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구

양천구

작성일 2007.03.07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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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가 양천구에 대해 조사를 할려 그러는데요...

*양천구

*유래/전설

*문화재/유물

등등 지역조사 하는데 필요한 내용들좀 써주세요...

내공 있습니다.

 


#양천구청 #양천구 #양천구립도서관 #양천구시설관리공단 #양천구민체육센터 #양천구 갑 #양천구 대형폐기물 #양천구육아종합지원센터 #양천구 보건소 #양천구청역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유래는 ..

양천구(陽川區)

   양천구(陽川區)는 1988년 강서구에서 분리 신설된 구(區)이다. 「양천(陽川)」은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 하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공암(孔岩)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과천)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양광도(楊廣道)로 속하여 수주(樹州)에 딸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공암(孔岩)을 양천(陽川)으로 고쳤으며,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경기좌도(京畿左道)로 편입되었다.

  조선 태종(太宗) 14년(1414)에 양천을 김포(金浦)와 병합하여 김양현(金陽縣)으로 하다가 동년에 다시 떼어내 금천(衿川)(시흥군)에 붙였다. 태종(太宗) 16년(1416)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고종(高宗) 32년에 양천군(陽川郡)이 되었다.

  양천(陽川)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때에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고 했다. 「제차(齊次)」라는 말은 지금의 김포군「양천」의 고명(古名)인데 뜻은 미상이나 혹시 「잿」(城)의 음차(音借)인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파의(巴衣)」는 「공암」의 「암(岩)」에 해당하는 「바위」의 음차이다. 바위는 「파의(波衣)」「파혜(波兮)」로 음차된 예가 많다. 그래서 양천은 제차파의현-공암현-양천현이 되었으며 「잿바위」혹은 「갯바위」의 뜻이다.

http://www.yangchon.seoul.kr/  

 

 목동(木洞)
 신월동(新月洞)
 신정동(新亭洞)

 

 

 

 

 

 

 

 

 

목동(木洞)

  목동(木洞)의 동명은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목동리(木洞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목동은 조선시대까지는 양천군(陽川郡) 남산면(南山面) 월촌리(月村里), 내목동(內木洞), 외목동(外木洞)이었던 것을 1914년 군, 면, 동, 리의 폐합을 하면서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의 확장이 있을 때 김포, 시흥군 일대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영등포구에 양동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목동리는 이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8년 양동출장소를 폐지함에 따라 목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7년 강서구를 신설하면서 이에 포함되었다.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분리 신설하면서 목동은 신설된 양천구 관할이 되었다.

  목동은 날로 증가하는 도심인구의 분산과 서울 남부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조성되는 대단위 주택단지의 건설에 그 목적을 두고 개발되었다.

  신시가지 개발계획이 수립되기 전의 목동의 도시 속의 농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한적한 곳이었다. 동쪽은 안양천(安養川)이 흐르고 북쪽은 한강에 연하여 있기 때문에 장마 때마다 상습적으로 침수가 되는 곳이었다. 이 곳이 안양천의 정비작업과 한강개발사업, 경인고속국도 주변 정리 등으로 인해 신주거지역으로 개발되었다.
  70여년 전 안양천 제방공사로 많은 농경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갈대가 우거진 침수지대로 무성한 목초(牧草)가 자연 조성되었기 때문에 말을 방목하는 목장(牧場)으로 이용되었다. 목장의 안쪽에 있던 마을은 내목동(內木洞) 혹은 나말, 안말, 안마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목동 제일 바깥쪽 끝부분에 있는 동네를 외목동(外木洞) 혹은 모세미라 하였으며 마장(馬場) 안 바로 옆에 있는 산은 마장산이라 하였다. 마장 안쪽은 마을을 마장안 또는 마장이라 하는데 내목동(內木洞)을 말한다. 또 부엉이처럼 바위모양이 생겼다하여 이름이 붙여진 부엉바위가 있으며 부엉바위가 있는 산을 부엉바위산이라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본 목동의 외산은 수명산과 우장산(雨裝山)이 있고 또 높이 98.8m의 매봉산, 양화산 등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 마치 한양이 내사산(內四山), 외사산(外四山)으로 형성된 것과 같은 형상으로 되어 있다. 또 객수(客水)인 안양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는 등 지형, 지세에서 왕이 나올 수 있는 곳이라 하던 왕재산(王在山)이 있었으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모두 주택단지로 변하였다.

  1923년 한강수리조합에 의한 농수로의 개발과 1925년 대홍수로 한강변과 안양천변 일대가 모두 침수되자 한강변에 흙으로 제방을 쌓게 되어 전일의 목초지였던 곳은 농경지로 조성되었다. 이에 각지에서 사람들이 농토가 있는 이 곳으로 모여들어 새로 이룩한 마을을 신촌(新村) 또는 새말이라 하였다.
  신촌에는 엄지미라는 마을이 있는데 양화초등학교와 진흥연립이 있는 곳을 말하며, 엄지미란 부락이름은 엄지산(嚴知山)에서 유래되었다. 용왕산이라고도 하는 엄지산은 높이 78m와 68m의 봉우리 두 개가 붙어서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목동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두 봉우리가 마치 펴놓은 엄지손가락을 옆에서 보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78m 높이 부분은 손바닥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조금 불룩하게 나온 곳이고 68m 높이 지점은 손톱부분으로 보인다.
  월촌(月村)은 달거리 혹은 달거리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용왕산 남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1단지와 2단지 동쪽부분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용왕산(龍王山)에서 떠오르는 달을 제일 먼저 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라고 한다.
  한강으로 유입되는 부분의 안양천은 원래 이름이 오목내였다. 이 부분에는 많은 세천(細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오목교 근방에 이르면 이들 세천에서 나온 물길들이 한데 모이면서 하천바닥을 움푹하게 골을 만들었고 이처럼 골이 형성되어 움푹 들어간 곳을 「오목하게 만들어진 내」라는 뜻으로 오목내라 하였다. 이 오목내에 걸쳐진 다리가 오목교인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이곳의 물살이 세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게 되자 동네사람들이 다리를 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매번 다리를 놓을 때마다 떠내려 가므로 동네 사람들은 달리 방도를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한 늙은 스님이 지나가다가 떠내려가는 다리를 붙잡아 매는 모습을 보고 '쯧쯧, 오동나무로 다리를 놓으면 쉬울 것을···'라고 하며 지나갔다. 이 말을 들은 인부 한사람이 급히 달려가 무슨 말인가 하고 되묻자 '웃여울에서 오동나무를 떠내려보내 멈추는 곳이 다리 놓을 곳인데 괜한 장소에서 애쓰며 다리를 놓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며 오히려 힐책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속는 셈치고 노승의 말대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근방에는 오동나무가 하나도 없으므로 멀리 남쪽에 있는 칼산에서 오동나무를 베어 바로 안양천 물에 띄우자 과연 지금의 오목교 근방에서 멈추므로 이 곳에다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때부터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동나무다리라 불렀다.

  목동 신시가지 개발계획의 마지막 꽃은 목동종합운동장의 완성이다. 이 운동장은 서울시민들의 체육진흥을 위해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에 건설되었다.
  서울시가 목동 신시가지 개발사업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1987년 6월부터 206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목동 아파트단지와 안양천 사이 4만 8,269평의 대지에 착공한 이 종합운동장은 주경기장, 야구장, 실내빙상경기장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목동에는 목동 신시가지개발과 함께 중요한 전력공급처가 될 열병합 발전소를 1985년 1월에 착공하여 1988년 11월 28일에 완공함에 따라 국내 최초인 열병합발전소의 건설과 함께 국내의 난방 및 폐열관리 등에 획기적인 전기를 열었다.
  목동 906번지에는 1987년 3월 6일 착공 동년 7월 1일 준공 개원한 파리공원이 있다. 1886년 한국과 프랑스가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이래 지난 백년동안 두 나라가 동서문화의 교류는 물론 경제발전의 동반자로 국제평화유지의 혈맹으로 다진 우호를 상기하고, 파리시 코로니 아파트 단지 내에 「서울광장」을 마련한 답례로 신시가지 부지 2만 9,720㎡의 제2근린공원을 파리공원으로 조성케 되었던 것이다.

 

 신월동(新月洞)

 

  신월동(新月洞)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이 고을 원님이 양천향교(陽川鄕校)를 지나 현 화곡아파트 부근 돌다리 앞에 이르러 전망으로 보니 마을이 신선하고 반달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새「新」자와 달「月」자를 따서 신월리(新月里)라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신월동은 갑오개혁시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에서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된 장군소면(將軍所面)의 신월리(新月里), 개대리(開垈里), 당곡리(堂谷里), 고음월리(古音月里) 등 마을이 띄어띄엄 자리잡아 이룩된 약 100호 정도의 마을이었다.
  1914년 경기도의 구역을 획정할 때 신월리, 당곡리, 고음월리를 합쳐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신당리(新堂里)로 하였는데 이들 마을 중 비교적 규모가 크고 중심지역인 신월리와 당곡리의 이름을 각각 따서 동명을  붙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동출장소 신월동이 되었다. 1977년 강서구를 신설하면서 강서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양천구가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고,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신설하여 양천구에는 목동 신시가지에 해당되는 목동, 신정동과 함께 신월동이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 전에도 신월동은 교통의 요지와 김포평야가 끝나는 구릉지대로 침수지역이 없는 준평원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제법 큰 부락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신월동에는 자연부락명이 아직도 꽤 많이 남아있다.

