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급해요!!!!(우리나라 조선선박이 1등인 이유!)

진짜!!!!!!! 급해요!!!!(우리나라 조선선박이 1등인 이유!)

작성일 2012.08.2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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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가 조선선박이 세계1위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부탁드립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길지만 1950년대 부터 조선사가 나와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1) 개 요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개념의 조선산업이 도입된 것은 19세기 말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한 일본 조선업자들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조선업자들은 19세기 말부터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1910년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부산, 인천, 청진, 목포, 진남포, 충무, 원산 등 전국 주요 항구에 걸쳐 조선업을 영위하고 있었다.(표 1 참조)

<표 1>  구한말 및 한일합방 초기의 주요 조선업체
  업     체     명 소 재 지 설 립 연 도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田中造船鐵工所
  中村造船鐵工所
  谷口造船所
  岡田造船所
  佐佐木造船所
  擺谷鐵工所
  太田造船所
  岡野造船所
  大野造船所
  造船商工(株)鎭 南 浦 鐵工所
  板井造船所
  澤井造船 鐵工所
  正木造船鐵工所
  葉田造船所
  村上造船工場
  田虎造船所
부 산
부 산
서 울
부 산
청 진
인 천
목 포
부 산
목 포
진남포
충 무
원 산
군 산
마 산
포 항
부 산
1887
1902
1905
1906
1908
1908
1909
1909
1911
1911
1912
1912
1912
1914
1914
1915
자료 : 대한조선학회지

    광복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있었던 일본인 소유의 조선소들을 인수하여 우리의 조선업을 스스로 성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인 종업원들은 운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본인으로부터 인계 받았다.(표 2 참조) 곧 이어 미국 점령군 당국은 일본인 귀속업체에 대한 관리인을 임명하였으나, 관리인 제도는 단지 업체 시설의 보전 정도에 그쳤으며 조선활동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 조선업계는 경제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우리의 조선업을 새로 출발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든 기자재를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해운과 수산업의 부진으로 소량의 수리 공사도 대금 결제가 어려운 상황이 됨에 따라 업체들은 경영난에 봉착하였으며, 종사하고 있던 기술자들도 점차 조선업계를 떠나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공업 시설 및 기술 도입 등을 추진하여 경제 자립을 위해 노력하던 중 동년 5월 북한의 단전 조치와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주요 산업시설과 많은 선박이 피해를 입었으며 산업기반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선산업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부산지방 이외의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는 등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군수물자와 원조물자의 수송이 증가해 선박의 수리 및 신조 수요가 증가되고 해운업과 조선업이 재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란으로 보유선박의 약 1/3이 파괴된 상황에서 UN 군수물자와 원조물자는 폭주하였으며, 이를 수송하기 위해서 정부는 1951년부터 일본에서 선박을 도입했고 이로부터 연안수송에만 명맥을 유지해 오던 해운업계는 활력을 찾게 되었다.
한편 UN군 측의 긴급 수리공사도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밀어닥쳐 우리의 조선산업도 해방 후 처음 활기를 띄었으며, 대한조선공사를 비롯하여 대선조선 등 강선 수리능력을 보유한 조선소는 모두 수리공사에 분주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신조선은 물론 수리공사도 자재와 기술의 부족, 자본의 고갈 등으로 유휴 상태에 처했으나 UN군 함정의 수리공사 증가로 활기를 띄게 되었으며 자재난도 군공급으로 원활하게 되었다. 또한 수리선의 대부분이 용접선이었기 때문에 전근대적인 리벳(rivet) 공사에서 용접공사로 이행되면서 용접에 관한 지식과 기술이 향상되었다.
<표 2> 해방 당시 남한의 주요 조선공장
업체명 소재지 건조능력
(톤)
수리능력
(톤)
기관생산
능력(마력)
기관수리
능력(마력)
朝鮮重工業(株)
朝鮮船舶工業(株)
日出造船(株)
東亞造船(株)
釜山工作船(株)
釜山造船工業(株)
朝鮮造船工業서울사업장
方魚津鐵工造船(株)
統營造船(유)
麗水造船工業(株)
木浦造船工業(株)
鍾淵朝鮮造船(株)
浦項造船鐵工(株)
부  산
부  산
부  산
부  산
부  산
부  산
서  울
방어진
통  영
여  수
목  포
군  산
포  항
5,000
500
400
200
-
1,000
6,000
600
1,000
300
600
3,000
 500
300,000
30,000
8,500
6,000
2,000
 -
4,000
10,000
2,000
6,000
1,500
10,000
 3,000
-
1,500
 500
-
-
-
750
800
500
300
500
3,000
700
-
300
1,000
6,000
-
-
-
 2,000
 1,000
 2,000
11,000
 5,000
 5,000
합   계 19,100 383,020 8,550   33,300
자료 : 陸運十年誌(교통부 발행)
 1950년대 후반은 한국전쟁에 의해 피폐된 산업 전반에 대한 복구 작업과 이후 경제발전을 위한 분위기 조성시기였으며 조선산업도 그러한 범주 내에서 피해 시설 복구 및 소형선 건조 등을 하였으나 실적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2) 업체 현황
1950년대의 우리나라 조선업체는 특수법인체 성격의 국책 조선공장인 대한조선공사와 여타 민간 업체로 대별할 수 있는데 민간 업체의 수는 많았으나 그 시설과 능력면에서는 대한조선공사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1950년대의 조선산업은 호황기라고는 할 수 없는 시기였는데도 조선업체수는 계속 증가하여 해방 당시 56개에 불과했던 조선업체가 1951년에는 79개로 증가했으며, 1959년에는 조선, 造機, 의장품 업체수가 198개에 달하였다.(표 3 참조) 이와 같이 조선업체가 증가하게 된 것은 특이한 현상으로 이는 해방 후 일단 공장을 차려놓고 보자는 풍조와 한국전쟁 중의 일시적 호경기의 영향인 것으로 판단되며, 따라서 정부는 선박관리법을 적용, 조선업 면허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표 3> 조선업체 수 추이
연 도 조 선 造 機
의장품제조 합계
1945.8.15
1948
1951.12
1954
1957.8
1959.3
-
-
-
65
87
99
-
-
-
-
82
93
-
-
-
7
4
6
56
57
79
106
173
198
이와 같은 조선업체의 증가는 조선능력을 증가시켜 1953년 12월말에는 신조선 15천GT, 수리선 20만GT의 능력에 종업원은 1,844명에 달하였으며, 기관제조 3만HP, 기관수리 25만HP의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어서 1957년 8월말의 조선능력은 신조선 20,500GT, 수리선 175,300GT, 기관제조 6,125HP, 기관보수 247,750HP로 추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1950년대의 건조 실적은 4천GT내외로 미미했다.
한편 정부 내 조선산업에 대한 행정 주무부서는 1948년 교통부내에 해운국 행정과 검사계가 신설돼 조선업을 총괄했으며, 이후 교통부 해운국 조선과, 해무청 해운국 조선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 조선항공학과가 신설돼 인재 배출의 토대를 마련했는데, 이들 기술 인력 배출로 50년대 말에는 1백~2백GT급 선박을 독자적으로 자체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조선공법이 리벳(rivet)방식에서 용접 방식으로 발전했으며 일반조립식과 병행하여 블록 조립방식이 채용되고 있었다.


