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가면 가봐야 할곳

부여가면 가봐야 할곳

작성일 2012.05.0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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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수학여행을 부여로 갑니다. 근데 저희반 선생님께서 부여의 유적지에 대해 조사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셨습니다.(수학여행을 부여로 가면 꼭 가는 곳) 제발 답변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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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유적지)

 

1.기림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기림성(성흥산성0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2.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3.능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시 대 백제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4.청마산성

 

종 목  사적  제3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1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능산리 월명산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

 

골짜기를 성안에 두고 산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전반적으로 성벽이 많이 무너져 있으나,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계곡의 물이 흐르는 서쪽 성벽에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성이라 남문이 없다. 현재 성안에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이 쌓은 망대와 각시우물이라 전하는 우물터, 경룡사터, 의열사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백제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석성산성·성흥산성·증산성과 함께 부여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서 의미가 크다.
 

 

5.군수리사지 

 

종 목  사적  제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 
시 대 백제


부여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이후 계속된 조사를 통해서 백제의 기본적인 가람배치로 알려졌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6.부여 나성

 

종 목  사적  제5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565 
시 대 삼국시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4㎞의 성이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부여시가지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에 있는 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의 하나이며,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이 있던 자리에서 시작하여 금강변까지 흙으로 쌓아만든 것으로, 지금은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벽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안쪽 벽은 완만하여, 성위에서 말을 달릴 만한 길이 있고 곳곳에 초소가 있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필서봉에는 횃불을 올리던 봉수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성안에는 백제의 왕궁을 비롯하여 관청·민가·절·상가 및 방어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의 전체적인 구조는 남쪽과 서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또 물길도 파놓아서 자연적인 2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부여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수도보호를 위한 외곽방어시설로 중요한 성이었다. 

 

 

7.청산성

 

종 목  사적  제5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 
시 대 삼국시대


부소산 동쪽 500m 지점의 낮은 구릉 위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흙으로 쌓아만든 산성이다.

 

백제 무왕 6년(605)에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나성과 함께 쌓았다. 외성의 북쪽 성벽은 나성과 연결되어 있어, 나성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독립된 산성이라기보다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부소산성과 연결하여 쌓았던 보조산성으로 보인다.

 

약 300m 정도의 내성과 500m 정도의 외성으로 이루어진 2중구조의 산성으로 보이지만, 내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산봉우리를 빙 둘러쌓은 테뫼식산성으로, 동북쪽 성벽의 윤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안 서부와 북부에 당시의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있다. 

 

 

8.석성산성

 

종 목 사적 제8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 산83

시 대 삼국시대

 

연산의 황산성, 노성의 노성산성 및 금강 건너의 성흥산성, 뒤쪽의 금성산성과 연결되는 백제의 수도 사비 남쪽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안쪽에 성을 세운 후, 다시 성 밖에 2개의 골짜기를 따라 성을 쌓았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와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6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둘레 약 1,600m, 폭 약 5m, 높이 4m 정도로, 바깥쪽은 돌을 쌓아 올리고 안쪽은 흙을 파서 도랑(호)처럼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벽은 모두 무너졌고, 성벽이 통과하는 계곡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수구(水口)도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오른쪽의 수구에 해당하는 부분은 좌우로 성벽과 연결되도록 돌덩이들을 3∼4m정도의 높이로 쌓아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 안의 가운데 산등성이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많이 널려있어 건물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사비성이 함락된 뒤에도 당나라군과 신라 및 백제부흥군이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으로 유서 깊은 유적이다.

 

  

9.쌍북리 요지 

 

종 목  사적  제9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시 대 백제


충남 부여군 쌍북리에 있는 백제 때 토기 및 기와를 굽던 가마터로, 1941년 5월에 부여 시가지 계획도로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가마는 땅에 묻힌 상태여서 분명하진 않지만, 폭 135㎝, 높이 90㎝ 정도의 크기였다. 굴뚝 부분에서 아래로 3㎝ 정도가 남아 있고 아궁이 부분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완성되면서 가마의 앞부분이 잘려져 낭떠러지로 되어 있으며, 시멘트로 석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이 부근에서는 토기조각이나 가마에서 버린 물건들이 발견되지 않지만, 산등성이 너머의 경작지에서는 많은 수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널려져 있다.

