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역사

수학의 역사

작성일 2011.08.1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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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수학의 역사를 도사해야하거든요.

 

둘 중에 하나만 부탁하겠습니다.

 

수학의 역사[History of mathematics, 수학사]

  1

 

수학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오래 되었다. 수학사(數學史)로 알려진 학문 분야는 본래 수학의 새로운 발견에 대한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며, 더 작게는, 과거의 표준적인 수학 방법과 용어에 대한 탐구다.

 

교역 ·분배 ·과세 등 인류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계산을 수학이 담당해 왔고, 농경생활에 필수적인 천문 관측과 달력의 제정, 토지의 측량 또한 수학이 직접적으로 관여한 분야다. 고대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나라로는 이집트, 인도, 그리스, 중국 등이 있다.

 

근대 시대와 지식의 전 세계적인 확산 이전에, 새로운 수학적 발전의 문자로 된 예들은 단지 일부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수학적 텍스트들은 플림톤 322(바빌로니아 수학, 기원전 1900년 경), 모스크바 수학 파피루스(이집트의 수학, 기원전 1850년 경), 린드 수학 파피루스(이집트의 수학, 기원전 1650년 경), 술바 수트라스(인도의 수학, 기원전 800년 경)다. 이들 텍스트들 모두는, 아주 고대부터 그리고 기초적인 산수와 기하학 이후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이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라 불리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수학은 수학에서의 방법과 다루는 주제를 크게 확장해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간주되는 그리스와 헬레네 수학에서 보다 더 발전했다. 이들 고대 문명에서 발전한 수학은 이슬람 수학에서 더 발전하고, 크게 확장되었다. 수학에 관한 많은 그리스와 아랍의 문헌들이 12세기에 중세 유럽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그곳에서 더욱 발전했다.

 

고대와 중세 수학의 역사에서 한 가지 인상적인 특징은 수학의 폭발적 발전이 종종 침체된 세기 이후에 뒤따른 다는 것이다. 16세기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영향을 준 새로운 수학적 발전들은 빠른 속도로 만들어졌고, 이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고대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그리스의 수학자 에우클레이데스(일명 유클리드)가 그 이전의 저서와 연구를 집대성해 《스토이케이아(Stoicheia)》를 지었다. 이것은 후세에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중국명은 利瑪竇, 1552~1610)의 구역(口譯)과 서광계(徐光啓, 1562~1633)의 집필에 힘입어 《기하원본(幾何原本)》(1607)이라고 한역(漢譯)된 일이 있는데, 내용은 도형(圖形) 뿐만 아니라 그리스식 방법에 따라 체계화된 교과서였다. 즉 제 1권은 수직·평행 및 평행 4변형에서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정리까지, 제 2권은 2차방정식의 면적에 의한 해법, 제 3권은 원과 호, 호에 대한 각, 제 4권은 내외접 정다각형(內外接正多角形), 제 5권은 비례론(比例論), 제 6권은 비례론의 도형에의 응용, 제 7권부터 제 9권까지는 정수론(整數論), 제 10권은 무리수론(無理數論), 제 11권부터 제 13권까지는 입체기하학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의 정통적인 수학은 기하학과 정수론과 비례론이고, 대수(代數)는 기하학적으로 풀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공리(公理)·정의(定義)·정리(定理)에 의해 매우 논리적으로 진행(進行)되었는데, 그와 같이 체계화한 데는 플라톤(Platon, BC 427~BC 347)에 의하는 바가 많다고 한다. 하기는 디오판토스(Diophantos, 246~330)는 기호를 사용해서 대수문제를 풀기는 했으나 그것은 예외적인 존재다.

 

중세(500년경~1400년)

 

중세 유럽 수학의 관심사는 근대의 수학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것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수학이 창조된 자연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신은 모든 것을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한다."라는 성경 구절(외경 "지혜서" 11장 21절)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중세 초기(500년경~1100년)

 

보에티우스는 산술과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음악에 대한 학문을 기술하기 위해 "4학"이라는 용어를 만들면서, 수학을 교육 과정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발췌한 총서의 하나인 니코마쿠스의 《산술 (De institutione musica)》을 번역해 《산수입문 (De institutione arithmetica)》을 저술했다. 그의 책들은 실용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론적이었으며, 그리스와 아랍 수학 책들의 재등장 전까지 수학 연구의 기초였다.

