왕으로 봉하면서 전횡하여 한왕조는 전복의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B.C. 180년 여후가 죽자 고조의 공신이었던 태위(太尉) 주발과 진평(陳平) 등이 여씨 일족을 죽이고, 고조의 서자로서 대왕(代王)이었던 유항(劉恒)을 맞아 제위에 올렸다. 이가 문제(文帝)이다.

문제와 그 뒤를 이은 경제(景帝)의 통치시기(B.C. 179-141)를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하여, 치세로 칭송되고 있다. 문제는 23년간의 재위기간 중 스스로 검약을 실천하며, 관료의 수를 축소시켜 경비를 절약하는 한편 빈농에게 종자나 식략을 대여해 주어 적극적으로 농경을 장려하였다. 문제는 고조가 정한 전조(田租) 즉 토지세를 1/15에서 1/30로 경감하였고, 만년의 12년간은 완전히 전조를 면제시켰으며 요역도 대폭적으로 경감하였다. 또한 형벌의 시행에 있어서도 연좌법을 폐지하고, 비방죄와 유언비어 날포죄를 제외하고는 언로를 개방하였으며, 신체에 손상을 가하는 육형(肉刑)을 폐지하였다. 이러한 무제의 통치방침은 도가의 영향을 받은 무위의 정치를 실현한 것이다.

경제는 전조를 부활시켜 1/30로 하였지만 그 외에는 모두 문제의 통치방침을 답습하였다. 오랜 전란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만큼 이러한 정치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사회생산력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경제의 회복과 번영의 이면에는 사회적 모순 또한 증대되고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회복되고 경제는 발전되었지만 그 결실을 거둔 것은 상인과 수공업자였다. 그들은 경제력을 이용해 농민의 토지를 겸병하였으며, 농민은 그들의 노비나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자가 등장했다. 이들은 호족층을 형성하면서 지방정치에 간여하기 시작하였고, 부의 축적이 이뤄졌다. 이미 가의(賈誼)는 문제시대인 B.C. 178년에 중농억상정책을 건의한 바 있다.

그러나 보다 중대한 정치적 문제는 대내적으로는 제후왕의 세력증대와 대외적으로는 흉노의 끊임없는 침략이었다. 고조 말년 제후황은 장사왕을 제외하고 모두 동성 제후왕이었으며 그 수는 9국에 이르렀다. 세력이 강한 제후왕 중에는 얼마 후 독자적으로 동광을 개발하여 동전의 주조권을 가지고, 염철을 생산하여 중국 전역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올리면서 부국강병책을 취하기 시작하는 자가 등장하였다. 왕국의 부와 세력은 점차 강대해졌지만 혈연관계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소원해져, 제후왕은 점점 한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문제 때인 B.C. 177년에 일어난 제북왕(濟北王) 흥거(興居)의 반란과 174년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의 반란을 계기로 중앙정부의 제후왕 억제책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방법은 영지의 분할과 삭감인데, 이를 주장한 인물이 가의와 조조(晁錯)였다. 이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문제와는 달리 경제는 강경한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국의 축소책에 나섰다. 이에 대해 오왕(吳王) 비( )를 주모자로 하여 초왕, 조왕, 제남왕, 교동왕, 교서왕, 치천왕 등이 간신 조조를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B.C. 154년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다. 경제는 난의 제공원인이었던 조조를 참수함과 동시에 주발의 아들 주아보(周亞父)를 장군으로 삼아 토벌에 나서, 불과 3개월만에 난을 평정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제후왕국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군국제는 외형적으로 존속하였지만 그 실질은 이전과 크게 달랐다. 제후왕을 왕국의 정치에서 분리시과 동시에 왕국 내의 관리는 상국을 비롯한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장악하였고, 조세의 징수도 그들의 권한이 되었다. 제후왕은 자국의 국정에서 배제되고 오히려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의 감시를 받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몇 개 군에 걸칠 정도로 광대했던 영지가 삭감되고 세분화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경제 다음인 무제 시대인 B.C. 127년에 추은령(推恩令)이 발포됨으로써 제도화되었다. 추은령은 황제의 은혜로써 제후왕국의 봉지를 모든 자제에게 분봉토록 한 것이다. 이로써 오초칠국의 난을 거치고 난 이후의 한의 군국제는 실질적으로 군현제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초 이래 북변을 자주 침략하여 약탈과 살육을 반복하던 흉노에 대한 대책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이 과제는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한 무제시대를 기다려 해결된다.

결국 문제와 경제를 거치면서 대내적으로는 한초 이래의 모든 현안을 거의 극복하였고, 후퇴했던 중앙집권체제도 다시 재확립되었다. 이러한 통치제도를 잠시 살펴보자. 우선 한의 중앙관제는 진대와 마찬가지로 삼공구경제를 답변확정하였고 지방관제는 직할지에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답변들
re: 중국통일(진나라 한나라)이 미친 영향

a3467 (2004-09-23 01:32 작성) 이의제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진나라의 통일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스럽던것을 진나라가 통일을 이뤘죠.
진나라는 엄한 법가 사상으로 부국강병책을 실행했습니다.
영향이라면 모든사상통제와 China란 이름이 생기게 됐습니다.
진의 멸망은 엄한 법가사상으로 인한 난에 멸망하게 돼었습니다.

한나라는 항우에 승리를 해서 통일을 하게 됐습니다.
딴 왕은 필요 없고 무제가 중요한데요 무제때에는 비단길을 개척했고 소금. 철의 전매제. 즉 소금과 철을 국민들에게 비싸게 팔았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돈으로 전쟁 비용에 쓰게 됐죠.
그리고 진나라때의 사상통제에서 관학화가 발전이 되었습니다

명망은 황건적의 난으로 멸망을 했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그걸 찾고 싶으면 친구에게 항우와 유방책 1권을 빌려서 찾아보셈
그러면 님이 궁금한게 다 나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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