 

지금은 가마의 일부만 남아있지만 부여읍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토기 및 기와 가마터로서 그 의의가 크다.
 

 

10.궁남지 

 

종 목  사적  제135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11.증산성 

 

종 목  사적  제156호 
지 정 일 1967.03.2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 산86 
시 대 백제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성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 듯 하다고 하여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백제 산성이다.

 

성왕 16년(538)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나서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2∼3m 정도로 거의 무너진 상태이지만, 성의 남쪽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쪽·남쪽·북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지만 다른 성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한 편이다. 성 안에는 백제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동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바라 보면서 연결 되어있다.

 

증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정월에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고성성으로도 여겨지이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한 거점으로도 여겨지는 중요한 산성이다.

 

 

12.송국리 선사취락지


종 목  사적  제249호 
지 정 일 1976.12.3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산24-1외 
시 대 선사시대


부여 송국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이다. 하천과 평지에 인접한 낮은 구릉과 대지 위에 100여 기 이상의 집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터는 평면 형태에 따라 둥근 것과 긴 네모꼴인 것이 있다. 둥근 집터는 30∼150cm 깊이로 땅을 파서(수혈식주거지) 만들었으며, 한쪽 벽을 얕게 파서 문을 만든 듯하다. 화덕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바닥 중앙에 1m 내외의 긴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 안에 몇 개의 둥근 구덩이를 만들었다. 네모꼴 집터는 30㎝ 미만으로 땅을 판 반움집이나 지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기둥구멍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주춧돌이 있는 발달된 집 형태를 하고 있다.


집터 안에서는 토기와 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무문토기와 붉은 토기(홍도), 검은 간토기(흑도)가 나왔다. 무문토기는 납작한 밑, 긴 달걀형의 몸체, 목이 없이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꺾인 모습을 하여 이전의 무문토기와 달라 송국리식토기라 불린다.


돌칼, 돌화살촉, 방추차, 돌도끼를 비롯하여 다양한 석기들도 출토되었다. 그 밖에 많은 양의 불탄쌀과 벽체에 세웠던 판자가 불탄채로 나오기도 하였고, 청동도끼 거푸집(동부용범)이 출토되었다. 청동도끼 거푸집은 부채날형 청동도끼의 틀로서 요령지역의 것과 닮은 것이다. 집터 서쪽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문토기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송국리 집터는 유물을 토대로 기원전 7∼6세기 전에 농경과 수렵에 기반을 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3.정림사지 

 

종 목  사적  제301호 
지 정 일 1983.03.26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14.정암리 와요지


종 목  사적  제373호 
지 정 일 1992.05.04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양길면 정암리 47외 
시 대 백제


부여 백마강 건너 야산 남쪽 비탈에 있는 백제 가마터이다.


백제 가마 11기와 고려시대의 가마 1기가 조사되었다. 가마는 풍화된 화강암반을 파고 들어가 만든 지하식 가마이며 천장을 제외하고는 완전하게 남아있다. 출토 유물은 연꽃무늬 수막새, 상자형 전돌, 토기, 각종 기와 등이 있다. 연꽃무늬 와당은 군수리와 동남리에서 나온 와당과 비슷해, 이곳에서 기와를 구워 부여의 주요 건물에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6세기 후반∼7세기전반) 가마터로서 그 모습이 잘 남아 있어 백제 가마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15.능안골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20호 
지 정 일 2000.07.22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7외 
시 대 백제


백제 능산리 무덤 동쪽에 있는 백제나성(사적 제58호)이나 청마산성(사적 제34호)과 함께 있는 백제 무덤이다.

