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진시황....

작성일 2014.03.26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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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에 대하여 최대한 기~일게 부탁드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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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始皇帝
(시황제)
영(嬴)
조(趙) / 여(呂)
정(政)
출생지 조나라 영자초 사저(私邸)
사망장소 진나라 사구
아버지 영자초(嬴子楚)
생몰기간 음력 B.C. 259년 1월 ~ B.C. 210년 9월 10일(50세)
재위기간 음력 B.C 246년 ~ B.C. 210년 9월 10일


1 개요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 '진나라의 첫 황제'라는 뜻. 본명은 영정(嬴政). 실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나라의 '첫 황제'였을 뿐 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시황제'라고 불릴 만한 인물. 중국사 최초의 먼치킨 군주.

고대 중국의 연, 조, 위, 제, 한, 초 6국을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이후 청나라 멸망까지 약 2000년에 걸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며, 따라서 중국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진시황이 없었으면 가뜩이나 이질적인 중국의 여러 지방이 지금처럼 거대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있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편이나 유학자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대대로 중국의 학자들에게는 그리 좋지 못한 평을 들었다.

또한, 기껏 중국을 통일해놓고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괴롭힌 것과 후계자를 잘못 세워 통일 진나라를 2대 만에 망하게 한 것으로도 꽤 혹독한 평을 듣기도 하였다. 크고 아름다운 토목공사를 좋아해서 아방궁, 만리장성, 병마용갱 등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오쩌둥이 좋아한 인물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일생


2.1 출생과 어린 시절

진시황은 본래 조나라 수도 한단에 볼모로 가 있었던 진나라 왕족인 훗날의 장양왕(莊襄王)이 될 영이인과 그 부인 조씨(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씨는 본래 영이인의 후원자였던 여불위의 첩이었으나 영이에게 바친 여자였다.

진시황의 아버지였던 영이인은 비록 당시 진나라의 왕이었던 소양왕의 손자이며,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아들이었으나, 장남도 아닌데다가 서자였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았다. 덕분에 조나라로 보내져 언제 죽을지도 모를 꿈도 희망도 없는 볼모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불위는 영이인을 만나본 뒤 그를 비범한 인물이라 판단하여 자신의 사재를 털면서까지 후원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영이는 여불위에게 받은 재물을 자식이 없었던 아버지 안국군의 본처에게 보내 환심을 샀으며, 갖은 편지를 보내어 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덕분에 영이인은 안국군 본처의 양자가 되었으며, 영자초(嬴子楚)라는 이름을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영이인은 곧 진나라로 귀국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손에 쥐었고,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왕위에 오르자 진나라 왕과 왕후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신뢰를 얻음으로써 마침내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올랐다. 이 공로 덕분에 여불위는 효문왕이 곧 병사하고 영자초가 장양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로 승상 벼슬을 얻어 진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한편 아직 나이가 어렸던 진시황은 아버지가 진나라로 귀국한 이후로도 어머니인 조희와 함께 조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였으나, 아버지가 곧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오르면서 그 힘을 두려워한 조나라 조정에 의하여 진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


2.1.1 출생 문제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씨는 원래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던 기생인데, 이후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까지 된 것을 보고 원래 진시황은 조씨가 임신했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진시황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를 여정(여불위의 성씨를 따랐을 경우 그의 이름)이라고 낮춰 불렀다.

사실 사마천의 사기에선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는데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진 않았으므로, 현대에는 진나라의 멸망 이후, 진왕조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 부정하는 견해가 주류이다. 사기 안에서 공식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본기 중 한 편인 시황제본기에서는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사기 열전 중 한 편인 여불위열전. 저자인 사마천 자신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료를 위주로 역사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본기부분에서는 시황제를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시황제의 진짜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소문이나 주장이 워낙 거센 터여서 이를 여불위 전기부분에 삽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더구나 열전에서도 사마천은 조씨가 장양왕과 혼인한 뒤 12개월 뒤에 자식을 낳았다고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다들 알겠지만 임신기간은 10개월로 만약 그 이전에 여불위의 자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12개월 후에 그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혼인 후에 사통한 것이라면 몰라도....

사실 사기 안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읽힌 부분은 딱딱한 본기가 아니라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고 스토리의 성격이 강한 열전인 것도 자연히 시황제의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된 것이다. 김팔봉 선생이 동아일보에 1954-55년 연재한 <통일천하>의 도입부에서 이 내용을 극적으로 잘 다루었다.