(3) 조선실적
해방 이후 1950년대의 우리나라 해운과 수산업계는 전적으로 도입된 선박에 의하여 운영되었는데, 연도별 선박도입상황을 보면 표 4와 같다. 이때 민간 소유의 수출 달러와 정부로부터의 외화 대부 방식에 의하여 소형선은 일본에서, 대형선은 미국, 노르웨이 등에서 선박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대부제도에 의하여 할당된 금액은 약 150건, 280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도입된 선박은 1951부터 1954년까지의 4년 간 324척, 39,825톤에 달하였다. 그러나 1954년 2월 19일 정부는 일본 지역에서의 물자 수입을 위한 정부 보유 달러 대부 취급을 중지하게 됨으로써 일본 지역에서의 선박 수입이 허용되지 않고 타지역에서만 도입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선박 수입은 부진하게 되었다.
한편, 수산업계에 있어서는 1950년에 CAC 원조사업으로 각종 어선과 유조선 등을 도입하였는데 1951년부터 1954년까지 4년 간 209척을 도입하였으며 1956년에는 FOA 자금 200만$로 기선저인망어선 8척 등 28척을 도입하였다.
<표 4> 선박 도입실적(1945년~1959년)
년 도 상선 어선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척수 총톤수
1945
1946
1947
1948
1949
1950
1951
1952
1953
1954
1955
1956
1957
1958
1959
7
1
32
-
-
1
3
13
4
6
5
3
16
1
-
7,860
3,100
52,900
-
-
1,500
3,490
28,057
10,479
16,163
7,350
13,610
35,292
1,000
-
-
-
-
-
1
-
108
32
79
6
21
-
6
-
-
-
-
-
-
140
-
4,846
1,141
4,639
226
805
-
150
-
-
7
1
32
-
1
1
111
45
83
12
26
3
22
1
-
7,860
3,100
52,900
-
140
1,500
8,336
29,198
15,118
16,389
8,155
13,010
35,442
1,000
-
자료 : 한국산업은행 발간 "한국의 산업"
이와 같이 1950년대 전반을 통하여 해운 및 수산용 선박의 확보는 전적으로 외국으로부터의 도입에 의존하였으므로 국내 신조선 시장이 성립될 수가 없었다. 물론 이와 같은 상황은 해방 후의 혼란기를 맞아 해운, 수산업의 경영 부재, 민족자본의 부족, 한국전쟁 발발 등 자리가 잡히지 못한 불안정한 정치, 경제, 사회 속에서 복합적으로 야기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국제적 선급협회의 검사원이 주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박수리도 일본과 같은 외국에서 많이 하였으며 그 주된 이유에는 기술의 낙후와 부품 및 자재의 구득난, 공기의 지연 등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한 군수물자와 원조물량의 수송으로 해운계가 활기를 띄면서 해운진흥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조선계획을 수립하게 되었고 목재선박이 주축이긴 하였으나 조선업계에도 업무량의 확보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어 조선보조금 지급규정, 노후선대체장려금 지급규칙, 수산업 장려보조금 지급규칙 등의 발표와 조선장려법 등의 조선장려 시책도 마련되게 되어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업무량의 확보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조선정책
(가) 조선장려법 제정

당시의 조선산업은 기자재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었던 관계로 국내 선박의 건조 가격은 국제 선가를 상회하였다. 이는 자본력이 부족한 국내 수산업자나 해운업자의 부담을 가중시켜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를 기피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해 정부는 1958년 3월 11일 조선공업육성 및 해운?수산업 진흥을 위해 조선장려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건조비의 40% 이내에서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며, 융자를 50%이상(연리 5%, 5년~10년 상환)받을 수 있게 하였으나, 예산 부족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나) 조선시설의 확장지원

