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에 대하여

정약용에 대하여

작성일 2005.07.01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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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에 대하여 알려 주세요.  그림도 넣어 주시고요. 글도 간추려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알려  주세요. 되도록이면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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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 애기하자면,,

간단히..

  • 본관 나주(羅州), 사람 조선 후기 대실학자
  • 이승훈의 처남,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
  • 정약용의 둘째 형 , 셋째 형
  • 유형원, 이익의 실학을 계승, 집대성함.
  • 벼슬은 정조 때 동부승지, 병조참의 역임
  • 신유박해와 황사영(조카 사위)의 백서(帛書) 사건에 관련,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갔다가 19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남. 이곳에서 500여 권의 저술 활동을 벌인 결과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라는 이름으로 전해짐
  • 저서 : [목민심서(牧民心書)], [마과회통(麻科會通)], [흠흠신서],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세밀히..

생몰년:1762-1836(영조38-헌종2)
본관:나주(羅州)
자:귀농(歸農), 미용(美庸)
호:사암(俟菴)/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시호:문도(文度)

1.득의의 시절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옥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李瀷)의 학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斗尾峽)뱃길에서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內降中庸講義》·《내강모시강의 內降毛詩講義》·《희정당대학강의 熙政堂大學講義》 등이 있으며, 기술적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舟橋〕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珍山)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시절에 《마과회통 麻科會通》·《사기찬주 史記纂註》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2.환난의 시절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지 채 1년도 못 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기(禍機)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체포, 투옥되니, 이로써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니 이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이아술 爾雅述》·《기해방례변 己亥邦禮辨》 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곳에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은 유배 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破門壞墻 不許安接)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萬德寺) 소풍길에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高聲寺)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주역사전 周易四箋》은 1808년에 탈고하였고 《상례사전 喪禮四箋》은 읍거시절에 기고하였으나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
《시경》(1810)·《춘추》(1812)·《논어》(1813)·《맹자》(1814)·《대학》(1814)·《중용》(1814)·《악경》(1816)·《경세유표》(1817)·《목민심서》(1818) 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서》와 《상서고훈》 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4서와 1표2서를 완결지었다.
 
 
3.유유자적의 시절
귀양에서 풀린 그의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는 대체로 6경4서·1표2서·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6경4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시에는 《모시강의》 12권 외에 《시경강의보 詩經講義補》 3권이 있다. 시는 간림(諫林)이라 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며,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 서(書)에는 《매씨상서평 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 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 尙書知遠錄》 7권이 있다. 《매씨상서》는 위서(僞書)로서 《사기》 양한서(兩漢書) 등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선기옥형 璿璣玉衡》은 상천(上天)의 의기(儀器)가 아니요 《홍범구주 洪範九疇》도 정전형(井田形)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셋째, 예(禮)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 12권, 《사례가식 四禮家式》 9권이 있다. 관혼상제 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천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태뢰(太牢)·소뢰(少牢)·특생(特牲)·특돈(特豚)의 예에서 그의 변두나 궤형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대부(大夫)·사(士)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악(樂)에는 《악서고존 樂書孤存》 3권이 있다.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제악(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분조(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추연(鄒衍)·여불위(呂不韋)·유안(劉安) 등의 취률정성(吹律定聲)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三分損益)·취처생자(娶妻生子)의 설이나 괘기월기(卦氣月氣)·정반변반(正半變半) 등의 설은 모두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섯째, 역(易)에는 《주역사전 周易四箋》 24권, 《역학서언 易學緖言》 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는데 추이(推移)·물상(物象)·효변(爻變)·호체(互體)로서 십이벽괘는 4시를 상징하고 중부(中孚)·소과(小過)두 괘는 오세재윤(五歲再閏)을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先天卦位)의 설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섯째, 《춘추》에는 《춘추고징 春秋考徵》 12권이 있다. 좌씨(左氏)의 책서(策書)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經義)의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는 오제(五帝)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지낸다고 한 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喪期)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곱째, 《논어》에는 《논어고금주 論語古今註》 40권이 있다.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異義)가 너무나도 많다. 총 520여장 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 原義總括》이라 하였다. 그 중의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분목(分目)으로서 주자의 심덕(心德)·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덟째, 《맹자》에는 《맹자요의 孟子要義》 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며 우리 유가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는 서로 빙탄(氷炭)과도 같아서 상호간에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아홉째, 《중용》에는 《중용자잠 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 中庸講義補》 6권이 있다.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째, 《대학》에는 《대학공의 大學公議》 3권, 《희정당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 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 心經密驗》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제·자(孝弟慈)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格物)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이요 치지(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다.

다음으로 1표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경세유표 經世遺表》 48권이 있으나 미완본이다. 관제·군현제도·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제·해세(海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 牧民心書》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봉공·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호·예·병·형·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 欽欽新書》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써 6경4서로써 수기하고 1표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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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업적

■ 규장각에서 학문적 자질을 쌓음

■ 배다리,거중기 축조 등 과학적 지식과 재능을 발휘
♣-백성들의 노고와 희생을 덜어주고,막대한 비용을 절감

■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영
♣-탐관오리의 부패와 타락을 폭로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18년간 유배지에서 보냄
♣-유학을 고증학고 학문을 완성하는 계기

■철학,윤리,종교,정치,경제,과학,문학,언어,의학,학문,역사,지리,음악,서화등 모든 분야의 탁월한 식견
♣-조선 후기 실학 사상 완성
♣-새로운 시대사상 요구와 부합

▲정약용의 사상

1. 문제와 구상

다산 정약용은 성리학의 사유체계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검토한 바탕 위에 자신의 철학을 세워나갔다. 따라서 정약용의 사상을 적절히 이해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그의 사유를 성리학의 적극적 맥락 혹은 배경 아래 짚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방대한 경학작업은 기본적으로는 송대의 철학적 성과인 성리학을 의식하여 쓰여졌다. 그러므로 성리학을 떠나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주희는 윤리와 자연, 유가와 도가를 아우르는 거대한 통합을 시도했고 과학의 자리에 선 니이담과 같은 사람은 그의 성공을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리의 자리에 선 조선 유학사는 이 둘의 결합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희가 제시한 통합적 사유는 조선 유학사의 갈등과 논란을 거치면서 마침내 인문적 영역의 독자적 위상에 주목한 정약용에 의해 근본적 회의와 비판의 시험대에 선다. 우리는 주희의 성찰과 정약용의 사상을 함께 살펴보면서 조선유학사에서 정약용의 위치와 역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주희 세계관의 구도

唐代의 儒家는 道家를 보완할 우주론과, 佛敎와 맞설 형이상학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유학은 본령인 윤리학을 지키면서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아우르는 새롭고 혁신적인 해답을 마련해야 했다. 옛 유교는 우주론과 철학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었기에 보다 성숙한 시대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新儒學의 길, 즉 경이적인 철학적 통찰력과 상상력을 구사하여,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인간 밖의 자연이라는 배경에 적절히 위치짓는 길밖에 없었다. 주희가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전체로서의 자연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 위치짓는 체계적 작업을 완성함으로써 유학은 도가의 우주론과 불교의 형이상학이 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희의 포괄적 체계 아래서의 인간의 문제를 정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오랜 고민을 거친 조선의 학자들의 고민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주희의 사유체계 내부를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주희는 세계를 태극(理)과 음양(氣)의 만남으로 본다. 理와 氣의 결합을 통한 세계관의 구상은 주희철학의 기본초석을 형성하고 있다.