단행본 기준으로는 1권 도입부로부터 약 1/4가량을 할애했다. 소설이기에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떡밥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드라마틱하게 전개 및 묘사한 탁월한 필치는 가히 일품이라 할 만 하다. 다만 연재시기에서 보듯이 워낙 옛 글이라 요즈음의 감각으로는 읽기에 약간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특히 어문각의 1984년 판본이 추천할 만 하다.

2.2 왕위에 오르다

영자초가 귀국한 이후, 당시 진나라 왕이자 진시황의 증조할아버지였던 진소왕이 사망하였다. 진시황의 할아버지인 효문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3일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를 이어 영자초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었다. 그러나 장양왕이 3년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훗날의 진시황인 영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다.

아직 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시 장양왕의 후원자로써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국(相國)의 직위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는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의 칭호까지 얻었다. 이토록 강력한 권세를 얻은 여불위는 아직 나이가 어린 진시황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여불위의 손 안에 들어갔다.

사기에 따르면 여불위는 상국의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과거에 자신의 첩이었던 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와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했으나 조태후가 여불위를 사랑하여 늘 불러 정을 나누려 했으므로 결국 가짜환관 노애(노대)를 조태후 옆에 붙여 시중들게 하였다.

노애는 정력이 출중해서(...)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로 조태후는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간통이 길어지면서 조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말았다. 노애와 조태후는 아이들을 감추어놓코 키우면서 진시황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략을 꾸몄다.


2.3 왕권을 되찾다 

그러나 진시황이 성인이 되었을 쯤에 이들의 행각은 곧 발각이 되었다. 노애는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진시황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진시황이 곧 창문군과 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수도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는 패하여 달아났다.

노애의 반란군을 무찌른 진시황은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서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인 조태후마저 유폐하였으나,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

노애와 조태후의 스캔들에 깊이 연루된 여불위 또한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선비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한때 왕과 견줄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하였다.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눌러 버린 진시황은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히게 된다.


2.4 천하 통일

상국의 벼슬에 올라 왕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리던 여불위마저 제거한 진시황은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시기 쯤에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나머지 6국을 통합하고 천하를 통일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쯤에 이미 진나라는 중국 대륙에서도 가장 강성한 나라로 거듭나 있었고, 그 우세한 군사력을 앞세워 수백년간 존속되어 오던 이웃 나라들을 차례차례 멸망시켰다. 이후로, 진시황의 치세는 단순한 정복의 나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진시황은 모사인 위료를 만나서 여러 계책들을 받아 들이며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당시 위료는 진시황에게 각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간에 이간질을 시키도록 조언하였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기원전 230년에 장군 등으로 하여금 동진하여 한을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장군 왕전으로 하여금 조나라를 공격해 역시 수도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그리고 뒤이어서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그 다음에 남쪽 배후에 위치한 초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회의 중에 백전노장 왕전은 초나라 정벌을 위해서는 60만 대군이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젊은 장수였던 이신은 이에 반발하며 15만의 군사로도 초나라를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진시황은 이신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치게 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이 도리어 이신을 무찔렀다. 진시황은 결국 뜻을 고쳐 왕전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공격을 감행하여 기어코 초나라를 멸망시키니 223년의 일이다.

또한 연나라의 태자인 단이 형가를 보내어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쳐서 무너뜨렸다. 연나라왕은 태자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진시황은 도망친 연나라 왕을 요동까지 집요하게 추격하였다. 결국 연나라왕이 사로잡히면서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 왕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제위 17년만에 진시황은 중국 전국을 통일하는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그의 나이가 39세였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하면 진시황은 모든 중국을 통일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나라(衛)가 남아있었기 때문. 진시황은 듣보잡 of 듣보잡인 위를 까먹어서 멸망시키지 않았고(...) 2대 황제인 호해가 우연히 위의 존재를 발견하고 멸망시켜 버린다.


2.5 제국의 통치

진은 일찍이 법가를 받아들여 강성한 나라였지만, 이사를 승상으로 앉힌 뒤 진나라는 더욱 철두철미한 법치국가가 되었고, 이 여세를 몰아 그는 10년도 안돼 전국을 통일한다.