정부에서는 조선산업의 중요성을 통감하였으나 당시 민족자본이 부족하여 막대한 시설 자금과 운영 자금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조선공장의 건설을 민간 업체에는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회사를 국영으로 하는 등 각종 조선공업 육성시책을 펴게 되었다. 1950년 1월 조선중공업(朝鮮重工業)의 시설을 토대로 하여 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고 1955년에 ICA자금 200만 달러와 대충자금(對充資金) 368백만 환에 의한 시설자금으로 20톤 기중기 7대 등 각종 시설을 확장하여 근대화된 조선소로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하였다.
정부는 군소 공장의 난립을 막고 조선, 조기, 의장품 제조, 선박수리 등 각 사업의 종합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1951년부터 선박관리법에 의한 사업면허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1954년에는 제8회 산업부흥국채 자금 중에서 15,000만 환을 대선철공소에 융자하여 6,000톤 급 드라이도크(109m×19m×7.7m) 1기를 축조, 연간 150,000톤의 선박을 국내 수리할 수 있게 하였으며, 소규모 조선소의 복구를 위해 1955년부터 3년 간 114만 달러(1955년 ICA자금 60만 달러, 1956년 16만 달러, 1957년 37.8만 달러)의 ICA자금으로 7개 민간 기업의 조선 시설을 확충하였다. 그리고 1955년에는 제4회 산업부흥국채자금 1,330만 환으로 방어진철공조선(주) 등 8개 사에 시설자금을 융자하여 피해시설 복구와 일반시설의 증설을 지원했다.

(다) 정부계획에 의한 선박건조 지원

정부는 1949년에 40톤~100톤 급 목재선박 100척 및 150톤 급 강선 5척의 건조계획을 수립하여 소요자금의 재원을 모색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중지되었다. 1955년에 정부보유 외화 271만 달러로 조선용 자재를 도입하여 각 조선소에 배정하였고 1956년 제4회 산업부흥국채기금에서 500백만 환, 1957년 제7회 산업부흥국채기금에서 658백만 환을 책정, 합계 1,158백만 환을 내자로 하여 총 14,400톤의 선박을 건조하였다.(표 5 참조)

<표 5>  선박 건조현황 및 지원자금
연 도 자 금 사업량 비 고
재원 내자(만환) 외자(천$) GT
1949
1955

1956

1957
계획안→중지(한국전쟁)
정부보유($)
4회 산업부흥국채
7회 산업부흥국채
소 계
雪禍부흥자금
8회 산업부흥국채
AID
정부보유($)
AID


50,000
65,800
115,800
8,690
32,331
46,648

27,710


2,710


500
2,480
500




758
4
10
44
10
12




14,400
305
1,013
1,570
740
1,590





4척 보수


기관 대치
합 계 203,505 8,125 838 19,618  
또한 1956년에는 폭설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동해 및 남해안 일대의 선박 8척에 대하여 8,690만 환을 융자하여 4척을 신조하고 4척을 수리하였으며, 1956년에는 제8회 산업부흥국채자금 500백만 환 중에서 323백만 환을 방출하여 10척에 1,013톤을 신조 또는 수리하였다. 이어 1957년에도 원조물자 및 군수품의 하역 작업을 위하여 KFX자금 248만 달러를 배정 받아 어선과 하역선박 130척(15,070톤)을 건조하기 위하여 1957년에 자재 도입을 완료하였으나 이 계획을 시행하기 위한 내자 31억 여 환을 조달할 방도가 없었고, 또한 휴전으로 인하여 여건이 바뀌어 23척(2,520톤)의 노후 여객선을 대체 건조키로 결정되었다.
이와 같이 정부는 선박건조비를 산업금융부흥채권과 AID자금으로 지원했는데, 그 조건은 자기자금부담 25%, 융자금 75%, 상환기간 7년~8년, 금리 년 12%이었다. 그러나 6년에 걸쳐서 내자 216백만 환, 외자 834만 달러를 투자하여 건조하였던 총 20,258 톤에 달하는 선박 대부분이 융자금을 제때에 상환하지 못하여 차압 공매되어 선박의 운영이 원활하지 못했다.


(5) 관련기관
1950년대에 조선산업의 발전은 부진하였으나 조선산업의 기반을 이룰 수 있는 관련 단체들은 이 시기에 대부분 발족하였다. 고급 기술자를 배출하기 위해 대학에 조선공학과가 생겼고, 대한조선학회, 한국선급협회 그리고 관련 단체인 한국선주협회가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가) 대학의 조선공학과 설치

대학과정에 조선공학과가 설치된 것은 1946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조선항공학과로 출발한 것이 처음이며, 이어 1947년 한국해양대학, 1950년에 수산대학, 1954년에 인하대학교에 각각 설치하였다.

(나) 대한조선학회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 9일 대한조선공사 기술양성소에서 창립총회를 가지고 학회가 설립되었으나, 1950년대에는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다) 대한조선공업협회

조선업자 상호간의 복리 증진을 도모하고 조선산업의 발전을 꾀하기 위하여 1948년 1월 9일 조선선박공업협회가 발족되었다. 동회는 제1차 계획조선사업, 1956년도 ICA어선 건조사업, 중소기업자금 융자알선, 주요 원자재수급 등을 담당하였다.


 

