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작성일 2008.06.15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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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문화,대외관계면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정확한 답변 부탁드려요 ㅠㅠㅠ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고구려의 삼국통일(가상 시나리오)

 

정치적 분야

(1) 왕권의 강화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했다면 넓은 영토로 인해 남쪽(옛 신라와 백제 영토)의 우월한 식량과 삼국의 군사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은 신라인과 달리 전투민족이여서 중국과 더욱 더 많은 전쟁을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통일고구려를 잘 통제하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과 중앙집권국가의 기초를 완성해야 했다.

고구려가 내정에 힘을 못 써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면 고구려의 수도는 북쪽이기때문에 통일신라 후기처럼 남쪽의 잔당세력 백제와 신라가 곳곳에서 반란을 도모할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또다시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는데 고구려가 내정을 잘했다면 중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대륙을 넓히고 중국의 문화를 일부 수용한면서 두만강의 위쪽의 넓은 지역을 확보하는등의 대국으로 성장하여 오늘날에 이른다면 아마도 세계에서 꼽히는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고구려가 내정에 실패했다면 다시 세나라는 분열되었을 것이고 고구려는 사라지게 된다. 북방민족과 중국이 그 모습을 그냥 지켜볼 나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항상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중간에서 한반도가 세력이 약해지면 바로 어느 한 세력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2) 중앙 집권 국가를 바탕으로 한 영토 확장

- 대조영의 고구려 : 통일고구려는 7세기에 이르러 북쪽의 대조영()이 나타나 고구려를 더욱 크게 성장하도록 한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당시 통일고구려의 귀족이었던 대조영은  통일고구려의 왕이 되어 만주지방에 혼거하던 말갈족도 함께 포용하여, 일반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귀족이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신라인과 백제인이 중간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과 거란족이 하류층을 형성하였다.

안정적인 내치로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한 고구려는 옛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당나라와의 정치적 갈등과 전쟁을 거듭하였으나 두나라는 요동을 경계로 서로의 나라를 인정하게 된다. 중앙은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3성 6부제, 지방은 5경 15부 62주로 이뤄졌죠. 국가의 큰 일은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했습니다.

- 당과의 관계 : 755년에는 당나라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매우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통일 고구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만주지역의 영토를 확대하고 당나라와는 외교적인 절충으로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당은 수 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경제적 분야

경제가 바탕이 아니고서는 정치가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일고구려의 제국성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경제적 측면이다.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전보다 넓은 토지와 많은 농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통일고구려는 피정복민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삼국의 경쟁 시기와는 다른 경제적 조치를 취하였다. 통일신라의 경우처럼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통일고구려는 조세 , 공물 등을 거두기 위하여 촌주에게 몇 개의 촌락을 책임지게 하였다. 

- 토지제도 : 통일고구려는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백제와 신라 영토를 편입하여 더 많은 농경지를 확보하였다. 이와 동시에 통일고구려는 통합된 백제와 신라인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을 농민에 대한 지배와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통일고구려는 삼국통일 이후 정치제도의 정비와 함께 토지제도를 정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토지제도의 정비는 통일고구려의 중앙집권체제정비의 한 과정이었다. 통일고구려는 공을 세운 귀족에게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을 지급하였다. 식읍은 아마 통일고구려의 정복사업이나 당과의 많은 전투와 삼국통일전쟁과정에 공을 세운 귀족에게 상급으로 지급되었다.

- 조세제도 : 통일고구려의 토지제도 정비와 함께 국가의 재원 조달을 위한 조세제도에 대한 정비가 뒤따랐을 것이다. 통일고구려는 일찍이 조세수취와 관련된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다. 결국 통일고구려는 통일신라나 발해처럼 조세제도의 정비와 수취기관을 체계화시켜 민에 대한 수취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통일고구려는 국가의 재정기반을 확대하였을 것이다. 통일고구려시대 백성은 토지의 면적에 따라 조세, 즉 전조(田租)를 납부하였다. 백성들은 전조 이외에도 조(調)를 납부하였다. 조는 호(戶)를 단위로 각 집에서 생산한 포(布) 등이 국가에 납부되었다. 역역의 주대상은 정남(丁男)이었다. 정남은 20세에서 59세의 남자이었다. 국가의 부역의 대상은 삼국시대 15세 이상의 남자이었다. 통일고구려시대에도 역역의 대상은 15세 이상의 남자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역역의 징발기간은 1년 가운데 대략 1개월 내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국가의 부역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실시되는데 전국의 촌락에서 동원되었다.

