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냉면이 유명한 이유

북한에 냉면이 유명한 이유

작성일 2014.06.2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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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도덕 숙제로 26일까지

북한에 냉면이 유명한 이유 조사해야 하거든요...

왜일까요?알려주세요~

답변은 적지도 않고 길지도 않게 해주시고요,

내공 냠냠,욕 신고하겠습니다~

(내공 50걸어용~)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탈북한 함흥사람들이 보고 기겁하는 남한의 함흥냉면 (119)

by 주성하기자   2012-09-10 7:43 am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여름 너무 무더웠죠. 서울도 폭염으로 8월 초에 한 열흘 동안 매우 고생이 많았습니다.

 

여기는 에어컨이라고 찬 바람이 나오는 가전기구가 있어 그나마 좀 낫습니다.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가면 시원하거든요.

 

그런데 선풍기조차 변변히 없는 북녘 여러분은 이런 무더위를 어떻게 견뎠겠나 싶습니다. 하긴 뭐 저도 북에 있을 때는 더워도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참았습니다.

 

이렇게 더울 때면 서울에서 제일 잘 팔리는 음식이 뭐냐 하니 바로 평양냉면입니다. 평양에 서울냉면 이런 식당이 있으면 이상하겠지만, 여기 서울엔 평양냉면이 아주 당연하게 있습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정말 여기저기 평양냉면집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냉면 하면 그냥 다 평양냉면으로 통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많은 것이 함흥냉면입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제외하면 남쪽에는 어느 지방을 대표하는 냉면이 거의 없습니다. 평양냉면이라고 하는 집은 서울에도 수백 개가 넘을 것이고, 저기 부산, 대전, 목포 등 한국의 어느 지방에 가도 평양냉면집이 있습니다. 함흥냉면도 똑같습니다.

 

여기서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나 어떻게 구별 하나 하면 평양냉면은 육수에 빠진 메밀국수이고 함흥냉면은 농마비빔국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육수에 메밀국수를 말아주는 식당은 평양냉면집, 육수가 없이 양념장에 농마국수를 비벼주는 식당은 함흥냉면집입니다.

 

참 이야기하다 보니 무더운 여름도 다 지나간 지금 철 지난 냉면 이야기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고, 또 여러분이 방송 듣는 자정 무렵이면 출출하실 텐데 군침이 나오게 먹는 이야기해서도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한국에 처음 와서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 길을 지나가다가 함흥냉면집을 보았습니다. 그때 제가 알고 있는 함흥냉면은 농마국수였거든요.

 

그래서 “야, 서울에서 농마국수를 다 먹어 보겠구나”하고 들어갔는데, 이게 나오는 국수가 참 이상한 겁니다. 물도 없고 뻘건 양념장과 배를 썬 것, 계란 반쪽 이런 것이 국수위에 부어져 있는데, 훌훌 비벼먹다 보니 맛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정말 달아서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원래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면 여기 음식이 너무 달아서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합니다. 여긴 음식에 사카린은 안 넣습니다만 사탕가루를 왜 그리 많이 뿌리는지. 저는 10년을 살아 어지간히 입맛이 적응됐습니다만 지금도 어떤 식당에 가면 달아서 못 먹습니다.

 

그 달아서 못가는 어떤 식당 중에 함흥냉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원래 제가 알고 있는 함흥냉면은 육수가 있는 감자 농마국수거든요.

 

함흥에 동흥산 아래에 있는 신흥관, 평양 메밀냉면의 중심지가 옥류관이라면 함흥 농마국수를 대표하는 냉면집이 신흥관 아닙니까. 거기 냉면이 왜 남쪽에 와서 이상하게 오리가 아주 가늘고 달달한 회냉면으로 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재료도 고구마의 전분과 서해안의 간재미 회고 어떤 것은 홍어회까지 올라가는 등 함흥에는 없는 재료로 만든 이 국수가 정체가 뭐냐 싶습니다.

 

원래 북한 음식들이 대다수가 1950년대 월남한 실향민들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으니 일제 때 함흥냉면은 비빔냉면이었는지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지금 북한에서 알고 있는 함흥냉면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 북한의 가장 유명한 함흥냉면집인 함흥 신흥관의 함흥냉면과 신흥관 모습.

 

저는 지금 북한의 함흥에서 파는 그런 감자 농마국수를 먹고 싶지만 이상하게 남쪽엔 그런 식당이 없네요.

 

양강도 감자를 수입해서 농마국수를 만들어 팔면 어떨까 싶지만 또 그런 음식은 여기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장사하다간 식당 망할 확률이 높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언감자 국수는 아예 찾아볼 수도 없구요.

 

함흥냉면에 비하면 평양냉면은 옥류관 국수와 비슷합니다. 물론 제 입맛에는 옥류관 국수가 최고고 여기 냉면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지만, 또 여기 사람들 보기엔 안 그럴 수 있죠.

 

과거 남북회담 때 평양에 취재 가서 옥류관 국수를 먹어본 제 신문사 선배들이 말하는 옥류관 국수는 너무 슴슴하답니다.

 

서울에도 1940년대 해방이 돼서 남쪽에 내려온 평안도 출신 실향민들이 만든, 그때부터 따지면 역사가 70년은 되는 냉면집들이 몇 개 있습니다. 저도 잘 가는데, 가면 젊은 사람들보단 할아버지들이 참 많습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은 슴슴한 평양냉면은 싫고 단 평양냉면이 좋은 것 같은데, 유서 깊은 냉면집들은 맛이 슴슴하거든요. 그러니 옛 맛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 같은 노인들이 많이 오는 것이죠.

 

하지만 40대 넘어가면 이런 음식도 입에 맞는지, 제 회사에서도 이 냉면집파와 저 냉면집파 이런 식으로 냉면 파벌이 존재합니다. 오랜 전통이 있어도 식당마다 맛이 좀 다른데, 그러다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냉면집이 다르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곳에 다 가 봐도 저는 옥류관이 제일 맛있습니다. 제가 옥류관 냉면 처음 먹어본 지도 20년이 넘었는데요.

 

아직도 처음 먹었을 때 너무 맛이 있어서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냉면도 있구나”하고 감탄했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전에 가서 두 그릇 반까지는 먹고 배가 불러 더 못 먹고 두 손을 들었던 기억도 있구요. 제가 평양에 다시 가면 아마 제일 먼저 옥류관부터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1998년인가 어떤 탈북자가 서울에 옥류관이란 이름을 딴 냉면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북에서 대남방송에 대고 “서울에서 옥류관 상표 도용하는 가짜 냉면집이 생겼다”고 불어대서 여기 사람들이 “아, 그 식당 이름만 옥류관이고 가짜구나”하고 알게 되면서 몇 년 못 버티고 망했습니다.

 

이름만 옥류관이면 뭐합니까. 맛도 옥류관이어야 사람들이 오는 것이죠.

 

그렇지만 냉면집으로 유명해진 탈북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까지 하기엔 시간이 모자라서 다음에 마저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9월 7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평양 옥류관과 가장 맛이 비슷한 한국의 냉면집은 (113)

by 주성하기자   2010-08-09 4:55 pm

언제부터
평양냉면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써보려 했지만 다 못 가본 냉면집들이 있어 미뤄왔는데,
그러는 사이 삼복도 성큼 절반이 지나갔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비록 못가 본 냉면집들이 있기는 하지만, 한번 올려봐야겠다고 마음먹고
글을 쓴다.

 

한국에서
유명한 평양냉면은 대체로 서울에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충무로의 필동면옥, 을지로의 을지면옥, 우래옥, 장충동의 평양면옥,
마포의 을밀대, 강남의 봉피양, 다동의 남포면옥, 신촌의 고박사집 등이 검색된다.

 

대충
유명한 집들은 다 포함된 것 같다. 정말 유명한 집인데 내가 못가본 집이 있다면
추천해주시길.

 

열거한
냉면집들은 다 가봤는데, 이중 남포면옥은 빼고 싶다. 과거에는 어쨌는지 몰라도,
지금은 국수에서 파마약 냄새가 난다. 슈퍼에서 파는 평양봉지냉면을 잘 씻지 않으면
그런 냄새가 난다. 그런고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으련다.

 

일단
냉면맛의 기준점은 평양의 유명 냉면집인 옥류관에 두려한다. 대학 때 같은 학급
사람의 여자친구가 옥류관에 근무해서 옥류관은 참 많이 가서 먹어봤다.

 


대동강가에
자리잡은 옥류관

 

옥류관에
갈 때마다 오늘은 꼭 3그릇 먹어야지 하고 마음먹고 가지만 내 기록은 2그릇 반이었다.
참고로 대학 때는 배고픈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때 서울에 가져다 놔도 3그릇은 먹었을
것 같다. 그만큼 옥류관 냉면은 양이 많았다.

 

하지만
옥류관이 남쪽의 입맛을 고려할 때도 기준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옥류관에
갔던 사람들은 맛이 슴슴하다고 평가한다.

 

예전
그러니깐 1990년대에 남쪽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평양에 가서 옥류관에 가서 국수를
먹었더니 안내하는 북한 사람이 은근히 칭찬을 기대했는지 아이들에게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생각 없이 “서울이랑 맛이 틀려요”하고 대답했다. 서울에선 “틀려요”가 “달라요”와
같은 의미이지만 북한에선 부정적 의미로 쓴다.

 

그랬더니
안내원이 “남조선에선 아이들에게까지 부정적으로 대답하게 정신교육 시키고 왔다”고
문제 삼더란다. 한나절 이 문제로 시끄러워졌다고 한다.

 

아무튼
이건 여담이고 어쨌든 옥류관이 천하에 절대적인 냉면 맛의 기준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옥류관의 주요특징은 쟁반냉면인데 서울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않은 것도 차이점이다.

 


옥류관
냉면

 

그럼에도
옥류관이 냉면의 본고장 평양에 있는 냉면이고 또 내가 평양에서 살다 왔으니 남쪽에서
‘평양냉면’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냉면에 대해 평가를 내릴 수는 있다고 본다.

 

남쪽에
와서 냉면을 먹어 봐도 내 입맛에는 옥류관을 따라올 냉면집이 없다.

 

그렇긴
해도 나는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들이대도 미식가는 아닌 것 같다. 냉면의 맛에 대해
유려한 설명과 비유를 들 자신도 없다.

 

그러니
그냥 내가 먹어본 소감에 대해 적으려 한다. 다른 사람과는 의견이 충분히 다를 수는
있다.

 

일단
내가 먹어 본 중 한국에서 냉면맛이 좋았던 냉면집은 서울이 아닌 부산에 있었다.

 

부산의
‘원산면옥’이다. 자갈치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그곳 냉면이 먹고 싶어
부산에 또 가고 싶다.

 


 


집도 1세가 돌아가셔 2세가 물려받은 뒤로 맛이 갔다는 평가도 있지만, 아무튼 서울에도
1세가 하는 냉면집은 거의 없으니 그건 마찬가지다.

