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도다. 주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뉴턴은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 사람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마법사,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 약 1만 년 전에 인류의 지적 유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가시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위대한 정신.
1. 소개2. 생애3. 과학적 업적
4. 초상화5. 일화와 덕후기질
6. 흑역사7. 역설8. 대중문화에서의 뉴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이며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수학자 중 한 사람인 동시에 훌륭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영국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근대 이론과학의 선구자, 고금 3대 수학자 중 한 사람, 2대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카스 석좌 교수[9], 그리고 마지막 르네상스인이자 최후의 연금술사. 동시에 신학자이며 종교학자다.
뭔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뉴턴의 생애는 과학과 신학과 연금술이 평생 동안 함께 얽혀 있었다. 오히려 분량으로만 따지면 신학 관련 저술이 더 많다. 진지하게 본업이 뭔지 따지면 오히려 종교와 신학 쪽이 더 맞는 것. 이것은 케인즈가 거시경제학 이론을 만들다 여름에 심심해서 뉴턴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알려지고 유명해진 내용이다.사실 수학과학에서의 뉴턴의 업적은 뉴턴이 심심해서 했던 연구다
저서로 《자연철학의 수학적 이해(프린키피아)》가 있다.
수학에서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 뉴턴역학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뉴턴역학(고전역학)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등장 전까지 과학계의 가장 큰 거목으로 자리잡게 된다.[10][11] 그는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단위로 힘의 단위인 N(뉴턴)이 있다. 1kg의 물체를 1m/s으로 가속시킬때 드는 힘이 1N.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그 다음 해[12]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사이 밤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미 죽어 유복자였고 1개월 일찍 태어난 미숙아라 몸이 양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재혼을 하고, 뉴턴은 외할머니와 외삼촌 집에 남겨지게 되었다.
새아버지 바나바스 스미스는 종교 골통인 왕고집 목사였는데, 그것이 뉴턴의 괴팍한 성격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역시 가정 교육이 중요하다.[13] 새아버지를 매우 증오하여 때때로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고,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과 폭언도 일삼았으며, 새아버지가 죽자 매우 기뻐했다는 말도 있으니까...
페스트가 런던에 퍼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피난하던 시기(1664~1666)의 산책 중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우선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고 알려진 만유인력의 존재 자체를 뉴턴이 발견한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서 측정되는 중력과 천체운동에 필요한 구심력이 같은 것이라는 정도의 개념은 당시 학자들도 다들 알고 있었으며, 문제는 그 끌어당기는 힘의 크기가 얼마이며, 그것이 행성 운동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느냐였다. 행성의 공전 주기니 궤도니 하는 것은 이미 전에 요하네스 케플러 등에 의해 관측되어 케플러의 3대 법칙으로 정립되었는데[14], 뉴턴이 한 것은 이를 갈릴레이 역학으로부터 발전시킨 뉴턴역학(뉴턴의 운동법칙)과 미적분이라는 수학적 도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만유인력을 수학적 표현으로 정립해낸 것이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겼구나!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구나!"라고 했다는 것은 초딩용 위인전에나 나오는 얘기.[15]
인생 말년에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뉴턴 본인이 직접 언급한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에 대한 영감을 받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유인력과 사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이제는 진위여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심지어 그의 모친의 자택에 있던 사과나무를 여러 번 옮겨심은 사과나무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기증받아 심어져 있다. 3대손 1그루, 4대손 1그루.
16세기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 모양으로 돈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학으로 계산하려들면 이상하게도 공전주기 계산이 맞지 않아 당대 수학계의 난제로 유명했었다. 그러다 에드먼드 핼리(1656~1742, Edmond Halley), 크리스토퍼 렌(1632~1723, Sir Cristopher James Wren)[16], 그리고 아이작 뉴턴의 최악의 라이벌 로버트 훅, 이렇게 셋이 누가 먼저 지구의 공전주기 계산을 정확히 해내나 내기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별 진전이 없었다.로버트 훅이 자기가 풀 수 있다고 시간을 달라고 나대서 시간을 지체한 것도 있다 그러다 같은 왕립협회 회원이던 아이작 뉴턴을 캠브리지 대학에서 만난 자리에서 우연치 않게 이 문제를 털어놓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뉴턴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계산해 봤더니 원이 아니고 타원이던데?"
