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 왜 민주화운동인지 모르겠습니다.

518이 왜 민주화운동인지 모르겠습니다.

작성일 2013.01.22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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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사태라고 부르는 사람인데요.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어 질문드립니다.

일단 교과서에서는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지요. 이건 재판 판결의 결과 민주화 운동이 승소해서 표기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폭동이라 부르는 것이 위법이 아니다 라는 판결이 후에 나왔지요.

즉 표기는 민주화운동이되 폭동이라 하여도 무관하다 이 말인데..

개인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승소한 원인을 알고 싶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관련 서적을 읽어보았는데 4월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더라구요.

저도 자세히 알아본게 아니라 정확한지 모르겠으나 순서는

계엄령. 시위. 방화. 저지. 경찰사망. 계엄군 투입. 진압. 무장. 최종 진압.

이런 순서대로 인 것 같은데

여기서 질문하겠습니다.

1. 계엄령은 국가비상사태에 내려지는 것으로 이 상태에서 시위는 불법 시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여러 방화사건.
이런 시위는 진압 요건에 해당합니까?

2. 경찰사망이 먼저 입니까? 518 첫 희생자라는 청각장애인의 사망이 먼저 입니까?

3. 주도자가 북으로 넘어갔다는데 사실입니까?

3 - 1 북한 개입주장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폭동입니까? 민주화 운동입니까?

Ps. 본인은 몇년 전 까지 민주화운동이라 알고 있었고 최근에는 논란이 있어보여 사태라 생각했습니다.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읽다 호기심이 생겨 글을 썼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법적 개념으로 보면 계엄령 하의 시위는 불법시위입니다.

하지만 사건을 재조명 하고 싶으시다면 기본적으로 인과관계는 필수입니다.

5.18 사건이 터진 이유는 서울의 봄으로 국민들은 민주화의 열망을 가지고, 정부에 대해 여러가지

요구와 행동으로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규하 정부 역시 유신정치의 잔재를 해결하는

등, 유신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움직임 역시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군부의 12.12 측으로 군 내의

실권을 잡고 정부정책에 대해 관여를 했습니다. 1980. 5. 17 기존의 계엄령을 확대해서 국민의 시위를

진압하고 군대로 깔아내렸습니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그 상황에 대해서 대항하기 시작했고.

신군부 내에서 총기발발을 시작하자, 살기 위해 경찰서 등 무기고를 털어 자발적으로 무장을 했고,

계엄군에 대해 대항했습니다. 이게 인과관계로 서술한 5.18입니다.

2. 5.18 첫 희생자는 경찰이 아닌 청각장애인의 사망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이는 당시의 검시자료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 해당 부분은 사실확인이 안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유언비어라고 판단했습니다.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근거가 필요하시다면 추후에

찾아서 수정하겠습니다.

3 -1 북한개입은 상황적으로 생각해도 모순점이 많습니다.

우선 반공을 논한다면 미국의 동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2.12. 쿠데타로 북한의 움직임을 경계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띄웠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동향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최근에 부분 해제된 국방부 기밀문서에서는 북한의 동향에 대해서는 한 줄도 언급이 되어 있지 않

습니다. 국내의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역시 반공을 상당히 강조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동향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주시를 하고 있었죠.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북한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건 우리나라의 군대 물먹이는 이야기 입니다.

가정이 아닌 기록으로써 설명드리자면 5월 16일 보성을 통해 침투한 간첩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의 신고로 체포되었지만, 이 간첩은 광주에 갈 의도도 없었고, 5.18과 관련된 임무도 없었습니다.

(이는 당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역시 그 상황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군부 세력은 5.18은 북한과 관련된 운동이라는 허위사실을 유포했고,  5. 23 여론조작을 했습니다.

4. 민주화운동입니다. 물론 민주화운동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극우세력을 제외

한 중도 보수층들은 민주화 혹은 사태 정도로 파악합니다. 민주화운동으로 판단하기도 뭐하지만

폭동으로 판단하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죠. 하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시면 당시 광주 내에서는 치안유지

가 잘 되었습니다. 이건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단순히 폭동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만약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면 치안이 유지될 일은 없으니까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역사적 사실은 항상 바뀝니다. 그 시대의 승리자의 승리 보상으로요. 광주사태또한 민주화를 눈앞에둔 상황이었던 당시 대통령 노태우정부때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명명하였고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고있습니다.
하지만 운동이라 함은 계획성과 목적이 있어야 하는 거지만 당시에 광주사태는 군부의 탄압에 따른 우발적인 사태였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서의 주장하는 폭동이라고도 불리어질수없습니다. 폭동은 반정부 반체제의 성격을 띄고있어야 하지만 당시의 광주사태는 반군부 였지 반정부의 성격은 띄고있지않습니다. 그런의미에서
광주사건 혹은 광주사태가 옳으나. 사건의 전후 정치 사회의 파급효과로 볼때 광주사태라함이 옳다고 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5.18은 민주화운동이 맞습니다.

 

우선

 

12.12사태부터 아셔야합니다.

 

12.12사태는 반란입니다.

 

하물며 박정희의 5.16쿠데타조차 '반란'은 아닙니다.무력으로 합법정권을 뒤엎기는 했어도

 

2년간의 군정을 국민들에게 동의 받았으며 2년뒤에 국민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됬으니 어쨋든 약속을 지킨겁니다. 나중에 문제가된게 3선개헌 유신헌법이지

오히려 5.16쿠데타는 그저 쿠데타입니다.

 

하지만 12.12사태는 국가적인 반란입니다.

 

박정희를 이어서 최규하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하고있었고 임시적으로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민주적으로 선거를 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다짜고짜 군대 끌고와서 이 나라를 맘대로 먹은게 전두환이고 12.12사태입니다.

 

국가반란으로 규정됬고 그로인해 사형선고도 받았습니다.

 

 

이런상황에서 결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제대로된 정통적인 공권력을 가졌다 보기 힘듭니다.

 

불법적인 권력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전국적으로 전두환을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전두환은 이들을 어떻게 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5.18때 북한이 개입했냐 안했냐 시민이 먼저 경찰을 떄렸냐를 떠나서

 

전두환이 경찰,군대를 동원하는것조차 일단 불법입니다.

 

 

폭동에 대하여..