- 무역활동(무역왕 장보고) : 옛 신라인 장보고는 통일고구려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 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이처럼 장보고 세력이 반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청해진을 거점으로 한 해상무역의 번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청해진의 옛 신라인뿐만이 아닌 재당 신라인들의 국제적인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사회적 분야

통일고구려의 사회 구조의 핵심은 지배구조의 이원화입니다. 즉 이것은 지배층인 고구려민, 백제민, 신라민과 피지배층인 거란인, 말갈인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고 사회 풍속도 이원화 되어 갔니다. 대씨와 고구려 고씨계의 지배층은 한때 당과 사이가 안 좋기도 했지만 후에 당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지배층들이 당의 외국인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여 좋은 성적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수많은 노비를 거느리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이에 비해 피지배층인 말갈, 거란족은 토착세력인 촌주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풍습을 지켜나갔습니다. 지배층 역시 이를 인정함으로써 여러 종족으로 섞여 있는 통일고구려를 하나로 융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문화적 분야

통일고구려의  문화의 특색 위에 당나라 문화를 더하였다. 불교가 발달하였고,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따라서 건국 이후 통일고구려의 문화는 자연히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당의 문화와 고구려의 문화와 신라및 백제의 문화가 그것이다. 건국 초기의 통일고구려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당의 문화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기층문화는 말갈 문화가 중심이었으면, 여기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요소도 있었고, 그 속에서 통일고구려인들 고유의 문화도 창조되었다.

 

 

다른 나라와의 대외관계

통일고구려는 7세기 후반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던 까닭에 건국 초기부터 돌궐은 물론 적대국인 唐과도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전개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대내체제의 안정을 기하였다.
- 돌궐과의 관계 : 통일고구려는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돌궐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이때 돌궐은 묵철가한(默輟可汗, 693~716)의 치세로 당이 무후(武后)와 위후(韋后)의 실정으로 내부의 통치체제가 문란해 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여 당을 압도할 정도였다. 당이 천문령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발해 정벌을 시도하지 못한 것도 돌궐의 등장때문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당군과의 치열한 항쟁과정에서 통일고구려는 국가적 존립을 도모하기 위해 당과 대립하는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대당 견제외교는 유연, 돌궐 등 북방 유목민족과 제휴함으로써 중원 왕조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통일고구려의 전통적 외교정책을 계승한 것이며 이후 통일고구려의 대 북방외교의 기본 틀이 되었다. 발해는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잘 활용하여 돌궐, 왜 등 주변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외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말갈제부를 복속시키는 등 급속한 세력확장에 성공하게 된다.

- 당과의 관계 : 통일고구려 자체가 반당적인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은 7년만인 705년 장행급(張行及)을 보내어 통일고구려의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였다. 당측에서 본다면 측천무후의 실정으로 발발한 거란의 이반, 통일고구려의 탄생, 돌궐의 성세에 대해 통일고구려를 회유하여 대립하고 있던 돌궐 및 그 예하에 있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당의 외교적 회유에 통일고구려는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계속 당과 대립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당의 선진문물은 통일고구려의 발전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돌궐은 정치, 군사적으로는 강대한 국가였으나 유목국가라고 하는 문화적 성격상 통일고구려의 발전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당과 통일고구려는 여기에서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발해는 왕자 대문예(大門藝)를 보내어 숙위케 하였고 당은 통일고구려를 정식으로 인정하려고 하였다. 한반도와 만주 전체를 통일한 대제국 통일고구려는 중국 남북조에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송기호, 발해정치사연구, 일조각, 1995

노태돈 외, 한국사10-발해, 국사편찬위원회, 1996

신성재,  9세기 전반 신라의 정치사회와 장보고 세력, 연세대학원, 2001
이병도,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93

윤제운,  발해사회 경제사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사연구회, 2003

http://explain.egloos.com/3512286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QNO001&qid=2heLm&q=%B0%ED%B1%B8%B7%C1%C0%C7+%BB%EF%B1%B9%C5%EB%C0%CF&srchid=NKS2heLm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대외관계 대충 얼버무리고 종합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일단 현재 동북공정이라는 말이 없었을 것이며 우리나라 영토의 확장과

조선의 사대, 보수적 사상이 진취적 독립적으로 되지 않았을까요?

또한 중국과의 대등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면서

일제 강점은... 모르겠네요.

만약 고구려라는 나라가 남의 문화를 적절히 수용할 줄 알았다면

일제 강점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후금, 즉 청의 정묘호란, 병자 호란은 일어 났을리 만무하고요.

왜냐하면 청은 만주족이기에 그 당시 만주가 우리 땅이라면... 이해 되시길...