말 그대로 에드먼드 핼리는 정줄을 놨고, 뉴턴에게 이걸 왜 발표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왕립협회에서 로버트 훅과 한판 키배를 벌이다 토라져서 근 은둔생활을 했다는 것(...).[17] 결국 1684년에 핼리의 권유로 내기도 이길 겸 프린키피아를 발표한다.[18]
거두절미하고 이론의 전개에 대해서 살펴보면, 뉴턴은 물체의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연구결과를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구심력을 정의했으며, 행성의 궤도가 원뿔곡선이고 태양이 초점 중 하나에 있으며, 궤도에서 케플러 제3법칙이 성립하면 중력은 거리의 역제곱꼴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도출해냈다. 현재의 고등학교 물리 1 수준에서는 케플러 제1법칙에 의해 행성의 궤도는 타원 궤도이고, 케플러 제2법칙에 의해 행성의 공전 속도는 태양에 가까울수록 빨라지지만, 물리Ⅱ에서는 그냥 등속 원운동 취급한 상태로 역제곱꼴이라면 궤도에서 케플러 3법칙이 성립한다는, 진행방향이 다른 전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다.
용수철과 관련한 법칙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로버트 훅과 또 다른 엄청난 논쟁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뉴턴은 지금 알려져 있는 대로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점을 밝혀냈지만, 훅은 중력이 거리에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즉, 용수철처럼 거리가 멀어질수록 강해진다고 주장한 것. 미적분 논쟁에서의 라이프니츠와는 달리 후크의 주장대로라면 행성의 궤도가 원이고 모든 행성의 공전주기가 공전반지름에 관계없이 동일해야 하는데, 후크는 미적분을 몰라서 이런 결론을 도출해낼 수조차 없었고, 결국 철저하게 깨졌다.
명언으로는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사실 이 '거인의 어깨' 개념은 중세 때부터 이미 흔한 개념이었다고.[19] 워낙 폭풍간지가 넘치는 말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인용해서 쓰는 말이 되었다.
그렇게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친 근대 과학은 뉴턴에서 집대성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공로 때문에 지금까지도 뉴턴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맥스웰과 함께 물리학의 3대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리학의 1/3(고전역학)은 뉴턴이, 1/3(전자기학, 통계물리)은 맥스웰이, 1/3(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완성했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20]
기존의 볼록렌즈 두 개를 합쳐 증폭시키는 방식과 다른, 반사경을 이용한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지금도 반사경을 이용한 망원경을 뉴턴식 망원경이라 부른다.
이 반사경을 만들 때는 미적분 지식이 있어야 정확하게 빛이 한 점에서 모여 상이 제대로 맺히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21] 그는 프리즘 연구를 통해 다양한 색의 빛의 굴절과 반사 등을 실험해보았고, 다른 색의 빛은 다른 굴절률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굴절 망원경이 색수차가 발생한다는 것을 예측했다.[22] 하지만 반사는 이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색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반사 망원경을 발명하게 된다. 상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23]을 제외하고는 제작하기도 훨씬 쉽고 싸다는 장점이 있다.[24]
망원경 중앙에 반사용 평면거울, 즉 반사경이 있어 상을 가릴 것 같은데, 반사경이 상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사경이 "가리는" 빛의 구간이 확대되기 이전의 부분, 즉 빛을 모으는 부분이기 때문. 개구면의 일부를 가린다 해도 가려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통해 들어온 빛만 모아 상 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반사용 평면경이 개구면의 일부를 가리더라도 상의 전체적인 밝기가 줄어들 뿐, 상의 일부가 가려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단, 반사망원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의 상 흐려짐 현상이 도넛 모양이 되는 특성이 있다. 소위 '도넛 보케'라고 하며, '보케'가 개구면의 형상대로 형성되는 광학적 원리 때문에 생긴다.