 

폭동이라는 단어는 매우 모호합니다.

 

폭동의 정확한 의미는 조직되지않는 집단이 일으킨 소요로 엄밀히말하면 왠만한 데모,시위같은것도 폭동이라고 부를수도있습니다만

 

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뜻을 담고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바꿔논 프랑스혁명도 어찌보면 폭동 이지만

 

루이16세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폭동인가?'라고 물어봤지만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은 '폐하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나라에서나 riot,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였다는것이 드러납니다.

순수한 단어뜻으로는 그렇게 나쁜뜻이 아닙니다.

한자만 봐도 폭동은 봉기와 비슷한 말입니다. 하지만 폭동과 다르게 봉기는 좋은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말하는 폭동은 '조직되지 않은 집단이 정당하지 않게 폭력을 사용함'이겠지요.

 

 

 

5.18이 폭동일수도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군부가 폭동 진압했으니 잘했다~고 말할수도없는것이죠.

 

가정을 해봅시다.

 

1.시민들이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였을경우

 

2.북한군이 개입하고 선동하여 국기를 뒤엎으려 한 경우

 

3.교과서에 나온 내용...

 

1,2의 가정으로 볼때 5.18폭동,사태라는 단어가 적합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한것입니다.

 

시민들이 먼저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이고 소란을 폈다 하더라도 지나친 과잉진압입니다.

 

죽은사람과 실종자는 어마어마합니다.

 

앞서말씀드렸듯이 전두환의 신군부는 불법정부입니다. 합법정부가 폭동이라 쳐도 저런식으로 진압하면 난리납니다. 하물며 군대동원도 못하는 불법정부가 그런식으로 탱크와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면 오히려 신군부가 더 잘못입니다.

 

만약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입니다. 비상계엄령 내리고 외국인출입도 제한한 마당에 겨우 북한군 하나 내려오는것도 못막았습니다.국가를 위기에 빠트릴뻔한 전두환의 잘못입니다.

어쩔수없이 빨갱이들을 진압했어야 한다고 쳐도 빨갱이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시민들이 빨갱이들에게 선동당하게 막지도 못하고 선동당하니깐 죽여버렸다?

더 나쁜새끼죠.

 

 

그런데 문제는 1,2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봐도 전경과 군인,공수부대의 시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최초사망자또한 장애인 대학생으로 밝혀졌고요.

 

전두환에게 협박당하고 돈먹은 전문가들이 처음에는 시민군이 쓰던 카빈소총 총알이 더 많이 박혔다고 구라쳤으나 나중에 다시 밝혀졌습니다. 군인들이 쓰던 M16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고요.

 

어떻게 시민들이 무기를 그렇게 잘 다루고 4시간만에 무기고를 터는게 가능하냐고 이것은 조직적으로 누군가가 선동했다고 하지요.

 

오히려 용어상으로 조직적이면 폭동이 아닙니다. 불법신군부를 무너뜨리려는 민중의 거룩한 저항입니다.

수꼴들이여 자폭하지 맙시다.

 

그리고 경찰서 위치야 동네사람들이 다알텐데 무기고 4시간만에 터는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다가 대한민국남자 대부분이 군대를 갔다오는걸 감안할때 총 잘다루는것도 무리가 아니죠.

 

결국 우기는게 북한개입설입니다.

 

이거면 문제가 있어도 전두환이의 입장이 약간 덜 난감해집니다. 과잉진압이지만 나라 위급해질뻔한걸 막았으니깐요.

 

근데 이것도 근거가 없습니다.

 

5.18을 북한이 기념한다고 하죠?

 

북한은 남한에서 일어난 모든 민중항쟁을 기념합니다. 4.19혁명 6.10항쟁 부마항쟁 등등..

 

그리고 진짜 5.18을 북한이 개입한거라치면 그거 숨길라고 기념 안하죠. 등신입니까?

 

어이없는건 시체중에서 신원미확인자가 손에 꼽을정도고 대부분이 시민이고 일부 군인이라는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상황에서 시체몇기는 신원미확인자가 나타나는건 당연한것)

 

북한군이 개입했고 공수부대하고 한판 붙었으면 적어도 공수부대나 북한군이나 시체가 있어야할것아닙니까?

 

거기다가 북한군이 내려오기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아무리 능력좋은놈들이라도 어떻게 뚫습니까?

 

그리고 많고많은 동네중에 하필이면 광주일까요? 지금이나 되니깐 광주가 좀 큰 도시지 30년전 광주는 그리 큰 도시도 아니었고 이점도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광주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있었는데 미군부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비상계엄 뚫고 내려온 물건(?)들을 미군부대가 가만히 나뒀는데

 

전두환이는 북한군이 내려온걸 감지하고 공수부대를 보냈다? 

 

전두환은 슈퍼맨이나 되나봅니다.

 

이 슈퍼맨인 전두환이가 시민들 그렇게 학살해놓고서는 빨갱이들을 하나도 못잡았습니다.

 

5.18이후 신군부가 간첩잡을라고 이짓을 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정리해보죠.

 

북한특수부대가 비상계엄을 뚫고 그 많고 많은 도시중에 광주로 도착-시민을 선동함-광주옆동네 미군부대는 븅신같이 이것도모름-근데 전두환은 어떻게 알았는지 광주로 공수부대 투입해서 빨갱이잡는다고 시민들까지 학살함-북한특수부대는 시체하나 안남기고 광주 빠져나감-전라남도 간첩들 잡는다고 철통포위-이렇게 쇼하는데 정보력 더쩌는 미군은 가만히 있음-간첩잡는다고 개지랄 다떨었는데 간첩들은 북한으로 아무일 없다는듯 흔적도없이 귀화함

 

 

판타지소설을 쓰고계십니다.

 

이 판타지소설을 쓸정도로 북한 특수부대가 개쩌는애들이라고 칩시다.

 

이정도 쩌는애들이라면 북한에서도 함부로 못움직이는 애들일테고 이정도 주도적이려면 김일성정도거물이 움직여야하겠지요?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루마니아 방문중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특수부대 보낼정도로 중요한 작전에 루마니아 방문중?