어쨌든 고구려가 통일을 했으면서 멸망하지 않았다면 대외 관계로는 현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을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상 허접한 답변 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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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삼국통일(가상 시나리오)

 

정치적 분야

(1) 왕권의 강화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했다면 넓은 영토로 인해 남쪽(옛 신라와 백제 영토)의 우월한 식량과 삼국의 군사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은 신라인과 달리 전투민족이여서 중국과 더욱 더 많은 전쟁을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통일고구려를 잘 통제하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과 중앙집권국가의 기초를 완성해야 했다.

고구려가 내정에 힘을 못 써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면 고구려의 수도는 북쪽이기때문에 통일신라 후기처럼 남쪽의 잔당세력 백제와 신라가 곳곳에서 반란을 도모할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또다시 두가지로 생각해볼수 있는데 고구려가 내정을 잘했다면 중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대륙을 넓히고 중국의 문화를 일부 수용한면서 두만강의 위쪽의 넓은 지역을 확보하는등의 대국으로 성장하여 오늘날에 이른다면 아마도 세계에서 꼽히는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고구려가 내정에 실패했다면 다시 세나라는 분열되었을 것이고 고구려는 사라지게 된다. 북방민족과 중국이 그 모습을 그냥 지켜볼 나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항상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중간에서 한반도가 세력이 약해지면 바로 어느 한 세력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2) 중앙 집권 국가를 바탕으로 한 영토 확장

- 대조영의 고구려 : 통일고구려는 7세기에 이르러 북쪽의 대조영()이 나타나 고구려를 더욱 크게 성장하도록 한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당시 통일고구려의 귀족이었던 대조영은  통일고구려의 왕이 되어 만주지방에 혼거하던 말갈족도 함께 포용하여, 일반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귀족이 상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신라인과 백제인이 중간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말갈족과 거란족이 하류층을 형성하였다.

안정적인 내치로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한 고구려는 옛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당나라와의 정치적 갈등과 전쟁을 거듭하였으나 두나라는 요동을 경계로 서로의 나라를 인정하게 된다. 중앙은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3성 6부제, 지방은 5경 15부 62주로 이뤄졌죠. 국가의 큰 일은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했습니다.

- 당과의 관계 : 755년에는 당나라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매우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통일 고구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만주지역의 영토를 확대하고 당나라와는 외교적인 절충으로 안정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당은 수 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경제적 분야

경제가 바탕이 아니고서는 정치가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일고구려의 제국성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경제적 측면이다.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전보다 넓은 토지와 많은 농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통일고구려는 피정복민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삼국의 경쟁 시기와는 다른 경제적 조치를 취하였다. 통일신라의 경우처럼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통일고구려는 조세 , 공물 등을 거두기 위하여 촌주에게 몇 개의 촌락을 책임지게 하였다. 

- 토지제도 : 통일고구려는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백제와 신라 영토를 편입하여 더 많은 농경지를 확보하였다. 이와 동시에 통일고구려는 통합된 백제와 신라인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을 농민에 대한 지배와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통일고구려는 삼국통일 이후 정치제도의 정비와 함께 토지제도를 정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토지제도의 정비는 통일고구려의 중앙집권체제정비의 한 과정이었다. 통일고구려는 공을 세운 귀족에게 식읍(食邑)이나 녹읍(祿邑)을 지급하였다. 식읍은 아마 통일고구려의 정복사업이나 당과의 많은 전투와 삼국통일전쟁과정에 공을 세운 귀족에게 상급으로 지급되었다.

- 조세제도 : 통일고구려의 토지제도 정비와 함께 국가의 재원 조달을 위한 조세제도에 대한 정비가 뒤따랐을 것이다. 통일고구려는 일찍이 조세수취와 관련된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다. 결국 통일고구려는 통일신라나 발해처럼 조세제도의 정비와 수취기관을 체계화시켜 민에 대한 수취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통일고구려는 국가의 재정기반을 확대하였을 것이다. 통일고구려시대 백성은 토지의 면적에 따라 조세, 즉 전조(田租)를 납부하였다. 백성들은 전조 이외에도 조(調)를 납부하였다. 조는 호(戶)를 단위로 각 집에서 생산한 포(布) 등이 국가에 납부되었다. 역역의 주대상은 정남(丁男)이었다. 정남은 20세에서 59세의 남자이었다. 국가의 부역의 대상은 삼국시대 15세 이상의 남자이었다. 통일고구려시대에도 역역의 대상은 15세 이상의 남자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역역의 징발기간은 1년 가운데 대략 1개월 내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국가의 부역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실시되는데 전국의 촌락에서 동원되었다.