 

유럽 수학의 재탄생(1100년~1400년)

 

12세기에, 유럽의 학자들은 과학의 아랍 문헌들을 찾으려고 스페인과 시칠리를 여행했는 데, 여기에는 체스터의 로버트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알 콰리즈미의 대수학(al-Jabr wa-al-Muqabilah)과 베스의 애덜라드와 카린티아의 헤르만 그리고 크레모나의 제라르드에 의해 여러 개의 판으로 번역된 유클리드 원론의 전체 문헌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새로운 원천들은 수학의 부흥을 불러일으켰다. 1202년에 쓰여지고, 1254년에 수정된 《계산판의 책》(Liber Abaci)에서,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는 유럽에서 에라토스테네스의 시대 이후 3천년 이상의 시간 차이를 두고, 처음으로 중요한 수학을 만들어 냈다. 그 작업은 유럽에 아라비아 수 체계를 도입하고, 많은 다른 수학 문제들을 논의한 것이었다. 14세기는 폭넓은 범위의 문제들을 탐구하기 위해 새로운 수학적 개념들이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학 발전에 기여한 하나의 중요한 분야는 위치 이동의 분석에 관한 것이었다.

 

토마스 브래드워딘은 산술적 비율로 증가하는 속도(V)는 기하학적 비율로 증가하는 힘(F)과 저항(R)의 비율이라고 제안했다. 브래드워딘은 이를 특정한 일련의 예로써 표현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 로그 개념이 착상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오류로 밝혀진 그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써서 표현할 수 있다: V = log (F/R). 브래드워딘의 해석은 혼합된 의약품의 성분을 계량하기 위해 알 킨디와 빌라노바의 아놀드가 사용했던 수학적 기교를, 하나의 다른 물리 문제에 모방한 하나의 예다.

 

근대 초기의 유럽 수학(1400년~1600년)

 

르네상스의 여명기에 유럽에서, 수학은 로마 숫자를 사용하는 불편한 기수법과 기호보다는 오히려 단어를 사용해 관계를 표현하는 것 때문에 아직은 제한적이었다. 즉 더하기 기호도, ‘같다’라는 기호도, ‘x’라는 미지수도 사용되지 않았다.

 

16세기의 유럽 수학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세계 어디에서도 전례가 없는 진전을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그 첫번째는 삼차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으로, 통상적으로 1510년 경 스키피오 델 페로가 먼저라고 알려져 있지만, 카르다노의 제자 로도비코 페라리에 의한 사차방정식에 대한 일반적 해법을 포함된, 뉘른베르크에서 요하네스 페트레이우스에 의해 첫 출판된 지롤라모 카르다노의 책, 아르스 마그나(Ars magna)다.

 

이 순간부터, 수학은 당시의 물리학의 진보에 기여를 하거나 도움을 받으며, 급속하게 발전했다. 이 진보는 인쇄술의 발전으로부터 크게 도움 받았다. 가장 처음 인쇄된 수학 책들은 1472년 포이에르 바하의 "행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며, 다음에는 1478년의 상업 산수에 관한 책 트레비소 산수였고, 그리고 1482년 에르하르트 라트돌트에 의해 최초의 수학 책인 유클리드의 원론이 인쇄되고 출판되었다.

 

항해가 증가하고, 더 넓은 지역의 정확한 지도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서, 삼각법은 수학에서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바르톨로메오 피티스쿠스가 1595년에 삼각법(Trigonometria)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레기오몬타누스의 사인표와 코사인표가 1533년에 출판되었다.

 

세기 말에, 레기오몬타누스(1436년-1476년)와 프랑수아 비에트(1540년-1603년) 등의 사람들 덕분에, 수학은 오늘날 사용되는 기수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의 인도-아랍 숫자를 사용해 쓰여졌다.

 

17세기

 

17세기에는 케플러, 네이피어, 데카르트 등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방법서설》을 지은 철학자 데카르트는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후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기하학을 대수학과 결부시켜 대수학적 방법으로 기하학적 성질을 탐구하는 것으로, 후에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발견에 영향을 끼쳤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을 창시하고 근대해석학을 만들었다. 기하학, 대수학의 세계에서 해석학으로 비약한 수학은 물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뉴턴은 1671년 미적분학을 체계화했으며 1687년 프린키피아를 간행했였다. 뒤에 미적분학을 누가 먼저 창안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나 현재는 두 사람이 독립적으로 그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참고로 라이프니츠는 기호화에 큰 공적을 남겼다.

