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여 '해모수'의 아들로 알려져있고,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
이름은 '주몽, 추모, 주모'등으로 불려집니다만, 대체적으로 '주몽'이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부여에서태어났고 주몽의 능력을 두려워한 부여 대소왕자가 주몽을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동료들과 함께 부여를 탈출, 고구려를 세우게됩니다.
그 시조는 '온조왕' 온조는 고구려 주몽의 둘째 부인이었던 '소서노'의 둘째아들. 본래 소서노는 첫번째로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자, 소서노는 주몽과 재혼인을 하고 고구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부여에서 찾아왔고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로인해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 비류와 온조에게 나라를 세울 것을 명하였는데 비류는 지금의 '인천'지역으로 가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좀 더 남쪽에 나라를 세워 '십제'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뒤 비류가 죽자 비류의 백성이 모두 '십제'로 오게 되는데 이 후 '백제'라고 이름을 고치게 됩니다.
시조는 박혁거세로,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이 경상도 지역에 모여 살았는데 6마을로 흩어져 각기 촌장을 두고 살았습니다. 이 여섯마을의 촌장들이 나라를 세우고자 한대 모이고 그 왕을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로 삼아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합니다.후일, '신라'로 명칭을 바꾸게 되지요.
건국이야기만.......sorry
<고조선 건국이야기>
하느님(하늘왕) 환인은 아들 환웅이 지상세계(즉 인간세상) 다스리고싶어했습니다.
환인은 환웅을 지상세계에 바람의신,태양의신,비의신과 더불어 3000명의 사람들과
지상세계에 내려와서 환웅은 태백산 주변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정착했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을 지내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환웅은 또한 "100일동안 햇빛을 보아서는 안된다"라과 말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처음에는 잘 버티었으나, 호랑이는 얼마 후 동굴을 뛰쳐 나갔다.
하지만 곰은 100일을 버티어 웅녀(인간)이 되었다.
곰은 인간이 되었지만,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곰은 신단수아래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계속빌다가 환웅이 인간으로 변해서
곰과 결혼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
기원전2333년에 단군 왕검은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건국이야기>
동명성왕의 본명은 주몽이죠.
주몽은 부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강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 였습니다.
원래 유화의 남편은 하늘의 신 해모수 이었는데,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유화를
두고 혼자 하늘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이로인해 가정의 수치라 여겨진 유화는 집에서 쫓겨났고 유화는 떠돌다가 당시
부여의 왕인 금와왕의 눈에 띄여부여의 궁성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화가 얼마뒤 알을 낳았고, 이를 이상히 여긴 많은 이들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 건강히 자라니 이가 바로 주몽입니다.
주몽은 자라면서 부여의 정실왕자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았고, 그로 인해 그를 따르는 부하3명과 부여에서 도망쳤습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떠나기전,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일곱소나무 아래의 일곱모난 돌 아래서 내 아이란 증표를 찾아오라."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은 압록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송양이란 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입니다.
<백제 건국 이야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고구려 주몽입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왕자들이 그를 위험 인물로 생각하여 해치려 하므로 그것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습니다.
주몽은 이미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급하게 피하느라 부인을 부여에 두고 왔지요. 졸본 지방의 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주몽은 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으니 첫째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습니다.
두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였을 무렵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오자,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비류와 온조는 새로 나타난 태자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열 사람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
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드디어 한산(지금의 서울)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부아악은 삼각산 만경대로, 바위가 아이를 업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지금도 부아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지금의 한강)를
끼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였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지세의 험함과 이로움이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습니다.온조는 신하들의
말에 따라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습니다.이때는 기원전 18년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발전할 때이지요.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 문학산 부근으로 생각됩니다.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았습니다.위례성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안락하였습니다. 미추가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스스로 죽으니
그 신하들과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습니다.그 후 올 때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습니다.
그 집안 내력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습니다.
<신라건국이야기>
서라벌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 곳에는 여섯 마을이 촌장을 중심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여섯 마을을 '진한의 6부'라고 하였다.
어느 날 여섯 마을의 촌장을 뽑는 회의를 하던 중 양산 촌의 「나정」이라는 우물 가 숲
속에서 찬란한 빛이 내리 뻗더니 그 곳에서 흰 말 한 필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산 촌의 촌장 '소벌공'이 가까이 가보니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큰 알이 한 개 놓여져 있었다.
알에 손을 대자 껍질이 깨지며 아주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여섯 촌장들은 아기를
꺼내어 깨끗이 씻었는데 몸에서는 광채가 났다. 아기는 고허 촌의 촌장 '소벌도리'에
의해 길러졌고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박",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다. 그후 한참 뒤 빛난다의 뜻을 지닌 "혁"과 세상에
있다는 뜻의 "거세"로 바꾸어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바로 이 날 사량리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는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오른편 겨드랑이
갈비뼈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한 할머니가 월성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져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되었다. 아이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
라고 하였다.
