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1학기 사회

6학년1학기 사회

작성일 2009.03.10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1. 백제의 전성기 때의 왕인, 아직기 같은 학자들을 왜에 파견하여 전파하고자 했던 학문은 무엇입니까?

2. 삼국중 발달이 가장 늦었고, 전성기도 가장 늦게 맞이한 나라는 어디입니까?

3. 신라의 000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발전의 토대를 쌓았습니다.

4. 신라가 성장할 무렵, 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나라는 어디입니까?

5. 삼국중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는?
6. 삼국 통일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은 누구입니까?

7. 삼국 통일 후 불교 발전에 힘쓴 승려는 00입니다.

8. 통일 신라는 신라문화에 000와 00의 문화 전통을 합하여 민족 문화를 이룩하였습니다.

9. 장보고가 해상 기지를 세운 까닭은?

10. 통일 신라의 멸망과 가장 관계 깊은 사건은?

11.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 대조영이 00를 세웠습니다.

12. 발해는 중국,일본과 교류하였으나, 00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13. 발해에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00문화가 융성하였습니다.

14. 발해 문화의 특징을 알 수 있는 도읍지는 어디입니까?

15. 신라말기에 00이 후백제를 일으키고 00가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16. 궁예가 새 시대의 주인이 되고자 바꾼 나라 이름은 무엇입니까?

17. 왕건이 계승하고자 했던 나라는 어디입니까?

18. 고려 태조 왕건은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는 000를 실시하였습니다.

19. 고려 시대 때에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은 어디입니까?

20. 고려가 송나라에 수출한 품목을 두 가지만 쓰시오.

 

-내공냠냠 이런거 신고하구요..

모두 성의있게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3월10일~3월11일까지 보고 채택하겠습니다.

내공은 60밖에 못걸지만 감사드리겠습니다..

 

 

 


#6학년1학기 사회 #6학년1학기 사회 1단원 #6학년1학기 사회 단원평가 #6학년1학기 사회책 #6학년1학기 사회 2단원 #6학년1학기 사회 교과서 #6학년1학기 사회 149쪽 #6학년1학기 사회 시험지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현제 중 1 김포 중 인 학생 입니다.

6 - 2 학기는 대화와 타엽 / 등등 << 문제가 많이 나옵니다..  6 - 1 보다 2학기가 중요하지만

답변은 엉터리로 하지않고 제대로 써드리겠습니다.

 

 

고구려 건국신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와 주몽에 관한 신화이다.
금와왕이 하루는 태백산 남쪽에 있는 우발수라는 곳에 사냥을 하러 갔다.
강가를 천천히 거닐고 있는데 아름다운 한 여인이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소녀는 누구이길래 그토록 슬피 울고 있느냐 ? "
" 소녀는 본시 하백의 딸이온데 이름은 유화라 하옵니다. 하늘의 아들 해모수라는 남자를 만났는데, 저는 그만 첫눈에 그 남자가 좋아졌습니다.
그러다 해모수가 훌쩍 떠나 버리고 저는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몹시 화가 나신 아버지 하백께서 저를 이곳으로 내쫓으셨답니다."

금와왕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유화를 왕궁으로 데리고 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유화는 닷되들이 크기의 알을 낳았다. 처음에는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그 알을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를 않고 피하길래 유화는 밤낮으로 알을 품기 시작했다.
며칠 뒤 알이 저절로 깨지더니 그 속에서 총명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바로 주몽으로, 생김새가 비범하고 재주가 영특하여 나이 7세에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무엇이던지 백발백중으로 맞혔다.
주몽의 재주를 시샘하는 사람들이 많자 주몽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압록강의 한 가지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땅으로 피신을 했다. 
주몽은 졸본땅을 도읍으로 삼아 비류수 위에 살며 나라를 세우니 나라 이름은 고구려이며, 자신의 성을 고씨로 정했다.
이때가 주몽의 나이 22세, 기원전 37년의 일이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그 후 주몽은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썼다.
 
신라 건국신화
 
진한(辰韓)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첫 번째가 이씨의 조상인 알평이 다스리는 알천 양산촌인데, 알평은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왔다.두 번째는 정씨의 조상인 소벌도리가 다스리는 돌산 고허촌으로, 소벌도리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왔다.세 번째가 손씨의 조상인 구례마가 다스리는 무산 대수촌으로, 구례마는 하늘에서 이 산으로 내려왔다.네 번째가 최씨의 조상인 지백호가 다스리는 취산 전지촌인데 지백호는 하늘에서 화산으로 내려왔다.다섯 번째가 배씨의 조상인 지타가 다스리는 금산 가리촌으로, 지타는 하늘에서 명활산으로 내려왔다.여섯 번째는 설씨의 조상인 호진이 다스리는 명활산 고야촌인데 호진은 하늘에서 금강산(경주 북쪽에 있는 산)으로 내려왔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 여섯 마을의 족장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알천 언덕에 모여 회의를 하였다.