 


다음 순위는 나는 을지면옥과 우래옥으로 꼽는다. 을지면옥은 육수가 좋고 우래옥은
면발이 좋다. 둘의 장점을 섞으면 매우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동면옥도
유명한데 을지면옥과 자매가 운영하기 때문에 맛이 비슷하면서도 나름 다르다. 필동냉면이
언니, 을지면옥이 동생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필동면옥,
을지면옥, 우래옥은 옥류관보다는 김일성대 앞에 있던 룡흥식당(? 오래돼서 기억력도
가물가물…) 국수맛과 더 비슷해 보인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김일성대 주변에 식당이 손으로 꼽아봐야 너댓개 정도밖에 없었다.
이중에서도 손님의 90% 이상이 김일성대 학생들인 지하철 삼흥역 앞 룡흥식당은 김대
졸업생들이라면 누구나가 각별한 추억을 갖고 있을 국수집이다.

 

물론
이 집도 고난의 행군 이후로 맛이 갔지만 그 이전에는 맛이 상당히 괜찮았다.

 

평양면옥은
모든 평양냉면집들 중에서 맛이 가장 슴슴하다. 내 입맛에도 너무 슴슴해서 을지면옥과
우래옥보다는 약간 못한 것 같다.

 

동기
기자 중에 한명이 평양냉면 팬이 있는데, 그가 들으면 섭섭할지 모른다. 그의 할머니가
평양에서 오셨는데 할머니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평양냉면집을 다니면서 맛 들였단다.

 

나도
서울에서 가장 먼저 먹어본 것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은
2순위에 들 수 있지만 을지면옥이나 필동면옥, 우래옥보다는 약간 못한 것 같다.

 

나는
3순위로 평양냉면과 봉피양을 꼽는다. 이 두 국수집은 평양냉면계의 탈레반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호불호가 뚜렷이 갈릴 수 있지만 내 입맛에는 2순위보단 못한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니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을 안 뒤엔 두 냉면집을 가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나도 마포의 을밀대에 많이 가봤다. 을밀대는 굵은 메밀면발이 독특하다. 물론 을밀대의
면발 굵기는 북한식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질긴 정도는 북한과 다르다. 북한
냉면이 좀 더 질기다.

 

봉피양도
서너 번 갔었는데 특징은 육수가 매우 진했다. 평양냉면과 대척점이 있는 맛이다.

 

신촌고박사집은
가보긴 했는데, 맛이 뚜렷이 기억에 남지 않아 순위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느껴지는
맛이 없이 평가한다는 것은 무성의하기 때문이다.

 

서비스는
가본 중에는 우래옥이 제일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신 좀 비싸다. 봉피양도
최근에 가격이 많이 올랐다.

 

가격을
밑에서부터 꼽으면 원산면옥이 6000원, 모란각이 6500원, 을밀대, 을지면옥, 필동면옥이
8000원, 우래옥 1만원, 봉피양 1만1000원이다. 봉피양이 저렇게 비싼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봉피양
1그릇이면 원산면옥이나 모란각 냉면 거의 2그릇이다.

 

남한에
오니 면을 가위로 잘라 먹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물론
남한 면발들이 일반적으로 북한에 비해 매우 가늘고 질긴 탓도 있겠다고 본다.

 

하지만
원래 면은 가위로 잘라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잔칫집이나 환갑(요새는 남쪽에서 잘 쇠지 않지만 북에선 매우 큰 예식이다)을
치르는 집에 가면 국수를 내놓았다.

 

국수면발처럼
길게 오래 살라는 뜻이다. 그런데 명을 의미하는 면을 가위로 뚝뚝 잘라버리면 단명하라는
뜻이 돼버릴 수 있으니 옛 조상들이 와보면 펄쩍 뛸 일이 아닐까.

 

가위로
자르지 않으면 처음에 휘젓는 것이 좀 힘들 수는 있지만 면을 후룩후룩 들이켜서
이로 잘라먹는 것은 습관 되면 괜찮다. 사람에 따라서 이로 면을 잘라내는 과정에
국수의 또 다른 진짜 맛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소문을
들었던 유명 냉면집 중에 딱 한군데 못 가본 것이 아쉬운데, 그곳은 대전 유성 숯골원냉면이다.
언제부터 가본다고 하면서도 못 가봤다. 대전에 가면 꼭 들릴 예정이다.

 


아쉽냐하니 다름 아닌 부산의 원산옥을 추천해주신 분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냉면집으로
원산옥과 숯골원냉면을 꼽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시는 분이다.

 

나머지
냉면집은 별로 명성을 못 들었기 때문에 못가서 아쉬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서울의 유명 냉면집을 검색하면 잘 나오진 않지만 ‘모란각’의 냉면도 상당히 맛이
괜찮다. 옥류관의 맛과 흡사하게 하느라 많이 노력한 냉면이다.

 


모란각
냉면

 

모란각은
장사가 잘 안돼서 그런지 현재 일산에 유일하게 본점이 남았는데 네비에 치면 안내해준다.
그렇게 없어지기엔 너무 아까운 맛이라고 생각해 한번 가보시라고 추천한다.

 

모란각의
주인이 귀순자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서 추천하는 것은 하늘에 맹세컨대 절대
아니다.

 

모란각에선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냥 평범한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냥 주문하고 돈을
내고 나온다. 하지만 평균 두 달에 한번은 가는 것 같다.

 


집 냉면맛은 굳이 순위에 포함시키면 2순위 정도는 든다고 본다. 한번은 평양 출신
사람 몇 명을 데리고 갔더니 맛이 괜찮다고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냉면맛을 평가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맛이 어느 냉면집에
길들여 있는가가 아닐까 본다.

 

동기처럼
어려서부터 평양냉면을 즐겨 찾았다면 제 아무리 평양의 옥류관 본점에 갖다 놔도
평양냉면이 제일 맛있을 것이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서울에 옥류관이라는 국수집이 없다. 예전에 어느 탈북자가 ‘옥류관’이라는 브랜드의
식당을 강남쪽에 냈지만, 브랜드를 놓고 법정공방까지 가면서 시끄러워졌고, 여기에
북한까지 가세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문을 닫았다.

 

진짜
북한 옥류관이 서울에 진출할 뻔 했던 일도 있다. 2000년 6.15정상회담이 있고 그해
10월 북측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해 옥류관 분점 개설을 추진했다.

 

당시
북한은 건물의 설계에서부터 조리사 파견, 재료운반 방안 등 세부사항까지 제시하면서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훗날 어찌된 영문인지 진척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북한이 붕괴되면 서울에 옥류관의 브랜드를 빌린 식당이 많아지리라는
점이다. 그때면 남한의 자본이 평양 옥류관의 우수한 요리사들을 평양에 가만히 앉혀두지
않을 것이 분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새는
왠지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든다.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김정일의 여인’이 밝히는 김정일의 사생활(1부-선발) (76)

by 주성하기자   2010-01-18 5:16 pm

 그녀에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얽힌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김정일의 기쁨조 일원이었다고 주장한 여성은 이전에도 여럿 있었고 새로 들어오는 탈북자
중에서도 자기가 기쁨조였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것은 팩트의 차이다. 아무리 책에서 본 내용을 짜깁기하고
없는 사실을 꾸며대더라도, 자신이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런 말은 조금만
들어봐도 어설프다.

 

  또 하나. 특히 이러한 주장에는 단 한 곳도 손댄 흔적이 없는 자연적인 미모와 날씬한
몸매, 매력과 같은 결정적인 ‘증거’가 따라야 한다.

 

  그녀가 그렇다. 그녀는 현대의학의 혜택과는 연관이 없는 미인이다. 북한에서 중앙당 소속
사진사가 찍어주었다는 10대 시절 사진 속의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동안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정일의 와병설이 터진 올 초부터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이 글은 그녀와의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내용이다. 김정일의 사생활은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이지만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 글은 그의 사생활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에 의해 일부러 쓰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다.

 

  지금까지 저에게 김정일과 관련됐었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으면서도 굳이 기사화는 피했던 이유가
있나요?

 

  이유를 굳이 꼽아보라면 많죠.

 

  우선은 김정일의 기쁨조였다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싫어서요. 사람들이 마치 저를 김정일의 성노리개였던 것처럼 바라볼까봐 두려웠죠.

 

  저는 김정일과 2년 가까이 함께 했었지만 잠자리까지는 같이 하지 않았었거든요. 그리고 사실 북한에는 기쁨조니, 만족조니 하는 말조차 없어요. 여기서 다 지어서 붙인 것이지요.

 

  그리고 제 신상에 김정일 옆에 더 있기 어려운 일이 터졌을 때, 그가 저는 특별히 살려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어요.

 

  원래 저같이 그의 옆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던 사람은 살아서 그곳을 벗어나기 힘들거든요.어쩌면 김정일이 저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저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볼 수도 있죠.

 

  남한에 입국해 합동심문을 받을 때 과거 경력들을 숨겼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되겠네요. 김정일과 있었던 이야기는 다 숨기고 평범하게 살 다 온 것처럼 이야기 했어요. 국정원에서는
지금까지도 제가 어떤 여성이었던지 잘 몰라요.

 

  예전에 어떻게 하다 보니 해외 언론에 한번 나갔던 적이 있어요. 그 나라 말을 모르다보니 그 곳 언론에 어떻게 소개됐는지 알리 없었죠.

 

  훗날 한번은 사실을 왜곡한 기사가 나가 항의했더니 “그럼 소송거세요. 여긴 외국이라 이기려면 아마 수십 년이 걸릴걸요”하는 거예요. 정말 화가 나더군요. 그런 체험을 통해 언론 기피증도 생겨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은 언론에 나가도 되는가요.

 

   늘 기사를 쓰고 싶어 했잖아요? 제가 결국 항복한거죠.(웃음)

 

  이건 농담이에요. 대신 너무 캐묻진 마세요. 사실 이것이 국가를 위해 중요한 정보인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 불과하잖아요. 제가 사실 입을 열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지금도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고 싶진 않네요.

 

  그냥 김정일이 병에 걸려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니 인생무상이란 말이 떠오르더군요. 어차피 그가 죽은 뒤에 다 공개될 일인데 지금 말하면 어떻고, 말하지 않으면 어떻고, 아무튼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 말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도….

 

  그리고 이제는 시간도 많이 흘러갔어요. 제가 김정일의 옆을 떠났던 때로부터 벌써 12년이 지났어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김정일의 옆에는 어떻게 가게 됐는가요.    

 

  제 의지는 아니지요. 북한에는 매년 중앙당 간부들이 전국의 학교를 훑으면서 학생들을 선발해요. 아마 탈북자들은 누구나 다 알거예요. 이것을 5과에 뽑힌다고 하죠.

 

  5과에 대해선 더 이야기 하지 않을게요.

 

  저도 거기에 뽑혔지요. 5과 대상자 선발은 매년 하는데 중앙당 간부들이 한번 학교를 돌 때마다 3개 학년의 학생들을 둘러보고 찜을 해놔요.

 

  저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예술관련 특목고를 다녔습니다. 저희 학교엔 미모가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어요.

 

 처음에 어떻게 뽑히는가요.    

 

  제가 5학년 때인데 수업시간에 40대 정도의 중앙당 남녀 간부가 들어왔어요.