미분법[25]을 누가 먼저 발명했나 하는 문제로 라이프니츠와 크게 싸웠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문제를 영국 왕립과학협회에 제소하여 공정한 판결을 받고자 했으나, 왕립과학협회 회장이 뉴턴이었기 때문에 게임 끝. 뉴턴은 회장 권한으로 이 문제를 '공정한 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사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 출신 위원에게는 아예 의견 개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게다가 위원회 최종보고서는 남몰래 뉴턴이 직접 썼으며, 이 보고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써서 익명으로 왕립과학협회 회보에 싣기까지 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죽었을 때는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뉴턴이 여러 외압을 넣은 결과와 동일하게, 실제로도 뉴턴 쪽이 라이프니츠보다 명백하게 먼저 발명했다. 그가 미분을 발명한 것은 1665~6년으로, 1676년에 발명한 라이프니츠보다 10년이나 빠르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주거나 연구에 사용하기만 했으며, 1671년 작성한 미분에 대한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다. 논문이 정식으로 발표된 것은 60년 후였는데, 이때는 이미 뉴턴이 사망하고도 10년이 지난 후였다.
사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분쟁에는 매우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미분 자체를 발표하기 전에 서로에게 자기 결과를 자랑했다는 점(...). 두 명 모두 미분을 발명했지만 서로 그것을 모르던 상태에서 먼저 뉴턴이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분의 기본 개념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막연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본 라이프니츠는 답장에서 뉴턴에게 자신의 미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편지를 보냈다.
따라서 누가 미분을 발명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기 지도를 받아서 미분을 재구성한 주제에 자기가 먼저 미분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배은망덕한 악당이라고 생각했고, 라이프니츠는 기껏 존경하는 과학자에게 자기 결과를 설명했더니 그걸 싹 빼앗아가고는 오히려 자기를 악당으로 모는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히 누가 진정한 발명자인가를 넘어선 깊은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라이프니츠도 뉴턴의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미분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지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서 불완전한 상태이던 미분을 완성했을수도 있기는 하다. 뉴턴도 이때까지 미분을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므로, 사실 라이프니츠의 연구결과를 보고 자신의 미분을 다소 손질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뉴턴이 먼저 발표를 냈고 그 뒤로 라이프니츠가 자신이 발견한 미분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뉴턴이 먼저 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미분과 뉴턴의 미분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했다. 그런데 후에 어느 영국 수학자가 '이것은 뉴턴의 표절이다'라는 의견을 내며 일이 커졌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저 둘은 가만히 있었는데 제3자가 일을 크게 만들었다는 소리. 저 의혹이 생기기 전까지는 둘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표절 의혹으로 영국 학계와 독일 학계는 대판 싸움이 났다.
추가로, 뉴턴이 단순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당대의 대학자라서 라이프니츠가 영국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욕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 이전에 흔히 라이프니츠는 라이프니츠 급수[26]라고 불리는 식을 1674년에 발견했는데, 문제는 이미 제임스 그레고리라는 당대의 영국 수학자가 1671년에 발견했던 식이었기 때문에[27] 라이프니츠가 이 식을 독자적으로 발견했음에도 이때 영국인들의 뇌리에는 '라이프니츠=표절범'이라는 의심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뒷배경과 뉴턴의 언플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당시의 영국인들에게 라이프니츠는 표절이나 일삼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더 안습한 사실은, 이미 madhava라는 인도의 수학자가 약 200년쯤 전에 아크탄젠트 급수를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논쟁으로 촉발된 영국 학회와 독일 학회의 싸움으로 인해 양국간의 학문적 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수학계는 얼마간[28] 대륙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었다고(…).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표절 문제를 명확히 한 현대의 논문체계가 등장하게 된다.[29]
미분의 발명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해석에서는 다소 의견이 갈린다. 뉴턴이 먼저 발견하기는 했지만, 많은 수학자들의 견해는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독립적으로 발명했으니 두 사람 모두 발명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30] 하지만 최종적 승자는 라이프니츠. 물리학자인 뉴턴의 방식보다는 수학자인 라이프니츠의 방식이 더 수학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현대의 미분은 거의 라이프니츠의 기호 방식을 따르고 있다. 뉴턴은 물리학자답게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연구하다가, 라이프니츠는 기하학에서 접선을 연구하다가 각각 미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dy/dx 방식이 바로 라이프니츠 방식이고, 뉴턴의 방식은 함수(변수) 위에 점을 쓰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dot notation. 다만 f(x)라는 기호를 처음 쓴 것은 오일러이므로, 뉴턴이 현대처럼 f'(x)라고 썼을 리는 없다.[31] 고등학교에서 미분을 배워 본 학생이라면 합성함수의 미분[32]을 할 때 라이프니츠와 라그랑주 방식이 얼마나 편리한지, 그리고 뉴턴 방식이 얼마나 결과가 더럽게 나오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뉴턴 방식으로 쓴 공식을 볼 기회는 거의 없지만 외국에서 쓴 미적분 책에는 간혹 나오고, 물리학을 한다면 시간에 대해 미분한 양으로 다른 양을 미분해야 하는 경우[33]처럼 역학문제에서 시간에 대한 미분이 잔뜩 들어 있는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할 때 쓰는 양을 줄이려고 쓴다.