1절 태극 - 우주의 중심에 대하여

과연 우주의 중심은 어디일까. 주희는 평생 동안 이 문제를 안고 고심하고 토론했다. 우주의 중심에 대한 주희의 생각은 다음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極이 없으면서 동시에 궁극의 極이다. 無極而太極

無極而太極이라는 선언은 신유학이 본질적으로 도가의 흐름과 유가적 사상을 통합하는 종합의 철학이라는 견해를 증거해주고 있다. 주희의 극은 궁극적(極至)중심을 가리킨다. 無極而太極이란 형태로 지각되지 않는(無極), 생성과 변화의 원리(太極)가 엄존한다는 뜻이다. 우주 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에는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받쳐주며 질서를 지우는 중심이 있다. 생성변화의 축이며 매듭이자 다양한 사물의 뿌리요 바탕이 다름 아닌 태극이다. 세계의 중심축은 공간상의 특정한 장소를 점하고 있지 않고 다른 감관에도 잡히지 않지만 그것은 보편적 중심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지각될 가능성이 없고, 氣와는 카테고리를 달리한다는 의미에서 이 중심은 초월적(形而上)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희가 생각한 무극은 태극이라는 중심의 이같은 초월적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주희는 태극이란 개념이 주돈이(周敦滯)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며 그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용어는 바로 理이다. 주희는 理가 太極의 다른 이름이라고 자주 말하고 있지만 완전히 동일한 의미와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희에게서 理는 유기체적 맥락을 뜻한다. 인체에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수많은 혈관과 신경(氣)의 통로와 그 네트웍을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2절 음양과 오행 - 우주의 창조력에 대하여

세계는 氣로 이루어져 있고 또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자체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정적 실체가 아니라 운동과 변화를 자신의 속성으로 하는 살아있는 계기이다. 氣는 특정한 시점과 장소에서 자체의 부정에 의해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인 요소를 산출하며, 그 이질적인 요소와의 상호영향에 의해 氣는 상대와 함께 자신을 변형시킨다. 이 두 계기를 음양(陰陽)이라 했고, 그들의 상호영향에 의한 일차적 변형물들을 오행(五行)이라 불렀다. 이 과정에는 초자연적 신의 의지나 법칙(logos)이 개입하지 않는다. 변화와 변이는 氣자체가 가진 생명력의 분화와 그 분화된 상호영향의 결과로 그렇게 존재한다. 氣만이 有爲하다. 이때 앞에서 살핀 理 혹은 太極은 바로 이 有爲의 氣의 자체분화, 그리고 그렇게 분화된 氣의 상호영향과 상호간첩의 <중심>을 가리키고 있다.

기의 변화라는 개념에는 일차적으로 생물학적인 변이(mutation)의 의미가 내포되어야 한다. 氣는 그 자체 거대한 생명의 창조력임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어야 물질, 에너지란 용어도 제한적으로 쓸 만하지만 궁극적으로 氣란 개념은 어떤 서구언어로도 번역이 볼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음양 >

주희의 理氣論은 대립적이면서 상호보완적인 두 힘을 축으로 우주론을 전개한 유가의 <易傳>의 틀을 확장시켰다. 음양은 기본적으로 태양의 출몰에서부터 寒暑의 사계절에까지 자연스레 연관되어 있다. 자연은 양극적 힘이 보편화된 場이라는 각성에서 陰陽의 사유는 출발한다. 음양의 양극화는 순환론적 시각의 반영이다. 자연계의 생성변화를 이 양극점 사이의 운동이라고 한다면 그 두 극점이 바로 음양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음양을 고정된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음양이란 어떤 힘의 순환적 패턴 내에서의 '상대적 위상'을 나타낼 뿐이다. 음양은 별개의 두 실질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패턴(理) 내에서의 힘, 즉 氣의 두 국면이라는 것이 옳다. 음양이라는 양극적 표현은 일차적으로 자연계의 생성과 변화를 밀고가는 힘의 주기성을 확보하기 위해 답변확정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양극성을 통한 균형의 동적 이동이 바로 음양이고, 그것은 자연계의 통시적 흐름과 공시적 場의 균형이라는 두 측면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자연은 대립, 보완되는 두 힘이 상호작용하면서 역동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움직이는 場의 인식이 음양이라는 사유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음양이란 氣의 <양극적 분화>이면서 동시에 그 두 힘이 <역동적 추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 오행 >

우주형성의 초기, 陰陽의 원초적 활동은 비교적 영구적인 구성물질을 생성시켰는데 그것이 이른바 다섯 가지 기본물질 즉 五行이다. 이들 제 요소들이 서로 결합하고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생명이 태어났다. 그리하여 오행은 개개의 物의 특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해 주게 된다. 순환론적 사유가 촉발시킨 오행론은 인간사의 제 측면을 해명하는 상징적 도구로 가능하게 되었다. 나아가 인간의 문명과 역사의 세계를 인간 밖의 자연의 현상과 상징적으로 연관시키는 정식화를 낳았다. 이렇게 발전해 간 오행론은 독립적으로 발전해 온 음양론과 합해 유가의 보편적인 인식 속으로 편입되었다.

陰陽家들에 의해 철학적 범주화를 거친 五行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고 또 널리 알려져 있다.

1) 상호생성의 순서(相生) :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

2) 상호정복의 순서(相勝) : 나무(木) 흙(土) 물(水) 불(火) 쇠(金)

오행 사이의 상생과 상극은 음양의 교호작용과 동시적이고 동연적이다. 우주가 동적 평형을 자기조직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순되는 힘들의 이같은 유기적 변증적 통일성 때문이다. 오행이 서로를 제어하고 동시에 촉진하는 방식은 다음 두 가지이다.


가)제어의 원리(相制) : 한 파괴의 과정은 그 파괴자를 파괴시키는 과정에 의해 제어된다. 가령 나무가 흙을 이기는 과정에서, 흙이 낳은 쇠가 나무를 제어한다. 요컨대 한 사물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형 파괴하는 과정에서 결국 자기자신도 변형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나)촉진의 원리(相化) : 상극에 의해 파괴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파괴되는 물질을 생산해냄으로써 변화의 과정을 상쇄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가령 나무가 흙을 이기는 과정에서 나무의 활동이 왕성해지면 거꾸로 나무가 낳은 불이 파괴의 대상인 흙의 생장을 동시에 촉진시킴으로써 균형을 유지한다.