자신들이 따를 임금이 없어 하는회의 였다..그때엿다!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 기슭에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저것이 무엇이오?""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봅시다.""앗! 저기 양산촌 나정 우물가에 신비한 오색 광채가 뻗치고 있소.""흰 말 한 마리가 거기에 대고 절을 하고 있어요.""그렇군요!""무슨 징조일까?" 그들은 오색 광채가 뻗치고 있는 곳으로 몰려갔다.흰말이 절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 보니 흰 말 앞에는 자줏빛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말은 몰려온 사람들을 보더니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사람들이 그 알을 깨어 보니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모든 사람들은 놀랍고 신기해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선 목욕부터 시킵시다." 누군가 말하자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알에서 나온 아기를 데리고 가서 동천 냇물에 목욕을 시켰다.깨끗이 씻긴 아기의 몸에서는 광채가 났고 새와 짐승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햇빛과 달빛이 더욱 밝아지기까지 하였다.그러자 아기의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지었다.여섯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임금님을 내려 주었다고 생각을 했다.

"이제 임금님이 내려오셨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지어야 하오."

백성들의 바람대로 같은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 우물가에 한 마리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그 아기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겨서 사람들이 곧 아기를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로 데려가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부리가 빠진 시냇물이라 해서 시내의 이름을 발천이라고 했습니다.여섯 마을의 족장들은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기를 받들어 길렀다.사내아이가 태어난 알의 모양이 박과 같았기 때문에 성을 박씨라고 지었고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지었다.13세가 되던 해 여섯 마을 족장들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받들고 알영을 왕비로 삼아 나라를 세우니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었다.

처음에 나라 이름을 '서라벌', '서벌', '사라', '사로'라고 하다가 '계림국'이라고도 고쳤으나 후세에 와서 '신라'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백제의 건국신화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다. 주몽이 처음 북부여에서 졸본 부여로 왔을 때, 왕에게는 딸만 셋이 있었다. 졸본 부여 왕은 주몽을 보자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과 결혼시켰다.

주몽과 둘째 딸 사이에서 큰 아들 비류와 둘째 아들 온조가 태어났다. 그런데 주몽은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과 이미 결혼하였고, 주몽이 떠난 후 예씨 부인에게서 아들 유리가 태어났다. 유리가 북부여에서 찾아오자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젖혀 놓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그러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려 등 10여 명의 신하와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산(서울)에 다다른 그들은 부아악(북한산 만경대)에 올라가 땅을 굽어 살펴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하남 땅에 이르러, 북으로는 한수(한강)에 접해 있고, 동으로는 높은 산이 가로막혔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으니 이 곳이 도읍을 정하기에 가장 좋다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비류는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두 무리로 나누어서 한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인천)로 가서 도읍을 정하였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경기도 광주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 땅이 습기가 많고 물맛이 짜서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라는 국가가 번성하고 있는 모습을 본 비류는 자신의 선택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비류의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와 합치자, 백제는 더욱 강해졌다.

온조는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백제(百濟)란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라고 하였다. 온조왕은 나라를 세운 첫해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고, 46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영토를 넓혔으며, 마한의 목지국을 정복하려고 하였다.
 

 

 

제가 중요한 부분 말고 그냥 다 빠짐없이 다  써놓았어요 .. 제가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이야기 입니다^^

 

서라벌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 곳에는 여섯 마을이 촌장을 중심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여섯 마을을 '진한의 6부'라고 하였다.

어느 날 여섯 마을의 촌장을 뽑는 회의를 하던 중 양산 촌의 「나정」이라는 우물 가 숲 속에서 찬란한 빛이 내리 뻗더니 그 곳에서 흰 말 한 필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산 촌의 촌장 '소벌공'이 가까이 가보니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큰 알이 한 개 놓여져 있었다.

알에 손을 대자 껍질이 깨지며 아주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여섯 촌장들은 아기를 꺼내어 깨끗이 씻었는데 몸에서는 광채가 났다. 아기는 고허 촌의 촌장 '소벌도리'에 의해 길러졌고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박",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다. 그후 한참 뒤 빛난다의 뜻을 지닌 "혁"과 세상에 있다는 뜻의 "거세"로 바꾸어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바로 이 날 사량리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는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오른편 겨드랑이 갈비뼈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한 할머니가 월성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져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되었다. 아이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하였다.

혁거세는 후에 알영과 결혼하여 신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6부 촌장들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임금을 '거서간'(왕 또는 귀인이라는 뜻)이라 불렀다. 이때가 혁거세 나이 13세, 기원전 57년이었다.

 

 

<<신라의 발전>> → 신라의 발전 과정을 살펴 볼까요?

제2대 남해가 즉위하자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낙랑군들이 자주 쳐들어왔으나 소득없이 물러났다.

