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대하여..

이집트에대하여..

작성일 2012.10.31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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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학교 정보시간인데 이집트에대하여 좀 빨리 알려주세요 ㅠ

수행평간데 잘 못하겟네요

이집트에대한 모든것들좀 알려주세요^^

모두다.

......최대한 빨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될수있으면 국기도 ㅇㅇ

 

성의없는답변,이상한답변 신고합니다

빠이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집트에 대한 모든 것

 

현재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이집트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가 다 있습니다.

참고하기 바랍니다.

 

이집트 국기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이집트 아랍 공화국이다.

  • 위치

    아프리카대륙 북동부

  • 경위도

    동경 30° 00

  • 면적

    1001450

  • 해안선

    2450

  • 수도

    카이로

  • 종족구성

    이집트인 (98%), 베르베르인· 누비아인· 베두인· 베자인 (1%)

  • 공용어

    아랍어

  • 종교

    이슬람교 (90%), 콥트교회 (9%)

  • 건국일

    1922년 02월 28일

  • 국가원수/국무총리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Mohamed Hussein Tantawi, 최고군사위원회의원장)

  • 정체

    공화제

  • 통화

    이집트 파운드(£E)

1.이집트의 기후

대부분 건조기후입니다.나일강 연안과 지중해 연안 좁은 해안지방을 제외하고

국토 대부분이 사막 기후죠.내륙으로 갈수록 건조한 정도가 심해집니다.

(리비아 사막 일부는 비가 내리지 않음)그래서 나일강으로 관개 용수를 얻죠.

계절 구분은 1년을 여름과 겨울로 나누는데,4월~10월은 고온에 공기가

건조한 하계이고,11월~3월의 동계는 일교차가 상당히 큽니다.(사막에선 일교차가

50도 이상)환절기에는 모래를 동반한 열풍,함서라고 부르는 고온의 열풍이

남서쪽에서 저기압 진행으로 불어옵니다.겨울에는 지중해에서 북풍이 불어

소량의 비가 이때 내립니다.

2.이집트의 인구
약 6,524만명


3.이집트의 면적
99만 7690㎢

4.이집트의 예절및 유의점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이므로 이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 이슬람교를 비난하는 행동이나 언사를 하지 말아야 하고 이슬람교 여성들과는 대화를 자제해야 한다.
• 날고기나 돼지고기를 공공장소에서 먹지 말아야 한다.
• 이집트는 개방된 ISLAM 국가이나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많은 여성들이 HIJAB(차도르)를 사용,얼굴을 감추고 몸의 노출을 꺼리는 실정임을 감안, 사진 촬영은 주의를 요한다.
• 무슬림은 1일 5회 예배를 실시하는 바, 예배중인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실례임.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관광차 모스크에 들어갈 경우 정숙이 요망된다.
• 이슬람교의 금식기간인 라마단 기간(약 1개월)중에는 외국인도 낮에는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식음 등을 삼가 하는 것이 요망된다.



5.인종및 민족
원주민 햄족이 99%이며 이들과의 혼혈이 생겼으며 지중해 연안에는 유럽인과의 혼혈인이 많다.

6.종교
이슬람교(순니파) 95%

7.언어
아랍어

8.생활모습(의식주)
이집트는 카이로 부근 룩소르 및 아스완 부근의 유적보호와 관광자원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유적 중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어 피라미드를 건조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타바에서 발전된 것이다.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最古)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조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또 오벨리스크(obelisk)는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며 태양신 신앙과 관계 있다. 문화의 꽃은 언어라 할 수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들 수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0년을 전후하여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최근의 발견으로 이집트에서 먼저 상형문자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세금에 관계된 것이어서 최초의 문자는 역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고대문화의 발달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고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의 발달도 아랍 세계에서 가장 앞서며 문학·미술·무용·연극·영화 등의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것과 현대작품이 공존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9.정치제도
이집트는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과밀한 나라 중 하나이다. 농촌의 잠재실업자와 도시의 실업자는 상당한 수에 이른다. 각지에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고, 하루 5회의 예배와 단식월(斷食月:라마단)의 준수 등 주민의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이집트인들의 생활양식과 풍습에 이슬람 문화의 종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남녀격리의 습관·남존여비의 경향 등이 있으며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었으나 국민생활의 근대화와 더불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농촌지역에는 고대의 가족제도가 있고, 메카 순례자를 존경하는 등 아직도 이슬람의 계율이 충실히 지켜진다.

이집트는 아랍세계의 교육·문화의 중심으로 아즈하르대학과 같은 10세기 이래의 이슬람학술의 본거지와 가장 새로운 교육·문화시설도 있다. 6∼12세까지는 의무교육이고 학비는 국가가 부담하지만 문맹률은 40%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은 아즈하르대학 외에 카이로·알렉산드리아·아일샴 대학 등이 있고, 카이로에 미국계의 아메리칸대학이 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유물을 보존·관리하는 박물관과 연구기관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10.가족제 및 가정생활
11.교육제도
12.경제및 화폐
국민총생산량 : $713억(1996) (1인당 $805)
계획및중점정책 : 낫셀에 의해 답변확정된 사회주의헌법(1971년) 병폐에 따른
계속적인 경제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환율현실화, 공공기업축소, 민간분야 확대등 경제개혁 추진 주요자원 : 석유(매장량 34억배럴, 일산 86만배럴), 인광석(년간 1.6백만톤,
국내소비 50만톤), 철광석(년 140만톤, 전량국내소비)
무역(1996) : 수출 $ 47억불, 수입 $136.8억불


13.청소년의 생활
14.문화(청소년 문화)
15.여성의 생활 모습
16.산업
17.역사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BC 2925년경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통일되었는데, 이는 메네스 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통일로 인해 이집트 문명은 절정기에 들어섰고,이후 약 3,000년 동안 본토 출신들이 계속해서 지배자의 위치를 이어갔다. 역사가들은 31개 왕조에 걸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의 고대사를 고왕국·중왕국·신왕국으로 구분한다.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유산이며,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제국시대와 유대인의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아시리아의 침략은 BC 7세기에 일어났으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것은 BC 525년이었다.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으로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이 왕조시대에는 이집트의 통치자들이 헬레니즘 세계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시는 헬레니즘뿐만 아니라 셈족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머지 않아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최고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구심점이 되었다. 로마인은 BC 30∼AD 395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그 후 이집트는 행정적으로 동로마 제국(뒤의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관용령을 내림으로써 이집트의 공식 교회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오리게네스·클레멘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활동 무대였다.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비잔틴 군대가 아라비아의 침략군과 3년의 무력 충돌 끝에 이집트에서 철수한 642년에 끝이 났다. 그후 200∼300년 내에 이집트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바뀌었고,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집트는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일부였다.

이집트는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1922년 명목상의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52년 쿠데타로 군주제가 타도되고,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2,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최초의 이집트 본토 출신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잠시나마 시리아 및 예멘과의 연방 수립을 시도했으며,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다. 1956,1967년에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엘 사다트는 나세르가 시행했던 강도 높은 사회주의 정책의 일부를 파기하려 했으며,또한 이스라엘을 공격해(1973) 시나이 반도의 작은 영토를 되찾았다. 그후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81년 10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밑에서 부통령직을 맡고 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그뒤를 계승하여 사다트의 평화주도정책을 계속했으며,1982년 이집트는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했다
18.유명한 물건

피라미드,파라오,스핑크스..
19.주요도시
이집트의 위치는 아프리카 대륙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은 지중해,동쪽 은 홍해,서쪽 은 리비아,남쪽이 수단과 인접한 정방형부분과 시나이 반도로 구성되어있다.
사막, 습지, 산악이 97.1%를 차지하고 있고, 나일강 하구와 그 유역의 삼각주평야, 수에즈 운하 연안, 사막지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나일강 하곡과 삼각주평야를 형성하는 나일강은 에티오피아 고원에서발 원한 청나일과 아프리카 중동부 빅토리아호에서 발원한 백나일에 합류하여 6,671㎞를 흘러 지중해로 유입되는 대하천이다.
아스완 이하의 사막지대를 흐르는 외래하천으로 대부분의 지류가 이집트 국내에 있다. 아스완에서 카이로까지는 양측에 사막으로 된 절벽을 끼고 좁은 충적지를 띠모양의 하천이 흘러가고 있다. 삼각주평야는 카이로에서 그 하류 일대에 약 24,000㎢의 면적으로 전개되는데, 이 하천이 운반, 퇴적한 물질로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이 삼각주평야와 나일강 하곡평야는 곡창지대로 인구조밀지역이다. 근래에는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였고, 아스완 남쪽에는 공호인 나세르호가 생겨 사막지방의 관개를 통해 개발을 서두르고있다. 나일강은 농부뿐만이 아니라 온 이집트인들의 생명선인 젖줄이다.
나일강 동쪽에는 마자고원, 갈랠라, 키블 리아 산지 등이 발달해있다. 이곳은 결정질의 암석과 석회암으로 된 단조로운 고원과 대지가 남쪽 에티오피아 고원으로 이어져 발달해 있다. 이 고원 남부에 하매타 산지가 남서쪽으로 점차 높아져 표고 1,900m 정도에 이른다. 홍해 안쪽은 바다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해안을 따라 가느다란 해안평야가 발달해 있다. 홍해의 수에즈만과 아까바만 사이에 삼각형모양의 시나이 반도가있다. 사막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불모의 지역이나 석유자원이 매 장되어 있어 이집트 경제에 지대한역할을 한다.
시나이 반도와 본토 사이의 수에즈지협 저대에는 한 무리의 호수들이 발달해 있다. 나일강 서쪽은 사막으로 되어 있어 파이윰 저지·카타라 저지 등에 분포한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거의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하다. 이런 자연적인 물 이외에 샘을 파서 오아시스 관개농업에 이용한다. 집약적인 농경지가 발달하여 인구 밀도가 매우 높다.


20.우리나라와의 관계
대한관계

이집트는 1963년 8월에 북한과 수교하였고, 한국과는 1995년 4월에 수교하였다. 1967년, 1975년 중동전쟁 때 북한의 군사지원으로 친북한 외교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1970년 중반 이후 이집트의 문호개방정책으로 외교관계로 발전, 1980년대 이후 실질 협력 관계를 수립하였다. 1999년 2월 총리 김종필의 이집트 방문 후 4월에는 대통령 무바라크의 방한으로 양국관계가 더욱 진전되었다.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항공협정, 1989년 문화·과학·기술협력협정, 1997년 투자보장협정, 1998년 무역협정, 1998년 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에는 과학기술양해각서, 외교연구원간 협력의정서에 서명하고 원자력협력의정서에 가서명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수입 5억 1590만 달러, 대한수출 2억 597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납사, 동 및 합금, 원유 등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및 부품, 일반기계, 직물 등이다

 

 

 

 

자세한 내용

 

 

I. 이집트 개관 1

II. 이집트 정세 2
1. 정치정세 2
2. 경제정세 8
3. 대외관계 17

Ⅲ. 한·이집트 관계 23
1. 한·이집트 기본관계 23
2. 한·이집트 경제통상관계 24
3. 주요인사 교류현황 28
4. 영사·교민관계 32

Ⅳ. 이집트·북한 관계 34
1. 대북한 기본인식 34
2. 관계연표 34
3. 인사교류 현황 35
4. 협정체결 현황 36
Ⅴ. 참고사항 37
1. 주요인사 인적사항 37
2. 주요연락처 43
3. 이집트관련 웹사이트 46

Ⅵ. 부록 49
1. 여행정보 49
2. 이집트 약사 59
3. 이집트 종교 66




ㅇ 국 명 : 이집트아랍공화국(The Arab Republic of Egypt)
ㅇ 수 도 : 카이로(인구 약 1,600만명)(2003. 1)
ㅇ 면 적 : 100.1만㎢(한반도의 5배, 전국토 95% 사막)
ㅇ 인 구 : 6,800만명(2003. 1)
ㅇ 민 족 : 이집트인, 베드윈,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된 햄족이 99%,
그리스, 누비안, 아르메니아인 등 소수민족 1%
ㅇ 종 교 : 수니파 회교(93.7%), 콥틱교(6.3%)
ㅇ 언 어 : 아랍어(공용어), 영어 및 불어 통용(지식층)
ㅇ 정부형태 : 대통령중심제
ㅇ 국가원수 : Mohamed Hosni Mubarak
ㅇ 총 리 : Atef Muhammad Ebeid
ㅇ 외무장관 : Ahmed Maher
ㅇ 의 회 : 국민의회(임기 5년, 454석), Shura Council(임기6년, 264석)
ㅇ 경제규모 (2002/2003 회계연도)
- GDP : 688억불
- 1인당 GNP : 1,012불
- 무역규모 : 수출 70억불, 수입 158억불
- 대외부채 : 283억불
- 주요자원
· 원유(매장량 35억배럴, 생산 78만 B/D)
· 천연가스(매장량 43조 입방피트)
· 원면(세계 2위 생산국)
ㅇ 교 육 : 의무교육 9년, 문맹률 약 50%
학제(초등6년, 중등3년, 고등3년, 대학4년)
ㅇ 독 립 일 : 1922. 2. 28(영국으로부터 독립)
ㅇ 국 경 일 : 1952. 7. 23(낫세르 혁명기념일)
ㅇ 근무시간
- 공공기관 : 토∼목(금요일 휴무) 09:00∼14:00
- 은 행 : 일∼목(금,토 휴무) 09:00∼14:00
- 상 점 : 대부분 일요일 철시, 일부 상점 금요일 12-15시 철시
ㅇ 시차 : GMT + 2시간(한국보다 7시간 늦음)
5∼9월 Summer Time 기간중에는 한국보다 6시간 늦음.


1. 정치정세

가. 정치체제
ㅇ 대통령 중심제에 내각책임제 요소를 가미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형태

(1) 대통령
ㅇ 임기 : 6년, 연임가능(Mubarak 대통령 81.10 취임후 99.10.5 제4기 연임, 2005년까지 임기)
ㅇ 권한 : 의회해산권, 비상조치권, 헌법개정안 및 국민투표 발의권, 총리 및 각료임명권 등
ㅇ 선출 : 국회재적 의원수 1/3이상으로 입후보자 지명, 동 재적의원수의 2/3이상 지지 획득한 지명입후보자를 국민투표로 확정
ㅇ 대통령 유고시 국회의장, 대법원장 순으로 대통령직 대행

(2) 국민의회(People's Assembly)
ㅇ 의원임기 : 5년
ㅇ 의 원 수 : 454명 (전국 222개 선거구에서 각구 2명씩 선출,
이중 1명은 노동자 또는 농민대표)
- 상기중 대통령 임명 케이스 10명 포함
ㅇ 권 한 : 입법권, 일반국가정책 승인권, 국가경제사회 개발계획 및
국가예산 승인권, 대 행정부 견제권
ㅇ 의 장 : Ahmed Fathi Sorour
ㅇ 선 거 : 2000.10-11월 총선실시

※ 2000년도 국민의회 선거결과(2000.10-11월 실시)
① 지역사정 및 효율적 관리를 위해 3단계로 구분실시
- 제1단계(10.18-24, 9개주) 148명 선출
- 제2단계(10.29-11.4, 9개주) 134명 선출
- 제3단계(11.8-14, 9개주) 162명 선출

② 2000. 11월 총선결과
- National Democratic Party (국민민주당) 388석
* 1995년 총선시 434석
- Independents (무소속, 단 Muslim Brotherhood 소속 17명 포함) 37석
- 여타 정당 17석
- 당선 미결정(소송계류중) 2석
③ 특징
- 기존 중진의원 및 집권당 간부 상당수 낙선
- 무소속 및 이슬람권 신진인사 대거진출
- 집권당 당선률 저조이유는 경기침체 및 이·팔사태 관련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인데 대한 국민불만표출

(3) Shura(Consultative) Council
ㅇ 기능 : 대통령과 의회에 대한 자문역
ㅇ 자문사항
- 헌법개정 제안사항
- 헌법내용을 보완하는 법 초안
· 사회·경제개발계획 초안
· 국가의 영토와 주권에 영향을 미치는 평화조약, 동맹 및
제조약
· 대통령이 의회에 회부하는 법안
· 국내정책 또는 아랍 및 외교에 관한 대외정책으로 대통령이 의회에 회부하는 모든 사항
ㅇ 구성 : 264명
- 1/3은 대통령이 지명
- 2/3는 88개 선거구에서 각 2명씩 직선에 의해 선출(이 가운데 절반은 노동자 또는 농민출신)
* 2001. 5-6월 중간선거 실시로 재적 1/2 개선(NDP 압승)
ㅇ 임기 : 6년(매 3년마다 1/2이 지명과 선거로 교체)
ㅇ Shura Council 의장 : Moustafa Kamal Helmy

(4) 정 당
ㅇ 복수정당제로서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 : 집권당), 신와프드당(New-Wafd Party), 알타감무당(Al-Tagammu Party), 나세르당(Nasserist Party), 아흐라당(Ahrar Party), 국민진보연합당(National Progressive Unionist Party), 사회주의노동당(Socialist Labour Party)등 16개의 정당
(5) 사법부
ㅇ 사법부 제도 : 헌법상 법원과 재판관의 독립성 부여
ㅇ 조직 : 3개 기관으로 구성
- 법원(Primary Courts)
- 항소법원(Administrative Judiciary)
- 대법원(The Supreme Court of Appeal or Cassation Court)

(6) 이집트 각료명단(2004. 7 현재) : 34개 부처
ㅇ 총리(Prime Minister)
- Dr. Ahmed Mahmoud Mohamed Nazif
ㅇ 국방부장관(Minister of Defence and Military Production)
- Field Marshal Mohamed Hussein Tantawi
ㅇ 공보부장관(Minister of Information)
- Dr. Mamdouh El-Beltagi
ㅇ 외교부장관(Minister of Foreign Affairs)
- Ahmed Ali Abul-Gheit
ㅇ 법무부장관(Minister of Justice)
- Mahmoud Abu El-Leil Rashed
ㅇ 문화부장관(Miniter of Culture)
- Farouk Abdel Aziz Hosni
ㅇ 교육부장관(Minister of Education)
- Dr. Ahmed Gamal Eddin Moussa
ㅇ 산업통상부장관(Minister of Industy and Foreign Trade)
- Rashid Mohammed Rashid
ㅇ 농업부장관(Minister of Agriculture and Land Reclamation)
- Ahmed Abdel-Moniem El-Laithy
ㅇ 상원담당 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for Shura Council Affairs)
- Dr. Mofied Shehab
ㅇ 하원담당 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for People's Assembly Affairs)
- Kamal Al-Shazli
ㅇ 관광부장관(Minister of Tourism)
- Ahmed Amin Al-Maghrabi
ㅇ 행정개발담당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for Administrative Development)
- Ahmed Mahmoud Othman Darwish
ㅇ 주택부장관(Minister of Housing, Utilities & Urban Communities)
- Dr. Muhammed Ibrahim Sulieman
ㅇ 노동부장관(Minister of Manpower and Immigration)
- Ahmed El Amawi
ㅇ 종교재산부장관(Minister of Waqfs(Endowments))
- Dr. Mahmoud Hamdy Zaqzouk
ㅇ 고등교육과학부장관(Minister of Higher Education and Scientific Research)
- Dr. Amr Ezzat Salama
ㅇ 수자원부장관(Minister of Irrigation and Water Resources)
- Dr. Mahmoud Abou Zeid
ㅇ 내무부장관(Minister of Interior)
- Habib Ibrahim El Adly
ㅇ 지역개발담당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for Local Development)
- Abdul Rahim Shehata
ㅇ 사회보장부장관(Minister of Social Affairs and Insurance)
- Dr. Amina Muhammad El-Guindi
ㅇ 방위산업담당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for Military Production)
- Dr. Sayed Abdou Moustafa Mesh'al
ㅇ 청년부장관(Minister of Youth)
- Anass Ahmed Nabih El-Fiqqi
ㅇ 조달부장관(Minister of Supply and Internal Trade)
- Dr. Hassan Ali Kheder
ㅇ 재무부장관(Minister of Finance)
- Dr. Youssef Boutros Ghali
ㅇ 정보통신부장관(Minister of Communication and Information Technology)
- Dr. Tarek Mohamed Kamel Mahmoud
ㅇ 석유부장관(Minister of Petroleum)
- Amin Sameh Samir Fahmi
ㅇ 투자부장관(Minister of Investment)
- Dr. Mahmoud Safwat Mohieddin
ㅇ 기획부장관(Minister of Planning)
- Dr. Othman Mohamed Othman
ㅇ 전력·에너지부장관(Minister of Electricity and Energy)
- Dr. Hassan Ahmed Younes
ㅇ 국제협력담당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 Dr. Fayza Abul Naga
ㅇ 환경담당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for Environment Affairs)
- Magid George
ㅇ 보건인구부장관(Minister of Health and Population)
- Dr. Mohamed Awad Tageddin
ㅇ 민간항공부장관(Minister of Civil Aviation)
- Ahmad Shafiq
ㅇ 교통부장관(Minister of Transportation)
- Dr. Essam Abdel-Aziz Ahmed Sharaf

참고 : 지방 정부(26개주)
ㅇ Ad Daqahliyah, Al Bahr Al Ahmar, Al Buhayrah, Al Fayyum,
Al Gharbiyah, Al Iskandariyah, Al Ismailiyah, Al Jizah, Al Minufiyah,
Al Minya, Al Qahirah, Al Qalyubiyah, Al Wadi Al Jadid,
Ash Sharqiyah, As Suways, Aswan, Asyut, Bani Suwayf, Bur Said,
Dumyat, Janub Sina, Kafr Ash Shaykh, Matruh, Qina, Shamal Sina,
Suhag


나. 국내정세

(1) Mubarak 대통령 정부의 정치적 안정유지
81. 10 Sadat 대통령의 피살로 대통령직(임기 6년) 취임
87. 10 재선 및 93.10월 3선, 99. 10월 4선
- 군부지지를 확보하고, 이슬람교 과격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 정치적 안정 유지
- 걸프전(1991) 참전에 따른 이집트의 외교적 성과 거양
.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의 대규모 원조수혜 및 외채탕감
. 이집트의 경제 및 정치 안정 강화에 기여
- 중동평화 협상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 수행
- 온건 친서방 비동맹 외교노선 견지
비상계엄법 존속 : 81.10. 이래 계속 시행중(1994년부터 3년 단위로 효력연장)
- 2003.6-2006.5간 비상계엄법 연장안 2003.2 국회통과

(2) 이슬람 과격세력에 대한 정부의 진압
이슬람 과격세력 발생요인
- 종교적 요인 : 서구영향거부 및 회교원리에 따른 국가통치를 요구 하는 원리주의 세력 영향
- 경제 사회적 요인 : 빈부격차 및 빈곤.실업 등에서 나타나는 계층간 대립, 정부에 대한 불신
- 외부적 요인 : 이란 이슬람혁명 성공, 1만명 이상의 아프간 내전 참전으로 원리주의 세력의 전투 경험 축적 및 이란, 수단 등으로부터 원리주의 세력에 대한 재정적 지원

이슬람과격세력 활동 현황
- 최대 야당세력인 Muslim Brotherhood, Gamma Islamiya, Jihad 등 3대 회교 원리주의 그룹이 있으나 현재는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못하고 있으며 정당 결성등을 통한 정치일선 복귀도 추진
- 이집트정부는 2003.6 Muslim Brotherhood 지도자인 Maamoun Hodeibi가 정당설립과 위성TV채널 보유계획을 발표한 후, 동 그룹조직원 11명과 Gamaa Islamiya 조직원 23명을 2003.6-7월에 걸쳐 체포
2. 경제정세

가. 대외 경제동향

ㅇ 이집트는 유럽과 중동·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을 활용, 투자유치와 무역확대를 위해 노력중
ㅇ 지역협력을 위한 양자·다자간 협정체결 및 관련조치 추진
- Egypt-EU Partnership Agreement(2001.6월 서명, 2003.3월 이집트의회 비준, EU측 비준절차 진행중)
- Egypt-US Trade and Investment Framework Agreement(1999 서명)(이집트-미국간 FTA 추진문제 논의중)
- 아랍연맹 회원국간 관세감면·철폐조치를 1998.1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중
- COMESA(남동아프리카공동시장) 회원국(1998 가입)으로서 역내국가간 관세를 2004년까지 철폐 예정

나. 최근 국내 경제상황

ㅇ Ebeid 총리 내각 (99.10 출범)의 경제정책 재평가, 외환유동성 부족과 환율의 급상승, 9.11테러이후 지역정세 불안으로 인한 관광경기의 침체 등으로 2001/2002 회계연도의 경제성장은 2.5%에 그침.
ㅇ 2002/2003 회계연도 기간중 성장률은 3.1%를 기록하여 전년도 대비 다소 호전되었으나, 본격적인 경기회복은 2005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임
- 현 내각의 잦은 경제운용 실패와 부적절한 정책수립으로 경제의 전반적인 여건이 악화되어 장기적인 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상태
< 이집트의 경제지표 >




자료원 : MEED, EIU종합


다. 분야별 경제상황

(1) 수출입동향
ㅇ 2001년이후 정부의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환율의 급등, 고유가의 지속으로 수출여건이 호전되어 2002/2003년도에는 전년대비 20% 이상의 수출 신장세를 보이고 있음.
ㅇ 한편 만성적인 외환부족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수입규제 정책과 외환통제, 국내경기의 침체로 인하여 수입수요는 정체 내지 소폭 감소 추세

< 이집트의 대외교역 현황 >
(단위: 억US$)
자료원 : MEED



< 주요국별 수입현황 >

(단위: 백만US$)

자료원 : 이집트 통계청


< 주요국별 수출현황 >


(단위: 백만US$)
자료원 : 이집트 통계청




< 주요품목별 수입현황 >

(단위: 백만US$)

자료원 : 이집트통계청


< 주요품목별 수출현황 >

(단위: 백만US$)
자료원 : 이집트통계청


(2) 외환동향
ㅇ 2001년 9.11 테러사태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유혈분쟁, 2003년 이라크전 발발 등으로 관광수입의 감소, 운하수입, 해외근로자 송금등의 축소와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의 지속으로 외환부족 심화
ㅇ 2000년 3/4분기부터 도입된 밴드변동환율제에 따라 30%이상의 평가절하가 단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외환수급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자 2003년 1월29일을 기해 전격적인 변동환율제를 도입
- 사실상 정부의 환율통제 정책을 포기하고 파운드화의 추가적인 평가절하 용인
- 이에 따라 환율은 불과 9개월 사이에 33%가 상승하는 폭등세를 기록하여 수입 등 무역거래와 물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

<공식 환율변동 추이>
(단위 : 달러)


(3) 민영화
ㅇ 2002년말 현재 민영화 목표 314개 기업중 155개 기업의 민영화 완료
- 민영화 수입은 45.3억불 상당
- 상기 민영화의 여파로 총 15만명의 공기업 근로자가 조기 정년 퇴직
ㅇ 그러나, 민영화 계획은 전반적으로 부진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외국투자가들의 관심의 초점인 Telecom Egypt 통신, 은행, 보험분야의 민영화가 시장상황 악화, 국민정서반대 등의 이유로 계속 연기되고 있으며, 일반 국영기업도 정리해고 곤란, 과다 부채 문제 등의 이유로 인해 외국인 자본유치 확대가 어려운 실정
ㅇ 특히 섬유, 시멘트 등 거대 국영기업들은 적자가 누적되어 자본잠식 상태에 놓여 있어 마땅한 투자자가 나서지 않고 있는바, 부실 공기업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경제현안으로 대두


< 외국인의 대이집트 투자현황(2002년도) >

(단위 : L.E 백만)

(4) 금융시장
ㅇ 96. 6월 금융법 개정으로 은행에 대한 외국인 소유권의 100% 인정, 이집트 파운드화의 외환구좌운용 허용, 이자율 자유화 등 조치를 취함에 따라 금융산업은 매년 30% 이상의 성장 추세
ㅇ 98. 6월 금융법을 재개정하여 외국 투자 유치를 위해 은행에 대한 민간인 소유권의 100% 인정
ㅇ 이집트 은행은 상업은행(28개 업체, 1,241개 지점), 산업 및 투자은행(31개 업체, 150개 지점), 외국 은행 지점 60개 등으로 구분
ㅇ 이집트 상업활동의 60%이상이 4개 국영은행(National Bank of Egypt, Banque De Caire, Banque Misr, Bank of Alexandria)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들 4개 은행은 주재국내 23개 합작은행의 총 지분 24%를 소유
ㅇ 2003년 금융산업의 구조조정과 개혁을 위한 통합금융법안을 제정,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화시키는 한편 금융업에 대한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

(5) 물가동향
ㅇ 경기침체와 정부의 긴축재정으로 지난 몇 년간의 물가는 비교적 안정상태를 유지하였으나 2003년도에는 계속된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로 주요 수입품가격이 등귀하여 대부분의 생필품 가격이 30% 이상 상승
ㅇ 최근 정부는 물가방어를 최대 경제현안으로 간주하여 금년 중에 3%이내의 인플레율을 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4-5%의 물가상승이 불가피한 것으로 전망

