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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문화제와 다른나라문화제를좀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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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 문화유산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쓰게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되어있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석굴암 불국사
2.외국 문화재 |
피사의 대성당
1063년 부스케투스의 설계로 착공, 1118년에 헌당식(獻堂式)을 올렸고, 1272년 이후에 라이날두스에 의해 회당부(會堂部)가 서쪽으로 연장(延長)되었다. 전체는 어느 것이나 바실리카풍의 단면(斷面)을 가진 5회랑식(五廻廊式) 회당부와, 좌우의 익랑(翼廊)으로 된 라틴 십자(十字) 플랜을 나타내며, 교차부(交叉部)에는 드물게 보이는 타원형의 원개(圓蓋)를 올려놓았다. 대리석의 가로무늬 모양의 석조물 배합이 선명한 외부는 전면에 장식적인 둥근지붕이 있는 복도와 측주(側柱)를 둘러쳤으며, 서쪽 정면(正面)의 상부 4층은 개방된 열주(列柱)로 장식되었다. 대성당의 앞에 독립해서 세워진 세례당(洗禮堂)은 디오티살비의 설계에 의해 1153년에 착공되었으며, 2층의 회랑을 가진 내부는 원추상(圓錐狀)의 궁륭(穹窿)의 천장으로 덮이고, 이것을 외부의 원개가 싸안은 특수한 이중구조로 되었다. 고딕풍의 외관은 N.피사노도 협력했다고 전하는 13세기의 개장(改裝)에 의한 것이다. 대성당의 배후에는 ‘피사의 사탑’으로서 이름높은 종탑(鐘塔:캄파닐레)이 있다. |
<!-- //참고 자료 VIEW --> |
콜로세움
정식으로는 ‘플라비우스 원형극장(圓形劇場)’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중세에는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였다. 제정기(帝政期) 로마의 복받은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여기에서는 글라디아토르(劍鬪士)의 시합, 맹수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外壁)은 높이 48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식(式)·이오니아식·코린트식의 원주(圓柱)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되어 있다. 콜로세움의 명칭은 근처에 네로의 거상(巨像:colossus)이 있었던 데에 유래한다.
<!-- //참고 자료 VIEW --> |
우리나라에는 유형문화제와 무형문화제로 나뉩니다,,,
말그대로,,, 무형 문화제는 형태가 없는 문화제 이죠,,,
예를들어 흠,,
봉산탈춤이나 종묘제례약 남사당놀이등 사람이 움직이는 형태죠...
유형 문화제는 말그대로 무형문화제의 반대로 형태가 있는 문화제죠...
예를들어 석가탑 불국사 석굴암 남대문 동대문 등이있죠....
그다음....
다른나라의 문화제로는
일단 일본의 문화제...
1. 히메지죠 ( Himeji-jo 姬路城 , 1993)
...- 현존하는 16세기 일본성곽 건축의 가장 뛰어난 모범
...- 고도로 발달된 방어시스템과 교묘한 보호장치를 갖춘 83개의 전각이 있음
...- 일본 쇼군시대 초기의 봉건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됨
2. 호류사의 불교기념물군 (Buddhist Monuments in Horyu-ji Area, 法隆寺,1993)
일본 나라현 호류사에 있는 48개의 불교기념물은 목조건축물의 대표작임,
이 목조기념물은 동일 양식으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이며
그중 11개는 8세기 또는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일본 불교문화의
윤곽과 중국 불교건축의 답변확정을 알려주는 예술사적 중요연대를 나타내줌
3. 시라카미 산치 ( Shirakami-Sanchi , 1993)
일본 혼슈북단 산맥에 위치해 있는 냉대삼림 지대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마지막 처녀지, 가파른 산과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너도밤나무,
흑곰 등과 88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음
4. 야쿠시마 ( Yakushima , 1993)
야쿠시마는 'sugi'라 불리는 일본 삼나무 고대 표본을 비롯한 1,900여종의 풍부한 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온난성 고대 삼림지대임
5. 고대 교토의 역사기념물
(Historic Monuments of Ancient (Kyoto-Kyoto, Uji and Otsu Cities) , 1994)
교토는 고대 중국의 수도를 모델로 하여 A.D 794년에 건설된 일본 왕조 시대의 수도로서 19세기까지 1천년에 걸쳐 일본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였음, 특히 일본의 목조건축의 발달이 두드러진 곳이며, 일본식 정원예술은 전세계 정원조경에 영향을 끼쳤음
까지가 있고요,,,
중국의 문화제로는....