미분과 관련한 뉴턴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변분법이다. 짧게 요약하자면, 방정식이 조건을 만족하는 변수를 구한다면, 변분법은 조건을 만족하는 함수를 구한다. 좋은 예시가 바로 최속강하곡선 문제로, "어느 고정된 두 지점을 연결된 궤도 위를 물체가 중력 가속도에 의해 이동할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달하는 궤도는 무엇인가?"를 구하는 문제다. 쉽게 설명하자면,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을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착하는 미끄럼틀 모양을 구하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뉴턴은 이 문제를 듣고서 다음 날 출근 전까지 변분법을 창안했으며, 답을 구했다. 이 때 뉴턴은 익명으로 답을 제출했지만, 풀이가 워낙 뛰어나고 독창적이라 이름이 저절로 밝혀졌다. 베르누이는 해답을 보자 “발톱 자국을 보아하니 사자가 한 일이다.”라고 평했을 정도.
변분법은 라그랑주 역학으로 이어지게 되며, 라그랑주 역학은 해밀턴 역학을 거쳐 슈뢰딩거 방정식, 양자역학까지 이어지게 된다.
* 구멍-반점 이론
뉴턴은 빛의 부분반사에 관한 이 론중 하나인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구멍-반점 이론이란, 유리나 물 등의 물체에서 빛이 일부는 투과되고 일부는 반사되는 부분반사현상을 구멍에서 빛이 통과되고 반점에서 빛이 반사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뉴턴은 "어떤 유리라도 깨끗하게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하게 설명하였는데, 이는 뉴턴이 유리를 '닦는다'라는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리를 닦는다는 것은 미세한 가루들을 문질러 유리면을 긁어내는 것으로 미세한 흠집이 생기는데, 이 미세한 흠집을 빛이 통과한다는 것은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갖가지 독특한 행동으로도 유명한데, 학생시절 돈이 없어 부유층 자제들 뒤치다꺼리를 하며 동전 몇 닢을 모아 생활했다든가, 어렸을 때 자기를 괴롭혔던 이웃집 애를 딱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서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게 본보기를 보여줬다든가, 근육 사이를 탐험한답시고 바늘로 눈구멍과 눈알 사이를 깊숙히 찔렀다든가[38], 연구에 몰두하다 달걀 대신 시계를 삶았다든가, 평생 연금술에 심취해 있었다든가 하는 일화가 많다.
게다가 평생 동정이었다.[39]만렙 마법사 그럼 그렇지 마법사가 아니면 이런 먼치킨이 나올리가 없지 뉴턴 자신도 동정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정도. 하지만 친척 여자가 집안일과 빨래를 도와주는 건 흔쾌히 찬성했다고 한다. 귀찮으니까.
이렇게 된 원인은 모친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뉴턴의 아버지가 죽은 뒤 뉴턴을 낳고 3살 무렵에 집을 나가 11살에 새아버지와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모친, 새아버지와 평생 사이가 소원했다고 전해지며, 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행복만을 찾는 어머니를 보고 결혼제도 자체를 혐오했을 확률도 높다.
특히 연금술, 성경 연구를 물리학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했다고 한다. 사실 그것들이 본업이고 물리학은 취미 생활 정도.취미로 물리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고대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톨릭이 전부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연금술, 성경 연구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왕창 연구했다. 실제로 그의 연구 노트 90%는 그쪽 주제이기도 하고.[40] 그런데도 물리학에서 이룩해낸 업적을 보면 흠좀무. 덕분에 친구인 핼리가 뉴턴의 관심을 물리학으로 돌려놓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사실 연금술을 연구하고도 장수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연금술에서는 수은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 더구나 그 시절에 물질의 특성을 확인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직접 먹어보는 방식이었다. 뉴턴은 특별한 부작용은 겪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말년에 우울증에 걸린 것이 수은 중독 탓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시기는 사실상 연금술이 유행한 마지막 시기로,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찰스 2세도 열심히 연구하다가 말년에 맛이 좀 갔다고 한다.