3절 생성과 변화

태극의 신호에 의한 氣의 태초의 움직임이 陽이다. 陽의 활동적 운동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그 극점에서 회귀 혹은 반전이 일어나는데 이 반전의 회귀적 운동을 陰이라 부른다. 생장하고 확산하는 氣는 陽이고 쇠퇴하고 퇴조하는 氣는 陰이다. 주희에게 있어서 시작이란, 연속된 시간에 있어 처음인 존재론적 시초가 아니라, 계기적 순환과정에서 방법적으로 분리된 극성의 인식론적 시초를 뜻함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천지의 개벽에 관한 주희의 직관은 현대 천문학이 발견한 우주의 생성이론과 놀랍게도 닮아 있다. 주희에 의하면 우주는 확장과 수축, 즉 양과 음의 영원의 순환이므로 창조의 시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음양은 한시도 실체적 안정을 누리지 못한다. 정지된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주희는 아마도 현대적 의미의 파동의 간섭 같은 것을 연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음양과 오행 사이에는 절대적인 구분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운동의 상대적인 속도나, 인식 가능성의 정도와 수준에 의해 구분할 뿐이다.

주희는 생명의 탄생을 오랜 진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기보다 음양이라는 두 대극적 힘에서 직접 파생된 것으로 본다. 기의 변화의 처음 작품이 인간이라고까지 여기고 있기도 하다. 주희의 이기론은 무기물의 세계까지 생명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 애미니즘적 발상을 보여준다. 실제 이기론은 무기물과 유기물 사이에 그리고 가장 단순한 유기물에서 가장 복잡한 유기물 사이에 어떤 본질적 단정을 설정하지 않았다. 물질과 비물질은 기의 응축과 확산의 과정에 있어 상대적 순도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왜 서양에서처럼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 구체적으로 물질과 영혼, 정신과 육체,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 논의의 초점으로 등장하지 않았는가를 일러준다. 이기론은 물질이든 영혼이든, 정신이든 육체이든 모두 특정한 기의 생명력이 조직된 양태로 이해한다. 이기론은 영혼과 물질, 정신과 신체를 서로 다른 수준의 유기적 에너지로서 상황에 따라 서로 전환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4절 음양(氣)과 태극(理)의 관계

탄생은 유동적 에너지가 일정한 중심 아래서 통합되는 사태로 번역할 수 있다. 이때 유동적 에너지를 氣(혹은 陰陽), 그 氣를 특정한 양식으로 조직하는 중심을 理(혹은 太極)라고 불렀다. 이 때 두 계기 사이에 어느 것이 우선하고 우월한가? 이 대답이 일차적으로 이른바 主理論과 主氣論을 가르는 잣대가 된다.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만일 논의를 생명의 기원과 발생의 구조에 한정한다면 둘의 차이는 실상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에너지만 있고 중심이 없다면 그 에너지는 혼돈일 뿐이고, 중심은 있되 에너지가 없으면 그 중심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理와 氣의 두 계기는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가.

씨앗이 솟을 때 씨앗의 생명력은 氣이고, 그것의 동인은 어디까지나 자체 안에 있다. 理는 씨앗의 성장을 유도하고 형성하는 패턴으로 정의할 수 있다. 씨앗의 발생과 진화, 성장과 소멸의 과정에 있어 이 유도와 형성의 원리, 즉 理는 그 씨앗을 일정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변전시키는 인자라는 의미에서 씨앗 안에 있지만 동시에 씨앗을 넘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理는 氣안에 있지만 동시에 氣안에 있지 않다. 理는 물질적 세계의 한계성을 갖고 있지 않기에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생성과 변화의 우주는 理와 氣가 통합 혹은 협동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 두 인자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주희의 구상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적이다. 그러나 둘 다에 동일한 위상을 공평하게 허여하기는 쉽지 않고 주희 또한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기에 결정적으로 理의 우위에 기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주희의 인간관

주희가 理를 <조직과 맥락의 통일성>이면서 동시에 <선험적 규범의 통합성>으로 읽은 데에는 화해의 도가적 낙관주의에 머물 수 없었던 유학자로서의 고민이 여실이 드러나 있다. 유가의 본령은 자연보다 사회적 인간관계에 있고, 그 현실은 자연에서 보이는 화해와 통합과는 거리가 먼 투쟁과 음모, 혼란과 갈등이 더 두드러지는 마당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희가 자연주의를 사유의 기본틀로 함으로써 적지 않은 곤란에 빠지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과연 주희는 우주적 선을 말하는 유기체적 사유의 자연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유가윤리의 선험적 형이상학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일까.

1절 性은 理이다

주희가 태극을 강조한 것은 단순히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 속에서 역동적 통합의 중심을 강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 자연을 유가적 윤리의 관점에서 위계화시킨 것으로 그 중심에 인간적 가치를 정위시켜놓았다. 주희는 우리가 앞에서 살핀 자연의 통합적 질서에서 인간이 실현해야 할 보편적 규범(仁義禮智)이 숨쉬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 소식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표준구가 바로 性卽理이다. 仁義禮智信은 본래 인간이 사회관계 속에서 실현해야 할 규범이었는데 주희는 이제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 나아가서 전 우주가 실현해야 할 이념으로 읽은 것이다. 이 이념의 실현을 모든 생명이 선험적으로 부여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일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性卽理). 주희의 전 학문과 사유체계는 이 전제 위에 구축되어 있다. 주희는 동식물의 각각의 종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패턴. 즉 성장의 신호와 자극반응의 메카니즘에서 우주가 실현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이념을 읽었다.

주희는 그 이념을 한마디로 사랑(仁)이라 했다. 철학자로서 주희가 理를 보편적 사랑으로 형이상학화함으로써, 그리하여 사회성과 윤리성을 인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무기물을 포괄하는 전 우주의 보편적 특성이자 본질로 파악함으로써 명백히 그는 경험적 자연학으로부터 일탈해버린 셈이 되었다. 주희가 理를 자연의 규범적 이념(idea)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다시 말하면 윤리적 이념으로서 理와 과학적 조직이나 구성으로서의 理를 同舟시킴으로써 사상사의 분분한 갈등과 파탄의 고리가 예비되었다.