1995∼1996년 사이에 조사되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30여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0여기, 독무덤(옹관묘) 4기 등을 발견하였다. 홑무덤(단장묘)이나 합장묘, 어린아이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주·사 등의 옷감 및 금귀고리, 은제관장식과 띠드리개장식(요대장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 후기 무덤형식과 의복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6.화지산 일원 유적


종 목  사적  제425호 
지 정 일 2001.01.04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05번지 외 
시 대 백제


부여 궁남지(사적 제135호) 동쪽에 위치한 화지산(해발 10∼48m인 야산)은 백제 이궁지인 망해정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서, 지난 '86년에 충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초석과 와편들이 다량 출토된 유적지이다.


2000. 5월부터 8월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추가 발굴조사한 결과에서도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건물지, 분묘, 목책시설 등 다양한 유구 및 유물(건물지5, 석곽묘11기, 토광묘<민묘>18기, 석축시설, 출토유물 50점 등)이 확인되어 이 일대가 백제시대 이후 계속적으로 거주지 또는 묘역으로 활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7.왕흥사지


종 목  사적  제427호 
지 정 일 2001.02.0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37-2번지외 
시 대 백제


부여 왕흥사지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화에 창건(법왕 2년, 600)과 낙성(무왕 35년, 634)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백제시대의 중요한 사찰유적으로 1934년 충남 부여군 신리 일대에서 왕흥명 기와편이 수습되어 신고됨에 따라 이 지역을 ‘왕흥사’의 위치로 비정하였다. 이후 왕흥사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82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에 사적 제42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00년부터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2010년 현재 11차 발굴조사를 시행중에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목탑지, 금당지를 비롯하여 동,서회랑 및 동,서건물지, 강당지 및 서편부속건물지 등 사역 중심부의 건물지들을 확인하였으며 사역의 축대인 동서석축, 진입시설인 남북석축과 사역 동편 외곽의 백제~고려시대 기와가마터가 확인되었다.


2007년 제8차 발굴조사 중 사리공 내부에서 금제사리병, 은제사리호, 청동사리합의 3중구조로 안치된 사리기가 출토되었다. 청동사리합 동체 외면에는 상·하 양단에 2줄의 음각선을 돌리고 그 안으로 5자 6행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정유년(577)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또는 사찰)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왕흥사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으로 문헌기록과 차이를 보여 왕흥사 창건시기를 밝히고 나아가 문헌 속 백제사에 대한 재검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8.관북리 백제 유적


종 목  사적  제428호  
지 정 일 2001.02.0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외 
시 대 백제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로 지정되어 있다.


'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가 발견되었고, '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9.능산리사지


종 목  사적  제434호 
지 정 일 2001.09.29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 외 
시 대 백제


능산리 절터는 부여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과 부여나성(사적 제58호)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유적으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3년 이 절터 내의 공방으로 생각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 수준과 예술 역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공양자 및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창건연대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건축공학, 고고학, 미술사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20.금강사지


종 목  사적  제435호 
지 정 일 2001.09.29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 13-1외 
시 대 백제

 
금강사 터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이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까지 계속하여 법등이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절로, 1964년과 1966년 두 차례 발굴조사 결과 초창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중건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금강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금강사로 불리던 절의 폐사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초창의 가람은 백제시대의 것으로 목탑을 갖춘 일탑일금당식의 가람 형식인데 남북을 축으로 한 남북방향이 아니고, 동서를 축으로 한 점이 특징이다. 동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이어지고 중문에서 강당에 걸쳐 회랑이 돌려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건축에 있어서 기단은 건물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금당의 경우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추고 네 귀퉁이에는 동자주를 세운 형식이고, 강당과 승방은 지대석이 없이 판석을 세워 축조하고 있다. 목탑지 기단은 2층 기단이었다고 추정되었으며, 그 지하 6척 깊이에서 발견된 심초는 자연의 풍화암반을 이용한 특이한 것이었다.


탑·금당·중문의 기단 축토가 판축법에 의해 축성되었음이 처음 확인된 절터 유적으로 역사적, 미술사학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21.홍산현 관아


종 목  사적  제481호 
지 정 일 2007.07.3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 187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홍산현 관아와 관련된 중요 기록은 여지도서(1757~1765), 홍산읍지(영조이후), 호서읍지(1892~1895), 서울대 규장각 소장 홍산현지도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옛 고을의 핵심시설인 객사와 동헌이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매우 드문 예라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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