 

  “너, 너, 저기가 서라”하면서 일단 몇 명을 뽑은 뒤, 뽑히지 않은 학생들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지요. 혹시 빠뜨린 학생이 있나 해서요.

 

  그 다음에 자기들이 뽑은 학생들을 상대로 여러 미션을 시켜요.

 

  “잘하는 것이 뭐냐. 해봐라” “가장 못된 표정을 지어봐” 이런 것들인데, 보면서 저들끼리 낄낄거리기도 해요.

 

  중앙당 간부 앞에 나섰다는 마음으로 긴장한데다, 어떤 때는 정말 난처하고 황당한 미션도 시키고 하니 심지어 오줌을 지르는 학생도 있어요.

 

  저에게는 춤을 추어보라고 하고, 가장 예쁜 표정을 지어보라 하더군요.

 

  그렇게 추려낸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요.

 

  교무실에 가서 부모 이름, 가족사항, 담임선생 이름 등을 다 기록해요. 그 자리에서 그 중년 남자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너 남자랑 잤어, 안 잤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때 제가 만 15살 정도였는데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리고 뽑힌 학생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건강검진을 해요. 병이 없나 이런 것을 검사하죠. 이렇게 최종 뽑힌 학생이 우리 학원에 열 댓 명 정도 됐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몸가짐 잘 하고 남자랑 연애랑 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사라졌어요. 5과 대상자로 뽑히니 그 다음부터 선생들은 “재들은 5과 갈 아이들”이라면서 수업에 안 참가해도 뭐라 안하고, 아무튼 누구도 저희를 터치하지 않았어요.  

 

  뽑는 절차가 그렇게 간단한가요?

 

  당연히 아니죠.  1년 뒤, 그러니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중앙에서 아주 멋진 병원차가 내려왔어요.

 

  이번 검사는 정말 깐깐하게 진행됐죠. 그리고 두 번째 검사에서 저희 학교에선 딱 3명만 선택됐어요.

 

  차라리 1차 검사에서 떨어지는 것이 나아요. 2차 검사에서 떨어지면 남자랑 자서 떨어졌다고 다른 애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아요. 그리고 여자만 뽑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뽑아요.

 

  남자들은 주로 어떤 곳에 쓰나요.

 

  남자도 뽑혀서 위로 올라가면서 부류가 갈라져요. 친위대에 가는 애들도 있고 어떤 애들은 김정일 사냥터에 가서 10년 동안 비밀리에 콩 농사만 짓다가 제대되는 애들도 있어요. 사냥터에
꿩이랑 많이 오게 하기 위해 콩 농사를 지어 수확하지 않고 밖에 그대로 방치해 두거든요.

 

  5과에 가면 휴가도 안 보내고 편지도 집에 못하게 해요. 아예 10년 동안 가족과 단절시키는 것이죠. 그것도 모르고 부모들은 아들이 5과에 뽑혀가서 가서 장한 일 한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거죠.

 

  콩 농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돼지를 치는 5과도 있고, 과수나무 가꾸는 5과도 있고. 아무튼 멀쩡한 젊은 애들을 뽑아서 김정일과 중앙당 간부들 뒷바라지 시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얼굴과 성격, 심성을 가장 많이 봅니다. 내성적인 성격이어도 잘 뽑히진 않아요.

 

  최종까지 올라가면 사진을 정면, 옆, 뒤로 아무튼 다양한 각도로 정말 많이 찍습니다. 검사할 때 자를 갖고 얼굴 비례를 재고, 찍은 사진을 확대해 자로 재는 등 몇 차례나 얼굴을 재서 눈 길이는 얼마고 입과 턱 사이 거리는 얼마고 하는 것들을 정밀하게 기록해요.

 

  키는 158~165㎝ 사이에서 뽑아요. 저의 경우에는 당시 158㎝였는데 신체검사를 한 사람들이 “딱 2㎝가 모자란다”면서 농담조로 “집에 가서 부모들에게 손발을 잡고 쭉쭉 늘여달라고 해라”고 시켰어요. 그러면서 “아직 17살이니 좀 크겠지”하고 저들끼리 말을 주고받았어요.

 

  최종에서 뽑힌 여자애들이 모두 10명이었는데 제 키가 제일 작았어요.

 

  나와 키가 비슷한 애가 한 명 있었고 나머지는 저보다 컸습니다. 다만 165㎝이상은 뽑지 않습니다. 김정일의 키가 작기 때문이죠.

 

  목소리가 남자 목소리 같다든지, 앵앵거린다든지 해도 뽑지 않아요.

 

  그리고 몸에 흠집도, 얼룩도 없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 최종 단계에서 어렸을 때 넘어지면서 팔에 생긴 흠집 때문에 정말 많이 고민하더군요(그녀의 팔에는 정말 주의 깊게 봐야 보이는 약 1㎝ 크기의 흠집이 있었다).

 

  그래서 저를 김만유 병원과 봉화진료소에 데리고 가더군요. 나이 지숙한 의사들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고 했는데 어쨌든 수술은 하지 않기로 결론 난 것 같아요.

 

  “오랫 만에 북데기에서 진주를 골랐는데, 딱 두 가지(키와 흠집)가 걸리네”하면서 몹시 아쉬워하더군요. 어쨌든 저는 1,2차 시험에는 합격됐어요. 이제 평양에서 전국에서 모집해 온 여성들과 다시 비교한 뒤 최종적으로 선발하는 3차 관문이 남았습니다.

 

(※이번 연재의 주요내용은 신동아 12월 호에 연재됐었다. 그러나 신동아에는 원고지 약 50장에 해당하는 분량이 지면제한으로 잘렸다. 이 글은 신동아에 나가기 전의 초기 원고이다. 특히 이번 글과 다음 글의 선발과정 부분은 이 블로그를 통하여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2부) 혈서로 맹세하고 김정일의 여인으로. (65)

by 주성하기자   2010-01-19 6:05 pm

 (앞글에 이어)

 

 2차에서 통과된 뒤에는 어떻게 하나요.

 

  2차에서 통과되면 집에 가서 한 보름정도 쉬게 한 뒤 다시 불러요.

 

  이때는 전국에서 뽑힌 학생들이 다 평양에 모여 고급 호텔에서 묵어요.

 

  4인1실 씩 쓰는데, 나흘 동안은 별로 큰 일이 없이 지내요.

 

  이때 보면 참 가관이에요. 여자애들 사이에 질투와 경쟁심리가 엄청 강하거든요.

 

  밤새 웃는 훈련을 하는 애도 있고, 오이팩을 바르고 누워있는 애도 있고 아무튼 모두 난리도 아니에요. 빵도 나누어 안 먹고, 화장품도 서로 나누어 쓰지 않고 그래요.

 

  원래 북한에서 학생 때 화장을 못하게 하는데, 예술 분야에서 많이 뽑아서 온 애들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미모가 출중해 제노라 하고 다녔던 애들이어서 그런지 화장에 상당히 눈들이 빨리 튼 것 같았어요.

 

  그때 벌써 오이팩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북한에선 누구도 몰랐는데 말이죠.

 

  기억나는 것이 그때 닭튀김을 주었는데, 처음 먹어봤어요.

 

  북한에서는 닭은 백숙해서 먹지 기름에 튀기질 않거든요. 하지만 맛이 없어서 애들이 고기를 다 버리고 뼈만 씹어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최종 심사는 언제 합니까.

 

  나흘 동안 묵다가 닷새 째 되는 날에 버스로 태워 어딘가 데려가더군요.

 

  전국에서 온 학생들이 대략 30~40명 정도 됐는데, 남자가 15명 정도였어요.

 

  거기서 시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렇게 한해에 많이 뽑아온 일이 없었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최종 시험에선 신체검사는 더 하지 않고, 사진을 엄청 찍어요. 확대사진, 전신사진 등등 많이 찍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을 해갖고 온 애들이 있어요.

 

  그런 애들은 모두 세면장에 들어가 얼굴을 씻고 오게 해요.

 

  그리고 그때 북한에선 머리를 여러 갈래도 따고 잤다가 아침에 풀어놓아 푸시시하게 보이는 그런 머리가 유행했었는데, 그런 머리를 하고 온 애들도 있었어요. 욕을 막 하더군요.

 

  그리고 또 한 명 한 명씩 잘하는 것이 뭐냐고 묻기도 하고, 해보라고 하기도 하죠.

 

  이 최종시험을 총괄하는 여자가 기억나요.

 

  까만 승용차를 타고 왔는데, 까만 색안경을 끼었고, 까만 가죽잠바에 무릎까지 오는 까만 장화를 신었어요. 새파랗게 젊은 여자 앞에서 다른 나이 많은 사람들이 다 공손해지더군요.

 

  마지막 시험에서도 탈락자가 생기나요.

 

  당연하죠. 그러나 누가 떨어지는지는 모르죠.

 

  시험이 끝나면 집으로 돌려보내요. 한 나흘 정도 있다가 중앙당에서 벤츠 승용차가 집에 옵니다. 동네에서 볼세라 밤에 옵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 딸을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게끔 훌륭하게 키워 감사하다는 식의 글이 적힌 감사패를 줍니다.

 

  특이한 점은 돈도 주는데, 당시 노동자 월급과 비교해 보면 거액이었어요. 헌데 그땐 물가가 너무 올라 시장가치로는 거액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요.

 

  어디로 데려가던가요.

 

  저는 그곳이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방에 들어가니 양복을 입고 배가 나온 남자가 앉아있던데, 책상 위에 큰 책이 놓여있었어요.

 

  크기는 이만큼(그녀가 그린 사이즈로 보아 길이가 약 70㎝, 너비가 50㎝ 정도 되는 대형 사이즈였다) 큰 데 표지는 검붉은색이나 자두색 비슷하고, 테두리는 금테를 둘렀어요.

 

  표지에는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5과 위원회’ 하고 그 옆에 무슨 숫자가 있었는데, 제 생각에는 우리 기 번호가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펼치는데 보니 한 사람당 3페이지 정도가 할당돼 있어요.

 

  첫 장에는 저의 이름, 부모 이름, 가족사항, 학교평점, 성적 등등 인적사항이 적혀 있고, 세 번째 장에는 그동안 3차 시험까지의 평가와 신체검사 결과 등이 적혀 있는 것 같았어요.

 

  두번째 페이지를 펼치니 제일 위에 “이 동무는 **학교를 졸업하고 당과 수령의 배려로”하고 시작되는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은 중앙당 간부가 직접 읽어줘요.

 

  그 글 아래에 사진 5장 정도가 붙어있었어요. 그동안 시험 치면서 찍은 사진인데 정면, 옆모습 등 다양한 각도의 사진이 위에 붙어있고, 전신사진은 첫 번째 사진 아래에 붙어있어요.

 

  사진이 붙어있는 모양은 ㄱ자를 돌려놓은 것과 같은 구도죠.

 

  그리고 사진을 붙이고 남은 공간에 불러주는 대로 글을 쓰라고 하더군요.

 

  군인선서와 비슷한 충성 맹세였어요. 그런데 북한에선 이러루한 선서에는 꼭 김일성의 이름이 들어가는데 이 선서에는 김일성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좀 다른 점이었어요.