1696년 조폐국 감사 자리를 시작으로 1699년부터 조폐국장의 자리를 25년이나 맡았는데, 이 직업을 가장 즐긴 이유는 화폐 위조범들을 교수형시킬 때 중력을 활용하는 것이 흥미로워서(...)였다고도 한다. 임기중에 금속 비율 등을 바꾸어 화폐를 개혁하기도 했다. 특히 동전의 테두리를 깎아 팔아먹거나 동전을 하나 더 만드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동전에 테두리와 톱니를 만들어 넣은 것은 이 사람의 업적.
뉴턴이 조폐국장을 맡은 일화 또한 흥미롭다. 원래 뉴턴과 친분이 있던 재무대신 찰스 몬태규가 월급 많이 주는 대신 할 일 별로 없는 명목상의 자리로 조폐국 감사 자리를 하나 줬는데, 그가 조폐국 감사 자리에 엄청난 열의를 보이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예 거처를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옮기고는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조폐국 업무에 몰두했다고 한다. 당시 심각했던 화폐위조범을 잡기 위해 정보원을 고용하고, 이런 정보원과 만나기 위해 변장을 하고 술집에서 접선을 하기도 했다고. 또한 조폐국장이 되고 싶어 이런저런 정치적 뒷공작도 했다고 한다. 결국 전임 조폐국장이 알콜중독으로 사망하자 후임 조폐국장에 임명되었다.
조폐국장 말년에는 주식놀이를 하다 남해거품사건이라는 역사적인 버블크래시에 걸려 대차게 말아먹어 20,000파운드(현 시가로 약 20억 원)의 손해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예나 지금이나 주식은 헬게이트로 가는 지름길 역사속의 주갤럼 이때 남긴 말이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다."(I can calculate the movement of the stars, but not the madness of men) 실제로 뉴턴의 이 말은 "물리학 짱짱맨 모든 세상의 현상은 결국 물리학으로 귀결됨요를 외치고 다니는 물리학자들에게 사회과학자들이 날리는 회심의 일격이기도 하다.우리가 더 어려운 거 연구함요[41][42]
이 조폐국장 시절이 사실 뉴턴 본인과 영국에 있어서는 흑역사이긴 하다. 위의 주식 말고도, 당시 파운드화에 쓰던 금화와 은화의 교환비율 설정을 잘못한 결과로 금화가 악화가 되고 은화가 양화가 되는, 금속 가치와 정반대의 일을 벌인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결론은 금화가 은화를 구축하여 이후 영국의 화폐제도가 한참동안 꼬여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지폐 활성화로 해결하기 전까지는 영국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이 교환비율은 뉴턴이 잘못 설정한 것은 아니고, 기존 가치를 유지하고 평가절하를 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뉴턴은 교환비율을 다시 설정하자고 권고하기는 했다. 하지만 자기가 가진 은화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사람들의 반대로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쉽게 위조되던 화폐를 변경해서 새로 주조하는 일+위조범을 때려잡는 일만을 맡았다.