 
(1) 개 요
 1960년대에 들어 2차에 걸친 5개년 계획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대폭 확대되었으며 원양어선을 비롯하여 각종 수산업도 발전함에 따라 선박의 국내 수요가 급격히 증대되었다. 1962년 당시 군사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선질개량 3개년 계획으로 당시의 비효율적인 선박엔진을 디젤엔진으로 대체하게 하였고, 대한조선공사의 시설확장 및 근대화 계획으로 연간 6만6천여 톤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초기 경제개발은 공업구조가 취약하였던 관계로 인해 경공업 중심으로 이루어져 중화학공업인 조선공업은 특별히 발전하지 못했다.
한편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 정부는「조선공업진흥법」과「기계공업진흥법」을 제정하여 우리나라에서의 조선공업을 육성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70년대 이후 조선공업이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또한 기술적인 면에서도 표준선형의 설계를 제정하고 선질을 목선에서 강선으로 개량하면서 조선기술의 수준이 급속히 향상되었으며, 국제적 선급협회로부터도 조선기술을 인정받아 베트남과 자유중국에 선박을 수출함으로써 수출산업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조선공법도 블록 건조공법이 완전히 정착되고 용접기술의 국제수준화가 이루어졌으며 각종 조선기자재도 국산화사업에 힘입어 선박 국산화율이 크게 제고된 기간이기도 하다.
(2) 업체 현황
1962년 7월 말 등록된 조선업체 수는 강선 조선소 9개소, 목선 조선소 97개소, 선박용엔진 제조 및 수리 103개소, 의장품 제조 6개소 등 총 215개소로 1957년 8월말 173개소에 비해 20% 이상 증가했으나, 이러한 증가는 주로 群小 조선공장의 난립에 의한 것으로서 규모가 작은 국내의 조선자금과 조선인력을 더욱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또한 60년대 들어 계속 조선사업장수와 능력은 증가하였으나 건조실적이 저조하여 가동률은 20%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조선소 중 가장 규모가 큰 강선조선소인 대한조선공사는 3,000GT급 선대 3기와 500GT급 2기, 3,000GT급 및 7,000GT급 드라이도크가 각1기, 수리선대로서 300GT급 및 500GT급 인양선대가 각 1기씩 있었으며 기타 조선조기(造船造機)를 위한 각종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강선 조선소의 규모가 다른 나라에 비해 큰 것은 아니었으나 전체 조선공장이 완전 가동되면 강선 조선능력은 1962년 7월 말에 신조선 18,150GT, 수리선 305,800GT이었으며, 여타 목선조선소의 능력까지 합한 총 생산능력은 조선부문에 있어서 신조 50,973GT, 수리 645,980GT이며, 조기부문에서 신조 94,301마력, 보수 853,180마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가동은 공장시설의 20%대에 불과하여 나머지 시설은 유휴상태였다.(표 1 참조) (표 2 참조) (표 3 참조) #EAEAD5

<표1> 조선공장 현황(1961년 8월말 현재)

구 분 공장 수 생산능력
조선 造機
합계 조선(톤) 수리선(톤) 기관제작(HP) 기관수리(HP)
인 천
장 항
군 산
목 포
여 수
부 산
포 항
묵 호
제 주
8
2
4
8
7
45
7
15
3
7
3
9
7
6
42
8
4
2
15
5
13
15
13
87
15
19
5
5,200
500
1,100
1,750
1,950
24,160
2,900
7,030
700
1,700
1,100
3,200
12,960
15,800
521,760
20,200
57,800
5,400
13,200
2,800
-
1,050
2,550
32,370
1,880
505
500
28,000
9,200
9,800
26,580
14,600
813,620
19,100
22,100
3,000
합 계 99 88 187 45,290 639,920 54,855 946,000

자료 : 상공부

<표2> 조선소별 생산능력(1962년 7월말)
업   체   명 소 재 지         생   산   능   력
    신    조     수    리
大韓造船公社
釜山造船 工業株式會社
朝鮮 船舶工業株式會社
大榮 造船鐵工所
防禦陣 造船鐵工所
慶南 造船所
朝鮮 機械製作所
大鮮造船 鐵工所
大林 造船所
    부  산
    부  산
    부  산
    부  산
    울  산
    부  산
    인  천
    부  산
    인  천
     10,000
        700
      1,000
      1,200
      2,000
        250
      1,000
      1,000
      1,000
     10,000
     28,800
      7,200
     54,000
     16,000
      4,800
      6,000
     84,000
      5,000
합                계      18,150     305,800
<표3> 1960년대 조선능력 및 가동율 현황
연도 조 선 능 력 건 조 실 적 가동율
(%)
최대 건조선
(GT)
공장수 GT GT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06
100
104
111
115
115
133
139
152
140
   41,700
   49,700
   53,640
   63,440
   80,710
   87,750
 123,320
 157,100
 187,000
189,900
   295
   334
   312
   358
   397
   253
   485
1,083
  717
  590
   4,636
   8,869
 11,625
 13,788
 17,683
 19,944
 31,148
 37,804
 39,100
43,310
 11.1
 17.8
 21.7
 21.7
 21.9
 22.7
 25.3
 24.1
 20.9
22.8
     200
     500
  2,400
  4,000
  4,000
  5,000
  6,100
 12,000
 12,000
12,000
자료 : 상공부
 
 
(3) 조선 실적
196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적극적인 추진은 우리나라 경제의 규모를 급속히 확대시켰으며, 이에 따라 선박의 수요도 급증하게 되어 1962년의 7,904GT에서 1969년에는 270,968GT으로 약 33배의 증가를 나타냈다. 그러나 총수요 중 국내 건조 비중은 갈수록 낮아져 1차 계획 기간 중에는 30%를 국내에서 건조한데 비하여, 2차 계획 기간 중에는 15%에도 못 미치는 13.5% 수준에 그쳤다.(표 4 참조)
도입 선박 중에는 상당수가 국내 건조가 가능하였는데 이는 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해운 및 어업에도 민간차관 형식으로 경제협력 자금의 상당 부분을 배정지원을 받게 된 반면 무상원조의 대일청구권 자금에서는 불과 20톤 급 미만의 연안어선 건조자금밖에 지원을 얻지 못한데 그 원인이 컸다.
이외에도 차관 연불수입에 의한 구입자금 조달의 용이성, 중고선 도입으로 인한 자금절약, 수입 선박에 대한 면세, 국내건조선박의 가격과 품질에 대한 문제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표4> 1960년대 선박수급 현황
   연 도  국내건조(GT)   도입(GT) 총수요(GT)   자급도(%)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4,636
     8,896
    11,625
    13,788
    17,683
    19,944
    31,148
    37,804
    39,100
    43,230
     3,268
     1,514
      709
    60,855
    67,086
   266,559
   187,026
   233,164
131,921
   194,861
     7,904
    10,383
    12,334
    74,673
    84,769
   286,503
   218,174
   270,968
   171,021
   2,238,171
    58.7
    85.4
    94.3
    18.5
    20.9
     7.0
    14.3
    14.0
    22.9
    18.2
 