1. 만리장성
이름: 만리장성
위치: 중국 본토의 북변, 몽골 지역 사이
제작연도: 기원전 214년
크기:성벽은 높이 6∼9m, 폭은 상부 4.5m, 기부(基部) 9m
2.자금성
이름: 자금성
위치: 중국 베이징
제작연도: 1420년
크기: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
등이 있습니다,,,
유럽으로 가보죠,,,
영국의 문화제를 찾아 봅시당,,,
문화재로는 영국 수도의 런던에 있는
- 버킹엄 궁전, 런던 탑, 빅벤, 런던 브릿지, 국회의사당 등이 있습니다
사진을 찾지 못하여 ㅈㅅ 합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문화제,,,
1.옐로우스톤 국립공원 ( Yellowstone , 1978 )
2. 메사 베르데 ( Mesa Verde , 1978 )
3. 그랜드 캐년 ( Grand Canyon National Park , 1979 )
4. 독립기념관 ( Independence Hall , 1979 )
5. 에버글래드 국립공원 ( Everglades National Park . 1979 )
끝입니다^^
체택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 문화재는 현재 다른나라에 대부분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 문화재는 현재 중국이 거이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 중국들은 우리 고구려의 문화재를 중국 자기들 껄로 만들려고 지금 현재
뭘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까먹었군요.. 할튼 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일본에도 우리문화재가 있다고 하던데요.
거이 대부분 가야문화재나 백재문화재나 신라문화재밖에 없어요..
왜 일본에는 우리문화재가 많을까?
우리나라가 일제감정기때 일본들이 우리나라 문화재를 박탈해 갔습니다.
꽤 비싼줄 알고 자기나라에 팔아 먹을려고 하니까 박탈해 간거죠.
이상 끝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1.불국사 및 석굴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석굴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종묘 : 사적 제 125호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다. 원래는 정전(正殿)을 가리키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3.해인사 장경판고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인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이다.
장경판고는 장경판전(藏經板殿)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 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록에 따르면 1481년(성종 12)에 고쳐짓기 시작하여 1488년(성종 19)에 완성했다고 한다.
4.창덕궁 :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서울 종로구 와룡동. 국보 제225호. 임금이 높이 앉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어좌는 중앙에 두고 양쪽에는 대신들의 관직 순서대로 품비석을 세워 정사를 보던 정전.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5.수원화성 : 사적 제 3호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벽.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6.경주역사 유적지구
①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②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③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④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⑤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7.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언즈에서 개최한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총회에서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로 의결했습니다.
고창고인돌유적은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일대에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화순고인돌유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양호합니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강화고인돌유적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외국문화재>
. 중국 ( 뤄양의 룽먼석굴 )
중국 룽먼석굴은 허난성에 있는 원강석굴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석굴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룽먼석굴은 뤄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석굴은 북위 때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송나라 시대에 완성하였습니다 . 룽먼석굴에는 우수한 북위 불상이 많습니다.
특히 서산의 중앙에 있는 봉선사동의 대로사나불은 높이 13m의 거대한 석불로, 협시인 보살상ㆍ나한상ㆍ신왕상ㆍ인왕상 등과 함께 당나라 조각기술의 최고봉을 이룬 걸작으로써,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
룽먼의 북위불은 원강석굴의 불상에 비해 조각기법이 매우 섬세하고, 작품에도 날카로움을 안에 숨긴 멋을 풍깁니다.
룽먼석굴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2.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 궁전 )
표트르 궁전은 러시아어로 '페트로 드보레츠'라고 불리며, 표트르 대제가 주로 여름을 보내기 위해 이 궁전이 만들어졌기에 '여름 궁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표트르 궁전은 1714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궁전은 핀란드만에서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는 지형을 이용하며 건설된 것이 특징이고, 러시아 황제의 여름 별장 중에서는 가장 호화로운 궁전입니다.