 

  글을 예쁘게 잘 쓰라고 자꾸 강조하던 것이 생각나요. 아마 김정일에게 올라가는 책이었을 거예요.

 

  다 쓴 뒤 그 아래에 혈서를 쓰게 해요.

 

  혈서까지 쓰게 한단 말인가요?

 

  난생 처음 혈서를 써서 그랬는지 그때 생각이 생생하게 나요.

 

  처음에는 혈서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간부가 먼저 이렇게 물어요.

 

  “손에서 가장 소중한 손가락은 어느 것인가요. 만일 손가락 하나만 남긴다면 어느 손가락을 남기고 싶습니까.” 참, 최종까지 올라오면 간부의 말투가 공손해지죠.

 

  그때만 해도 저는 그냥 이것도 테스트 과정인 줄 알고 잠시 생각에 잠겼어요.

 

  제일 먼저 약지를 제외해 버렸어요. 그리고 다음엔 중지를 제외시켰고요. 그리고 엄지와 검지, 새끼손가락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어요. 새끼손가락을 제하고 싶었지만 그것 없으면 귀를 파지 못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거예요. (웃음) 제가 그땐 그렇게 철이 없었어요.

 

  결국 새끼손가락도 제외하고 참, 기자님은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어느 것을 고르시겠어요. (저요. 음…저는 검지를 선택하겠네요.) 그래요. 저도 결국 검지를 골랐어요.

 

  그랬더니 한 뼘 정도 길이의 칼을 소독 솜으로 쑥쑥 문지르고 저에게 주는 것이에요.

 

  이 칼로 혈서를 쓰라는 거예요. 그 칼이 너무 멋있었어요.

 

  (커터칼처럼생긴 것입니까?) 아니에요. 북한산이 아니고 수입품이었는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지만 날이 상당히 예리하고 너무 화려한 칼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칼로 손가락을 벤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칼로 약지를 긋긴 했는데 피가 적게 나는 거예요. 다시 하라고 해서 눈을 감고 이를 악문 채 속으로 ‘엄마’를 부르며 다시 그었어요.

 

  그리고 그 간부가 불러주는 대로 ‘충성으로 복무함’이라는 일곱 글자를 썼죠. 그 다음 간부가 그 아래에 무슨 도장을 꽝 찍었어요.

 

 혈서를 썼으니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혈서를 쓴 다음에 벤츠를 타고 어디론가 데려가요.

 

  운전기사가 앞에 있고, 뒷좌석엔 저와 안내인이 함께 탔어요.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엔 레이스가 달린 커튼이 있어요. 그리고 옆에도 다 커튼이 쳐 있고요.

 

  그러니 밖을 내다 볼 수도 없거니와 운전기사도 저의 얼굴은 볼 수 없는 구조예요. 물론 커튼은 닫았다 폈다는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승인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이후에도 차를 많이 타고 다녔는데, 제가 타고 다닌 벤츠는 거의 다 커튼이 쳐 있어요.

 

  물론 커튼 색깔이랑 두께는 차마다 달라요.

 

  외국 정상들이 북한을 방문하면 리무진을 타고 가잖아요. 그 리무진도 탄 적 있어요.

 

  벤츠가 멈춘 곳은 평양의 한 교외입니다. 산으로 둘러싸 있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곳입니다.

 

  한적한 교외로 나무로 둘러싸인 곳이었는데 층고가 높은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었어요.
훗날 교육받으면서 보니 지하에도 3개 층이 있었어요.

 

  건물 모양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처럼 둥근 반달 모양입니다.

 

  그 가운데 김정일 동상이 있고 그 아래 학교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판이 있어요. 김정일 동상은 살면서 거기서 첨 봤어요.

 

  건물 길이는 100m가 넘어요. 그땐 그게 무슨 건물인지 몰랐는데, 지금 보면 중앙당 5과 건물인 것 같아요.

 

  도착하자마자 저를 어떤 방에 데리고 가더군요. 이제부터 지낼 곳이라면서요.

 

 (다음호에 계속)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3부) 반 년간 교육받고 김정일과 면접을 하다 (87)

by 주성하기자   2010-01-22 6:17 pm

 (앞글에
이어)

 

  신분이
달라졌으니 으리으리한 방이 기다리고 있겠네요.

 

  아니요.
방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화장실과 이불만 있고 정말 하나도 없어요.

 

  아주
작은 뙤창문이 하나 붙어있는데, 제 키로는 밖을 내다볼 수 없었어요. 몇 층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상 반 지하방 아닌가 기억돼요.

 

  밤에는
밖에서 이상한 새소리들과 벌레 소리들이 나서 무서웠어요. 사람을 볼 때는 어떤
남자가 밥을 날라 올 때뿐이죠. 그나마 말도 못해요. 그리고 계속 책을 가져다 줘요.
읽어보라고요.

 

  김일성,
김정일 노작, 혁명역사 등 밖에서도 봤던 책들이고 소설책도 있었어요.

 

  책을
읽고는 반드시 감상문을 써야 해요. 책 하나를 놓고도 감상문을 몇 가지로 쓰라고
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고여 놓고선 창밖을 내다볼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방의 천장에 감시카메라까지
붙어있어 그럴 엄두는 못 냈어요. 이건 뭐 감옥과 똑같았죠.

 

  머리가
정말 복잡하더군요. 남들이 다 좋은데 간다고 했는데 내가 왜 이런데 와 있나,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정말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랬어요.

 

  감옥은
아니겠다싶은 느낌이 드는 것은 끼니때마다 밥을 날라다 줄 때였죠.

 

   세계
여러 나라 음식들이 다 있었어요. 정말 구경도 못했던 음식들을 먹었어요.

 

  저는
제가 간첩으로 키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왜냐면 제가 들어간 학교
이름이 **군사학교이기 때문이죠. 학교 이름은 쓰지 마세요. 이 학교의 존재는 아직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가 이름을 밝히면 훗날 이 학교 출신이라고 사칭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아요.

 

  감금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졌나요.

 

  한
달이요. 한 달쯤 지난 뒤 저를 불러 나갔더니 어떤 방에 데려가는 거예요.

 

 그
자리에는 저처럼 뽑혀온 여성 10명이 와있었어요.

 

  얼굴을
처음 보는 애들도 있고 3차 시험에도 본 애들도 있어요. 모두 전국에서 고르고 골라
뽑아온 나름 개성 있는 미인들이죠. 외국 여자같이 생긴 애도 있어요.

 

  나이는
제가 제일 어린 또래 같지만 서로 정확한 나이는 몰라요. 서로 말을 안 하거든요.

 

  2년
동안 초보적인 말을 빼고는 거의 말을 서로 안하고 살았어요. 그리고 위에 학년도,
또 후배도 없어요. 받은 애들을 졸업시키고 그 뒤에야 새로 받는 것 같았어요.

 

  어떤
간부가 나와서 이제부터 학교 입학식을 한다고 하면서 군복도 내주었어요. 넥타이도
붙어있는 인민군 협주단 군복 비슷한 것을 주더군요.

 

  입학식이
끝나고 다시 제가 있던 방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요.

 

  우선
외출이 허용됐어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평양에 나갑니다.

 

   나갈
때는 아주 멋진 양복차림으로 나가요. 가서는 좋은 곳도 구경시켜주고 좋은 식당도
데려가죠. 제가 즐겨 가던 옥류관에 귀빈용 방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향만루
같은 고급 식당도 갔는데, 가기 전에 미리 방을 다 예약해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게
하지 않아요.

 

  나갈
때 2~3명 씩 조를 이뤄 나가는데 조 구성은 나갈 때마다 다 달라져요.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그런 데 나가서도 서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아요. 워낙 주의를 받았고 학교
분위기도 그렇다 보니 그렇죠.

 

  그리고
한 달 지나서부터 사진을 엄청 많이 찍어요. 중앙당 사진사가 찍는데 아마 김정일에게
가나 봐요. 그리고 사진사가 인심 좋게 이건 보관하고 있으라면서 사진을 주기도
해요. 그때 받은 사진을 남한에 몇 장 갖고 왔어요.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이를테면 교육과정이라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뭘
배워주고, 어떻게 배워주고 하는 과정안을 상세히 말하려면 끝이 없어요.

 

  그건
줄이기로 하죠. 그냥 공부도 하고 사격이나 수영도 시키고, 비디오도 보고, 예능
훈련도 하고, 식사예절 등등 아무튼 여러 가지를 배우죠.

 

  참,
제가 있던 건물은 구조가 아주 특이해요. 공부하려 갈 때는 같은 층에 가면서도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가요.

 

  한마디로
구조를 알 수 없는 미로처럼 만들었죠. 실제 있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상상이 안
돼서 그 구조를 그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건물의 방음이 너무 잘돼 있어요. 정말
조용해요.

 

 앞에서
미옥 언니라는 이름을 말했는데, 교관인가요?

 

  예.
교관이라면 교관이고, 선생이라면 선생인 그런 언니들인데, 저희를 가르치는 언니들은
모두 3명이었습니다. 미옥 언니는 그 책임자 격이었죠.

 

  학교생활을
시작해 3달쯤 됐을 때 저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더군요. 그 방은 2층입니다. 예전에
있던 방은 건물의 날개 부분에 있었는데 옮겨간 방은 건물 중심 쪽에 있었습니다.

 

  제가
혼자 있던 방보다 훨씬 크고 내부도 잘 돼 있죠.

 

  장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했는데, 침대는 없었어요.

 

  심심할
때는 컴퓨터에서 게임도 했는데, 이런 게임도 있어요.

 

  게임
제목이 ‘장군님 보위하리’인가 그런 것인데, 적을 죽이면서 미션을 수행하고 끝까지
가면 머리가 곱슬머리이고 잠바를 입고 배가 나온 작은 사람이 나와서 “쫙쫙쫙”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어요. 누가 봐도 그 캐릭터가 김정일인걸 알죠.

 

  박수를
치면 주변 배경음악으로 “만세”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무튼 게임까지도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이라니깐요.

 

  그게
1990년대 중반인데 그런 게임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걸요.

 

  그
방에도 혼자 있었나요.

 

  아니요.
저는 그 방에서 미옥 언니와 함께 지냈어요. 그 언니는 저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요.
누구나 자매 같다고 했어요. 키도 저랑 거의 비슷하고요.

 

  그
언니는 소좌(소령)였어요. 그렇지만 군복을 입은 모습은 본적 없습니다. 그때부터
어딜 갈 때마다 그 언니와 항상 함께 했어요.

 

  교육받으려
갈 때도 그 언니가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할 때가 많았죠. 저희 기 10명 중에 다른
언니와 함께 생활한 것은 함흥예술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뽑혀 온 영미라는 애와
저 두 명뿐이었어요.

 

  두
명 뿐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죠.

 

  교육받을
때 강의실에 대개 저희 두 명이 먼저 가 있어요. 그리고 1~2분 뒤 나머지 8명이 우르르
들어와요. 교육이 끝나서 나갈 때도 저희 두 명이 먼저 빠져 나갑니다.

 

  저희는
2층에서 살았고, 다른 8명은 1층에서 있었어요. 그래서 질투 섞인 시선 많이 받았어요.