 

아실분은 아시다시피 김일성이는 어느나라 방문할때는 수뇌부,정부요직 다 데려갑니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나.... 80년대 동유럽 지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수뇌부,정부요직도 없이 특수부대 스스로 판타지같은 일을 했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무슨 북한은 도라에몽의 도구라도 있는걸까요?

 

 

그 외의 반박

 

5.18때 김대중 석방이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냥 김대중 하나 살릴라고 일으킨거다.-부마항쟁도 김영상 석방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김대중 좋아하냐 싫어하냐를 따지지 않고 일단 멀쩡한 정치인 잡아다논거 석방하라는게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탈북자단체의 증언이 있다.북한이 븅도 아니고 그런 국가기밀을 그런애들한테 알려주겠냐? 그리고 인터뷰 요청은 왜 안받아들이냐. 신상 공개도 필요없고 최소한 모자이크 해줄테니깐 얼굴까고 인터뷰좀 하라는데 그것도 안받아주고 카더라~ 하면서 우기면 뭐가 되냐? '내가 그 특수부대였음'해도 못믿을판에..

 

지만원판결때 지만원의 의견을 대법원이 받아들인것으로 볼수있기 때문에 5.18은 폭동이라고 할수도있다?

 5.18은 민주화운동이 맞습니다.

 

우선

 

12.12사태부터 아셔야합니다.

 

12.12사태는 반란입니다.

 

하물며 박정희의 5.16쿠데타조차 '반란'은 아닙니다.무력으로 합법정권을 뒤엎기는 했어도

 

2년간의 군정을 국민들에게 동의 받았으며 2년뒤에 국민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됬으니 어쨋든 약속을 지킨겁니다. 나중에 문제가된게 3선개헌 유신헌법이지

오히려 5.16쿠데타는 그저 쿠데타입니다.

 

하지만 12.12사태는 국가적인 반란입니다.

 

박정희를 이어서 최규하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하고있었고 임시적으로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민주적으로 선거를 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다짜고짜 군대 끌고와서 이 나라를 맘대로 먹은게 전두환이고 12.12사태입니다.

 

국가반란으로 규정됬고 그로인해 사형선고도 받았습니다.

 

 

이런상황에서 결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제대로된 정통적인 공권력을 가졌다 보기 힘듭니다.

 

불법적인 권력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전국적으로 전두환을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전두환은 이들을 어떻게 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5.18때 북한이 개입했냐 안했냐 시민이 먼저 경찰을 떄렸냐를 떠나서

 

전두환이 경찰,군대를 동원하는것조차 일단 불법입니다.

 

 

폭동에 대하여..

 

폭동이라는 단어는 매우 모호합니다.

 

폭동의 정확한 의미는 조직되지않는 집단이 일으킨 소요로 엄밀히말하면 왠만한 데모,시위같은것도 폭동이라고 부를수도있습니다만

 

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뜻을 담고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바꿔논 프랑스혁명도 어찌보면 폭동 이지만

 

루이16세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폭동인가?'라고 물어봤지만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은 '폐하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나라에서나 riot,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였다는것이 드러납니다.

순수한 단어뜻으로는 그렇게 나쁜뜻이 아닙니다.

한자만 봐도 폭동은 봉기와 비슷한 말입니다. 하지만 폭동과 다르게 봉기는 좋은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말하는 폭동은 '조직되지 않은 집단이 정당하지 않게 폭력을 사용함'이겠지요.

 

 

 

5.18이 폭동일수도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군부가 폭동 진압했으니 잘했다~고 말할수도없는것이죠.

 

가정을 해봅시다.

 

1.시민들이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였을경우

 

2.북한군이 개입하고 선동하여 국기를 뒤엎으려 한 경우

 

3.교과서에 나온 내용...

 

1,2의 가정으로 볼때 5.18폭동,사태라는 단어가 적합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한것입니다.

 

시민들이 먼저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이고 소란을 폈다 하더라도 지나친 과잉진압입니다.

 

죽은사람과 실종자는 어마어마합니다.

 

앞서말씀드렸듯이 전두환의 신군부는 불법정부입니다. 합법정부가 폭동이라 쳐도 저런식으로 진압하면 난리납니다. 하물며 군대동원도 못하는 불법정부가 그런식으로 탱크와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면 오히려 신군부가 더 잘못입니다.

 

만약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입니다. 비상계엄령 내리고 외국인출입도 제한한 마당에 겨우 북한군 하나 내려오는것도 못막았습니다.국가를 위기에 빠트릴뻔한 전두환의 잘못입니다.

어쩔수없이 빨갱이들을 진압했어야 한다고 쳐도 빨갱이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시민들이 빨갱이들에게 선동당하게 막지도 못하고 선동당하니깐 죽여버렸다?

더 나쁜새끼죠.

 

 

그런데 문제는 1,2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봐도 전경과 군인,공수부대의 시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최초사망자또한 장애인 대학생으로 밝혀졌고요.

 

전두환에게 협박당하고 돈먹은 전문가들이 처음에는 시민군이 쓰던 카빈소총 총알이 더 많이 박혔다고 구라쳤으나 나중에 다시 밝혀졌습니다. 군인들이 쓰던 M16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고요.

 

어떻게 시민들이 무기를 그렇게 잘 다루고 4시간만에 무기고를 터는게 가능하냐고 이것은 조직적으로 누군가가 선동했다고 하지요.

 

오히려 용어상으로 조직적이면 폭동이 아닙니다. 불법신군부를 무너뜨리려는 민중의 거룩한 저항입니다.

수꼴들이여 자폭하지 맙시다.

 

그리고 경찰서 위치야 동네사람들이 다알텐데 무기고 4시간만에 터는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다가 대한민국남자 대부분이 군대를 갔다오는걸 감안할때 총 잘다루는것도 무리가 아니죠.

 

결국 우기는게 북한개입설입니다.

 

이거면 문제가 있어도 전두환이의 입장이 약간 덜 난감해집니다. 과잉진압이지만 나라 위급해질뻔한걸 막았으니깐요.

 

근데 이것도 근거가 없습니다.

 

5.18을 북한이 기념한다고 하죠?

 

북한은 남한에서 일어난 모든 민중항쟁을 기념합니다. 4.19혁명 6.10항쟁 부마항쟁 등등..

 

그리고 진짜 5.18을 북한이 개입한거라치면 그거 숨길라고 기념 안하죠. 등신입니까?