그 후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그 칭호를 왕에서 황제로 고치고, 자기가 그 초대 황제가 되어 "진나라는 자기부터 2세, 3세...그렇게 만세를 이어가며, 전 천하를 지배하게 하리라"...는게 그의 목표였다.

그리고 왕이 되고도 한동안 여불위의 그늘 밑에서 지내고, 어머니의 쿠데타까지 겪어서 그런지 절대권력 확립에 집착해 모든 사무를 직접 처리했는데, 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 가량이였다고 한다


2.5.1 업적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은 본격적인 제국 통치 사업에 몰두하면서 갖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는다.

우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전에 주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러한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이 때에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 역사책이나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적들을 없앨 것을 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분서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다. 법가의 지나치게 업격한 법률이 중국 전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엄격한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 6국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과 진시황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할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언제나 중국에 위협이 되어온 북방 민족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길다란 성곽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건설된 성곽에 후세의 여러 나라들이 보수와 확장 공사를 하여 완성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리장성이다.

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중국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문자가 달라 서로간에 교류하는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중국 전역의 화폐와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통일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로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 등도 하나로 통일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통일된 넓은 중국 전국의 통치를 원할히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2.6 말년 

이렇게 통일을 이룬 후, 진시황은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나름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게다가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이 중국 전역의 통치에 이용되면서, 각지에서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가 이어지게 되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까다로운 법률과 무거운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은 피폐해져만 갔다. 이는 곧 진시황 사후에 진나라를 멸망케 한 농민반란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또 진나라에는 군공수작제에 따라 20 여 단계의 작위가 있었는데, 바로 수급 하나당 하나씩 올려주는 그 계급이다. 이 계급에 따라, 혹은 계급 강등으로 형벌을 대신하거나 완화받을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나라 사람들이야 지난 정복전쟁에서 쌓은 군공과 계급이 있지만, 정복당한 육국의 백성들은 당연히 군공수작제의 작위가 없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육국의 백성들은 진나라 백성들과 달리 가혹한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차별받게 되었다.

진시황 개인적으로도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로불사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갖은 사기를 당하며 재정을 낭비하였다. 특히 서복이라는 사기꾼이 동해바다에 살고 있는 신선에게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며 뻔히 보이는 구라를 치자 진시황이 이에 넘아가 서복에게 엄청난 양의 재물를 딸려보내 주었던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기꾼들이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겠다면서 진시황에게 돈을 뜯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진시황은 늘 속아넘어갔다.

말년에 접어든 진시황은 제위초에 전쟁 수행 과정과 정책 수행 과정 등에서 보여주었던 냉혹하면서도 총명했던 기질은 거의 잃어버린채 갖은 삽질만을 계속하였고, 결국 전국을 순행하던 여행을 하다가 BC 210년 7월 사구(沙丘;河北省 平鄕縣 부근)에서 병으로 죽어버린다. 이때의 나이가 약 50세 정도.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최초로 황제의 칭호를 썼던 진시황은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다. 잠시만, 그때 그 시절에 50대면 오래 산 편 아니야? 수은 퍼 먹었다매

그가 죽은 이후에 아들 호해가 뒤를 위어 2세 황제로 즉위한다.


3 평가 

비록 진시황이 말년에 폭정하여 기껏 통일해놓은 진나라를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최초로 중국 전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놓은 진시황의 업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건설된 운하는 이후에도 역대 왕조를 거쳐가면서 점차 확장되어가 오늘날까지도 수로 교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이며, 문자와 도량형, 화폐 등을 통일함으로써 수백년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문화가 이질적으로 발전한 각지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수백년간 갈라져있던 중국이 하나의 정부 아래에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존재하지 못했고 오히려 유럽처럼 많은 나라들이 들어서게 되어 역사가 완전히 변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현재 중국에서는 굉장히 띄어 주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과 중국 한족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잘 어울려 거의 국가 차원으로 띄워주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말년으로 갈수록 벌연 갖은 폭정, 병크와 숱한 실책들은 그냥 까이고 있는 듯(...). 애초에 진시황이 그렇게 밀어 붙였던 법가 사상 자체의 단점 중 하나인 '법은 함부로 바뀌어선 안된다.'는 사상으로 인해 전징시대에나 맞았던 법률을 계속 이어간 문제점도 있고