< 연도별 물가상승률 추세 >
(전년대비 상승률: %)


(6) 실업률
ㅇ 정부발표 실업률(9.8%)과 경제계(15-17.5%)통계간에 심한 편차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경기침체로 인해 실업률은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
ㅇ 이집트 정부는 연 2%에 달하는 인구증가율의 억제와 약 40만 명의 신규인력의 취업 및 30%에 달하는 고학력실업 해소를 최우선 경제과제중의 하나로 설정

< 연도별 실업률 추이 >



라. 2003/2004년도(2003.7.1-2004.6.30) 이집트 경제전망

(1) 경제성장
ㅇ 2002/2003 회계년도에 이집트가 이룩한 실제 GDP 성장률은 3.1%로 당초목표인 4%에 미달함. 동기간 동안 이집트는 10%이상의 고이율 정책을 유지하여 기업투자는 퇴보하였으며 결제통화의 취득과 외환부족으로 생산량과 생산성도 감소
ㅇ 특히 이라크 전쟁으로 관광산업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경기침체와 소비위축도 지속됨. 따라서 이집트 정부는 경제성장제고를 위해 재정지출 증가와 생필품 구매용 보조금 증액을 통해 경기부양을 시도중
ㅇ 국제기구들은 2003/2004년 회계년도 이집트의 GDP 성장률을 3.2%로 예상(지역정세의 안정과 수출경쟁력 강화 및 관광수지 등 주요 서비스수지의 개선 예상)

(2) 경상수지
ㅇ 무역수지 적자 감소
- 수출은 유가상승과 정부의 적극적인 수출드라이브 정책, 환율인상 등으로 2001/2002년도의 66억불에서 2002/2003년도에는 70억불로 다소 신장
- 수입은 강력한 수입억제 정책, 외환부족과 규제, 환율폭등으로 작년보다 5.4%감소한 158억불 내외에 그칠 것으로 보여 무역적자액도 작년도의 100억불보다 개선된 88억불에 이를 것으로 전망
ㅇ 경상수지 흑자
- 2003년도 이집트의 경상수지는 90년대 이후 처음으로 약 4억불 (총 GDP의 0.6%)의 흑자를 보일 것으로 전망(이라크전이 단기간에 종료됨에 따라 관광수지나 운하 통관료 등 서비스 수지가 개선되었기 때문)
- 2004년도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금년보다 약간 늘어난 7억2천만불 (GDP의 1%)에 이르러 관광경기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 적자폭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

(3) 물 가
ㅇ 2003년 하반기와 2004년 상반기 중의 소비자 물가지수는 급격한 환율인상에 따른 후유증으로 4.3 % 정도까지 인상 될 것으로 전망
ㅇ 2004년도 하반기에는 환율이 약간 하락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인플레이션율은 3.6%로 완화될 것으로 전망


3. 대외 관계

가. 중동평화협상 문제

(1) Land for Peace 원칙에 입각한 평화 협상 지지

이집트 정부는 4차에 걸친 중동전쟁 이후 아랍권내에서 이스라엘과 최초로 평화협정을 체결(1979) 하였고, 이-팔 평화 협상 등 중동 평화협상을 적극적으로 측면 지원해 오고 있는 만큼 중동평화협상의 기본틀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 견지

특히, 마드리드 평화회의(1991)에서 확인된 Land for Peace 원칙 및 이스라엘-팔레스타인간에 체결된 Wye River, Sharm El-Sheikh합의가 준수되어야 한다는 인식하에 이스라엘군의 West Bank, 골란고원 철수 강조

(2) 공정하고 포괄적인 평화(Just and Comprehensive Peace) 원칙지지

이-팔 협상을 중동 평화협상의 핵심으로 인정하나, 이-시리아 협상이 병행 추진되어야 하며 어느 Track이 경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

팔레스타인인 독자 결정에 의한 독립국가 수립을 지지한다고 여러차례 강조한 바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Wye River협정 및 후속 조치인 Sharm El-Sheikh 협의 이행으로 이- 팔 양국간 대화를 통해 이-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

(3) 이·팔 분쟁관련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한 연대감 표명

중동평화협상 중재의 중요한 축이 되었던 요르단의 후세인왕 서거로 중동 평화협상에 있어서 이집트 Mubarak대통령의 중재역할 상대적으로 강화
2000.9월 이래 계속되고 있는 이-팔 유혈사태 관련, 아랍국가들의 대이스라엘 강경정책 주장에 대해서는 온건입장을 견지하는 한편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한 연대감 표명

(4) 중동평화 로드맵 지지

미국 Bush 대통령의 중동평화 로드맵을 이·팔간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서 지지
- 그러나, 미국이 이·팔 관계에서 보다 균형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나. 주변국 관계

(1) 이스라엘 관계

이스라엘과 수교를 하였으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에 걸친 본격적인 교류와 협력은 중동평화 협상이 정착될 때까지 활성화하지 않는다는 입장
Netanyhu 정부 때는 이스라엘의 중동평화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대이스라엘 정치적 교류 동결
Barak 정부 초기에는 양국 고위 채널간 다소 접촉이 있었으나 2000.9월이래 계속되고 있는 이-팔 유혈 사태 등으로 이스라엘과의 정치. 경제 분야 등 제반 분야에서 교류 동결중
특히, Sharon 정부 출범이후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강경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이집트는 2000.11월 이스라엘주재 대사를 소환하는 등 강경한 태도 유지

(2) 요르단 관계

Mubarak 대통령은 요르단 Hussein 국왕 사후 승계한 압둘라 왕에 대해서도 전임왕과 마찬가지로 우호관계 유지, 압둘라왕의 정치적 경험 미흡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대외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기여
(3) 시리아 관계

Assad시리아 대통령의 사망이후 승계한 Bashar 대통령에 대하여 우호적 입장 견지
그동안 양국 관계개선에 걸림돌로 작용해왔던 레바논 문제 관련, 이집트가 레바논내 시리아의 존재를 인정하고 남부 레바논에 있어서 이스라엘군의 철수가 종결됨에 따라 아랍국가들에 대한 실리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Bashar 정부와 우호관계 유지

(4) 이라크 관계

이라크의 안보와 안정을 위하여 조속한 시일내에 이라크국민에 의하여 선출된 이라크정부의 구성 촉구
전후 이라크재건에 있어서 UN에 지도적이며 중심적 역할을 부여할 필요성 강조
이라크파병과 관련, 같은 회교도인 이집트군과 이라크국민간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UN결의하에서도 이집트군의 이라크파병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나, 이라크 경찰병력의 훈련을 위한 이집트 교관파견 및 이라크 병원복구 등 인도적 지원에는 적극 참여한다는 입장

(5) 수단 관계

1995년 이디오피아 방문시 발생한 Mubarak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에 수단이 연루되었다고 이집트가 주장함으로써 양국 관계 급냉
- 이밖에 현 Bashir대통령의 정적인 전 니메이리 수단 대통령의 망명처를 이집트가 14년동안 제공, 양국간 남부 국경지대 소유권 분쟁 지속, 나일강 수자원 배분 문제 등이 양국 관계 개선의 걸림돌로 지속
그러나 99. 11월 수단의 Bashir대통령과 Al-Turabi전국회의장간의 권력투쟁에서 이집트가 Bashir 대통령을 적극 지지함으로서 양국간의 관계개선 무드가 형성되었으며, 이집트가 그동안 공석이었던 주수단 이집트대사를 2000년초 재파견함으로써 양국 관계 회복
(6) 리비아 관계

99년중 리비아가 Lockerbie 분쟁(1992 리비아 요원에 의한 미항공기 공중 폭파사건)해결을 위한 2명의 혐의자를 인도함에 있어서 주재국이 아랍연맹 등을 통한 막후 중재 역할 수행
그러나 아직까지 양국간의 항공노선이 재개설되지 않고 있으며, 리비아는 아프리카 문제에 관한 한, 자국이 주도적으로 나서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아프리카의 주도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이집트와는 다소 이견

(7) 이란 관계

양국간의 관계개선에 최대 걸림돌은 현재 테헤란 중심로의 거리 명칭이 사다트 대통령 암살범의 이름으로 명명되고 있기 때문이었는 바, 이란측이 동 거리 이름의 개명을 결정함에 따라 양국 관계개선 전망
- 한편, 이란 보수파는 지난 1979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를 선언하고, 또한 이란혁명의 결과로 망명한 Shah왕가에게 피난처 제공과 매년 Pahlavi왕의 묘소를 방문해온 Farah Deva왕비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 왔다고 비난하고, 이집트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이슬람을 반역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동 거리의 명칭 개명은 물론 이집트와의 관계정상화에 반대
그러나 Khatami 대통령을 포함한 이란의 개혁파들은 거리이름 때문에 양국 관계가 중단되고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최근 거리명칭 개명을 포함, 이집트와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자세
경제적으로는 최근 양국간 무역박람회 상호 개최, 무역관련 협정 체결 등으로 양국간의 교역 신장중

(8) 기타관계

이집트는 걸프지역 및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과는 잦은 경제, 정치 교류 등을 통해 꾸준한 우호 관계 유지
다. 서방관계

(1) 미국 관계

지난 20여년간 미국·이집트 관계는 착실한 협력관계를 다져 왔으며, 미국 정부는 주재국 정부에 대해 매년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제공(2003/4 회계연도 경제원조 5.75억불, 군사원조 13억불)
- 미국은 이집트의 최대 교역국이며 이집트는 현재 미국이 더 많은 투자를 해줄 것을 요청중
- 이집트의 콥틱교 차별문제에 대한 미국측의 인권문제 제기, 리비아, 수단, 이라크 문제 등 국제문제에 대한 양국간의 이견이 있으나, 이러한 사안들이 기존의 양국우호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는 않을 전망

이집트 정부는 2002년말 이후 이라크에 대한 군사조치 가능성이 농후해지는 과정에서 전쟁에 대한 반대입장을 견지하는 한편, 전쟁방지를 위하여 외교력을 집중하였으나, 2003.2월초 이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관한 결의가 점차 확고해지자, 전쟁반대 입장표명을 자제하는 한편, 조기종전 및 종전후 이라크의 주권과 안보, 영토보장을 확보(중동질서의 status quo 유지) 하는데 역점

이집트 정부는 국내에서나 역내에서 표면적으로 미국의 대이라크 공격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조치도 피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오고 있으나, 미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이라크문제에 대하여 가능한한 low profile을 유지

(2) EU 관계

이집트는 중동평화협상에 있어서 EU국가들의 역할 강화 및 팔레스타인 입장지지 요청 및 대이집트 투자확대 등 요청

2001.6월 EU와 경제관계를 강화시킬 EU-이집트 제휴협정(Egypt-EU Partnership Agreement) 서명
- 2003. 3월 이집트의회 비준
- EU 회원국 각국의 비준절차 진행중(2003.8월 현재 15개 회원국중 5개 회원국 비준절차 완료)
라. 제3세계 관계

(1) 비동맹국관계

이집트 정부는 아랍연맹(AL, League of Arab States), 비동맹정상회담, 아프리카연합(AU, Africa Union)정상회담, 이슬람회의기구(OIC, Organization for Islamic Conference)정상회담, G-15 정상회담, Islamic G-8 정상회담, 동남아프리카공동시장(COMESA, Common Market for Eastern and Southern Africa)회의 등을 통해 제3세계 국가들과의 협조관계를 광범위하게 유지 및 동 협력관계를 통해 아래 주요 대외정책 추진중
- 비동맹 중립 외교노선
- 제 3 세계 국가들간의 경제·통상협력 강화
- 아랍권에서의 주도권 확보 및 이스라엘 견제
- 중동지역에서의 핵무기 등 대량파괴 무기 제거
- 테러 방지를 위한 국제 협력 도모

(2) 아프리카 관계

AU 정상회담, COMESA 회의 등의 참석을 통해 다자관계 유지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디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이 AU등의 결의안에 따라 해결되기 바란다고 입장을 표명하는 등 아프리카내 중심국으로서 지역현안에 대한 조정자 역할 수행
나일강 수자원 배분 문제에 있어서 나일강 인접국가 들과 다소 이견

(3) 아시아 관계

1990년대 이후 냉전체제 붕괴, 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경제 성장, 국제사회에서의 중국, 일본, 인도등의 위상 강화 등으로 아시아 국가들과의 정치·경제적 협력이 요구됨에 따라 대아시아 정책을 적극 추진, 고위인사 방문 및 활발한 경제협력 관계 등을 통해 양자관계 확대중
1999.4월 Mubarak 대통령이 한국, 중국, 일본을 방문하여 극동국가들과의 정치, 경제 분야 협력 방안 논의



1. 한·이집트 기본관계

가. 한국에 대한 기본인식

1967년 및 1973년 중동전쟁시 북한의 대이집트 군사지원으로 이집트는 1970년대 중반까지 국제무대에서 친북한 일변도 정책 견지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이집트가 문호개방정책을 표방하면서 친서방 정책을 추구함에 따라 한국과 경제·통상관계가 점차 신장되었으며, 공식적으로 남북한에 대하여 중립정책을 답변확정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한국과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중요시

1999년 2월 김종필 총리의 이집트 공식방문에 이어, 1999년 4월에는 Mubarak 대통령의 한국 국빈방문으로 양국관계 급진전

나. 이집트의 대한반도 정책기조

한반도의 비핵화를 지지하며, 협상에 의한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및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지지

다. 관계 년표

1961.12. 5 영사관계 수립
1962. 5. 1 주카이로총영사관 개설
1991. 8.19 주서울이집트총영사관 개설
1995. 4.13 한·이집트 수교

라. 협정체결 현황

과학협력 양해각서 교환
(1979. 5 한국과학재단 - 이집트과학·기술 아카데미)
항공협정(1988. 6 발효)
문화·과학·기술협력협정(1989. 6 발효)
이중과세방지협정(1994년 발효)
투자보장협정(1997년 발효)
청년봉사단파견 양해각서(1997년 발효)
무역협정(1998년 발효)
외교관·관용여권 사증면제협정(1998년 발효)
과학기술양해각서(1999. 4 발효)
연구원간 협력약정(1999.11 발효)
2001-2003년간 문화교류시행계획서(2000.10 발효)
원자력 협력협정(2002.6 발효)


2. 한·이집트 경제통상관계

가. 통상관계

(1) 양국간의 교역규모
1999년 8.3억불(수출 : 5.7억불, 수입 : 2.6억불)로 최고치를 보였으나, 2000년 이후로 감소 추세. 2002년도 교역규모는 4.54억불(수출 : 3.2억불, 수입 : 1.34억불), 2003년도는 전년대비 30% 증가전망

(2) 주요 수출품목
2002년 주요수출품목은 자동차 및 부품이 5,672만불로 1위이며 섬유사(4,274만불), 가전제품(3,615만불), 석유화학제품(2,750만불) 산업용전자제품(2,263만불), 고무제품(2,063만불), 일반기계(2,190만불)순

(3) 주요 수입품목
나프타가 7,829만 불로 수위이며 원면(1,760만불), 순면사(703만불), 질소비료(330만불)등 주로 원자재로 구성

나. 건설진출

(1) 현지 건설시장의 특성
ㅇ 시공품질보다 가격을 더 중시
ㅇ 정부공사의 경우 현지 건설업체에 15%의 특혜부여
ㅇ 일반공사의 경우 현지 대형업체의 급부상으로 공개경쟁입찰에서 우리업체의 가격 경쟁력 감소
ㅇ 입찰방식이 BOT방식으로 시공자 자본참여를 요구, 자본력에서 열세인 우리기업의 입지가 축소되는 경향

(2) 실 적
(단위:백만불)

ㅇ 2001년이후 정부발주 공사가 중단되어 수주실적이 없음
ㅇ 프로젝트 발주방식이 BOT방식이나 시공자 자본조달방식으로 우리기업의 현실에 맞지 않고 원조공여국이나 자본력이 앞선 선진국기업에게 발주물량이 주어지고 있는 실정

다. 대이집트 투자

(1) 현 황
ㅇ 1999년 이집트 대통령의 방한이후 10여건에 이르는 우리기업들의 투자진출이 이루어졌으나 복잡한 투자진출절차, 국내 시장의 악화, 관료주의의 만연 등으로 2000년 이후로는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음.

(2) 주요 현지투자 진출현황
ㅇ 2003년 9월 현재 우리나라의 총 투자건수는 신고기준으로 14건 178,019천불이며 순투자 건수는 9건, 104,024천불

< 현지 투자 진출현황 >

(단위 : 천불)

자료원 :수출입은행

라. 대이집트 무상자금 및 기술협력 현황

(1) 개 황
ㅇ 한국은 대이집트 협력사업으로 2002년말까지 총 약 24백만불(군사원조 15백만불 포함)을 지원

(2) 연도별 이집트 협력사업 현황
ㅇ 지원총액(2002년까지) : 24,035천불(군원 15백만불 포함)
(단위 : 천불)


마. 진출업체 현황

(1) 지·상사 및 합작투자회사



(2) 현지회사



3. 주요인사 교류현황

(1) 방 문

1995. 6 박운서 통상산업부 차관
1995. 9 이시윤 감사원장(15차 INTOSAI 총회 참석)
1996. 8 이기주 외무차관(제1차 한·이 정책협의회 참석)
1996. 11 홍재형 전부총리(제3차 MENA 경제회의 참석)
1997. 4 조순 서울시장(서울 - 카이로 자매 결연)
1997. 9 정재문 통일 외무위원장(IPU총회 참석)
1997. 10 송영식 제 1차관보
1998. 9 이종찬 안기부장
1998. 11 박태영 산자부장관
1999. 1 김봉호 국회부의장
1999. 2 김종필 총리
1999. 7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유흥수 단장)
1999. 10 고건 서울특별시장
1999. 11 홍순영 외교통상부장관
1999. 11 권진호 국정원 차장
2000. 4 김경한 법무차관
2000. 5 최기선 인천광역시장(인천-알렉산드리아 자매결연)
2000. 8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
2000. 12 김윤기 건교부장관
2001. 1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이용삼 단장)
2001. 1 국회정보위원회(김명섭 단장)
2001. 3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박헌기 단장)
2001. 4 황병기 감사위원
2001. 4 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
2001. 7 국회 운영위원회 (이상수 단장)
2001. 8 한승수 외교통상부장관
2001. 11 김종호 국회부의장
2002. 3 이만섭 국회의장
2002. 8 국회예결위원회(이상득 단장)
2003. 1 국회행자위원회(박종우 단장)
2003. 3 국회문광위원회(이협 단장)
2003. 5 국회통외통위원회(유흥수 단장)
2003. 6 김재철 무역협회장
2003. 6 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
2003. 7 조부영 국회부의장
2003. 8 변재일 정보통신부차관

(2) 방 한

1995. 4 El Gharieb 투자청장
1995. 7 Ibrahim Soliman 신도시 개발 장관
1995. 11 Omar Ads 경찰대학장
1995. 12 El Meniawy 국제협력부 차관
1996. 3 Amre Moussa 외교장관
1996. 9 El Tatawy 국제협력장관
1996. 10 Sorour 국회의장(Abdellah 외무위원장 수행)
1997. 4 Sorour 국회의장(IPU 총회 참석)
1999. 4 Mubarak 대통령 국빈 방한
1999. 4 Bahha El-Din 교육부장관
2000. 4 Ghatrifi 외교부 아주차관보(제2차 한·이 정책협의회 참석)
2003. 9 Saleh 통상부 국제전시청장


나. 문화·체육교류

(1) 문화교류

문화행사개최
1993. 9 대전엑스포 계기 이집트 민속무용단 방한
1994. 9 대규모 한국주간행사 개최
. Korean Night 행사
. 국립예술단 공연
. 한·이 학술세미나(한국외대 유정렬교수, 카이로대와 공동개최)
. 앙드레김 의상발표회
. Piano Trio Recital
. 한국영화주간
. 김희진 전통매듭전시회
. 한정혜 한국전통음식축제
1995. 12 한국화전시회
1996. 3 한국문화행사 개최(앙드레김 의상 발표회)
1996. 11 도예전 개최
1997. 4 한국어 웅변대회 개최
1997. 7 국립발레단 공연
1997. 9 김복희 무용단 공연
1998. 2 금호현악 4중주단 공연
1998. 10 한국어 웅변대회 개최
1998. 11 제22회 카이로 국제영화제 참가
1999. 7 국립무용단 공연
2000. 9 제12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 참석
2000. 10 알렉산드리아 민속공연단 방한
2001. 4 금호현악 4중주단 공연
2002. 9 제14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 참가
2002. 10 제26회 카이로 국제영화제 참가
2003. 9 제15회 카이로 국제실험연극제 참가
. 우리나라 극단 "여행자" 최우수작품상 수상
2003. 10 제27회 카이로국제영화제 참가, 한국영화특별전 개최

카이로대학 한국학 사업 지원
1996. 10 한·이집트 학술세미나 개최
1999. 9 한·이집트 학술세미나 개최
2002. 9 한·이집트 학술세미나 개최
(우 리 측 : 중동아프리카연구원, 외교안보연구원,
이집트측 : 카이로대학 아시아문제연구소)
2003. 1 한·이집트 학술세미나 개최
(우리측 : KDI, 이집트측 : 카이로대학 아시아문제연구소)

한-이 문화공동위 개최
- 2000.10.23-26간 카이로에서 제1차 문화공동위 개최, 양국간 문화, 학술, 관광증진방안 협의
- 2004년중 서울에서 제2차 회의개최 예정

서울 공원 조성
- 카이로-서울시 자매결연 기념으로 98.9 카이로에 서울공원 조성

한국대사관 문화원내 한국어강좌 개설
- 2002.10 한국어강좌 재개
- 2003.10 초급 1개반 증설

(2) 체육교류

태권도사범 파견(1984년이래 2명, 1999년부터 1명)

국제대회 상호참가
1994. 11 카이로개최 세계유도 쥬니어대회 참가(박용성 한국
유도협회장)
1994. 12 KBS 국제태권도대회, 이집트 선수단 파견(남 2, 여 3)
1995. 1 카이로개최 제1회 태권도 국제선수권대회 아측 선수단
참가 (남 6, 여 6)
1995. 11 태권도 시범단 방애
1997. 1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 방문
1997. 3 카이로 개최 월드컵 태권도선수권대회 참가
1997. 12 포항제철 축구팀 - 자말렉팀 축구 경기
1998. 9 제1회 대사배 태권도대회 개최
1999. 6 카이로 개최 세계 남자핸드볼대회 참가
1999. 10 제2회 대사배 태권도대회
2001. 4 LG배 국제축구대회 한국대표팀 참가
2003. 2 한국어린이 태권도팀 및 민속예술단 카이로 및
알렉산드리아 방문, 공연
2003. 8 이집트 대학체육연맹팀(7명) 2003 대구유니버시
아드대회 참가


4. 영사·교민관계

가. 동포사회현황

(1) 한인현황(2003.12 현재)

총계 : 623명(316세대)
- 상사, 건설업체 임직원 128명, 동가족 119명
- 여행업 26명, 동가족 26명
- 요식업 20명, 동가족 23명
- 유학·연수 20명
- 정부 및 공기업 43명, 동가족 42명
- 기타 176명

주요단체 및 언론
- 재이집트 한인회(1979. 12 결성, 회장 : 고상원)
- 이집트 상사협의회(1988. 4 결성, 회장 : 장문성)
- 재이집트 부인회(회장 : 최은복), 주카이로 한인교회(3)
- 언론(연합통신 정광훈 특파원, 중앙일보 서정민 특파원)
(2) 카이로 한국학교
ㅇ 79.12.5 개교
1980. 4. 15 교육부설립인가
교장 : 배정철(2004.1.27 부임)
교사진 : 9명(교장 정부파견 1명, 현지 채용 교사 5명, 강사 3명)
학생 : 초등학교 6학급 24명
2000. 9 교사 신축 이전
한국학력인정학교로서 주로 단기체류자(일부 상사·건설회사직원, 유학생, 선교사 등)자녀 재학

(3) 평통자문위원
임 기 : 2003.7.1∼2005.6.30(제11기)
자문위원 : 이준교(카이로한인교회 목사)

나. 영사관련업무

(1) 사증문제
외교관, 관용여권 사증면제협정 체결(98.6.24)
- 체류기간 90일, 주재공관원의 경우 재임기간중 면제
일반여권소지자의 경우 상호지정에 의한 무사증입국허가대상국가 국민으로 분류
- 양국 국민은 상대국의 공항에서 관광 등 단기체류비자 취득 가능
이집트는 외국인에 대하여 영주권을 발급치 않으며, 원칙적으로 외국인의 취업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바, 합작투자사 및 지·상사 근무 임직원, 기술직, 요리사 등 특수자격 소지자는 노동허가를 받아 주재국내에서 영업활동 내지 취업

(2) 양국 국민 방문자 현황


자료원 ; 한국인의 이집트방문 : 이집트 관광부, 이집트인의 한국방문 : 한국 법무부




1. 대북한 기본인식

북한은 1973년 중동전쟁시 이집트에 조종사를 파견하였을 뿐 아니라, 70년대초 소련 군사 고문단의 이집트 철수 후 미그기 및 탱크 등 소련제 무기의 부품을 대신 공급함으로써 군사 분야 협력을 중심으로 이집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그러나 최근 이집트의 무기체제가 미국산으로 전환되고 그간 북한이 공급해 오던 소련제 부품을 이집트가 대부분 자체생산, 조달함에 따라 군사면에서 협력관계가 과거와 같이 긴밀하지는 않은 상태이며, 북한의 낙후된 경제수준으로 인해 경제·통상 등 분야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협력이 미미한 실정

따라서 현재의 이집트-북한관계는 실질적인 상호협력 측면보다는 상징적, 정치적인 측면이 강하며, 이는 주로 과거 대이집트 군사지원에 따른 이집트의 대북한 의리감정 등 작용

1994. 7 김일성 사망이후, 북한경제난 등으로 인해 이집트·북한 관계 활성화 가능성 희박


2. 관계연표

1958. 7. 9 주카이로북한무역대표부 설치
1961. 7. 30 총영사관 설치 합의
1961. 11. 27 주카이로북한총영사관 개설
1963. 8. 25 외교관계 수립(대리대사급)
1963. 8. 28 주이집트북한대사관 설치
1964. 12. 26 대사급 외교관계 승격 합의
1970. 4. 6 주이집트북한문화원 개설
1998. 8. 16 주이집트북한문화원 폐쇄
3. 인사교류 현황

가. 북한 인사 방문
1990. 3 이종옥 부주석(김일성 특사)
1990. 8 지수원 외교부 부부장(중동지역 북한공관장회의 개최)
1990. 9 북한 중동전 참전 조종사일행
1991. 9 김영남 외교부장
1992. 1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
1992. 3 이종옥 부주석
1992. 3 김달현 부총리겸 무역부장
1993. 1 장승길 외교부 부부장
1993. 5 황진태 사회안전부 부장
1994. 3 김일성 특사(최기룡 교육위원회 위원장)
1994. 5 김영남 외교부장(제11차 비동맹 각료급 회의 참석)
1994. 5 최수헌 외교부 부부장
1995. 5 채화섭 관광총국 부국장
1998. 8 박길연 외교부 부부장
1998. 10 정창렬 인민무력부 부부장
1999. 4 김철식 사회과학자협회 부의장
2000. 12 김용일 외교부 부부장 (사회과학자협회 대표단 인솔)
2001. 1 북한축구대표단
2001. 3 문재철 대외문화연락위 위원장(대리)
2001. 3 신해복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2001. 4 북한문화대표단
2001. 9 강경욱 북한농업부 국장 등 6명

나. 주재국 인사 방북
1990. 5 Mubarak 대통령(Meguid 부수상겸 외무장관, Kamal
Ghanzouri 부수상겸 경기원장관, Azmi 대통령비서실장,
Osama El Baz 정치특보 대동)
1990. 10 Rashid 이집트 노총위원장 일행
(북한노동당 창당기념대회 참석)
1991. 4 Sorour 국회의장(IPU 참석)
1992. 4 Yousef 문화부차관
1993. 6 Shawky 공보부차관
1993. 10 Alfi 내무부장관
1994. 4 Rahman 문화부차관(4월 평양축제 참석)
1996. 4 Ali Abu Shady 문화부차관
1998. 4 Hussein Abdel Moneim Tolba 문화부차관
1999. 4 Omar Gamil Goneim 문화부차관
2000. 9 Ghatrifi 외교부 아주차관보

4. 협정체결 현황

1983. 4 경제·과학·기술 및 문화협조에 관한 일반협정
1991. 6 노동당-국민민주당간 협조협정서
1993. 10 사회 안전·내무 협정
1995. 10 문화, 과학, 보건, 교육 등에 관한 협조 계획서
1996. 2 해운협력협정
1997. 8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7. 11 의류 및 의약품 지원 협정
1998. 8 문화교류 계획서
1999. 9 공보협력협정
2000. 3 이중과세방지협정
2000. 5 보건협력협정
2001. 3 문화교류협정(갱신)