2절 규범적 이념으로 읽는 理와 氣

理를 규범적 이념으로 읽을 때는 理와 氣의 결합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조직이나 구성보다 규범이나 가치로서의 理가 부각될 때, 理氣의 결합인 생명은 육신을 통해 이념이 드러나는 場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理와 氣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명제는 생명력과 그 유도의 중심과의 통합이라는 행복한 유기적 연관의 관점에서와는 사뭇 다른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여 氣는 理를 위한 도구로 격하되고, 자연히 가치에 있어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이다. 주희는 우주적 생명력을 나누어 받은 육신(氣)이 이념적 가치(理)를 구현하는 불완전한 도구라고 인식했다. 육신은 생물학적 조직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도구>이면서 <제약>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몸(氣)은 동시에 육신(氣)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연론적 구도 안에서 행복했던 理氣사이에 불화의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규범적 측면에서 理와 氣는 서로 갈등하는 인자로 대립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희가 읽은 이념으로서의 理는 서양철학이나 종교의 대상인 절대적 존재의 속성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아 있다. 이 정결한 고요의 초월적 영역을 주희는 本然之性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본래 순수했던(本然) 이념의 세계로부터 이 땅으로 내려왔다. 육신(本質)을 얻어 형태를 갖춤으로써(形而下) 우리는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근원을 순수한 형태로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한정된 여러 생명의 현실, 이념의 불완전한 모방을 주희는 氣質之性이라 부른다. 理는 氣 속에 갇혀 있다. 다시 말하자면 理와 氣는 화해의 합일이나 화학적 혼융을 형성하고 있지 않다.

3절 주희가 읽은 인간의 모습

그렇다면 이 정식화를 통해 주희가 읽은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던가.

외계의 자극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인의예지의 끈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행동 이전의 인간의 일차적 반응은 四端의 범주 안에 있다. 이 때 외계의 자극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언제나 인의예지의 본래적 이상적 형태를 온전히 구현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인 인의예지를 온전히 그리고 전체적인 수준에서 발휘할 수 없다. 그것은 기질의 개성과 그 한계에서 온다. 기질의 일차적이고 대표적인 특성은 생래적 조직의 경향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후천적 노력은 자명해진다. 기질지성을 순화하여 본연지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것이다. 주희는 格物을 통해서 기질을 어떻게 올바르게 순화시켜야 할까를 알며, 그 이해의 바탕 위에서라야 우리는 올바른 정신과 신체의 표현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주희가 보기에 맹자는 본연지성의 이념적 차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현실적 차원을 무시했다. 그것이 이른바 性을 논하되 氣를 논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함의이다. 性은 理, 즉 본연지성을 가리키고 氣는 기질지성을 가리킨다. 주희는 이렇게 생각했다.


"맹자의 성선은 현실의 육신과 교섭을 갖기 이전의 초월의 이데아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거나, 아니면 현실 속의 가장 순수한 형태의 표출만을 짚어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념이 구체적 육신을 통해 발현되는 현실의 모습을 놓치고 있거나 그 발출 가운데 순수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요컨대 本然之性에 입각해 인간을 논했지 본연이 기질에 타재한 이후의 氣質之性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4. 주희철학의 쟁점과 분화 - 조선 유학의 전개

인간과 인간 밖의 세계를 연결시킨 주희의 사유체계는 조선 유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주희의 사유체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논쟁을 통해 조선 유학사가 전개되었다. 때문에 조선 유학사의 쟁점과 그 전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주희가 통합시킨 두 가지 시각을 분리시켜 보아야 한다.

1. 물질에너지인 氣와 그 조직인 理가 하나로 결합되어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보이지 않는 理가 보이는 기로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이 경우 인간은 동물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유기체 조직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 도가적 세계관과 연관된다.

2. 다른 하나의 견해는 氣와 理를 분리된 서로 다른 존재로 보는 경우이다. 그렇다고 둘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생명은 육신인 氣에 이념인 理가 올라탐으로써 나타난다.

이 때 이념은 육신에 대해 동시이면서 앞서 있다. 육신은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통로인 동시에 욕망을 통해 이념의 구현을 방해한다.

이와 기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를 축으로 조선 유학사는 전개된다.

서경덕은 자연론적 화해론(1)에 서서 윤리적 이념마저도 자연성 속에서 발견하려 했다. 서경덕은 세계를 氣의 자연스런 분화와 교섭의 과정으로 바라본다. '하나'인 氣가 분화와 교섭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결국 '하나'를 중심으로 그 모든 것이 통합되어 있다. 서경덕은 기의 유기적 조직에서 나타나는 질서를 理라고 했다.

따라서 서경덕에 있어 理는 독립적인 존재일 수 없다. 氣는 외부의 특정 존재(理)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속에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 주희가 理를 '氣를 통제하는 절대 원리'로 인식했던 데에 비해 서경덕은 理에 '氣의 조직'이라는 의존적인 속성만을 부여한 것이다. 理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자연스레 인간 윤리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이어진다.

서경덕은 육신의 이기적인 활동과 인간이 이루어야 할 이타적 사회성인 仁義를 동시에 자연성의 연장에서 읽었다. 인간이 인간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피곤하면 쉬고, 뜨거운 것을 쥐면 찬물에 손을 담그듯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보았다. 자연의 필연성을 충분히 이해하여 그에 따라 살아갈 때, 안심입명도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그에게는 인간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하는 것 자체가 악으로 보였다.

이황은 서경덕의 입장에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그는 서경덕의 입장을 고수할 경우 절제하고 없애야할 人慾을 바람직한 天理로 간주하게 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동시에 철저한 이념을 내세워 인욕을 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황에게 있어 理와 氣는 분명 서로 다른 존재이고, 이 둘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서경덕은 인간의 초월성을 기의 자연성의 연장의 끝에 위치하는 것이어서, 이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면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황은 초월성과 자연성의 경계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氣가 아무리 정련되어도 理가 될 수 없고, 理가 아무리 순도가 떨어져도 氣의 영역에 내려가지 않는다. 이황은 氣의 자연성을 믿지 않았다. 氣의 자연적 발현은 인간이 본래 부여받은 초월(理)을 방해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초월성을 방해하는 氣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理에도 현실화의 힘이 필요했다. 인간 속의 이기적 동물성을 구성하는 氣質之性과 맞서서 인간 본연의 초월성을 드러낼 本然之性이 그것이다. 이황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사단과 칠정이 서로 대립되는 구도로 존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맹자가 말한 인간의 선한 성품인 四端은 도저히 인간의 악한 기질에서 연장되었다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황은 자연성과 인간성을 화해시킨 주희의 구도를 완전히 뒤틀어 놓았다.

〈음양은 처음이 없다〉는 程子의 말을 근거로 이이는 이 두 사상가를 비판한다. 서경덕은 氣가 먼저 있었고, 그 움직임과 더불어 비로소 理가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이는 理와 氣를 공존하는 두 실체로 보았다. 때문에 이와 기에 있어 선후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생리적·심리적 구조는 자연계 일반의 자극 반응의 구조와 동일하다는 생각을 했다. 생명의 보편적 패턴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방식에 따라 구체적인 생명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이것이 氣質之性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인의예지를 향해있다. 이이에 있어 本然之性은 순화된 氣質之性일 뿐 결코 이 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이이는 분명히 주희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서경덕이 구체적 현실이 보여주는 질병과 악에 대해서는 적극적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생명의 본질은 인의예지이지만 그것을 구현할 신체가 불완전하다고 여겼다. 서경덕은 이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은 분명히 순수하지만 그것을 담고있는 신체가 더러워서 본연지성이 드러날 때에 일정한 일탈과 오염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리고 신경망의 조직이 유기적 복합성을 더해갈수록 본질의 구현 가능성이 더 커진다. 식물보다는 동물이 동물보다는 인간이 본연지성을 성취하는 데에 더 유리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5. 정약용의 朱熹 비판

주희를 비판하기까지의 도정

성리학은 조선의 문화적·철학적 담론의 보편양식이었다. 실학과 개화의 시대조차도 이 담론의 양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 태어난 학자, 정약용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성리학의 맥락을 떠나서는 쉽지 않다.