 

18세기

 

17세기에 창설된 해석학이 발전한 시대다. 스위스의 베르누이 일가와 프랑스의 수학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베르누이의 제자인 오일러는 뛰어난 계산력과 독창력으로 해석학의 면목을 일신했다. 그 외 오일러와 더불어 변분학을 창시한 라그랑주, 천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규명한 라플라스, 타원함수론의 선구자였던 르장드르, 화법기하학을 창시한 가스파르 몽주가 있다.

 

 

 

 

19세기

 

19세기 내내 수학은 점점 추상화되었다. 이 시기의 탁월한 수학자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1777년~1855년)가 있다. 과학 분야에서의 수많은 기여를 제외하고도, 순수 수학에서 그는 복소 변수의 함수와 기하학, 그리고 급수의 수렴 등에서 혁명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수학의 기본 정리와 2차호상법칙에 대해 처음으로 만족할 만한 증명을 얻었다.

 

이 세기에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 공리가 더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라는 두 가지 형태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전이 있었다. 러시아 수학자 니콜라이 로바체프스키와 그의 라이벌인 헝가리 수학자 야노슈 보요이는 각기 독립적으로 평행선의 유일성이 더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라는 쌍곡선 기하학을 발견했다. 이 기하학에서는 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 보다 작게 된다.

 

타윈 기하학은 19세기 말에 독일의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에 의해 발전되었다. 여기서 한 삼각형의 내각의 180°보다 크게 되고, 리만은 또한 세 가지 종류의 기하학을 통합하고, 폭넓게 일반화한 리만 기하학을 발전시켰으며, 곡선과 표면에 관한 관념들을 일반화한 다양체의 개념을 정의했다.

 

19세기는 추상대수학의 엄청난 시작을 경험했다. 영국의 윌리엄 로원 해밀턴은 비가환대수을 개발했다. 영국 수학자 조지 불은 곧이어 숫자를 단지 0과 1로 표현한, 유명하게는 1+1=1인, 현재 ‘불 대수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전개된 대수학을 고안했다. 불 대수학은 수리 논리학의 시작점이고, 컴퓨터 과학에서 중요한 응용을 가진다.

 

오귀스탱 루이 코시, 베른하르트 리만 그리고 카를 바이어슈트라스는 더 엄밀한 방식으로 미적분학을 재구성했다.

 

또한 처음으로 수학의 한계가 폭발했다. 노르웨이 수학자 닐스 헨리크 아벨과 프랑스인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4차 이상의 다항 방정식을 푸는 더 이상의 일반적인 대수학적 해법은 없다라는 것을 증명했다. 다른 19세기의 수학자들은 이 증명을 이용해 자와 컴파스만으로, 임의의 각도를 3등분 할 수 없다는 것, 주어진 입방체의 2배의 체적을 가지는 입방체를 구성할 수 없다는 것, 주어진 원의 면적과 똑같은 정사각형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 많은 수학자들이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헛되이 시도했었다.

 

아벨과 갈로아에 의한 다양한 다항 방정식의 해법에 대한 연구는, 군론 그리고 추상대수학에 관련된 분야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한 토대를 쌓았다. 20세기의 물리학자와 과학자들은 군론을 대칭성을 연구하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간주했다.

 

19세기 말에 게오르크 칸토어는 거의 모든 수학에서 공통의 언어가 되었고, 무한의 개념을 엄밀하게 다루는 것이 가능하게 된 집합론을 발명했다. 칸토어의 집합론, 그리고 주세페 페아노, 로이첸 에흐베르투스 얀 브라우베르, 다비드 힐베르트, 버트런드 러셀에 의한 수리 논리학의 출현은 수학의 기초에 관한 오랜 논쟁을 일으켰다.

 

19세기는 국가 단위의 수학 기관이 설립되었다. 1865년의 런던수학협회, 1872년의 프랑스수학협회, 1883년의 에든버러수학협회, 1884년의 팔레르모수학협회, 1888년의 미국수학협회.

 

외에 다른걸 써 주시거나(간단하게)

 

아니면 이 글을 간추려서 써 주십시오.