1. 주요인사 인적사항

가. Mubarak 대통령

성 명 : Mohamed Hosni Mubarak
(모하메드 호스니 무바락)

출 생 : 1928. 5. 4 생

학 력
- 이집트 국방사관학교 졸(1949)
- 항공과학 학사 취득(1950)
- 구소련 Frounz Military Acadamy 유학(1964-65)

경 력
1952 - 59 공군사관학교 교관
1959 - 67 소련 유학 및 공군지휘관
1967 - 69 공관사관학교 교장
1969 - 72 공군참모총장
1972 - 75 공군사령관 겸 국방차관
1975 - 81 부통령
1981 - 현재 대통령(1999.10월 6년 임기 4선 당선)

남북한 방문 : 1999. 4월 방한 및 북한 4회 (1980. 1/
1983. 4 / 1985. 4 / 1990. 5) 방문

가족관계 : 기혼(Suzanne Mubarak) 및 2남

나. Ebeid 총리

성 명 : Atef Muhammad Ebeid
(아테프 무하마드 이베이드)

출 생 : 1932년생

학 력
- 카이로대 상대학사 (1952)
- 카이로대 경영학석사 (1956)
- 미 일리노이대 경영학박사 (1962)

경 력
1962 - 84 카이로대 경영대 교수 및 학장
1984 ILO 자문관
1984 내각 및 총무장관
1992 - 97 공기업 및 환경관리장관
1997 - 99 공기업부장관
1999.10 - 현재 총리

방한경력 : 99. 4월 Mubarak 대통령 방한시 수행

가족관계 : 기혼, 자녀(2)

비 고 : 한·이집트 친선협회장

다. Sorour 국민의회의장

성 명 : Ahmed Fathi Sorour
(아흐멧 파티 소루르)

출 생 : 1932. 7. 9생

학 력
- 카이로대 법대졸 (1953)
- 카이로대 법학박사 (1959)

경 력
1953 - 59 검사
1959 - 64 카이로대 법과교수
1964 - 76 스위스, 프랑스 대사관 근무 (문화담당)
1972 - 78 아랍연맹 대표
1983 - 85 카이로법대 학장
1985 - 86 카이로대 부총장
1986 - 89 교육부장관
1990.10 - 현재 국민의회의장

남북한 방문 : 1991. 4월 북한방문(IPU 총회 참석)
1996. 9월 방한(국회의장 초청)
1997. 4월 방한(IPU 총회 참석)

가족관계 : 기혼, 3남
라. Maher 외교부장관

성 명 : Ahmed Maher El-Sayed
(아흐멧 마헤르 엘사에드)

출 생 : 1935. 9. 14생

학 력 : 카이로대 법학사 (1956)

경 력
1957 외교부 입부
1959 - 63 주쥬리히총영사관 근무
1967 - 71 주콩고대사관 근무
1971 - 74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보좌관
1974 - 77 주프랑스대사관 근무
1978 - 80 외교부장관 비서실장
1980 - 82 주포르투갈대사
1982 - 84 주벨기에대사
1988 - 92 주러시아대사
1992 - 99 주미국대사
2000 - 2001 아랍연맹내 Arab-African Aid Fund 사무총장
2001. 5 - 현재 외교부장관

기 타 : 1978년 Camp David 협상 및 1987-88년 Taba 협상 참여

가족관계 : 부인(Hoda)
마. Ghali 통상부장관

성 명 : Youssef Boutros Ghali
(유세프 부트로스 갈리)

출 생 : 1952년, 카이로

학 력 : 카이로대졸
미 MIT 경제학 박사(1981)

경 력
1974 - 75 카이로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교수
1981 - 86 IMF Senior Economist
1986 - 93 총리경제보좌관
1993 - 96 국제협력부장관
1996 - 97 경제부장관
1997 - 현재 통상부장관

가족관계 : 기혼(1남)
바. Moussa 아랍연맹 사무총장

성 명 : Amre Mahmoud Moussa
(아므르 마흐무드 무사)

출 생 : 1936년

학 력 : 카이로대졸 (법학 전공)

경 력
1958 외교부 입부
1977 - 81 외교부 국제기구국장
1981 - 83 주유엔대표부 부대사
1983 - 86 주인도대사
1986 - 90 외교부 국제기구국장
1990 - 91 주유엔대표부대사
1991 - 2001 외교부장관
2001. 5 - 현재 아랍연맹 사무총장

방 한
1996. 3 공로명 외교장관 초청으로 방한
1999. 4 Mubarak 대통령 방한시 수행


2. 주요 연락처

가. 대사관
ㅇ 청 사
주소 : 3 Boulos Hanna St., Dokki, Cairo, A.R.E
TEL : 761 - 1234∼7
FAX : 761 - 1238, 335 - 7066
ㅇ 관 저
주소 : 45, Road 83, Maadi, Cairo, A.R.E
TEL : 378 - 3124, 750 - 9631
FAX : 380 - 3663

나. KOICA(이집트사무소)
주소 : 3 Boulos Hanna St., Dokki, Cairo, A.R.E
TEL : 761 - 1234∼7
FAX : 761 - 1238, 335 - 7066

다. KOTRA(카이로무역관)
주소 : 25 Misr Helwan St., Maadi(Entrance1), 4th Foor, El-Zeini
Tower Building, Cairo, A.R.E
TEL : 358 - 1192, 380 - 0072, 380 - 0092
FAX : 359 - 9178

라. 한국학교
주소 : 5th Zone, 1st Residential Area, New Cairo, A.R.E
TEL/FAX : 358 - 2983

바. 교 회
ㅇ 카이로한인교회 358 - 4620
ㅇ 애굽한인교회 359 - 3927
ㅇ 나일연합교회 754 - 5109

사. 범죄 및 화재신고
ㅇ 범죄신고 122
ㅇ 화재신고 125

아. 호 텔(Five Star Hotel)
ㅇ Grand Hyatt(Corniche Al Nil. Garden City)
TEL : 362 - 1717
ㅇ Conard(Corniche Al Nil. Maspero)
TEL : 580 - 8440
ㅇ Cairo Marriot(Saray Al Gezirah Zamalek)
TEL : 735 - 8888
ㅇ Cairo Sheraton(Midan Al Galaa, Dooki)
TEL : 336 - 9700
ㅇ Gezirah Sheraton(Gezirah Island Zamalek)
TEL : 736 - 1333
ㅇ Heliopolis Movenpick(Airport)
TEL : 385 - 2555
ㅇ Mena House Oberoi(Al Haram Giza)
TEL : 383 - 3222
ㅇ Meridian Cairo(Corniche Al Nil. Garden City)
TEL : 362 - 1717
ㅇ Nile Hilton(Corniche Al Nil. Midan Tahrir)
TEL : 578 - 0666
ㅇ Ramses Hilton(11115 Corniche Al Nil. Maspero)
TEL : 577 - 7444
ㅇ Semiramis Intercontinental(Corniche Al Nil. Garden City)
TEL : 355 - 7171

자. 한국인 운영 여행사
ㅇ Salco Travel 519 - 9831, 4(F) (012-216-5826)
ㅇ N.T.C 579 - 4909, 579 - 4910(F) (012-214-9065)
ㅇ Meryland 519 - 2997, 519 - 2996(F) (012-212-5502)
ㅇ Blue Sky 516 - 4737(T/F) (012-210-9667)
ㅇ Kouni Travel 519 - 2998(T/F) (012-349-0653)
ㅇ Corniche 390 - 2727, 391 - 4412(F)
ㅇ Egypt Tour 761 - 3205, 335 - 2304(F)
ㅇ Lucky Tours 305 - 9467(T/F) (012-211-3480)

차. 식 당
ㅇ 한국식당
구 룡 관 575 - 9831
산마리노 519 - 2451
아 몬 347 - 3928
하 나 738 - 2972
부일갈비 582 - 3563
청 솔 579 - 4910
가 야 519 - 8494
ㅇ 일본식당
yamato 579 - 6806
Sushi Yama 578 - 5161
Sakura 570 - 1227
ㅇ 중국식당
Gulf Royal 526 - 3662
Bird Cage(Semiramis) 355 - 7171
Chin-Chin(Four Corners) 340 - 1647
Regent(Ramses Hilton) 777 - 444
Peking 591 - 2381
Dragon(Gezirah Sheraton) 341 - 1333
ㅇ 불란서식당
Justin(Four Corners) 340 - 1647
Swiss Air Restaurant(Le Chalet) 348 - 5321
Le Pasha(Le Steak) 340 - 5734
ㅇ 이태리식당
Ciao Italia(Gezirah Sheraton) 341 - 1333
La Pizza(Four Corners) 340 - 1647
Le Pasha(Bicclomndo) 340 - 5734
Omam Restaurant(Il Camino) 570 - 1227
Da Mario(Nile Hilton) 578 - 0444
ㅇ 중동식당(양고기)
El Kababgy(Gezirah Sheraton) 341 - 1333
Bint El Sultan 360 - 1213
Abou Shakka 367 - 8811
El Mashrabeya 348 - 2801

ㅇ Seafood Restaurant
Fish Market(Marriot) 340 - 8888
Kadoura 360 - 8665
Fish Market 570 - 7692
ㅇ American Fast Food
Mc Donalds 578 - 1588
K.F.C 392 - 9658
T.G.I Friday 570 - 9690

카. 병 원
ㅇ 앗쌀람 병원 524 - 066, 524 - 250
ㅇ 이븐씨나 병원 249 - 9267
ㅇ 누주하 병원 266 - 0555
ㅇ 오수만 병원 526 - 0168/9
ㅇ 야간의사 문의 350 - 2873, 724 - 452
ㅇ 야간 약국 743 - 369


3. 이집트관련 웹사이트

가. 이집트 정부기관
www.alhokoma.gov.eg
Egypt's government-on-line homepage, with links to many ministries

www.presidency.gov.eg
Egyptian Presidency

www.sis.gov.eg
State Information Service

www.parliament.gov.eg
Egyptian Parliament

www.cbe.gov.eg
Central Bank of Egypt

www.moft.gov.eg
Ministry of Foreign Trade

www.mfa.gov.eg
Ministry of Foreign Affairs

www.visitegypt.gov.eg
Ministry of Tourism

나. 비정부기관
www.eiv.com
Economist Country Report

www.eces.org.eg
Egyptian Center for Economic Studies

www.amcham.org.eg
American Chamber of Commerce on Egypt

www.arableagueonline.org
Arab League Website

www.wto.org/english/thewto e/countries e/egypt e.htm
World Trade Organization Website - Egypt Page

www.ahram.org.eg
Al Ahram Newspaper

www.elakhbar.org.eg
Al Akhbar Newspaper

www.gn4me.com/alalamalyoum/index.jsp
Al Alam Alyom Newspaper

www.touregpt.net
Tour Egypt

www.tourism,egnet.net
Egypt's Tourism Net

다. 기타 관련사이트
www.usembassy.egnet.net
Homepage of the U.S. Mission to Egypt

www.exim.gov
Export-Import Bank of the United States

www.usaid.gov
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www.ita.doc.gov/uscs/egypt
Home page of the Commercial Service in Egypt


1. 여행정보

가. 입 국
ㅇ 모든 방문객은 비자와 6개월 이상의 유효여권을 가지고 있어야 함.(단, 외교관·관용여권 90일간 무비자 체류)
ㅇ 비자발급처 : 주한이집트대사관 또는 이집트 입국시 공항에서 발급

나. 대한항공 일정
ㅇ 인천/카이로 : 월·목 KE953 21:30/02:40+1일
ㅇ 카이로/인천 : 화·금 KE954 11:30/05:00+1일

다. 주요관광지

〔카이로 지역〕

(1) 기자 피라밋

ㅇ 개 요
- 카이로 인근 기자지역에 위치한 3개의 피라밋은 제 4왕조(BC 2613- 2494)의 Khufu왕, Khafre왕, Memdaure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70여개 피라밋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음.
. 단순한 왕의 무덤이 아니라 사후 세계의 신앙과 관련된 신성한 건축물로 보는 학자들도 있음.
- 이중 Khufu왕의 피라밋은 일명 대피라밋(Great Pyramid)이라고도 하며 고대 이래로 불가사의한 건축물의 하나로 받아들여져 세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음.
. 피라밋 내부 및 외부에 피라밋에 관련된 문자나 그림 등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음.


ㅇ 대피라밋
- 크기 및 방향
. 높이 146M, 밑변 길이 230M(각변의 길이 오차는 0.1 - 0.2% 내외의 정밀도 유지)
. 피라밋 입구 방향은 정확하게 정북을 지향
. 피라밋 경사각 약 52도
- 구 조
. 무게 2톤 - 20톤의 석회암(카이로 인근에서 채취) 내장석 약 230만개를 쌓아 올렸으며, 과거에는 피라밋 전체가 백색 외장석으로 덮여있었다고 함(외장석과 내장석간에는 백색 모르타르로 접합된 흔적이 남아 있음).
. 피라밋 내부는 왕의 방, 왕비의 방, 대회랑, 내려가는 통로, 올라가는 통로, 수평통로, 환기통 등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음(내부 방 및 대회랑 등에 사용된 석재는 화강암으로서 남부 아스완에서 운송해 온 것으로 추정됨).
. 내려가는 통로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발견되었으나, 올라가는 통로(왕의 방, 왕비의 방 및 대회랑과 연결)는 9세기 Abbas 왕조의 Mamun 왕이 처음 발견하였다고 함(당시 Mamun 왕이 만든 통로는 현재 관광객들의 출입구로 사용중).
- 건 축
. 그리스의 역자학자 Herodotus는 약 10만명의 인원이 약 10년간에 걸쳐 건축하였다고 추산함.
. 현대 일부 건축학자들은 피라밋 건축의 정밀도 등을 감안 4-5 천명의 숙련되고 조직된 기능인들이 건축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건축방식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해명되지 않고 있음.

ㅇ Khafre왕과 Memdaure왕의 피라밋
- Khafre왕은 Khufu왕의 아들이며, Memdaure왕은 Khufu왕의 손자로서 각 피라밋 높이는 Khufu왕(146m), Khafre왕(137m), Memdaure왕(69m)순임.
- Khafre왕의 내부 현실은 지면과 동일한 높이에 있으며, Memdaure왕의 현실은 지하에 있음.
- Khafre왕의 피라밋 상부에는 외장석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음.
ㅇ 스핑크스
- Khafre왕의 피라밋 동쪽에 피라밋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스핑크스상이 있음.
. 거대한 자연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서 길이 75m, 높이 22m
. 얼굴에 채색 흔적이 아직 남아 있으며, 턱수염은 대영 박물관에 전시중
- 스핑크스의 건축 연대는 기자 피라밋 건축연대와 비슷한 시기로 보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스핑크스상에 물에 침식된 흔적이 남아있는 점 등을 근거로 약 BC 10,000년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
- 18왕조 Tuthmosis 4세(BC 1425 - 1417간 재위)가 꿈에 계시를 받아 당시 모래속에 파묻혀 있던 스핑크스를 발굴하고 스핑크스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함.
. Tuthmosis 4세는 원래 차남이었으나, 후에 왕이 되었는 바, 이를 출애굽기의 모세의 재앙(장자 사멸)과 관련짓기도 함.

(2) 카이로 박물관
ㅇ 개 요
- 이집트 고대 파라오 왕조 유물은 과거 그리스·로마시대부터 해외로 반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슬람 시대에는 모스크 건축 등의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석조 유물 등이 다수 파손됨.
- 19C 샹폴리용(프랑스인)의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으로 이집트 역사 및 문화의 중요성이 인식됨에 따라 이집트 유물 보존 조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
. 1834년 이집트 유물 보호국 설립
. 1858 August Mariette이 유물감독관으로 임명됨.
. 1863 Ismail 왕이 Bulaq 지역에 유물보관소(구 박물관) 건립
- 현 카이로 박물관 건물(카이로 시내 Tahrir 광장에 소재)은 Bulaq박물관이 협소하여 1895 - 1902년간 국제입찰로 건축(Mariette이 건축 감독 및 지휘)
- 1층 51개 전시실에는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의 유물과 Greco-Roman시대의 유물이(정문 입구에서 시계방향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2층 전시실에는 Tutankamun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과 이집트 신왕조시대 왕들의 미이라 및 기타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음.
. 선사시대부터 Greco-Roman시대까지 총 10만여점 유물 전시

ㅇ 1층 주요 전시물
- 고왕조 시대의 유물
. Memdaure왕과 두 여신의 석상, Khafre왕의 석상, 서기관의 좌상, 촌장의 목상, 귀족(Rahotep) 부부상, 거위 벽화 등
- 중왕조 시대의 유물
. Mentuhotep 1세의 석상, 귀족(Harhotep)의 분묘 벽화 등
- 신왕조 시대의 유물
. Hatshepsut 여왕의 석상, Tuthmosis 3세의 석상 Hathor신(암소신)의 석상, Akhenaten과 부인 Nefertiti의 석상, Ramses 2세의 석상 등
- 기타 석관, 목선, 미이라 수술대, 로제타 스톤 모형 등 전시

ㅇ 2층 주요 전시실
- 투탄카문 왕의 유물
. 1922년 영국인 Howard Carter가 Luxor 왕들의 계곡에서 발굴한 Tutankamun왕의 유물 전시
. 왕의 전차, 목관, 황금관, 황금 마스크, 알라바스타 항아리, 침대, 의자, 우산 등
- 미이라실
. Ramses 2세 등 18 - 20왕조 왕들의 미이라 수구 전시
. 미이라실 입구에는 미이라 수술 도구 및 재료가 전시되어 있고, 미이라 수술 방법이 간략히 설명되어 있음.


〔Luxor 지역〕

(1) 왕들의 계곡
ㅇ 개 요
- Luxor 지역 나일강 서안에 위치한 석회암 계곡으로서 고대 이집트 신왕조(18 - 20 왕조, BC 1567 - 1085)시대 왕들의 무덤 62개소가 발굴됨.
. 무덤 일련번호는 발굴된 순서를 의미
- 자연 석회암 계곡에 토굴을 파고, 토굴 벽면에 사자의 서(고대 이집트 종교와 관련된 내용) 등을 기록한 뒤 시체 및 유물을 안장
. 고왕조시대 왕들의 무덤인 피라밋과는 달리 외부 노출을 피함으로써 도굴 방지를 기도하였으나, 대부분의 유물이 도굴됨.

ㅇ 무덤 형태 및 구조
- 신왕조 초기 무덤(예 : Tuthmosis 3세)은 통로가 직각으로 굽어진 형태이며 후기 무덤(예 : Seti 1세)은 통로가 직선 형태임.
- 또한, 신왕조 초기 무덤은 내부 벽화 바탕색이 엷은 황색(파피루스 색) 이고 사자의 서 내용도 단순한데 반해 후기 무덤은 오렌지색 벽화 바탕에 다양한 내용의 사자의 서를 기록

ㅇ 무덤 발굴
- 신왕조말 정국이 혼란이 야기되자 왕들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별도의 은닉 장소에 이들 시신을 옮기는 작업이 진행됨.
. Deir Al-Bahari 묘역(Hatshepsut 신전 지역)에서 Ramses 2세 및 3세, Tuthmosis 3세, Seti 1세의 시신 발견(1881)
. Amenhotep 2세의 무덤에서 동인의 시신 포함 7구의 왕들의 시신발견(1898)
- 일부 무덤들은 그리스·로마시대부터 발굴되었으나, 대부분의 무덤들이 18-19C 유럽인들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발굴 당시 부장된 유물들은 모두 도굴된 상태였음.
. 그러나, 1922년 영국인 Howard Chather가 발굴한 Tutankamun 왕의 무덤(62호)에서는 시신과 함께 부장품이 모두 발굴되었으며, 현재 시신은 동 무덤내에, 부장품은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음.

(2) Hatshepsut 신전

ㅇ 개 요
- 18왕조 Hatshepsut 여왕(BC 1503 - 1482간 재위)이 8년에 걸쳐 건축한 신전으로서 왕들의 계곡 뒤편에 위치
. 여왕 자신과 여왕의 부친인 Tuthmosis 1세를 기념하기 위한 신전
. 여왕의 시신이 동 신전 지하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짐.
- Hatshepsut 여왕은 원래 Tuthmosis 2세의 왕비였으나, Tuthmosis 2세가 요절하자 첩 소생 아들인 Tuthmosis 3세를 대신하여 왕위에 즉위하였는 바, Hatshepsut 여왕 때문에 20여년간 억압된 생활을 강요받은 Tuthmosis 3세는 여왕 사후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여왕에 대한 복수로 신전의 많은 부분을 파손

ㅇ 신전 구조(3층)
- 1층 좌측 벽화에는 Karnak 신전의 Obelisk에 사용될 화강암을 해외로부터 7개월에 걸쳐 운송해 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우측 벽화에는 여왕이 Amun 신에 제물을 바치는 모습 및 왕들의 조상이 새겨져 있음.
- 2층 좌측 벽화에는 여왕이 Punt(아프리카 홍해 연안지역)로 원정대를 보내 향료 및 몰약을 구입해 오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우측 벽화에는 여왕이 탄생을 신성화하여 자신을 Amun 신의 딸로 묘사한 그림이 남아 있음
. 2층 좌·우단에는 각각 Hathor(풍요를 상징한는 암소신) 신 지성소와 Anubis(자칼 얼굴을 가진 저승의 신) 신 지성소가 있음.
- 3층에는 여러개의 기둥이 있는 큰 홀과 홀 안쪽의 Amun 신 지성소, 홀 좌측의 작은 방들, 홀 우측의 Re-Harakhty(지평선의 Horus) 신 지성소 등이 있음.
. 신전 3층에는 과거에 콥틱교 수도원 건물이 건축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 모두 철거되었음.
(3) Luxor 신전

ㅇ 개요
- 18왕조 Amenhotep 3세(BC 1417-1379간 재위)때 건축하기 시작하여 19왕조 Ramses 2세(BC 1304-1237간 재위)때 탑문(Pylon)이 완공됨.
. 탑문과 입구쪽 광장은 Ramses 2세때 증축된 것이며, 그 안쪽의 내부 광장 및 Amun신 지성소 등은 이에 앞서 Amenhotep 3세때 건축된 것임.
- 동 신전은 나일강 동안에 나일강을 따라 남북으로 건축되었으며 폭 40-70m, 길이 180-200m 정도의 규모이며 태양신 Amun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임(Karnak 신전에 비해 규모가 작음).

ㅇ 주요 구조물
- 스핑크스 대로
. 신전 탑문 앞에서 시작되는 스핑크스 대로는 2Km 정도 떨어진Karnak 신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함.
- 정문 외벽
. 정문 외벽에는 Kadesh 전투(Ramses 2세가 Hittites 족을 격퇴) 장면이 벽화로 묘사되어 있으며, 정문 좌우에 Ramses 2세의 좌상 2개 및 입상 4개가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좌상 2개와 입상 1개만 남아 있음(입상 2개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 또한, 정문 좌우에 원래 2개의 Obelisk가 있었으나 하나는 19세기에 Muhammad Ali 왕이 프랑스에 기증(콩코드 광장에 전시)함으로써 현재 하나만 남아 있음.
- Ramses 2세 광장
. 탑문 안쪽 Ramses 2세 광장에는 Tuthmosis 3세(BC 1504-1450간 재위) 당시 건축된 성소가 남아 있으며, 또한 후대에 건축된 회교 모스크 건물이 광장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음.
. 동 광장 주위를 74개의 기둥이 2중으로 둘러싸고 있음.
- Amenhotep 3세의 열주
. Ramses 2세 광장을 지나면 Amenhotep 3세의 열주(16m 높이의 파피루스 모양을 가진 기둥 14개) 있으며 Ramses 2세의 석상들이 기둥사이에 위치하고 있음.
- Amenhotp 3세의 광장
. 열주를 지나면 Amenhotep 3세의 광장(약 2,400평방미터)이 나오는데 Ramses 2세의 광장과 모양이 유사하며 파피루스 모양의 기둥이 광장 3면을 2중으로 둘러싸고 있음.
- 신전 내부
. Amenhotep 3세의 광장을 지나면 32개의 기둥이 배열된 다주식 광장(Hypostyle Hall)이 나오며 다주식 광장을 지나면 8개의 기둥이 있었던 제1전실에 이름.
. 제 1전실(Ante Chamber)은 서기 4세기에 기둥들이 제거된 후 콥틱교회 예배장소로 변경되었으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
. 제1전실을 지나면 4개의 기둥이 있었던 제2전실이 있고 그 안쪽에 태양신 Amun의 성스러운 배를 모셨던 지성소가 위치함.

(4) Karnak 신전

ㅇ 개 요
- 태양신 Amun 신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Mut 신전, Montu 신전, Khonsu 신전 등 Luxor의 수호신들을 모신 신전들이 기본 신전들로 배치되어 있으며, Tuthmosis 3세의 신전, Amenhotep 2세 및 3세의 신전, Ramses 3세의 신전 등 다수의 소규모 신전들도 복합적으로 배치되어 있음.
-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의 제 12왕조(BC 20세기)때부터 건축되기 시작하여 Ptolemies 왕가(BC 1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에 걸쳐 계속 증축되어 왔으나, 기본 구조는 제 1 탑문(Pylon)이 건설된 제 25왕조(BC 7세기)때 완성된 것으로 알려짐.
- 전체 신전 배치는 남북으로 되어 있으나, Amun 신전은 동서로 배치
. 전체 신전 규모는 남북으로 2km, 동서로 500-600m 정도 크기임.
ㅇ 주요 구조물(Amun 신전)
- Amun 신전 제1탑문(정문) 앞 입구에는 양의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스핑크스들이 도열한 스핑크스 대로가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룩소르 신전 입구까지 연결됨.
- Amun 신전의 제1탑문을 지나면 22왕조때 건축된 대광장(Great Court)이 나옴
. 넓이가 약 8,650평방미터에 달하는 대광장의 북쪽에는 Amun신, Mut신, Khonsu신의 성스러운 배를 모셔두었던 Seti 2세의 신전이 있고, 대광장의 남쪽에는 Ramses 3세의 신전이 있음.
- 대광장을 지나면 제2탑문 앞에 붉은 화강암으로 조각된 Ramses 2세의 석상을 볼 수 있음. 제 2 탑문은 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Horemhep이 건축을 시작하여 19왕조 Ramses 2세때 완성됨.
- 제2탑문을 지나면 열주전(Great Hypostyle Hall)이 나오는데 그 넓이는 5,356평방미터로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성바울 성당의 크기를 합친 것과 같다고 함. 이 열주전은 134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 12개(좌우 6개씩) 기둥은 Amenhotep 3세가 건축하였으며 외곽의 파피루스 모양의 122개 기둥들은 Seti 1세가 건축하기 시작하여 람세스 2세때 완공됨.
. 가운데 12개 기둥과 외곽의 122개 기둥간의 높이 차이를 이용하여 햇살을 받아들이는 창문을 천장에 건축함.
. 고대에 기둥을 채색한 흔적이 아직도 기둥 윗부분에 약간씩 남이 있음.
- 제3탑문은 Amenhotep 3세때 건축되었으며, 제4탑문은 Tuthmosis 1세 때 건축된 것을 세티 2세가 복원함.
. 제3탑문과 제4탑문 사이에는 작은 광장(Small Court)이 위치하며, 동 광장에는 Tuthmosis 1세의 Obelisk가 있음(높이 23미터, 무게 143톤)
. 제4탑문 안쪽에는 Hatshepsut 여왕의 Obelisk가 있음(높이 27.5미터, 무게 320톤)

- Tuthmosis 1세와 3세가 건설한 제5탑문과 제6탑문을 지나면 태양신 Amun의 지성소에 도달함. 지성소는 동쪽과 서쪽으로 개방되어 일출과 일몰 때 햇살이 Amun신의 지성소를 비출 수 있게 설계되어 있음.
. 지성소는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외실은 Tuthmosis 3세가 건축한 것이며 내실은 기원전 3년경 Ptolemise 왕조가 건설함.
- 지성소 남쪽에는 제사장들이 종교의식을 행하기 전 목욕재계하던 성스러운 호수가 있고, 성스러운 호수 입구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던 딱정벌레(Scarab)의 석상이 있음.
. 호수 입구쪽에 Hatshepsut 여왕의 누워있는 Obelisk가 있음.