 

어이없는건 시체중에서 신원미확인자가 손에 꼽을정도고 대부분이 시민이고 일부 군인이라는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상황에서 시체몇기는 신원미확인자가 나타나는건 당연한것)

 

북한군이 개입했고 공수부대하고 한판 붙었으면 적어도 공수부대나 북한군이나 시체가 있어야할것아닙니까?

 

거기다가 북한군이 내려오기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아무리 능력좋은놈들이라도 어떻게 뚫습니까?

 

그리고 많고많은 동네중에 하필이면 광주일까요? 지금이나 되니깐 광주가 좀 큰 도시지 30년전 광주는 그리 큰 도시도 아니었고 이점도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광주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있었는데 미군부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비상계엄 뚫고 내려온 물건(?)들을 미군부대가 가만히 나뒀는데

 

전두환이는 북한군이 내려온걸 감지하고 공수부대를 보냈다? 

 

전두환은 슈퍼맨이나 되나봅니다.

 

이 슈퍼맨인 전두환이가 시민들 그렇게 학살해놓고서는 빨갱이들을 하나도 못잡았습니다.

 

5.18이후 신군부가 간첩잡을라고 이짓을 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정리해보죠.

 

북한특수부대가 비상계엄을 뚫고 그 많고 많은 도시중에 광주로 도착-시민을 선동함-광주옆동네 미군부대는 븅신같이 이것도모름-근데 전두환은 어떻게 알았는지 광주로 공수부대 투입해서 빨갱이잡는다고 시민들까지 학살함-북한특수부대는 시체하나 안남기고 광주 빠져나감-전라남도 간첩들 잡는다고 철통포위-이렇게 쇼하는데 정보력 더쩌는 미군은 가만히 있음-간첩잡는다고 개지랄 다떨었는데 간첩들은 북한으로 아무일 없다는듯 흔적도없이 귀화함

 

 

판타지소설을 쓰고계십니다.

 

이 판타지소설을 쓸정도로 북한 특수부대가 개쩌는애들이라고 칩시다.

 

이정도 쩌는애들이라면 북한에서도 함부로 못움직이는 애들일테고 이정도 주도적이려면 김일성정도거물이 움직여야하겠지요?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루마니아 방문중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특수부대 보낼정도로 중요한 작전에 루마니아 방문중?

 

아실분은 아시다시피 김일성이는 어느나라 방문할때는 수뇌부,정부요직 다 데려갑니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나.... 80년대 동유럽 지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수뇌부,정부요직도 없이 특수부대 스스로 판타지같은 일을 했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무슨 북한은 도라에몽의 도구라도 있는걸까요?

 

 

그 외의 반박

 

원래 폭동이었는데 김대중,노무현때 명칭이 바뀐것이다. 김대중,노무현은 고사하고 김영삼때도 아닌 노태우때 이미 정식명칭은 5.18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http://archives.kdemo.or.kr/PhotoView?pPhotoId=00755073

 

 

5.18때 김대중 석방이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냥 김대중 하나 살릴라고 일으킨거다.-부마항쟁도 김영상 석방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김대중 좋아하냐 싫어하냐를 따지지 않고 일단 멀쩡한 정치인 잡아다논거 석방하라는게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탈북자단체의 증언이 있다.북한이 븅도 아니고 그런 국가기밀을 그런애들한테 알려주겠냐? 그리고 인터뷰 요청은 왜 안받아들이냐. 신상 공개도 필요없고 최소한 모자이크 해줄테니깐 얼굴까고 인터뷰좀 하라는데 그것도 안받아주고 카더라~ 하면서 우기면 뭐가 되냐? '내가 그 특수부대였음'해도 못믿을판에..

 

지만원의 판결로 인해서 5.18을 폭동이라고 불러도된다? http://pds25.egloos.com/pds/201212/30/07/2010____51.pdf

 

판결문이나 보고 반성하시고요. 지만원 소송은 전적으로 명예훼손에 관련된 소송입니다.

오히려 96년 대법원판결에서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종결됬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나돌고 있는 유언비어들과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폭도는 전두환입니다.
폭도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이 폭도라는 주장만큼 황당한 주장이 어딨습니까.

* 5.18을 폭동이라고할때 하는주장 list

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 습격을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1.08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중화기와 무전기로 중무장했던 것은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2.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전옥주 및 차명숙).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08 5·18민주화운동 당시 배후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신군부가 발표한 바 있다.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2.10 (1.10) 시민군은 당시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2.1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2.12 1985년 북한에서 발행된 '광주의 분노'라는 서적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

3. 기타
3.01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가 아닌 김대중의 석방에 불과했다.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5 고등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3.06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절도를 자행했다.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3.09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에 대한 공로가 없으므로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3.10 5·18민주화운동 당시에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3.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무력을 사용한 건 사실이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3.14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김대중 정부가 내린 편파적인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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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출처 : http://study21.org/518/photo/5-19.htm
http://www.study21.org/518/video/5-20.htm

이같은 유언비어의 퍼져나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역사학도라는 한 극우인사의 황당한 주장에 있습니다.


역사학도에 따르면, 위 사진은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날인 20일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촬영한 영상(http://www.youtube.com/watch?v=Rq_qa1HhnBo)에서 가져온 캡쳐 사진입니다. 사실 역사학도는 힌츠페터가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들어 조총련 충복 노룻"을 했다며 영상 촬영 날짜의 신뢰성을 스스로 비하하고 있지만, 이를 떠나서 영상 어디에도 해당 영상이 20일에 촬영됐다는 코멘트는 보이지 않습니다. 힌츠페터는 5월 19일에 광주로 내려갔다가, 도쿄에 돌아간 뒤 5월 23일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 광주 시민들을 촬영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34715) 즉, 해당 영상은 광주시민들이 무장한 뒤인 23일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20일에 촬영됐다는 주장은 단순히 그가 19일에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세우는 황당한 추측일 뿐입니다.

또한 역사학도는 위 사진이 5월 19~20일 사이의 사진이라는 단서가 "[광주 시민]이 이미 5월 19일에 나주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에 따르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서 나주 경찰소의 무기 가져간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발포 다음입니다.