뉴턴의 조폐국 감사와 국장 시절을 다룬 책이 번역본으로 나왔다. 제목은 <뉴턴과 화폐위조범: 천재 과학자, 세기의 대범죄를 뒤쫓다.(원제: Newton and the Counterfeiter: The Unknown Detective Career of the World's Greatest Scientist)>
명예혁명 직후(1688) 대학대표로 국회의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43], 투표에는 빠짐없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은 당시 속기록에 딱 하나만 있다고 한다. "거, 바람 들어오니 창문 좀 닫아주시오."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
고양이를 길렀는데, 지나다니기 쉬우라고 문아래 작은 여닫이문을 하나 달아 놓았다. 그런데 새끼를 낳으니까 옆에 작은 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친구가 보다 못해 "어미가 문 연 거 그대로 따라가게 하면 되잖아"라고 하니까 데꿀멍했다는 일화.[44]
그리고 키우던 동물이(고양이라는 말도 있고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의 개라는 말도 있다.) 촛불을 쓰러뜨려 20년이 걸려 쓴 프린키피아 원고를 다 날려먹었다.망했어요 그런데 기억력을 되살려서 다시 썼다고 한다! 이후 그 동물이 어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네가 한짓을 알 턱이 없으니 뭐라고 할 수 없구나."라며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라던가 "다이아몬드! 네가 무슨 짓을 한건지 아는거니!"라고 절규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뉴턴이 한동안 기행을 일삼자(...)[45]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떠돌던 이야기라는 말도 있다. 애초에 그는 동물을 실험 재료로 보았으며, 일절 애완동물을 기른 적이 없기에 저건 말이 안된다는 주장도 있으니 사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외국에서도 타 과학자의 에피소드가 아니냐는 둥 논란이 있는 모양.
그밖에 연구에 열중하는데 배가 고파 간식으로 달걀을 삶아먹으려고 주섬주섬 책상을 손으로 더듬어보다 손에 잡힌 대충 둥근 걸 펄펄 끊는 냄비에 넣고, 나중에 달걀이 다 삶아졌나 하여 꺼내 보니 달걀은 온데간데없고 책상에 두었던 회중시계가 냄비에서 나오더라는 이야기도 있다.연금술 성공
말년에 성깔이 더러워져서 성질 괴팍한 노인네라고 불렸다고. 그래도 전해오는 말로는 제자들이 "선생님이 한 업적이 많습니다."라고 말하자 피식 웃으면서 하던 말은 다음과 같다.
"난 겨우 꼬맹이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업적이라는 건 그 꼬마가 바다에서 주운 조개껍질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네. 바다에는 더 많고 더 엄청난 업적이라는 게 많으니 자네들도 그 꼬마의 조개껍질을 덮는 엄청난 발견을 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
또는 다른 버전으로 이렇게 유언을 책자에 쓴 경우도 있는데,
"난 진리를 찾아 다니는 꼬맹이였지만, 내가 찾은 건 고작해야 바다에서 조개껍질 한 줌을 주웠을 뿐, 결코 진리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리를 찾아 바다에서 더 크고 더 많은 무엇을 줍거나 발견할지 모른다. 그것이 뭔지 나도 모르지만 이 바다에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넘치고 많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진정한 과학도라면 이 짧은 글 속에서 진리를 향한 끝없는 갈망과 학자로서의 겸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뒤에는 영국의 위인들이 잠든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되었다. 함께 사원에 안장된 과학자로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찰스 다윈, 찰스 라이엘 등이 있다. 석관 위에는 그가 자신이 쓴 저서들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몸을 기댄 모습이 조각되었으며, 연구에 사용했던 망원경과 프리즘 등의 기구가 묘사되었다. 라틴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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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S. E. ISAACUS NEWTON Eques Auratus, Qui, animi vi prope divina, Planetarum Motus, Figuras, Cometarum semitas, Oceanique Aestus. Sua Mathesi facem praeferente Primus demonstravit: Radiorum Lucis dissimilitudines, Colorumque inde nascentium proprietates, Quas nemo antea vel suspicatus erat, pervestigavit. Naturae, Antiquitatis, S. Scripturae, Sedulus, sagax, fidus Interpres Dei O. M. Majestatem Philosophia asseruit, Evangelij Simplicitatem Moribus expressit. Sibi gratulentur Mortales, Tale tantumque exstitisse HUMANI GENERIS DECUS. NAT. XXV DEC. A.D. MDCXLII. OBIIT. XX. MAR. MDCCXXVI |
이곳에 아이작 뉴턴 경이 묻혀 있으니, 하느님과 같은 정신력에 의하여 그가 발견한 수학적 원리로 행성의 운행, 혜성의 경로, 바다의 조석을 처음 밝혔으며, 일찍이 어떠한 학자도 의심하지 않고 있던 광선의 본성을 발견하였다. 또한 자연, 고대, 성서에 관하여 세밀하고 예민하며 확실하게 해명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이 존엄하심을 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인류가 하느님 곁에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실로 우리의 큰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642년 12월 25일 출생, 1727년 3월 20일 사망. |
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뉴턴의 묘비명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을 칭송한 다음의 글귀다.[46]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느님이 “뉴턴이 있으라!" 하시자 세상이 밝아졌다.