2. 이집트 약사

가. 고대 이집트(파라오 왕조)

(1) 개 요

BC 8000년부터 나일강 유역에 농경생활을 시작하여 최초의 고대문명을 탄생시켰으며 BC 3100년(Menes 왕이 최초로 남 북 이집트 통합, Memphis에 도읍)부터 BC 332년(Alexander 대왕의 이집트 정복)까지 약 2800년간 지속

고대 파라오 왕조는 30개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였으며 통상 고왕조시기, 중왕조 시기 및 신왕조 시기의 3기로 시대 구분
- 고왕조 시기(BC 3100-2040 약 1000년간) : 10개의 왕조(1-10 왕조)가 변천하는 기간중 약 40명의 왕이 통치
- 중왕조 시기(BC 2040-1567 약 500년간) : 7개의 왕조 (11-17 왕조)가 변천하는 기간중 약 30명의 왕이 통치
- 신왕조 및 후기왕조(BC 1567-332 약 1200년간) 시기 : 13개의 왕조(18-30 왕조)가 변천하는 기간중 약 80명의 왕이 통치

(2) 고왕조 시기(BC 3100-2040)

1왕조의 Menes 왕은 최초의 파라오로서 남 북 이집트 통합후, Memphis에 도읍(BC 3100경)

3왕조 Zozer 왕은 공사장 Imhotep의 도움으로 Saqqarah 지역에 최초의 피라밋(계단식)을 건축하고, 시나이 반도 정벌

4왕조 Khufu왕, Khafre 왕, Memdaure 왕은 Giza 피라밋 건축

5왕조 Unas 왕부터 피라밋에 문자기록(Pyramid Text)를 남기기 시작
- 5왕조 기간중 리비아, 누비아, 시나이 등을 정벌한 기록
- 태양신 Ra를 숭배한 기록 등

6왕조부터 왕권이 쇠퇴하여, 7-10왕조 기간중에는 지방 세력들이 할거
(3) 중왕조 시기(BC 2040-1567)

11왕조 Menthuhotep 2세는 남 북 이집트를 재통합

12왕조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
- Senusert 3세는 지방 족벌들을 평정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확립
- 12왕조 기간중 리비아, 누비아, 시나이, 시리아, 푼트 지역을 정벌
- 12왕조 시대부터 왕과 왕위 계승자간 공동 통치(Co-Regency) 관행 발생

13-17왕조는 힉소스 등 외적의 침입으로 쇠퇴기

(4) 신왕조 및 후기왕조 시기(BC 1567-332)

18왕조부터 국력이 다시 번성하여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 남쪽으로 수단지역까지 지배
- Hatshepsut 여왕은 Thebes(Luxor) 지역에 최초의 신전 건축
- Tuthmosis 3세(Hatshepsut 여왕의 조카) 통치기간중 최대 영토 확장
- Amenhotep 3세는 Luxor 신전, Memnon 거상 등 건축
- Amenhotep 4세는 Akhetaten (Amarnah) 지역으로 일시 천도하고, 전통적 Amun 신 숭배에서 벗어나 Aten 신을 숭배(기존의 제사장 그룹과 갈등을 피하고 정치에도 무관심)
- Amenhotep 4세와 왕비 Nefertiti 사이에서 태어난 Tutankhamun 왕이 요절하고, 그 뒤를 이은 Ay 왕도 단명함에 따라 Horemheb, Ramses 1세 등 장군 출신들이 왕위를 승계(18왕조 멸망)

19왕조는 국력을 정비하고, 신전 건축 등을 통해 고도의 문화 창달
- 19왕조 Seti 1세는 아시아 지역을 정벌하고, Abydos 신전 등을 건축
- Ramses 2세(Seti 1세의 아들)는 Hittites의 침입을 격퇴(Kadesh 전토)하고, Abu Simbel 신전 등을 건축

20왕조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함에 따라 왕권이 약해진 반면 제사장의 권한이 강화됨.

22왕조에 이르러 왕권은 Delta(나일강 하류) 지역에만 미치고, Upper Egypt(나일강 상류)는 제사장들이 관할

25왕조 시기에 Assyria의 침입을 받은 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

27-30왕조 기간은 Persia의 속국으로 전락
- Persia 출신 파라오가 지배

나. 그리스, 로마 시대

(1) Ptolemies 왕조(BC 332-30)

Alexander 대왕은 이집트 정복후 Ptolemy 장군을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하고, Alexandria에 새로운 수도 건설
- Alexandria는 Hellenism 문명의 중심지로 발전
- Fayyum을 농업 중심지로 개발
- Ptolemies 왕조의 해군은 지중해 및 홍해의 해상활동 지배

Ptolemies 왕조는 국가 통합 차원에서 파라오 왕조시대의 건축 양식을 답습한 신전을 건축하고(Dendarah, Philae, Edfu 지역), 파라오 왕조시대의 이집트 신들을 모방한 그리스 신화 도입

(2) 로마 제국시대(BC 30 - AD 337)

로마 황제 Octavian이 로마 장군 Antony와 이집트 여왕 Cleopatra의 연합군을 Actium 해전에서 물리치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합병(BC30)
- 이집트는 로마의 식량 공급기지 및 로마와 인도간의 중계 무역장소 역할 수행
- Philae, Dendarah, Esna 지역에 신전 건축

기독교의 유입으로 콥틱어 사용이 유행하고, 수도원이 창설됨(전통 종교 몰락)
- Constantine 황제, 기독교 포교를 승인(312)
- 성 마가 이집트 포교(4세기초)

이집트에 대한 지배권이 동로마제국(Constantinople)으로 넘어간 후 리비아, 누비아, 페르시아 등의 침입이 5-6세기까지 지속
다. 이슬람시대

(1) 이슬람군의 이집트 정복(AD640-969)

Khalif(이슬람 수장) Umar의 명령에 따라 Amr Ibn Alas가 지휘하는 이슬람군이 동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AC 640)

이후 Ummayya(다마스커스) 왕조 및 Abbasid(바그다드) 왕조 등으로부터 파견된 이슬람 총독이 이집트를 지배
- 이 기간중 많은 콥틱 교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가 콥틱어를 대체
- Tulun 총독 시기에는 바그다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반독립적 세력 형성(Tulun 왕조)

(2) Fatimah 왕조의 이집트 지배(969-1171)

Fatimah 왕조는 예언자 Muhammad의 사위인 Ali(예언자의 딸 Fatimah와 결혼)를 정통 Khalif로 인정하는 시아파 이슬람 왕조로서 순니파 Ummayya 및 Abbasid 왕조의 Khalif 승계에 도전하였으며, 969년 이집트를 정복
- 초기에는 Fatimah 왕조의 Khalif들이 직접 이집트를 통치하였으나, 후기에는 군출신 총독을 파견
-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로 천도

(3) Ayyub 왕조(1171-1252)

이집트를 침입한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Saljuk Turkey의 Sultan이 파견한 Salah Al Din이 십자군을 물리친 후 이집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
- Fatimah 왕조를 폐지하고 Abbas 왕조를 전통 Khalif 승계자로 인정(시아파 척결)
- 십자군의 공격에 대해 카이로 주변에 Citadel 축조(십자군은 Damietta, Mansurah 지역 점령)

(4) Mamluk 왕조(1250-1517)

Ayyub 왕조는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터키계 노예출신인 Mamluk족을 수비대로 활용하였으나, Mamluk족의 반란으로 몰락(1250)

Mamluk 장군 Baybar(후에 Sultan직 승계)는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십자군 세력, Ayyub 왕조 잔당, 아르메니아, 누비아 등을 정벌한 후 순니회교의 보호자 역할 수행

Mamluk 왕조 시대에는 터어키어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내정은 불안하였으나 대외적인 관계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체로 안정 유지

(5) Ottoman Turkey의 지배(1516-1805)

Ottman 왕조의 Salim 1세가 Mamluk 왕조를 멸하고, 이집트를 정복(1517)
- Ottoman 왕조에서 파견한 총독 Pasha가 이집트 지배(후기에는 군출신 귀족 Bay들이 사병의 힘을 토대로 Pasha의 권위에 도전)
- 이집트는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쇠퇴하였으나, 이슬람 종교 중심지로서의 중요성 확보


라. 근대 이후

(1) 19세기의 변천

프랑스의 이집트 지배(1798-1801)
-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1798)
- 프랑스 학자들에 의한 'Rosetta Stone' 발견(1799) 등 많은 고고학적 유물 및 유적 발굴

이집트 근대 왕조 성립
-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769-1849)는 원래 프랑스의 이집트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터어키 왕조에서 파견한 장군이었으나 이집트 정착후 정치, 군사, 경제개혁 단행, 근대 이집트 건설의 기초를 닦고, 수단 정벌(1820), 팔레스타인 지역 및 아라비아 반도 파병 등을 통해 세력 확장
- Ali의 장손 이스마일(Ismail the Magnificent, 1863-79)은 대규모 국토개발계획(수에즈 운하건설, 철도, 통신, 공장, 관개수로 등)을 추진함으로써 외채가 누적(1875 영국 정부의 수에즈운하 주식 43% 매입)
- 1876년 외채 상환이 정지됨에 따라 공채정리위원회(영, 불, 독, 이, 오)에 의한 국가 재정 관리 실시(식민지화의 길)

영국의 군사점령과 통치(1882-1936)
- 1882 영국군의 알렉산드리아 상륙(Arabi 등 민족주의 그룹이 주도한 알렉산드리아 반영 폭동 진압) 및 카이로 점령 이후 영국 총영사에 의한 실질상의 국정 수행
- 1914 영국 보호령 선포(1차 대전중)
- Wafd당(Saad Azgloul 등이 주도)의 범이슬람주의, 입헌제 운동(1919 혁명)
-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쟁취, 국제연맹가입(1936까지 영국의 실질적 지배 지속)

(2) 독립 이후

2차 대전 당시 영국을 도와 연합군에 참전
- 1942년 Al Alamayn 전투에서 독일군 침공 저지

1948년, 제 1차 중동전쟁 참전
-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1947 UN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에 반대한 아랍국가들이 이-팔간 내전에 개입,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배

1952년 Nasser 중령 휘하의 자유장교단 혁명
- 왕정 폐지, 이집트 아랍공화국 건립
- BC 341년이래 약 2300년간의 걸친 이민족 지배 종지부

1956년 Nasser 대통령, 수에즈 운하 국유화
- 영 불 및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으로 제 2차 중동전쟁 발발, 유엔(미 소)의 중재로 휴전(아랍의 자존심 회복, Nasser 대통령은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부상)

1958년 이집트-시리아 아랍연방 공화국 결성(1961 시리아 탈퇴)

1967년 6일 전쟁(제 3차 중동전쟁)
- 소련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 등이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팔레스타인 지원, 이스라엘의 Tiran항 봉쇄 조치 등을 취하자, 미 영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등을 기습 공격
-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가자지구, 요르단 서안 및 골란고원 점령

1970년 사다트 대통령 취임(낫세르 대통령 병으로 사망)
- 친서방 온건노선 추구

1973년 10월 전쟁(제 4차 중동전쟁)
- 시나이 반도 등 회복을 위해 이집트 등 아랍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나 실패(이집트측은 승전 주장)
-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협상의 계기 마련(아랍에 대한 서구 및 이스라엘의 인식 전환)

이집트 이스라엘 관계 정상화
-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미국 중재)
- 1979년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
- 1989년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 철수 완료

1981.10 Mubarak 대통령 취임(사다트 대통령 피살)
- 낫세르의 아랍 민족주의와 사다트의 친서구주의의 장점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중도주의를 지향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항, 걸프전 참전
-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이래 이집트는 아랍권으로부터 소외당했으나, 걸프전 참전계기 아랍의 중심으로 재부상(1979년 평화협정체결 당시 아랍연맹 본부를 이집트에서 튀니지로 옮겼으나, 걸프전 직후 아랍연맹 본부를 카이로로 다시 옮김)

1997년 Luxor 테러사건 발생(외국인 58명 희생)

1999년 이집트 최대 이슬람 과격단체 Gamma Islamiya, 대정부 투쟁종식 선언

1999.10 Mubarak 대통령 4선 당선(6년 임기)
3. 이집트의 종교

가. 고대 이집트 종교

(1) 고대 이집트 종교에 관한 기록

고왕조 시대 : 5-6왕조 시대의 Pyramid Text에 기록
중왕조 시대 : 목관, 석관 등에 기록
신왕조 시대 : 파피루스에 '사자의 서'를 기록하여 시신과 함께 부장

(2) 고대 이집트 신화

창조신화(Heliopolis 지역에서 숭배되는 9신)
- 최초의 혼돈상태(Nun)에서 땅이 생긴 뒤 태양신 Atum (Amun-Ra)이 나타남.
- 태양신으로부터 공기신(Shu)과 습기신(Tefunt)이 태어났으며, 다시 이 두신으로부터 토지신(Geb)과 하늘여신(Nut)이 탄생함
- 토지신과 하늘여신 사이에서 Osiris, Seth, Isis, Nephthys 등 4형제 신이 탄생함.

투쟁 신화
- Osiris는 이집트에 최초로 문명을 도입한 신이었으나, 동생 Seth에 의해 살해됨.
- Osiris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Isis가 Seth의 방해에도 불구, 오랜 세월 끝에 Osiris의 시신을 찾아 저승의 신으로 부활시키고, Osiris와 Isis 사이에서 태어난 Horus는 Seth와의 왕권 쟁탈전에서 결국 승리함.

(3) 종교 의식

왕(Paraoh) 또는 제사장 주재로 매일 신전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 거행
- 성직자는 제사 의식을 통해 악으로부터 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
- 제사의식을 통해 세상이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질서를 유지하도록 한다고 믿음.

일반 대중들은 일상적인 제사의식에는 참여할 수 없었으나, 질병치료 등을 위해 신전 출입은 허용됨.

각 신전들은 1년에 몇 차례씩 고유의 축제 행사를 개최(나일강 범람계기 등 농경생활과 관련)
- Thebes(Luxor)에서 거행된 Opet 축제는 나일강 범람 익월에 Karnak 신전에서 Luxor 신전까지 Amun신이 Mut와 Khonsu신(Thebes의 수호신들)을 대동하고 행진하는 축제행사임.

(4) 사후 세계

Osiris 부활 신화 등의 영향으로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미이라 수술이 왕족 및 귀족층을 중심으로 유행

인간에게는 생명이 끊어져도 파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후세계에 대비 무덤속에 노예의 모형, 배, 식량, 집모형 등을 함께 부장

(5) 고대 이집트 주요신
Amun(Ra) : 태양신, 두 개의 깃털 달린 모자 착용
Anubis : 사자의 신, 자칼 머리를 가진 신
Aten : 태양 원반신, 손 모양의 햇살을 비춤
Hathor : 암소신
Horus : 이승의 신, 매의 머리를 가진 신, Osiris와 Isis의 아들
Isis : 사자를 보호하는 신, 왕조 모양의 모자 착용, Osiris의 아내
Osiris : 저승의 신, 원추형 왕관 착용, Isis의 남편
Montu : Thebes의 전쟁신
Khonsu : Thebes의 월신
Mut : Thebes의 수호신, Amun의 아내
Ptah : Memphis의 창조신
나. 콥틱교

(1) 기독교 포교

성마가, AD 50년경 Alexandria 근교 Baucalis에서 기독교 공동체 창설, 포교활동 시작
- AD 68년경부터 부활절 기념행사 거행

3세기 후반까지 Alexandria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세 확장
- Gnosticism(신비적 직관주의), Mani교 등 이단적인 종교에 대항하기 위해 Alexandria에 교리 문답 대학이 설립됨(Pantaenus, Heraclas 등 기독교 이론가 배출)
- 로마에서는 기독료 박해가 심하였으나, Alexandria에서는 상대적으로 평온 유지

284년(콥틱 순교 원년) Diocletial이 로마 황제로 즉위 후, 이집트 지역을 점령하고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였으나, Constantine 황제는 312년 밀란 칙령을 발표, 종교의 자유 허용
- Athansius파(3위일체설 주장)와 Arius파(예수의 신격 부인)간의 종교재판에서 Athanasius파가 정통으로 인정됨에 따라 Athanasius파가 Alexandria 교구 관할

(2) 수도원 문화 발생

서기 270년경 성 Anthony가 최초로 홍해 연안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수도원 창시
- 성 Makarius, 성 Palemon 등은 Nile Valley쪽에 수도원 설립

성 Pachomius 이래 수도원 조직에 군대식 규율이 도입되고, 노동교육, 신에 대한 헌시 등을 사명으로 하는 수도원 생활 확립
- 이집트에서 발생한 수도원 문화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이디오피아)등지로 파급

성 Shenute, Theophilus 등은 이교도를 배척하고,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 폭력행사 및 파괴활동도 불사

(3) Alexandria와 Constantinople간의 종교 분쟁

Alexandria(예수의 인성보다 신성 강조)와 Constantinople(예수의 인성과 신성 양면성 인정) 간에 예수의 신성문제를 둘러싼 종교분쟁 발생
- Alexandria의 Cyril과 Constantinople의 Nestorius간의 종교 재판(431년)은 Cyril이 승리(예수와 성모의 신성 강조)
- 로마의 Marcian 황제가 451년 종교재판에서 Constantinople의 종교적 우위를 인정하고 Alexandria의 Dioscorus 대주교를 추방한 이래 Alexandria의 일체주의(Monophytism)가 쇠퇴
- Justinian 황제는 Christianity를 유일한 종교로 인정하고 이교도 및 Monophytism 박해

(4) 콥틱 교회 조직

수장 : Alexandria 교황(Pope)
- 수도원 협의체에서 선출
- Alexandria 및 Cairo 교규장 겸임
- 원래 교구 본부는 Alexandria였으나 11세기에 Cairo로 이전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그 밑에 대주교(Archbishop, 해외 교구 관할), 주교(Bishop 국내 교구 및 수도원 관할), 사제(Priest), 집사(Deacon) 신도(Reader) 등의 계층조직으로 구성


다. 이슬람교

(1) 예언자 Muhmmad의 일생

AD 570 Mecca에서 탄생, 삼촌 Abu Talib 밑에서 성장한 후 과부 Khadijah와 결혼하여 2남 4녀를 둠.

40세 되던 해의 Ramadan월(이슬람역 9월)에 Hira산에서 기도중 천사 Gabriel로부터 최초의 계시를 받고, 그후 사람들에게 Allah(신)의 메시지를 전달
- Allah의 계시를 받은지 12년째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서 승천 체험

포교 13년째 Mecca 지도층의 암살기도를 피하여 Medina로 도피(Hijrah)하였으나, 그 뒤 Mecca로 다시 돌아와 Kabah(Ibrahim이 Allah에게 처음으로 제물을 바친 곳)의 우상들을 파괴하고 Mecca 및 Arabia 반도 사람들을 Muslim으로 개종시킴.
.
Hijrah 이후 9년째 되던 해에 약12만명의 Muslim 신도를 이끌고 성지 Mecca로 순례하였으며(Hajj), 그 이듬해 사망함.

Muhammad 사후 Abu Bakr, Umar, Uthman, Ali 등 제자들이 Khalif직을 승계하면서 이슬람을 전파(북아프리카, 아시아지역 등)

2) 코란(Quran)의 주요 내용

예언자 Muhammad가 천사 Gabriel을 통해 계시받은 Allah의 메시지를 후대의 제자들이 엄격한 검증작업을 거친후 그대로 기록
- 신앙편, 봉사편, 거래편, 도덕편, 처벌편 등 5개장으로 구성

알라는 유일한 신이라는 점, 알라와 인간을 매개시켜주는 천사는 알라의 충실한 종이라는 점, 코란은 알라의 계시를 가장 진실하게 수록하였다는 점(기독교의 성경도 알라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코란과 불일치하는 부분은 인간에 의해 잘못된 내용이 수록되었기 때문임), 인간은 사후세계에서 다시 부활하여 영생한다는 점,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라 예정 조화된다는 점 등 6가지에 대한 신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신앙편)

이슬람 신자(Muslim)는 ① 알라가 유일신이고 Muhammad는 알라의 메신저임을 증언하고, ② 하루에 5번 기도하며, ③ 수입의 일부를 신에게 바치고, ④ Ramadan월에 금식하고, ⑤ Mecca로 성지순례하는 등 5대 의무를 수행하여야 함(봉사편)

결혼, 상속, 상거래에 관한 코란의 규범을 기술(거래편)

이슬람 신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정서적인 측면을 기술(도덕편)

인명 및 재산에 피해를 주거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 강조(처벌편)
- 이슬람의 법체계(Shariah)는 최고의 법인 코란, Sunnah(예언자 Muhammad의 언행), Ijma(이슬람 학자들의 견해), Qiyas(유추 해석) 등으로 구성되며, 동 법규범 순서에 따라 적용됨.
(3) 이슬람 종교 조직

이슬람에는 성직자 제도가 없으며 모스크(이슬람 사원) 예배는 연장자인 남자 또는 이슬람 교리에 밝은 남자가 인도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은둔주의 또는 수도원 생활 등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 교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그룹(Sufi)을 형성하여 사회현실에 참여하면서 회교원리주의에 따라 사회 개혁을 추구하려는 전통이 있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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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이집트[ Egyp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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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로, 1882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 보호를 이유로 이집트 정부를 장악하였다. 1922년 이집트 왕국으로서 부분적으로 독립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운동과 반영국운동이 격화하면서 완전한 주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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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국기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이집트 아랍 공화국이다.

  • 위치

    아프리카대륙 북동부

  • 경위도

    동경 30° 00

  • 면적

    1001450

  • 해안선

    2450

  • 수도

    카이로

  • 종족구성

    이집트인 (98%), 베르베르인· 누비아인· 베두인· 베자인 (1%)

  • 공용어

    아랍어

  • 종교

    이슬람교 (90%), 콥트교회 (9%)

  • 건국일

    1922년 02월 28일

  • 국가원수/국무총리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Mohamed Hussein Tantawi, 최고군사위원회의원장)

  • 정체

    공화제

  • 통화

    이집트 파운드(£E)

  • 인터넷도메인

    .eg

  • 소리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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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지도

정식명칭은 이집트 아랍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이다. 북동쪽으로 이스라엘가자 지구,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는 수단과 국경을 접하고, 북쪽과 동쪽으로 지중해와 홍해(紅海)가 있다. 국토의 일부인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과 접경하여 중동지방에 걸쳐 있다. 고대문명 발상지로, 16세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으며 오늘날 아랍과 중동지역에서 정치적·문화적인 중심국가를 이룬다. 아랍에서는 '2개 해협' 또는 '국가'라는 뜻의 아랍어(語)인 '미스르(Misr)'라는 국명으로 부르며 현지 발음으로는 '마스르'라고도 한다. 행정구역은 26개 무하파자(muhafazah)로 되어 있다.


이집트 주요도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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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아프리카 대륙의 북동부에 있는 나라

동경 30° 00"", 북위 27° 00"", 면적 약 100만㎢,
인구 약 8,000만 명(2007년)
정식명칭은 이집트 아랍공화국으로 1922년 이집트 왕국에서
부분적으로 독립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완전한 주권을
찾았다.

 

[이집트]

이집트의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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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피라미드

기자 피라미드 쿠푸왕, 카프레왕, 멘카우레왕, 스핑크스가 있는 곳이다. 이 피라미드 들은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서 있고, 현재 주변으로 기자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이집트의 지형은 국토의 면적에 비해 단순하다. 나일강 하곡(河谷)과 그 유역의 삼각주평야, 수에즈 운하 연안, 이곳을 제외한 넓은 사막지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나일강 하곡과 삼각주평야를 형성하는 나일강은 상류의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한 청(靑)나일과 아프리카 중동부 빅토리아호(湖)에서 발원한 백(白)나일에 합류하여 6,671km를 흘러 지중해로 유입하는 대하천이다. 아스완 이하의 사막지대를 통과하는 외래하천(外來河川)으로 그 지류의 대부분이 이집트 국내에 있다. 이 하천의 상류부는 여러 군데의 급경사를 이루면서 흐른다.

아스완에서 카이로까지는 양측에 사막으로 된 절벽을 끼고 너비 3~25km의 좁은 지역의 충적지 가운데를 띠[帶] 모양의 하천이 흘러간다. 카이로에서 그 하류 일대에 걸쳐 약 2만 4000㎢의 면적을 가진 대삼각주평야가 전개된다. 이 삼각주평야는 이 하천이 운반·퇴적한 물질로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하며, 퇴적층이 매우 두꺼운데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시추결과는 163m에도 기저(基底)의 암반에 달하지 못했다. 이 삼각주평야와 나일강 하곡평야는 곡창지대를 이루는 인구조밀지역이다.

하천 유수량의 조절이 어려웠던 옛날에는 하천 유수량의 연변화(年變化)가 하안의 충적지에서 살고 있는 이집트인들에게 많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로 그 위협은 사라졌다. 아스완 남쪽으로 인공호인 나세르호가 생겨 이 인공호의 물을 이용하여 사막지방의 관개를 통한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나일강은 농경을 하는 농부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생명선이 되는 젖줄이다. 나일강 동쪽에 마자 고원과 갈랠라·키블리아 산지 등이 발달해 있다.

이 곳은 결정질(結晶質)의 암석과 석회암으로 된 단조로운 고원과 대지가 남쪽의 에티오피아 고원으로 연이어 발달해 있다. 이 고원의 남부에 하마타 산지(1,977m)가 남서쪽을 향해서 점차로 높아져 해발고도 1,900m 정도에 이른다. 홍해안 쪽은 바다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해안을 따라서 가느다란 해안평야가 발달해 있다. 홍해의 수에즈만(灣)과 아카바만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시나이 반도가 있다. 이 반도는 남으로 갈수록 높아져서 카트리나산(2,637m)에 이르러 최고점이 된다.

사막과 암산으로 된 불모의 지역이기는 하나 석유자원의 매장으로 이집트 경제에 큰 역할을 한다. 시나이 반도와 본토 사이의 수에즈 지협의 저지대에는 한무리의 호소들이 발달해 있다. 수에즈 운하는 이 호소들을 연결해서 굴착하여 만든 것이다. 나일강의 서쪽은 인간이 살기에는 어려운 사막이다. 파이윰 저지·카타라 저지 등에 분포한 오아시스들을 제외하면 거의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하다.

이들 저지에서는 석회암의 틈을 따라서 곳곳에 지하수가 용출하여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물 이외에도 샘을 파서 오아시스 관개농업에 이용한다. 집약적인 농경지가 발달하여 인구밀도가 높다. 바하리야·파라피라·다흘라·하르가·시와 등 5개의 오아시스가 유명하며 1600년경부터 이집트인에 의해 농경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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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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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기후는 대부분의 지역이 건조기후에 속한다. 북회귀선이 이 나라의 남부를 지나고, 북부의 지중해연안은 대체로 북위 31°30'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일강 계곡과 지중해 연안의 좁은 해안지방을 제외하면 전국이 사막기후가 된다. 내륙으로 갈수록 건조가 심해지고 기온이 높아진다. 서부나 남부지방에서는 수년간 비가 오지 않은 지역도 있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겨울에 약간의 비가 내리는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며 기온도 1년을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로 나누고 있다. 4~10월은 고온이며 공기가 건조한 하계(夏季)이고, 11~3월의 동계(冬季)에는 낮에는 덥고 야간에는 서늘하다.

또한 환절기에는 남쪽에서 저기압이 진행되어 모래를 동반한 열풍이 내습해온다. 이것이 유명한 캄신이라는 바람이며 때로는 40℃ 이상의 고온을 몰고오는 남서의 열풍이다. 동계에는 지중해 방면에서 불어오는 북풍이 비를 다소 내리며 그 영향은 대체로 나일강 삼각주와 해안의 좁은 범위에 미치는 데 불과하다. 연강수량 100mm 이상이 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거의 비가 없는 지대로서 나일강의 혜택으로 관개 용수의 편의를 얻을 수 없는 곳은 곧 불모의 사막인 것이다. 기온의 교차가 매우 심하고 여름에는 사막에서 낮에 50℃ 이상의 극단적인 고온현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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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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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아의 농민

이집트 주민은 대부분 코카서스 인종인 함족에 속한다. 총인구의 대부분은 고대(古代)이집트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콥트인 및 누비아인으로 약 60%가 펠라라고 불리는 농민으로 구성된 농촌인구이다. 그 밖에는 수도 카이로를 포함한 도시지구의 거주민으로 아라비아 반도팔레스타인의 아랍혈통을 받은 자와 투르크·아르메니아의 피를 이어받은 자 등이 이주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함어계의 언어가 사용되어 문서 등에 상형문자 및 그의 초서체(草書體)가 사용되었으나 고대 이집트의 멸망과 더불어 그 언어는 콥트어로서 국지적으로 존속해 왔다. 9세기경에 아라비아가 정복한 이래 이집트 전국에 아랍어가 급속히 전파되어 마침내 국어가 되었다. 1964년 헌법에서도 이슬람교가 국교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슬람을 문호의 기반으로서 더욱 강조한다. 국민의 93.7%가 이슬람교도인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하고 나머지 6.3%는 콥트파(東方敎會系諸派의 하나)의 그리스도교도이다. 그 외 유대교도 등이 약간 있다.