  신원초등학교가 있는 뒷산에서 동쪽으로 발달한 동네를 곰달래라고 하는데 달빛이 맑게 비친다는 뜻의 고운달동네가 곰달래로 되었다. 한자로는 고음월(古音月)이라 쓴다. 신월2동 지역으로 경인고속도로변에 발달한 마을을 개대리(開垈里)라 한다. 개터리 혹은 새터골이라고도 하는데 곰달래 쪽의 사람들이 이주, 부락을 새로 형성하였다.
  신월3동 화곡로가 지나는 동네를 당곡(堂谷) 혹은 당꿀이라 한다. 마을의 어귀에 해당되는 곳으로 도당(都堂)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상곡(裳谷)이라고도 하는데 당집에 펄럭이는 깃발이 마치 치마를 펴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곰달래의 아랫동네는 아랫말, 윗동네는 웃말이라 하며 신월2동 쪽을 한강말이라 하였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홍수때 한강과 안양천을 넘쳐흘러 이곳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한강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 이 지방의 소산물 중 수산물로는 생자해(生雌蟹;게), 위어(葦魚;웅어), 백어(白魚;뱅어), 은어(銀魚), 면어(綿魚;민어?)등이 유명하였으며, 이 중 게와 웅어는 나라의 진상품으로 바쳤고, 사어는 국휼시(國恤時)혈에 진공하였다.
  이 직역은 한강에 연한 평탄한 야지(野地)로 지질은 비교적 비옥한 편이나 수원(水源)이 적어 수도작(水稻作)은 생수지(生水地)에나 경작이 가능하였지만 가뭄의 피해가 많아 야지는 전작(田作)을 대부분 하여였다.

  이 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전래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양천원님이 부임할 때 울고, 나갈 때 운다.』

  양천현(陽川縣)은 장(長) 30리이며 광(廣) 15里가 되는 아주 작은 고을인 데다가 한강이 가까운 야지이기 때문에 수해가 가끔 있어서 해마다 흉년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 고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라야 잡곡 뿐이라서 누가 보든지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현감이 이런 고을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보니 낙심이 되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부임하여 지내고 보니 봉급 외에도 꽤 생기는게 있었다. 즉, 매년 백미의 관수미(官需米 ; 현감의 식량으로 매년 정해놓은 쌀)가 108석이고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 ; 손님 접대용으로 정해놓으 쌀)가 30석이며 그 밖에 은결(隱結)에서 남이 모르게 생기는 것과 또 살림에 해당하는 모든 물건이 들어오니 작은 고을로는 그만하면 상당한 수입이 되었다. 이런 고을을 버리고 다른 임지로 떠나게 되니 아까운 생각에서 또한 울 정도였다 하여 나온 말이다.

  『양천 사람은 바람마시고 죽(粥)을 마신다.』

  이 말은 기후에 따라 부는 바람이 아침에는 동풍이 불고 저녁때는 서풍이 부는 경우가 많아 일기가 고르지 않는 때가 많다. 그런 날 서울로 나무를 팔러 가는 나무장사나 행인이 항상 일찍 출발하므로 집에서 떠날 때에는 동풍이 불어 바람을 안고 가니 바람을 마시게 되고 저녁 때 집으로 올 때는 서풍이 불어 또 안고 내려오게 된다. 해마다 계속되는 흉작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을 하게 되어 죽을 먹는다는 데서 나온 속담이나 실제로 옛날의 실정이 그러하였다고 한다.

 

신정동(新亭洞)

  신정동(新亭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의 자연마을이었던 新機(신트리)의 「新」자와 은행정(銀杏亭)의 「亭」자를 따서 신정리(新亭里)라 한데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에 속하였던 것을 갑오개혁시 양천현이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됨에 따라 여러 부락들을 합하여 양천군 장군소면(將軍所面)의 은행리(銀杏里)와 신기리(新機里)로 하였다. 1914년 구역획정때 은행정리와 신기리는 양천(陽川)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양동면(陽東面)으로 하고 두 마을을 합쳐 신정리(新亭里)로 하였다. 1963년 영등포구 양동출장소로 소속되고 신정동(新亭洞)으로 동명을 변경하였다. 1968년 양동출장소의 폐지로 영등포구 신정동이 되었다가 1977년 영등포구에서 강서구를 분리하여 설치하자 신정동은 신설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양천구를 신설케 되자 신정동은 신설된 양천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 남아 있는 신정동의 자연부락 명칭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남아있다.

  단산(丹山)은 현 신정동 산 125-1번지 일대로 나무가 없는 벌거벗은 둥근산을 말한다. 매년 음력 10월1일이면 이곳에 있던 당집에서 당제(堂祭)를 지냈기 때문에 당집이 있는 산 곧 당산(堂山)이라 불렀다. 신정산이라고도 하는 단산이 모양이 쪽박처럼 생겼다 하여 쪽박산이라고 하였다. 일제 때 근방에 농토를 개간하고 주민을 이주시켜 이 산 근방에 거주케 했는데 약 40여호의 농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담겨 있다.
  이 산은 원래 광주(廣州)에 있던 산으로 오랜 옛날에 비가 계속 내려 큰 홍수가 나자 광주에서 이곳까지 떠내려왔다. 비가 개인 뒤 광주고을에서는 없어진 산을 찾아다니다가 김포공암산 끝머리에 와 있는 것을 알자 광주 관가에서는 「이 산은 우리 고을에서 떠내려와 이곳에 있는 것이니 해마다 우리고을에 조세(租稅)를 바치시오」하고 양천관아에 요구하였다 양천 고을원님은 광주 관아에서 요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였으나 그 산에서 생산되는 것이 없고 오직 싸리나무가 몇 주씩 드문드문 있으므로 해마다 싸리나무를 베어 비 세자루를 만들어 보내 주었다.
  이해에도 비 세자루를 만들어 광주고을에 보내준 양천고을 원님이 조용히 생각해 보니 「저 벌거숭이 산에 기껏해야 싸리나무 몇 주 나는데 그것마저 비를 만들어 바치니 이런 귀찮은 일을 하면서도 저 산이 우리 고을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광주 관가에 「이 산은 우리 고을에 아무 소용이없으니 도로 가져 가시오. 앞으로는 빗자루도 못바치겠오.」하고 통보하자 광주 고을에서는 이 산을 가져갈 수 없어 양천 고을에 빼앗기고 말았다.

  신트리는 600여년 전의 지도에도 신기(新機)라 표기될 만큼 역사가 깊은 마을인데 금옥여고 어귀 정랑고개 아래 동네를 말한다.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전설로 알려진 것이 없어서 간혹 잘못 전해지는 기록으로 「옛날 신을 삼았던 마을」이라는 뜻의 표기도 있다. 신트리를 순우리말이라 한다면 新機의 「新」은「처음」이라는 뜻이 되고 「機」는 「틀」로 해석될 수 있다. 「틀」이란 「어떠한 짜임새 있는 것」이 되므로 「터」의 뜻과도 통한다. 「특」과「터」는 어떤 터전과 윤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월제3동에 「개터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새터에 발달한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곳 주민들도 개터리의 「개」를 「開」로 보아 「트인 곳, 열린 곳」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기란 「새로운 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터리→신틀이→신트리로 전해진 것이라 봄이 타당하다.

  오금(梧琴)은 마을 형국이 오목하여 마치 사람의 다리 오금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영중학교 근방인데 조선시대에는 약 50여호가 살았다고 한다.
  응골은 일명 웅골이라고도 하며 은행정 마을 북쪽에 위치한 깊은 골짜기에 발달한 마을로 은행정에 속했다.
  천호지벌판은 현 목동시영아파트가 았는 곳으로 옛날 한 기인(奇人)이 나타나 뒷날 이곳에 천호가 들어선다고 예언한 데서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시대에는 달밭이었는데 일제 때 논으로 개척하였다. 벌판의 길이가 천리나 된다하여 천리지벌판이라 불렀다고 한다.
  충청촌(忠淸村)은 일제때 안양천의 오목교 근처에 둑을 쌓고 그 근처를 농토로 개간하고 충청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그들이 만든 부락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변천사는..

고대의 양천

 

우리고장은 고대인들에게는 어떠한 곳이었을까?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이나 유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활 환경적인 면에서 예상되는 것을 비교해 본다면 최상의 여건을 갖추었던 터전이라 하겠습니다.지금의 목동신시가지에서 영등포일대까지 드넓은 침수지대로 초원을 이루었던 곳, 그 속에서 흐르는 안양천의 지천으로는 오류천, 도림천, 대방천, 봉천천 등으로 어우러져 갈대숲과 어패류 등이 풍부하여 각종 동물 등의 서식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렵과 채집경제에 의존하던 고대인들에게는 풍부한 자원이 되었던 것이며, 특히 한강으로 이어진 안양천은 물고기들의 요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강변은 이동하는데 좋은 길이 되어 서해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고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는 곳입니다. 우리의 주변이 고대인의 삶의 터전으로 이용되었다는 증거로서 김포일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유적과 가까운 구로구 고척동과 관내의 신정동 은행정마을 뒷산에도 고인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옥여중 앞에서 돌칼을 채집하였다는 원주민이 있으며, 청동유물이 출토된 지역으로서는 영등포 공업고등학교 부근으로 청동칼과 청동끌이 발견되었고, 신정동 토성지에서는 청동동촉 1점이 채집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등으로 입증된 것은 우리고장이 고대에서 부터 삶이 터전으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강동구 암사동의 선사유적지에서 알 수 있듯이 강변 모래언덕 움집에서 삶을 이루었던 것처럼 우리의 주변 어느 곳에선가 고대인들이 살았던 곳이라 생각되며 다만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채 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삼국시대의 양천

 

삼한시대는 마한의 땅이였는데. 백제가 한강변에서 나라를 세웠을 당시 그 어느 방향보다 중요했던 지역이 우리고장이었습니다.초기백제시대에는 강화 지역까지 영토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육로를 통하여 해산물 수급과 해양통로 확보를 위해서 양천지역에 첫관문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특히 소금은 꼭 필요했던 해산물로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온조왕 14년(기원전5년)에 하남에서 백제를 건국한지 6개월만에 한강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백성 일부를 이주 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가 강성하게 된 원인도 양천지역을 첫발판으로 경인지역을 장악하였으며, 해상통로와 천혜의 요새 강화도를 확보하므로서 풍부한 자원과 튼튼한 방어로 부강 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경인만은 한강과 서해로 둘러쌓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형으로 어느시대를 살펴보아도 경인 지역을 차지한 나라는 부강하였다는 역사적인 뜻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한반도의 젖줄이라는 한강은 삼국시대에는 중요한 교통요지로서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기습공격으로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이 광개토왕 비문에 기록되어 있을만큼 한강의 군사적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한강 서부지역의 백제의 유적으로는 신정동 토성과 강서구 매봉산의 군사유적과 궁산의 석성 등이 있으며 모두 한강변에 위치했던 유적으로 삼국시대 양천의 중요성을 입증해 주는 역사의 현장이라 하겠습니다.