 

  이후에
김정일과 만날 때도 항상 그 언니와 함께 동행 했어요. 그리고 영미와 그 영미와
함께 생활하는 교관인 미소 언니 이렇게 저흰 보통 4명이서 김정일을 만났거든요.

 

  물론
저와 미옥 언니만 만날 때도 있었고요. 미소 언니보다는 미옥 언니가 더 높았어요.
최종 지시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저희
두 명만 특별히 언니들과 생활한 것은 아마 10명의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서 올려간
뒤 김정일이 저희 두 명을 최종 낙점했고 그래서 저희만 언니들과 특별히 생활한
것 같아요.”

 

  김정일을
처음 본 것이 언제죠.  

 

  1995년
늦여름쯤이었어요.  학교생활을 시작해 반 년이 안 됐을 때입니다. 갇혀서 지내다보면
시간 개념이 없어져요. 그래서 저도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 안나요.

 

  이틀
전에 미옥 언니가 저와 영미를 불러다 아주 엄숙하게 이야기 해주어요.

 

  “너희들은
장군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일을 맡아서 할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주의사항을 자세히 알려줘요.

 

  우선
예전에 장군님 뵌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저는 어려서 설맞이공연에 나가 김일성과
김정일 앞에서 공연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래서
공연장에서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고 영미는 처음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영미에게
더욱 조심하라고 당부하더군요.

 

  주의
사항으로는 너무 과잉반응하지 말고 차분하게 행동하라는 것, 장군님의 말씀이 끝나면
자기가 하는 대로 따라서 박수를 치라는 것 등을 말해주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저는 한밤도 못 잤어요.

 

  말해준
그날부터 마사지를 받게 하고 머리도 손질시키고 그랬어요.

 

  당일
날에 분장을 다 시켜요. 저는 10대이니 그 나이에 맞게 화장도 아주 살짝 하죠.

 

  거기선
매일 아침 입을 옷을 지시해줘요. 군복을 입으라고 하면 그날을 군복입고, 사복 중에서
어떤 것을 입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입어야죠.

 

  그런데
그 날은 옷을 새로 가져다주었어요. 저희 신체 사이즈는 이미 다 파악돼 있기 때문에
훗날 말만 하면 어디서 저의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어 와요.

 

  어디서
만났나요?

 

  커튼을
내린 차를 타고 가다보니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 지하는 아니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저까지 모두 다섯 명이 와있었어요.

 

  미옥
언니와 저, 미소 언니와 영미, 그리고 또 한 얘가 있었는데, 그 얘는 함께 온 언니는
없었어요. 그리고 이후에 저희가 김정일 만날 때 다신 나타나지 않았었습니다.

 

  아마
김정일이 사진을 보고 저희 두 명은 물론 그 얘까지도 한번 보자고 했던 것인데 결국
최종 낙점이 되진 않았던 것 같았어요. 물론 그 얘도 미모는 출중했고, 어딘가 모르게
북한 영화배우 오미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얘였어요.

 

  그
다섯 명이 입은 옷은 다 달랐어요. 아마 각자 개성이 맞게 입게 한 것 같아요.

 

  어떤
방문 앞에 이르더니 미옥 언니가 먼저 들어갔다 나왔어요. 그리고 우리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 김정일이 앉아있었어요. 어떤 사람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우리가 들어가자 그 사람은 나갔어요.

 

(다음호에
계속)

 

 

1부

(4부) 김정일과 함께 블루스를 추다 (43)

by 주성하기자   2010-01-22 9:06 pm

 (앞글에
이어)

 

  처음
만날 때 많이 긴장되지 않았나요?

 

  아시다시피
북한에선 태어나서부터 우상화 교육을 받지 않습니까.

 

  김정일은
곧 신처럼 생각하게 만들죠. 그를 보기만 해도 눈물을 쏟게 만들 정도로 말이죠.

 

  TV에서
보면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다 만세를 외치잖아요. 그래서 저도 방에 들어서서 김정일을
보자마자 미리 주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세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마음이 조마조마해 망설여졌어요.

 

  그런
가운데 미옥 언니랑 미소 언니랑 김정일과 살짝 웃으며 악수를 하는 것이었어요.
저도 언니가 하는 대로 상당히 긴장한 상태로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6인용 테이블에 앉았어요. 김정일이 가운데 앉고 그 양 옆에 미옥 언니와
미소 언니가 앉고, 우리 셋은 그 맞은편에 앉았어요.

 

  밥을
먹는 와중에 미옥 언니가 저에 대해 설명하고, 미소 언니가 영미를 설명하고 했어요.
그런데 김정일이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저희더러 차례로 일어서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어요.

 

  그날
뭘 먹었습니까.

 

  이탈리아
요리가 나왔어요. 스테이크와 스파게티 이런 거요. 와인도 마셨어요.

 

  참
특이한 것은 이탈리아 음식인데도 상어 요리도 나왔어요.

 

  요리들은
참 맛이 있었어요. 생전 그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입니다만, 저는 너무 긴장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밥을 먹었죠.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만
미옥 언니와 미소 언니는 아주 편안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자
김정일은 연신 우리들에게 자상한 목소리로 “마음 편히 가지고 천천히 먹어”하고
말했어요. 우리 표정이 굳어있으니 자기도 불편한 듯한 기색이었습니다.

 

  김정일을
직접 앞에서 본 느낌이 어땠습니까.

 

  예전에
김일성, 김정일 앞에서 공연을 했던 적이 있지만 그때는 수십 m 거리가 있었죠.

 

  직접
코앞에서 보니 이웃집 아저씨처럼 너무 평범한 인상이었어요. 그리고 얼굴에 검은
점 같은 얼룩도 많고, 이는 누렇고 아무튼 그때까지 갖고 있던 신비스러웠던 환상이
많이 깨졌어요.

 

  그렇지만
참 자상하게 잘 대해주었어요. 그리고 김정일이 무슨 훈시 같은 말을 하면 미옥 언니가
먼저 박수를 치면 우리도 따라 치고 그랬어요.

 

  떠날
때는 선물도 주었어요. 초콜릿과 중국 월병 비슷한 것이 들어간 세트와 함께 김정일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도 주었어요. 김정일 특유의 흘려 쓴 자필 필체가 새겨져 있었어요.

 

  사실
북한에선 명함시계라고 해서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는 있지만 김정일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는 민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진주 목걸이와 화장품을 선물로 받았어요. 저와 영미만 받고
언니들은 주지 않았어요.

 

  미옥
언니가 벌써 김정일이 선물을 줄 때쯤을 미리 짐작하고 밖에 나가서 선물들을 가져왔어요.
그럼 김정일이 저희에게 그 선물들을 안겨주는 것이죠.

 

 두
번째로 만났을 때는 어땠나요.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밥을 먹고, 가라오케 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그랬어요.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도 나중엔 아주 허물없이 우리를 대했어요.”

 

(허물없다고
하면 어떤 정도를 말하는 건가요)

 

  음,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방귀도 서슴없이 뀌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안 그랬거든요.
그의 방귀는 ‘혁명적’으로 뀐다고 표현하면 아마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아주 서슴없었어요. 그럴 정도로 허물이 없었죠. 냄새가 나도 저희는 표정이 달라질
수도 없고 숨을 참아서도 안 되고 하니 그냥 웃으면서, 아무튼 그래요.

 

  그런데
김정일의 성격상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서슴없이 방귀를 뀌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무리
높은 사람도 체면이라는 것은 있으니 말이죠. 우리 앞에서도 처음에 그렇게 조심했으니
김정일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져도 아랫사람들 앞에선 체면을 중시하는 것이죠.

 

  아까
노래를 불렀다고 했는데 노래방 분위기는 어땠나요.

 

  저랑
영미에게 노래를 시켜보는 자리 비슷한 거죠.

 

  저랑
영미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영미는 성악과를 나와서 노래를 참 잘했어요. 그런데
북한에서 성악을 하면 얼굴에 막 인상을 지으면서 표정을 오버하는 습관이 생겨요.
북한 공연을 보면 얼굴 인상들이 인위적이고 그렇잖아요.

 

  영미는
‘장군님 찬 눈길 걷지 마시라’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
참고로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1절-
눈 오는 이 아침 우리 장군님/그 어데 찾아 가십니까/          찬 눈을 맞으며 가시는 길에
/ 이 마음 따라 섭니다/          이 땅의 눈비는 우리가 다 맞으리니/장군님 장군님 찬 눈 길
걷지 마시라.

   2절-장군님
찬 눈비 맞으시면서/험한 길 더는 걷지 않게/          날마다 기쁨을 드리는 길에/이 한 몸
바치렵니다/  

         우러러 바라는 간절한 소원입니다/장군님 장군님 부디 안녕하시라.)

         (노래
듣기)

 

  영미는
성악한 얘답게 후렴구에 가서 ‘장군님, 장군님’을 부를 때는 막 눈물을 흘리면서
목소리를 절절하게 내면서 노래를 했는데, 그걸 보면서 저는 “참 잘 부르네, 칭찬
받겠네. 나도 저렇게 해야 할텐데”하는 걱정이 생겼어요.

 

  그런데
의외로 김정일이 별로 기뻐하는 표정도 없고, 무덤덤해서 “잘했어. 목소리가 참
고와” 이러는 거예요.

 

  제
차례가 됐는데, 저는 노래는 영미보다 많이 못해요. 저는 일본 노래 ‘미치즈레’를
불렀어요. 일본어로 부르고 북한에서 번역된 가사도 부르고 했어요.

 

  ※참고로
북한말로 번역된 가사는 대략 이렇다고 한다.

     물위에
떠서 사는 부평초 보고/ 이 밤도 이내 신세를 말하였더니/이슬 맺힌 눈으로 말없이
날 보며/     우리 모두 같은 신세라 고개만 끄덕이네 / 그대는 그대는 나의 길동무라.     (미치즈레노래듣기)

 

  부르고
나니 김정일이 노래와 내 몸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면서 하나 또 불러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북한 노래를 불렀죠.

 

  그래서
‘철없던 그 시절 새 교복 입고/냇가에 뛰놀다 바래여 오면/철없다 꾸짖던 어머니
앞에/이 작은 가슴엔 욕망은 컷네/ 아 인생에 철이란 그 무엇인가’하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어요.

 

  북한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노래일 겁니다.

 

  일본
노래를 서슴없이 부르다니 그래도 괜찮은건가요. 일본 노래는 어디서 배웠나요.

 

  일본
노래는 학교에서 다 배워줘요. 일본 노래 뿐 아니라, 남한 노래, 중국, 러시아 등
각 나라 노래들이 다 있어요. 테이프로 이런 노래들을 다 들려주고 자기가 마음에
드는 곡을 불러보게 해요. 학교에 남한 노래방과 똑같은 시설이 있어요.

 

  ‘미치즈레’는
사실 미옥 언니가 장군님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귀띔해줘서 배웠어요. 언니에게
노래 책이 있는데 일본말을 모르니 일본말을 한국어로 적어서 외웠어요.

