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질문자님께 답변드립니다.
사회 숙제시라구요?
어이구 열심히 해가셔야겠네요.
제 답변 보시구 해가셔서 맘에 드시면 답변확정해주세요~ ^^
1. 통일 신라의 발전
통일 신라의 발전은
이차돈의 희생을 통하여 법흥왕 때 불교를 통하여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여러 성군들의 통치 이래하에, 신라 문화의 전통 위에 찬란한 문화를 이룩, 전성기가 다가옵니다.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일본(왜), 중국(당)나라, 아라비아등과의 교역을 통해 신라의 자유로운 해상 무역 기술이 발달하는 등, 여러면에서 발전합니다. 그러면서 성군이었던 의자왕의 초기 정책으로 인하여 신라는 많은 땅을 빼앗깁니다. 처음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갑니다. 결국 진흥왕 때에서부터 태종무열왕 초기까지 끝내 당나라와의 협상에 성공, 김유신 장군과 태종 무열왕, 여러 장군들의 활약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무찌르고 삼국의 통일을 이루어냅니다. 하지만 외세를(당나라) 끌어들여
자력이 아닌 삼국통일을 이룩해 내었다는 점과, 고구려의 영토를 얻지 못하고 반도 내에만 속한 영토만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삼국 통일을 했다는 것으로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2. 통일 신라의 문화
통일 후 신라는 중앙의 귀족을 지방의 관리로 파견하는 등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체제를 강화해 갔다. 초기의 1세기간의 전성기를 지나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점차 왕권 쟁탈의 심화되고 귀족의 분열하며, 신분제의 구조적 문제와 호족의 반란 등이 잇따르면서 정치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892년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키고, 901년 궁예가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세우므로 다시 삼국으로 갈려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윽고 935(경순왕 9)년에 신라는 궁예의 후고구려를 이어 고려를 일으킨 왕건에 의해 종말을 맞았다.
통일신라는 정치적으로 불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당 등의 대륙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귀족적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역시 초기 안정기에 큰 진전이 있었는데 이시기에 불국사를 창건하고 안압지와 석굴암을 조영하였으며 다보탑을 비롯한 많은 탑파와 불상 등 우수한 불교 미술품들이 조성․창작되어졌다.
이 시기의 대표적 불교예술품 중의 하나인 불상은 인도의 굽타양식으로 성립된 당의 양식을 수용해 세련되고 사실적인 조각양식을 확립하였는데 얇은 옷자락을 몸에 밀착시켜 신체의 굴곡과 볼륨이 완연히 드러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범종도 종 상부의 용뉴, 용통, 종신의 상․하대무늬, 유곽과 9개의 유두, 비천상과 당좌의 우리나라 범종 양식의 전형이 이때에 확립되었다. 그 외 고복형연보주석등 쌍사자석등 등의 석등과 부도나 탑파의 아름다운 조형이 어느 시기보다도 뛰어나다.
통일신라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사라지고 돌방무덤과 돌무덤이 쓰여졌으나 불교의 장제에 따라 뼈 항아리에 납골하여 매장하는 화장묘가 성행하기도 하였다. 돌방무덤은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을 받아 통일시대 이전 6세기말부터 쓰여졌으며, 널방으로 통하는 널길 만들고 봉분 밑둘레에 둘레돌을 두르기도 하였는데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새기기도 하였다. 그 외 석인을 배치한 경우도 있다. 통일신라기의 대표적 돌방무덤은 전 경덕왕릉, 김유신이다.
토기는 이미 6세기말부터 나타나는 특징으로 굽이 낮아지고 굽구멍이 형식화 되어진다. 그리고 입 큰병, 목긴병, 자라병, 주름병과 같은 병류나, 합 또는 뼈 항아리 같은 새로운 형태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새긴 무늬도 초기에는 문살무늬나 겹고리무늬가 많았으나 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찍어 새긴 도장무늬를 화려하게 베풀기 시작한다. 또 연유를 입혀 녹색․황갈색․황녹색의 아름다운 채유 토기도 만들어지는데 특히 뼈 항아리류에 많이 나타난다. 말기에 이르면 도장무늬가 점차 사라지고 민무늬로 바뀌면서 입 큰병이 증가한다. 이때에 청자와 유사한 것들이 만들어지면서 고려 토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 외 연꽃무늬와 당초무늬를 조각한 와전의 괄목할 만한 발전 또한 주목된다.
3. 통일 신라의 건국
660년에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는 둥 신라의 50 여개의 성을 빼앗아 갑니다.
그리하여 백제의 의자왕은 성군이라고 칭송받으며 점점 자만에 빠져 흥청망청 놀게되죠.
통일신라 당시 당나라 그리고 신라는 동맹 관계였고 고구려와 돌궐과 백제와 왜 역시 동맹 관계로 십자 외교를 맺고 있었죠. 고구려에 사절단을 보내보나 고구려의 왕인 보장왕은 오히려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이북의 땅을 내놓으면 생각해보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김춘추는 알고있던 고구려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빠져나가 이번에는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러갑니다. 당시 티베트 정벌준비를 하고있던 와중 후방의 고구려에 뒤치를 당할 위험이 있었던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군을 결성, 백제의 금강 하구로 침입해 오게 되고 결국은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잡히죠. 고구려는 명장 연개소문의 지휘를 통해 저항을 잘 하다가 연개소문이 죽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연남건, 연남생, 연남산들의 내분으로 인해 치고받고하다가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자 당나라는 옛 고구려 땅에 안동 도호부를 백제 땅에는 웅진 도독부를 신라 땅에는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게 되는데 신라가 반발하자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죠. 기벌포전투와 매소성 전투가 대표적인 예인대요. 이 둘의 전투에서 신라는 대승을 거두고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게 되죠.
이로써 통일 신라가 형성됩니다.
즐공 열공하세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