혁거세는 후에 알영과 결혼하여 신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6부 촌장들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임금을 '거서간'(왕 또는 귀인이라는 뜻)이라 불렀다. 이때가
혁거세 나이 13세, 기원전 57년이었다.
고구려의 시조이야기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여의 왕은 산책을 나왔습니다.
산책도중에 낮선 여자를 보게되죠....
부여의 왕이 여자에게 왼일이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하백의 딸 유화라고 합니다.
동생들과 놀고있을때 어떤 남자가 나타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며 저를 웅심산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가 혼인하고는 떠나버렸어요.
부모님은 허락없이 혼인했다며 이곳에 놓고 가셨습니다"
부여의 왕 금와왕은 유화부인에게 궁전에서 살자며 유화를 데리고 갔습니다.
며칠 뒤,
유화부인은 큰 알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금와왕은 해괴한 일이라며 알을 짐승의 먹이로 주라고 했습니다.
짐승들이 알을 먹지않자,금와왕은 알을 개뜨리라고 했습니다.
도끼로 내리쳐도 알이 깨지지 않자 금와왕은 알을 유화 부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유화부인은 알을 천에 싸서 품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알이 깨지며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사내아이는 7살이 되자 활을 제 힘으로 화살을 쏘는데 백밸백중이었습니다.
그러자 유화는 아이 이름을 주몽이라고 짓게 되죠....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엇습니다.
처음엔 주몽도 일곱 아들들과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 태자가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몽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주몽은 부여를 빠져나가 졸본에 터를 잡고 고구려를 세우지요.....
백제의 시조이야기
주몽은 고구려에서 다시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때 결혼하였던 여자의 아들인 유리가 찾아오자,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허락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온조는 지금의 서울에, 비류는 인천에 자리잡아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인천 땅은 기름지지 않아서 비류의 백성은 온조에게로 왔습니다.
그러자 온조는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하였습니다.
신라의 시조이야기
지금의 경주일대에는 여섯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들은 각 각 촌장이 다스리고 있었으나, 힘센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견디려면 왕 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촌장이 길을 가고 있는데 말 한마리가 엎드려 절을 하고있었습니다.
촌장이 가까이 다가가보니 커다란 알이 한개 있었습니다. 무슨 알인지 궁금한 촌장은 집으로 가져와 정성스럽게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광채가 나는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이아이가 바로 신라의 1대왕인 혁거세 성은 박 박은 알이 박모양처럼 생겨서 朴이라 했답니다.
이름 혁거세의 뜻은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이였습니다.
드디어 혁거세 왕은 여섯마을을 한데 모아 신라를 세웟습니다
<고조선 건국이야기>
하느님(하늘왕) 환인은 아들 환웅이 지상세계(즉 인간세상) 다스리고싶어했습니다.
환인은 환웅을 지상세계에 바람의신,태양의신,비의신과 더불어 3000명의 사람들과
지상세계에 내려와서 환웅은 태백산 주변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정착했다.
이 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을 지내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환웅은 또한 "100일동안 햇빛을 보아서는 안된다"라과 말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처음에는 잘 버티었으나, 호랑이는 얼마 후 동굴을 뛰쳐 나갔다.
하지만 곰은 100일을 버티어 웅녀(인간)이 되었다.
곰은 인간이 되었지만,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곰은 신단수아래서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계속빌다가 환웅이 인간으로 변해서
곰과 결혼하여 단군 왕검을 낳았다.
기원전2333년에 단군 왕검은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건국이야기>
동명성왕의 본명은 주몽이죠.
주몽은 부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강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 였습니다.
원래 유화의 남편은 하늘의 신 해모수 이었는데,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유화를
두고 혼자 하늘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이로인해 가정의 수치라 여겨진 유화는 집에서 쫓겨났고 유화는 떠돌다가 당시
부여의 왕인 금와왕의 눈에 띄여부여의 궁성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화가 얼마뒤 알을 낳았고, 이를 이상히 여긴 많은 이들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 건강히 자라니 이가 바로 주몽입니다.
주몽은 자라면서 부여의 정실왕자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았고, 그로 인해 그를 따르는 부하3명과 부여에서 도망쳤습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떠나기전,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일곱소나무 아래의 일곱모난 돌 아래서 내 아이란 증표를 찾아오라."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은 압록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송양이란 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입니다.