 

[이집트]

이집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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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푸왕 피라미드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13km 떨어진 기자에 위치해 있는 이집트 4대 왕조 쿠푸왕의 무덤이다. 이집트 전 지역에 존재하는 피라미드 중 가장 큰 규모로 대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지금부터 6,000년 전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의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나일 삼각주의 하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이집트로 나누어졌다. 상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었다. 하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 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서 활발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그후 1,0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 하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무렵 상이집트의 나르메르(혹은 메네스)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어 수도는 중간지점인 나일 델타 곡창지대가 시작되는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나르메르의 통일은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통일 후, 이집트는 강력한 사회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이 시대를 제1왕조, 제2왕조라 하는데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 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집트 인들의 문자 체계인 히에로글리프도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역법이 완성되었다. 기원전 약 2800년경의 제3왕조의 2대 군주 조세르는 이집트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그의 후계자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피라미드를 기자에 세우게 된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 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이기도 했던 파라오와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제5왕조 군주들이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 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 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7~10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된다. 마네토의 제11왕조(기원전2133~1991년)와 제12왕조(기원전 1991~1785년)에 해당되는 중왕국시대는 테베의 왕자 멘투호텝 2세가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이룩한 상, 하이집트의 재통일도 시작된다.

통일은 모든 계층이 이집트 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다 주었으며, 절대 다수의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받았다. 멘투호텝 2세는 통일 후 바로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시나이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상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메네메트가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네메트 3세의 재위 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파라오들이 인간 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 문화와 사상이 밀려 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 쪽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라고 부른다.

아시아 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곡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를 제2중간기라 부른다. 제18왕조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서 소탕하고,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후 투트모스 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전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나일 제4폭포'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 세력은 아멘호텝 3세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하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 4세는 이집트의 모든 파라오 중 가장 논쟁이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교의 신 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를 중부 이집트의 알-아마르나로 옮기고 신도시 아케타텐(아텐의 지평선)을 건설하였다.

신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가의 계곡'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 등으로 확인된다. 제19왕조는 람세스 1세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 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 2세는 66년간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었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히타이트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20왕조의 오랜 평화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왕조가 이어진다. 제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리비아계 군주들이 통치하고 누비아인들이 상이집트 전역과 중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며, 에티오피아 군주들과 앗시리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기원전 663~332년의 후기왕조 시대는 이집트를 지배하던 아시리아인들을 무찌른 하이집트 델타 지역 사이스의 왕자 프삼티크 1세의 제26왕조로부터 시작된다. 2대 군주 네코의 시대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해군력이 증강되었으며,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가 건설되었고, 특히 이집트와 그리스 사이에 교역이 발달하며, 많은 그리스인들이 상인으로서, 왕가의 용병으로서 이집트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제27왕조 시대에 페르시아의 군주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총독을 두어 다스렸으나 이집트인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외세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조각과 문학이 흥성했다.

페르시아 군주들의 암살, 사망, 아테네와의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전 등을 계기로 델타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페르시아 봉기가 일어났고, 그때마다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제28왕조를 연 사이스 출신 아미르타에우스에 의해 반 페르시아 투쟁은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제29왕조시대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세력 균형에 힘입어 이집트가 다시 국제 무대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제30왕조에서는 줄곧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제30왕조의 마지막 군주 넥타네보가 페르시아군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누비아로 도망함으로써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페르시아 군주들의 제31왕조가 들어섰다.

기원전 332년 가을 알렉산더 대제의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 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우여곡절을 거쳐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롤레마이오스 왕가에 권력 투쟁이 빈발하여, 전성기 때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어, 마지막 100년은 로마의 보호 없이는 독립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야심파이고 보기 드물 게 유능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살로 고대 이집트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이집트의 전통을 존중하였고, 이스스 숭배를 비롯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이 로마까지 파급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이집트로 전파된다. 기독교는 발생 초기 박해를 받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보호 속에서 급격히 발전한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집트의 모든 우상 신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바 있다.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에서의 토착종교는 거점을 점점 잃어 갔다. 기독교 수도자와 은둔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세계 최초로 이집트에 수도원이 등장하였다. 성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대한 번역물이 주를 이루는 풍부한 콥트문학이 이집트에서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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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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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이집트는 왕국으로 독립하여 후아드가 국왕이 되고 헌법을 제정하여 와후드당(黨) 내각이 성립하였으나 영국수에즈운하 주류권(駐留權) 등 많은 특권을 보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운동이 격화하여 1946년에 영국군 철수의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세부검토의 단계에서 팔레스타인전쟁이 일어나 국내의 반영국운동이 더욱 격화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1952년 7월 나세르 혁명이 일어나 장군 나기브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공화제는 1952년의 토지개혁, 1956년의 공화국 헌법공포와 J.A.나세르의 대통령취임 등 순조롭게 발전하였으나 1956년의 수에즈전쟁을 계기로 반제국주의적 경향을 강화하여 수에즈운하 접수, 미스르은행 국유화 등의 정책과 국민을 총동원하는 ‘국민연합’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적극적 중립주의가 강조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58년 2월 시리아와 합방하여 아랍 연합공화국을 결성하여 전 아랍의 통일을 목표로 하였으나 시리아에게 적용한 급격한 혁신정책이 실패하여 1961년에는 시리아가 이탈했다.

시리아 분리 후, 제2차 농지개혁·국민헌장답변확정·‘아랍 사회주의연합’ 결성 등 대폭적인 사회주의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내정세의 동요와 함께 국제정세도 악화되어 1967년 6월에 이스라엘과의 사이에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아랍측의 대패(大敗)로 끝나 시나이반도가자지구가 점령되고 수에즈운하는 폐쇄되었다. 대통령 나세르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일시 사퇴하였으나 국민의 요청에 의하여 전후처리에 임했다. 이스라엘과의 화평교섭·국내정치·경제정세의 부흥 등은 어려운 상황이었고 팔레스타인 게릴라요르단 정부군의 내전을 종결시키는 카이로협정을 성립시킨 직후, 나세르는 병으로 급사했다.

이집트는 정치적으로는 의회 민주주의를 답변확정하고 있다. 1977년 6월의 법률제정에 의하여 모든 정당들은 아랍 사회주의동맹의 인가를 받은 정당만이 합헌정당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추인되었다. 이 법률제정 이후 인민의회 의원의 정당별 변화가 생기게 되어 국민진보동맹은 정당활동을 정지당하게 되었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M.A.사다트는 우선 나세르 노선의 계승을 주장하고 집단지도 체제를 추진하였다. 사다트는 영구헌법의 제정, 아스완 하이댐의 경제건설에의 이용, 소득배증계획 등을 실시하고 1971년 9월에 아랍 공화국 연방의 결성에 의한 국명(國名)을 이집트 아랍 공화국으로 변경하였다. 사다트는 미국의 중동평화 노력에 주목하여 소련과의 유대관계를 끊는 동시에 미국과의 복교(復交)를 실현하여 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으로 전환하고 나세르주의로부터 탈피하였다.

1977년 11월 이후부터 중동문제의 독자적 해결을 위한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 1978년 9월의 캠프데이비드협정, 1979년 3월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체결 후 시나이반도를 돌려받았다. 1981년 10월에 사다트는 카이로 근교에서 총격으로 피살되었다. 같은 달 14일에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7, 1993년의 당선에 이어 1999년 9월 26일 다시 4선에 성공하였다.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가 아니며 454명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단일후보를 선출한 뒤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당락을 결정하는데, 대통령 무바라크는 1999년 7월 국민민주당의 추천을 받아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야당은 이러한 선거방식을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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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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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와 나일강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내를 흐르는 나일강. 나일강과 그 삼각주 지대의 수로에 의한 수운도 발달하였다.

이집트의 주요산업인 농업은 나일강 계곡과 삼각주평야 및 몇 군데의 오아시스 주변에서 집약적으로 행해진다. 한 농토에서 연간 2∼3모작으로 각종 작물을 생산한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으며, 경제작물로는 목화재배가 중심이고, 식량작물로는 옥수수, 밀, 보리, 쌀, 콩, 과실, 사탕수수 등이 재배되고 기타 오아시스의 관개농업지대에서 대추야자·기름야자 등을 생산한다.

이집트의 농업발전에 저해요인이 되어 왔던 토지제도는 1952년 나세르 혁명정권 수립 이후 농지개혁의 단행으로 개선되었고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농업생산구조가 변화하여 경지면적이 대폭 증가하고 있다. 또 농산물가공도 공업화 계획의 일환으로 발전하여 사탕수수의 제당 및 식료품가공업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이집트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석유자원은 시나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내 유전지대에서 생산된다. 대부분은 국영 정유공장에서 정제되는데, 수에즈항을 중심으로 정유공업이 발달하였다. 이 석유자원을 원료로 한 석유화학공업의 건설과 새로운 유전개발을 위한 방법이 강구되고 있다. 천연가스 외에 광물로는 아스완 부근의 철광석, 에시바이야 등의 인광석(燐鑛石), 시나이 반도의 망간광(鑛)과 알렉산드리아의 소금 등이 있다. 중공업 제품으로 자동차·트레일러와 농업용 트랙터·디젤엔진 등이 생산되며 전통적인 섬유공업·방직공업이 발달해 있다. 교통은 카이로를 중심으로 하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이 가장 발달해 있다.

나일강은 수단에 이르는 내륙수로교통로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농산물과 광산물의 수송을 주로 한다. 이집트에서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크며 1967년 중동전쟁으로 폐쇄되어 큰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항공교통은 국영 이집트항공이 있고, 카이로 공항은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지니며 아프리카∼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항공의 요충지이다. 이집트항공사(社)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최대의 항공사의 하나이다. 중요 항구로는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 운하를 낀 포트사이드와 수에즈항 등이 있다.

주요수출품은 석유와 석유제품, 원면, 면사와 면제품이며, 주요 수출대상국은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미국, 네덜란드 등이다. 주요 수입품은 식료품, 기계류와 수송장비, 화학제품, 윤활유, 연료와 광물이며, 주요 수입대상국은 미국, 독일이다. 이집트의 수출은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유, 원면 등 1차산품이 주종을 이루어 1차산품의 국제시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반면, 수입은 식량 및 중간재, 자본재 등으로 대외 의존비율이 높다. 1998년 동아시아외환 위기, 유류가 하락 등으로 수출이 큰 비율로 감소하였으나, 1999년 이후 유류가 상승 등에 힘입어 2000년에는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2000년 GDP 성장률은 6.5%이고 수출은 64억 달러, 수입은 178억 7000만 달러로 무역수지 적자폭이 매우 크다.

 

[이집트]

이집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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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과밀한 나라 중 하나이다. 농촌의 잠재실업자와 도시의 실업자는 상당한 수에 이른다. 각지에 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고, 하루 5회의 예배와 단식월(斷食月:라마단)의 준수 등 주민의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이집트인들의 생활양식과 풍습에 이슬람 문화의 종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남녀격리의 습관·남존여비의 경향 등이 있으며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었으나 국민생활의 근대화와 더불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농촌지역에는 고대의 가족제도가 있고, 메카 순례자를 존경하는 등 아직도 이슬람의 계율이 충실히 지켜진다.

이집트는 아랍세계의 교육·문화의 중심으로 아즈하르대학과 같은 10세기 이래의 이슬람학술의 본거지와 가장 새로운 교육·문화시설도 있다. 6∼12세까지는 의무교육이고 학비는 국가가 부담하지만 문맹률은 40%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은 아즈하르대학 외에 카이로·알렉산드리아·아일샴 대학 등이 있고, 카이로에 미국계의 아메리칸대학이 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유물을 보존·관리하는 박물관과 연구기관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집트]

이집트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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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눔 신전

이집트 아스완. 엘레판티네 섬 남쪽에 위치해 있는 크눔 신을 모시고 있는 신전이다.

이집트카이로 부근 룩소르아스완 부근의 유적보호와 관광자원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유적 중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어 피라미드를 건조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타바에서 발전된 것이다.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 최고(最古)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조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오벨리스크(obelisk)는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며 태양신 신앙과 관계 있다. 문화의 꽃은 언어라 할 수 있는데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들 수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서기전 3,000년을 전후하여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기록되었는데 최근의 발견으로 이집트에서 먼저 상형문자가 발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세금에 관계된 것이어서 최초의 문자는 역시 경제적인 필요에 의해 사용되기시작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고대문화의 발달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고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의 발달도 아랍 세계에서 가장 앞서며 문학·미술·무용·연극·영화 등의 분야에서도 전통적인 것과 현대작품이 공존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집트]

이집트의 대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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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1963년 8월에 북한과 수교하였고, 한국과는 1995년 4월에 수교하였다. 1967년, 1975년 중동전쟁 때 북한의 군사지원으로 친북한 외교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1970년 중반 이후 이집트의 문호개방정책으로 외교관계로 발전, 1980년대 이후 실질 협력 관계를 수립하였다. 1999년 2월 총리 김종필의 이집트 방문 후 4월에는 대통령 무바라크의 방한으로 양국관계가 더욱 진전되었다.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항공협정, 1989년 문화·과학·기술협력협정, 1997년 투자보장협정, 1998년 무역협정, 1998년 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에는 과학기술양해각서, 외교연구원간 협력의정서에 서명하고 원자력협력의정서에 가서명하였다. 2000년 현재 대한수입 5억 1590만 달러, 대한수출 2억 597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납사, 동 및 합금, 원유 등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및 부품, 일반기계, 직물 등이다.

 

이집트고대 문명의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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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

    아프리카 > 이집트

  • 분야

    국가

1. 이집트는 어떤 나라?

이집트의 정식 명칭은 이집트아랍공화국(The Arab Republic of Egypt)이고, 면적은 100만㎢로 한반도의 다섯 배이다. 인구는 약 8,368만 명(2012년 기준)이고, 98%가 이집트인·베드윈인·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된 햄족이며, 그 외 그리스인·누비아인·아르메니아인 등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의 90%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6.9%는 콥틱교를 믿으며 공용어로는 아랍어를 사용하며 이집트만의 독특한 억양이 있어 주변 국가와 구별된다고 한다. 화폐 단위는 LE(이집션 파운드)이고, 공공기관과 은행은 모두 금요일에 쉬며 근무 시간은 오전 8시에서 오후 2시까지이다.

이집트의 국기 - 빨간색은 투쟁의 피, 하얀색은 미래와 희망, 평화, 검정색은 식민지 시대를 나타낸다.

2. 이집트의 자랑, 스핑크스(Sphinx)

스핑크스는 이집트에서 기원한 상상의 동물로,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왕의 권력을 상징한다. 동물의 왕 사자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성격이 달라진다. 이집트 기자에 있는 제4왕조(기원전 2560년~기원전 2450년) 카프라 왕 피라미드의 스핑크스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는 여성의 얼굴에 날개 돋친 사자 모습을 한 괴물로 그려졌다. '아침에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낸 뒤 못 맞추면 잡아먹었으나, 오이디푸스가 나타나 '사람은 어려서 네 발로 기고 커서는 두 발로 걸으나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으니 세 발이다'라고 풀자 스핑크스는 부끄러워하며 물 속에 몸을 던져 죽어 버렸다고 한다.

기자 지역의 스핑크스 - 카프라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카르나크 신전의 양 머리 스핑크스 - 스핑크스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집트[ Egyp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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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 북동쪽에 있는 이집트는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한 곳이에요. 나일 강을 중심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누어져 있던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통일 국가를 이루었어요.

고대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를 거치며 크게 발전했어요. 그러다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았고,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어요. 이후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여러 차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1953년이 되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에 놀라운 문명을 이루었어요. 국가 체계를 완성한 것은 물론, 나일 강의 범람을 대비한 측량술과 기하학이 발달했고, 오늘날 달력의 기원인 태양력을 만들어 사용했지요. 또 파피루스로 종이를 만들어 문자를 기록했고, 수학도 발달해서 십진법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미라를 만들면서 의학도 발달했지요.

고대 이집트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왕국 시대 왕들의 무덤인 피라미드예요. 태양신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 사람 머리에 사자 몸을 가진 스핑크스도 이집트 문명을 상징하지요. 룩소르에 있는 왕들의 계곡에는 왕들의 무덤 유적과 거대한 신전 유적들도 남아 있어요.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유적들을 보기 위해 이집트를 찾아온답니다.

오랫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은 이집트는 많은 국민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고, 수도인 카이로에는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피라미드 지역
룩소르
이슬람 도시 카이로


이집트[ Egyp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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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 북동쪽에 있는 이집트는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한 곳이에요. 나일 강을 중심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누어져 있던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통일 국가를 이루었어요.

고대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를 거치며 크게 발전했어요. 그러다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았고,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어요. 이후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여러 차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1953년이 되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에 놀라운 문명을 이루었어요. 국가 체계를 완성한 것은 물론, 나일 강의 범람을 대비한 측량술과 기하학이 발달했고, 오늘날 달력의 기원인 태양력을 만들어 사용했지요. 또 파피루스로 종이를 만들어 문자를 기록했고, 수학도 발달해서 십진법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미라를 만들면서 의학도 발달했지요.

고대 이집트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왕국 시대 왕들의 무덤인 피라미드예요. 태양신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 사람 머리에 사자 몸을 가진 스핑크스도 이집트 문명을 상징하지요. 룩소르에 있는 왕들의 계곡에는 왕들의 무덤 유적과 거대한 신전 유적들도 남아 있어요.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유적들을 보기 위해 이집트를 찾아온답니다.

오랫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은 이집트는 많은 국민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고, 수도인 카이로에는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피라미드 지역
룩소르
이슬람 도시 카이로

 

이집트콩[ Chick Pe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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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분

    서양 > 식재료 > 곡류 용어 > 두류

이집트 또는 병아리콩이라고도 한다. 일반 콩보다 조금 크며, 모양이 불규칙하게 생겼다. 주로 지중해, 인도, 중앙아시아 지역의 요리에 쓰인다. 삶아 샐러드나 으깨서 퓌레로 사용한다.

 

이집트문자[ Egyptian scrip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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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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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라를 싸는 천(기원전 300-200)

미국 워싱턴 D.C.

서체에 따라 ① 신성문자(神聖文字:히에로글리프), ② 신관문자(神官文字:히에라틱), ③ 민중문자(民衆文字:데모틱)의 3종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한자의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성문자는 상형문자이며 고대 이집트의 전 기간을 통하여 사용되었다. 주로 신전의 기둥이나 벽면, 오벨리스크 등에 음각하였으며 왕의 기념물이나 종교관계 서적 등에 사용하였다. 채색된 것도 많으며 예술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신관문자는 신성문자의 윤곽을 흐트려서 주로 파피루스 등에 흘려 쓰는 데 사용하였다. 민중문자는 BC 8세기 이후 일반인이 일상생활에 사용한 것이다.

이들 문자는 대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해 가로쓰기한다. 세로로 쓸 경우도 오른쪽에서부터 읽는다. 왕명(王名)은 카르투슈라고 부르는 액자 속에 써 넣었다.

이집트문자는 회화문자에서 발달한 것이며 원래 그 문자가 표시하는 대상물을 의미하는 표의문자였다. 그것이 후에 음만을 표시하는 표음문자가 되었다. 표음문자에는 둘 이상의 음을 가지는 음절과 일자일음의 알파벳이 있다. 이집트문자에는 모음 기호가 없으므로 어떻게 읽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네브수메누 무덤의 석조 비문

미국 워싱턴 D.C.

 

[이집트미술]

이집트미술[ ─美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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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생겨나고 발전한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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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비문

미국 워싱턴 D.C.

구석기시대 이후 로마시대에 이르는 고대 이집트 미술은 BC 3100년경 제1왕조가 성립된 시대부터 점차 원시적 단계를 벗어나 제4∼5왕조시대에는 이미 고전적 양식을 보여줄 정도로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제12왕조, 제18∼19왕조, 제26왕조 등의 시대에는 특히 그 활동이 눈부셨다. 이집트인은 옛날부터 자연현상이나 동물 등을 신으로 숭배하였고, 또 내세(來世)를 믿어 사자(死者)를 후장(厚葬)하였다.

예술은 이와 같은 종교관에 입각하여 영원성을 조형화(造形化)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견고한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져서 불변불후를 이상으로 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종교교의(敎義)가 일단 정해지면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양식도 수천 년에 걸쳐 지극히 미미한 변화밖에는 없었다.


미이라를 싸는 천(기원전 300-200)

미국 워싱턴 D.C.

 

[이집트미술]

이집트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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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 전체 길이 약 70m, 높이 약 20m, 폭 약 4m에 달하는 거대한 스핑크스는 자연석 그대로 조각한 작품이다.

건축의 유구(遺構)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분묘와 신전이다. 이집트인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양자의 분리는 죽음이지만, 사자(死者)는 영혼이 머무는 곳인 시체가 멸하지 않고 공물(供物)을 받을 수 있다면 죽은 자도 저승에서 계속 산다고 믿었다. 시체를 미라로 만든 이유라든가, 또는 사자의 영원한 집인 분묘를 정비한 이유가 모두 이러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건축상 주목되는 최초의 분묘형식은 왕조 성립기 전후에 나타난 마스타바(아랍어로 걸상)라는 왕과 귀족의 묘로서, 처음에는 지하에 현실(玄室)과 그 부속실을 만들고 지상의 상부구조에 몇 개의 방을 두어 부장품을 넣었으며, 그 위를 양건(陽乾) 벽돌로 쌓아올려 직사각형의 대(臺)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마스타바는 고왕국시대에 들어와서 귀족의 묘로 발달하여 현실은 땅속 깊숙이 파고들어간 수혈(竪穴)에 접하여 만들고 상부구조의 측면은 경사가 져서 사다리꼴을 이루었으며 그 안에 영혼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과 예배소, 조상실(彫像室)을 배치하였다. 제3왕조의 조세르왕은 사카라에 6단의 마스타바를 쌓아올린 형태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구축하였다. 제4왕조부터 왕의 분묘는 정사각형 추형(錐形) 피라미드가 된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북쪽부터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등 왕들의 것인데,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5 m, 평균 2.5 t의 돌이 230만 개나 쓰인 것으로 추정되고, 현실은 석축(石築)의 거의 중앙에 있다.

이러한 피라미드는 정사각추의 석축과 예배소, 나일강변의 신전, 예배소와 신전을 연결하는 지붕 덮인 낭하 등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1왕조의 멘투호테프 2세 및 3세의 분묘는 테베의 델 엘 부하리에 있으며, 마스타바에 피라미드를 얹은 형태이다. 제12왕조의 왕들은 파이윰에 피라미드를 세웠으며, 그것은 규모가 작고 재료도 양건벽돌이었다. 중왕국시대에 중(中)이집트 등 사막이 나일강 가까이까지 뻗은 지방에서는 귀족의 분묘를 절벽 중턱에 설치하였다. 신왕국시대 왕들의 분묘는 테베의 ‘왕가의 계곡’에 횡혈식으로 만들어졌고, 도굴에 대비하여 입구는 비밀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위한 장제전(葬祭殿)은 멀리 떨어진 사막의 대지 끝이나 평지 위에 세워졌다.

델 엘 부하리에 있는 하트솁수트 여왕의 장제전은 경사진 길로 연결된 3개의 단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데, 중정(中庭) 둘레에 콜로네이드(列柱)를 세운 형식으로, 배경을 이루는 단애의 경관과 잘 조화되고 있다. 람세스 2세의 장제전인 라메세움, 메디네트 하부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장제전 등은 사자와 함께 신들이 모셔져 있었으므로, 그 설계는 신전과 거의 비슷하였다. 신전에는 고왕국시대의 것으로 제5왕조의 태양신 ‘라(Re/Ra)’의 신전형식이 밝혀져 있으며, 상하가 압축된 모양의 오벨리스크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중왕국시대의 신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은 신왕국시대 및 말기의 것이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전형식은 카르나크(테베)의 콘수 신전에서 볼 수 있다. 양쪽에 스핑크스가 늘어선 참배도(參拜道)가 끝나는 곳에 오벨리스크를 전면에 세운 탑문(塔門)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뜰이 있고 좌우에 별주랑(別柱廊)이 있다. 뜰 안쪽에 현관이 있으며, 그 곳을 지나면 다주실(多柱室)이 된다. 다주실 안쪽은 신관(神官)이나 왕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특별한 날에 콘수 신상을 얹어 나르는 성주(聖舟)를 격납(格納)하는 방과 그 밖의 방이 있고, 가장 안쪽 벽에 붙은 콘수 신상을 안치하는 방을 중심으로 3개의 방이 있다.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 룩소르의 신전 등은 규모도 크고 형식도 복잡하지만, 부분적인 요소는 콘수 신전의 형식과 다름없으며, 다만 이것을 확대하거나 반복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이 형식은 덴데라 ·에드푸 ·필라에 등 말기의 신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또한 사막이 나일 강변까지 근접한 지방에는 신전의 대부분 또는 일부를 단애 속으로 파들어가서 만든 암굴신전 ·반암굴신전도 있다. 아스완 댐의 건조에 따라 절단(切斷)하여 이전한 아부심벨의 신전은 전자의 예이다. 분묘나 신전이 석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세워진 데 반하여 세속건축은 주로 양건 벽돌이나 목재 등을 사용하였다. 제18왕조의 이단왕(異端王) 이크나톤이 천도하였던 수도 텔 엘 아마르나에서는 정궁(正宮)과 이궁(離宮), 고관의 저택, 새 수도 건설에 종사한 기술자의 집합주택 유구(遺構)가 발견되었다.

이집트 건축의 특징이 되는 기둥의 형식을 보면, 네모난 기둥에는 여신 하트호르의 두부(頭部)를 주두부(柱頭部)에 부조(浮彫)한 것(하트호르 기둥)과 수의(壽衣)를 입은 왕의 상(像)을 그 앞에 세운 것(오시리스 기둥) 등이 있으며, 원주(圓柱)에는 8면 또는 16면 등으로 이루어진 프로트 도리스주(柱)와 각종 식물(야자 ·연꽃 ·파피루스)을 모티프로 한 것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이집트미술]

이집트의 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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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신전 람세스 2세 좌상

카르나크 대신전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세워진 부속 건물로서 람세스 2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6개의 람세스2세를 나타내는 거상과 2개의 오벨리스크가 전면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 거상은 3개가 남아 있으며 한쪽의 오벨리스크는 프랑스의 콩코디아 광장에 있다.

이집트미술의 환조(丸彫)에는 신상(神像), 신전이나 분묘에 안치된 왕과 귀족의 조각상, 부장품으로 만든 소형 인물상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 재료는 돌 ·금속 ·나무 ·상아 ·도기 등이다. 석재는 섬록암(閃綠岩) ·화강암 ·각력암(角礫岩) 등 경질의 암석과 석회암 ·사암 ·앨러배스터(설화석고) 등 연질의 것이 있으며, 금속은 주로 동과 청동이고, 목재는 아카시아 ·무화과나무 등의 이집트산 이외에 침엽수의 수입재를 많이 사용하였다. 왕조 전 시대와 초기 왕조시대에는 그다지 단단하지 않으면서도 정교하게 조각할 수 있는 상아조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교한 대형 조상은 분묘형식이 발달하여 예배소에 조상실을 설치하고 사자(死者)의 상을 안치하게 된 고왕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상에는 사자의 영혼이 머무른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체 각 부분 중에서도 특히 얼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왕국시대에는 제세르왕 좌상(제3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이 등신대 묘상(墓像)으로는 최초의 것이며, 라호테프, 네페르트 부부의 좌상(제4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채색이 아직도 선명하고 옥안(玉眼)이 영롱하여 현실감이 넘친다. 카프레왕 좌상(제4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견고한 섬록암으로 된 당당한 조각으로서 품위와 위엄이 가득한 최고 걸작의 하나이다. 멘카우레왕과 왕비의 입상(제4왕조:보스턴미술관 소장)은 매우 경건한 느낌을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상 열거한 것은 왕과 왕족의 조상으로, 왕실의 공방(工房)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밖에도 사설 공방에서 만들어진 사인(私人)의 조상 중에도 뛰어난 것이 많다. 가발을 붙인 것과 붙이지 않은 것 등 두 가지가 있으나 얼굴이 몹시 닮은 라노펠 입상(제5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 정력적인 50대 남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카펠 입상(제5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 당시 식자층으로 존경을 받은 서기(書記)의 모습을 조각한 묘상 중에서는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기좌상(제5왕조) 등을 걸작으로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석회암이나 목재 등으로 만든 것은 일반적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두발은 흑색, 남자의 피부는 적갈색, 여자의 피부는 담황색, 옷은 백색으로 칠해져 있다. 중왕국시대에는 북쪽의 멤피스계(系)와 남쪽의 테베계 작품을 각각 식별할 수 있다.