표트르 궁전에는 44개의 분수, 7개의 소공원, 가로수길, 대궁전을 포함하여 20개의 궁전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표트르 궁전은 표트르 대제가 베르사유 궁전을 염두에 두고 건설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의 베르사유'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대궁전은 길이 300미터의 2층 건물로 1714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후에도 증개축을 계속했습니다. 현재의 대궁전은 라스토렐리가 설계한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58년 완전 복구되었습니다.
3. 캐나다 ( 퀘벡의 노트르담 대성당 )
퀘벡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성당은 1647년에 지어진 것으로 북미 대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당입니다. 현재의 건물은 1922년 화재로 인해 다시 지어진 것이며, 종탑과 벽면 등은 지어질 당시의 것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성당의 외관은 왠지 수수하고 소박한 느낌이 들지만, 내부에는 화려한 제단과 스테인글라스 등 매우 화려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4. 뉴질랜드 ( 웰링턴의 국립박물관과 미술관 )
이 건물은 1층은 박물관이고, 2층은 미술관입니다. 건물 정면에 서있는 커다란 종루에는 전몰용사들에 바치는 49개의 종이 들어있습니다. 박물관에는 쿡 선장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동행했던 G.뱅크스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초기 식민지시대의 유물, 마오리족의 예술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층 미술관에는 뉴질랜드 외에도 영국ㆍ미국ㆍ호주 등지에서 온 미술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5. 독일 (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
냉전시대에 분단된 동서 베를린의 유일한 관문이었던 브란덴부르크문은 오랜 역사를 베를린과 함께해 온 베를린의 상징입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폴리아를 본떠 만든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서 18세기 말에 세워졌습니다. 문 위에는 조각가 샤토가 제작한 2륜마차 동상 ‘승리의 콰드리가’가 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안타깝게도 제2차 세계대전 때 화재를 입었습니다. 다행히도 브란덴부르크 문은 1958년 복원되었으며, 동상도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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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쓰게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되어있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ㄴ 이글은 다른 좋은 simhd9409 님의 글을 복사하여 올린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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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등록
화성(1997년 등록)
-선시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을 수원남쪽의 산으로 옮기면서 화산 부근에 있던 수원의 관아 건물과 마을을 오늘알의 위치로 옮기고 쌓은 성이다. -이 성을 쌓을 때 실학자 정약용이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데 도르래의 원리로 만든 거중기를 이용하였다. -6.25전쟁 때 크게 부서졌으나 성의 구조를 자세히 밝혀 놓은 책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다시 세워 옛모습을 되찾았다. 종묘와 종묘 제례악(1995년 등록) -종묘는 조선 시대에 왕과 왕비, 공을 세운 신하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해에 지어진 것이다. -종묘와 더불어 제사를 지내는 과정(종묘제례), 제사를 지낼 때 연주하던 음악(종묘제례악)도 문화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창덕궁(1997년 등록) -조선시대의 태종 임금이 세운 것으로 주변의 경치와 아름답게 어우러진 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이루어졌던 인정전을 중심으로 한 궁전 건물과 정원으로 나뉜다. -궁전에는 왕이 나라의 일을 보던 곳과 왕과 왕후 및 왕족이 살던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후원으로 불리는 정원은 왕실 도서관 및 정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원은 아름다운 자연과 건물이 잘 어울릴 뿐 아니라 꽃과 나무를 잘 조화시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해인사의 장경판전(1995년 등록) -경상 남도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 완성되었다.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 이외의 특별한 장식은 하지 않았다. -통풍, 습도 조절, 실내 적정 온도 유지, 판가의 진열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어서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변형되지 않고 보전될 수 있었다. 석굴암과 불국사 ◎석굴암(1995년 등록) -신라 경덕왕10년, 김대성에 의해 짓기 시작하여 해공왕 10년에 완성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잘 보존되지 못하였으며 일제 시대에 크게 수리를 하였고 1960년대에 다시 수리를 하면서 바깥쪽에 석굴암을 보소하는 건물을 지었다. -석굴암의 바깥쪽 방은 땅을 나타내는 네모 모양이다. 하늘을 나타내는 안쪽 방은 둥글게 만든 석굴이다. -천장을 둥글게 쌓아 올린 안쪽방이나 부처님의 크기를 방의 크기와 잘 맞춘 것은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석굴암 안에는 한가운데에 부처님과 여러 보살상이 있고 바깥쪽에는 절을 지키는 무사의 상이 있다. ◎불국사(1995년 등록) -신라 경덕왕10년, 김대성에 의해 석굴암과 함께 짓기 시작하여 해공왕 10년에 완성된 것이다. -불국이란 부처님이 계신 나라를 뜻하며 부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푸른 구름과 흰 구름을 상징하는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야 하는데 이 돌계단들이 매우 아름답다. -불국사 안에 있는 3층석탑은 남성미를 지녔으며 다보탑은 보다 정교하고 세련된 여성미를 간직하고 있다... 1)창 덕 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 문화유산적 가치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Ⅳ)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2)수 원 화 성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 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게 문화유산적 가치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3)석 굴 암 , 불 국 사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금강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 석굴암의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신장을 두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석주를 세웠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원형의 주실로 본존은 중심에서 약간 뒤로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로 주벽을 채우고 본존 정후면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내의 보살들의 유연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도 본존불을 중심으로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다.