제3대 유리 이사금(왕의 명칭)은 나라 안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보기 위해 순행하다가 한 노인이 얼어죽게 된 것을 보고 왕으로서 백성을 잘 보살피지 못한 것이라 여기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늙고 병든 이들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평안하게 되었으므로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어 불렀는데 우리 나라 가악의 시초가 되었다. 왕 9년에는 신라 건국의 바탕이 되는 경주 일대의 6부를 정리하여 이름을 고치고 6부에 각각 성씨를 주었는데 이는 각 성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그는 나라의 관제를 정하여 17관등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제5대 파사 이사금은 검소하여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군비를 정비하였으며 군사를 훈련시켜 유사시에 대비토록 하였다. 또 서쪽으로는 백제를 경계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에 대비하여 마루성을 쌓고 서울에는 궁성을 쌓아 월성(지금의 경주 월성)이라고 칭하였다.

제6대 지마 이사금 때에는 왜국과 화친하여 나라가 안정되고 말갈족이 침범하였을 때는 백제의 구원병을 청하여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제7대 일성 이사금은 제방을 수리하고 논밭을 개척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에 힘쓰게 하였다. 제

13대 미추 이사금은 덕이 많은 임금으로 빈민 구제에 힘쓰고 백성들의 생활을 늘 염려하였으니 농사일에 방해되는 모든 일들을 없애도록 하여 백성들이 농사에만 힘쓸 수 있도록 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제16대 흘해 이사금은 농사를 장려하여 벽골지(김제에 있는 신라시대의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농사의 혁신을 가져오게 되었다.

4세기 후반 내물 마립간 때부터는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가 발전을 위하여 고구려 도움을 받았으나 5세기 눌지 마립간 이후로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견제하며 자주적인 힘을 길렀다. 그리고 6세기 지증 마립간, 법흥왕, 진흥왕에 이르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소지 마립간(479년)은 처음으로 우역(통신제도)을 설치하고 중앙과 지방의 교통과 연락을 편리하게 하여 중앙과 지방의 행정이 원활하게 유지되었다. 또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개설하여 사방의 물건을 유통하게 함으로써 경제를 발전 시켰다. 왕 16년에는 고구려가 침입해오자 백제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나라를 구하기도 하였다.

지증왕(500년)은 순장 제도를 폐지하여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산 사람을 함께 장사지내는 것을 금하였다. 또한 각 주의 군주들에게 농사를 장려하도록 명하고 소를 밭갈이에 쓰도록 하여 처음으로 우경이 시작되었다. 왕 4년에는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임금의 존호를 '왕'으로 정하였다.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며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왕 5년에는 상복법을 개정하였으며 전국에 12개의 성을 쌓아 유사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왕 6년에는 처음으로 석빙고를 만들어 얼을음 저장하여 쓰게 하였다.

법흥왕(514년)은 병부를 설치하여 국방을 담당하게 하고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처음으로 관리들의 옷에 주자(붉은 색과 자주색의 옷)의 차례를 정하였다. 왕 15년에는 불교를 공인하였는데(527년) 이는 고구려(372년), 백제(384년)보다 무려 150년이나 늦게 이루어진 일이다. 또 김해 지방의 금관가야를 정벌하여 복속 시킴으로써 낙동강 유역의 가야 지방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다음은 신라의 역대왕 계보입니다.

 

혁거세거서간    
  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금 4대 탈해이사금 5대 파사이사금    
    7대 일성이사금 6대 지마이사금    
  9대 별휴이사금 8대 아달라이사금      
  10대 내해이사금 11대 조분이사금 12대 첨해이사금 13대 미추이사금 14대 유례이사금
  19대 눌지마립간 18대 실성마립간 17대 내물마립간 16대 흘해이사금 15대 기림이사금
  20대 자비마립간        
  21대 소지마립간 22대 지증마립간      
    23대 법 흥 왕 24대 진 흥 왕    
      25대 진 지 왕 26대 진 평 왕  
    29대 태종무열왕 28대 진 덕 여 왕 27대 선 덕 여 왕  
    30대 문 무 왕      
    31대 신 문 왕      
    32대 효 소 왕 33대 성 덕 왕    
      34대 효 성 왕 35대 경 덕 왕  
        36대 혜 공 왕 37대 선 덕 왕
38대 원 성 왕
39대 소 성 왕
  44대 민 애 왕 43대 희 강 왕 42대 흥 덕 왕 41대 헌 덕 왕 40대 애 장 왕
  45대 신 무 왕        
  46대 문 성 왕 47대 헌 안 왕 48대 경 문 왕    
  51대 진 성 여 왕 50대 정 강 왕 49대 헌 강 왕    
  52대 효 공 왕 53대 신 덕 왕      
    54대 경 명 왕 55대 경 애 왕 56대 경 순 왕  

<<신라의 팽창>> → 삼국중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신라

진흥왕은 재위 5년에 흥륭사를 창건하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대가야을 복속 시킴으로써 낙동강 유역에 6가야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을 모두 합병시켰다.