실제로 총을 먼저 발사한 건 계엄군입니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를 보고 군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5월 20일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계엄군이 또다시 발포를 했습니다. 이 때 비무장 시민 두 명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계엄군의 총기 사용이 정당방위로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5월 21일 13시 공수부대가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이 시점 이후로 광주 시민들은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총기 사용 이전에, 청각 장애인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해 5월 19일 사망한 사례가 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73631). 즉, 최초의 사망자는 시민입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를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습격을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지만원에 의해 퍼지게 된 해괴한 논리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서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이 파출소들과 방위 상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려는 것은 시민군을 어떻게든 불순세력과 연관하려고 하는 비열한 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군부는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5·18민주화운동 이후 "간첩죄"나 "반공법"에 의한 죄목이 아닌 "내란죄"로 처벌했습니다. 신군부 입장에서도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간첩"으로 몰았을 때 진압의 정당성을 얻었을텐데 스스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불순분자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광주 내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는데 그 때 사용한 장갑차는 바로 시가전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KM900 장갑차입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닌 장륜(차륜형) 장갑차이죠. 이 차륜형 장갑차의 운전 방식은 일반적인 자동차의 운전 방식과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 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광주 시민들을 어떻게든 북한과 관련지으려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황당한 논리입니다.


현재 5·18묘지에 5구의 신원미상의 시체가 묻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자,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직후에는 무려 30명에 달하는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3/2012110300062.html)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중 6명도 아직 신원 미상입니다(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8/2008021801357.html). 신원 미상자가 있다해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대구 지하철 참사가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터무니 없는 논리입니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출처 : http://blog.daum.net/sillasouls/109


우선 시민군이 도청에 TNT를 설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이상한 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 2. TNT 설치는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다.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따르면(http://cafe.naver.com/enatur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1), 당시 다이너마이트 설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 씨 등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광업소에서 근무하던 분에게 다이너마이트 설치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TNT 설치가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라는 논리를 살펴봅시다. 위에서 언급했던 5.18 正史에 기록된 신만식 씨의 증언입니다. 신만식 씨 역시 화순 광업소 다이너마이트 유출 작업에 참여한 분입니다.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는 단순한 위협용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전남도청을 폭파할 의도가 있었다면 도화선을 연결했을텐데 시민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화선 자체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로는 온건파의 요청에 의해 폭약 제거를 시도한 배승일 씨에 대한 명예회복 판결이 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116104502&Section=03). 뉴스 기사에 따르면, 배승일 씨는 당시 뇌관과 신관을 제거했습니다. 만약 도화선이 있었더라면 도화선을 먼저 제거했겠지요.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dh&no=5295


말도 안 되는 거짓입니다.


우선, 먼저 사망한 쪽은 시민 측입니다. 목차 1.01를 봐주세요.
경찰이 시민 측에서 온 버스에 의해 사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http://cafe.daum.net/80518/N8mQ/40?docid=DKjbN8mQ4020031117052216)


"한편 이날 차량시위는 금남로에 이어 노동청 앞에서도 계속된다. 소위 노동청 전투라고 불리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는 9시20분께 광주고속 차량 10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함평경찰서 소속 경관4명이 사망하기도 한다. 당시 광주∼남원간 정기노선을 운행하던 광주고속 운전기사 배용주씨 (당시나이 34세)는 정기노선운행을 마치고 본사에 도착, 이소식을 듣자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노동청과 도청사이로 들어온 배씨는 다른 차량들과 함께 맨앞으로 차를 운전, 도청을 향해나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공수대로부터 발사된 최루탄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차내에서 터지자 엉겹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대로 시동이 걸린 차량은 계속 앞으로 돌진, 경찰들을 깔아버린 것. 배씨는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기에 이른다. 또 차량시위는 현대교통기사 김복만씨 (당시 29세)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한다."


당시 경찰들을 사망하게 한 건 버스 기사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제대로 된 운전이 가능했을까요. 증언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분들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아래 사진을 봐주십시오.


버스 안에 가득한 최루탄 연기를 보십시오. 이 상황에서 제대로 운전을 해서 의도적으로 경찰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요.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81766
http://systemclub.net/bbs/zb4pl5/view.php?id=n_1&page=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ate&desc=desc&no=46


신군부의 나팔수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계시다니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이같은 유언비어가 원천이 된 두 가지 서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제5공화국은 1982년 신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서적 『계엄사』에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117명이 시민군이 사용한 칼빈 소총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해주십시오. 인터넷에서 떠도는 아래와 같은 도표도 같은 서적에서 나온 도표입니다.


반면, 1980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에 광주 지방검찰청에 의해 작성된「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에서 따르면 사망자 1백65명의 사인은 총상이 전체 79.4%인 1백31명(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9명)으로 가장 많고, 개머리판. 곤봉 등에 의한 타박사가 18명, 차량사 12명,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이 4명인 것이라고 합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가 26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검찰청 입장에서 카빈 소청에 의한 사망자 숫자를 축소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82년 후에 군에서 나온 출처 없는 주장과는 많이 다른 내용입니다. 즉, 1982년 발표된 군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보안사에서 발간한 5.18 자료를 인용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칼빈 및 기타 총상 사망자는 94명, M16 사망자는 38명이지만, 이 역시 거짓입니다. 당시 보안사는 505보안부대에서 파악한 사체 검안 자료를 가지고 167명에 대해 양민과 난동자(원문에는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진행했습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이 분류 과정에 참여한 의사 2명과 목사는 사망자가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때, 분류 과정이 불확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는 마지막 사망자의 분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5월 27일 YWCA 안에서 사망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학생은 경기도 출신으로 그 안에서 저항했다는 이유로 군측에서는 계속 ‘폭도’라고 주장했고, 세 사람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폭도가 될 수 있냐며 시민들은 비폭도로 분류할 것을 주장해 결국 ‘비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료의 원본이 됐던 505보안부대의 검시자료에 따르면(이 문서는 최근 공개되었습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20명입니다. 즉, 보안사에서 원본 자료를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


굉장히 황당한 주장이니,


6월 항쟁에 참여한 자랑스러운 시민들의 사진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이들도 남파 간첩인가요.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74860, http://www.ilbe.com/77398014


둘 다 유언비어입니다.