북방계의 조각은 고왕국시대의 세련된 작풍을 계승하여 기교적으로 뛰어나지만, 약간 도식적이면서 섬약한 인상을 준다. 리셰트에서 출토된 세누셀트 l세 좌상(카이로), 하와라에서 출토된 아멘엠헤트 3세 좌상(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 등이 그 보기이다. 남방계의 조각은 지방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칠고 힘찬 작풍에 멤피스의 기교를 받아들여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였다. 다얄 알 바하리 출토의 세누셀트 3세 입상(카이로)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고왕국시대 말기부터 하인 소상(下人小像)을 부장(副葬)하던 풍습은 중왕국시대까지 계속되었으나, 중왕국의 하인 소상은 전대와 같이 돌로 된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몇 가지 예를 제외하면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신왕국시대의 조상에는 새로운 포즈도 답변확정되고 양감(量感)이나 선이 세련되어 우아한 작품이 많아진 반면, 표현이 형식화되어 차갑고 생기가 덜한 것이 흠이다. 제18왕조 초기의 작품은 다분히 중왕국의 작풍을 남기고 있으나 하트솁수트 여왕 무렵부터 점차 새로운 기법이 나타나서 백관(白冠)을 쓴 투트모세 3세 입상(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남달리 무용(武勇)이 뛰어난 왕이었지만 매우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신왕국시대에는 거상(巨像)의 제작이 많아졌는데, 아멘호테프 3세와 왕비 티의 좌상(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그 선구적인 작품이다. 아멘호테프 4세 무렵에는 투철한 사실주의가 풍미하여 왕의 추한 신체적 특징을 표현한 작품이 나타날 정도였으나, 왕이 이크나톤이라 개명(改名)하고 텔 엘 아마르나에 천도한 후부터 크게 누그러져서 왕비 네페르티티 흉상(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과 같이 세련된 작품이 나타났다.

제19왕조에는 람세스 2세의 입상처럼 기교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생기를 잃은 작품이 만들어졌으며, 또 왕이 여러 신전에 봉납한 거대한 자상(自像)은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될 만한 것은 못되었다. 제21∼25왕조에는 왕비 카로마마의 입상(루브르미술관 소장)과 같은 기교적 작품만이 나타났으나, 제25왕조 무렵에는 사실적인 남자상이 만들어졌다. 제26왕조에는 일반문화와 보조를 맞추어 미술도 복고적인 경향을 띠면서 고왕국시대의 작품을 많이 모방하였으나, 결국은 냉랭한 형식화에 그치고 말았다. 프톨레마이오스시대부터 로마시대에는 이집트 양식과 그레코로만 양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조상도 만들어졌다.

 

[이집트미술]

이집트의 부조와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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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렘헤브왕묘 벽화

이집트 룩소르. 왕가의 골짜기에 있는 제18왕조 호렘헤브왕 분묘의 벽화.

고대 이집트의 부조와 회화는 신전 ·분묘 등 건조물의 벽면을 장식하고, 또 비석이나 관 ·궤(櫃) 등의 이면을 꾸미는 데 이용되었다. 이 밖에 특수한 것으로서 석회암 파편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기도 한 오스트라콘, 파피루스의 두루마리 그림 등이 있다. 회화는 물론이고 부조도 여러 색으로 채색되었다.

주요한 안료는 대자(代赭)의 적색, 황토의 황색, 감청석(紺靑石)의 청색, 공작석의 녹색, 그을음의 흑색, 백악(白堊)이나 석고(石膏)의 백색 등이었고, 그것을 아교 ·수지 ·달걀 흰자위 등에 개어서 사용하였다. 부조와 회화의 표현은 공통적으로 인물의 얼굴이 반드시 옆을 향하게 하고, 눈과 어깨는 정면을, 복부는 거의 옆, 다리는 완전히 옆을 향하게 했다. 이는 인체의 각 부분에 대한 관념을 종합한 관념상으로서 종합하는 방법에 일관성이 없어 프리미티브(primitive) 예술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의 부조에는 신전에 봉납하기 위해 만든 팔레트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나르메르왕의 남북 이집트 통일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나타낸 화장용판(化粧用板)이 특히 유명하다. 제3왕조의 헤시라의 목제 패널(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윤곽이 정확하고 살붙임의 기법이 미묘하다. 제5왕조시대에는 민간의 분묘가 발달하여 예배소의 벽면에는 생존시의 윤택하였던 생활이 내세에도 계속되도록 비는 여러 즐거운 정경이 조각되었다. 사카라의 티의 분묘(제5왕조)에는 집 안에서 일하는 각종 기술자나 농부 ·뱃사공 등 집 밖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묘사해놓았다.

회화에서는 메둠에서 출토된 오리의 그림(제4왕조: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이 깃털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어 벽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벽화는 중왕국시대의 중부이집트 호족의 묘에도 그려진 것이 있으나 현재의 보존상태는 좋지 않다. 신왕국시대부터 그레코로만시대를 포함한 말기에 걸쳐 조영된 신전이나 장제전의 벽면에는 수많은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이 경우, 일반 예배자에게 공개되는 부분에는 왕의 전기적(傳記的)인 주제가 다루어지고, 은밀한 부분에는 왕이 신들을 예배하고 신들이 왕에게 은총을 내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레코로만시대의 부조는 둥그스름한 느낌을 주고 윤곽이 유연하게 표현되어 인체의 해부학적 정확성을 잃고 있다.

분묘벽화는 신왕국시대 테베의 왕릉이나 귀족의 분묘에 그려진 것이 많고, 오늘날에도 선명한 색채로 전하는 작품이 많다. 레크미라 ·낙트 ·멘나 등지의 분묘벽화가 그 좋은 예이다. 아마르나시대에는 왕실 가족의 단란한 장면과 아톤 신앙에 연관된 새나 짐승의 모습 등 특색있는 주제가 다루어졌다. 파피루스의 두루마리 그림에는 사자(死者)가 위험한 저승길을 여행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주의사항을 모은 《사자의 서(書)》 등이 있다.

 

[이집트미술]

이집트의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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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왕의 황금마스크

어린 나이로 숨진 소년왕으로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 투탕카멘왕의 유물이다. 룩소르 왕들의 계곡의 무덤군에서 발견되었다. 붕대로 감은 미이라의 얼굴에 파라오 얼굴 모양대로 만들어져 씌워져 있었다. 얼굴 위에는 어퍼와 로어 이집트의 수호신인 대머리수리와 코브라가 이마 위에 조각되어 있다.

공예품으로는 석기를 비롯하여 도기 ·금세공품 ·목공예품 ·섬유제품, 짐승의 엄니[牙]나 뿔로 만든 물건, 피혁제품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주요한 것을 들면 석기로는 선왕조시대 후기의 프레이킹 기법에 의한 수석제(燧石製) 소도(小刀)가 특히 뛰어나며, 석제 용기로는 선왕조시대에 견고한 돌로 만든 그릇과 왕조시대의 반투명한 앨러배스터 제품(製品)이 매력적이다.

토기는 선왕조시대 후기의 것이 조형적으로나 장식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도차(陶車)는 제1왕조 무렵부터 사용된 듯하다. 유약(釉藥)은 협의의 선왕조시대 이전인 바다리기(期)의 석태(石胎)에 이미 나타나 있다. 이것은 선왕조시대에 들어서면 인공적으로 마련된 듯한 석영분말의 태(胎)에 응용되었으며, 이 도기는 왕조시대에 계속 발달하여 기물(器物) 이외에도 분묘에 부장하기 위한 인형이나 동물상 ·우샤브티(使役用人形) ·부적류 및 타일 등의 건축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유약은 알칼리질로서 빛깔은 청색 ·녹색 ·보라 ·백색 ·황색 등이었다.

유리 제품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제18왕조시대의 유품이 전하며 그 가마터가 테베와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로마시대 이전까지는 유리공예에서 샌드 코어(砂芯)기법이 사용되었다. 이집트에서 제일 먼저 이용된 일반금속은 동(銅)으로서, 그 기원은 BC 500년으로 거슬러올라가고, 서아시아에서 비롯된 청동이 보급된 것은 중왕국시대부터였다. 구리와 청동의 가공기법에는 단조(鍛造) ·주조 ·금은피복(金銀被覆) 등이 있었다.

금은 일찍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그 세공기법도 놀랄 만한 수준이다. 많은 보석으로 장식한 금관과 금제흉식(金製胸飾) 등이 만들어졌는데, 제12왕조의 뛰어난 유품이 전한다.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예로는 제18왕조 투탕카멘왕의 금제관(棺)이 특히 유명하다.

 

이집트복식[ Egypt costu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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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복식 스타일 또는 그것을 모티프로 한 패션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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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은 기하학적인 감각을 지닌 민족으로서 복식에서도 기하학적인 규칙성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주로 직선적인 실루엣과 단순한 색깔의 복식에 화려한 장신구를 걸쳐 조화를 이루었다. 복식의 중요한 재료는 아마(리넨)로 고왕국 시대에는 아마의 자연적인 흰색이 신성시되어 많이 사용되었다. 그밖에 빛나는 금색, 은색과 검은색 계통과 빨강, 노랑, 파랑, 녹색 계열 등도 사용되었다. 상류층은 나일강가에서 자란 아마로 짠 곱고 투명한 모슬린을 주로 입었다.

남녀의 기본적인 옷은 로인 클로스(loin cloth)로서 허리에 두르는 단순한 형태인데 거들이나 벨트로 매어 입었다. 시대나 신분에 따라서 그 길이나 감는 방법은 조금씩 달랐는데 신분이 낮은 사람은 단순히 옆으로 감았고, 왕은 주름이 많았으며 앞에는 금으로 만든 장식을 달았다. 그리고 고관들은 앞에 주름잡은 에이프런을 덧입었다. 이것은 트라이앵귤러 에이프런(triangular apron)으로 태양을 표현하기 위해서 밑에서부터 벨트쪽을 향해 방사선의 주름을 잡은 것이었다. 또한 왕은 뱀 모양의 유리어스(uraeus)를 머리와 거들(girdle)에 달아 권위를 나타내었다. 여자는 좁고 간단한 형태의 시스 가운(sheath gown)을 입었다. 시스 가운은 장식적인 어깨끈이 달리고 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으로 고왕국 때부터 입었으며 중왕국 이후부터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아 문양과 색채가 들어가 화려해졌다.

중왕국 이후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아 모직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신왕국 시대에는 상류 계급에서 칼라시리스(kalasiris)를 입었는데, 이것은 가는 주름을 많이 잡은 드레이프된 형태의 옷으로 남녀가 모두 입었다. 길이가 매우 길어 입는 사람의 어깨에서 발목 길이의 두 배, 폭은 양팔을 벌려서 양손목 간의 길이가 되는 천을 반으로 접어 중앙에 머리가 들어갈 곳을 뚫어 입는 옷이었다. 또 칼라시리스보다 드레이핑이 더 복잡하고 유동적인 숄을 걸치기도 하였는데 이를 하이크(haik)라고 불렀다. 사제는 표범가죽을 어깨에 걸쳤다.

이집트인들은 필수적으로 화장을 하였는데 눈은 나일 블루(nile blue)라는 청색으로 그려 더욱 시원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붉은색은 저주의 색으로 여겨 잘 사용하지 않았고 동물의 털도 종교적 목적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염색한 가죽에 보석을 장식하거나 종려나무로 만든 샌들을 신었다. 고왕국시대에는 거의 맨발이었으나 중왕국 이후부터 상류층에서 샌들을 신었다. 형태는 남녀, 좌우의 구분이 없었고 사제는 파피루스로 만든 샌들을 신었다. 앞부분이 뾰족하거나 둥근 형태였는데 투탕카멘 왕의 샌들은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이집트의 복식은 파라오를 중심으로 한 권력 표시의 상징이었는데 넓고 긴 우아한 드레이퍼리형의 의복이나 거대한 가발과 머리 장식, 신체의 곳곳에 착용한 금속 장신구 등은 이러한 심리를 말해준다. 이집트인은 흰색의 요의나 칼라시리스와 구릿빛 피부색과 대비하여, 화려한 원색의 장신구와 의복과의 조화가 독특한 복식미를 나타내었다. 금속세공, 칠보세공이 발달하여 장신구가 많이 이용되었고 특히 금은 태양을 상징하고 영혼불멸이라 믿어 많이 사용하였다. 금·은·청동·마노·에메랄드·자수정·터키석 등을 사용하여 원색의 장신구를 만들었으며, 파시움(passium:넓은 칼라와 같은 반달 모양의 목걸이), 펜던트, 펙토랄(pectoral) 장식 등과 팔찌·발찌·반지 등을 착용하였다.

이집트 의복은 소재의 특성상 흰색이 지배적이었으나 중왕국 이후 문양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기하학적 문양으로 나타났다. 이집트 문양은 추상과 사실이 공존, 조화를 이루는 풍부한 상상력과 기하학적 재능으로 후대의 장식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문양의 종류는 다양하여 기하학무늬, 동물무늬, 식물무늬, 상형문자무늬 등 여러 가지 문양의 종류가 모두 나타날 정도였다. 기하학무늬에는 직선을 기본으로 하는 사선무늬, 귀갑무늬, 십자무늬, 완자무늬, 곡선을 기본으로 하는 파도무늬, 소용돌이무늬, 원무늬, 고기비늘무늬, 점을 이은 점렬무늬 등이 있다.

동물무늬에 사용된 동물은 수소, 자칼, 뱀, 백로, 매, 하마 등 여러 신의 상징 동물로 사용되었다. 이집트의 식물무늬의 장식요소는 로터스와 파피루스이다. 꽃과 꽃봉오리의 옆과 평면을 벽면에 묘사하거나 주초 장식에 사용하였다. 상형문자는 이집트 고유 문자로 오늘날에는 이집트를 상징하는 문양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복식은 현대 패션에도 영원한 패션의 주제로 활용되고 있다.

 

이집트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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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미술품 등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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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무늬

이집트 무늬를 크게 분류하면, ① 동물계통 무늬:인간상·소·뱀·황소·딱정벌레·승냥이 등, ② 식물계통 무늬:로터스[睡蓮]·파피루스·팔메트(棕櫚의 일종) 등, ③ 기하학적인 무늬:거치(鋸齒)무늬·소용돌이 무늬·귀갑(龜甲)무늬·고기비늘무늬 등 세 가지가 있다.

이집트의 미술이 그렇듯이, 이와 같은 무늬들도 이집트의 종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얼핏 보아서 단순한 듯한 기하학적 무늬라든지, 동식물의 모양을 본뜬 무늬들 가운데는 종교적인 뜻을 지니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구의 장식문양으로 하마(河馬)나 승냥이의 무늬를 사용한 것이 임부(姙婦)를 악마로부터 지켜 주는 부적의 뜻을 지녔다든지, 저녁에 꽃잎이 아물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다시 활짝 피는 연꽃은 부활·영원한 청춘 등의 의미를 지니는 따위이다.

또한 동그라미가 태양, 거치무늬가 물을 나타내는 그 의미는 쉽사리 해독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단순한 선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진 이집트 무늬의 독특한 형식은 설사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도 충분히 감상의 대상이 될 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집트 홀[ Egyptian h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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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건축사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이집트 풍’의 커다란 방. 일층의 벽면 가까이에는 열주를 두르고 그 열주위에 천정없이 2층 벽면을 올려놓은 큰방. 고대로마에서 비트루비우스에 의하여 기술(記述)되고 16세기 팔라치오가 그의 「건축 4서(四書)」에서 복원안을 제시, 버린튼 백(伯) 리처드 보일이 요크의 어셈블리 룸즈(1731~32)에서 실지로 건조하여 유명하다.


요크의 의회 회의장의 이집트식 홀

1731~32년

 

[이집트음악]

이집트음악[ music of Egypt , ─音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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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를 지닌 이집트음악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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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이집트음악이라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 전부터 음악문화가 발달한 고대 이집트와, 아라비아의 침입에 의한 이슬람화 이후의 이집트는 음악 그 자체에도 본질적인 상이점이 있고 시대적인 격차도 크다.

 

[이집트음악]

이집트 고왕국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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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말에 이미 타악기(딸랑이 등)와 마우스피스가 없는 세로플루트가 있었으며 모든 춤은 타악기로 반주되었다. 이것을 발전시킨 고왕국은 BC 2000년경까지 이미 고대 이집트음악의 중요한 것을 거의 모두 이루어 놓았으며, 조용하고 느릿한 음악이 이 무렵의 특징이었다(무반음 5음음계). 팬터마임은 노래와 악기의 반주로 이루어졌고 양손을 머리 위에 얹은 유연한 춤은 마우스피스가 없는 세로플루트와 하프(5~7현, 5도로 조현)의 대합주로 반주되었다.

쌍관의 클라리넷도 제5왕조 때 만들어졌으며, 제4왕조의 무덤 조각에서는 가수가 악기 연주자 앞에 앉아 손가락 모양이나 손·팔의 위치로 음높이·리듬 등을 지시(카이로노미)하고 있다. 이것은 음의 기록으로서 가장 오래 된 것이며 BC 2555년경의 궁정가수·플루트 주자인 푸프 안프는 이름이 알려진 가장 오래 된 직업 음악가이다.

 

[이집트음악]

이집트 중왕국·신왕국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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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문화의 영향으로 음악은 화려하고 관능적이었다. 키타라·2매가죽틀북, 그리고 공명상자가 커진 하프에 이어 신왕국 때는 뼈로 만든 딸랑이, 각종 북·수형(竪形)하프·류트(BC 1500년경의 하르모시스의 악기는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쌍관오보에·트럼펫 등이 나타났다. 그리고 류트나 오보에에서 이 무렵의 음악에 반음정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에서 처음 만들어진 악기 시스트룸(방울)은 중왕국시대부터 유물이 발견되며, 신왕국시대에는 여성음악가가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에서 활약하였다.

 

[이집트음악]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이후의 이집트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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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세기에 그리스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그리스의 판(피리)이 이집트에서 기계화되어 수압(水壓)오르간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의 음악은 그리스음악과 함께 고대 그리스도교회음악의 모체가 되는데, 기원 후에 만들어진 각종의 심벌즈와 그밖의 타악기는 고래의 카이로노미나 이 시대의 선율과 더불어 에티오피아콥트교회 전례음악으로 전해지고 있다. 640년 이브눌 아스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부터는 아라비아음악이 많이 유입되어 세분(細分)음정도 쓰여졌다(17음음계 등).

동서 이슬람문화권의 교류점에 있었으므로 현재도 역시 도시의 음악에는 터키나 페르시아의 영향이 남아 있고 우드·레바브 등을 사용하나, 한편 고래의 세로플루트 등도 연주되고 있다.

1820년 이후는 카이로를 비롯하여 각지에 음악학교가 설립되고 1871년에는 카이로에 오페라극장이 개설(마이어베어의 《위그노교도》로 낙성식, 이어 베르디의 《아이다》 상연)되어 음악의 유럽화가 진행되고, 이 경향은 영화음악 분야에서 특히 뚜렷이 나타나 있다.

1925년 전통적 아라비아음악을 부흥하기 위한 음악학교가, 또 1929년에는 동방음악연구소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동방적 음악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형식적·기술적인 면에서 유럽화의 실마리를 찾아내려는 흐름이 있으며, 그 중심 인물은 알 헤프니이다. 또, 현대의 작곡가 중에서는 하가그를 들 수 있다.

 

이집트신화[ ─神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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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수천 년의 먼 옛날로부터 기원 전후에 이르기까지 나일강 유역에서 번영을 누린 고대 이집트인(人)의 신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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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레왕 피라미드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중 두번째로 꼽히는 쿠푸왕의 아들 카프레왕의 무덤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아름다운 피라미드로 꼽힌다.

이집트로마나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정복당하여 멸망하였지만, 피라미드나 신전(神殿)과 같은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은 예로부터 종교와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유적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어 프랑스인(人) J.F.샹폴리옹이 1822년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인 성각문자(聖刻文字)를 해독해낸 데 이어, 그후 각문(刻文)이나 파피루스 문서의 해독과 연구가 급속히 진전되었고, 그에 따라 고대 이집트인의 정신생활에 관해 상당히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사후(死後)세계에 관한 것인데, 그에 의하면 인간은 죽어도 그 혼(魂:바)은 죽지 않으며, 사후세계로 가서 때때로 원래의 육신으로 돌아오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육체는 미라로 만들어 묘소에 정중히 모셔졌다.

혼이 사후세계로 가는 과정이나 사자(死者)의 신(神) 오시리스 앞에서 선악 판정의 저울에 올려지는 과정은 《사자의 서(書)》라는 종교적 문서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자연이나 동물, 또는 여러 가지 관념을 모두 신으로 보는 다신교(多神敎)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주요한 것은 《사자의 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밖에도 지방에 따라 대소(大小)의 신들이 존재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숭배되고 있었다.

창세신화

고대 이집트의 유물에는 바빌로니아의 창세신화나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같이 체계적인 기록은 없지만, 각지에 있는 신전의 각문 등에 어렴풋이나마 세계의 시초와 신들의 계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중에도 헤르무폴리스·헬리오폴리스·멤피스·부시리스(그리스식 발음) 등의 도시에는 독립된 신학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재구성된다. 원초에는 눈이라고 불리는 바다가 있었고 여기에서 아툼이 태어났다. 이는 태양신 라와 동일시되는데, 눈은 나일강물이라고 여겨진다. 아툼 라는 스스로의 수정작용(受精作用)으로 게브 ·슈 ·테프누트 ·누트를 낳았다. 이 4명은 서로 다툰 끝에 게브는 대지가 되고 슈와 테프누트는 공기와 증기(蒸氣)가 되었으며, 막내 누이동생 누트는 하늘이 되었다.

그리고 게브와 누트는 부부가 되어 오시리스와 이시스라는 남매를 낳았다. 이들은 오시리스 신화의 주인공이다. 또한 태양신 라의 숭배는 헤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고대 이집트 전기간에 걸쳐 성행하였는데, 여기에는 호루스(매의 신)의 숭배가 수반되어 왕권의 확립 및 계승과 관련이 있다.

오시리스신화

이 신화는 그리스의 저작가 플루타르코스에 의하여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이시스근친결혼을 하여 이집트를 28년간 통치하였으나, 동생인 세트(그리스식 이름으로는 튜폰)에게 살해당하여 시체는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다.

상자는 델타를 지나서 지중해로 흘러들어가 시리아 해안의 비블로스에 닿았다. 비탄에 잠긴 이시스는 이 상자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비블로스에 당도하였다. 오시리스를 담은 상자는 비블로스에 도착한 후 무화과나무가 이를 에워싸 크게 되었다. 비블로스의 왕은 이 나무로 궁전의 기둥을 만들었으나 이시스가 이를 알고 그 상자를 되찾았다.

이 사실을 안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14토막으로 토막내어 온 나라에 뿌렸다. 이시스는 다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흩어진 오시리스의 시체를 모아다가, 누이동생 네프티스의 도움을 받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켰다. 그리고 생명을 되살리는 의식(儀式)을 행하였으나 오시리스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있어 사자(死者)의 나라의 왕이 되었다. 남편의 시체와 상관하여 이시스가 낳은 호루스는 세트와 싸워 마침내 이겨 상 ·하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좋아하였고, 오시리스 신앙은 농경의례(農耕儀禮)와 결부되어 성행하였다.

다신교의 신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크나톤 지배하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다신교가 성행하였기 때문에, 많은 신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숭배되었으며, 제각각 그 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하피(나일강의 신)와 같은 자연신이나 아누비스(늑대 모습의 주검의 신) ·바스테트(고양이의 신) ·세베크(악어의 신)와 같은 동물신도 있고, 후세에 와서 이집트의 주신(主神)이 된 아몬처럼 유래가 분명치 않은 것도 있다.

또한 그리스인에 의해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된 사랑의 신 하트호르, 헤르메스와 동일시된 기예신(技藝神) 토트(이집트 이름은 제프티)처럼 원시의 단계를 벗어난 이집트인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도 꽤 많이 있으며, 때로는 장대한 신전에 모셔져 융숭한 숭배를 받고 있었다.

멤피스를 중심으로 숭배되었던 푸타하도 이에 속하고, 공예의 신으로서 그리스인에게 헤파이스토스와 동일시되었으며, 성우(聖牛) 아피스를 비롯한 동물숭배는 꽤 넓은 범위에 걸쳐 찾아볼 수 있다. 이 신들의 성격과 경력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것도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도 많다.

 

이집트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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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 이집트

1. 이집트의 고대 신화

만물의 기원이자 최초의 혼돈 상태의 신인 눈(Nun)에서 땅이 생긴 뒤, 태양신 라(Ra)가 나타났다. 이 태양신으로부터 공기의 신 슈(Shu)와 습기의 여신 테프누트(Tefnut)가 태어났으며, 다시 이 두 신으로부터 토지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여신 누트(Nut)가 탄생했다. 그리고 게브와 누트 사이에서 오시리스와 세트, 이시스, 네프티스 네 형제 신이 탄생하게 된다. 오시리스는 이집트에 최초로 문명을 도입한 신이자 이집트의 왕이었으나, 그를 시기한 동생 세트에게 살해되었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관에 넣어 나일 강에 버리고, 되돌아온 사체를 열네 토막으로 잘라 들판에 뿌렸으나 오시리스는 아내 이시스의 노력으로 부활한다. 이집트를 다스리던 폭군 세트는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와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하고, 호루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이집트의 왕이 된다. 이 신화의 영향으로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미라 수술이 왕족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유행하게 됐고, 사후 세계를 대비해 무덤 속에 노예, 배, 식량, 집 모형 등을 함께 부장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2. 고대 이집트의 주요 신

1) 라(Ra)

라(Ra)는 '창조자'라는 뜻으로, 하늘의 절대적 지배자인 태양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아톤·아몬·아몬 라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제5왕조에 와서는 왕의 칭호에 '라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2) 오시리스(Osiris)

오시리스는 형의 권력을 시샘했던 동생 세트에게 살해당해 이집트 각지에 버려졌으나, 아내이자 동생인 이시스가 몸을 주워 모아 미라로 만들어 부활시켰다. 때문에 저승과 재생·부활의 신으로 불린다.

3) 이시스(Isis)

아내와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는 여신으로, 죽은 이를 보호하는 신이자 풍요의 여신이다. 이집트 최고의 여신으로 태양과 암소에 관련되어 이집트 각지에서 숭배되었다.

4) 호루스(Horus)

이승의 신이자 하늘·태양의 신인 호루스는 하토르의 남편으로, 매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성장해서는 아버지 오시리스로부터 병법을 전수받아 원수인 세트를 죽이고 통일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5) 아누비스(Anubis)

죽은 자의 신인 아누비스는 저승의 문을 열어 죽은 자를 오시리스의 법정으로 인도하며,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달아 살아 있을 때의 행위를 판정하는 장의(葬儀)와 미라의 신이다.

6) 하토르(Hathor)

태양신인 라의 딸이자 호루스의 아내인 하토르는 하늘·사랑·기쁨·결혼·춤·아름다움 등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 여신으로 표현되는데, 보통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숭배받는다.

7) 세트(Seth)

오시리스와 형제이며, 악의 정령, 악의 신으로 불리는 세트는 모든 파괴와 악에 연결된다. 오시리스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으나 조카인 호루스에게 패배한 뒤 악의 상징으로 불리게 되었다.

8) 토트(Thoth)

따오기 또는 비비(원숭이과의 짐승)의 머리를 지닌 모습으로, 과학·예술·의학·수학·천문학·점성술 등 지식과 지혜를 탄생시킨 학문 전반의 신이자 서기(書記)·통역의 신이다.

 

이집트 신전[ Egyptian temple , -神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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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와 신전을 겸한 묘신전에서 발달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신전. 일반적으로는 장방형 평면으로 구성되고, 탑문 · 안뜰 · 다주실(多柱室) · 성소(聖所) 등이 축선상에 배치된다. 또, 전면에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서 있고 참배의 길 양쪽에 스핑크스를 배치 했다.


이집트 신전

 

이집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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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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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이집트는 기원전 5000년부터 나일 강 유역에 농경 생활을 시작하여 최초의 고대 문명을 탄생시켰다. 30여 개의 파라오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였으며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1. 파라오 왕조

1) 고왕조 시기(기원전 2635년~기원전 2140년)

제1왕조의 메네스 왕은 최초의 파라오로서 상·하 이집트를 통합했고, 제3왕조의 조세르 왕은 사카라 지역에 최초의 피라미드(계단식)를, 제4왕조의 쿠푸 왕, 카프라 왕, 멘카우라 왕은 기자에 피라미드를 건축했다.

2) 중왕조 시기(기원전 2022년~기원전 1650년)

제11왕조의 멘투호텝 2세는 상·하 이집트를 재통합하고, 제12왕조의 세누세트 3세는 지방 족벌들을 평정해 강력한 중앙 집권을 확립했다.

3) 신왕조 및 후기왕조 시기(기원전 1539년~기원전 332년)

하트셉수트 여왕이 테베(지금의 룩소르) 지역에 최초의 신전을 건축하고, 이후 제19왕조의 세티 1세는 아시아 지역을 정벌, 세티 1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아부 심벨 신전 등을 건축하였다.

2. 그리스·로마 시대

1)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32년~기원전 30년)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를 정복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새 왕조를 열어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2) 로마 제국 시대(기원전 30년~395년)

기원전 30년에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합병했다. 기독교의 유입으로 콥틱교가 유행하고 전통 종교가 몰락하게 된다.