진흥왕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새로 궁전을 지었는데 황룡이 그곳에 나타나자 궁전을 절로 고치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라고 하였다. 왕은 지원사, 실제사 등 사찰을 짓고 불교를 권장했다.

또한 진흥왕은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쳐서 북쪽으로 함경도 지방까지 이르고 다시 백제를 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는데 이로써 백제와 120년 간이나 유지해 오던 동맹 관계는 깨어지고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에 맞서게 되었다. 이 때 한강 유역 점령으로 신라는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있다는 이점과 한강 유역의 많은 자원을 얻는다는 이점을 얻었으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진평왕은 최초로 위화부(이부)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을두어 일을 하게 하였으며 왕 13년에는 남산성을 쌓았다. 또한 수양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선덕여왕은 백제가 변방을 자주 침범하여 전쟁 피해가 크자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김유신으로 하여금 백제를 치게하여 승전하였다. 선덕여왕은 또한 황룡사에 9층탑을 쌓아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하였고 화강암으로 첨성대를 만듬으로써 세계 최초의 천문관측대가 되게 하였다.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평정하였다.

문무왕은 재위 15년에 고구려의 남쪽을 쳐서 빼앗고 고구려를 정벌한 후 당나라를 몰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삼국 통일의 의의는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무력으로 물리치고 통일을 이루었다는 자주성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된 기반 위에서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국의 힘을 빌렸다는 점과 대동강이남 지역만의 통일이었다는 점에 한계성이 있다.

<<빛낸인물>>


김유신

원효

의상

장보고

혜초 <<문화유산>>


불국사000000기림사000000신라오릉

첨성대000000나정00000000신문왕릉

천마총000000다보탑000000포석정

분황사000000대릉원000000계림

황룡사터0000무열왕릉0000선덕여왕릉

석굴암000000문무대왕릉00석가탑

감은사지삼층석탑 

 

고구려

 

 

 

BC 37년에 주몽()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로 옮긴 뒤 낙랑군임둔군()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한사군(
)이 설치된 이후 현도군()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태조왕(: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였다. 태조왕은 현도군을 쳐서 푸순[]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과 낙랑군()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임둔군의 옛 땅에 자립한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다.

고국천왕(:재위 179∼197)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동천왕(:재위 227∼248) 때는 중국의 위 ·() ·() 3국의 대립시기였는데, 이때 동천왕은 요동군의 실권자 공손 연()과 통교하고 위나라를 견제하는 등 국제적 안목을 넓혔으나, 242년 서안평(西)을 공격하다가 관구 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까지 함락되었다.

봉상왕(
) 때는 선비족인 전연()모용외(
)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미천왕(: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백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오므로 비로소 백제()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한다.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시조로 등장한 것은 고이왕()이며, 근초고왕() 때 마한() 전역을 통합한 뒤 크게 발전하여 역대 31왕()으로 이어지면서 660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유리한 자연환경과, 지배층이 북방 유이민()을 모체로 한 단일체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등의 이점()으로 일찍부터 정치·문화적 선진성()을 과시하고, 4세기 중엽에는 일본, 중국 랴오시[西] 지방·산둥반도[] 등지와 연결되는 고대의 해외 상업세력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일본 고대문화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신라

시조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신로()·사라()·서나(:)·서야(:)·서라(:)·서벌() 등으로 불렀는데, 모두 마을[]을 뜻하는 사로()로 해석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상대(: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원시부족국가·씨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② 중대(: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③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해상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밖에 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

백과사전 자료 필수입니다. !!!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 이야기>>간단하게 썼습니다.도움이 되시길...

*고구려

북부여 '해모수'의 아들로 알려져있고,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이름은 '주몽, 추모, 주모'등으로 불려집니다만, 대체적으로 '주몽'이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부여에서태어났고 주몽의 능력을 두려워한 부여 대소왕자가 주몽을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동료들과 함께 부여를 탈출, 고구려를 세우게됩니다.

 


*백제

그 시조는 '온조왕' 온조는 고구려 주몽의 둘째 부인이었던 '소서노'의 둘째아들. 본래 소서노는 첫번째로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자, 소서노는 주몽과 재혼인을 하고 고구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부여에서 찾아왔고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로인해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 비류와 온조에게 나라를 세울 것을 명하였는데 비류는 지금의 '인천'지역으로 가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좀 더 남쪽에 나라를 세워 '십제'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뒤 비류가 죽자 비류의 백성이 모두 '십제'로 오게 되는데 이 후 '백제'라고 이름을 고치게 됩니다.

 

 

*신라

시조는 박혁거세로,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이 경상도 지역에 모여 살았는데 6마을로 흩어져 각기 촌장을 두고 살았습니다. 이 여섯마을의 촌장들이 나라를 세우고자 한대 모이고 그 왕을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로 삼아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합니다.후일, '신라'로 명칭을 바꾸게 되지요.