AK 소총 사용에 대한 근거는 정말 정사갤/일베 등 모든 사이트를 뒤져봐도 아무데도 없군요.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시민군의 파파샤 사용을 증명한다며 제기한 재밌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들은 해당 사진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물전에 있었던 사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로 바로 옆의 확성기에 부착되어 있는 Q마크를 보십시오. Q마크 보증제는 82년에 도입된 건데 어떻게 80년에 이게 있었을까요. 사실 이 사진은 한 시민이 "오월 판화체험전 시민군 현장 체험전"에 참석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시민군 소품을 어떻게 실제 총기로 과장할 수 있을까요. 모조품에 지나지 않다는 거죠. 그래도 이게 진짜 같다면 다른 각도에서 찍은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장전 손잡이도 없고, 방아쇠울도 저런 모양인 파파샤 총기가 어딨습니까.. 원래 총기의 사진과 직접 비교해봅시다(https://www.google.ca/search?q=PPSH-4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조잡한 합성입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4804976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kagicstaton88/601
http://blog.naver.com/totoro890907/90146962497


제일 황당한 논리입니다.


예,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http://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21228), 6월항쟁(http://www.ytn.co.kr/_ln/0101_200706102202527375
), 심지어 3·1운동(https://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68182)과 6·3항쟁(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30603173400596&p=yonhap)도 기념합니다. 그래서 4·19혁명과 6월항쟁 그리고 6·3항쟁은 북한의 소행이고 3·1운동은 공산투쟁입니까?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http://www.ilbe.com/429606599


북침설에 대한 증언은 대부분 임천용이라는 이 괴악한 사람한테서 나온 증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무려 북한에서 "암살용"으로 "휴대용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냐 하면 미국에서조차 이 사람을 난민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결정을 내렸죠(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94678). 이 분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물론, 정신상태가 멀쩡하지 않다고 해서 증언이 거짓이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증언들이 엇갈린다면 어떨까요? 임천용은 총 세 곳에서의 인터뷰에서, 침투 인원을 어떤 곳에서는 450명으로, 어떤 곳에서는 1개 대대로, 어떤 곳에서는 2개 대대로 증언했습니다. 이 분의 오락가락한 증언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http://asegaew.egloos.com/2269768). 심지어 귀환 인원에 대해서도 제각각 다르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3군 사령관 출신인 서종표 의원은 이에 대해 "600명이 침투해서 광주에서 어떻게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 해도 그 동안 정부와 군은 무엇을 했는가.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군 경험을 가진 보수단체장이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5238).


심지어 다른 탈북 군인 협회인 탈북군인협회의 대표는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협력해서 일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이들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또다른 근거입니다.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끔찍한 왜곡입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간첩 이창용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창용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의하면 5. 16.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와는 상관 없이 남파됐다. 5․18과 관련한 임무나 광주로 잠입하기 위한 시도도 발견할 수 없다."
이창용이 검거 된 곳은 서울입니다. 게다가 그 때의 날짜는 무장투쟁이 시작되고 난 뒤인 5월 24일이었죠.
무엇보다도,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신군부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습니다.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출처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4632


뉴데일리라는 언론사의 신문사에서 나온 황색 유언비어입니다.


해당 뉴스 기사에 따르면, 10월 북한군 개입설을 증명하기 위해 김주호 박사가 공개한 자료는 바로 '인민군영웅렬사묘'를 촬영한 다음과 같은 사진 두 장 뿐입니다:


자, 김 박사는 이 묘에 있는 군인들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김 박사는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158명이 ‘남조선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 영웅들’이라는 사실을 각기 다른 문건에서 중복 확인했다,” “사망자의 ‘죽은 날’로 기록된 1980년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 종결일로, 사망일을 이 날짜에 맞췄다”라고 주장했지만 김 박사는 그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밌는 사실은, 해당 사진의 '인민군영웅렬사묘'가 김주호 박사가 지칭하는 묘라는 명확한 증거 역시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북한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사실을 밝히는 기사가 있었죠(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41153541&code=910303).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어버이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지칭)께서 월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 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 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하시였다.”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출처가 된 문건도 없고, 사진의 비석이 어떤 묘의 비석인지조차 밝히지 않으니, 김 박사의 주장은 근거없는 유언비어입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출처 :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근거 없는 유언비어입니다. 무장간첩이 침투한 것은 3월 23일, 35일, 27일에 있었으며, 그마저도 모두 검거되었습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sionvoice/13756351


괴악한 논리적 비약이군요.


윤기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재학중인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간첩 훈련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윤기권이 북한으로 넘어갔다해서 5·18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시민들 대다수가 어떻게 간첩이 됩니까.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출처 : http://study21.tistory.com/entry/%EA%B4%91%EC%A3%BC%EC%82%AC%ED%83%9C-%EC%83%9D%EC%A4%91%EA%B3%84%ED%95%98%EC%98%80%EB%8D%98-%EC%9D%B4%EB%B6%81-%EB%B0%A9%EC%86%A1


상식에서 벗어난 어불성설입니다.


역사학자라는 사람은 5월 28일자 대한뉴스가 당시 평양의 생중계 방송을 편집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합니다.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980년 당시 기술로 중계시설이나 송신소도 없이 광주에서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평양까지 어떻게 생중계를 했을까요. 동영상 후반에 나오는 북한 방송에서 나온 듯한 구호는, 5·18민주화운동 이후의 북한 방송의 보도일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탈북자가 북한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생중계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검시기록은 없습니다.


3. 기타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유언비어가 아닌 사실입니다.


5월 20일에는 군인이 정조준한 총에 임신 8개월 된 최미애 씨가 맞아 쓰러졌고, 병원에 옮겼으나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5월 24일, 신군부의 공수여단은 달리는 차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나 집을 향해 M16을 마구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앞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중학교 1년 방광범 군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마을 어귀에서 놀던 초등학교 1학년 전재수 군이 벗어진 신발을 주우려는 순간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대검 사용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실제로 사망자 중 14세 이하의 사망자는 무려 8명에 이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59021).