     

 

고려시대의 양천

 

공암현이였던 땅이름이 고려시대에 양천현으로 개칭 되었던 것은 그 무렵 양천의 중심권이 공암(강서구 가양동)에서 거리가 먼곳인 지금의 신정3동 지양산 남쪽 연의골 이었습니다. 서부 한강변에서 안정적으로 농경을 할 수 있는 면적이 제일 넓은 곳으로 옛지도에는 지양산을 대동산이라 할만큼 큰 촌락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신월1동에 있었던 돌다리도 그 무렵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삶의 중심이 형성되었던 흔적이라 하겠습니다.양천이라는 땅이름의 발생근거지는 지금의 양천구이며, 지금도 고려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연의골입니다. 경인 지역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고려시대의 가마터로서는 양천에서 9~10세기경에 청자의 시초가 되는 녹청자를 생산하였던 것입니다.양천지역의 지표조사에서도 상당수의 녹청자 파편이 발견되고 있습니다.이것은 통행이 빈번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목동신시가지 주변은 어떤 곳인가? 택리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염창사안이 막혀서 물이 빠져 나가지 않고 연이 그 가운데 자랐다. 고려때는 어가가 매양와서 연꽃을 구경하면서 묵기도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강과 안양천이 어우러지는 풍경속에 아름다운 연꽃이 군락을 이루워 장관을 이루었던 것입니다.개성에서 왕등이 자주 드나들면서 양천벌에 피어난 연꽃 무리를 잊지 못해하였던 것은 운치있는 주변의 자연경관과 은은한 연꽃의 무리에 도취되어 마음을 묻어 달래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양천

 

  -연혁의 변동과 역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강 북쪽의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와 행정을 위한 여러가지 제도를 한양을 중심으로 바꾸어야 했다. 제일차로 시행할 일은 행정구역의 조정이었는데 1394년(태조 3)6월 23일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양광도를 충청도로, 강릉교주도를 강원도로 고치고, 서해도를 풍해도로 고쳤다. 양천은 장단, 파평, 현주, 사천, 포주, 풍양, 서원, 행주, 심악, 한양, 부원, 과주 , 철원, 영평, 승령, 삭녕, 적성, 임강, 마전, 송림, 연주, 고봉, 교하, 금주, 양천, 남양, 안산, 인주, 토산, 안협과 함께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양천에는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어 고장을 다스렸다. 제3대 임금 태종때 행정구역을 다시 조정하였는데 면적이 좁고 그 세력이 약했던 양천현은 이시기에 여러차례 통폐합을 반복당하는 수난을 겪었다.1414년(태종 14)에 경기도에서는 용구와 처인을 병합하여 용인으로 하고, 금천·과천을 병합하여 금과로 하고, 교하를 원평에 붙이고, 김포.양천을 병합하여 김양으로 하고, 연천·마전을 병합하여 마련으로 하고, 장단·임강을 병합하여 장림으로 하고, 광주 임내인 주계.고안을 양지로 붙이고, 삭녕.안협을 병합하여 안삭으로 하였다. 그러나 1달여 후 과천 현감을 다시 설치하고, 금천을 양천에 합하여 금양현으로 하였으며, 양천과 통합하였던 김포는 부평에 붙여 통합하였다. 2년후인 1416년(태종 16)에는 합병한 군현을 다시 나누어 예전대로 경기도를 금천, 양천, 삭녕, 안협, 마전, 연천, 김포로 복구하였다. 1457년(세조 3년)에는 정비된 지방행정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전국에 걸쳐 지방단위의 군사조직을 재정비하였다.군사제도의 중익·좌익·우익을 혁파하고, 거진을 설치한 것이다. 경기에서는 수원진에 부평, 인천, 금천, 안산, 남양, 진위, 안성, 양성을 속하게 하고, 광주진에 양근, 지평, 천녕, 여흥, 음죽, 죽산, 이천, 양지, 용인을 속하게 하며, 양주진에는 연천, 마전, 적성, 원평, 교하, 수평, 포천, 가평을 속하게 하며, 강화진에는 김포, 양천, 통진, 교동을 속하게 하며, 개성진에는 삭녕, 임진, 풍덕을 속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양천은 강화를 거진으로 하는 체계로 묶이었다. 1460년(세조 6)에는 전국의 역을 정비하여, 경기도 내의 역들을 모아 경기좌도라고 칭하고 경기좌도찰방을 두어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양천현에 있던 남산역도 이에 속하였다. 2년후에는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었다. 연산군때에 양천현은 연산군의 별궁과 사냥터를 위하여 혁파되었다가 중종 반정으로 다시 복구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이궁을 지으려고 주민을 몰아내고 금표를 세워, 들어가는 자는 기시에 처하였다.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 양주, 포천, 영평에서, 서남으로는 파주, 고양, 양천, 금천, 관천, 통진, 김포 등에 이르는 땅에서 주민 5백여 호를 모조리 내보내고, 내수사의 노자를 옮겨서 채우고, 네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를 하니, 초부.목동의 길이 끊겼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한다. 1달후에는 망원정 이남 1백리로 금표를 세우고, 양천현을 혁파하였으며, 망원정 근처의 도로에는 사람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고, 바라다 보이지 않는 곳에 정박하여 숨도록 하되. 어기는 자는 죄를 주도록 하였다. 또 성산의 높은 봉우리에 날마다 올라가 망을 보며 신기전을 살펴 보게 하였다. 도성 사방 1백리 이내에는 금표를 세워서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고, 금표 안에 들어오는 자는 기훼제서율로 논죄했다. 사직북동에서 흥인문까지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표를 세우고, 인왕점에서 동쪽으로 타락산까지 크게 민정을 징발하여 높직이 돌성을 쌓았다. 광주. 양주. 고양. 양천. 파주 등의 읍을 혁파하고 백성들을 모두 쫒아내어 내수사의 노비가 살게 하고, 혜화. 홍인. 광희. 창의 등의 문을 폐쇄해 버렸다. 또 나루터를 금지하고 다만 육로와 교량만 통하게 하였으므로, 나그네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땔나무를 하기도 또한 어려웠다.1586년(선조 19)에는 양천현에서 아비와 계모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 양천을 현령에서 현감으로 강등시키고, 현령을 파직하였다. 양천이 언제 다시 현령으로 복구되었는지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을 면밀히 검토하면 1597년(선조30)까지는 '양천현감'으로 기록하였다가, 1598년(선조31)부터는 '양천현령'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1598년 부터는 읍호를 회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양천현은 큰 변화없이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정 때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이 지방제도의 틀를 크게 개혁한 것은 1894년부터 시작한 갑오개혁의 하나로 1895년에 실시한 지방제도개정에 의해서였다. 종래의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팔도제를 없애고 전국을 23개의 부로 나누어 전국 337개의 군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또 여러 단계의 품계로 위계를 이루고 있던 유수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 군으로 획일화하였다.양천현은 이 때 양천군으로 개칭되었으며, 23부 가운데 인천부가 관할하는 12개 군의 하나가 되었다. 5개월 후에는 군의 면적, 인구, 토지면적의 다과에 따라 군을 5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양천군은 규모가 가장 작은 5등군에 속하였다. 1년이 지난 1896년에 다시 지방제도 개정이 이루어졌다. 23부제를 1년만에 폐지하고, 1부 13도제를 실시하였다. 한성부를 특별구역으로 독립시키고, 조선시대의 팔도 가운데 면적이 넓고 군의 수가 많은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는 그대로 둔 것이다. 이때 양천군은 경기도 관할이 되었으며, 조정의 5등군에서 4등군으로 승격되었다.

  

  -양천의 행정구역과 인구

 