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륭(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梵天像)과 제석천상(帝釋天像), 보현(普賢)·문수(文殊)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十代弟子像)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돼 있다. 일찍이 당나라의 현장(A.D602~664)이 17년간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한후 지은 풍물지리지 성격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바로 그 자리에 대각사(大覺寺)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정각을 이룬 모습의 불상이 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고, 왼손은 샅 위에 뉘었으며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대좌의 높이는 당척 4척2촌이고 넓이는 1장2척5촌이며 상의 높이는 1장1척5촌, 양 무릎폭이 8척8촌, 어깨폭이 6척2촌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 크기와 이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데, 현장이 보았던 대각사의 그 불상은 현존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에 역사적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으로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成道像)이라고 한다. 감실은 주실에서의 위치로 보아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을 뜻한다. 이는 교리적인 면에서 보면 보살이 각자(覺者)인 여래와 무명(無明)중생의 중자적인 존재라는 점과 잘 어울린다. 미륵보살상의 오른쪽 어깨, 손목, 오른쪽 무릎으로 이어지는 직삼각형이 안정감을 주는 반면 세운 무릎, 비스듬히 얹은 팔, 숙인 얼굴이 그리는 곡선은 변화와 운동감을 주고 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가지 모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는 곳인 둥근 주실 뒷벽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십일면관음보살상 (十一面觀音菩薩像)의 아름다운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머리둘레에 열구의 얼굴이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끄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 화려하게 전면을 장식한 영락(瓔珞:구슬이나 귀금속을 꿰어 만든 장신구) 장식,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天衣), 손가락 발가락의 미묘한 움직임, 왼손은 한송이 연꽃이 꽂혀있는 병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서 영락을 잡고 정면관의 자세로 서 있는 모습에서 화려함과 원숙함을 느끼게 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에 건립된 석굴암은 불교사상과 매우 발달한 수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건축 기술,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완성되었다. 우리가 석굴암에서 느끼는 장엄미와 숭고미는 이러한 바탕과 그 속에 내재하는 조화율에 있다 하겠다. 석굴암은 석가모니가 정각 즉,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가시적인 건축과 조각으로 재현한 것이며, 조각에 있어서도 인위적인 기교나 부자연스러움없이 생명력이 넘치며 원숙한 조법과 탁월한 예술성이 돋보인다. 절대적인 경지인 정각을 통해 인간 석가모니는 형이상학적 존재인 석가여래가 되고, 속세는 법계라는 이상향이 된다. *세계 문화유산적 가치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Ⅰ), (Ⅳ) (Ⅰ) 독특한 예술적 혹은 미적인 업적, 즉 창조적인 재능의 걸작품을 대표하는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4)팔 만 대 장 경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 문화유산적 가치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Ⅵ)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Ⅵ)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산 5)종 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와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제를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2003년부터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넷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제사드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목적용 건축물이다. 종묘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개별적으로 비대칭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모습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전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때 처음 짓고 세조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 문화유산적 가치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Ⅲ)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6)경 주 역 사 유 적 지 구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古都)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鮑石亭)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鷄林),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시설인 첨성대(瞻星臺)등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세계 문화유산적 가치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7)고 인 돌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Pyramid), 오벨리스크(Obelisk)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은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유럽, 중국,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1)고 창 고 인 돌 유 적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일대에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고창지석묘군(사적 제391호) (2)화 순 고 인 돌 유 적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화순 효산리 및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제410호) (3)강화 고인돌 유적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 내가지석묘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6호) 강화 대산리고인돌(인천광역시기념물 제31호) 강화 부근리점골지석묘(인천광역시기념물 제32호) *세계 문화유산적 가치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Ⅲ)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위의 내용은 인터넷검색하다 퍼온 것임,점수필요없음 *추가: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문자 훈민정음-(한글) |
출처 :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3&dir_id=130602&docid=277987 |
이 곳 저곳에서 복사를 많이 해서 중복이 많아도 이해해 주세요. 방학숙제를 하신 다면 .. http://www.restorekcp.or.kr/sub/view/photo/list.php 이 곳을 이용해 보세요! 이곳은 약탈 문화제란 곳인데, 현재 우리나라에 미처 있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제에 대해 쓰시면 더 좋지 않을까요..? |
밑에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입니다.