3. 이슬람 시대

이슬람군의 이집트 정복(640년~1805년)

640년, 다마스커스 왕조 및 바그다드 왕조의 이슬람군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이슬람 총독이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다. 이 기간 중 많은 콥틱 교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가 사용되었다. 1517년부터는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아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쇠퇴하였으나, 이슬람 종교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확보하게 된다.

4. 근대 이후

1) 19세기의 변천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 후, 1801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터키 왕조에서 파견된 장군 무하마드 알리가 근대 이집트의 기초를 닦았으나, 이후 수에즈 운하 건설 등의 대규모 국토개발계획 때문에 외채가 누적되면서 식민지 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국제 연맹에 가입하였다.

2) 독립 이후

1952년에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이집트아랍공화국이 건립된다. 이로 인해 기원전 341년 이래 약 2,300년간에 걸친 이민족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이집트의 예술산 자와 죽은 자가 벌이는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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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집트를 원정할 때 단 하나의 목적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뒷문으로 인도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영국에게 공포를 안겨주어 강화를 서두르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집트 원정은 나폴레옹에게 빛나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원정은 인력과 재화의 낭비였고, 불쌍한 노새와 낙타만 쓸데없이 괴롭힌 결과였다. 다행히 전혀 무의미한 원정은 아니었다.

비록 그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코르시카의 젊은 모험가는 2천여 년 동안 무관심과 망각에 묻혀 있던 옛 고센1)의 보물을 유럽 세계에 전해주었다. 그의 부하가 발견한 로제타석은 훗날 역사가인 샹폴리옹에 의해 해독되었다. 이집트 문자의 해독은 1500여 년 동안 닫혀 있었던 고대 이집트의 관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과학적으로 탐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그러나 4천여 년 동안 유지되었던 문명을 한 나라에서 도맡아 연구하고 분류하기란 너무 벅찬 일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지역을 나누기로 했다. 그 뒤 이집트 전역이 분할되어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고대 이집트의 생활양식을 밝히는 작업에 동참했다. 보잘것없는 이집트의 농민들은 따분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잡동사니와 더불어) 온갖 아름다운 물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현대인은 생활양식에서 무의식적으로 변화를 추구한다. 언제나 짜릿한 게 필요하다. 우리는 단지 즐거움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그런데도 기원전 4000년부터 현재까지 6천 년간에 달하는 '역사시대'의 2/3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지루한 생존의 연속에 불과했다는 것은 묘한 일이다.

배를 타고 멤피스나 테베를 향해 천천히 가면 키 작은 이집트 농부들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함족이 이 옥토에 처음 정착했을 때도 농부들은 지금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밭을 갈았다. 다재다능한 민족들이 으레 그렇듯이 함족도 옛 터전을 떠나 나일강 유역의 더 좋은 환경에서 새 삶을 시작하러 온 다양한 부족과 개인들이 뒤섞인 혼합 민족이었다. 저지대에 살던 멤피스의 지배자들이 고왕국을 세웠을 때도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밭을 갈았다. 쿠푸와 카프레, 멘카우레가 피라미드를 짓고, 1천 년 뒤 아브라함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우르의 땅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이주하려 결심했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밭을 갈았다.

나일강 유역의 예술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른바 중왕국 시대의 600년 동안에도 농부들은 끈질기게 밭을 갈았다. 지배자들이 안전을 위해 고왕국의 수도인 멤피스를 버리고 호메로스가 '100개의 문이 있는 도시'라고 부른 저 유명한 테베로 옮겼을 때도 그들은 계속 밭을 갈았다.

아메넴헤트 3세가 늘어나는 인구의 식량과 식수를 충당하기 위해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하고 나일강의 수위를 통제할 때도 농부들은 밭을 갈고 있었다. 힉소스인이 서아시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2000년에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도, 그리고 이들이 나일강 유역의 점령지를 관리하기 위해 또 다른 유목민족인 히브리인, 즉 셈족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농부들은 한결같이 밭을 갈고 있었다.

수백 년이 지나 마침내 힉소스인이 쫓겨나고 아모세 1세(기원전 17세기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할까?)가 신왕국을 건설할 때도, 그리고 투트모세, 아멘호테프 3세, 람세스 대왕 같은 위대한 지배자들이 그 새 제국의 영토를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바빌로니아로 넓혀나갈 때도 농부들은 변함없이 밭을 갈았다. 기원전 1400년경 홍해와 지중해를 운하로 연결하려는 계획이 세워질 때도 농부들은 여전히 밭을 갈았다.

히브리인이 자신들을 지배했던 힉소스인의 뒤를 따라 강제로 이집트에서 쫓겨난 뒤 팔레스타인 언덕에 정착했을 때도 농부들은 밭을 갈았다. 제국이 급속히 쇠락해 기원전 1091년에 남부에서 벼락출세한 어느 군주가 독립을 선언하고 나일강 삼각주 한가운데 새 왕국의 수도 타니스를 세웠다는 것도 농부들은 알지 못했다.

에티오피아를 잃었을 때도, 예루살렘이 점령과 약탈을 당했을 때도 그들은 밭을 갈았다. 에티오피아인이 느닷없이 쳐들어와 반세기 이상 이집트를 지배할 때도 그들은 계속 밭을 갈고 있었다. 아시리아인이 에티오피아인을 내몰고 이집트를 아시리아 제국의 속주로 만들었을 때도 농부들은 생활양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을 위한 오랜 투쟁에서 누가 이겼는지 알려 하지도 않았으며, 그 투쟁의 결과로 기원전 653년에 또 하나의 이집트 왕국이 일어나 삼각주에 위치한 사이스를 수도로 삼은 일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홍해와 지중해를 운하로 연결하려 했던 람세스의 계획을 네코 왕이 800년 만에 부활시켜 운하 건설에 착공했을 때도(수에즈 운하가 마침내 완성된 것은 1869년이었다.) 농부들은 여전히 밭을 갈고 있었다. 페르시아가 나일강 유역을 정복했을 때도,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이 이 풍요로운 유역에 찾아와 외국 무역이라는 이름 아래 약탈과 착취를 자행할 때도 그들은 꾸준히 밭을 갈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1천 년 동안이나 폐허로 방치되었던 카르나크의 고궁에서 주연을 베풀 때도 그들은 밭을 적시는 나일강만 지켜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였던 어느 마케도니아 장군의 후손이 여왕으로 즉위해 로마 장군 두 명과 정략적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도, 그리고 그녀가 문학적·감성적 명성을 얻는 것과 더불어 왕국이 로마의 한 속주로 전락해버렸을 때도 농부들은 여전히 밭 가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부터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밭을 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집트는 이제 로마의 중요한 곡창이 되어 농부들은 자기 한 몸만이 아니라 로마 시민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가 나일강 어귀에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명칭을 붙였을 때도, 또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이 그 빛나는 문명을 마구잡이로 파괴했을 때도 농부들은 쉬지 않고 밭을 갈았다. (하기야, 그들이 작은 마을 밖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리스도교 열심당원이 신전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4천 년 동안이나 신성한 상형문자를 가르쳐온 학교를 폐쇄했을 때도 그들은 결코 노동을 멈추지 않았다. 칼리프 우마르(예루살렘에 자신의 이름을 딴 유명한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가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도 농부들은 고분고분하게 새 신앙으로 개종하고 새로운 구원 따위에는 별로 개의치 않으면서 경작을 계속했다.

얼마나 기묘한 삶이며 기묘한 문명인가! 4천여 년 동안 그 갈색 피부의 왜소한 사람들은 밭을 갈고, 곡식을 기르고, 작은 농토를 적셔줄 나일 강물을 기다리고, 자식들을 키우고, 여러 지배자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결국에는 사막의 흙먼지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땅, 하루하루가 늘 똑같은 땅, 삶이 익명의 연속성으로 이어지는 땅을 고향으로 삼고, 상류 지역인 수단에서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의 격랑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고요히 흐르는 나일강의 물결처럼 고즈넉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 갈색 피부의 왜소한 사람들, 개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은 누대에 걸쳐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땀 흘려 농사를 지었으면서도, 뛰어난 완성도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독특한 예술을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우리 세계에 물려주었다.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행운이나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그 답을 알기란 쉽지 않다. 기원전 5세기에 나일강 유역을 찾은 헤로도토스가 당시에도 이미 고색이 창연했던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이것을 지은 이유가 뭘까?" 하고 자문했을 때처럼 난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다.

물론 피라미드는 예술과 거의 무관하다. 건축의 분야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피라미드는 순전히 토목공학의 대상일 뿐 미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늘날 은행 금고처럼 실용적인 데 있었다. 백성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극히 소중한 선왕의 유해를 보존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피라미드가 그렇게 커야 했던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예술의 영역에서 기이한 것들이 흔히 그렇듯이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허세가 엄청난 에너지와 재원을 낭비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피라미드를 오랜 빈곤과 실업의 산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왕이 백성에게 일거리를 주고 먹여 살리기 위해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라미드가 '엄청난 낭비'(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같으면 틀림없이 이렇게 주장했을 것이다.)든, 5천 년 전의 빈민구제 사업이든 순수 예술과 전혀 무관한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커다란 정성과 공을 들인 건축물인 만큼 언제까지나 훌륭하고 귀한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은 분명하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유적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자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개미처럼 불합리한 복종을 강요당한 민족은 세계 어디서나 그와 같은 쓸모없는 기념물을 남겼다. 그러나 스톤헨지를 세운 켈트인이나 우쭐대는 그리스인을 포함해 어떤 민족도 조각과 미술의 분야에서 이집트인만큼 많은 걸작을 남기지는 못했다. 게다가 어떤 민족도 그들만큼 높은 수준의 문화를 수천 년 동안이나 유지하지는 못했다. 대부분 수백 년이나 수십 년쯤 번영을 누린 뒤에는 처음 뮤즈의 유쾌한 정원에 들어올 때처럼 갑자기 쇠락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다시는 그런 기적을 일구지 못했다. 그런데 이집트인은 무려 4천 년 동안이나 최고 수준의 문화를 꽃피웠다. 백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온 지 500년이 채 안 된 것을 감안하면, 또 그 조상들이 서유럽을 차지한 지 2천 년이 채 안 된 것을 감안하면 4천 년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오랜 세월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거석문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영국 남부에 있는 스톤헨지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고 스톤헨지는 종교적 용도의 건축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대에는 전 세계에 걸쳐 이런 거석문화가 발달했다.



이집트인이 특별한 성공을 거둔 주요 원인은 전통을 존중하는 자세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전통을 경시하지만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전통을 존중했다. 이집트인의 생활은 99퍼센트가 계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계절은 세계 어디서나 전통과 불가분한 관계를 가진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이집트인은 천체를 깊이 연구했다. 일정한 궤도를 도는 별들은 계절에 못지않게 규칙적이고 전통적이다.

그래서 이집트인은 일상생활에서 '전통'을 받아들인 것처럼 예술에서도 전통을 자기 보존의 시작이자 끝으로 받아들였다. 이 사실을 알면 이집트 예술가들이 왜 개성보다 '전형'에 훨씬 더 흥미를 느꼈는지, 왜 대상의 개체적 특질을 표현하기보다 전형(왕이든, 왕의 신성한 고양이든)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애썼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유사성의 문제에 봉착한다. "아름다운 그림이지만 우리 그이와는 안 닮았네요." 50년이나 같이 산 남편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부인("이 세상에서 그이의 진짜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저라고요.")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 화가는 운이 없는 사람이다. 십중팔구 그 부인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진짜 모습'을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훌륭한 화가라면 그 부인이 반세기 동안에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불과 10분 동안에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통 사람은 그런 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그림은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도 의뢰인에게 간단히 퇴짜를 맞고, 화가는 쓸데없이 여섯 주일을 낭비한 결과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집트 조각가와 화가는 운이 좋았다. 왕의 조각상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들도 일단 얼굴의 세세한 부분, 즉 눈썹이나 턱, 코의 생김새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나 고객에게나 그런 요소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나 한눈에 "아하, 왕의 모습이군!" 하고 감탄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일이었다. 통상적인 지배자의 풍모, 이를테면 일상사로부터 초연한 태도, 현세에 속하면서도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신격화된 왕의 조상들과 닮은 모습을 표현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의 얼굴에서는 슬픔, 노여움, 기쁨, 놀라움, 찬동, 불만 따위의 인간적 감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눈은 언제나 똑바로 앞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눈은 뭔가를 응시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 눈은 분명히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지만 일상적인 세계를 넘어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 왕자 부부 - 대피라미드와 같은 시기인 기원전 26세기에 제작된 석회암 조각상이다. 위쪽을 향한 이 부부의 시선은 현세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내세를 바라보고 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으면 대피라미드와 같은 시대에 속하는 이집트 파라오의 조각상과 미켈란젤로나 로댕 같은 조각가들의 작품을 비교해보라. 조각가들은 영웅이나 신만이 아니라 왕궁과 교회의 문간에서 구걸하는 가엾은 거지에게도 똑같은 열정과 정서를 불어넣는다.

현대인의 취향에는 '인간적인 특성'이 꼭 필요하다. 지난 400여 년간의 조각 작품을 흥미롭게 만든 요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그런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그 말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연에는 불평등이 가득했고, 그들은 자연보다 고결해지려 애쓰지 않았다. 신은 신이고, 왕은 왕이며, 신하는 신하였다. 그 단순한 구성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필요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현실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 규칙은 이집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나 중요한 것은 같은 현실이 4천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집트인의 전반적인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우리와 같은 의미의 시간이 당시 나일강 유역의 민족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에게 시간관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5000년의 사람이든 기원전 500년의 사람이든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다.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밭을 갈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방식으로 결혼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기르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거의 똑같은 신들을 숭배했다. '시간'만 없었던 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풍경'도 없었다.

인간은 일상의 경제활동만이 아니라 예술적 표현에서도 환경의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변이 산맥이나 사막으로 막혀 농토가 좁고 길게 뻗은 극히 단조로운 이집트의 환경은 주민들의 종교 관념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이집트인들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영원이라는 궁극적 이상을 좇게 되었다. 그들은 영원히 반복되는 계절, 영원히 회전하는 태양, 달, 행성, 별, 무한한 지평선을 향해 영원히 흘러가는 강물에 영원성이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문명에나 특유의 리듬이 있다면(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이집트의 리듬은 영원성의 리듬, 무한한 우주의 리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무한한 우주라 해도 자세히 관찰하면 소폭의 변화가 있듯이, 이집트 예술도 전체적인 윤곽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1천 년쯤 시간이 지나면 세부에서는 제법 큰 변화를 보인다. 이집트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런 세부를 파고들어야 한다.

여기서 이런 논의를 할 때 간과하기 쉬운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이집트의 왕은 왕국 안에서 유일한 예술 후원자였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신전이나 왕궁이 훗날 옥외 박물관이 되고 지중해 유람선의 승객들에게 자신이 다음과 같이 소개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국립박물관 왼쪽 건물에 있는 7호실의 오른쪽에서 두 번째 유리관에 있는 미라 번호 489-A. 황후의 엑스레이 사진은 데이비드 로젠이 촬영함."

후대의 로마인이나 중세 사람들처럼―아울러 예술과 일상생활을 구별하지 않았던 거의 모든 민족들처럼―이집트인들도 훗날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왕궁과 신전을 자기들 마음대로 세우고, 헐고, 늘어놓고, 재배치했다. 만약 람세스 11세가 수백 년 전에 자신과 이름이 같은 파라오가 세운 낡은 신전을 발견했다면 그는 단지 복구만을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역시 인간이고 허영심도 없지 않으므로 입구에 서 있는 유명한 선조의 조각상을 멋지고 새로운 자신의 조각상으로 대체하고 나머지 잡동사니들은 적당한 곳에 치우게 했을 것이다.

기원전 2500년의 신전에 기원전 1500년의 파사드(façade, 건물의 앞면)를 갖다 붙였거나, 기원전 1000년의 양식으로 장식된 새로운 기둥을 그보다 2천 년이나 더 오래된 열주(列柱)에 추가했다면, 이집트 예술의 연구는 매우 어려워진다. 그러나 우리가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르는 예술 파괴는 현재도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다.

현실적이고 실용성을 중시했던 중세 사람들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래의 설립 취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마을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고딕 교회의 버팀벽(buttress) 사이에 소형 가옥들을 지었고, 옛 대성당의 한복판에 신교 예배당을 세웠다. 12세기의 로마네스크풍 성자의 몸뚱이에 고딕식 얼굴을 갖다 붙였는가 하면, 15세기의 아담과 이브에 18세기의 무화과 잎사귀를 그려 넣었고, 바로크식 응접실에 로코코식 소파를 들여놓았다.

그들은 '고급한 취향'이나 '시대에 맞는 가구' 같은 오늘날의 관념에 위배되는 온갖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더구나 그런 만행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아마 그들은 오늘날처럼 순전히 예술적인 측면을 고려해 불편을 감수하거나 개발을 미루는 태도를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들에게 삶의 충만함은 누리고 즐기는 데 있는 것이지 소수의 학자들이 설파하는 미학 이론을 위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수선과 보수의 과정이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되면 그 시대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도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룩소르 신전을 보자. 이 신전의 원형은 아멘호테프 3세(아메노피스 또는 멤논이라고도 한다. 그리스 시대 이래 이집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의 이름을 표기했다.)의 시대인 기원전 15세기 초에 세워졌다. 100여 년 뒤 람세스 2세가 이 신전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에 왔을 때도 아멘호테프의 신전은 여전히 보수 중이었다. 그러므로 젊은 마케도니아 왕이 신전 본당을 자신이 거느린 건축가의 설계대로 완전히 뜯어고치라고 명령했을 때도 이집트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기둥만 남은 신전 - 룩소스에 있는 신전의 유적이다. 갈대 다발을 묶어놓은 듯한 양식의 9미터짜리 기둥들이 남아있다.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건축의 전성기였던 람세스 시대에 복구되었다.

안타깝게도 이집트의 신전과 왕궁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피라미드의 운명이다. 물론 피라미드의 형태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보다 높은 이 거대한 석조 건축물은 투라의 돌산에서 캐낸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로 외피를 두른 덕분에 사막의 뜨거운 열기에도 잘 견뎌냈다. 그러나 3천 년 뒤 아랍인들은 카이로에 모스크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피라미드의 외피를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피라미드는 이제 먼지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앞으로 1~2천 년이 지나면 피라미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옛 사람들의 반달리즘, 아니 그보다 무관심(악의가 아니었으니까 무관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이 그렇듯 심했기 때문에 과거의 예술에 관한 논의는 '체계적'으로 전개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게다가 옛날 조각가와 화가들은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스 조각품 중에 서명이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불과 한 세기 동안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창고를 정리한 사람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이집트 예술에는 일본 등의 동양 예술처럼 원근법이 결여되어 있다. 원근법은 현대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이 개념에 대한 정의를 알아보는 게 순서일 듯싶다. 원근법이란 특정한 점에서 대상을 바라볼 때 대상의 상대적 위치, 크기, 거리를 실제와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평면 위에 표현하는 기법이다. 간단히 말하면 원근법이란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평면에 그리는 방법이다.

지금은 어린이도 그림을 실제의 풍경처럼 여기도록 해주는 원근법의 기본 원칙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평행선과 평면이 수렴하는 점을 소실점(vanishing point)이라고 부르는데, 명칭은 모르더라도 그 의미는 누구나 잘 안다. 각각의 사물을 전체 구도 속에서 정확한 위치에 배치하면 평면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입체적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원근법을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의 일이며, 동양의 예술가들은 그 뒤에도 원근법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근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원근법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보기에 동양의 그림은 매우 당혹스럽다. 그런 사람이 일본 판화를 처음 보면, 마치 어렸을 때 '음들의 조화로운 배열'이라고 배운 화음의 정의를 마구 무시하는 현대 음악을 접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불쾌한 소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원근법은 올리브나 브로콜리의 맛 또는 현대 음악처럼 배워야만 익숙해지는 것이다. 대수표의 비밀을 처음부터 터득한 사람은 없듯이 태어나면서부터 원근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아이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3차원적 효과에 신경 쓰지 않고 평면적인 그림을 그릴 것이다. 모든 예술도 유아기에는 원근법이 없었다. 만약 원근법의 감각을 가졌다면 그것은 우연일 뿐이다.

원근법의 차이


위쪽은 이집트 『사자의 서』에 수록된 그림. 아래쪽은 원근법을 발견한 파올로 우첼로의 15세기 작품 「숲 속의 사냥」의 일부다. 이집트 그림은 평면적인 반면 원근법에 충실한 우첼로의 그림은 3차원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집트처럼 예술에서 '전통'을 중시하고 사제나 지도자 같은 특정 계급이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전통을 엄격한 규칙으로 확립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표정이나 몸짓이 완전히 경직되기 쉽다. 만약 사제나 지배자들이 특정한 양식을 엄수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이집트의 예술가들은 다른 양식을 취할 수 있었을까? 나는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그들은 관찰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무덥고 건조한 기후(홍수는 잦아도 비는 없다.)에서 용케도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집트 초기의 목각상은 인물을 묘사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하인들의 목각상이 가득한 왕의 무덤은 그 이름 모를 조각가들의 비범한 재능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그러나 이 전통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삶을 정태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농법, 사회적 태도, 풍습 등 모든 것이 판에 박힌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으며, 국가적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변화란 불가능했다. 이집트 예술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경직성에 불만을 토로한다. 조각의 분야를 살펴볼 때 경직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자연이다. 나일강 유역의 조각가들은 화강암과 현무암을 재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생동감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대리석은 없었고, 화강암과 현무암이 아니면 '화강암만큼 단단한 돌'뿐이었다. 이런 재료로는 경직된 선밖에 가능하지 않으므로 이집트 조각가들은 경직성을 일관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설사 이집트 조각가들이 더 연한 재료로 작업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이집트의 사회∙종교 체계가 강요하는 경직성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국민들 대부분이 가축을 기르거나 농사를 지으면서 겨우 식솔들이나 부양할 정도인 나라라면 지속적인 협동이 필요하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일을 홀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부주의하게 행동하면 그의 가족과 친척은 굶을지 모르지만, 그의 무능함이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실수로 자기 집에 불을 내서 마을 사람들의 재산까지 위협하는 사태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행복과 번영은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나일강 유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지속적으로 협동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자기 하나만을 위해 관개용 댐을 만드는 사람은 없다. 또한 1평방킬로미터당 수백 명(이 인구밀도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에 달하는 인구가 먹고살려면 여기저기에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관개시설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폭이 15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이 좁은 지역에서 수백만 명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단일한 의지에 따라야 했다. 원래의 의도는 자기 보존에 있었다. 그런데 그 방식이 효과적이었고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이집트가 독립적인 단위로 존재했던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나라의 지배자는 파라오―큰 집에 사는 대족장이라는 뜻이다―였다. 선량한 나일강 유역의 사람들이 다른 체제로 같은 결과를 이루려 했을 리는 없다. 헛된 망상으로 골치를 썩일 이유가 뭔가? 그들의 체제는 매끄럽게 작동했다. 고대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인 굶주림과 가난과 궁핍의 세계에서, 광대한 곡창을 가진 이집트인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따금 세금이 너무 무거울 때, 특히 외국 침략자의 지배를 받을 때 분노해 들고 일어났을 뿐 늘 유순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방식의 삶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언제나 기꺼이 지배자에게 복종했고 수많은 돌을 쌓아 넓은 왕궁과 신전을 지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단 한 가지는 바로 죽음이었다.

이상할 게 없다. 태초 이래 정말로 죽고 싶어 안달한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스인들이 그랬듯이 대부분의 민족들은 죽음 앞에서 얼굴을 찌푸렸고 냉혹한 저승사자에게 온갖 불쾌한 이름들을 갖다 붙였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마치 죽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죽음을 무시하려 했던 유일한 민족이다.

그로부터 수천 년 뒤, 그리스도교 예술은 내세의 즐거움과 기쁨을 묘사하는 데 골몰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장차 이 음울한 세상의 온갖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원한 환희의 내세에 살게 되리라고 믿었다. 전대의 역사가들은 고대 이집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을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결과 이집트인들도 그리스도교도들처럼 이 세상을 경멸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나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납골당으로 만들고 수많은 피라미드와 무덤을 축조했으며, 정교한 관과 석관, 기타 죽음에 대한 기묘한 숭배를 표현하는 온갖 물건들을 만들었다. 결국 이집트인들은 현세에서 몹시 불행하게 살았던 우울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후대의 그리스도교도들처럼 신전과 무덤의 깊은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 저승세계의 안내서에 해당하는 『사자의 서(Book of Dead)』를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실제 정신세계와 정반대였다. 앞에서 길게 말했듯이 이집트인들은 매우 단조롭게 살았다. 하루하루가 똑같았고, 한 해 한 해가 다를 게 없었으며, 천 년이 지나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단조롭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고, 그런 생활방식에 불만을 품는 것도 아니다. 현대인에게는 따분한 삶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열심히 찾아야만 지상의 천국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와는 달랐다.

이집트 농부는 개미처럼 뼈가 빠지게 일해도 유쾌하게 살 수 있었다. 그는 훨씬 후대의 유대인이 발명한 '원죄'라는 논리에 시달리지 않았다. 에스키모처럼 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즐거웠다. 생명 없는 수많은 물건과 장치에 부대끼며 버겁게 살아가는 현대의 도시인보다는 웃을 일이 훨씬 더 많았다.

이집트인은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죽음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르는 척할 수는 있다. 죽은 자를 숭배하는 관습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 '산 자를 위한 숭배'였다.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무시하려는 애처로운 노력이었다. 할머니에게서 "그래, 아가야, 귀신은 없어. 좋은 꿈꾸고 잘 자라"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은 소망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숨바꼭질을 염두에 두고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들을 검토해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중세 그리스도교 무덤은 바로 공포의 장소였다. 섬뜩한 해골과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몸부림치는 불쌍한 죄인의 이미지가 가득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은 고뇌와 절망의 분위기를 풍길 뿐 유쾌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 반면 이집트의 무덤에는 온갖 아름다운 물건들, 장신구, 방향제, 값비싼 의상이 가득했고, 시녀, 요리사, 악사, 서기, 호위병, 뱃사공 등의 인형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무덤에 넣은 데는 의도가 있었다. 사람이 죽었어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장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세상을 떠난 왕, 아버지, 남편, 삼촌, 아내가 내세에도 현세처럼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여느 농경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도 자연의 갖가지 힘마다 선명한 인격을 부여했다. 그들은 자연의 힘들이 일종의 신격화된 위계를 이룬다고 믿었으며, 파라오와 병사들, 신하들, 사제들처럼 보통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등 이집트의 오래된 신들은 이상하게 변하기도 했다. 신성을 잃은 신은 일반 관리, 세리, 관개시설 조사관과 다를 바 없었다. 다시 말해 줄만 댈 수 있다면 신에게 다가가는 것도 가능했다.

왕의 신하들에게 다가가기는 비교적 쉬웠다. 은 몇 덩이만 쥐어주면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신의 경우에는 절차가 더 복잡했다. 신의 은총을 얻어내려면 올바른 주문과 기도가 필요했다. 신과 제대로 소통하면 죽은 자가 잠시 휴가를 얻어 옛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산 자들은 세상을 떠난 친척들에게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줄 의무를 가졌다. 이리하여 죽은 자만을 위해 일하는 예술가 집단이 생겨났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들도 산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는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쾌활한 분위기가 넘쳤다. 그들은 술래를 다 아는 상태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했던 것이다.

소형 예술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자. 사실 이집트 예술에서는 민족적 창조성을 과시하는 거창한 상징물보다 작은 예술품들이 더 흥미롭고 매력이 있다. 몇 킬로미터나 길게 늘어선 황량한 궁전과 음침한 신전,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이집트 전역의 모든 문과 마당에 세워진 초연한 느낌의 수많은 신과 왕의 조각상들은 예술품이라기보다 오로지 백성들에게 엄숙한 분위기를 상기시키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정신의 영역이란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도다!"

그러나 왕궁이나 신전 내부를 보면 다르다. 벽, 기둥, 지붕, 상인방(上引枋, 창이나 문틀 위에 댄 가로대)을 뒤덮은 무수한 세밀화들은 이집트인들의 타고난 낙천성과 천진스러운 즐거움을 다채로운 색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기 어려운 곳이든 거의 감춰진 곳이든 가릴 것 없이, 천장에서 바닥까지 아무리 작은 곳에도 일상생활의 사소한 장면을 묘사한 작은 그림들이 빼곡하다. 생선을 올바로 조리하는 방법에서부터 왕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온갖 주제들이 다 있다.

표면에 그림만 그린 것도 있지만 돌로 된 벽과 기둥에 그림과 글이 새겨진 것도 있다. 이렇게 돌에 형상을 새기는 방법을 '얕은 돋을새김(bas-relief)'이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중세 사람들은 형상의 두께가 바탕에서 도드라진 부분까지 전체 두께의 절반 이하인 얕은 돋을새김(basso-rilievo), 그 이상인 높은 돋을새김(alto-rilievo), 꼭 절반인 반(半) 돋을새김(mezzo-rilievo)을 명확히 구분했다.