다시 말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누가 폭도인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출처 : http://unifykorea.hosting.paran.com/xe/kwangjuinsurgence/23995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신군부의 왜곡에 그대로 동조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기록(전교사 전투상보)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내용에서 시작된 유언비어입니다. 5·18기념재단의 설명대로, 시민군들은 광주의 고립과 봉쇄를 뚫고 담양과 장성에 광주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교도소 앞의 차단을 뚫어야 했고,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기 위해서 교도소 앞으로 출동했을 뿐입니다(http://www.518.org/ease/board.es?mid=a10501000000&bid=0006). 당시 시민군이 광주 외곽으로 진출하려던 것을, "교도소 습격"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총격전이 일어난 곳은 근처 호남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고, 교도소로 진출하려는 일부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해당 사건에 관련된 시민군은 4명, 6명으로 교도소 습격 자체가 목표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교도소를 함락할 수 있나요. 상식의 문제입니다. 이에 따라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위해 관련자를 조작했음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오히려 신군부는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신군부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asegaew.egloos.com/3653375를 참고해주십시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출처 : http://www.ilbe.com/437085841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파괴하는 주장입니다.


4. 19 혁명 때도 경찰서가 방화됐고, 6. 10 항쟁 때도 파출소와 방송국이 방화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4. 19 혁명과 6. 10 항쟁이 폭동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대한국민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은 잘못됐네요.


3.05 고등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출처 : http://www.ilbe.com/146457631


괴악한 비약이군요.


5·18단체가 고소한 사건에서 지만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5·18민주화운동이 폭동이라는 지만원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지만원이 5·18단체 회원들을 직접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281626)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출처 : http://www.ilbe.com/354176114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우선 극우세력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1985년에 작성된 것입니다. 우선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공화당 성향의 우파 싱크탱크라는 사실과, 전두환 정부의 비서실장인 허화평이 1983년 1월부터 1986년 6월까지 헤리티지 재단의 수석 연구위원을 지냈다는 사실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보기 힘든 까닭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87년 6월 항쟁에 의한 민주화 이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인사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고서에는 5월 18일 전남대에서의 시위부터 이틀 간 두 명의 사망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1.01을 참조하십시오).


"...There were many injuries on both sides, but only two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first two days of the confrontation." (http://www.heritage.org/research/reports/1985/09/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query=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


또한 이 보고서에서는 광주교도소에서 50명의 시민군이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실제로 교도소로 진출하려 했던 시민군은 총 10명에 그쳤습니다 (3.06을 참고하십시오).


"...At the Kwangju Prison, for example, more than 50 armed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numerous assaults against the government-held facility." (Ibid.)


이같이 왜곡된 정보만으로 헤리티지 재단이 당시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입니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 직후에 작성된 CIA의 기밀문서와 1980년 6월 25일에 발행된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는 어떨까요. 여기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을 광주 폭동(riot)으로 규정하지만 이 역시 당시 진상규명의 부족함과 신군부와의 공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당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그의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국 언론사가 촬영한 민간 시위에 대한 군인들 (대부분이 특전사)의 잔인한 대응을 상쇄시키려는 것이다. ...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


실제로 1989년 미 국무부는 5·18민주화운동을 "May 18th K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즉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했습니다(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출처 : http://www.ilbe.com/438961786, http://www.ilbe.com/439148590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전두환은 내란죄, "즉 국토의 참절 또는 국헌문란(國憲紊亂)의 목적으로 폭동하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폭도와 그 폭도에게 맞서 싸운 5·18민주화운동의 광주시민이 어떻게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습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부르시려면 우선 전두환이 일으킨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하지만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라는 명백한 사실은 위의 판결문에서 보시다시피 이미 90년대 재판에서 수차례 확인한 진실이랍니다.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목차의 3.12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어떻게 일제가 하는 말과 한결같이 똑같습니까.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5·17비상계엄전국확대가 이래도 정당화된다고 보이십니까? 5·17비상계엄전국확대는 강압적인 쿠데타입니다. 이를 두고 당시 최규하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상관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을사조약이 무효인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군부대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전화선을 끊어버린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미 국무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NO information indicating a North Korean intention to attack was received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period covered by this statement, nor did United States officials regard the domestic situation in the South as being so serious as to justify either Full Martial Law or harsh repressive measures."
"미국은 북한의 공격 의도가 있었다는 어떤 정보도 [1980년 당시] 받지 못 했고,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이 계엄령 또는 극심한 탄압을 정당화할만큼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가소로운 말장난입니다. 사면은 "형벌의 면제"입니다.

 

 

 

 

 

 

유네스코에 올라왔다고 무조건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http://www.unesco.org/new/fileadmin/MULTIMEDIA/HQ/CI/CI/pdf/mow/nomination_forms/Korea%20Human%20rights.pdf

어떻게 올라왔는데

 

읽고 반성이나 합시다.

 

유네스코에서는 '광주민주화봉기'로 판정했습니다.

 

좋든 싫든 민중이 폭력을 사용한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네스코에서조차 이 폭력은 정당한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참고링크:

http://blog.daum.net/kbsicom/49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http://blog.daum.net/kbsicom/51
http://www.youtube.com/watch?v=sCXbu_Ekca4

http://blog.naver.com/chiyahn/20171304853

http://mirror.enha.kr/wiki/5.18%20%EA%B4%91%EC%A3%BC%ED%8F%AD%EB%8F%99%EC%84%A4

 

 

12.12는 반란이아니다? 정당한것이었다. 헛소리 집어 치우고 읽자.

 

이희성은 12.12 반란 이후 전두환이 직접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인물

 

이희성 1980년 당시 계엄사령관이 증언하는 12.12 사태

 

그 때 그건 전두환이가 확실히 잘못한 겁니다.
연행한다는 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되거든요.
소장이, 참모총장을 갖다 연행해야한다는 것이
국방부 장관한테 승인받을래도 국방부 장관이 노재현 장관이니까
전두환이 볼 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차라리 야단맞겠지요.
(전두환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이렇게 얘기하니까
대통령이 뭐라고 했냐면, 나는 군부 내용을 모르니
국방부 장관을 통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시간을 끌고 그러니까 자기네들은 뭐
큰 사건 일으키는 식으로 해서 끌고 가야 되는데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니까 불쑥 쳐들어간거에요.
(12.12 사태는 ) 하극상이오
쿠데타라기보다는 하극상입니다.
정승화 장군은 절대로 김재규의 손아귀에 들어가거나
김재규의 이용물이 되거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전두환이가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해서 했다고 그렇게 봅니다.
12.12 사태 때 내가 곧 참모총장이 됐거든요.
사실은 그문제를, 1.212 문제를 가지고 조사를 해야되는 그 힘은 미치지 못해요.
왜냐하면 조사기관이나 보좌진이 전부 다 그쪽(보안사)에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터뜨리면 번연히 군 전체가 쑥대밭이 되니까
할 수 없이 내버려 뒀거든요.
그게 타성이 되버린 겁니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의 행태