 
(4) 조선정책
(가) 수출산업화의 기반구축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1960년대의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목선건조에서 강선건조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동 시기는 조선산업의 수출산업화를 위한 착실한 준비 기간이었으며 근대화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1966년 대한조선공사가 자체기술로 건조한 2,600GT급 화물선이 최초로 미국선급협회(ABS)의 검사에 합격했으며, 이에 힘입어 선박 수출에도 시야를 돌려 대한조선공사와 대선조선은 바지선 30척을 1967년에 최초로 베트남에 수출하였다. 정부는 1968년부터 선박 수출을 계획하여 그 해에 1,600만$의 수출목표를 세우고 1971년에는 53,750GT를 수출하는 장기계획을 마련하였다. 1969년에는 250GT 참치어선 20척을 대만에 수출하게 됨에 따라 해외 진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아울러 해외시장 개척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선박의 대형화 추세가 진행되었는데 우리나라도 최소 10만톤 급 이상의 선박건조능력을 갖춘 조선소를 검토하게 되었다. 국영의 대한조선공사는 오랫동안 적자운영을 면치 못하다가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1968년에 민영화되었고 자본금도 30억 원으로 대폭 증자하였다. 또 시설확장계획을 수립하여 제1단계로 1972년 8월까지 12,000DWT급 도크를 6만DWT급 수리용 도크로 확장하고 기존선대 6,000DWT 2기를 60,000DWT급으로 확장키로 했으며, 2단계로 최대 25만DWT급 도크의 건설을 계획하였다.

(나) 조선업 장려책

대부분의 선박용 기자재를 수입해야 하는 등의 이유로 자본력이 부족한 국내 수산업자나 해운업자는 국내 건조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이미 건조비의 40% 이내의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조선장려법을 제정한 바 있었으나 예산 부족 등의 사유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중 5.16혁명 후 정부는 강력한 조선장려책으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시책을 답변확정하였다.

① 건조자금 구성 : 실수요자는 총건조비의 10%에 해당하는 자기자금을 부담케 하고 보조금 40%, 융자금 50%의 비율로 건조비를 구성.
② 정부보증융자 조치 : 실수요자의 담보물 결여에 의한 사업의 지연을 막고 실수요자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선박 건조기간 중에는 정부보증 융자로서 공사를 시행하고 완공 후 건조된 선박만을 후취담보.
③ 이자율 경감과 상환 기간의 연장 : 융자금의 이자율을 년 5%, 상환기간을 15년으로 연장하여 수요자의 연간부담금을 경감.
④ 도입선용 원자재의 관세면제 : 철강재, 목재 등 수입되는 조선용 기자재의 관세 면제를 통하여 선박 건조비를 절감.
⑤ 대한조선공사의 재건 : 우리나라 최대의 조선 시설을 보유하고 연간 1만GT의 강선 건조 능력을 갖춘 대한조선공사가 누적된 부채로 막대한 경영상의 애로를 겪고있는 상황이어서 5개년 계획 수행에 차질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정부는 1962년 4월 법률 제1064호로서 대한조선공사법을 공포하여 주식회사의 체제였던 동사를 완전히 국영기업체로 개편.

(다) 수산개발, 선질개량, 선박도입에 대한 3개년 계획

1964년도에 정부는 자금 사정이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산개발, 선질개량, 선박도입에 대한 3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수산개발 3개년 계획
- 연승어선, "스턴트롤"工船, 어업母船 등 227척 건조를 위하여 13,700만 달러를 차관
- 대중형기선, 저인망어선, 포경선 등 589척을 건조하기 위하여 5,264만 달러를 차관
- 연안어로형 어선 5,632척의 동력화
- 저성능기관 어선 4,748척의 디젤기관화를 위하여 5,264만 달러를 차관
② 선질개량 3개년 계획 : 국내 선박의 70% 이상이 노후화하여 경영 적자 요인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비능률적인 hot engine의 디젤기관화와 노후 해체의 보수를 추진.
③ 해운선박도입 3개년 계획 : 외항 수송 수요량 증가에 따라 정부는 국내화물을 국내선박으로 수송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175천GT의 선박도입을 추진.

또한 1965년도에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에 의한 조선계획을 포함, 선박수요처인 농림부와 교통부의 선박수요량을 연도별, 선종별, 톤수별로 확정하고 대형 선박의 국내건조 공급을 위한 기존 시설의 확장 및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대한조선공사에 대한 시설확장 및 근대화 작업(최대건조능력 13,000GT, 연간능력 66,000GT, 자본금 10억 원에서 30억 원으로 증자)에 착수하는 한편 정부는 대일 청구권자금을 이용해 어선의 건조 및 도입을 시행했다.(표 5 참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최종 연도인 1966년에 있어서의 조선공업은 예년에 비해 상당한 활기를 띠었다. 이것은 어선의 근대화에 따라 연안 및 원양어업 진출을 도모하려는 어업계의 동향과 대일청구권자금 중 어업협력자금에 의한 선박건조 및 도입계획이 수립된 데 비롯되었다. 당초 대일청구권 무상원조자금의 어업협력자금 제1차 연도 사용액 899만 달러 중에서 어선도입자금으로 360만 달러가 배정되었으나 실제 도입실적은 없었다. 어선건조자금으로 424만 달러가 배정된 것은 1966년 말 146만 달러의 조선용 자재와 9.3만 달러의 어선동력 개량을 위한 자본재의 도입으로 155만 달러에 해당하는 물자만이 도입되어 이것이 조선공업 생산 활동에 기여하게 되었다.