 

건국이야기만.......sorry

<고조선 건국이야기>

 

하느님(하늘왕) 환인은 아들 환웅이 지상세계(즉 인간세상) 다스리고싶어했습니다.

환인은 환웅을 지상세계에 바람의신,태양의신,비의신과 더불어 3000명의 사람들과

지상세계에 내려와서 환웅은 태백산 주변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정착했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을 지내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환웅은 또한 "100일동안 햇빛을 보아서는 안된다"라과 말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처음에는 잘 버티었으나, 호랑이는 얼마 후 동굴을 뛰쳐 나갔다.

하지만 곰은 100일을 버티어 웅녀(인간)이 되었다.

곰은 인간이 되었지만,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곰은 신단수아래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계속빌다가 환웅이 인간으로 변해서

곰과 결혼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

기원전2333년에 단군 왕검은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건국이야기>

 

동명성왕의 본명은 주몽이죠.
주몽은 부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강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 였습니다.
원래 유화의 남편은 하늘의 신 해모수 이었는데,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유화를

두고 혼자 하늘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이로인해 가정의 수치라 여겨진 유화는 집에서 쫓겨났고 유화는 떠돌다가 당시

부여의 왕인 금와왕의 눈에 띄여부여의 궁성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화가 얼마뒤 알을 낳았고, 이를 이상히 여긴 많은 이들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 건강히 자라니 이가 바로 주몽입니다.

주몽은 자라면서 부여의 정실왕자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았고, 그로 인해 그를 따르는 부하3명과 부여에서 도망쳤습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떠나기전,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일곱소나무 아래의 일곱모난 돌 아래서 내 아이란 증표를 찾아오라."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은 압록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송양이란 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입니다.

 

<백제 건국 이야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고구려 주몽입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왕자들이 그를 위험 인물로 생각하여 해치려 하므로 그것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습니다.
주몽은 이미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급하게 피하느라 부인을 부여에 두고 왔지요. 졸본 지방의 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주몽은 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으니 첫째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습니다.

두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였을 무렵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오자,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비류와 온조는 새로 나타난 태자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열 사람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

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드디어 한산(지금의 서울)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부아악은 삼각산 만경대로, 바위가 아이를 업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지금도 부아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지금의 한강)를

끼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였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지세의 험함과 이로움이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습니다.온조는 신하들의

 말에 따라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습니다.이때는 기원전 18년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발전할 때이지요.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 문학산 부근으로 생각됩니다.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았습니다.위례성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안락하였습니다. 미추가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스스로 죽으니

그 신하들과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습니다.그 후 올 때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습니다.
그 집안 내력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습니다.

 

 

<신라건국이야기>

 

서라벌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 곳에는 여섯 마을이 촌장을 중심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여섯 마을을 '진한의 6부'라고 하였다.

어느 날 여섯 마을의 촌장을 뽑는 회의를 하던 중 양산 촌의 「나정」이라는 우물 가 숲

 속에서 찬란한 빛이 내리 뻗더니 그 곳에서 흰 말 한 필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산 촌의 촌장 '소벌공'이 가까이 가보니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큰 알이 한 개 놓여져 있었다.

알에 손을 대자 껍질이 깨지며 아주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여섯 촌장들은 아기를

 꺼내어 깨끗이 씻었는데 몸에서는 광채가 났다. 아기는 고허 촌의 촌장 '소벌도리'에

의해 길러졌고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박",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다. 그후 한참 뒤 빛난다의 뜻을 지닌 "혁"과 세상에

있다는 뜻의 "거세"로 바꾸어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바로 이 날 사량리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는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오른편 겨드랑이

갈비뼈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한 할머니가 월성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져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되었다. 아이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

라고 하였다.

혁거세는 후에 알영과 결혼하여 신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6부 촌장들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임금을 '거서간'(왕 또는 귀인이라는 뜻)이라 불렀다. 이때가

혁거세 나이 13세, 기원전 57년이었다.

 

고구려의 시조이야기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여의 왕은 산책을 나왔습니다.

산책도중에 낮선 여자를 보게되죠....

부여의 왕이 여자에게 왼일이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하백의 딸 유화라고 합니다.

동생들과 놀고있을때 어떤 남자가 나타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며 저를 웅심산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가 혼인하고는 떠나버렸어요.

부모님은 허락없이 혼인했다며 이곳에 놓고 가셨습니다"

부여의 왕 금와왕은 유화부인에게 궁전에서 살자며  유화를 데리고 갔습니다.

며칠 뒤,

유화부인은 큰 알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금와왕은 해괴한 일이라며 알을 짐승의 먹이로 주라고 했습니다.

짐승들이 알을 먹지않자,금와왕은 알을 개뜨리라고 했습니다.

도끼로 내리쳐도 알이 깨지지 않자 금와왕은 알을 유화 부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유화부인은 알을 천에 싸서 품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알이 깨지며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사내아이는 7살이 되자 활을 제 힘으로 화살을 쏘는데 백밸백중이었습니다.