양천현은 조선시대에 경기도에서 가장 작은 군현 중의 하나였다. 조선 초기의 사정을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양천현의 인구가 202호 509구로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의 38개 군현 중 호수로는 32위, 인구수로는 35위의 인구규모이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이후 조선 전기, 중기의 양천현의 인구를 알려 주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조선 후기에는 인구를 비롯해 지역의 모습을 전해주는 여러 자료들이 편찬되고 또 현재까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은 양천현에서 편찬한 읍지와 고지도 들이다.현존하고 있는 양천의 읍지와 읍지의 편찬 시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읍지들은 모두 필사본 자료들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이다.o『경기지』제4책 양천현읍지, 1842년 (헌종 8), 채색지도o『경기읍지』제1책 양천현읍지, 1871년 (고종8), 채색지도o『양천현읍지』1891년 이전, 1책 14장, 채색지도o『양천현읍지』1891년, 1책 16장, 채색지도o『양천군읍지』1899년, 1책 151장, 채색지도o『양천군읍지』1899년, 1책 14장, 채색지도이밖에 전국지리지로는 17세기 후반 반계 유형원이 편찬한『동국여지지』, 19세기 후반에 김정호와 최성환이 편찬한 『여도비지』,1864년경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중에 양천의 읍지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인구 자료가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자료는 1789년(정조 13)의 자료를 기록한 『호구총수』가 있다. 『호구총수』에 기록된 양천현의 인구상태는 다음과 같다. 총 5면 35리에 802호 2,793구이며, 이중 남자 1,415구 여자 1,378구 이다. 1면당 호수는 160.4호 인구는 558.6이며, 1리당 호수는 22.9호 인구는 79.8구를 보인다. 지금의 양천구에 해당하는 면이 조선시대 양천현의 5개 면 중 남산면과 장군소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면에는 배촌리, 월촌리, 본(목?)동리, 반곡리, 능동리, 화곡리, 역리. 염창리, 양화도리가, 장국소면에는 신월리. 고음리, 당동리, 은행정리, 신기리 등 지금도 쓰이고 있는 지명들이 나타나 있다. 양천의 인구 자료가 표시된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의 기록은 1789년의 통계 자료인『호구총수』, 1828년의 통계인 『대동지지』,1899년의 『양천군읍지』의 인구 자료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전반, 19세기 후반의 인구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89년~1828년 사이에 양천현의 호수는 802호에서의 993호로 23.8%,인구수는 2,793인에서 3,352인으로26.5%증가하였다. 40년 사이에 이러한 높은 증가율은 인구 파악의 철저성, 파악 방식의 변화에 따른 문제일수도 있으나, 일정부분은 실제의 인구 증가 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다. 1828년~1899년의 70년 사이에 양천현의 호수는 993호에서 1,302호로 32.9%, 인구수는 3,532인에서 5,522이으로 56.3%증가하여 여전히 높은 인구 증가를 보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통계상으로 전국의 인구가 정체 내지 감소를 나타내고 있는 기간에 이러한 높은 증가 현상은 양천 지역에 다른 지역과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양천현의 상업 발달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구 천여호의 작은 읍이었지만 『양천군읍지』의 점막조에 5개 처가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도 인구 규모로 보아 경기도의 가장 작은 고을 양천의 성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양천현은 경기도에서 가장 인구수가 적은 고장이었다. 19세기 전반의 인구자료를 수록한 『대동지지』에서 호수가 1,000호 미만인 군현은 양천현이 유일하다. 그러나 『대동지지』에서 양천은 경기도에서 가장 작은 호수를 보이고 있지만, 인구수는 지평현과 마전현을 앞지르고 있다.

     

 

  -고지도에 비친 양천

 

『해동지도』중의 양천현지도

『해동지도』에 수록된 양천현지도는 18세기 중엽의 다른 지도에 비하여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지도이다. 특히 도로가 매우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18세기 중엽의 상업 유통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도로 파악을 중시하였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보여 준다. 여백에는 지역에 관한 다양한 설명을 기재함으로써 지도와 지지를 결합하려 한 점도 주목된다.

 

『양천현지도』(1872)

1872년(고종9)의 저국 지도 제작의 일환으로 작성된 『양천현지도』는 읍의 중심지인 읍치를 상세하게 표시한 점이 특징이다. 향교, 객사, 관아 등 관청 건물의 배치와 구조, 명칭 등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일제시대의 양천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제 침탈한 일본은 즉시 조선의 전통적인 지방제도와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행정 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1914년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편을 실시하였는데 종래의 12부 317군을 12부 220개 군으로 폐지, 통합하였다. 양천군도 이 때 폐지되어, 통진군과 함께 김포군으로 통합되었다. 즉 새로운 김포군은 이전의 김포군,통진군,양천군을 합하였다. 이와 더불어 면도 통폐합되어 과거의 김포군 6개의 면이 군내면과 검단면 2개 면으로, 통진군 14개 면이 월곶면, 대곶면, 양촌면, 하성면의 4개 면으로, 양천군5개 면이 양동면과 양서면의 2개 면으로 통합되었다. 지금의 양천군에 해당하는 남산면과 장군소면이 양동면으로 개칭되었다.이봐 동시에 동리의 통폐합도 이루어져, 가장 작은 말단의 행정구역까지도 변경되었다. 총 5개 면 37개 리로 구성되어 있던 양천군의 하위 행정 구역은 2면 15개 리로 격감하였다. 가양리, 마곡리, 등촌리, 양화리, 화곡리, 염창리, 목동리, 신당리, 신정리, 내발산리, 외발산리, 송정리, 과해리, 방화리, 개화리 등 이때 개칭된 리명이 현대까지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다. 1936년에는 서울시(당시 명칭은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는데 이때 시흥군에 속했던 영등포읍 일대와 함께 안양천 동측에 있던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 염창리, 목동리 일부가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일제시대에 양천 지역에는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양천수리조합의 설립과 한강변 제방이 축조로 인한 농경지 확대와 벼생산량의 증가가 가장 중요한 변화이다.양천 지역은 한강. 안양천과 같은 큰 강에 연한 평탄한 저지였다. 평탄하였으나 좋은 수원이 없어 논 보다 밭이 많았으며, 그나마도 수해와 범람의 피해가 많았던 곳이었다. 1924년에 목동, 신정동, 신당동, 화곡동, 고척리 등 지금의 양천구 일대를 구역으로 하는 양동 수리조합과, 가양동 , 마곡동, 등촌동, 염창동,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 방화동 일대를 구역으로 하는 양천 수리조합이 준공되었다. 그러나 1925년 미증유의 을축년 대홍수를 맞아 제1호 방조제가 무너지고,농지가 유실, 매몰되어 1926년 1월부터 3개 제방의 보강공사와 농지 보수, 수원지 변경 등의 보강을 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도 큰 장마가 짐에 따라 농경지가 모두 침수 되었다. 이에 배수기의 설치와 배수로의 개설 등 개량공사를 수행하고 이후에도 보강공사를 실시하여 1938년에 양천수리조합을 준공함으로써 양천의 저평한 지역을 벼농사를 행할 수 있는 수전으로 바꾸었으며, 양천 지역을 농업 지역으로 변모시켰다. 큰 강을 다스릴 수 있는 기술을 인간이 가지게 되면서, 양천 지역은 비옥한 지역으로 탈바꿈하였다.

 

 

해방이후의 양천

 

해방이후에도 양천구 지역은 현재의 행정구역의 모습을 가지기까지 많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이는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수도권 인구집중의 결과 수도 서울이 행정구역을 꾸준히 확장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재의 양천구지역은 처음에는 영등포구, 그 이후에는 강서구의 일부에 속했었는데,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영등포가 경성부에 편입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4월 1일의 일이었고, 해방 후 서울의 구역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확장이 있은 1950년 3월에는 시흥군 동면에 속했던 구로, 도림, 번대방리가 서울로 들어오고 다시 1963년 1월1일 대규모 구역확장때에는 김포군 양동면, 양서면 전역과 부천군 오정면과 소사읍의 각 일부, 시흥군 신동면 전역과 시흥군 동면 중 시흥, 독산 ,가리봉, 신림, 봉천의 각 동이 영등포구로 편입되었으며 1977년 9월 1일에는 안양천으로부터 서쪽지역 즉 염창, 목, 등촌, 화곡, 마곡동 등 16개 동이 분할되어 강서구로 독립하였다. 강서구가 다시1988 년에 분구되어 양천구가 신설되면서 김포군의 양동면과 양서면, 그리고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와 오쇠리를 관할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천구지역이 본격적으로 서울시의 일부로 편입되게 된 계기는, 1962년 11월 21에 공포하여 1963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서울특별시/도/군/구의 행정구역 변경에 대한 법률"에 따라 서울시역이 크게 확장되면서 부터이다. 이 때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의 5개군, 11개 면(6개면 전역,5개면은 일부), 84리가 서울시역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이러한 시역확장의 목적은 서울특별시의 계획인구를 5백만명으로 하여 수도권을 확장하고 시민생활의 편익증진과 자치행정의 발전을 도모하려는데 있었다. 새로 편입된 지역은 그 당시 대부분 농촌지역이었고, 면적이 광활하여 기존의 도시 행정 체계로는 관리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가급적 기존의 행정질서를 존중하여 종래의 기구를 그대로 활용, 구의 출장소로서 설치, 운영하게 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부천군, 김포군에서 영등포구로 편입된 지역은 1개 읍, 5개 면의 36개 리 161.69㎢ 였으니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출장수명 행정동 관할지역
양동출장소 양촌동, 염촌동
신곡동, 신정동
가양동, 마곡동, 등촌동, 염촌동, 목동, 화곡동, 신월동, 신정동
양서출장소 발산동, 공항동
방화동, 개화동
과오동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송정리), 방화동, 개화동, 과해동, 오곡동, 오쇠동

 

1963년 서울시의 면적 확장은 종래에 비하여 22%에 이르렀으나, 가구수는 5%, 인구수는 5.6%가 증가한 것이었다. 이는 새로 편입된 지역의 인구밀도가 낮으며, 농촌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68년에는 서울특별시의 13개 출장소 중 망우, 뚝섬, 오류, 양동, 관악출장소를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양동출장소는 폐지하고, 양서 출장소만 남게 되었다. 출장소 폐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인구 증가 등으로 인해 행정환경이 급속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로의 계속적인 인구 유입과 외곽지역의 확장으로 1977년에는 강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종래 영등포구에 속했던 염창동, 등촌동, 화곡동, 신월동, 마곡동, 가양동,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 방화동, 과해동, 오곡동, 오쇠동, 목동 및 신정동 일부를 분할하여 강서구가 관할하게 되었다. 1977년 9월 1일 영등포구에서 분구된 강서구도 목동신시가지의 개발, 그에 따른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비대해져, 1988년 1월 양천구를 분리하게 되었다. 양천구는 일대의 지방제도 개정으로 1914년에 잃어 버렸던 옛 이름을 74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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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구(陽川區)는 1988년 강서구에서 분리 신설된 구(區)이다. 「양천(陽川)」은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 하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공암(孔岩)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과천)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양광도(楊廣道)로 속하여 수주(樹州)에 딸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공암(孔岩)을 양천(陽川)으로 고쳤으며,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경기좌도(京畿左道)로 편입되었다.

  조선 태종(太宗) 14년(1414)에 양천을 김포(金浦)와 병합하여 김양현(金陽縣)으로 하다가 동년에 다시 떼어내 금천(衿川)(시흥군)에 붙였다. 태종(太宗) 16년(1416)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고종(高宗) 32년에 양천군(陽川郡)이 되었다.