이것도 다른 곳에서 가져 왔으니 차질 없으시길 바랍니다.
가나(GHANA) : 2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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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비아(GAMBIA) : 1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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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GUATEMALA) : 3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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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고연방/마케도니아공화국 (FORMER YUGOSLAV REP. of MACEDONIA) : 1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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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 (GEORGIA) : 3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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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GREECE) : 16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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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코트디브와르 (구아이보리코스트/GUINEA & COTE D'IVOIRE) : 1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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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수정하느라 힘들어요~
답변 답변확정해주세요~ ^^
어제 쌍수하고 오늘 2일차인데 이거 실밥 풀린 걸까요ㅠㅠ?? 안녕하세요.... 님께서 "어제 쌍수하고 오늘 2일차인데 이거 실밥 풀린 걸까요ㅠㅠ??"라고 말씀하셨는데...
... 혹시 카드깡 수수료 이런문제 인가요ㅠㅠ 추가요금을 요구하더라구요 ㅠㅠ 이런 사기도 있나요 ㅠㅠ 카드깡 수수료 사기친사람 고소하고 싶어요 ㅠㅠ 카드깡 수수료 문제요...
집에서 나왔는데 무슨 벌레든 바퀴만 아니면 되는데 혹시 무슨벌레인지 알수있을까요?ㅠㅠ 사진은 집게벌레목에 속한 끝마디통통집게벌레(학명: Gonolabis marginalis) 로...
몸이 너무 뻐근하고 토할거같고 머리어지럽고 툭치면 너무너무 아픈데 어떡해요ㅠㅠ 안녕하세요. 대한의사협회·네이버 지식iN 상담의사 정현화 입니다. 위염 같아요. 내과...
벌써 여름을타는지 입맛도없고 소화도안되는데 자꾸 상추를 먹으라고 옆에서 강조하네요 ㅠㅠ 밥먹을때마다 스트레스를.. 입맛이라도있어서 먹으면괜찮겠는데 입맛도없어서...
... 느낌이에요ㅠㅠ 이거 틱ㅌ 증상인가요? 그리고 제가 최근에 학업 스트레스,대인관계 스트래스 때문에 좀 많이 힘들어하고있어요ㅠ 안녕하세요. 하이닥-네이버 지식iN...
엑셀 고수님들 부탁 드리겠습니다!!ㅠㅠ 진짜로 모르겠어요 ㅠㅠ 과제 내용은 사진처럼하는건데 ㅠㅠ 설문지 파일 보고 해결해주세요. 뭔가 시트 부족인듯합니다. 여기가지...
... 8년동안 계약직이였으며 그만둔 이유는 오해가생겨서 그만두게되었는데 8년을 다니고 항상 최저로만 받고 일하면서 실업급여를 못받는게 좀 억울해서요ㅠㅠ 저렇게...
... 뭐에홀렸는지 500만원 입금 한뒤에 이게 맞나 싶어 찾아보니 대리구매 사기인거 같더라구요ㅠㅠ 그다음4차 진행 하는 금액보니 1000만원 이여서 더이상 안하겠다...
... 궁금해요 ㅠㅠ !! 계속 고민중인데 상담해쥬실분이 계신가용 ㅠㅠ 애견미용학원에 관심이 있어서 다닐까... 궁금해요 ㅠㅠ !! 계속 고민중인데 상담해쥬실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