그러자 유화는 아이 이름을 주몽이라고 짓게 되죠....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엇습니다.

처음엔 주몽도 일곱 아들들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 태자가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몽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주몽은 부여를 빠져나가 졸본에 터를 잡고 고구려를 세우지요.....

 

 

      백제의 시조이야기

 

     주몽은 고구려에서 다시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때 결혼하였던 여자의 아들인 유리가 찾아오자,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허락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온조는 지금의 서울에, 비류는 인천에 자리잡아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인천 땅은 기름지지 않아서 비류의 백성은 온조에게로 왔습니다.

그러자 온조는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하였습니다.

 

 

 

     신라의 시조이야기

 

  지금의 경주일대에는 여섯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들은 각 각 촌장이 다스리고 있었으나, 힘센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견디려면 왕 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촌장이 길을 가고 있는데 말 한마리가 엎드려 절을 하고있었습니다.

촌장이 가까이 다가가보니 커다란 알이 한개 있었습니다. 무슨 알인지 궁금한 촌장은 집으로 가져와 정성스럽게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광채가 나는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이아이가 바로 신라의 1대왕인 혁거세  성은 박  박은 알이 박모양처럼 생겨서 朴이라 했답니다.

이름  혁거세의 뜻은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이였습니다.

드디어 혁거세 왕은 여섯마을을 한데 모아 신라를 세웟습니다

 

<고조선 건국이야기>

 

하느님(하늘왕) 환인은 아들 환웅이 지상세계(즉 인간세상) 다스리고싶어했습니다.

환인은 환웅을 지상세계에 바람의신,태양의신,비의신과 더불어 3000명의 사람들과

지상세계에 내려와서 환웅은 태백산 주변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정착했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을 지내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환웅은 또한 "100일동안 햇빛을 보아서는 안된다"라과 말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처음에는 잘 버티었으나, 호랑이는 얼마 후 동굴을 뛰쳐 나갔다.

하지만 곰은 100일을 버티어 웅녀(인간)이 되었다.

곰은 인간이 되었지만,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곰은 신단수아래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계속빌다가 환웅이 인간으로 변해서

곰과 결혼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

기원전2333년에 단군 왕검은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건국이야기>

 

동명성왕의 본명은 주몽이죠.
주몽은 부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강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 였습니다.
원래 유화의 남편은 하늘의 신 해모수 이었는데,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유화를

두고 혼자 하늘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이로인해 가정의 수치라 여겨진 유화는 집에서 쫓겨났고 유화는 떠돌다가 당시

부여의 왕인 금와왕의 눈에 띄여부여의 궁성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화가 얼마뒤 알을 낳았고, 이를 이상히 여긴 많은 이들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 건강히 자라니 이가 바로 주몽입니다.

주몽은 자라면서 부여의 정실왕자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았고, 그로 인해 그를 따르는 부하3명과 부여에서 도망쳤습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떠나기전,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일곱소나무 아래의 일곱모난 돌 아래서 내 아이란 증표를 찾아오라."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은 압록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송양이란 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입니다.

 

<백제 건국 이야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고구려 주몽입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왕자들이 그를 위험 인물로 생각하여 해치려 하므로 그것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습니다.
주몽은 이미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급하게 피하느라 부인을 부여에 두고 왔지요. 졸본 지방의 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주몽은 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으니 첫째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습니다.

두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였을 무렵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오자,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비류와 온조는 새로 나타난 태자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열 사람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

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드디어 한산(지금의 서울)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부아악은 삼각산 만경대로, 바위가 아이를 업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지금도 부아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지금의 한강)를

끼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였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지세의 험함과 이로움이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습니다.온조는 신하들의

 말에 따라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습니다.이때는 기원전 18년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발전할 때이지요.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 문학산 부근으로 생각됩니다.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았습니다.위례성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안락하였습니다. 미추가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스스로 죽으니

그 신하들과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습니다.그 후 올 때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습니다.
그 집안 내력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습니다.

 

 

<신라건국이야기>

 

서라벌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 곳에는 여섯 마을이 촌장을 중심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여섯 마을을 '진한의 6부'라고 하였다.

어느 날 여섯 마을의 촌장을 뽑는 회의를 하던 중 양산 촌의 「나정」이라는 우물 가 숲

 속에서 찬란한 빛이 내리 뻗더니 그 곳에서 흰 말 한 필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산 촌의 촌장 '소벌공'이 가까이 가보니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큰 알이 한 개 놓여져 있었다.

알에 손을 대자 껍질이 깨지며 아주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여섯 촌장들은 아기를

 꺼내어 깨끗이 씻었는데 몸에서는 광채가 났다. 아기는 고허 촌의 촌장 '소벌도리'에

의해 길러졌고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박",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다. 그후 한참 뒤 빛난다의 뜻을 지닌 "혁"과 세상에

있다는 뜻의 "거세"로 바꾸어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바로 이 날 사량리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는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오른편 겨드랑이

갈비뼈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한 할머니가 월성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져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되었다. 아이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

라고 하였다.