나중에 우리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자바의 보로부두르, 인도의 대규모 사원들을 다루는 대목에서 정교하게 새겨진 얕은 돋을새김을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형상이 바탕에서 실제로 도드라지도록 새기려 하지 않았다. 돌 표면에 형상의 윤곽선을 긁어 새기는 정도에 만족했을 뿐 입체적인 표현을 위한 노력은 없었다. 이는 우리가 '음각(陰刻)'이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지금은 이런 예술 형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세밀하게 구분하지 않고, 바탕에서 완전히 도드라지지 않은 것은 전부 얕은 돋을새김이라고 부른다. 나도 그 용어를 그런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훌륭한 얕은 돋을새김 작품을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노련한 조각가가 아니라면 시도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류 조각가는 얕은 돋을새김으로 아주 멋진 효과를 낼 수 있다. 소박할수록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

나는 4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금의 것보다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어떤 일들은 고대 예술가가 우리 현대인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첫째, 오늘날의 예술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반드시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다. 예술가는 실제 생활에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돈을 받는 일종의 예능인 같은 존재가 되었다.

둘째, 누군가가 '시간은 돈이다'라는 끔찍한 슬로건을 생각해낸 뒤부터 예술가도 기술자처럼 작업장에서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는 화가나 조각가도 나무가 자라거나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자연의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켜야 한다. 돋을새김은 시간과 인내가 많이 필요한 작업이다. 우리는 그런 미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예술작품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셋째, 현대의 생활양식은 조각이나 돋을새김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어제 세운 집을 내일 허무는 상황이다. 조각가도 그것을 잘 알기에 집이 허물어진 뒤 자신의 작품이 어느 외딴 구석에 옮겨져 고객을 기다리게 되리라고 생각하면 몹시 언짢은 기분이 된다. 더욱이 현대 사회에서는 조각상의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찾는 고객마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서글픈 느낌도 든다. 벽의 일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돋을새김은 조각상보다 훨씬 더 나쁜 운명이다. 벽을 철거하는 인부는 그 작품이 옆의 도로를 메운 다른 허섭스레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예술가들은 그런 문제 따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솜씨를 부렸다. 모든 사람의 삶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영원성을 추구할 수 있었다. 만약 자기가 그린 새나 나귀의 그림이 앞으로 3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정말 훌륭한 그림이군!" 하는 호평을 듣게 되리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기껏해야 2~3년이나 살아남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보다 훨씬 작품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나일강 유역에서 사용된 건축 방법 자체가 고대 이집트 예술가들에게 솜씨를 발휘할 좋은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파라오의 건축가들은 몇 평방킬로미터에 걸친 넓은 평면과 곡면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고대의 신전은 현대의 교회와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의 그리스도교도에게 '교회'란 수백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의미한다. 교도들은 30분가량 성서의 몇몇 구절에 관한 짧은 설교를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목사와 함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른다. 교도들 자체가 곧 교회이므로 설령 교회 건물이 불타 무너진다 해도 극장이나 창고, 때로는 옥외에서 집회를 할 수 있다. 예배 행사 자체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이집트의 신전은 그리스∙로마의 신전과 중세 성당의 원형에 해당하지만 목적이 달랐다. 신전에 모인 사람들은 예배에 참여하지 않았다. 예배는 사제가 집전하는 상징적인 행사였다. 일반 사람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1만 명이 참여하든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든 예배는 똑같이 거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의 신전은 성격이 크게 다른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신전에는 정규 예배 장소 이외에 신에게 특별한 예배를 드리는 '별채' 격인 작고 어두운 방이 있었다. 여기서 '별채'라고 말한 이유는, 신은 당연히 산 너머 아득한 저편에 있는 신의 나라에 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은 일반 사람들의 필요에 비추어보면 너무 모호하고 멀었다. 그들에게는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 적어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자신은 신을 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이따금 신이 눈에 보이는 특정한 장소에 찾아와 특권을 가진 몇몇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행복감을 느꼈다.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태도와 유사한 예를 생각해볼 수 있다. 현대인의 숭배 대상이 된 신비로운 노란 금속을 보라. 사람들은 흔히 금의 비축분이 나라의 안위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수의 경비원들을 제외하고 국고에 보관된 금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다. 고대 이집트의 신처럼 금은 어두운 지하실에 감추어져 있다. 대통령이나 재무장관도 국가 신용의 토대가 보관된 그 지성소2)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 현대판 금송아지를 새로운 형태의 숭배 의식과 결부시켜 생각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 '종교적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더 이상한 일도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만약 금에 대한 숭배가 엄숙한 국민의례로 격상된다면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유사한 형태가 생겨날 것이다. 볼 수 없는 금덩이를 볼 수 없는 신으로 대체하고, 월 스트리트, 브로드웨이, 윌리엄 스트리트를 사람들이 서서 기다릴 수 있는 넓은 마당으로 바꾸면 된다. 재무장관이 어둡고 보이지 않는 지하 금고로 내려가 '10억 97센트, 20억 48달러' 하고 읊조리면, 신도들은 신앙의 대상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행복감에 젖어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이렇듯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런 전반적인 생각을 확고하게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으면 고대의 신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의 신전은 신이 현세에 가지고 있는 집으로, 대개 매우 넓은 안마당과 뒷마당의 한쪽 끝에 작고 검소하게 지었다. 왜 그랬을까? 안마당과 뒷마당은 넓고 화려하면서도 신이 머무는 거처는 왜 작게 지었을까? 그러나 사제로서 성공하려면 극적인 상태를 유발하는 탁월한 감각을 갖춰야 하고, 대중의 감동을 자아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직업적 사제는 직업적 정치가와 같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현직을 유지하는 일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국민 정서에 가장 알맞았다. 그러나 그리스처럼 직업적 사제가 없었던 나라에서는 신전의 배치가 전혀 달라야 했다. 그리스에서는 사당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회당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실제로 초기 신전에는 회당이 없었고, 주변 지형이 회당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공행사가 많았던 이집트에서는 신전 입구의 회당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예술가들도 늘 회당에 주의를 기울였다.

금속이 나일강 유역에 전래되기 전에는(금속은 파라오 제도와 함께 외부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전 본체만이 아니라 입구의 회당도 목조로 건축했다. 금속이 도입된 뒤에는 가까운 산기슭의 바위를 깎아 신전을 짓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멤피스와 테베 같은 평원의 대도시가 발달하면서 옛 목조 신전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전체를 석조로 건축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그 결과로 생겨난 돌벽과 돌기둥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실력을 발휘할 멋진 공간이 되었다.

카르나크 신전의 넓은 회당을 예로 들어보자. 이 회당의 규모는 길이가 100미터, 너비가 50미터, 높이가 24미터이고 134개의 기둥이 있었다. 지붕 바로 밑에 있는 채광용 창문을 제외한 모든 벽면이 화가와 돋을새김 전문가의 예술을 위한 공간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화가들은 원근법을 전혀 몰랐고 물감도 디스템퍼(distemper)3)밖에 없었다. 디스템퍼는 가장 오래된 채색 물감이다. 석기시대의 동굴인도 디스템퍼를 썼다. 오늘날 방을 흰색으로 칠할 때 사용하는 회반죽도 가장 단순한 디스템퍼라고 할 수 있다. 더 복잡한 형태의 디스템퍼는 여러 가지 색깔의 안료를 수용성의 아교질 재료와 섞은 것인데, 끈기가 있어 회벽 바탕에 칠할 수 있다. 디스템퍼를 사용할 때는 바탕이 건조해야 한다. 현대 회화에서는 알프레스코(alfresco) 기법을 사용한다. 이 '신선한 기법'(알프레스코라는 이탈리아어를 문자 그대로 옮긴 표현이다.)은 회벽이 다 마르기 전에 색을 입히는 방법이다. 이 기법을 쓰면 물감을 침착시킬 수 있으므로 마른 바탕에 직접 그리는 옛 방법과 크게 다른 효과를 낸다.

처음에 이집트인들이 사용한 물감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단 두 종류뿐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잉크는 바로 이집트인들이 발명했다. 그들이 상형문자를 깨우쳤기 때문에 잉크를 발명한 것인지, 아니면 잉크를 먼저 발명했기 때문에 상형문자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중에 이집트인들은 검은색과 붉은색 이외에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도 사용하게 되었고, 주홍색이나 양홍색보다 황토색이나 암황색에 가까운 붉은색도 썼다.

이집트의 회화는 제12왕조와 제19왕조 사이, 대략 기원전 20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해당하는 람세스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이집트 화가들이 기법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데는 700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했다. 반 에이크(van Eyck) 형제가 현대식 유화 기법을 발명한 것은 1400년경이다. 파라오를 위해 일했던 이집트 화가들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셈이다.

이집트 예술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듯한,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오로지 신만이 아는 완벽한 익명의 예술이다. 온갖 지배 체제와 혼돈 속에서도 끊기지 않았고, 폭풍우와 파도에 굳건히 버티는 바다처럼 외국의 침략과 자연재해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예술이다. 짓고, 깎고, 칠하고, 그리고, 새기면서 음악을 연주하듯이 점점 복잡한 장식으로 향한 예술이다. 엄청난 성공을 기대하지도, 비참한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저 차분하고, 끈질기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은 듯 자연스럽게 나무에서 청동으로, 청동에서 철로, 진흙에서 유리로, 무명에서 리넨으로 옮아간 예술이다.

개인의 권리와 특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나'라는 말이 사회, 도덕, 예술 전반을 지배하는 현대의 생활철학으로 바라보면 고대 이집트는 이상한 세계였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를 제외하고 지난 5천 년간 존속했던 어느 체제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나라가 바로 이집트였다.

현대의 예술은 개인적 개성의 표현이지만, 이집트의 신전과 조각은 사회 전체적 개성의 표현이었다. 모세가 이집트 예술을 보았을 때는 이미 과거의 것이었고, 카이사르가 보았을 때는 더 오랜 과거의 것이었으며, 나폴레옹이 허풍스런 연설에 써먹었을 때는 까마득한 과거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예술에 대해 더 연구한다면(그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작은 목각 인형과 말 없는 문지기 석상, 수많은 회화들이 마치 바로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신선하고 산뜻하게 느껴질 것이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아무도 못할 것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예술 영역에서 이성의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성의 힘만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것이 현명하다.

나는 모든 박물관의 문에 새기는 말로 다음 문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받아들이라, 그리고 겸허히 감사하라."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제의와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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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신들의 거주지인 신전에서 제사장들의 집례하에 하루에 세 번(아침, 낮, 저녁) 드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중에서도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낮 제사에서는 단지 물을 뿌리고 향을 피움으로써 신전을 정결케 하는 일만을 행했을 뿐이지만,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에서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목욕재계하고 신상 앞에 절을 한 다음에 음식물을 제공하는 순서를 진행하였다. 또한 신상을 꺼내어 옷을 벗기고 목욕시킨 후에 다시 옷을 입히고 치장하는 순서도 두 제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이 어떠한 축제들을 지켰는지는 확정하기 어려우나, 새 수확물의 복을 기원하며 식물에 육화되어 있는 생명을 갱신하려는 수확 축제와, 파라오를 위해 새로운 신전을 봉헌하고 그가 이집트 땅의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널리 공포하는 세드(Sed) 축제가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집트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던 거룩한 결혼 의식이 제의 드라마 형식으로 재현되었을 것임을 나타내는 문헌상의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오시리스 신의 죽음과 부활을 극화하는 오시리스 축제만이 증거로 남아 있을 뿐이다.

본래 나일 계곡에 처음으로 농경문화를 정착시킴으로써 지상 세계의 삶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초목과 농사의 신이었던 오시리스는 초목의 생장을 가능하게 하는 나일 강의 물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는 왕조 이전 시대부터 델타 지역에서 숭배되어 오다가, 고왕국 시대 말기부터는 그보다 더 남쪽에 있던 아비도스(Abydos)에서 매우 활발하게 섬겨지게 되었으며, 중왕국 시대 이후부터는 지하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오시리스의 삶과 행동, 고통, 죽음, 부활 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오시리스 신화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자기 동생인 세트에게 죽임을 당하나, 이시스와 네프티스의 도움에 힘입어 다시 살아나 지상 세계의 풍요를 회복시키는 한편, 지하계를 주관하는 신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아들 호루스가 그의 자리를 계승한다. 이렇듯이 오시리스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지상 세계에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널리 숭배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신화와 제의의 세계 속에서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 지하계의 왕이 된 오시리스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오시리스의 삶은 메소포타미아의 두무지나 탐무즈처럼 자연계의 순환(초목의 소생)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던 까닭에, 이집트인들은 자신을 오시리스와 동일시함으로써 죽었다가 살아나는 오시리스의 삶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 그와 동일한 갱신 효과를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신탁과 점술 그리고 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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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의 창조 신화들에 의하면 인간은 신들을 섬기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숙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따라서 여러 신전들에서 신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일은 인간이 당연히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물론 그 일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들 앞에서 신하들과 백성들을 대표하는 왕의 책임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제사만이 신들을 섬기는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신들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생활에 옮기는 일 역시 신들을 섬기는 한 방법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신들의 뜻은 일반적으로 신비로운 것이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다고 신들의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들의 뜻은 신탁 선포나 각종 점술을 통하여 지상 세계에 알려졌다. 신탁 선포가 신들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계시를 가리킨다면, 점술은 특별한 기술을 통하여 신들의 뜻을 아는 방식을 가리킨다.

먼저 신탁(oracle) 선포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신탁 메시지는 일반적으로 국내외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왕에게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물론 그 중심 내용은 대체적으로 왕에게 확신과 평안을 주는 것이었지만, 때로는 왕의 잘못을 책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탁 메시지는 보통 제사장이나 제사장적인 인물을 통해서 선포되었으며, 일반 평민들 중의 한 사람이 신탁 선포의 도구로 선택되기도 했다. 그들은 일종의 황홀경(ecstasy)이나 꿈을 매개로 하여 신탁 메시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들의 뜻은 점술이나 주술처럼 전문적인 지식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경우도 있었다. 점술(divination)의 경우동물의 간을 살펴서 점을 치는 간신점(肝神占), 물에 기름을 띄워 기름의 모양이나 흐름을 살펴 점을 치는 수유점(水油占), 나무로 만든 막대기의 움직임을 보고서 점을 치는 막대기점, 화살을 던지거나 화살 머리에 글을 새겨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의 화살점, 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신들의 뜻을 알고자 하는 몽점(夢占),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들여 신들의 뜻을 구하는 초혼점(招魂占),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점을 치는 별점(점성술), 돌이나 나무 또는 주사위 등으로 만들어진 제비를 던지거나 뽑아서 점을 치는 제비점 등의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간신점에 사용되던 점토판 간의 모델

이상의 다양한 점술 방법들은 고대 근동 지역 전역에서 제사장들을 비롯한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수메르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수메르 사람들이 이 방법들 모두를 폭넓게 사용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헌 자료에 의해 뒷받침되는 점술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문헌 자료들을 발굴하여 해독하게 된다면, 그 활용 범위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수메르 지역에서는 부적이나 글씨를 새겨 저주함으로써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특정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주문을 외는 주술(magic)이 널리 시행되었다. 마법으로도 번역되는 주술은 신들에게 있는 초월적인 힘을 조정하여 국가적인 차원에 속한 일이나 개인적인 차원의 일을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수메르 지역을 포함한 고대 근동 전역에서 합법적인 주술가(magician)들에 의해 폭넓게 활용되었다.

 

[고대 근동의 신화와 종교]

죽음과 사후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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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아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껏 발굴·해독된 자료들을 통하여 그들이 죽음과 죽은 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어떠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다. '길가메쉬와 산 자들의 땅'(Gilgamesh and the Land of the Living)이라는 서사시를 읽어보면, 우룩의 성주(城主)인 길가메쉬는 모든 다른 인간과 같이 자신도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자신의 운명의 날이 이르기 전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자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산 자들의 땅'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백향목을 자신의 도시인 우룩으로 가져오고자 한다. 이러한 내용은 수메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명예욕, 곧 불멸의 이름을 남기려는 욕망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핀 '지우수드라의 홍수 이야기'에서 지우수드라가 신들의 은총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는다는 내용도 알고 보면 수메르 사람들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그들이 때때로 죽은 자들이 반드시 가게 되는 지하 세계(underworld)를 땅 속에 있는 어둠의 도시로, 태양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땅으로 묘사하는 것도 그들이 죽음을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지우수드라가 영생을 얻어 딜문이라는 낙원에 거주하게 된다는 결론 부분은, 인간의 필멸성 또는 사멸성(mortality)을 넘어서고자 하는 수메르 사람들의 욕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수메르 사람들은 죽은 자가 지하계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을 삼키는 (man-devouring) 강을 건너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그들은 죽은 자를 지하계로 인도하는 사공(沙工)이 그 강에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 강은 그 누구도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강이었다. 이처럼 지하계로 내려가는 길은 적어도 인간에게는 도무지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지만, 신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난나의 지하계 여행'이라는 작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난나 여신은 배우자인 두무지가 갑자기 죽어 지하계로 내려가 버리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를 찾아 지하계로 내려가게 되고, 거기서 두무지를 지상 세계로 다시 이끌어 올림으로써 그를 살려낸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지하계 탈출과 지상계 복귀는 어디까지나 인간 세계의 풍요로운 삶을 보증하기 위한 죽음–부활 신화의 의례적인(ritual) 재현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어떠한 인간도, 심지어는 길가메쉬 같은 영웅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죽음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행복, 기쁨 등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물질, 가족, 재산 등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빼앗아가 버린다. 어느 누구도 이 절대적인 상실로부터 도피하지 못한다. 영웅 길가메쉬의 이야기는 수메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던 이러한 죽음 의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대수학]

이집트·바빌로니아시대 대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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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시대의 파피루스에 ‘어떤 수의 2/3와 그 1/2과 3/7을 더하면 33이 된다. 그 수는 얼마인가?’라는 문제가 씌어 있는 것이 있다. 이것은 1차방정식의 문제이다. 이집트인은 분수를 잘 썼다. 바빌로니아설형문자(楔形文字)로 씌어진 점토판을 해독해보면 2차방정식이나 때로는 3차방정식의 문제가 있다.

중국의 오래 된 수학책 《구장산술(九章算術)》 등에도 저차방정식(低次方程式)에 귀착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숫자방정식(계수가 수인 대수방정식)이며 그 해법의 일반론이 당시에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헬레니즘]

마케도니아와 이집트의 왕실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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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여성의 지위 변화가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나마 가장 많은 부분이 묘사되어 있는 왕실의 여성에 대해 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헬레니즘 군주국들에서 왕실 여성은 과연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지니고 공적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먼저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될 무렵의 마케도니아(Macedonia)가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주요 군주국의 왕실은 모두 마케도니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을 떠나면서 공식적으로 마케도니아는 섭정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맡겨졌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륌피아스와 친누이인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마케도니아와 에피로스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에피로스는 올륌피아스의 모국으로 그녀는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를 남동생인 에피로스의 알렉산드로스와 결혼시켰기 때문이다. 에피로스의 왕비가 된 클레오파트라는 외삼촌이었으나 이제는 남편이 된 에피로스의 왕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4년경 이탈리아로 군사 원정을 떠난 이후, 그리고 기원전 331~330년 겨울 전사한 이후 에피로스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이끌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이 시기 마케도니아 여성사의 전문가인 화이트혼(Whitehorne)은 분석하고 있는데, 첫째로 그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누이이며, 둘째로 에피로스에서의 여성의 특별한 지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에서와는 달리 에피로스에서 아들이 있는 미망인은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가장으로 행동하는 것이 용인되어 있었다.

한편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드로스전」에는 이 두 여성에 대해 눈에 띄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첫째는 25장 4절의 묘사로써 알렉산드로스가 가자(Gaza)를 점령(기원전 332년)한 후, 많은 전리품을 고국으로 보내면서 '올륌피아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그(알렉산드로스)의 친구들에게' 보낸다고 특별히 명시한 부분이다. 둘째는 68장 3절로 "올륌피아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섭정인)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 대항하여 파당을 모아 그(알렉산드로스)의 영토를 분할하고 올륌피아스는 에피로스를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를 장악하였다"는 내용이다.

첫째 부분에서 올륌피아스가 거론된 것은 홀로 있는 어머니이니 당연하다고 치고, 그 밖의 다른 이복형제들의 이름이 전혀 거론되지 않는 것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이는 친누이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특별한 관심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 관심은 곧바로 둘째의 구절과 관련이 될 것이다. 미망인이 된 클레오파트라가 마케도니아로 돌아와서 권력투쟁에 뛰어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며, 동시에 이는 오빠인 알렉산드로스와의 특별한 친분관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68장 3절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어머니는 선택을 잘 하신거야, 마케도니아는 여성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거든"하고 평했던 대목은 알렉산드로스의 권위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기는 하나, 에피로스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동시에 앞 문단에서 언급한 에피로스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당한 정도로 보장되어 있던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후, 권력의 무게 중심이 소위 '후계자들'에게 넘어감에 따라 이들과 결혼이나 친척관계로 맺어진 마케도니아 왕실의 여성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합법적인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이 권한이 확고한 것은 아니어서, 기원전 280년 이후 정치적 혼란이 가라앉고 헬레니즘 왕국과 왕조가 자리를 잡게 되자 그때까지 놀라울 정도로 강화되어 가던 왕실 여성들의 중요성은 일부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왕조 치하에서는 그들의 권한이 약화되었지만, 다른 경우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계속 유지되었거나 심지어 더욱 강화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나온 여러 비문과 파피루스 등의 자료에서는 거의 언제나 왕과 여왕이 나란히 거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신이자 구주(theoi soteres)이신 프톨레마이오스(1세) 왕과 베레니케(Berenice) 여왕의 자녀이시며, 남매신(theoi adelphoi)이신 프톨레마이오스(2세) 왕과 아리스노에(Arisnoe) 여왕의 아들이신 프톨레마이오스(3세) 대왕 등이다. 아리스노에는 기원전 270년까지 5년여를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함께 통치했으며, 기원전 2세기의 클레오파트라 2세와 3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 역시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투쟁을 벌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은 플루타르코스의 「클레오메네스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클레오메네스가 이집트로 망명한 뒤, 그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얼마 안가 사망하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즉위하였다. 이 시기 이집트의 궁중은 "지나친 방종과 음주에 빠져있었고, 여성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국사는 왕의 애첩인 아가토클레이아(Agathocleia)와 포주였던 그녀의 어머니 오이난테(Oinanthe)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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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스 아우레아에는 온갖 진기한 것들이 많았다. 언덕 세 개가 만나는 계곡에는 인공호수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바로 이 자리에 세워진 것이 콜로세움이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72년에 착공되어 8년 동안의 기적적인 역사를 거쳐 티투스 황제 때인 80년에 준공된 콜로세움은 로마시대에 건립된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콜로세움.

티투스는 등극하기 전인 70년에 예루살렘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10만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였다. 그 중 4만 명을 동원하여 콜로세움을 건축했다는 전설이 있다. 콜로세움은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과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구경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거대한 원형극장은 4층으로 되어 있었다. 1층은 높이 10.5m의 도리아식 반원주, 2층은 높이 11.85m의 이오니아식 기둥, 3층은 11.6m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되어 있고, 4층은 관중들이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수 있게 벨라리움이라는 천막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대장치를 지탱하는 벽으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계단과 독립 공간, 즉 갈레리아가 있었다. 이 갈레리아는 이집트산 콩, 음료수 등을 파는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조우했다.

그러나 이 건물의 설계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도미치아누스의 건축가 라비리오라고 하기도 하고, 가운덴치오라는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단지 추측일 뿐이다. 아무튼 티투스 황제는 이 장엄한 건축물을 통해 제국의 위용을 마음껏 자랑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콜로세움의 거대함은 높이 48m, 둘레 500m 등 경기장 내부의 길이 87m와 폭 55m라는 수치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하다.

내가 콜로세움을 제일 먼저 찾은 것은 1969년 9월의 일이었다. 로마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는데, 콜로세움에 들어선 순간 아찔한 기분이었다. 같이 있던 친구는 "역사가 무언지 조금은 알 것 같구나"하고 중얼대듯 말했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를 통해 얻었던 선입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맹수와 사투를 벌이는 노예 검투사의 거친 숨소리며, 맹수에게 물려 죽어가는 자의 비명소리 혹은 탄식소리 등의 모든 소리들이 관객석에서 울리는 함성소리와 섞여 검투사와 짐승의 옆구리에서 뿜어 나오는 핏줄기처럼 서늘한 전율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만 같았다.

검투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러나 사실은 자유를 걸고 싸우는 것이다. 로마에 잡혀온 포로들은 시장에서 노예로 팔려나간다. 팔리지 못한 노예들은 이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가 되어 싸우고 또 싸운다. 맹수와도 싸운다. 정해진 수만큼 승리를 거두면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유를 위해 싸웠다. 경기장 바닥은 모래로 덮이고, 곳곳에는 사냥장의 분위기를 살려 숲이며 나무 그리고 구릉을 설치하였다. 바닥 밑에는 노예들과 맹수들을 수용하던 각종 우리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바다에서의 싸움 장면도 연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바닥 전체에 물을 가두는 일이 용이하지 않아 별도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였다. 콜로세움은 608년까지는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지만 중세기에는 군사적 요새로 이용되다가 그 이후에는 교회나 빌딩의 건축에 사용될 자제의 제공 터가 되었다. 오늘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르베리니 궁전도 여기서 뜯어온 돌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빗대어 후세 사람들이 남긴 말이 너무나 유명해 여기에 옮긴다.1)

야만인들이 하지 않았던 것을 바르베리니 가문이 하였다.
(Quod non fecerunt Barbari fecere Barberini.)

526년 토틸라 야만족들이 쳐들어와 콜로세움을 훼손시킨 일이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1차적인 목적은 그들의 조상들이 당한 한을 풀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 다른 목적은 돌과 돌을 이어주던 구리를 약탈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건물 전체가 무참히 파괴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후에 로마의 귀족 명문 세도가들에 의해 훼손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남겨진 것이기에 인용하였다.

콜로세움이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슬픈 역사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박해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로마 곳곳에 있는 원형경기장들에서 자행되었던 그리스도 교도에 대한 박해는 콜로세움에서도 계속되었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난 다음에야 중단되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다른건 말고 문화등을 설멍해 드릴께요

이집트는 예로부터 나일강이 범람하는자연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새롭게 땅을 분배해야 하지요

그러므로 땅을 측량하는 기술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수학,천문학등이 다른문명보다도 매우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워낙 미신,귀신숭배가 강하고

이 현실세계는 별것이 아니고

죽고난 뒤가 중요하다고 해서

피라미드등을 세우고

파라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파라오는 이집트의 지배자로써

제사등을 주관하는데

아무리 왕이라도

농사가 잘안되면

처벌을 받는습니다

왕의 자질부족등으로

 

지금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고

더운 기후에 살면서

인구,면적,GDP도

세계여느 나라에 밀리지 않습니다

정치제도는 왕정이고

형제가 왕위에 오르면

그 옛날왕자들은 다 처형을 당합니다(지금도)

이집트에대하여

... 저희 선생님이 이집트에 대하여 알아오래요 ㅠㅠ 그래서 말인데 이집트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ㅠㅠ 제가 내공50 걸깨여 ㅠㅠ 근데 내일까지라서 빨리 알려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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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도와주세요 제목과 같이 이집트에 대해... (많죠?) 그리고 이집트국기 사진있죠? 그것좀올려주세요! (내공냠냠, 욕설등등신고) 이집트 전통의상은...

이집트에대하여

...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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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이거 자세히좀가르쳐주세요 이집트가 세워진때 하구요 이집트가 대통령제... 대통령제이면 현재의 대통령은?(왕두 되요) 꼭 좀 부탁드려요~ 이집트는 기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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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대하여 수도,언어,지형적특징,이집트의 특징,역사 등 간단하게 부탁바랍니다. 이집트의 자연환경 이집트의 지형은 국토의 면적에 비해 단순하다. 나일강 하곡...

이집트에 대하여 알려주세염

이집트에 대하여 알려주세여 예를 들어 먹는 음식과 생활 모습 입는 옷, 기후 집 등등등 간단 하고 자세하게 그림도 있으면 ㄳㄳ 다음은 이집트에 대한 정보입니다....

이집트에 대하여

... 7이집트가 낳은 위대한 사람 8피라미드에 대하여<간략하게 요점만> 9인구수 이렇게 알려주시지 않고 무작이로 복사해오시는분은 내공 없습니다 많이 답변해주세요...

이집트에 대하여

저 6학년 사회숙제때뮨에 이집트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사를 해야해요 ㅠㅠ 최대한 빨리 답변 부탁드려요 ㅠ 이집트 아랍 공화국(이집트아랍共和國, 아랍어: جمهوري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