정약용은 성리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어떤 계기를 통해 성리학의 전면적 비판을 행했고 그리하여 나름의 철학을 전혀 다른 패러다임 위에 정립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다가서는 가장 유효한 디딤돌은 역시 조선 유학의 방향을 정한 두 거인, 이황과 이이의 철학적 갈등이다. 정약용은 당대의 누구나 그랬듯이 이 문제를 안고 심각한 고뇌와 모색의 방황을 거듭했다. 과연 누가 옳은가. 동일하게 주희의 사유에 기반을 두면서 어떻게 서로 다른 철학적 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조선 유학의 영원의 논쟁은 결국 해결할 수 없는 미궁인가.

『中庸講義』,『西巖講學記』,「理發氣發辨」의 서로 다른 세 시기에 쓰인 글을 통해 이황과 이이의 철학적 갈등에서 비롯된 그의 사유의 확장을 읽을 수 있다. 초기의 정약용은 이이의 사상에 동의하여, "氣는 독립적 실체인 데 비해 理는 의존적 이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두 설 모두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독립된 체계임을 인정하게 된다. 퇴계와 율곡이 비록 똑같이 四端과 七情을 논하고 있고, 함께 理氣를 담론하고 있으되 그 理氣 두 글자의 해석이 현격히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퇴계가 논하는 理氣는 인간의 性情에 한정하여 입설한 것이니, (거기서) 理는 道心으로서 天理의 영역에 있고 聖靈쪽에서 나오는 것이며, 氣는 人心으로서 人慾의 영역에 있고, 혈기 쪽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다. 한편 율곡이 논하는 理氣는 천지만물을 총괄하여 입설했으니, (거기서) 理는 形質이 없는 것으로서 物이 그로부터 말미암는 바이며, 氣는 形質이 있는 것으로서, 物의 몸(體質)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황은 인간 속에서 갈등하는 사회성과 이기성에 입각하여 理氣를 논했고, 이이는 體用이라는 포괄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理氣를 논했던 것이다. 둘은 동일한 개념을 쓰고 있는 서로 다른 체계임을 자각한 정약용은 논쟁을 통해 두 체계를 귀일할 해결책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이 두 설에 대한 객관적 공정의 이름 뒤에 자신의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정약용의 철학은 理氣論 위에 서 있지 않다. 그는 인간과 세계를 연속적으로 읽어서는 인간의 실상을 적절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성리학의 구상을 벗어 던졌다. 정약용은 주희의 사유, 그리고 주희의 사유를 충실히 정돈하고 있는 이이의 사유를 무기명으로 함께 비판했다. 그 과격한 비판과 해체의 디딤돌은 다름아닌 <본래의 유학>이었다. 그는 송대의 새로운 유학, 그 집대성인 주희의 이기론과 성리학이 공맹 본래의 유학의 참모습을 그대로 전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같은 <정통>의식이 당대의 패러다임인 性理學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용기와 무기를 제공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전에 주희 또한 자신의 철학이 도교와 불교의 위세에 맞서 전통 유학을 계승 확장하노라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이제 정약용이 바로 <진정한 전통의 계승>이라는 동일한 의식 위에서 주희의 구상에 대해 전면적 비판을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삶 속에서의 갈등에 대한 인식을 기본으로 한 이황은 자신의 독자적 발상을 밀고 나가기 위해 이기의 본래적 구도를 뒤트는 모험을 감행했었다. 이 모험으로 하여 이황의 체계는 이상한 <변형>이 되었고 이 변형이 이후의 논쟁의 발단을 마련했었다. 정약용은 이황이 택한 理氣論의 변형과 구구한 변명의 길을 따르지 않고 현명하게도 이기론 자체를 과감하게 해체하는 길을 택했다.

정약용의 주희에 대한 비판은 맹자의 저작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논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적극적인 언급을 피했고, 『중용』 첫머리의 선언 역시 짤막한 경구적 표현이라 주희가 자신의 체계 안으로 이 경전을 끌어들이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맹자』는 달랐다. 춘추전국시대에까지 굽이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난만한 주장을 분명하게 정돈하고 있는 저작이었기에 이 경전을 자신의 체계 안에 동화시키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다.

맹자는 인간성에 내재하는 공적·사회적 지향의 선험적 선함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세찬 조류에 맞서 인간성의 선함을 힘주어 변호한 사람이다. 맹자는 인간성의 이념적 차원(理)과 현실적 차원(氣)을 따진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의 두 경향성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주희에게 있어서 기질지성은 인간성 속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성의 현실적 차원 <전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원래 기질지성이란 용어는 張載의 것이었고 이 개념으로 장재가 의도한 것은 주희가 읽은 바와는 달리, 인간의 생물학적 제 조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재는 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을 현실적으로―존재론적으로가 아니라―맞세웠다. 그러나 주희는 수평적으로 놓였던 천지지성(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체용론적 구도하에 수직적으로 통합했다. 주희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형이상과 형이하, 또는 이념성과 현실성으로 설정했기에 사물의 겉과 안은 분리될 수 없고, 이념성도 현실성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니 어떻게 理와 氣가 현실적으로 <맞서는> 두 계기일 수 있겠는가. 요컨대 주희는 현실적 차원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질지성만 인정한 셈이 된다. 주희의 생각을 따르자면, 인간과 동물은 기질지성의 동일한 지평에서 연속적으로 읽히게 된다. 그 연속의 통합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 구도는 다름아닌 理氣論이라는 것을 자각한 정약용은 조선조의 유학자들처럼 주희철학의 마이너한 수정이나 보충, 정돈에 머무를 수 없었다.