혁거세는 후에 알영과 결혼하여 신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6부 촌장들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임금을 '거서간'(왕 또는 귀인이라는 뜻)이라 불렀다. 이때가

혁거세 나이 13세, 기원전 57년이었다.

 

고구려 건국 신화

『고려본기』에 전해져오는 고구려 건국에 얽힌 이야기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제는 성은 고(高)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부여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금와왕이 즉위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
수를 지나다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미인을 만난 왕은 호기심이 일어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 여인의 몸으로 어찌 이런 곳에 있는가 ? " 왕의 물음에 그 묘령의 여인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 저는 본시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라고 합니다. 어느 날 동생들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한 남자
를 만났지요. 그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꾀었습니다. 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웅신산 밑 압록강
가의 외딴 집으로 따라가 정을 통하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로 떠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어요.
부모님은 낯선 사내를 따라가 함부로 몸을 맡겼으니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느냐며 노발대발하셨죠. 그래서
결국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오게 된 것이랍니다."
유화의 사연을 들은 금와왕은 보통 여인네가 아니다 싶어 그녀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빛이 들지 않는 으슥
한 방에 가두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빛도 들지 않던 그 방으로 햇빛이 들어오더니 유화의 몸을 비추는 것이었
다. 유화가 햇빛을 피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햇빛은 계속 따라다니며 비추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햇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면서 점점 배가 불러오더니 마침내 잉태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그것은
크기가 닷 되나 되는 커다란 알이었다. 금와왕은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이 못내 꺼림칙해서 그 알을 내다버리게 했다.
시종들이 유화에게서 알을 빼앗아 개와 돼지에게 던져 먹게 했지만 어느 놈도 먹으려들지 않았다. 다시 말과 소들이
다니는 길바닥에 버려 깨뜨리려 하였지만 말과 소들은 오히려 조심스럽게 알을 피해가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들판에 갖다 버렸더니 이번에는 새와 짐승들이 와서 알을 덮어 보호했다. 화가 난 왕이 알을 가져다 깨뜨려 보려
했지만 어찌나 단단한지 도저히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것을 알고 어미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알을 잘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드디어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성장하면
서 아이는 그 골격이나 외양부터가 남달리 장대하고 영특해서 비범하게 보였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그것이 백발백중이었다. 동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부르는 풍속이 있어
자연히 주몽이라 불리게 되었다.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언제나 주몽과 함께 활도 쏘고 말도 타며 놀
았다. 그러나 무엇을 해도 주몽을 따를 수가 없었다. 주몽의 재주를 시기한 맏아들 대소(帶素)는 왕에게,
"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니 빨리 처치하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하며 죽이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금와왕은 대소의 말을 물리치고 대신 주몽을 마굿간에서 일하게 했다. 주몽은 자신을 시기하는 대소의 무리가
있는 한 자신의 신상이 안전치 못함을 알고 차근차근 앞날을 대비해 갔다. 주몽은 말을 볼 줄 아는지라 일부러 품
종이 좋은 날쌘 말에게는 먹이를 조금 먹여 볼품없이 여위게 만들고 굼뜬 놈은 오히려 잘 먹여서 살찌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은 보기좋게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여윈 놈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말먹이꾼으로 있으면서도
오이, 마리, 협부 등 충실한 벗을 사귀고 기예를 연마하며 부지런히 앞날을 준비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왕
자들과 그 신하들은 주몽의 성장을 두려워하여 주몽을 해칠 모의를 하였다. 이를 눈치챈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몰래 주몽을 불러 일렀다.
"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니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좋겠구나. 너의 재주와 계략이라면 어디를 간들 못살
겠느냐. 어서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거라. "
어머니와 눈물로 작별한 주몽은 길들여 둔 준마를 타고 세 사람의 친구와 함께 서둘러 동부여 땅을 떠났다. 이들이
탈출한 것을 안 일곱 왕자는 정예병을 이끌고 곧바로 말을 달려 추격해 왔다. 숨가쁘게 말을 달리던 주몽 일행은
엄수(淹水)에 이르러 길이 막히고 말았다. 추적자들의 말발굽 소리는 가까워 오건만 앞을 가로막은 시퍼런 강물을
건널 길은 묘연했다. 주몽은 앞으로 나서며 강물을 향해 큰 소리로 호소했다.
"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화를 피해 도망하는 길에 뒤따르는 자가 쫓아 닥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 "
주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물 속에서 물고기와 자라들이 새까맣게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다리를 만들기 시작
했다. 주몽 일행이 그 다리를 달려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곧 물 속으로 흩어져 버렸고, 추적자들은 시퍼런 강물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추격을 따돌린 주몽 일행은 마침내 현도군이 자리했던
졸본주에 당도했다. 주몽은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미처 궁실을 지을 사이도 없이 비류수(沸流水) 근처에 초막을
지어 거처로 삼았다. 그리고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자신의 성을 고씨로 정했다. 이 때가 기원전 37
년으로 주몽의 나이 열 두 살이었다.