  양천(陽川)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때에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고 했다. 「제차(齊次)」라는 말은 지금의 김포군「양천」의 고명(古名)인데 뜻은 미상이나 혹시 「잿」(城)의 음차(音借)인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파의(巴衣)」는 「공암」의 「암(岩)」에 해당하는 「바위」의 음차이다. 바위는 「파의(波衣)」「파혜(波兮)」로 음차된 예가 많다. 그래서 양천은 제차파의현-공암현-양천현이 되었으며 「잿바위」혹은 「갯바위」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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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는 모르지만 관광지 는 엄마가 허준역사박물관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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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는 ..

양천구(陽川區)

   양천구(陽川區)는 1988년 강서구에서 분리 신설된 구(區)이다. 「양천(陽川)」은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 하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공암(孔岩)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과천)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양광도(楊廣道)로 속하여 수주(樹州)에 딸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공암(孔岩)을 양천(陽川)으로 고쳤으며,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경기좌도(京畿左道)로 편입되었다.

  조선 태종(太宗) 14년(1414)에 양천을 김포(金浦)와 병합하여 김양현(金陽縣)으로 하다가 동년에 다시 떼어내 금천(衿川)(시흥군)에 붙였다. 태종(太宗) 16년(1416)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고종(高宗) 32년에 양천군(陽川郡)이 되었다.

  양천(陽川)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때에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고 했다. 「제차(齊次)」라는 말은 지금의 김포군「양천」의 고명(古名)인데 뜻은 미상이나 혹시 「잿」(城)의 음차(音借)인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파의(巴衣)」는 「공암」의 「암(岩)」에 해당하는 「바위」의 음차이다. 바위는 「파의(波衣)」「파혜(波兮)」로 음차된 예가 많다. 그래서 양천은 제차파의현-공암현-양천현이 되었으며 「잿바위」혹은 「갯바위」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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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동(木洞)
 신월동(新月洞)
 신정동(新亭洞)

 

 

 

 

 

 

 

 

 

목동(木洞)

  목동(木洞)의 동명은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목동리(木洞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목동은 조선시대까지는 양천군(陽川郡) 남산면(南山面) 월촌리(月村里), 내목동(內木洞), 외목동(外木洞)이었던 것을 1914년 군, 면, 동, 리의 폐합을 하면서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의 확장이 있을 때 김포, 시흥군 일대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영등포구에 양동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목동리는 이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8년 양동출장소를 폐지함에 따라 목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7년 강서구를 신설하면서 이에 포함되었다.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분리 신설하면서 목동은 신설된 양천구 관할이 되었다.

  목동은 날로 증가하는 도심인구의 분산과 서울 남부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조성되는 대단위 주택단지의 건설에 그 목적을 두고 개발되었다.

  신시가지 개발계획이 수립되기 전의 목동의 도시 속의 농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한적한 곳이었다. 동쪽은 안양천(安養川)이 흐르고 북쪽은 한강에 연하여 있기 때문에 장마 때마다 상습적으로 침수가 되는 곳이었다. 이 곳이 안양천의 정비작업과 한강개발사업, 경인고속국도 주변 정리 등으로 인해 신주거지역으로 개발되었다.
  70여년 전 안양천 제방공사로 많은 농경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갈대가 우거진 침수지대로 무성한 목초(牧草)가 자연 조성되었기 때문에 말을 방목하는 목장(牧場)으로 이용되었다. 목장의 안쪽에 있던 마을은 내목동(內木洞) 혹은 나말, 안말, 안마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목동 제일 바깥쪽 끝부분에 있는 동네를 외목동(外木洞) 혹은 모세미라 하였으며 마장(馬場) 안 바로 옆에 있는 산은 마장산이라 하였다. 마장 안쪽은 마을을 마장안 또는 마장이라 하는데 내목동(內木洞)을 말한다. 또 부엉이처럼 바위모양이 생겼다하여 이름이 붙여진 부엉바위가 있으며 부엉바위가 있는 산을 부엉바위산이라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본 목동의 외산은 수명산과 우장산(雨裝山)이 있고 또 높이 98.8m의 매봉산, 양화산 등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 마치 한양이 내사산(內四山), 외사산(外四山)으로 형성된 것과 같은 형상으로 되어 있다. 또 객수(客水)인 안양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는 등 지형, 지세에서 왕이 나올 수 있는 곳이라 하던 왕재산(王在山)이 있었으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모두 주택단지로 변하였다.

  1923년 한강수리조합에 의한 농수로의 개발과 1925년 대홍수로 한강변과 안양천변 일대가 모두 침수되자 한강변에 흙으로 제방을 쌓게 되어 전일의 목초지였던 곳은 농경지로 조성되었다. 이에 각지에서 사람들이 농토가 있는 이 곳으로 모여들어 새로 이룩한 마을을 신촌(新村) 또는 새말이라 하였다.
  신촌에는 엄지미라는 마을이 있는데 양화초등학교와 진흥연립이 있는 곳을 말하며, 엄지미란 부락이름은 엄지산(嚴知山)에서 유래되었다. 용왕산이라고도 하는 엄지산은 높이 78m와 68m의 봉우리 두 개가 붙어서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목동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두 봉우리가 마치 펴놓은 엄지손가락을 옆에서 보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78m 높이 부분은 손바닥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조금 불룩하게 나온 곳이고 68m 높이 지점은 손톱부분으로 보인다.
  월촌(月村)은 달거리 혹은 달거리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용왕산 남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1단지와 2단지 동쪽부분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용왕산(龍王山)에서 떠오르는 달을 제일 먼저 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라고 한다.
  한강으로 유입되는 부분의 안양천은 원래 이름이 오목내였다. 이 부분에는 많은 세천(細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오목교 근방에 이르면 이들 세천에서 나온 물길들이 한데 모이면서 하천바닥을 움푹하게 골을 만들었고 이처럼 골이 형성되어 움푹 들어간 곳을 「오목하게 만들어진 내」라는 뜻으로 오목내라 하였다. 이 오목내에 걸쳐진 다리가 오목교인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이곳의 물살이 세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게 되자 동네사람들이 다리를 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매번 다리를 놓을 때마다 떠내려 가므로 동네 사람들은 달리 방도를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한 늙은 스님이 지나가다가 떠내려가는 다리를 붙잡아 매는 모습을 보고 '쯧쯧, 오동나무로 다리를 놓으면 쉬울 것을···'라고 하며 지나갔다. 이 말을 들은 인부 한사람이 급히 달려가 무슨 말인가 하고 되묻자 '웃여울에서 오동나무를 떠내려보내 멈추는 곳이 다리 놓을 곳인데 괜한 장소에서 애쓰며 다리를 놓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며 오히려 힐책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속는 셈치고 노승의 말대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근방에는 오동나무가 하나도 없으므로 멀리 남쪽에 있는 칼산에서 오동나무를 베어 바로 안양천 물에 띄우자 과연 지금의 오목교 근방에서 멈추므로 이 곳에다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때부터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동나무다리라 불렀다.

  목동 신시가지 개발계획의 마지막 꽃은 목동종합운동장의 완성이다. 이 운동장은 서울시민들의 체육진흥을 위해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에 건설되었다.
  서울시가 목동 신시가지 개발사업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1987년 6월부터 206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목동 아파트단지와 안양천 사이 4만 8,269평의 대지에 착공한 이 종합운동장은 주경기장, 야구장, 실내빙상경기장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목동에는 목동 신시가지개발과 함께 중요한 전력공급처가 될 열병합 발전소를 1985년 1월에 착공하여 1988년 11월 28일에 완공함에 따라 국내 최초인 열병합발전소의 건설과 함께 국내의 난방 및 폐열관리 등에 획기적인 전기를 열었다.
  목동 906번지에는 1987년 3월 6일 착공 동년 7월 1일 준공 개원한 파리공원이 있다. 1886년 한국과 프랑스가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이래 지난 백년동안 두 나라가 동서문화의 교류는 물론 경제발전의 동반자로 국제평화유지의 혈맹으로 다진 우호를 상기하고, 파리시 코로니 아파트 단지 내에 「서울광장」을 마련한 답례로 신시가지 부지 2만 9,720㎡의 제2근린공원을 파리공원으로 조성케 되었던 것이다.

 

 신월동(新月洞)

 

  신월동(新月洞)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이 고을 원님이 양천향교(陽川鄕校)를 지나 현 화곡아파트 부근 돌다리 앞에 이르러 전망으로 보니 마을이 신선하고 반달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새「新」자와 달「月」자를 따서 신월리(新月里)라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신월동은 갑오개혁시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에서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된 장군소면(將軍所面)의 신월리(新月里), 개대리(開垈里), 당곡리(堂谷里), 고음월리(古音月里) 등 마을이 띄어띄엄 자리잡아 이룩된 약 100호 정도의 마을이었다.
  1914년 경기도의 구역을 획정할 때 신월리, 당곡리, 고음월리를 합쳐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신당리(新堂里)로 하였는데 이들 마을 중 비교적 규모가 크고 중심지역인 신월리와 당곡리의 이름을 각각 따서 동명을  붙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동출장소 신월동이 되었다. 1977년 강서구를 신설하면서 강서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양천구가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고,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신설하여 양천구에는 목동 신시가지에 해당되는 목동, 신정동과 함께 신월동이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 전에도 신월동은 교통의 요지와 김포평야가 끝나는 구릉지대로 침수지역이 없는 준평원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제법 큰 부락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신월동에는 자연부락명이 아직도 꽤 많이 남아있다.