3 평가

비록 진시황이 말년에 폭정하여 기껏 통일해놓은 진나라를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최초로 중국 전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놓은 진시황의 업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건설된 운하는 이후에도 역대 왕조를 거쳐가면서 점차 확장되어가 오늘날까지도 수로 교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이며, 문자와 도량형, 화폐 등을 통일함으로써 수백년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문화가 이질적으로 발전한 각지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수백년간 갈라져있던 중국이 하나의 정부 아래에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존재하지 못했고 오히려 유럽처럼 많은 나라들이 들어서게 되어 역사가 완전히 변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현재 중국에서는 굉장히 띄어 주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과 중국 한족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잘 어울려 거의 국가 차원으로 띄워주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말년으로 갈수록 벌연 갖은 폭정, 병크와 숱한 실책들은 그냥 까이고 있는 듯(...). 애초에 진시황이 그렇게 밀어 붙였던 법가 사상 자체의 단점 중 하나인 '법은 함부로 바뀌어선 안된다.'는 사상으로 인해 전징시대에나 맞았던 법률을 계속 이어간 문제점도 있고


4 그 외에

4.1 몰락의 징후

진시황의 비정상적인 외모와 말년에 보인 정신 착란 증세가 사실 수은 중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수은은 소량 섭취시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지는 효과가 있어 진시황은 이를 불로장생 약으로 믿게 되었던 것. 당시 '수은'은 아주 귀해서 금, 은 같은 귀금속과 같았는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전국의 수은을 모아 수은 연못을 만들어 놓고 수은을 먹고 얼굴에 발라 결국 수은 중독에 이른다.

참고로 순수한 수은은 인체에 거의 흡수되지 않는데, Discovery 채널의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수은 흡수를 위해 수은과 다른 소화 가능함 물질을 혼합한 것을 만들었다는 추측이 나온다.

게다가 말년에 들어 심신이 쇠약해진 진시황은 기이할 정도로 미신에 집착하게 되었고 위에 보듯이 '망진자호야'라는 점괘를 철썩같이 믿어 '만리장성'을 쌓는다든가, 꿈 속에 나온 홍의동자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거라는 해몽을 믿고 순행길에 올랐다가 병사하는 등 미신에 푹 빠져 버린다.

이 정신 이상적인 모습은 수은 중독으로 인한 심각한 뇌 손상이라는 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70년대 일본에서 수은 함량이 높은 생선을 오래 먹고 미나마타병으로 상당수가 죽어 나간 흑역사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은 간접 섭취가 아닌 아예 대놓고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 마라 더더욱 무서운 건 수은을 끊어 버리면 금단 증상으로 몸에 엄청난 고통이 오게 되어 더더욱 수은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은은 식품이 아닌 주제에 금단 증상까지 있는 무서운 물질이다. 아니... 요즘 시대에도 이런 미친 짓하고 50세 가까이까지 살겠다는 거 자체가 사치다. 이런 미친 짓할 사람도 없겠지만 근데 그러고도 그 때 그 시절에 50대까지 살았다(...). 뭥미? 수은 안 퍼 마셨으면 100살까지 살았을 기세

그의 유서에 의해 후계자로 부소란 멀쩡한 아들은 사형시키고, 호해란 별 병신 껍쩍데기한테 제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나라가 작살나 버렸다. 결국 정복과 나라 경영은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란 것을 보여주는 케이스. 단, 사실 저 유서는 호해를 황제로 내세워 정권을 잡으려던 이사와 조고 등의 측근이 위조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사기 등에 이렇게 나와 있기 때문에 일단 정설이기는 한데, 문제는 그 측근들이 설사 정말로 유서를 위조했다 하더라도 대체 그들이 유서를 위조했는지 여부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냥 흔히 떠돌던 낭설을 2세 황제의 바보짓 때문에 시황제같은 사람이 정말 2세황제를 후계로 삼았을 리가 없다고 여긴 사마천이 믿어 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사마천이 이 기사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들 호해와 관련되어 한 가지 민간 설화가 있는데 '진나라는 호에게 멸망할 것이다(망진자호야, 亡秦者胡也)'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아 진시황이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죽어라 쌓았으나 이민족(胡)이 아니라 호해에게 망하고 말았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중국에 진시황릉과 병마용이라는 거대한 세계문화유산을 남겨줬다.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사실 만리장성은 진시황 사후에도 계속해서 건축되어 송나라 대에야 겨우 완성되었고 아방궁은 아방궁터로 알려졌던 유적을 조사 결과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완성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 존재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4.2 분서갱유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건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여, 전근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만세의 적 취급을 당해왔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분서갱유라는 사건 자체가 유학자들에 의해 다분히 부풀려졌으며, 한편으로 굳이 진시황 개인의 폭정 문제를 꼽지 않더라도 일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항목 참고.