-백제-

1. 백제의성장과정

(1) 백제는고구려계통의위례부락이성장하여이루어진나라로한강유역과지금의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차지하였다. 백제는넓은평야를영토로가지고있었으며황해를 통해서중국과교류할수있었기때문에삼국중가장먼저발전할수

있었다.

(2) 고이왕 : 3세기경한강유역의대부분을통합하고국가제도를정비하며불교를받아들여고대국가모습을갖추었다.

(3) 근초고왕 : 북쪽으로는 한강이북지역, 남쪽으로는 탐라(지금의제주)까지영토를넓혔으며바다건너중국과일본에도그세력을뻗쳤다. 또한 아직 기와왕인 박사를 통해 발전된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기도하였다.

(4) 무령왕 : 양나라와통교하였으며서현성을쌓아외국의침략에대비하였고위천에서고구려군과싸우기도하였다.

2. 백제도읍지의변화

(1) 위례성(한강유역) : 백제의건국당시도읍지로서,한강의북쪽인지금의서울지방으로 추측되며 22대문주왕이웅진으로도읍지를옮길때까지백제의도읍지였다.

(2) 웅진(공주) : 고구려장수왕의남하정책으로한강유역의땅을고구려에넘겨주고 472년문주왕이북한산성의위례성에서금강유역의웅진(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3) 사비(부여) : 고구려의세력을막기위해신라와동맹을맺었으며 538년성왕 이사비(부여)로

도읍지를 옮기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1.성립 : 한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2.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이유 : 한강 유역 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하였고,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3.군초고왕 : 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1)북쪽으로 한강 이북, 남쪽으로 마한을 통합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하였다,

 (2)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세력을 뻗쳤다.

4.도읍지 변천 : 위례성-웅진-사비

 (1)5세기경에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의 땅을 고구려에게 넘겨주고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2)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한강 유역에서 일어난 백제는 넓은 형야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고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 있어기 때문에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북쪽으로 한강 이북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남쪽으로 마한을 모두 통합하여 그 영토를 남해안까지 넓혔으며,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에도 그 세력을 뻗쳤다.

그러나 백제는 5세기경에 고구려의 힘에 밀려 세력이 약해졌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는 한강 유역의 땅을 고구려에게 넘겨주고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야했다. 백제는 고구려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그 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이상 ~~~~~~~~~~~~~~~~~~~~~~~~~~~~~~~~~~

 

6학년1학기사회119쪽 안창호에대해

6학년1학기 사회 119쪽에 선택1번을 하려고. 하는데. 안창호로 하려고.하거든요? 좀 도와주세요^^. 생애 출생: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 사망: 1938년 3월 10일...

6학년 1학기 사회 정리부탁!!

내일 시험치는데 6학년 1학기 사회정리좀 부탁드립니다!!급해요!! 6학년 1학기 사회 정리부탁!! 내일 시험치는데 6학년 1학기 사회정리좀 부탁드립니다!!급해요!! 네 이 답변의...

6학년 1학기 사회 ( 내공100

6학년 1학기 사회 89~92쪽 사진좀 보내주세요,, 전자책이면 더 좋은데 책 사진 찍어주셔도 좋습니다 6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금성) 클릭하면 바로 보기 가능해요 ↓

6학년 1학기 사회 알려주세요

6학년 1학기 사회 처음부터 끝까지 알려주세요 ㅠ 내일 시험인데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ㅠㅠ 급해요 ㅠㅠ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정리하기><일제 국권 강탈(1910)과 일제의...

6학년 1학기 사회 총정리

6학년 1학기 사회 총정리 해주세욤 내공 70 6학년 1학기는 정치와 경제를 배우기에 재미가 없고 외워야 할게 많습니다. 그리고 6학년 2학기는 지리와 문화를 배우기에 6학년...

6학년 1학기 사회

6학년 1학기 사회에는 왜 이승만 독제정권 박정희 군사정변 왜 않좋은것만 골라서 교육을 하는 거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를 발전시키신 분이기도 하고 왜 이러죠?...

6학년 1학기 사회 내공100

6학년 1학기 사회 89~92쪽 사진좀 보내주세요,, 전자책이면 더 좋은데 책 사진 찍어주셔도 좋습니다 책 사진을 안 올려서 다시 씁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사진을 보낼 수 있는...

6학년1학기 사회

6학년1학기 사회 다른 나라와의 교류 라는 문제 칸이 있는데 거기에다가 조사한것을 써야하는데 다른 나라가 우리 나라와 교류한점을 찾아주세요ㅜㅜ 그리고 우리나라도 그...

6학년1학기 사회문제 알려주세요

6학년1학기 사회문제 알려주세요 잘 모르겠어요ㅜㅜ '지방자치제도' 아닐까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3358&cid=47333&categoryId=47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