  신원초등학교가 있는 뒷산에서 동쪽으로 발달한 동네를 곰달래라고 하는데 달빛이 맑게 비친다는 뜻의 고운달동네가 곰달래로 되었다. 한자로는 고음월(古音月)이라 쓴다. 신월2동 지역으로 경인고속도로변에 발달한 마을을 개대리(開垈里)라 한다. 개터리 혹은 새터골이라고도 하는데 곰달래 쪽의 사람들이 이주, 부락을 새로 형성하였다.
  신월3동 화곡로가 지나는 동네를 당곡(堂谷) 혹은 당꿀이라 한다. 마을의 어귀에 해당되는 곳으로 도당(都堂)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상곡(裳谷)이라고도 하는데 당집에 펄럭이는 깃발이 마치 치마를 펴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곰달래의 아랫동네는 아랫말, 윗동네는 웃말이라 하며 신월2동 쪽을 한강말이라 하였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홍수때 한강과 안양천을 넘쳐흘러 이곳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한강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 이 지방의 소산물 중 수산물로는 생자해(生雌蟹;게), 위어(葦魚;웅어), 백어(白魚;뱅어), 은어(銀魚), 면어(綿魚;민어?)등이 유명하였으며, 이 중 게와 웅어는 나라의 진상품으로 바쳤고, 사어는 국휼시(國恤時)혈에 진공하였다.
  이 직역은 한강에 연한 평탄한 야지(野地)로 지질은 비교적 비옥한 편이나 수원(水源)이 적어 수도작(水稻作)은 생수지(生水地)에나 경작이 가능하였지만 가뭄의 피해가 많아 야지는 전작(田作)을 대부분 하여였다.

  이 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전래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양천원님이 부임할 때 울고, 나갈 때 운다.』

  양천현(陽川縣)은 장(長) 30리이며 광(廣) 15里가 되는 아주 작은 고을인 데다가 한강이 가까운 야지이기 때문에 수해가 가끔 있어서 해마다 흉년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 고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라야 잡곡 뿐이라서 누가 보든지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현감이 이런 고을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보니 낙심이 되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부임하여 지내고 보니 봉급 외에도 꽤 생기는게 있었다. 즉, 매년 백미의 관수미(官需米 ; 현감의 식량으로 매년 정해놓은 쌀)가 108석이고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 ; 손님 접대용으로 정해놓으 쌀)가 30석이며 그 밖에 은결(隱結)에서 남이 모르게 생기는 것과 또 살림에 해당하는 모든 물건이 들어오니 작은 고을로는 그만하면 상당한 수입이 되었다. 이런 고을을 버리고 다른 임지로 떠나게 되니 아까운 생각에서 또한 울 정도였다 하여 나온 말이다.

  『양천 사람은 바람마시고 죽(粥)을 마신다.』

  이 말은 기후에 따라 부는 바람이 아침에는 동풍이 불고 저녁때는 서풍이 부는 경우가 많아 일기가 고르지 않는 때가 많다. 그런 날 서울로 나무를 팔러 가는 나무장사나 행인이 항상 일찍 출발하므로 집에서 떠날 때에는 동풍이 불어 바람을 안고 가니 바람을 마시게 되고 저녁 때 집으로 올 때는 서풍이 불어 또 안고 내려오게 된다. 해마다 계속되는 흉작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을 하게 되어 죽을 먹는다는 데서 나온 속담이나 실제로 옛날의 실정이 그러하였다고 한다.

 

신정동(新亭洞)

  신정동(新亭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의 자연마을이었던 新機(신트리)의 「新」자와 은행정(銀杏亭)의 「亭」자를 따서 신정리(新亭里)라 한데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에 속하였던 것을 갑오개혁시 양천현이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됨에 따라 여러 부락들을 합하여 양천군 장군소면(將軍所面)의 은행리(銀杏里)와 신기리(新機里)로 하였다. 1914년 구역획정때 은행정리와 신기리는 양천(陽川)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양동면(陽東面)으로 하고 두 마을을 합쳐 신정리(新亭里)로 하였다. 1963년 영등포구 양동출장소로 소속되고 신정동(新亭洞)으로 동명을 변경하였다. 1968년 양동출장소의 폐지로 영등포구 신정동이 되었다가 1977년 영등포구에서 강서구를 분리하여 설치하자 신정동은 신설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양천구를 신설케 되자 신정동은 신설된 양천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 남아 있는 신정동의 자연부락 명칭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남아있다.

  단산(丹山)은 현 신정동 산 125-1번지 일대로 나무가 없는 벌거벗은 둥근산을 말한다. 매년 음력 10월1일이면 이곳에 있던 당집에서 당제(堂祭)를 지냈기 때문에 당집이 있는 산 곧 당산(堂山)이라 불렀다. 신정산이라고도 하는 단산이 모양이 쪽박처럼 생겼다 하여 쪽박산이라고 하였다. 일제 때 근방에 농토를 개간하고 주민을 이주시켜 이 산 근방에 거주케 했는데 약 40여호의 농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담겨 있다.
  이 산은 원래 광주(廣州)에 있던 산으로 오랜 옛날에 비가 계속 내려 큰 홍수가 나자 광주에서 이곳까지 떠내려왔다. 비가 개인 뒤 광주고을에서는 없어진 산을 찾아다니다가 김포공암산 끝머리에 와 있는 것을 알자 광주 관가에서는 「이 산은 우리 고을에서 떠내려와 이곳에 있는 것이니 해마다 우리고을에 조세(租稅)를 바치시오」하고 양천관아에 요구하였다 양천 고을원님은 광주 관아에서 요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였으나 그 산에서 생산되는 것이 없고 오직 싸리나무가 몇 주씩 드문드문 있으므로 해마다 싸리나무를 베어 비 세자루를 만들어 보내 주었다.
  이해에도 비 세자루를 만들어 광주고을에 보내준 양천고을 원님이 조용히 생각해 보니 「저 벌거숭이 산에 기껏해야 싸리나무 몇 주 나는데 그것마저 비를 만들어 바치니 이런 귀찮은 일을 하면서도 저 산이 우리 고을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광주 관가에 「이 산은 우리 고을에 아무 소용이없으니 도로 가져 가시오. 앞으로는 빗자루도 못바치겠오.」하고 통보하자 광주 고을에서는 이 산을 가져갈 수 없어 양천 고을에 빼앗기고 말았다.

  신트리는 600여년 전의 지도에도 신기(新機)라 표기될 만큼 역사가 깊은 마을인데 금옥여고 어귀 정랑고개 아래 동네를 말한다.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전설로 알려진 것이 없어서 간혹 잘못 전해지는 기록으로 「옛날 신을 삼았던 마을」이라는 뜻의 표기도 있다. 신트리를 순우리말이라 한다면 新機의 「新」은「처음」이라는 뜻이 되고 「機」는 「틀」로 해석될 수 있다. 「틀」이란 「어떠한 짜임새 있는 것」이 되므로 「터」의 뜻과도 통한다. 「특」과「터」는 어떤 터전과 윤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월제3동에 「개터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새터에 발달한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곳 주민들도 개터리의 「개」를 「開」로 보아 「트인 곳, 열린 곳」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기란 「새로운 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터리→신틀이→신트리로 전해진 것이라 봄이 타당하다.

  오금(梧琴)은 마을 형국이 오목하여 마치 사람의 다리 오금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영중학교 근방인데 조선시대에는 약 50여호가 살았다고 한다.
  응골은 일명 웅골이라고도 하며 은행정 마을 북쪽에 위치한 깊은 골짜기에 발달한 마을로 은행정에 속했다.
  천호지벌판은 현 목동시영아파트가 았는 곳으로 옛날 한 기인(奇人)이 나타나 뒷날 이곳에 천호가 들어선다고 예언한 데서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시대에는 달밭이었는데 일제 때 논으로 개척하였다. 벌판의 길이가 천리나 된다하여 천리지벌판이라 불렀다고 한다.
  충청촌(忠淸村)은 일제때 안양천의 오목교 근처에 둑을 쌓고 그 근처를 농토로 개간하고 충청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그들이 만든 부락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변천사는..

고대의 양천

 

우리고장은 고대인들에게는 어떠한 곳이었을까?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이나 유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활 환경적인 면에서 예상되는 것을 비교해 본다면 최상의 여건을 갖추었던 터전이라 하겠습니다.지금의 목동신시가지에서 영등포일대까지 드넓은 침수지대로 초원을 이루었던 곳, 그 속에서 흐르는 안양천의 지천으로는 오류천, 도림천, 대방천, 봉천천 등으로 어우러져 갈대숲과 어패류 등이 풍부하여 각종 동물 등의 서식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렵과 채집경제에 의존하던 고대인들에게는 풍부한 자원이 되었던 것이며, 특히 한강으로 이어진 안양천은 물고기들의 요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강변은 이동하는데 좋은 길이 되어 서해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고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는 곳입니다. 우리의 주변이 고대인의 삶의 터전으로 이용되었다는 증거로서 김포일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유적과 가까운 구로구 고척동과 관내의 신정동 은행정마을 뒷산에도 고인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옥여중 앞에서 돌칼을 채집하였다는 원주민이 있으며, 청동유물이 출토된 지역으로서는 영등포 공업고등학교 부근으로 청동칼과 청동끌이 발견되었고, 신정동 토성지에서는 청동동촉 1점이 채집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등으로 입증된 것은 우리고장이 고대에서 부터 삶이 터전으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강동구 암사동의 선사유적지에서 알 수 있듯이 강변 모래언덕 움집에서 삶을 이루었던 것처럼 우리의 주변 어느 곳에선가 고대인들이 살았던 곳이라 생각되며 다만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채 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삼국시대의 양천

 

삼한시대는 마한의 땅이였는데. 백제가 한강변에서 나라를 세웠을 당시 그 어느 방향보다 중요했던 지역이 우리고장이었습니다.초기백제시대에는 강화 지역까지 영토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육로를 통하여 해산물 수급과 해양통로 확보를 위해서 양천지역에 첫관문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특히 소금은 꼭 필요했던 해산물로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온조왕 14년(기원전5년)에 하남에서 백제를 건국한지 6개월만에 한강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백성 일부를 이주 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가 강성하게 된 원인도 양천지역을 첫발판으로 경인지역을 장악하였으며, 해상통로와 천혜의 요새 강화도를 확보하므로서 풍부한 자원과 튼튼한 방어로 부강 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경인만은 한강과 서해로 둘러쌓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형으로 어느시대를 살펴보아도 경인 지역을 차지한 나라는 부강하였다는 역사적인 뜻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한반도의 젖줄이라는 한강은 삼국시대에는 중요한 교통요지로서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기습공격으로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이 광개토왕 비문에 기록되어 있을만큼 한강의 군사적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한강 서부지역의 백제의 유적으로는 신정동 토성과 강서구 매봉산의 군사유적과 궁산의 석성 등이 있으며 모두 한강변에 위치했던 유적으로 삼국시대 양천의 중요성을 입증해 주는 역사의 현장이라 하겠습니다.