<표5> 대일 청구권자금에 의한 어선건조 및 도입실적
구분 사업내용 도입기자재 규모 및 수량 도입액(천$)


 어   선
 건   조
기선저인망

근해어선
연안어선



어선건조자재 일부 및 기관,
강판, 의장품
근해어선 건조자재
건조자재 일부
삼재 3,840㎥
기관부문 310대분
발전기 260대분
100톤급 28척
50톤급 35척
70톤급 6척
소형어선 514척
(4,686톤)
중형어선 776척
(20,675톤)
2,104
-
-
277
5,986
-
-
 도입어선 대형기선저인망
선망어선
2수인 저인망어선
선망어선단
100톤급 16척
70톤급 18척
1,871
1,727
합                     계 총 33,490톤
1,392척
11,915
자료 : 경제기획원
(라) 표준선형의 제정

한편 1965년에 상공부는 대한조선학회에 표준선형의 설계를 의뢰함에 따라 1971년까지 대한조선학회는 조선공사를 비롯한 현장설계 기술진, (주)한국해사기술 설계진, 한국선급협회,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각 대학 등 각 분야 조선설계자의 협력으로 근해어선, 원양어선, 연안객선, 연근해유조선, 화물선 및 원양화물선 등 65여 종의 중소형 표준선형의 기본설계를 수행하였다.
선형 및 선종에 따라 선박안전관계 규정과 한국선급협회 규정에 맞도록 설계하였으며 1,000GT급 이상의 화물선, 유조선 등은 향후 미국 선급협회 입급을 예상하여 ABS규정에도 부합되는 구조로 설계를 진행하여 계획조선의 실시와 설계기술의 향상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선박의 건조가 동일한 선종?선형이라 해도 선주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사양을 갖게 되므로 양산할 수 없는 게 보통이지만 일시에 많은 선복이 요구될 경우 표준선형 설계에 의한 계획조선을 실시하여 조선산업 뿐만 아니라 해운업 발전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었다.
표준선형 설계에 의하여 건조하는 경우 소요되는 자재와 공정 표준화 및 단순화가 가능하므로 선박의 질적 향상과 공기의 단축, 선가절감을 꾀하고 설계기술이 빈약한 그 당시 각 조선소에서도 기 작성된 표준에 의거 건조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기술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으며 또한 계획조선으로 조업도의 향상을 기하려는 목적이었다.

 
 
(5). 조선기술
목선을 주로 건조한 1950년대는 물론이고 1960년대 전반의 우리나라 조선기술은 선진국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6년 대한조선공사에서 2,600GT급 화물선을 자체 기술진의 힘으로 건조하여 ABS로부터 품질인증을 받고 1968년에는 4,000GT급 화물선을 건조하여 ABS와 KR의 검사에 합격함으로써 국내 조선기술이 점차 국제 수준을 향하여 전진하게 되었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중 정부는 조선기술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표준형선을 연차적으로 제정, 발표하고 선박용 중소형 디젤기관 제작, FRP선제작 기술개발, 통신기기 및 탐지기 제작, 특수 용접봉 제작 등 각종 관련기기의 국산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대한조선공사의 기술자 양성소를 활용하여 조선기술자의 양성을 후원하였다.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도 조선업체에 대한 기술자료 제공, 공정개선을 통한 원가절감책 권고 등의 기술지원을 적극 추진한 결과 1960년대 후반에는 선체부문에 있어서 신공법이 확보되었으며 블록 건조법이 완전 정착되고 용접기술의 국제 수준화, 표준형선의 설계를 통한 설계기술의 향상 등이 성취되고 공기 단축 및 원가 절감 면에서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이외에도 1968년 11월 6일 민영화된 대한조선공사는 시설 확장에 대비하여 1만GT급 선박의 설계 및 건조, 2만GT급 선박의 수리, 용접의 자동화 및 고속화, 선박 하역장치의 자동화, 특수선박 건조, 냉동장치의 국산화, 어선의 어로장치 개선, 경금속 및 합성수지 의장품 제작, 선박용 유압기계의 국산화, 특수합금의 제작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서 기술 개발을 적극 추진하였다.(표 6 참조)

<표6> 제1,2차 5개년계획 기간중 조선기술 개선사항

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 조선용 디젤기관 (소형) 제작
- FRP선 기술개발
- 통신기기, 어군탐지기 제작, 특수용접봉 제작
   등 각종 관련기자재의 국산화 추진
- 블럭 건조방법 답변확정
- 의장품규격 표준화(KS) 시행
- 표준선 세부설계
- 조선용 기호, 약호 통일안 작성
- 10,000GT급 선박설계 및 건조
- 20,000GT급 선박의 수리
- 용접의 자동화 및 고속화
- 선박 하역장치의 자동화, 냉동장치의 국산화, 어선
   의 어로장치 개선, 선박용 유압기계의 국산화 등 기
   자재부문 기술 수준 향상
  