뉴턴은 과학에 버금가는 분량의 종교와 신학에 관련된 문헌을 남겼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전문 신학자로 간주될 정도로 신학 전문가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상가들과 신학이나 종교에 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뉴턴은 표상과 이데아 사이의 일치성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이것은 고전 중세신학의 연구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일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본인이 종교에 대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부정하였다. 더 나아가 초대 교회가 삼위일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 본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확신했다. 이는 영국 성공회의 견해와 정면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었고, 논쟁을 의식한 뉴턴은 활발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출판을 주저하였다.
결국 그가 죽은 후에 방대한 종교 문헌 중 4가지만 사후에 출판되었고, 나머지 원고는 20세기 들어 경매를 통해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47] 경매 이후 뉴턴의 신학과 종교, 연금술에 관한 원고는 전 세계에 분산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측정과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뉴턴이 남긴 기록을 단어 수로 본다면 과학과 수학에 관해서는 100만 단어, 연금술에 관해서는 55만 단어, 신학과 종교에 관해서는 140만 단어로 추정된다. 양으로만 따지면 과학자가 아니라 신학자라 불러야 할 수준(...). 뉴턴의 학문적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서 과학, 신학 뿐 아니라 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48]
비교적 잘 알려진 연금술 외에도 그에게 흑역사가 있으니, 바로 숫자조작이다. 인디애나 대학 교수이자 과학협회장을 역임한 웨스트폴이 <뉴턴과 그의 조작요소들>에서 이 부분을 밝혔다.
글에 따르면, 뉴턴은 자신이 주장한 이론에 맞지 않는 관찰값이 나오면 원하는 관찰값이 나올 때까지 변수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뉴턴의 만유인력과 관련된 이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변수간의 상관관계를 자신의 이론에 맞춰 주작했다는 것. 문제는 웨스트폴이 밝혀낸 것은 뉴턴의 글이 쓰이고 300년이 지나서이고,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가지고 뉴턴이 비도덕적인 연구를 했다고 까기는 좀 그런 것이, 확률과 오차를 통해 실험결과를 분석하는 실험 방법론이 등장한 것은 한참 후이다. 애초에 확률과 오차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미적분이 필요한데, 미적분 자체가 뉴턴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니... 거기다 이러한 실험은 엄격한 변인 통제와 분석이 필요한데, 변인 통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를 최대한 고려하여 실험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런데 애초에 이 '실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요소'를 가장 처음으로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 뉴턴이다. 그러니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요인에 대해 아예 모르고 시작할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실험은 태생적으로 부정확하다. 이 때문에 뉴턴은 분명히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맞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 봤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변인통제와 실험방법론 등 실험의 기본 개념이 막 등장하던 시기였고, 실험환경을 갖춘다는 인식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뉴턴은 역사학 관련 책도 집필한 적이 있었는데,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을 연구한 적이 있다(...).
시(詩)를 "일종의 천재적인 궤변"(a kind of ingenious nonsense)라고 했다(...).
뉴턴을 골아프게 한 역설 두 가지가 있었으니, 벤틀리의 역설과 올베르스의 역설이 그것이다.