<백제 건국 이야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고구려 주몽입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왕자들이 그를 위험 인물로 생각하여 해치려 하므로 그것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습니다.
주몽은 이미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급하게 피하느라 부인을 부여에 두고 왔지요. 졸본 지방의 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주몽은 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으니 첫째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습니다.
두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였을 무렵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오자,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비류와 온조는 새로 나타난 태자에게 받아
들여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열 사람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
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드디어 한산(지금의 서울)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부아악은 삼각산 만경대로, 바위가 아이를 업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지금도 부아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지금의 한강)를
끼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였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지세의 험함과 이로움이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습니다.온조는 신하들의
말에 따라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습니다.이때는 기원전 18년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발전할 때이지요.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 문학산 부근으로 생각됩니다.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았습니다.위례성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안락하였습니다. 미추가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스스로 죽으니
그 신하들과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습니다.그 후 올 때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습니다.
그 집안 내력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습니다.
<신라건국이야기>
서라벌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 곳에는 여섯 마을이 촌장을 중심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여섯 마을을 '진한의 6부'라고 하였다.
어느 날 여섯 마을의 촌장을 뽑는 회의를 하던 중 양산 촌의 「나정」이라는 우물 가 숲
속에서 찬란한 빛이 내리 뻗더니 그 곳에서 흰 말 한 필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산 촌의 촌장 '소벌공'이 가까이 가보니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큰 알이 한 개 놓여져 있었다.
알에 손을 대자 껍질이 깨지며 아주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여섯 촌장들은 아기를
꺼내어 깨끗이 씻었는데 몸에서는 광채가 났다. 아기는 고허 촌의 촌장 '소벌도리'에
의해 길러졌고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박",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다. 그후 한참 뒤 빛난다의 뜻을 지닌 "혁"과 세상에
있다는 뜻의 "거세"로 바꾸어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바로 이 날 사량리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는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오른편 겨드랑이
갈비뼈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한 할머니가 월성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져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되었다. 아이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
라고 하였다.
혁거세는 후에 알영과 결혼하여 신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6부 촌장들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임금을 '거서간'(왕 또는 귀인이라는 뜻)이라 불렀다. 이때가
혁거세 나이 13세, 기원전 57년이었다.
고구려 건국 신화
『고려본기』에 전해져오는 고구려 건국에 얽힌 이야기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제는 성은 고(高)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부여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금와왕이 즉위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
수를 지나다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미인을 만난 왕은 호기심이 일어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 여인의 몸으로 어찌 이런 곳에 있는가 ? " 왕의 물음에 그 묘령의 여인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 저는 본시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라고 합니다. 어느 날 동생들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한 남자
를 만났지요. 그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꾀었습니다. 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웅신산 밑 압록강
가의 외딴 집으로 따라가 정을 통하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로 떠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어요.
부모님은 낯선 사내를 따라가 함부로 몸을 맡겼으니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느냐며 노발대발하셨죠. 그래서
결국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오게 된 것이랍니다."
유화의 사연을 들은 금와왕은 보통 여인네가 아니다 싶어 그녀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빛이 들지 않는 으슥
한 방에 가두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빛도 들지 않던 그 방으로 햇빛이 들어오더니 유화의 몸을 비추는 것이었
다. 유화가 햇빛을 피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햇빛은 계속 따라다니며 비추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햇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면서 점점 배가 불러오더니 마침내 잉태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그것은
크기가 닷 되나 되는 커다란 알이었다. 금와왕은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이 못내 꺼림칙해서 그 알을 내다버리게 했다.
시종들이 유화에게서 알을 빼앗아 개와 돼지에게 던져 먹게 했지만 어느 놈도 먹으려들지 않았다. 다시 말과 소들이
다니는 길바닥에 버려 깨뜨리려 하였지만 말과 소들은 오히려 조심스럽게 알을 피해가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들판에 갖다 버렸더니 이번에는 새와 짐승들이 와서 알을 덮어 보호했다. 화가 난 왕이 알을 가져다 깨뜨려 보려
했지만 어찌나 단단한지 도저히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것을 알고 어미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알을 잘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드디어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성장하면
서 아이는 그 골격이나 외양부터가 남달리 장대하고 영특해서 비범하게 보였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그것이 백발백중이었다. 동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부르는 풍속이 있어
자연히 주몽이라 불리게 되었다.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언제나 주몽과 함께 활도 쏘고 말도 타며 놀
았다. 그러나 무엇을 해도 주몽을 따를 수가 없었다. 주몽의 재주를 시기한 맏아들 대소(帶素)는 왕에게,
"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니 빨리 처치하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하며 죽이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금와왕은 대소의 말을 물리치고 대신 주몽을 마굿간에서 일하게 했다. 주몽은 자신을 시기하는 대소의 무리가
있는 한 자신의 신상이 안전치 못함을 알고 차근차근 앞날을 대비해 갔다. 주몽은 말을 볼 줄 아는지라 일부러 품
종이 좋은 날쌘 말에게는 먹이를 조금 먹여 볼품없이 여위게 만들고 굼뜬 놈은 오히려 잘 먹여서 살찌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은 보기좋게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여윈 놈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말먹이꾼으로 있으면서도
오이, 마리, 협부 등 충실한 벗을 사귀고 기예를 연마하며 부지런히 앞날을 준비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왕
자들과 그 신하들은 주몽의 성장을 두려워하여 주몽을 해칠 모의를 하였다. 이를 눈치챈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몰래 주몽을 불러 일렀다.