 
(6). 관련 기관
(가) 한국선급협회

사단법인 한국선급협회는 1960년 6월 20일 국내 해운, 보험, 무역, 조선업계 및 해운기술계와, 조선기술계의 권위자가 설립 필요성을 인식하여 발기인회를 개최하면서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0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1) 개 요
세계 조선산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대 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이는 선진국간의 교역량이 크게 늘어나 중화학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원자재와 석유 수요증가에 따른 해운업의 발전에 기인하였다. 특히 1967년의 수에즈운하 폐쇄로 세계 최대의 석유 공급지인 중동에서 구미제국으로 수송되던 원유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우회해야 함에 따라 세계 조선시장에는 20만DWT급의 초대형 유조선 수요가 급증하였으며, 조선업계는 이에 대응하여 영국의 Harland & Wolf, 네덜란드의 Verome, 덴마크의 Odense 조선소들이 1970년대를 대비하여 100만DWT급 이상의 초대형 도크 건설에 나섰으며 일본 역시 미쓰비시중공업이 고야끼 조선소에 100만DWT급 규모의 초대형 도크를 건설하는 등 경쟁적인 시설 확장이 이루어졌다.
한편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정부가 추진한 수 차례의 조선공업 육성시책은 내수 중심의 소형 선박 건조 확대에 그쳤으며 시설 근대화 및 국제경쟁력을 갖춘 선박 개발 면에서는 답보 상태에 있었던 것이 한국의 조선산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1980년대의 자주 경제를 완성하고 고도의 경제 구조를 이룩하려는 한국 경제의 성장에 있어서 조선산업의 역할과 기여는 1970년대를 통하여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였다. 1960년대가 조선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 조성기였다고 본다면 1970년대는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에서 주요 육성산업으로 답변확정되어 국가의 재정적 지원 아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던 도약기로 볼 수 있다. 1973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완공을 필두로 주요 대기업들이 대형 조선시설을 건설해 조선업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 조선은 후진성을 완전히 탈피하여 일약 국제적 규모로 성장, 현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75년 수리조선 전문인 현대미포조선이 설립되었고, 1978년 대한조선공사는 옥포에 초대형 제1도크를 완공하였으나 후에 대우그룹에 매각하게 되었으며, 삼성그룹은 1977년에 우진조선소를 인수, 1979년 1도크를 완공했다. 특히 현대중공업은 1973년 조선소 준공과 더불어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VLCC)을 건조, 우리나라 조선업은 본격적으로 세계 조선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1976년에는「해운조선종합육성방안」의 일환으로 우리 선박은 우리 조선소가 건조하고 우리 화물은 우리 선박으로 수송한다는 목표 아래 계획조선이 실시되어 조선산업 육성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1973년에는 선박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77년에는 한국조선공업협회가 설립되었다. 이 같은 1970년대의 고속 성장은 대형 조선소의 대규모 설비 투자로 이어졌으며 1980년대 들어 불어닥친 세계 해운조선 장기 불황과 맞물리면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2) 업체 현황
1970년대는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 다져진 기간산업을 기초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부터 적극 추진된 중화학공업정책을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조선공업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 초대형 조선소의 등장
1970년까지 우리나라 조선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온 대한조선공사의 시설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 조선소 건설계획을 1970년 9월에 현대건설(주)이 추진하면서 현대의 울산조선소가 태동하게 되었다. 처음의 계획은 10만GT급 도크 1기, 6만GT급 및 3.5만GT급의 선대 각1기를 건설하려 했으나 당시의 세계조선시황이 대형 유조선의 수요가 많았고 정부도 국제 규모의 조선소를 4대 핵심 공장의 하나로 지정하여 적극 육성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소 건설계획을 완전히 변경하여 최대선 건조 능력 50만DWT급의 시설 능력을 갖추어 연간 26만DWT급의 VLCC 5척을 건조, 전량 수출토록 계획하고 1972년 3월 역사적인 초대형 조선소의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건설공사가 진척되면서 다시 규모가 커져서 최대선 건조 능력이 70만DWT급으로 확장되고 35만평 부지에 383m × 80m × 12.7m의 도크 1기, 1,050m 의장안벽, 450톤 goliath crane 2기 등의 주요시설과 강재전처리시설, 광선추적식 절단기, N/C 절단기, 자동용접 및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된 판넬라인 조립장 등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대규모의 조선소로 1974년 6월 준공되었다.
또한 이상의 1차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1973년 3월 정부의 「장기조선공업 진흥계획」에 따라 동 조선소의 시설 능력을 배가하여 100만DWT급 유조선을 건조할 수 있는 초대형 조선소로 확장하는 2단계 공사가 추진되어 503m × 80m × 12.7m 도크 1기, 642m × 92m × 13.4m 도크 1기와 450톤의 goliath crane 4기, 1,500M의 의장안벽 등의 시설을 확보함으로써 단일조선소로서는 세계 최대규모인 초대형조선소가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동 조선소는 조선소 건설을 기공하기도 전에 그리스에서 수주한 26만DWT VLCC 2척을 조선소 건설공사와 병행하여 1973년 3월부터 건조하기 시작하여 1974년 11월에는 제 1호선인「아틀란틱 배론호」를 선주 측에 인도함으로써 국제적인 조선소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73년 3월에 확정된 ?장기조선공업 진흥계획?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정부에서는 1980년도를 조선공업의 수출 산업화 완성시기로 잡고 1976년까지 조선 능력을 260만GT로 대폭 확충하기 위하여 현대조선소 외에 세계 최상위 수준급의 초대형 조선소 2개와 150천GT급의 중형조선소를 건설하고 중형조선소를 중심으로 군소 조선소를 대폭 통합, 계열화하여 세계 수준의 중형 전문 조선소로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조선공사는 1973년 2월에 8천DWT급 도크를 6만DWT급으로 확장하였으며, 현대조선소도 연간능력을 2백만GT로 확충함으로써 최단 시일 내에 세계 유수의 대형조선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또한 대한조선공사는 거제군 옥포에 연간능력 120만GT, 최대선 건조능력 100만DWT급의 옥포조선소를 1973년 10월에 기공하였으나 1978년 8월에 대우그룹이 인수하여 1981년 10월에 조선소를 준공하였으며, 고려원양(주)에서는 거제군 죽도에 연간능력 150천GT의 고려죽도조선소를 1974년 말에 기공하였으나, 1977년 4월에 삼성그룹이 인수하여 1979년 12월에 제1도크의 건설을 완공하였다. 이러한 신조선능력의 확장과 더불어 수리선 전담시설도 대폭 확장시켜 최대선 수리능력 700천DWT급의 현대미포조선소를 1976년 울산시 전하만에 완공시켰다.
한편 정부의 장기조선공업진흥계획과는 별도로 1972년 6월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연간 건조능력 15천GT급 규모로 강선과 알미늄선을 건조할 수 있는 코리아타코마조선소가 설립되었으며, 울산시 용잠동에는 연간 건조능력 100천GT급 규모로 화학물운반선 건조를 전문으로 하는 동해조선소(현 한진중공업 울산조선소)가 설립되어 1976년부터 강선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표 1 참조)
<표19> 대형조선소 건설 상황
 회       사 건        설       상       황
현대중공업(주) - ’72. 3  : 건설 착공
- ’73.12 : 조선소 건설 완공
- ’74. 6  : 26만DWT급 VLCC 건조
- 사  업  : 신조선 건조외 PLANT, 해양구조물 부문
(주)현대미포조선 - ’75. 3  : 제1공장 착공
- ’75. 4  : 현대미포조선소 설립
- ’75. 7  : 조업 개시
- ’81. 7  : 제2공장 건설 착공
- ’82.11 : 제1공장 현대중공업(주)에 매각
- 시  설  : 세계 최대 수리전문 조선소로 6만DWT급 선박을 나란히 입거 할 수
               있도록 도크 폭을 65M로 함
대우중공업(주) - ’73. 8  : 대한조선공사가 착공
- ’73.10 : 1차 유류파동으로 공사 지연
- ’78. 8  : 제1도크 완성
- ’78.12 : 대우그룹 인수
- ’81. 1  : 부대설비 완공
삼성중공업(주) - ’74. 3  : 고려조선(주) 설립
- ’74.12 : 조선소 건설 기공
- ’77. 3  : 우진조선(주) 인수
- ’77. 4  : 삼성그룹 인수
- ’79. 9  : 공장가동 개시
- ’79.12 : 제1도크 완공
- ’83. 3  : 제2도크 완공
이와 같이 1970년대에 들어 신규 대형?중형?조선소들의 건설과 아울러 기존 조선소의 시설 확장으로 우리나라의 연간 건조능력은 1972년 190천GT에서 1976년에는 2,600천GT로 대폭 증가되었으며 옥포조선소와 죽도조선소가 완공되면서 세계 2위 조선국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산업 관련 공장 수는 60년대까지는 수적으로 증가하였으나, 70년대 중반에는 조선업체의 정비 개편으로 감소 경향을 보였다. 조선 능력은 현대조선소의 준공 및 확장으로 1974년에 100만GT를 돌파한 후 70년대 말에는 280만GT 수준에 이르렀으며, 건조량에서는 1974년에 VLCC 건조로 56만GT를 기록한 후 계속 60만~70만GT를 유지함으로써 세계 상위권 조선국으로 발돋움했다.(표 2 참조)
<표2> 70년대 업체현황
 연  도  공 장 수  시설능력
  (천GT)
건조량
(천GT)
 가동율(%) 최대건조선
  (천GT)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52
  140
  141
  143
  142
  139
  118
  130
  142
  153
    187
    190
    190
    250
  1,100
  2,390
  2,600
  2,670
2,770
2,800
     39
     43
     50
    163
    562
    612
    624
    643
    769
    525
    20.9
    22.8
    26.6
    65.4
    51.1
    26.6
    26.3
    24.1
    27.8
    18.8
     12
     12
     14
    126
    126
    126
    126
    126
    126
    126
 