 

내공100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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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원래 기하학은 상당히 오래된 수학의 한 분야입니다. 그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었으며 역사적인 측면에서

 

기하학의 첫 인식의 문제는 거론할 수 조차도 없을 정도로 거의 문명이 있는 곳이라면 자연스럽게 존재하던

 

것들이었기 때문에 기하학의 첫 기초적 설립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단 기초적으로 잘 성립된

 

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역사에서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발전하게된 것들에는 상당히 많은 문화적, 제도적, 지리적, 사회적 등의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재정과 건축에 잇었습니다. 이집트에는 나일강으로 유명한,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이 있으며

 

그 강은 지구의 궤도가 딱 태양과 함께 위상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남회귀선과 북회귀선의 변화에 따라서

 

범람이 일어나고 끝나고를 반복합니다.

 

이때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가 중학교 1학년때에 교과서에서 배운 나일강 문명이라고 대표될 정도로 유명한

 

이집트 문명의 시작이지요. 기하학은 여기에서 필요욕구에 의해서 생겨났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본적

 

인 형태로써, 수학에서 기하학으로 우리들이 배우는 것과는 달리 이집트인들은 재무상에서의 요구에 의해서

 

절실히 필요시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금시기 이전에, 이집트 내에서는 나일강의 범람에 의해서, 사유

 

재산에 의한 재산관념에서 농경문화였던 이집트에서는 토지의 중요도는 고사하고 법체계들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땅의 소유권에 대한 인식과 토지들에서 나오는 곡식들의 조세제도에서의 수확부분에서 땅의

 

경계가 범람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은 크나큰 피해액을 예상의 범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넘나들 수 잇다라는

 

불안감에 의해서 이를 타계하기 위해서 땅을 측량한다라는 의미에서 기하학에 대한 연구의 수요가 조성이

 

되어서 연구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나온 기하학적 연구 성과들은 지금 현대의 기준에서는 매우 미미한 것이지만 이 문서들과 이집

 

트의 발달화된 문명들은 곧 바다건너, 그리고 땅을 건너서 그리스로 전해집니다. 지리적으로 농업국가가

 

될수조차도 없이 상업과 올리브 농장 등에 의존했던 그리스의 경우에는 본질적으로 이집트의 풍족한

 

오리엔트 문명의 찬란한 황금의 땅과는 거리가 먼, 여름에는 덥고 빛이 따가우며 칙칙한 습도에 겨울에는 건

 

조하여 생활할 때에 약간 다른 이방인들에게는 불쾌감을 주는 그런 공간인 그리스에서는 이집트와는 달리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한 문명이었다고 말할 수 잇습니다. 대신 이집트에 비해서 정신적인 문명에서는

 

압도적이었던 그리스의 경우에는, 추상적인 사고관과 연역법과 귀납법 등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연구들을

 

기반으로 하여 이집트에서 건너온 기하학에 대해 자신들의 추상적 사고관을 도입하여 연역적을 다루기

 

시작햇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넓은 토지와 비옥한 땅에서 나오는 곡식들에 비해 그리스는 척박한 산악지대

 

에서 아고라와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같은 폴리스들이라는 것으로 유명한 험악한 지형들 때문에 기하학의

 

발전에서는 이집트에서 보다는 훨씬 작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집트에서 기하학 논문서들이 오기전까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집트의 신화적인 것들과 제도들, 그리고 학문의 성과들을 담은 논문들이 전해지고

 

크레타 문명, 에게해 문명으로 유명한 그리스 문명 특유의 사색적 학문적 열풍들에 적절한 조화를 걸쳐서

 

기하학을 연역법을 도입하여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의 무리수인, 이집트인들도 인식하고 있었기에 피라미드 건축에서도 이용했고 고대 수메르인들도

 

이 무리수의 존재를 인식햇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표현법을 몰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같은 표현을 한

 

인물들이 없었던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최초의 수학사에 획을 그은 인물인 피타고라스의 數사상과 조화이

 

론에 힘입어, 기하학은 큰 발전을 입게 됩니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시기를 지나서

 

그리고 플라톤의 기하학 논문들이 후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 집필에 영향을 끼치고, 이런 것들이 시간

 

적 차이를 두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수학, 과학, 철학, 사상, 식물학, 동물학, 의학(이집트가 최고였죠,

 

그리스에서도 의학의 발전은 대단했지만 그 성과는 고대 이집트의 의술에 비길바가 못되엇습니다), 신화,

 

문학, 등에서 눈부신 발전을 하기 시작했죠. 그 유명한 정치의 천재인 페리클레스의 존재로 민주주의의

 

황금기로 유명한 것이 대략 이 시기에 속합니다. 허나, 초기 그리스의 학문적 성과들은 이집트에 비할바가

 

못되었기에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에 대거 유학을 가서 학문을 연구하고 배워오는 것으로 대신했지요.