     

 

고려시대의 양천

 

공암현이였던 땅이름이 고려시대에 양천현으로 개칭 되었던 것은 그 무렵 양천의 중심권이 공암(강서구 가양동)에서 거리가 먼곳인 지금의 신정3동 지양산 남쪽 연의골 이었습니다. 서부 한강변에서 안정적으로 농경을 할 수 있는 면적이 제일 넓은 곳으로 옛지도에는 지양산을 대동산이라 할만큼 큰 촌락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신월1동에 있었던 돌다리도 그 무렵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삶의 중심이 형성되었던 흔적이라 하겠습니다.양천이라는 땅이름의 발생근거지는 지금의 양천구이며, 지금도 고려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연의골입니다. 경인 지역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고려시대의 가마터로서는 양천에서 9~10세기경에 청자의 시초가 되는 녹청자를 생산하였던 것입니다.양천지역의 지표조사에서도 상당수의 녹청자 파편이 발견되고 있습니다.이것은 통행이 빈번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목동신시가지 주변은 어떤 곳인가? 택리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염창사안이 막혀서 물이 빠져 나가지 않고 연이 그 가운데 자랐다. 고려때는 어가가 매양와서 연꽃을 구경하면서 묵기도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강과 안양천이 어우러지는 풍경속에 아름다운 연꽃이 군락을 이루워 장관을 이루었던 것입니다.개성에서 왕등이 자주 드나들면서 양천벌에 피어난 연꽃 무리를 잊지 못해하였던 것은 운치있는 주변의 자연경관과 은은한 연꽃의 무리에 도취되어 마음을 묻어 달래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양천

 

  -연혁의 변동과 역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강 북쪽의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와 행정을 위한 여러가지 제도를 한양을 중심으로 바꾸어야 했다. 제일차로 시행할 일은 행정구역의 조정이었는데 1394년(태조 3)6월 23일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양광도를 충청도로, 강릉교주도를 강원도로 고치고, 서해도를 풍해도로 고쳤다. 양천은 장단, 파평, 현주, 사천, 포주, 풍양, 서원, 행주, 심악, 한양, 부원, 과주 , 철원, 영평, 승령, 삭녕, 적성, 임강, 마전, 송림, 연주, 고봉, 교하, 금주, 양천, 남양, 안산, 인주, 토산, 안협과 함께 경기좌도에 소속되었다. 양천에는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어 고장을 다스렸다. 제3대 임금 태종때 행정구역을 다시 조정하였는데 면적이 좁고 그 세력이 약했던 양천현은 이시기에 여러차례 통폐합을 반복당하는 수난을 겪었다.1414년(태종 14)에 경기도에서는 용구와 처인을 병합하여 용인으로 하고, 금천·과천을 병합하여 금과로 하고, 교하를 원평에 붙이고, 김포.양천을 병합하여 김양으로 하고, 연천·마전을 병합하여 마련으로 하고, 장단·임강을 병합하여 장림으로 하고, 광주 임내인 주계.고안을 양지로 붙이고, 삭녕.안협을 병합하여 안삭으로 하였다. 그러나 1달여 후 과천 현감을 다시 설치하고, 금천을 양천에 합하여 금양현으로 하였으며, 양천과 통합하였던 김포는 부평에 붙여 통합하였다. 2년후인 1416년(태종 16)에는 합병한 군현을 다시 나누어 예전대로 경기도를 금천, 양천, 삭녕, 안협, 마전, 연천, 김포로 복구하였다. 1457년(세조 3년)에는 정비된 지방행정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전국에 걸쳐 지방단위의 군사조직을 재정비하였다.군사제도의 중익·좌익·우익을 혁파하고, 거진을 설치한 것이다. 경기에서는 수원진에 부평, 인천, 금천, 안산, 남양, 진위, 안성, 양성을 속하게 하고, 광주진에 양근, 지평, 천녕, 여흥, 음죽, 죽산, 이천, 양지, 용인을 속하게 하며, 양주진에는 연천, 마전, 적성, 원평, 교하, 수평, 포천, 가평을 속하게 하며, 강화진에는 김포, 양천, 통진, 교동을 속하게 하며, 개성진에는 삭녕, 임진, 풍덕을 속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양천은 강화를 거진으로 하는 체계로 묶이었다. 1460년(세조 6)에는 전국의 역을 정비하여, 경기도 내의 역들을 모아 경기좌도라고 칭하고 경기좌도찰방을 두어 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양천현에 있던 남산역도 이에 속하였다. 2년후에는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었다. 연산군때에 양천현은 연산군의 별궁과 사냥터를 위하여 혁파되었다가 중종 반정으로 다시 복구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이궁을 지으려고 주민을 몰아내고 금표를 세워, 들어가는 자는 기시에 처하였다.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 양주, 포천, 영평에서, 서남으로는 파주, 고양, 양천, 금천, 관천, 통진, 김포 등에 이르는 땅에서 주민 5백여 호를 모조리 내보내고, 내수사의 노자를 옮겨서 채우고, 네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를 하니, 초부.목동의 길이 끊겼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한다. 1달후에는 망원정 이남 1백리로 금표를 세우고, 양천현을 혁파하였으며, 망원정 근처의 도로에는 사람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고, 바라다 보이지 않는 곳에 정박하여 숨도록 하되. 어기는 자는 죄를 주도록 하였다. 또 성산의 높은 봉우리에 날마다 올라가 망을 보며 신기전을 살펴 보게 하였다. 도성 사방 1백리 이내에는 금표를 세워서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고, 금표 안에 들어오는 자는 기훼제서율로 논죄했다. 사직북동에서 흥인문까지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표를 세우고, 인왕점에서 동쪽으로 타락산까지 크게 민정을 징발하여 높직이 돌성을 쌓았다. 광주. 양주. 고양. 양천. 파주 등의 읍을 혁파하고 백성들을 모두 쫒아내어 내수사의 노비가 살게 하고, 혜화. 홍인. 광희. 창의 등의 문을 폐쇄해 버렸다. 또 나루터를 금지하고 다만 육로와 교량만 통하게 하였으므로, 나그네들이 몹시 괴로워하고 땔나무를 하기도 또한 어려웠다.1586년(선조 19)에는 양천현에서 아비와 계모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 양천을 현령에서 현감으로 강등시키고, 현령을 파직하였다. 양천이 언제 다시 현령으로 복구되었는지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을 면밀히 검토하면 1597년(선조30)까지는 '양천현감'으로 기록하였다가, 1598년(선조31)부터는 '양천현령'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1598년 부터는 읍호를 회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양천현은 큰 변화없이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정 때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이 지방제도의 틀를 크게 개혁한 것은 1894년부터 시작한 갑오개혁의 하나로 1895년에 실시한 지방제도개정에 의해서였다. 종래의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팔도제를 없애고 전국을 23개의 부로 나누어 전국 337개의 군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또 여러 단계의 품계로 위계를 이루고 있던 유수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 군으로 획일화하였다.양천현은 이 때 양천군으로 개칭되었으며, 23부 가운데 인천부가 관할하는 12개 군의 하나가 되었다. 5개월 후에는 군의 면적, 인구, 토지면적의 다과에 따라 군을 5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양천군은 규모가 가장 작은 5등군에 속하였다. 1년이 지난 1896년에 다시 지방제도 개정이 이루어졌다. 23부제를 1년만에 폐지하고, 1부 13도제를 실시하였다. 한성부를 특별구역으로 독립시키고, 조선시대의 팔도 가운데 면적이 넓고 군의 수가 많은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는 그대로 둔 것이다. 이때 양천군은 경기도 관할이 되었으며, 조정의 5등군에서 4등군으로 승격되었다.