 

  제가
학교에서 맨 처음 배웠던 한국노래가 ‘감수광’이었는데 언니들이 그 노래가 제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

 

  거기에
일단 들어가면 어떤 노래 부르든지 그건 전혀 상관없어요.

 

  그날
김정일도 노래를 불렀어요. 미옥 언니가 “장군님도 한곡 하십시오”하고 박수를
치면서 박자를 맞추어 “장군님, 장군님”하고 외치니 우리도 다 같이 “장군님,
장군님”하면서 박수를 쳤죠.

 

  김정일이
기분 좋은 얼굴로 일어나 노래를 불렀어요. 러시아 노래를 러시아어로 불렀는데,
미옥 언니가 말하길 러시아에서 아주 유명한 노래라고 했어요.

 

  김정일은
음치는 아니지만 음색이 이상하다보니 썩 잘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그가 제일
듣기 좋아하는 노래는 일본 노래입니다.

 

  한번은
저보고 일본노래 ‘스바루’를 불러보라 해서 불렀더니 ‘너는 ‘미치즈레’가 더
잘 어울려’라고 하더군요. (스바루노래듣기)

 

  기쁨조는
원래 외국 노래 많이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외국노래 열심히 배우게
한 것 아닐까요.

 

  저희는
훗날 김정일 만났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공연하고 그런 적은 없었어요.
아마 춤추고 노래하고 하는 그런 얘들은 따로 있을 거예요.

 

  사실
북한엔 기쁨조라는 이름이 없어요. 우리도 자신들이 어떻게 불리는지 몰랐어요.

 

  안마해주는
여성들도 따로 있어요. 이건 들은 소리인데, 안마도 머리 담당하는 애가 따로 있고,
발을 담당하는 애, 몸을 담당하는 애 등 다 다르다고 해요. 혈을 정확히 찾아 누르고
조그마한 실수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군요.

 

  김정일은
저희 네 명을 다른 사람들 앞에 공개하지 않았어요. 꼭 자기 혼자만 있을 때 불렀어요.
간혹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있을 때도 있는데, 저흰 그가 누군지 몰라요.

 

  또
다른 점은 저희에겐 가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지도 않았어요. 물론 저희는 예술고
출신이니 기본기는 배어있지만 전문 훈련은 하지 않았어요.

 

  대신
김정일은 블루스 춤을 추기를 매우 좋아해서 그건 연습했어요.

 

  대신
미옥 언니랑 보니 외국어도 특별히 힘을 들여 배우고 그러더군요.

 

 (다음글에
계속)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5부)지하도로만 40분,김정일의 호화 지하별장 (59)

by 주성하기자   2010-01-25 6:30 pm

 (앞글에
이어)

 

   일본에
후지모토 겐지 씨라고 김정일의 요리사를 하다가 나온 사람이 있어요. 그가 쓴 책에
보면 김정일이 신천초대소에서 한번은 다섯 명의 기쁨조에게 다가가 옷을 벗게 한
뒤 알몸인 그들을 다른 간부들과 춤을 추게 했다는 구절이 나와요. 그럴 가능성이
있나요.

 

  제가
볼 때 그는 다른 간부들의 눈을 상당히 많이 의식합니다.

 

  그랬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일 겁니다. 그렇지만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술에 취하면
약간 음, 변태적 기질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나오긴 합니다.

 

  그는
과음하면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잘 모를 때가 있어요.

 

  저도
직접 보진 못했고 전해들은 소리긴 하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해요. 한번은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 옆에 부관이 다가와 ‘그만 마시라’고 만류한 적이 있었대요.
그러자 ‘이 놈을 당장 감옥에 처넣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 부관을 찾았어요. 감옥에 넣었다고 하니 “내가 어제 그랬나”하더니
당장 다시 부르라고 했다더군요.

 

  술
먹으면 그도 여느 주정뱅이와 다름없이 취하게 되죠. 하지만 저희 앞에서 추태를
부린 적은 없었어요. 술 먹고 우리 앞에서 울기까진 하진만 말입니다.

 

  소리를
내어 엉엉 우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저희에게 슬픈 노래를 시키고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눈에 눈물이 핑 고이거나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쭈르륵 흘리기도
하죠.

 

  후지모토
씨가 6년 전에 쓴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읽어 봤나요?

 

  그런
사람이 있는 줄은 알지만 책은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저희가 김정일과 만날 때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저희를 안내해주고 가는
부관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두 명 정도 있었지만 요리사는 본 적이 없었어요. 음식은
다른 사람들이 날라 옵니다. 어떤 때는 승강기에서 나올 때도 있고요.

 

  그렇지만
김정일이 초밥을 참 좋아하는 것은 사실예요. 그래서 저희도 참 많이 먹었는데 어쩌면
그가 만든 것일지 모르겠네요.

 

  다른
음식들도 매우 맛이 있지만 특히 초밥들이 너무 맛있어요. 그 맛을 잊지 못해 한국에
와서 살면서 내노라하는 초밥집에 많이 갔는데 여직 그렇게 맛있는 초밥 먹어본 적
없어요.

 

  (※그녀가
‘김정일의 요리사’를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하기에 10월 말 그 책을 구해서 전해주었다.
그녀는 기자 앞에서 첫 몇 페이지를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김정일의 1주일간 식단이
실려 있었다. 그것을 보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도
상어 요리가 많이 나오네요. 상어 많이 먹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이탈리아 요리가
나왔는데 그때도 상어요리가 따라 나왔으니 말이죠.

 

  회가
매우 독특한 그릇에 담겨 나오기도 합니다.

 

  금붕어
두세 마리가 헤엄치는 어항이 밑에 있고 그 위에 회 접시가 놓여있죠. 살아 헤엄치는
고기를 보면서 회를 먹으면 아주 색다른 분위기입니다.

 

  한번은
김정일이 먹으라고 추천하는 것을 집어 먹는데 그가 웃으며 “그게 뭔지 아냐”고
묻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모르겠습니다”고 했더니 그는 상어 ‘거시기’라고
했어요. 물론 거시기는 남한 표현이고 실제는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닌데 직접 말하긴
그렇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먹다가 토할 뻔 했어요.

 

  돌아올
때 미옥 언니보고 “다른 좋은 것 참 많은데 왜 그런 것 먹냐”고 물었더니 언니가
그런 것을 먹으면 남자는 정력에, 여자는 미용에 참 좋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이 책엔 밥이 백미밥이라고 나오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김정일을 만나서 백미밥은
먹어본 기억이 없어요. 늘 5~6가지가 섞인 잡곡밥을 먹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잣과 호두를 넣고 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참, 스테이크에
조금 따라 나오는 밥은 백미밥이 맞네요.

 

   처음
만났을 때인가, 절 보고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어요.

 

  제가
‘냉면을 좋아합니다. 하루 세끼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했더니 김정일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우리 아버님이 너처럼 냉면을 그렇게 좋아하셨지. 그런데 난 썩
좋아하진 않아’라고 대답하더군요.

 

  김정일과는
평양에서만 만났습니까.

 

  아니요.
많이 다녔어요. 지방 별장들도 가고, 사냥터도 가보고 했어요.

 

  어딘지
모르는 별장도 많아요. 학생일 때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데 그때 미옥 언니가 “네가
졸업해 중앙당에서 일하게 되면 여기가 어딘지 다 자연히 알게 된다”고 말했어요.

 

  만약
제가 그때 몇 년 뒤에 한국에 올 운명이 닥쳐올 줄 알았더라면 하나하나 머리 속에
곰곰하게 새겨넣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궁금해도 별로 물어보지도 않았고
일부러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또 제가 너무 어리고 철이 없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교육받을 때 쓸데없는 관심은 갖지 말도록 배웠습니다.

 

  다른
곳에 갈 때는 대개 김정일이 가기 하루 전에, 아무리 늦어도 몇 시간 전에는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별장
얘기들까지 다 하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겠고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마 김정일은 특히 자기 별장과 아지트 이야기 하는 것 가장 싫어할 겁니다.

 

  그럼
가장 기억이 남는 별장 하나만 이야기해주시죠.

 

  차를
타고 지하로만 40분 동안 가는 별장도 있어요. 거긴 모든 것이 다 지하에 있어요.

 

  그래서
기억에 남아요. 그건 별장이라고 하긴 좀 그렇겠네요. 지하차도는 1차선이고 너무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고 적당해요.

 

  미옥
언니가 말하길 “이곳은 장군님이 특별하게 여기시는 곳이고 장군님과 우리들을 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올 수 없다”고 했어요.

 

  지하에
각종 오락실, 수영장, 침실, 식당 등이 정말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요.

 

  김정일
별장들은 여기서 볼 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북쪽 기준에선 정말 화려해요.

 

  그
지하 아지트 역시 그랬어요. 김정일이 오기 전날 지하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는데,
폭은 좁고, 길이는 한 한 50m 정도 길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수영장 바닥엔 타일로 큰 김정일화가 새겨져 있어요. 그리고 그 김정일화 중심부위는
번쩍번쩍 황금빛이 나는 타일로 조각돼 있어요. 돈이 엄청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침실도 정말 화려하고 그래요.

 

  지하에
있는 별장이 많나요.

 

  그럼요.
별장보단 지하 아지트라는 표현이 적절하죠. 특히 평양시내에 그런 곳이 많아요.

 

  그리고
실례로 인민대학습당이나 광복백화점 이런 민간 빌딩 아래 김정일의 밀실이 있어요.
방음 장치도 철저해서 민간인들은 그 아래 그런 곳이 있는 줄 절대 상상도 못하죠.

 

  그렇지만
밀실에는 그 빌딩과 연결된 탈출구가 있어요. 이라크전 때 보니 후세인 궁을 마구
폭격하던데, 북한엔 그런 방법이 안 먹힐 거예요.

 

  민간
빌딩을 위에 이고 지하에 숨어버리면 폭격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도처에 그런 비밀장소들이
많고 지하로 연결돼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 거예요.

 

  그런
장소들을 연결하는 지하도는 호위국에서 관할하나요?

 

  예,
지하차도를 전담해 지키는 부대가 있어요. 그곳 군인들은 정말 특혜를 많이 받아요.
실례를 든다면 이런 것도 있다고 들었어요.

 

  원래
북한군은 30살에야 장가를 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곳 군관들은 30살 되기 전이라고
해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하루밤씩 여자들과 보내게 해준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런 여자들도 저처럼 5과에 뽑혔지만 최종까지는 선택되지 않은 여성들이죠. 그러니
나름 미모들이 출중한 것입니다. 이들을 따로 교육을 시켜선 호텔에도 상주시키고
그래요.

 

  아마
외국에서 필요한 인물이 오면 접대할 여자들일 겁니다. 손님들이 오지 않아 대기하고
있는 그런 여자들과 군인들을 붙여주는 거죠.

 

  궁금한
것이 사냥터에 가면 다른 사람도 총을 휴대합니까.

 

  저희랑
갔을 때는 늘 다른 사람들이 없었어요. 김정일 혼자만 총을 휴대하죠. 미옥 언니도
총을 주지 않아요. 저희도 사격훈련은 하지만 실제 김정일 앞에서 총을 쏴본 일은
없어요.

 

  호위병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한 50~100m 떨어진 곳에서 원거리 경호를 해요.