 

알렉산더 대왕을 아시는지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서 그리스를 점령하고 이집트의 삼각주 지대에

 

알렉산드리아 대항구 도시를 건립한 것이 대략 이 초기 그리스 학문적 성과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사건으로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명한 학자들인, 아폴로니우스나 유클리드 등이

 

거대 도서관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수학을 하였으며, 유클리드는 여기에서 생활하면서

 

여러가지 도서들이 수장된 도서관 내부의 책들을 종합하여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담은 the elements를

 

저술하였다고 전해지죠. 그 말고도, 다른 저술활동도 하였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the elements라는 책

 

이며 이 책은 이후, 기하학에 획을 끄으며 추상적으로만 다가오던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하나의

 

공리계들의 구축에서의 수학에서의 연역법의 성전으로 받들여지게 되었으며,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의미의 포괄적인 수학 기하학의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명칭의 대표적인 명사로 자리를 잡게되지요.

    

    

우리가 잘 아는 수선, 중점, 평행선의 원리, 완전한 원, 엇각, 직선, 할선 등의 개념들은 거의 유클리드의

 

기하학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들 역시, 유클리드 개인의 기하학 원리들을 총괄하여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부로써 피타고라스의 원리를 자신의 논문에서(내가 읽었는데, 아마 3부에서 읽은

 

것 같군요) 증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기하학을 본격적으로 수학의 한 갈래로 분리된 것으로

 

다룬 인물은 물론 유클리드가 아닙니다. 탈레스라는 인물이며, 아마 내 기억에는 중학교 1~2학년때에

 

과학 교과서에서 세상에 대한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것으로 주장했던 인물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인물에서 기하학이 본격적으로 독립된 것으로 그리스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수학을 역시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의 도구로써 인식했던, 자연 철학사상에

 

근거를 두기도 했던 그리스의 철학사상들을 보아서는 우리가 기하학을 수학이라고 부른것과 완전히

 

별개로 그리스인들에게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본 것으로 봐서는 이 문장도 잘못된 표현이라고 봅니다.

 

기하학을 도형이라는 것으로, 사물의 모습을 본뜬 것이라는 시각이라는 인간의 감각에 근거한 것에서

 

출발한 것처럼, 기하학을 자연의 한 모습을 재구성시킨 것으로 본 것으로 보이거든요.

 

아무튼, 기하학의 출발은 매우 오래되었지만, 탈레스보다는 가장 유명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유클리드이고

 

그 다음이 바로, 아폴로니우스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유클리드와 함께 가장 큰 기하학의 거성으로써 이름이

 

높기도 햇던 인물인 유클리드와 쌍벽을 이루기도 하였던 아폴로니우스 역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특이하게 그리스의 수학자이면서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는 원추곡선론이라는

 

conic sections 8 vol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잇는데.... 제가 가지고 잇는 책에서 보았을 때에는 7권만 있더

 

군요. 이 인물의 존재도 역시 독특한데, 유클리드에 비해서 곡선에 대해서, 원뿔곡선이나 전개도 상에서의

 

원기둥 등에 대한 논문이 본격적으로 심화해서 다루어진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그리고 우리가 배우는 10-나의 도형에 대한 함수와 좌표점들에 대한 것들을 배울때에 원의 함수에 관한

 

문제들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들 많이 포괄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는 면적에 대한 피타고라

 

스 학파들의 면적에 대한 용어들을 토대로 하여, ellipse, parabola, hyperbola 라는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타원이라는 의미의 ellipsis는 부족하다라는 그리스의 언어에서 가져온 말이며,

 

parabole라는 일치하다라는 단어에서 포물선을, hyperbole라는 그리스어에서 초과하다라는 의미의 쌍곡

 

선을 사용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걸쳐서 상당히 우리가 초&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기하 부분의 상당히 절대적으로 많은 부분을 배우고 있는 것들을 이루는 것이며

 

수능 문제들이나 혹은 모의고사에서 나오는 문제들의 응용부분은 이들의 논문에서 언급이 되었던 것들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아폴로니우스의 원들의 경우에는 원과 접하는 완전히 곧은

 

직선과의 관계들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 부분을 문제에서 꼬아서 내면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되버리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수능공부이든 논술 공부이든 대학공부로 넘어가든지, 한번쯤은 이들의 논문들을 직접

 

구입을 해서 읽어볼 필요가 잇습니다.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을 한국에서 보지도 못했지만 해외로 넘어오면서

 

쉽게 구입을 해서 읽게되었고 원추곡선을 구입해서 읽게되니, 상당히 고등학교 때에 배웠던 도형문제들이나

 

혹은 논리들에 대한 증명과정들이 상당수 거기에 근거를 두고 잇다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게되었지요.