  

  -양천의 행정구역과 인구

 

양천현은 조선시대에 경기도에서 가장 작은 군현 중의 하나였다. 조선 초기의 사정을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양천현의 인구가 202호 509구로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의 38개 군현 중 호수로는 32위, 인구수로는 35위의 인구규모이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이후 조선 전기, 중기의 양천현의 인구를 알려 주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조선 후기에는 인구를 비롯해 지역의 모습을 전해주는 여러 자료들이 편찬되고 또 현재까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은 양천현에서 편찬한 읍지와 고지도 들이다.현존하고 있는 양천의 읍지와 읍지의 편찬 시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읍지들은 모두 필사본 자료들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이다.o『경기지』제4책 양천현읍지, 1842년 (헌종 8), 채색지도o『경기읍지』제1책 양천현읍지, 1871년 (고종8), 채색지도o『양천현읍지』1891년 이전, 1책 14장, 채색지도o『양천현읍지』1891년, 1책 16장, 채색지도o『양천군읍지』1899년, 1책 151장, 채색지도o『양천군읍지』1899년, 1책 14장, 채색지도이밖에 전국지리지로는 17세기 후반 반계 유형원이 편찬한『동국여지지』, 19세기 후반에 김정호와 최성환이 편찬한 『여도비지』,1864년경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중에 양천의 읍지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인구 자료가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자료는 1789년(정조 13)의 자료를 기록한 『호구총수』가 있다. 『호구총수』에 기록된 양천현의 인구상태는 다음과 같다. 총 5면 35리에 802호 2,793구이며, 이중 남자 1,415구 여자 1,378구 이다. 1면당 호수는 160.4호 인구는 558.6이며, 1리당 호수는 22.9호 인구는 79.8구를 보인다. 지금의 양천구에 해당하는 면이 조선시대 양천현의 5개 면 중 남산면과 장군소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면에는 배촌리, 월촌리, 본(목?)동리, 반곡리, 능동리, 화곡리, 역리. 염창리, 양화도리가, 장국소면에는 신월리. 고음리, 당동리, 은행정리, 신기리 등 지금도 쓰이고 있는 지명들이 나타나 있다. 양천의 인구 자료가 표시된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의 기록은 1789년의 통계 자료인『호구총수』, 1828년의 통계인 『대동지지』,1899년의 『양천군읍지』의 인구 자료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전반, 19세기 후반의 인구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89년~1828년 사이에 양천현의 호수는 802호에서의 993호로 23.8%,인구수는 2,793인에서 3,352인으로26.5%증가하였다. 40년 사이에 이러한 높은 증가율은 인구 파악의 철저성, 파악 방식의 변화에 따른 문제일수도 있으나, 일정부분은 실제의 인구 증가 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다. 1828년~1899년의 70년 사이에 양천현의 호수는 993호에서 1,302호로 32.9%, 인구수는 3,532인에서 5,522이으로 56.3%증가하여 여전히 높은 인구 증가를 보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통계상으로 전국의 인구가 정체 내지 감소를 나타내고 있는 기간에 이러한 높은 증가 현상은 양천 지역에 다른 지역과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양천현의 상업 발달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구 천여호의 작은 읍이었지만 『양천군읍지』의 점막조에 5개 처가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도 인구 규모로 보아 경기도의 가장 작은 고을 양천의 성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양천현은 경기도에서 가장 인구수가 적은 고장이었다. 19세기 전반의 인구자료를 수록한 『대동지지』에서 호수가 1,000호 미만인 군현은 양천현이 유일하다. 그러나 『대동지지』에서 양천은 경기도에서 가장 작은 호수를 보이고 있지만, 인구수는 지평현과 마전현을 앞지르고 있다.

     

 

  -고지도에 비친 양천

 

『해동지도』중의 양천현지도

『해동지도』에 수록된 양천현지도는 18세기 중엽의 다른 지도에 비하여 상세하고 내용이 풍부한 지도이다. 특히 도로가 매우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18세기 중엽의 상업 유통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도로 파악을 중시하였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보여 준다. 여백에는 지역에 관한 다양한 설명을 기재함으로써 지도와 지지를 결합하려 한 점도 주목된다.

 

『양천현지도』(1872)

1872년(고종9)의 저국 지도 제작의 일환으로 작성된 『양천현지도』는 읍의 중심지인 읍치를 상세하게 표시한 점이 특징이다. 향교, 객사, 관아 등 관청 건물의 배치와 구조, 명칭 등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일제시대의 양천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제 침탈한 일본은 즉시 조선의 전통적인 지방제도와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행정 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1914년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편을 실시하였는데 종래의 12부 317군을 12부 220개 군으로 폐지, 통합하였다. 양천군도 이 때 폐지되어, 통진군과 함께 김포군으로 통합되었다. 즉 새로운 김포군은 이전의 김포군,통진군,양천군을 합하였다. 이와 더불어 면도 통폐합되어 과거의 김포군 6개의 면이 군내면과 검단면 2개 면으로, 통진군 14개 면이 월곶면, 대곶면, 양촌면, 하성면의 4개 면으로, 양천군5개 면이 양동면과 양서면의 2개 면으로 통합되었다. 지금의 양천군에 해당하는 남산면과 장군소면이 양동면으로 개칭되었다.이봐 동시에 동리의 통폐합도 이루어져, 가장 작은 말단의 행정구역까지도 변경되었다. 총 5개 면 37개 리로 구성되어 있던 양천군의 하위 행정 구역은 2면 15개 리로 격감하였다. 가양리, 마곡리, 등촌리, 양화리, 화곡리, 염창리, 목동리, 신당리, 신정리, 내발산리, 외발산리, 송정리, 과해리, 방화리, 개화리 등 이때 개칭된 리명이 현대까지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다. 1936년에는 서울시(당시 명칭은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는데 이때 시흥군에 속했던 영등포읍 일대와 함께 안양천 동측에 있던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 염창리, 목동리 일부가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일제시대에 양천 지역에는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양천수리조합의 설립과 한강변 제방이 축조로 인한 농경지 확대와 벼생산량의 증가가 가장 중요한 변화이다.양천 지역은 한강. 안양천과 같은 큰 강에 연한 평탄한 저지였다. 평탄하였으나 좋은 수원이 없어 논 보다 밭이 많았으며, 그나마도 수해와 범람의 피해가 많았던 곳이었다. 1924년에 목동, 신정동, 신당동, 화곡동, 고척리 등 지금의 양천구 일대를 구역으로 하는 양동 수리조합과, 가양동 , 마곡동, 등촌동, 염창동,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 방화동 일대를 구역으로 하는 양천 수리조합이 준공되었다. 그러나 1925년 미증유의 을축년 대홍수를 맞아 제1호 방조제가 무너지고,농지가 유실, 매몰되어 1926년 1월부터 3개 제방의 보강공사와 농지 보수, 수원지 변경 등의 보강을 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도 큰 장마가 짐에 따라 농경지가 모두 침수 되었다. 이에 배수기의 설치와 배수로의 개설 등 개량공사를 수행하고 이후에도 보강공사를 실시하여 1938년에 양천수리조합을 준공함으로써 양천의 저평한 지역을 벼농사를 행할 수 있는 수전으로 바꾸었으며, 양천 지역을 농업 지역으로 변모시켰다. 큰 강을 다스릴 수 있는 기술을 인간이 가지게 되면서, 양천 지역은 비옥한 지역으로 탈바꿈하였다.

 

 

해방이후의 양천

 

해방이후에도 양천구 지역은 현재의 행정구역의 모습을 가지기까지 많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이는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수도권 인구집중의 결과 수도 서울이 행정구역을 꾸준히 확장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재의 양천구지역은 처음에는 영등포구, 그 이후에는 강서구의 일부에 속했었는데,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영등포가 경성부에 편입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4월 1일의 일이었고, 해방 후 서울의 구역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확장이 있은 1950년 3월에는 시흥군 동면에 속했던 구로, 도림, 번대방리가 서울로 들어오고 다시 1963년 1월1일 대규모 구역확장때에는 김포군 양동면, 양서면 전역과 부천군 오정면과 소사읍의 각 일부, 시흥군 신동면 전역과 시흥군 동면 중 시흥, 독산 ,가리봉, 신림, 봉천의 각 동이 영등포구로 편입되었으며 1977년 9월 1일에는 안양천으로부터 서쪽지역 즉 염창, 목, 등촌, 화곡, 마곡동 등 16개 동이 분할되어 강서구로 독립하였다. 강서구가 다시1988 년에 분구되어 양천구가 신설되면서 김포군의 양동면과 양서면, 그리고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와 오쇠리를 관할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천구지역이 본격적으로 서울시의 일부로 편입되게 된 계기는, 1962년 11월 21에 공포하여 1963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서울특별시/도/군/구의 행정구역 변경에 대한 법률"에 따라 서울시역이 크게 확장되면서 부터이다. 이 때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의 5개군, 11개 면(6개면 전역,5개면은 일부), 84리가 서울시역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이러한 시역확장의 목적은 서울특별시의 계획인구를 5백만명으로 하여 수도권을 확장하고 시민생활의 편익증진과 자치행정의 발전을 도모하려는데 있었다. 새로 편입된 지역은 그 당시 대부분 농촌지역이었고, 면적이 광활하여 기존의 도시 행정 체계로는 관리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가급적 기존의 행정질서를 존중하여 종래의 기구를 그대로 활용, 구의 출장소로서 설치, 운영하게 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부천군, 김포군에서 영등포구로 편입된 지역은 1개 읍, 5개 면의 36개 리 161.69㎢ 였으니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출장수명 행정동 관할지역
양동출장소 양촌동, 염촌동
신곡동, 신정동
가양동, 마곡동, 등촌동, 염촌동, 목동, 화곡동, 신월동, 신정동
양서출장소 발산동, 공항동
방화동, 개화동
과오동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송정리), 방화동, 개화동, 과해동, 오곡동, 오쇠동

 

1963년 서울시의 면적 확장은 종래에 비하여 22%에 이르렀으나, 가구수는 5%, 인구수는 5.6%가 증가한 것이었다. 이는 새로 편입된 지역의 인구밀도가 낮으며, 농촌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68년에는 서울특별시의 13개 출장소 중 망우, 뚝섬, 오류, 양동, 관악출장소를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양동출장소는 폐지하고, 양서 출장소만 남게 되었다. 출장소 폐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인구 증가 등으로 인해 행정환경이 급속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시로의 계속적인 인구 유입과 외곽지역의 확장으로 1977년에는 강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종래 영등포구에 속했던 염창동, 등촌동, 화곡동, 신월동, 마곡동, 가양동,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 방화동, 과해동, 오곡동, 오쇠동, 목동 및 신정동 일부를 분할하여 강서구가 관할하게 되었다. 1977년 9월 1일 영등포구에서 분구된 강서구도 목동신시가지의 개발, 그에 따른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비대해져, 1988년 1월 양천구를 분리하게 되었다. 양천구는 일대의 지방제도 개정으로 1914년에 잃어 버렸던 옛 이름을 74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pxg골프채시타가능한곳(서울양천구)

... 집은 서울 양천구이구요 가까운 거리면 좋겠습니다.... 서울 양천구에서 PXG 골프채를 시타해볼 수 있는 곳을... 양천구에서 서대문구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