 

제일 처음에 (전두환이) 그 때 소장이였거든요.
소장이 중장 진급을 자꾸 시켜달라고 나한테 애를 무척 태웠어요.
뭐 국방장관까지 동원해 가지고
뭐, 여러 사람을 동원해 가지고 했는데
그 때 소장되고 나서 중장 될 차례가 안되었을 때 자꾸 중장 진급시켜달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 중장할려고 그러느냐,
그런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
다른 뜻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에 차츰차츰 가보니까 애들이 하는 행동이요.
경호 문제를 굉장히 걱정을 하더라 이거요.
자기의 경호!
경호대장같은 사람을 해가지고
시내에 가든지 골프장에 가든지 하면
굉장히 대통령 행사 모양으로 경호를 해요.
얘네들이 왜 그러냐 할때
처음에는 12.12 일어나고 난 다음에 자기의 적이
많으니까 신변보호를 하기 위해 그랬지 않느냐
그 생각이 들고도, 쭉 가보니까 그 때도
'야 이것이 지금 큰 꿈을 꾸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이와 같은 것이 징후에 나타나더라 말이야.

 
 
 
 
 
 
재판당시 뉴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120020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2-12&officeId=00020&pageNo=1&printNo=23051&publishType=00010
 
5공청문회 당시 뉴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100289101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2-01&officeId=00028&pageNo=1&printNo=173&publishType=00010
 
1988년 반란의 가장큰 피해자 정승화의 인터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12800209215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1-28&officeId=00020&pageNo=15&printNo=20666&publishType=00020
 
엔하위키:
 
 
 
 
전두환은 책임이없다? 전두환이 발포명령안함: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600209202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2-06&officeId=00020&pageNo=2&printNo=20673&publishType=00020
 
전라도출신 정웅이 진압한거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72600209134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7-26&officeId=00020&pageNo=34&printNo=23264&publishType=00010
 
 
 
 
종결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애초에 계엄확대는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의 일입니다. 불법시위이냐를 운운하기전에 전

 

   두환이 무력으로 나라를 전복했다는 사실자체를 명확히 하는게 순서가 아닌가요?. 전두환 옹호론자들이

 

   자꾸 이걸 잊어먹더군요. 내란죄는 사형감이라는걸 그리고 상황이 격화되다보면 더러 있는일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말에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2.중요한건 시민군측 희생자가 100여명이 넘게 나왔고 이중에는 시위자체와 상관없는 어린아이들이나 민

 

  간인들이 다수 나왔다는것입니다. 경찰이냐 청각장애인이냐는 사실여부는 알수없지만 적어도 앞에것만

 

  으로도 계엄군은 개자식들 맞아요

 

3.사실이라고는 하더군요 더러 그일로 인해5.18을 북과 연결시키려는 발언이 나옵니다만 말그대로 팩트없

 

   는 소리일뿐입니다.

 

3-1. 백퍼센트 구라입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600명이 넘어오는것도 당연히 불가능하고 그 600명이 진압

 

        군에 섞이는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4.민주환운동입니다. 전두환의 쿠데타, 그리고 그로인해 사형판결, 역사적으로나 명분으로 보나 민주화

 

  운동 맞아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네, 맞습니다. 시위는 불법인지는 모르지만, 방화사건은 진압 요건입니다.

 

2. 청각장애인 사망이 먼저입니다.

 

3. 아니요. 주도자 자체는 없습니다. 주도자를 찾고자 하면, 광주 시민들 모두가 주도자 입니다. 북으로 넘어갔다는 자체는 말이 되지가 않습니다.

 

3-1. 논리적으로 보아도 말이 안됩니다. 왜, 북한이 광주로 목표를 하겠습니까? 예를 들며 과거 오사마 빈 라덴이 테러를 뉴욕에 한 사실을 아십니까? 911테러라고, 그가  왜 뉴욕에 테러를 한 이유를 압니까? 뉴욕은 자본주의와 미국의 상징 이고,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북한이 공격을 하고자 하면, 대한민국의 상징인 서울에 하지, 왜 촌동네인 광주에 하겠습니까?(광주 분들께 죄송하지만), 이런 이유에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북한국 개입을 탈북자가 증언 했다고 하는데, 탈북자의 증언을 모아 서로 비교해보면 말이 되지 않고요. 광주의 북한 군이 5만명이라던지, 낚시 배를 타고 왔다고 하는 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국군이 바보 인줄 아나요?, 전두환과 노태후가 짠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고위층 탈북자들께서는 여기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기고가 2시간 만에 다 알아 낸 것이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하는 데, 이거에 대한 반박은 인터넷 조그만 찾으시면 나옵니다. 무기고가 국가 1급 비밀인 줄 아시나 봐요. 요즘의 학생분들은. 군대나 가보시고 말하시지......

 

4. 저는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미국 비밀 문서가 90년대에 공개 되었는데,(미국은 문서를 작성하고 10년 후 공개, 이런 식으로 문서를 작성합니다.) 거기에는 전두환의 시나리오, 추적이 다 적혀있습니다. 그 때 미국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니까, 쿠레타를 눈 감아 준 것입니다. 이것을 증거로 하여 전두환씨를 감옥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정부에서는 민주화 운동으로 지정했습니다. 해마다 518 기념일에는 대통령들이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가 않 할걸로 비판을 받았는데요. 그렇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국무총리를 보냈습니다. 한마디로 이명박 대통령 정권도 인정해 다는 거죠.

 

죄송하지만, 잘 못 아시는 것이 있는 데, 방화 전에 무차별 진압이 일어났습니다.

책 한권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18민주화 운동이 폭동인가요?

... 광주민주화 운동 막을려고 빨갱이 프레임 씌어서... 전두환 재판 다시 한다는 내용인데 댓글 상태가 ... 않습니다 518은 우연이 아니라 조선왕조 기반지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