- 무역활동(무역왕 장보고) : 옛 신라인 장보고는 통일고구려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 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이처럼 장보고 세력이 반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청해진을 거점으로 한 해상무역의 번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청해진의 옛 신라인뿐만이 아닌 재당 신라인들의 국제적인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사회적 분야

통일고구려의 사회 구조의 핵심은 지배구조의 이원화입니다. 즉 이것은 지배층인 고구려민, 백제민, 신라민과 피지배층인 거란인, 말갈인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고 사회 풍속도 이원화 되어 갔니다. 대씨와 고구려 고씨계의 지배층은 한때 당과 사이가 안 좋기도 했지만 후에 당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지배층들이 당의 외국인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여 좋은 성적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수많은 노비를 거느리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이에 비해 피지배층인 말갈, 거란족은 토착세력인 촌주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풍습을 지켜나갔습니다. 지배층 역시 이를 인정함으로써 여러 종족으로 섞여 있는 통일고구려를 하나로 융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문화적 분야

통일고구려의  문화의 특색 위에 당나라 문화를 더하였다. 불교가 발달하였고,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따라서 건국 이후 통일고구려의 문화는 자연히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당의 문화와 고구려의 문화와 신라및 백제의 문화가 그것이다. 건국 초기의 통일고구려 문화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당의 문화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의 기층문화는 말갈 문화가 중심이었으면, 여기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요소도 있었고, 그 속에서 통일고구려인들 고유의 문화도 창조되었다.

 

 

다른 나라와의 대외관계

통일고구려는 7세기 후반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던 까닭에 건국 초기부터 돌궐은 물론 적대국인 唐과도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전개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대내체제의 안정을 기하였다.
- 돌궐과의 관계 : 통일고구려는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돌궐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이때 돌궐은 묵철가한(默輟可汗, 693~716)의 치세로 당이 무후(武后)와 위후(韋后)의 실정으로 내부의 통치체제가 문란해 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여 당을 압도할 정도였다. 당이 천문령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발해 정벌을 시도하지 못한 것도 돌궐의 등장때문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당군과의 치열한 항쟁과정에서 통일고구려는 국가적 존립을 도모하기 위해 당과 대립하는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대당 견제외교는 유연, 돌궐 등 북방 유목민족과 제휴함으로써 중원 왕조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통일고구려의 전통적 외교정책을 계승한 것이며 이후 통일고구려의 대 북방외교의 기본 틀이 되었다. 발해는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잘 활용하여 돌궐, 왜 등 주변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외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말갈제부를 복속시키는 등 급속한 세력확장에 성공하게 된다.

- 당과의 관계 : 통일고구려 자체가 반당적인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은 7년만인 705년 장행급(張行及)을 보내어 통일고구려의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였다. 당측에서 본다면 측천무후의 실정으로 발발한 거란의 이반, 통일고구려의 탄생, 돌궐의 성세에 대해 통일고구려를 회유하여 대립하고 있던 돌궐 및 그 예하에 있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당의 외교적 회유에 통일고구려는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계속 당과 대립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당의 선진문물은 통일고구려의 발전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돌궐은 정치, 군사적으로는 강대한 국가였으나 유목국가라고 하는 문화적 성격상 통일고구려의 발전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당과 통일고구려는 여기에서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발해는 왕자 대문예(大門藝)를 보내어 숙위케 하였고 당은 통일고구려를 정식으로 인정하려고 하였다. 한반도와 만주 전체를 통일한 대제국 통일고구려는 중국 남북조에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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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 했다면고구려의 영토가 넓고 인구도 많아서 곧 분열을 했을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중국에 병합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현재...

일단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현재 한국이라는 나라는 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미국과...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는...

삼국통일을 만약 고구려가 했다면 어떻게...

삼국통일을 만약 고구려가 했다면 어떻게 되는건가요?? 삼국통일을 만약 고구려가 했다면 어떻게 되는건가요?? ㅡ 고구려는 못함~ 아니 않함~~ 정치적 견해가 다름~~ ㅡ 예로 ㅡ...

만약고구려가 나당전쟁에서 이기고...

...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대조영은 아마 고구려의 무장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1-2. 일단 계루부출신의 고씨중 가장 종친인 인물이 왕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3. 일단...

고구려가 삼국통일 했다면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 했다면 중국과의 관계에서 나타날 외교상의 변화가 어떻게 될까요? 저도 그때가 너무 아쉽습니다.. 그 넓은 영토…

만약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 제 생각에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건 반쪽통일이고 불완전한 통일이었고 만약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는 백제...

만약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다면...

... 제 생각에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건 반쪽통일이고 불완전한 통일이었고 만약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는 백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