정약용은 본연과 기질을 통한 체용론적 인간학이 현실적으로 갈등하는 실존적 인간을 적절히 해명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바로 그려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효한 틀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성리학의 대전제인 性卽理의 모토를 부정하고 理氣論의 구도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주희가 本然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 理는 선험적 이념, 형이상학적 원형과 더불어 현실이 지향해야 할 규범이라는 뜻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우리의 일상용법에서처럼 <본연>을 선험적 형이상학적 차원이 아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평 위에서 읽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신유학의 형이상학적 발상이 불교의 그것을 도입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약용은 주희의 <본연>이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영원의 영역이라고 읽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을 통해 주희철학의 발판을 이단인 불교에 돌림으로써 주희철학의 전면적 비판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주희는 영원의 이념적 실재가 현실화를 위해 <생리적 조직을 갖는> 과정에서 악이 잉태된다고 생각했다. 육신을 가짐으로써 이념은 자신을 표현할 통로를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온전히 순수한 모습으로 드러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가리워짐의 정도는 각양각색이다. 그리고 이때 선천적 장애의 무게는 주체가 개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숙명적인 것이다. 정약용은 만일 태극이 분화하고 유출하는 과정에서 악이 형성되는 것이라면 또, 그것이 탄생과 더불어 예비된 것이라면 性善은 공허한 외침에 그치고 만다고 우려했다. 이념적 형이상학적 <본연>의 善은 진정한 선이 아니다. 오직 현실적 선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이라 불릴 수 있다. 유가의 정통은 한결같이 인간 본성의 생래적 선, 그것도 조건이나 한정 없는 보편적 선을 역설해 왔다. 주희가 설정한 체용론의 구상은 맹자가 창도한 인간학과는 길을 달리하고 있다. 정약용은 그 점을 첨예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맹자는 성선과 함닉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선한 본성을 타고나지만 경험적 습관적 환경적 제 요인에 의해 후천적으로 변질된다고 말하는데 비해, 주희는 인성은(비록 이념적으로는 선하나) 악을 안고 태어나는바, 개인별로 달리 나타나는 선악의 지형은 다시 후천적·경험적 제 요인에 의해 정화될 수도 있고 더욱 혼탁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기본 인식이 서로 달라짐으로써 자기수련의 테제는 <타고난 善의 실현>과 <이념적 善의 회복>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두 테제가 답변확정하는 훈련양식이 상당부분 겹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제 두 인간학이 결과하는 방법론의 거리는 천양지차이다.

성리학의 체용론 하에서의 무게중심은 당연히 性에 있었고 이것이 성리학의 이념적 사고를 결정했다. 이때 心이란 性을 현재화하는 통로이면서 그 발현을 제어하는 이중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性의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心과 性의 무게중심이 뒤바뀌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체로서의 性을 부정한다. 실체의 위상은 오직 心에만 허여된다. 性이란 心이 가진 특정한 능력이나 경향성을 가리킬 뿐, 결코 실체의 지위를 부여할 수 없는 이차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주희는 타고난 현실(氣)의 인간성을 불신하고 순수함과 선함의 가능 근거를 선험적 이념(理)에서 찾는 바람에 인간이 자신의 초월적 가능성을 자기내적 힘으로 확인하지 못하게 했다. 정약용은 순수와 선을 경험적 현실, 즉 자기내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정신신체적 에너지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맹자의 정통적 생각이었다. 정약용이 보기에 신유학의 장대한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설계가 잘못된 것이었다. 주희의 인간학, 그 본연 기질의 틀로는 이황에게서 보았듯이 불필요한 오해와 혼란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주희 비판은 기질지성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주희의 기질지성은 같은 조직 내에서도 각 개체의 개성, 즉 성격적 기질적 특성에서 지적 도덕적 능력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너른 의미역을 갖는다. 어떤 기질을 받아 태어나느냐에 따라 그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윤리성은 후천적 환경과 개인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간행동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물을 수 있다. 정약용 또한 인간의 지적 능력과 정서적 제 성향은 그럴지 모르지만 기질은 그 안에 아무런 도덕적 인격적 의미를 띠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도덕적 책임은 오직 의지의 자유를 가질 때만이 정당하게 물을 수 있다. 정약용은 인간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지평에 있다고 믿었다. 즉 당대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던 것에 반하여 기질의 편차는 본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악이 선천적 결정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행위의 주체는 없는 셈이다. 실제로 주희는 중국문명의 변방에 있는 미개 민족들을 <동물과의 경계선에 있는 족속>으로 보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른바 사대주의라 비판하는 인습도 주자의 사상에 맥을 두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이같은 기질지성의 논리가 바람직하지 않은 숙명론을 유포하고 있다고 깊이 우려했다. 그는 氣가 자족적 독립적 실재임을 분명히 하면서 氣를 원래의 문맥, 즉 한의학에서 다루는 인체의 생명력에 한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질의 측면에서 인간은 동물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인간과 동물이 갈라지는 곳은 지적 도덕적 지각과 능력임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도덕감의 수준에서 거의 단절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주희가 서로 같다고 한 本然之性을 정약용은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희가 서로 다르다고 한 氣質之性을 정약용은 서로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理氣 보편 구도의 해체

이처럼 인간에 대한 실존적 관심이 정약용으로 하여금 理氣로 대변되는 성리학의 기본 구도를 해체하게 했다. 그는 理는 기실 능동적 주체가 아닌 피동적 객체에 불과하므로 인간존재의 현실을 해결하고 대처하는데 있어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理는 우주적 수준에서의 자연의 질서와 통합을 가능케 했는데, 정약용은 理를 해체하고 이론을 형이하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에 불과하다는 도가적 발상의 반문을 던질 수도 있겠으나, 정약용은 자연이 보이고 있는 규칙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자연의 규칙성과 통일성의 인간학적인 적용에 있다. 논의의 시작에서 짚었듯이 자연의 규칙성과 통일성은 인간이 처한 현실을 적절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인간은 자연의 결정력이 가장 약화된 자유와 선택의 실존적 가능성 위에 있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천지가 생성하는 理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하고 그는 외쳤다. 자연이 <스스로 그러한> 세계라면 인간은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주체인 것이다.

정약용은 氣를 본래의 의미, 즉 <생명>이란 뜻으로 한정적으로 구체화하였다. 주희에게서의 氣는 理의 지도와 정돈을 기다려서야 혼돈이 아닌 질서를 확보할 수 있는 반쪽의 실재였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성리학 체계에서의 氣는 실체일 수 없다. 정약용은 氣를 명실상부하게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자기조직을 통해 스스로 질서를 부여하는 실재로 끌어올렸다. 정약용이 생각한 <생명>으로서의 氣의 특성은 요컨대 신진대사와 신체활동과 지각, 그리고 자기보존의 충동(식욕과 성욕)을 포괄하고 있다. 이것이 생명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는 이 기질의 제 특성은 인간과 동물이 공유한 바인데도 어째서 구도는 기질지성이 인간과 동물이 서로 현격히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가,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개인적인 편차가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인간의 본질을 보편적 형이상학의 구도 아래 읽은 性卽理라는 성리학의 표준구 또한 비판의 표적이었다. 理는 나의 실존적 의식의 직접적 계기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性은 내가 가야 할 길, 즉 주체적 판단과 결단의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정약용의 인식이었다. 성리학이 인간의 마음을 이념이 자신을 표현하는 장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작 결단하고 판단하며 선택하는 <정신>의 능력에 적절한 위상을 정립시켜주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반성과 자기규율을 통한 자각과 실천, 그 초월을 향한 도정은 근본적으로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우주 안에서 인간을 전혀 다른 차원에 자리매김해야 하는 극명한 예가 아닌가. 인간의 일은 예비된 길에의 적응(이른바 天人合一)이 아니라 인위적 作爲에의 창조적 도정이다. 이 인식하에서 정약용은 주희의 철학적 지향을 원론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로운 발상 위에 선 포괄적 패러다임을 재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6. 정약용의 인간관