4.3 용모 ¶

중국의 한 논문에 따르면, 진시황은 초상화와 달리 선천적인 병으로 인해 어렸을 때의 외모가 추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꺼려했고, 특히 화려함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가 되었을 거라고.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탓에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배우지 못했을 텐데, 이게 그의 정신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줘서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래서 뭔가 이루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중국통일을 이루거나, 만리장성 축조 등 큰 규모의 건축을 계획하게 된 거라는 것이 이 논문의 주장이다.
이 주장을 믿는다면 진시황은 소질 있는 아이가 타고난 외모랑 안 좋은 환경 때문에 비뚤어진 케이스란 결론이 나온다. 그런 케이스가 적지 않은 만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사마천은『사기』에서 시황제를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했으며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같은 자라고 혹평을 아끼지 않는다.

4.4 암살 위협 

의심이 많고 불로불사에 집착하게 된 것은 살해 위협을 받았을 때 겪은 일이 결정적이라는 설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형가의 암살미수. 연나라의 자객 형가가 암살을 하려고 칼을 휘두르는데도 국법으로는 황제의 명 없이는 황제가 있는 단에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다들 쩔쩔 매는 와중이었다. 다행히(?) 의관 하무저(夏無且)가 약 봉투를 던져 형가의 시야를 교란시키고 좌우 신하들이 검을 등에 지고 뽑으라고 조언하여 형가를 죽였다.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서는 진시황은 수염나고 이렇게 고생한건 처음이라고 말한다.

암살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 형가의 친구 고점리는 현악기인 축을 매우 잘 탔는데, 이미 의심을 충분히 하고 있던 진시황은 단지 축만을 듣기 위해서 고점리의 눈을 제거한다. 고점리는 궁정 악사 생활을 계속하다가 어느날 축에 납을 넣어 무겁게 만든 후 진시황이 있는 방향으로 그것을 던지지만 실패하고 죽게 된다. 이 이후 진시황은 타국 출신 인물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밖에 진시황은 순행 도중 훗날 한고조 유방의 책사가 되는 장량이 사주한 장사의 암살 미수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당시 진시황은 경호를 위해 세 개의 수레를 똑같이 만들어 그 중 하나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장사는 가운데 수레를 박살을 냈으나 진시황은 세 번째 수레에 타고 있었고 따라서 암살은 실로 끝나게 된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진시황은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다.


5 그 외 

쵸소카베 모토치카로 유명한 센고쿠시대 시코쿠에 기반을 둔 쵸소카베 가문이 진시황의 후손을 자처했다. 정확히는 일본 고대 씨족인 하타씨(秦氏)의 자손을 일컬은 것인데, 이 하타씨의 시조가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일컫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족보가 다 그렇듯이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 근데 도사모노가타리라는 책에 따르면 모토치카 자신은 신라인의 자손임을 자랑했다고 한다. 뭐가 진실인지는....

진시황이 개쩌는 이유

진시황의 업적들 좀 구체적으로 나열해주세여 특히 잘 안알려진 업적 같은거요 진시황은 너무 알려진 유명한... 분서갱유가 진시황이 미쳐서 벌인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시황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

진시황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 결혼하는 방법 알려주세요 내공 1000000 진시황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계를 따라야 합니다. 첫째, 진시황과 친해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진시황에게 질문한다면

진시황에게 만약 인터뷰를 하며 질문을 한다면 무슨 질문을 해야할까요..??춘추전국... 분서갱유 자체만 보면 진시황이 무식한 인간 같은데 진시황의 치적을 보면 절대 무식한...

진시황이 폭군이었다지만...

진시황이 폭군이었다지만 분서갱유만큼은 잘했다고... 분서갱유 진시황의 분서갱유 정책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고... 진시황은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해결하고 제국의 안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