 

  김정일은
사격을 잘해요. 사냥이 끝난 저녁에는 대개 그날 잡은 꿩고기로 요리를 해먹는데,
그 요리도 기가 막히게 맛이 있어요.

 

  꿩고기
버섯 샤브샤브, 꿩 완자, 꿩 만두 이런 것들을 주로 만들어 먹어요.

 

  맨
처음 사냥터에 갔을 때 김정일은 저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제 원래 이름이 촌스럽다면서
저에게 ‘미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아름다운
‘미’와 매혹적인 ‘향’을 함께 겸비했다고 하면서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때부터
북한에서 나올 때까지 저의 이름은 미향이었습니다. 저희들에겐 중앙당에서 발급하는
특수 증명서가 있어요. 거기 이름도 다 미향으로 돼 있어요.

 

(다음호에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6부) 탤런트 한지민, 김정일의 이상형 (106)

by 주성하기자   2010-01-27 12:28 am

  (앞글에
이어)

 

  그러고
보니 미옥, 미향, 미소, 영미 등 모두 ‘미’자가 들어간 이름이네요.

 

   예,
그건 그의 여자라는 뜻인 것 같아요. 미소 언니는 웃을 때 모습이 참 아름다웠어요.
아마 그래서 미소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 같아요. 영미도 나중에 미애로 고쳤어요.

 

  김정일은
술에 취하면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는 버릇이 있어요.

 

  특히
웃긴 것이 ‘미’자가 들어간 이름을 자기가 우리에게 지어주고는 자꾸 헛갈려 해요.

 

  술이
좀 들어가면 손가락을 들고 “네가 미옥? 미향?”하고 수시로 묻습니다. 그리고는
“아 미향이었지”하고는 좀 있다가 그 말을 또 반복해요.

 

  그리고는
이러기도 해요. “미옥이 무슨 뜻인 줄 알지. 미와 옥 같은 피부를 가졌다는 의미야”하고
이렇게 말하고는 좀 있다가는 또 “미옥이 무슨 뜻인 줄 알지. 미와 옥구슬 같은
목소리란 뜻이야” 이런 식으로 우리 이름에 대한 해석이 매번 달라져요.

 

  미옥이라는
여성이 하는 일은 그냥 교육을 시키는 것 입니까.

 

  언니는
김정일과 잠자리도 함께 하는 애인이지만 비서 역할도 합니다. 김정일과 허물없이
대하지만 반말은 안합니다.

 

  언니도
평양에서 자란 여자인데 중앙당 청사 안에 김정일이 하사한 아주 크고 번듯한 자기
집도 갖고 있어요.

 

   하지만
5과 건물에 와서 자는 것은 아마 제가 과도기를 쉽게 가지고, 김정일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붙여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늘 저랑 함께 행동해야 하니 그런
것도 있겠고요.

 

  자주
혼자 밖에 나갔다 와요. 술을 마시고 새벽에 올 때도 있고 낮에 올 때도 있고요.
김정일이 하사한 벤츠를 직접 몰고 집에 가서 자고 올 때도 있어요.”

 

  미옥
언니에 대한 추억도 많겠네요.

 

  언니가
김정일의 애인이었으니 언론에서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가 많죠.

 

  저랑
2년 가까이 한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잔 사이기 때문에 들은 소리가 참 많습니다만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언니가 걱정돼서요.

 

  언니는
저를 자기 후계자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질투도 하지 않고 참 친동생 대하듯이 잘
대해주었어요. 그 안에선 저도 외로웠지만, 언니도 외롭긴 마찬가지였어요.

 

  언니는
자주 나를 품에 안고선 ‘넌 내 뒤를 따를 거야. 너랑 나랑은 외롭게 살아야 해’라고
했어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언니의 목소리는 슬펐어요. 언니는 참 착했어요.

 

  원래
학교에선 ‘미옥 동지’라고 불러야 하지만 방에 돌아와 둘이 있으면 저보고 언니라고
부르라고 해요. 언니에겐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참 많이 그리워했죠.

 

  언니의
장에는 김정일이 준 선물이 많았어요. 제가 어떤 때는 ‘이것 정말 예뻐요’하면
언니가 ‘너에게 주고 싶지만 장군님이 주신 선물이 돼서 못 주겠구나’ 그랬어요.

 

   그러면서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집엔 엄청 많아. 너도 이제 장군님 모시게 되면 나처럼
큰 집도 받고 온갖 선물도 받을 거야’라고 말했어요.”

 

  언니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26~27세면 제대를 해요. 제대할 쯤이면 소좌나 대위 정도가 되죠. 하지만 김정일과
그런 사이였던 여성들은 이후에도 독수공방을 해야 해요. 봉건시기 궁녀처럼 말입니다.

 

  물론
최고의 대우는 해주죠. 제대한 뒤에 김정일의 사랑을 받으면 비서로 계속 옆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미옥
언니도 김정일의 각종 심부름과 잡무를 대신해서 하는 일이 많았는데, 분명 제대하지
않고 계속 김정일 옆에 남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랑도 신임도 두터웠거든요.

 

  관계가
너무 깊이까지 들어가지 않은 여성들은 호위국 군관 등과 결혼시켜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죠.

 

   김정일도
최소한의 도덕은 있어요. 저만 해도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만지고 그러긴 했지만
학생인데다, 스무 살이 넘지 않아서인지 따로 부르진 않았어요. 제가 조금만 더 오래
있었다면 그랬겠죠.”

 

  김옥이라는
여인에 대해 들어보셨죠. 혹시 미옥이라는 그 여성이 아닌가요?

 

   전
김옥이란 이름은 몰라요. 한국에 와서 김옥이라고 하는 여인의 사진은 봤는데 북에서
본 적은 없어요. 사진을 보니 귀엽고 발랄한 스타일이더군요.

 

   저희
학생 10명 중에 그 여자와 비슷한 애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미모로 따지면 미옥 언니가
훨씬 예쁩니다.

 

  그리고
김옥이란 여성이 김정일과 반말하는 사이라고 하던데 저는 그 보도가 믿어지진 않습니다.
김정일은 순종적인 여성을 좋아해요.

 

  김정일의
사망 뒤에 문고리 정치니 뭐니 하면서 김옥이란 여성의 역할을 몹시 대단하게 보던데,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여성과 권력을 절대 나눌 사람도 아니고,
그런 상황까지 가게 만들 사람도 아닙니다.

 

  미소
언니는 약간 야심도 있고, 질투도 있었는데 김정일이 그런 건 별로 좋아안했어요.

 

  그렇지만
미모로만 판단할 수도 없어요. 한번은 어디 갔더니 미옥 언니가 서른 살이 넘은 한
여성에게 깍듯이 대하는 거였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장군님의 신임 받는 비서로
대단한 여자’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보건대 그 여성의 미모는 별로였어요.”

 

  김정일의
여성에 대한 취향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간단히 대답하기 어렵군요. 그냥 제가 보았던 느낌대로 말할게요.

 

  일단
눈을 가장 중요하게 봐요. 그리고 눈과 머리카락의 조화를 따지죠. 그는 제 머리가
숱이 많고 까만데, 눈동자도 까맣다고 좋아했어요.

 

  눈동자가
갈색이면 머리도 갈색이어야 하고, 눈동자가 까맣다면 머리카락도 까매야 한다는
게 그의 미학관입니다.

 

  다음엔
입을 봐요. 특히 아무리 예뻐도 입술이 얇으면 무조건 싫어해요. 코는 오뚝해야 하죠.

 

  아무튼
그의 취향은 상당히 섬세해요. 제 손가락을 잡고 자세히 살펴보면서 손가락이 긴
것을 보니 감수성이 풍부하겠다고 그랬어요.

 

  화장을
진하게 하면 싫어해요. 한번 속눈썹을 붙이고 나갔더니 싫어해서 다신 달고 나가지
않았어요.

 

  향수
뿌리는 법도 가르쳐줄 정도로 우리에겐 자상하게 잘해주었어요.  미소 언니가
한번은 향수를 많이 뿌리고 들어갔더니 향수는 허공에 먼저 뿌리고 거기에 몸을 갖다
대야 한다고 알려준 적도 있어요.

 

  우리가
쓴 화장품은 전부 프랑스제였어요. 샤넬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그래요. 저희에겐
굽 높이가 5㎝ 이상인 신발은 주지 않았어요.

 

  그의
키가 작아서 그랬나 봐요. 여성이 자기보다 키가 크면 좋아 안 해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치마는 밑에만 주름이 있는 그런 치마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입는 옷도 그런 것이
많았어요. 아무튼 그것도 얘기하려면 길어요.

 

  남한의
탤런트들이 북한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김정일에게 뽑힐 확률이 높은
여성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남과 북의 미의 기준이 다르니 말씀드리기 힘드네요.

 

  남한이야
‘미모’를 따지지 않고 ‘키모’를 따지잖아요. 뭔 소리냐 하면 미스코리아가 되려면
키와 날씬한 몸매가 제일 중요하죠. 키만 되면 얼굴은 찍어내면 되지만, 키가 안
되면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미스코리아가 못 되죠.

 

  이런
풍토에서 성형수술 안한 배우가 없고, 키 작은 배우도 쉽지 않고 그러니 둘 다 결정적인
결격사유죠.

 

  김정일에게
뽑히려면 성형수술이나 교정을 절대 하지 않은 자연 미모에 키도 적당해야 합니다.

 

  만일
성형여부를 따지지 않고 뽑는다면 음,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제가 모르는 탤런트들도
상당히 많지만 일단 머리에 떠오르는 배우 중에서는 ‘이산’이라는 드라마에서 송연의
역을 맡았던 여성이 뽑혔을 것 같습니다.

 

  (기자도
그녀의 이름을 몰라서 인터뷰 뒤 찾아봤더니 한지민이었다.) 아담하면서도 참한 이미지이니까요.

 

  이영애가
김정일이 선호하는 스타일이라는 뉴스도 있던데, 그건 누가 처음에 그렇게 지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김정일은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북한
탤런트 누구누구가 김정일의 애인이란 소리도 많이 나옵니다.

 

  1970년대엔
그랬는지 몰라도 5과가 생긴 이후론 그렇지 않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입니다.

 

  전국에서
정말 고르고 골라 뽑은 미인들을 숨겨두고 있으면서 굳이 말이 새나갈 수 있는 여자들을
애인으로 삼을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1부

 

 

<7부> 기쁨조 미향의 마지막 이야기. 그리고… (211)

by 주성하기자   2010-02-02 11:16 pm

  지금까지
김정일의 기쁨조라고 하면 그의 연회에 참석해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 여성들이 밤
생활까지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는 따로
있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김정일이
무지막지한 폭군인 듯해도 그도 부하들 눈치를 많이 봅니다. 부하들에게 아주 도덕적인
지도자로 비치길 바라죠. 물론 다른 간부들이 참석한 연회장에서 춤과 노래를 부르는
여성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김정일이 그들을 다치진 않을 거예요. 전국에서 정말 고르고 골라 뽑아서 숨겨놓은
여성들이 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언은 못하겠습니다만, 춤 노래를 잘하는 여성 중에는 그의
취향에 맞는 여성이 있을 확률은 높지 않을 겁니다. 가무하는 여성들은 키도 늘씬하죠.
혹 김정일에게 선택된 여성이 있다면 아마 저희랑 함께 은둔의 생활을 시작하겠죠.