 

논증기하의 가장 핵심은 바로, 논증방법에서 나오게되는 공식들이 아니라 바로 증명과정에서 사용된

 

논리 전개 과정 그 자체에 잇습니다. 이게 바로, 논증기하를 어렵게 보면 끝도 없이 어려워지고 공식만

 

줄줄 외운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애에 비해서 상당히 능률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잇기 때문이죠.

 

논증기하는 기하 원래의 역사에서 16세기까지 이어오면서 페르마의 3차원에서의 좌표평면과 데카르트의

 

2차원에서의 좌표 평면이 성립이 될때까지는 기하학의 기본 주류로 이어져 왓기 때문에 기하학 자체의

 

이해를 위해서는 논증기하는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더욱, 올림피아드 수학을 준비하는 애들이라면

 

논증기하 부분은 피할 수 조차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공부를 해야하며, 과학을 공부하는 아이들 중에서

 

아이작 뉴턴의 자연 철학 논문과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의 수학 논문들(디오판토스의 산수론과 같은

 

대수 부분의 최초 논문들 등과 같은 것들은 열외로 합시다)이나 혹은 현대 도형이론 이전의 논문들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논증기하를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반드시 한번 쯤은 눈여겨 봐둬야만 합니다.

 

참고사항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역시 이 논증기하에 대거 의존하기

 

때문에 천문학의 역사에 대해서 하늘에 대한 고대인들과 과거 인류의 이해도를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논증기하는 더욱 피할 수 없죠^^;;

 

아래 사진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것들의 요약해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세계의 요약본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세계의 계요도 입니다^^;;

   

아폴로니우스의 코닉섹션에서 발췌한 원과 직선과의 관계들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수는 중,

 

고등학교 때에서 문제집에서 사용된 도형들의 모습과 흡사함을 알 수가 있지요. 일단, 아폴로니우스의

 

내분점과 외분점에 관한 문제는 10-나의 도형문제의 내분점과 외분점의 심화문제에서 논술 문제로

 

나왔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문제집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져서 중급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엣날에는

 

배우지 못한 상태에 있다가 논술 문제로 나와서 상당히 애를 먹기도 한 문제라고 하더군요....


 
 
 
 
 


 

위의 그림들은 그림판에서 에전에 오픈 백과 노하우에서 한번 원피스 논평을 적는 과정에서 그림판에서

 

직접 그렸던 것들입니다. 가장 먼저, 위의 그림들이 왜 그리스 편에 나오느냐에 대해서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가 잇을 거라고 봅니다. 예전, 삼각함수가 고전적인 인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도형문제들에 대해서 접근을 할 수 있고 건축학에서 사용이 되었는지를 의아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이

 

보였기 때문에 언급을 할 필요가 잇을 것 같습니다.

 

일단, 기하학에서의 삼각함수의 존재는 원속에 숨겨진 보물이라고 하여, 그리스 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존재입니다. 단지, 우리가 현대에서 잘 알고 있는 삼각함수의 기술적 묘사들과 그 공식들 등등은 아이작

 

뉴튼, 라이프니쯔->오일러->가우스->코시 등등의 인물들에 걸쳐서 세밀화된 것이지 고대 인물들에게도

 

삼각함수 자체의 존재들은 존재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장들과 그곳의 학자들의 손에서

 

최초로 본격적으로 삼각함수들이 다루어지기 시작햇고 그것이 하나의 수학의 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기술로 발전이 된 것이지요. 한번쯤은 삼각함수의 sin의 1도와 90도 값에 대하여 0.xxx라니 1이니 하는

 

값들의 표들을 본 적이 잇을 것입니다. 그리스 인들에게는 sin, cos, tan등과 같은 것들은 표에서 정리한

 

값들처럼 대략적인 추정치로써 다루어지고 잇엇으며 도형의 성질에 대한 삼각형의 관계에서 사용이되었고

 

사각형과 오각형, 다각형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이 되었지만, 그것은 굉장히 고전적이었습니다.