"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하니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좋겠구나. 너의 재주와 계략이라면 어디를 간들 못살
겠느냐. 어서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거라. "
어머니와 눈물로 작별한 주몽은 길들여 둔 준마를 타고 세 사람의 친구와 함께 서둘러 동부여 땅을 떠났다. 이들이
탈출한 것을 안 일곱 왕자는 정예병을 이끌고 곧바로 말을 달려 추격해 왔다. 숨가쁘게 말을 달리던 주몽 일행은
엄수(淹水)에 이르러 길이 막히고 말았다. 추적자들의 말발굽 소리는 가까워 오건만 앞을 가로막은 시퍼런 강물을
건널 길은 묘연했다. 주몽은 앞으로 나서며 강물을 향해 큰 소리로 호소했다.
"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화를 피해 도망하는 길에 뒤따르는 자가 쫓아 닥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 "
주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물 속에서 물고기와 자라들이 새까맣게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다리를 만들기 시작
했다. 주몽 일행이 그 다리를 달려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은 곧 물 속으로 흩어져 버렸고, 추적자들은 시퍼런 강물을 보며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추격을 따돌린 주몽 일행은 마침내 현도군이 자리했던
졸본주에 당도했다. 주몽은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미처 궁실을 지을 사이도 없이 비류수(沸流水) 근처에 초막을
지어 거처로 삼았다. 그리고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자신의 성을 고씨로 정했다. 이 때가 기원전 37
년으로 주몽의 나이 열 두 살이었다.
-백제-
1. 백제의성장과정
(1) 백제는고구려계통의위례부락이성장하여이루어진나라로한강유역과지금의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차지하였다. 백제는넓은평야를영토로가지고있었으며황해를 통해서중국과교류할수있었기때문에삼국중가장먼저발전할수
있었다.
(2) 고이왕 : 3세기경한강유역의대부분을통합하고국가제도를정비하며불교를받아들여고대국가모습을갖추었다.
(3) 근초고왕 : 북쪽으로는 한강이북지역, 남쪽으로는 탐라(지금의제주)까지영토를넓혔으며바다건너중국과일본에도그세력을뻗쳤다. 또한 아직 기와왕인 박사를 통해 발전된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기도하였다.
(4) 무령왕 : 양나라와통교하였으며서현성을쌓아외국의침략에대비하였고위천에서고구려군과싸우기도하였다.
2. 백제도읍지의변화
(1) 위례성(한강유역) : 백제의건국당시도읍지로서,한강의북쪽인지금의서울지방으로 추측되며 22대문주왕이웅진으로도읍지를옮길때까지백제의도읍지였다.
(2) 웅진(공주) : 고구려장수왕의남하정책으로한강유역의땅을고구려에넘겨주고 472년문주왕이북한산성의위례성에서금강유역의웅진(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3) 사비(부여) : 고구려의세력을막기위해신라와동맹을맺었으며 538년성왕 이사비(부여)로
도읍지를 옮기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1.성립 : 한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2.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이유 : 한강 유역 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하였고,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3.군초고왕 : 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1)북쪽으로 한강 이북, 남쪽으로 마한을 통합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하였다,
(2)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세력을 뻗쳤다.
4.도읍지 변천 : 위례성-웅진-사비
(1)5세기경에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의 땅을 고구려에게 넘겨주고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2)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한강 유역에서 일어난 백제는 넓은 형야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고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 수 있어기 때문에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북쪽으로 한강 이북 지역까지 진출하였고, 남쪽으로 마한을 모두 통합하여 그 영토를 남해안까지 넓혔으며,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에도 그 세력을 뻗쳤다.
그러나 백제는 5세기경에 고구려의 힘에 밀려 세력이 약해졌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는 한강 유역의 땅을 고구려에게 넘겨주고 금강 유역의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야했다. 백제는 고구려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그 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력을 회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