 

  그가
총애하던 보천보전자악단 가수들을 그 악단 악기 연주가들에게 시집보낸 것을 봐선
그런 여성들에게도 지킬 선은 지켰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해오면서 김정일이 지어준 미향이라는 과거 이름과 당시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밝혔는데, 괜찮은 건가요.

 

  어차피
이 이야기를 북에서 보면 제가 누군지 다 알지 않겠습니까.

 

  김정일의
옆에 있다가 남한까지 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럴 일도 없어요. 저
말고는 또 나오기 힘들 겁니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최고의 대우를 받는데 탈북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 이름을 숨기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죠. 다만 5과에서 제대하면 자기 고향엔 못 가게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예전에 해외 언론에 나가 제 과거 이야기를 잠깐 한 적은 있었는데, 그때는
제 이름도, 주변 인물 이름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육받던
건물도 밝히기 싫어 대충 말했어요. 그들은 선정적인 데 관심이 많아 ‘기쁨조’나
‘만족조’가 있느냐 뭐 이런 것을 집요하게 따지는 바람에 그냥 있다고도 했습니다.
상세하게 밝히기 싫어 얼렁뚱땅 넘어간 까닭에 과장된 것이 많아요.

 

  그러나
지금은 제가 이름까지 다 밝히고, 그냥 있었던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얼굴이 나가는 것은 왜 거절하십니까. 어차피 저쪽에서 다 알고 있을텐데요.

 

  제가
이 인터뷰를 하는 이유가 뜨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처음에
한국에 와서는 그런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 기쁨조 미향’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이제 제 사진이 나가면 성가진 일이 많아지겠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고요.
저는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남한에
와서 연예계 데뷔할 기회도 많았죠. 배우나 감독들 중에 아는 사람도 적잖습니다.
제 과거는 모르지만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던 감독도 여럿입니다.

 

  하지만
다 거절했어요. 한국 연예계의 실상을 알아갈 수록 북한에서 살았던 제가 그 물에
적응할 자신이 없더군요.

 

  그리고
중앙당에 있을 때 찍은 저의 10대 시절의 사진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얼굴이 많이 못쓰게 됐어요. 예쁠 때 사진 찍히고 싶은 것이 여자잖아요.

 

  또
한 가지 망설여지는 것이 있다면, 한국은 안전한 곳이 아니잖아요. 이한영 피살사건
때 보시다시피 저들은 마음먹으면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만약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저를 없애도 제가 따로 남긴 상세한 이야기가
다 공개돼 책으로 나간다면 암살이 별 효과는 없을 거예요. 오히려 테러국가라는
이미지만 더욱 각인될 겁니다. 그렇긴 해도 굳이 얼굴을 공개할 생각은 없어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어떻게 남한에 오게 됐는지 궁금해 할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다 나름의 사연과 아픔이 있습니다. 조용히 가슴에 묻어두고 싶은 것일 수도 있죠.
그냥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의 가족이 북한에선 용서 못할 역적이 돼버렸습니다.

 

  역적의
딸을 김정일의 옆에 둘 수는 없잖아요. 미옥 언니가 저를 붙안고 ‘넌 이제 살기
힘들 거다. 다시 못 보겠구나’하면서 몹시 슬퍼했어요.

 

  언니가
‘너 죽지 않게 내가 최선을 다할게’ 그러면서 돈도 많이 주었어요. 헤어질 때 저도
엄청 울었어요. 1997년 저는 중앙당 보위부에 갇혀서 참 오랫동안 심문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제가 할 이야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어느
날 보위부 사람이 이야기하더군요. ‘장군님 말씀에 따라 목숨만은 건졌으니 감사하라’고요.
그 순간 미옥 언니가 생각났어요.

 

  저는
깊은 산골 오지의 혁명화 구역으로 추방돼 한동안 세상과 격리됐어요. 이해되지 않는
게 추방 나갈 때 김정일이 준 선물을 일부는 뺏지 않고 갖고 나가게 해요.

 

  유배
중에 은인이 생겨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가 알려준 선을 따라 몇 달 뒤 북한을
벗어나 남한까지 오게 됐습니다.

 

  다시
떠올리긴 싫지만 그 과정을 써도 아마 두꺼운 책 하나는 나올 거예요.

 

  에피소드
하나 이야기할게요. 중국에서 북한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북한 식당에 간 적이 있어요.
나름 안경을 쓰는 등 변장을 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 식당에서 일하던 한 여인이 저를 자꾸 쳐다봐요. 저는 그녀가 낯은 익은데 선뜻
생각은 안 났어요.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제가 다가와서 조용히 ‘실례지만 혹시
아무개 아닙니까’하고 묻는 거예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그는
5과 시험 볼 때 나랑 함께 3차까지 올라왔고, 최종 시험 때는 같은 호텔에서도 생활했던
애였는데, 왜 중국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어요.

 

  5과에는
뽑혀도 최종까지는 못 간 미모의 여자애들은 따로 교육시켜 호텔에 상주시키면서
외국 요인들을 접대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해외까지 나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곤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어요. 그게 벌써 10년
넘었군요. 요즘 해외 북한 식당 종업원들은 권세 있는 간부집 자식 중에서 선발된다고
들었어요.”

 

  남한에
오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길은 아닙니다. 운명이 이끈 것이죠.

 

  그리고
남한에서의 삶에 대해 벌써 결론을 낼 수는 없다고 봅니다. 30대에 ‘인생을 잘 살았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듯이 말이죠.

 

  잘
왔는지는 몇십 년 뒤에 대답할 문제가 아닐까요. 아마 북한에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행복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행복이란 별것 아니구나 하고 느끼죠. 결국 행복이란 자기가 느끼는
감정 아닌가요. 김정일과 있었던 일은 제 일생의 일장춘몽일 뿐입니다.

 

  살아갈
날은 그 순간의 몇십 배입니다. 앞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목표와 꿈은 잃고 싶지 않습니다.
꿈이 뭐냐고요? 훗날 북한에 돌아가 부모 잃은 애들을 돌보는 고아원 원장이 되고
싶습니다.

 

  (연재
끝)

 

 —————————————————————

 

  <에
필 로 그>

 

  이
글이 공개된 뒤 어떤 곳에서 전화가 왔다.

  주인공이
누군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이
여성이 입국한 뒤 조사과정에 과거를 숨겼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처음엔 이미 한 약속이 있어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찾아냈다.

  솔직히
과거 조사 서류들만 다시 캐 봐도 누군지 딱 집힐 것이다.

  그녀에게
만나자고 집요하게 전화한다.

  이왕
그렇게 된 것 나의 책임도 있으니 함께 나갔다.

 

  오갔던
그 많은 말들을 다 옮길 수는 없다.

  “이것(김정일
사생활)이 주 기자님이 지어낸 것 아닙니까”고 물을 때는 모욕감마저 들었다. 진실여부가
궁금하면 본인을 조사해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간단히 알 수 있을 텐데 이들은
김정일에 대해선 관심 없는 것 같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했던 것은 아닐지.

 

  불러낸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글을 쓰면 신변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우니 더 이상의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리는 글은
나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을 전달한다. 다 생각해서란다.

 

  음,
신변보호라. 나는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고위급 하수인으로 인민의
등껍질을 벗겨 먹다가 비리가 드러나 도망쳐 오면 확실히 받는다고 장담할 수 있다.
참고로 모든 탈북자들과 북한 주민들에게 죄를 짓는 이런 문제는 나도 예전부터 한번은
건드려봐야겠다고 벼르고 있는 참이다.

 

  조용히
살라는 ‘친절한’ 권고는 긍정적인 선의의 표시로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입
다물고 조용히 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긴 누가 보건대 나는 약간의 힘이
생겼다고 계란을 들고 바위에 덤벼드는 주제파악 못하는 보기 안쓰러운 탈북자일
수도 있다. 삶의 지혜는 엇서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귀에 속삭이건만.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남북이 정상회담 분위기를 막 만들려고 하는데, 김정일의 부도덕성을
까밝히고 자극하는 글이 그 직전에 자꾸 튀어나와 화제를 모으면 위에서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좀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김정일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고 전 세계에
알리려는 사람들에게는 정상회담이라는 이슈가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연재된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느꼈겠지만 이번 내용은 전반적으로 매우 조심스럽다.

  이미
내가 들은 내용만으로도 책이 나올 정도지만 정말 민감하고 자극적인 내용은 거의
빠졌다. 당사자가 지금은 원치 않아서였다. 다 쓴다면 파문이 엄청날 것 같다.

 

  김정일이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문제들을 공개하는 것은 큰 위험을 동반한다. 김정일의 사생활을
폭로했던 이한영의 피살사건에서 보다시피 한국은 안전지대가 아니며 이웃 일본에서도
후지모토라는 요리사가 숨어 지낸다.

 

  그렇지만
협박이 두렵다고, 목숨이 두렵다고 물러서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다행스럽게
목숨을 부지해 살아온 북한 의 사명감은 나를 늘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짐이다.

 

  수백
 만의 백성을 굶겨 죽인 독재자가 어떻게 호화 방탕한 생활을 하는지, 이를
위해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무수한 비밀 지하궁전을 짓느라 또 어떻게 인민들의 자식들이
죽어가고 있는지. 설계도를 그렸다고 죽이고, 비밀을 누설했다고 죽이고, 사고가
나서 죽어가고…. 이런 내용은 세계에 알려져야 한다. 누군가는 목숨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메야 할 것이다.

 

  영향력
있는 언론에서 민감한
북한 관련 기사를 쓰다 보니 나는 그동안 신변 협박을 수시로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글은 그녀의 우려 때문에 조심조심 썼건만 나간 뒤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협박을
전달 받았다. 나는 협박받아도 상관없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걱정스럽고 미안하다.
그러고 보니 조용히 있으라고 했던 것은 정말로 친절의 표시였던가.

 

  그런데
며칠 뒤 나는 공개하지 말아야 할(나 때문이 아닌 그들의 체면 때문에) 일로 속임까지
당해 몹시 화가 났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에서 오픈된 삶을 사는 나를 마음만
먹으면 전화통화, 이메일, 통장잔고에 결제내역까지 모두 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어떤
음모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예감마저 든다. 그런 점 때문에 망설이다가
이런 글을
미리 적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미리 말해주는 것은 정말로 친절한 행위일 수도 있겠다.
음, 그런데 손에 든 계란은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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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음식에 대해서 조사할려 하는데요 대표로 함흥냉면... 우리나라 유명한 지역 냉면 특징 유래도 괜찮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북에서 사랑받던 냉면은 6.25때 1.4후퇴와 함께...

북부지방에서는 왜 냉면을 먹나요?

북부지방에서는 냉면이 유명하잖아요 평양랭면(?)이라든지... 북한지역에서 감자와 밀이 많이 나잖아요 먹을 게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우선 그 음식 재료가 많이 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