 

sin, cos, tan 등의 기호들은 오일러의 논문들에 기초하여 본격적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미분과적분이라는

 

학문에서의 dx, dy, dy/dx와 같은 기호들이나 도함수 f'등과 같은 것들의 기호들은 라이프니쯔의 논문에

 

기인합니다. 아이작뉴턴도 라이프니쯔와 별개로 미분적분에 관하여 논문을 적었으나 그 기호들과 표현들이

 

라이프니쯔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더군요.

 

아무튼,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는 삼각함수의 기호들도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제각각이었으며

 

그 존재 자체는 공통적으로 주관적인 생각에 따라서 달리 보일지라도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거의 통일화

 

된 모습으로 보고 잇습니다. 위의 그림들 중에서, 행성들과의 관계 위치관계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사용이

 

되는 것으로써 천문학에서 사용이 되었고 이는 그리스보다 천문학이 절실히 농업에 사용이되어야만 했던

 

농경국가인 이집트에서 사용이 되었지요. 그랬기에, 삼각주 일대의 대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용이 되어서, 그 기술적 방법들이 보편화되면서 이집트의 천문학에서 영향을 주었던 것이고 그것이

 

시간이 흘러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동설(물론, 다른 저술서들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의 논증기하에서

 

사용이 되었지요.

 

그 다음의 인물로, 가장 큰 인물로 꼽히는 것은 아르키메데스 입니다. 아르키메데스 역시 독특한 인물입니다.

 

그는, 시라쿠스(혹은 시라쿠사라고도 하죠)에서 활동을 한 그리스인이며 역시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서 수학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과학자이자 기술자로써 더 유명하기도 했던 그는, 모든 학문의

 

시조라고 불린 고대 그리스 시대의 학문의 거성이자 학문의 기초를 닦은 인물인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별개로 철학분야가 아닌 과학과 수학, 지리 분야 등에서 주로 활동을 하던 인물입니다. 특히, 이 인물의

 

기술적 분야에서의 눈여겨 볼 것들은 태양의 빛을 최초로 무기로써 사용한 인물로 기록이 되어잇습니다.

 

즉, 그는 태양이라는 무형으로 인식되지만 有한 존재인 태양을 인위적인 매개물을 기준으로 하여 다룰 수

 

있다라고 본 최초의 인물이며 그것은 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와 로마 공화정의 전쟁에서 카르타

 

고가 패하고 거기에 가슴이 울컥한 하밀 카르가 스페인으로 넘어가 세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태어난 유명한

 

천재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한니발의 로마 침공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한니발이 갈리아를 넘어서 북알레스카를 넘어 로마로 북쪽으로 침공하여 본토로 침략하여 로마 군단들을

 

몰살 시키는 일이 있는 지 얼마 안되어, 시라쿠사의 왕 역시 한니발의 손을 빌려서 로마에 대항하는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는 마케도니아의 왕과 함께 로마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로마의 반격에 따른 시카쿠사의

 

침공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돛을 불태우고, 지레의 원리들을 이용한 공사들, 그리고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서 돌들을 멀리 화살보다도 더 멀리 공격하여 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격추시키는 일 등이 그것이지요.

 

그는 연구에 미친 인물이기도 하여, 그리스인 특유의 문화적인 생활들인 극장에 다니고 올리브 음식을

 

음미하며 여행을 다니고, 상공업에 종사하며 세상의 흐름들에 귀를 기울이고, 물질적 풍요의 이로움을

 

풍미하던 인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원의 측정법에 관한 것이나, 혹은 모래가 땅으로 떨어지면서 이루는 원뿔모양의 자연현상들에 대한

 

측정법들, 등의 주제로하여 유클리드와 아폴로니우스의 논문에서의 내용과는 별개로 하여 그 도형들의

 

영역에 대한 탐구를 한 인물이며 입체적인 도형들에 대하여서도 연구를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더 재밌는 사실은, 이러한 연구 자료들을 토대로하여 기술적으로 응용하였고, 부력의 원리들이나 그 외

 

밝혀진 사실들을 자신이 노력할 수 잇는 최대의 노력으로 수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인물이기도 하였지요.

 

이 인물을 기점으로하여, 그리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수학적 증명에 관한 이론적인 이해관게가

 

형성이 됩니다. 에라스토테네스의 지구 측정법들 등등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되겠지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내용이 참 좋네요. 하지만 17세기의 내용 간단하게 18세기의 내용간단하게 이런 식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답변확정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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