대항해시대 5에서는 라몬의 해도에 감춰진 비밀을 찾기 위해 항해하는 주인공 일행이 갈릴레이의 추천을 받아 찾아갔는데, 뉴턴은 해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서 쫓아냈지만 나중에 해도의 비밀을 통해 지도를 바꿔 플리머스에서 단숨에 해로로 런던을 오는 현상을 보여주면서 주인공 일행이 말하는 해도의 비밀에 대해 믿게 된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나침반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있던 것인데도 새 것처럼 있다고 했으며, 연구에 흥미가 생겼다면서 연구를 위해 나침반을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인공의 아버지인 라몬의 유품이라 건네받지는 못했다. 자신이 연금술을 연구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 나침반은 현자의 돌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고 그 나침반은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빼앗으려 할 수 있다면서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이후에도 주인공 일행으로부터 해도와 관련된 항해에 대해 보고를 받기도 하며, 원래 세계에는 당시의 기술 수준을 뛰어넘는 유물도 존재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이집트에 가는 것을 권하면서 힘을 쌓고 자신을 연마하라면서 자신도 조사하기로 하며, 주인공 일행에게 편지를 보내 런던으로 오도록 해서 편지를 전해준다. 주인공 일행이 오자 나일강 북부1의 지도를 주면서 피라미드를 조사하는 것을 의뢰하기도 하며, 주인공 일행이 피라미드에 가져온 진주를 가져오면 그런 것은 역사학에 능통한 사람에게 조사하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떠나자 드레이크에게 무언가를 꾸미고 있냐고 하면서 그에게 경고를 하는 것을 통해 단순히 연구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드러낸다. 주인공 일행이 아프리카 남단을 항해하고 유럽으로 돌아오면서 뉴턴이 의뢰를 하는데, 아프리카 남단 사막 근처에 있는 불모 지대에서 꽃밭이 펼쳐졌다가 어느 사이에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현자의 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인공 일행에게 조사하도록 시킨다. 주인공 일행이 전설의 섬 오르가나에 대한 것을 조사하다가 수수께끼의 해적 함대와 전투를 벌여 물리쳤는데, 오스만이 아테네 근해를 봉쇄하는 것을 주인공 일행에게 물리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드레이크에게 요청받으며, 뉴턴은 이를 수락하면서도 항상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주인공 일행이 카리브 해에서 라몬에 대한 조사를 하는 사이에 쥬피톨에게 주인공 일행을 몰래 도와주라는 의뢰를 했다는 것,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본래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다가 이를 주인공 일행이 발굴한 대서양 중부의 해룡의 동굴 앞 거점에 있는 헤라클레스 신전의 동상에서 잃어버렸다고 한다. 현자의 돌에 대해 세상의 이치를 방해하는 물건으로 자신이 가진 것 이외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이 돌의 행방을 모두 공개했다가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봉인해야 한다면서 연구가 진행되면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면서 자신이 맡고 있겠다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황금양털을 찾기 위한 모험을 한 것을 엠마로부터 듣고서는 주인공 일행에게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다빈치 코드》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사과도 같이 등장.
드라마 《닥터후》에서도 언급이 된다, 거기서 4대 닥터가 그에게 중력을 발견하도록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떨어뜨렸는데, 뉴턴은 그걸 보더니 닥터 보고 나무에서 꺼지라고 했고(...), 결국 같이 저녁 먹으면서 말로 설명해 줬다고 한다. 근데 사실 누구든지 처음 보는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사과를 떨어뜨리면 꺼지라고 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불타는 성전에 등장하는 나그란드 지역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 섬들 중 한 곳에 나무에 기댄 상태로 죽어있는 해골과 사과 나무, 근처에 떨어진 사과가 있다. 중력을 무시하고 공중에 뜬 섬이나 사과 나무 등으로 미루어 아이작 뉴턴에 관한 짓궂은 이스터 에그.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의 최종보스인 도른커크의 본명이 아이작이며 지구에 있을 때의 직업은 과학자 겸 철학자, 만유인력의 법칙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봐서 아마 이 인물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것 같다. 아니면 아이작 뉴턴 본인이라거나.
타임보칸시리즈에서도 나왔다. 도론죠 일행과 아웅다웅하다가 사과나무를 걷어차는 바람에 우루루 떨어진 사과에 파묻히면서 진리를 깨달았다.
제임스 대시너의 SF소설 메이즈 러너의 등장인물 뉴트의 이름은 아이작 뉴턴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이름의 유래를 언급했다.
천재소년 지미 뉴트론의 주인공 지미 뉴트론도 뉴턴을 오마주한 캐릭터다. 키가 작다는 것하고, 뉴트론이라는 성도 뉴턴과 비슷한데다 지미 뉴트론의 미들네임(middle name)도 아이작(Issac)이다.
랩도 곧잘 한다
Nell의 정규 6집 앨범의 제목이 Newton's Apple이다.
천문학자 이강환 박사의 뉴튼과 뉴튼역학 오디오강의PLAY
개새끼라 카더라
가면라이더 고스트의 주인공 라이더 고스트가 사용하는 고스트 아이콘 중 하나로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