정약용에 있어 인간은 자연의 아들이 아니었다. 인간 밖의 모든 것이 정해진 결을 따르는 닫힌 메카니즘을 벗어날 수 없지만 인간은 자연의 과정에서는 도무지 불가해한 그 <마음(정신)>, 즉 자기의식을 통한 행동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하여 자연을 벗어난다. 주희는 이 초월적 성격에 적절한 위상을 부여해주지 못했다. 그는 인간 역시 자연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인간을 자연과 함께 일반적 理氣 體用의 거시적 구도 아래 포섭시켜버린 것이다. 정약용의 생각은 이와는 달리 인간에 고유한 자유로운 <자아>의 독립성과 초월성 위에 서 있다.

성리학은 인간의 정서와 의지 사유 등 모든 움직임은 性體가 피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性體, 즉 本然之性이 순수하다는 선언은 인간의 <마음>이 본래 때묻지 않았다는 불교적 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왜 때가 묻게 되었는가. 완전한 <본연지성>이 불순한 기질에 그저 머물러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악은 육신의 자기보존적 경향성에서 온다. 이 특성이 연못물처럼 투명하던 정신에 파문을 일으키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신에 대한 혐오, <人慾을 滅하라>는 극단적인 엄격주의가 선전되었다.

정약용 역시 인간의 악이 생물학적 자기보존의 충동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상식에는 일차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라는 體는 주희가 생각하듯이 순수한 것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나아가 정약용은 진정한 악은 육신, 즉 생물학적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즉 인간적 조건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자연의 여러 생명체와는 달리 육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가치와 욕구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기도 하는 존재이다. 오히려 육신의 필요가 부르는 충동보다 이것이 훨씬 큰 힘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이로 인한 악의 크기는 육신에 의한 악 정도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성리학은 인간의 중심에 性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약용은 이 性體를 부정했다. 앞에서 살폈듯이 性은 특정한 體가 아니라 어떤 體가 가진 <특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실체는 性이 아니라 당연히 心이어야 한다. 그가 이해한 이 <마음>, 즉 정신은 형태가 없다. 그렇더라도 서경덕이나 이이가 생각했듯이 가장 미세하고 정련된 형태의 氣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에 모종의 신적 속성을 부여한 정약용으로서는 이것을 물질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자아는 자연(氣)의 산물이 아니라 신(天)이 부여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신은 <형태가 없는 몸>으로 모종의 물질이 아닌 신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육신의 연장선에 있지 않다.

정약용은 정신적 자아가 氣에 속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지녔다. 육신은 부모로부터 받되 정신은 초월자(天)에게서 온다. 정신은 육신의 과정에서 파생된다는 당대의 자연진화론적 유물론적 사유를 그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인간성의 실현을 생물학적 조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인 공자의 克己復禮 또한 그 극복의 근거는 언제나 초월적 신성에 있었다. 공자와 맹자에서 중용으로 이어지는 天은 바로 인간의 도덕감과 그 실현의 초월적 근거였던 것이다. 유학의 윤리학은 본시 종교의 바탕 위에 서 있었던 바, 정약용은 이 문맥에 철두철미하려 한 사람이다. 그는 고전의 재발견을 통해 성리학이 묻어버린 종교적 측면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다.

인간은 보다 높은 가치에 헌신하는 동물이다. 육신에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는 초월의 지향성으로 하여 인간은 비로소 인간임을 획득한다. 인간을 떠나지 않는 이 숙명적 충동에야말로 진정한 인간성이 깃들여 있다고 정약용은 생각했다. 그는 맹자를 따라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자기중심적이거나 공격적이 아니라 이타적이며 화해를 향해 있음을 느끼고 인간 본성의 절대적 선함을 확신하고 그 교의를 유포하는 데 진력했다.

탄생과 함께 주어진 영원의 목소리에 시시각각 귀를 기울이며 그 희미하고 가냘픈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자기실현이다. 그것이 <길(道)>이다. 이것이 진정한 길임을 누가 보증하는가. 정약용은 이렇게 대답한다. "무릇 식물이나 동물이나 생기가 없고 시들시들하는 것은 성장을 방해당한 증좌이다. 다시 말하면 그 유기체에 고유한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화초가 물기를 빨아올리지 못하면 시든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생기, 얼굴과 등줄기를 타고 신체에 가득 퍼진 존엄과 윤기>는 본성의 참 욕구를 채우고 성취했다는 관찰 가능한 징표가 아니겠는가. 인간성의 완전한 성취는 내적 욕구의 만족스러운 충족에 다름아니며 그 성장의 극치는, 흐르고 넘쳐 천지에 가득 찬 주체의 이상적인 정서적 상태(浩然之氣)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같은 존엄의 정서는 오로지 도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일찍이 맹자도 악이란 인간성 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함닉에 의한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정약용은 삶의 본능은 죽음의 본능에 우선하는 일차적 힘이며, 파괴성이란 그것이 자연스럽게 발휘되고 성장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병적 징후로서 어디까지나 이차적 부수적 경향성이라고 믿었다.

정약용은 인간의 본질이자 본성을 초월의 자발적 경향성에서 찾았다. 도덕을 향한 정서이고 의지이자 의식인 이 본성의 활동은 아무런 권위에도 기대 있지 않은 전적으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이다. 또한 인간은 초월의 지향성뿐만 아니라 그를 실현할 수 있는 권능을 함께 허여받았다고 하였다. 동물은 자신의 생물학적 충동이 요구하는 바, 그리고 외부적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뿐, 사태를 판단하고 행위를 선택할 수 없다. 인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행위의 능동적 주체일 수 있다. 정약용은 인간의 보편적 본질을 <도덕감>으로 적극적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타인을 향한 배려와 그 축복으로 이해했다.

그렇지만 이타적 배려의 정감을 실현시키는 데는 심각한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다. 신체적 욕구와 인간 정신 안의 또 다른 불순한 충동이 그것이다. 정약용은 이 힘의 크기에 주목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기술에서 연상된, 지나치게 안이한 낙관론자라는 인상을 벗고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은 이 둘이 싸우는 <격전장>이라고 말하면서 갈등을 극복하여 인간됨을 성취하려는 이 내부의 전투는 처절하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인간이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다. 초월의 길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인간다움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깊어지고 또 그 이해와 확신은 성장의 실현에 더욱 힘쓰는 계기가 된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며 그 끝에서 인간됨(仁)을 완성할 수 있다고 정약용은 역설했던 것이다.

7. <孟子> 해석에서 드러난 두 시각

주희와 정약용, 이 두 거인의 차이는 『맹자』에 나오는 '고자와의 대화'에 대한 해석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고자가 인간의 본성을 버드나무로, 의로움은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에 각각 비유하자 맹자는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주희는 告子가〈人性 안에 仁義禮智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여겼고, 맹자의 비판의 초점도 여기에 맞추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는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四德, 즉 仁義禮智를 인간의 본성으로 여겼고, 四端은 그 증거라고 여겼다. 이런 그의 주장은 인간과 자연의 본질이 결국 하나임을 보이려했던 그의 주장을 설명하는 데에 핵심적인 사항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런 그의 해석이 결국 자신의 세계관으로 맹자를 읽으려해서 생긴 오독이라 비판했다.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 非人也)'라는 맹자의 발언은 사단이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단이 없으면 인간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희는 이런 맹자의 발언을 그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의 세계관 자체가 인간과 동물의 본질이 결국 같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四德이 아니라 四端이라 했다. 四德이란 四端이 인간의 외부상황 속에서 실천되면서 얻어지는 인격의 이상이다. 聖人이란 四德이 성취된 인간을 뜻하는 용어인 것이다.

주희의 해석과 정약용의 해석의 차이는 '端'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주희는 '端'을 〈실마리 혹은 증거〉로 해석했다. 주희에게서 四端이란 '四德이 인간의 본성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실마리 혹은 단서'인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端'을 〈처음 혹은 시작점〉이라는 의미로 읽었다. 정약용에게서 四端이란 '인간성의 이상(四德)을 실현해나가는 발판'이다.

8. 맺음말

이 글은 다음 3단계의 진행을 밟았다.

가)세계관의 포괄적 구도하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주희의 시각을 살펴본 다음,

나)그것이 제기한 인간론의 난점을 조선 유학사의 전개를 통해 살펴보고,

다)결국 주희의 구도를 해체하고 존재론적 단절 아래 인간을 읽는 정약용의 새로운 시각을 살펴보았다. 이 글은 조선 유학사의 철학적 고민에 일차적으로 주목했다. 갈등의 일차적 원인을 인간과 세계의 연속으로 파악한 주희의 구도 안에서 찾다보니 도교와 불교의 막강한 영향 아래서 유학의 중건을 꾀한 주희의 사상사적 업적을 소홀히 다룬 흠이 있다. 또한 한국 유교 전통이나 정약용의 세계관적 구상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못했지만 주희와 정약용의 사상을 이해하는데에는 작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한형조, 1996,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 조선유학의 철학적 패러다임 연구, 세계사

정윤경, 1993, 정약용의 天관과 物관에 관한 연구

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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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실학 사상


1> 시대적 배경
16세기 중엽, 성리학자들의 비현실적 논쟁

당쟁, 사화(士禍)로 사회 기강 문란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민 생활 궁핍

시대적 상황 극복 노력, 근대 지향적, 개혁적인 사상의 등장

이이 : 경제적 안정을 통한 사회 개혁(현실주의)에 영향 받은 실학 태동, 정약용·최한기에 집대성

2> 실학의 과제와 전개

과제 - 민생안정과 사회발전 등, 현실 사회 문제 해결

전개 -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 치용(經世致用)

농업의 혁신을 통한 현실 문제 해결 모색

균전제, 한전제(限田制), 정전제(丁田制) - 빈농층 대변, 토지개혁을 통한 농촌 경제 현실 개선

이용 후생(利用厚生)

이용(利用) - 경제 성장, 후생(厚生) - 사회 복지

청의 발달 문물을 배워 상공업의 진흥을 통한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를 추구

《서경》의 '정덕이용후생(正德利用厚生)' - 정덕(正德, 바른 도덕)을 기초로 이용(利用)에 의해 축적된 부를 후생(厚生)의 사회복지로 전환하여 안정된 사회 이룩

실사 구시(實事求是)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객관적 태도와 실증적 연구 자세

우리 자신의 역사와 지리 및 문헌 등의 연구를 통한 민족 정체성 형성에 기여

3>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성리학적 학문 풍토에서 탈피, 독자적인 학문의 탐구를 통한 실학의 집대성

심성론(心性論) - 성기호(性嗜好) 사상

성(性) -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 성향(嗜好)

내면적 도덕성보다는, 자신의 성향에 따른 자율적 실천 의지나 행위 과정 중시

심성 - 선, 악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행위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결단을 촉구하는 자유 의지

덕 -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 행위 속에서 실천하면서 행성되는 것.

성리학에서의 욕망 - 악의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부정하고 제어해야 할 대상

정약용 사상에서의 욕망 - 삶의 원동력으로 긍정

정약용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저는 정약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 자세하게 파헤쳐 드리겠습니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생애 출생과 가정 배경: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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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오떤 인물이며 무슨 일을 한 사람이에요 정약용에 대하여 정약용은 오떤 인물이며 무슨 일을 한 사람이에요 정약용의 업적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 행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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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에 대하여 3시 까지 답좀 부탁해염~정약용에 대하여 모든지 알려주세요!부탁드려요~ 다산 정약용(1762~1836) 매형인 이승훈의 영향으로 실학에 관한 책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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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A4용지 1쪽 부탁드립니다ㅠㅠ 오늘안에 부탁드려요..ㅠㅠ 내공냠냠 이딴거 신고 합니다. 참고 하세요..... 정약용의 생애 정약용은 1762년에 경기도...

정약용에 대하여..

정약용에 대하여 아는 사람 댓글좀...내일 까지 학교 학습..ㅠㅠ 내공 20추가 다산 정약용(1762~1836) 매형인 이승훈의 영향으로 실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으며, 천주교를...

정약용에 대하여

정약용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학교 숙제이거 든용.. 채택과 내공100드림니다. 호호 아참 그리고 내공냠냠과 이상한 글은 신고 바로 들어갑니다. 다산 정약용 출생과 가족관계...

정약용에 대하여(200자)

... 사회숙제로 정약용에 대하여 200자까지 써야되요. 도와주세요....... *욕설은 삼가해주세요~ ◆정약용 [丁若鏞, 1762.6.16 ~ 1836.2.22]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

정약용에 대하여 글좀^^ㅋㅋ

... 정약용에 대하여 좀 알고 발표를 하는데 ㅠㅠ, 정약용의 일대기와 업적 등 그리고 태어난 날짜와 사망한 날짜를 제가 자세히는 모르 걸랑요.ㅋㅋ 그래서 정약용에 대해 아주...

정약용에 대하여

정약용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꼭 채택해주세요 힘듬..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다산정약용에대하여

다산정약용에대하여알켜주세욤.. 제발여 정약용의 일생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이현길의 치료로 살았다. 성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