 
(3) 조선 실적
우리나라의 신조선 건조 실적은 1960년대 이후 꾸준한 증가를 보여왔으나, 특히 정부가 조선공업을 중화학공업 핵심 산업의 하나로 선정하여 중점적인 지원을 시작한 제3차 경제개발계획기간 중에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로이드 선급협회에서 발표하는 세계조선 통계를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건조 실적이 1973년부터 게재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조선공업이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며,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때가 이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조선공업협회가 집계한 우리나라의 신조선 건조 실적은 1973년에 34척에 12천GT, 8백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5년이 지난 1978년에는 208척에, 769천GT, 648백만 달러로 수십 배나 증가하였다. 한편 국내선 대비 수출선의 건조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어 대부분의 산업이 내수를 바탕으로 성장한 후 수출에 진출한 여타 산업과는 달리 성장 초기부터 수출을 위주로 발전하여 왔다.(표 3 참조)
한편 회사별로는 1974년에 첫 번째 선박을 인도한 현대중공업은 1974년의 건조실적 137,692GT에서 1979년에는 383,762GT로 2.8배 성장하였으며, 현대중공업과 대한조선공사의 건조 실적이 우리나라 전체 건조 실적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표 4 참조)
<표3> 우리나라의 신조선 건조량 추이
구분 국  내  선 수  출  선 합      계
GT 천$ GT 천$ GT 천$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29
42
34
44
84
140
97
77
10,373
18,519
14,064
302,114
89,478
151,409
221,086
190,482
5,619
9,720
 8,817
 53,039
 73,993
104,399
190,216
190,877
5
21
13
53
108
68
56
27
1,635
201,832
416,003
551,294
553,660
617,525
304,107
464,449
2,003
73,552
137,346
298,086
472,396
543,976
372,396
353,436
34
63
47
97
192
208
153
104
12,008
220,354
430,067
853,408
643,138
768,934
525,193
654,931
7,622
83,272
146,163
351,125
546,389
648,375
562,612
544,313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표4>회사별 신조선 건조실적
단위 :GT
회사별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현  대
 조  공
 삼 성
 타코마
 동 해
 대 동
 대 선
 신 아
 부 산
 인 천
 기 타
  -
2,980
-
-
-
2,195
5,628
-
485
-
 -
137,692
16,040
-
-
-
7,390
9,854
1,750
1,950
-
675
346,485
61,518
-
1,140
-
11,460
727
2,666
5,881
-
190
768,935
53,544
 -
 -
625
19,760
6,070
2,730
447
142
 1,155
505,568
76,322
-
600
2,529
15,353
16,880
1,670
1,600
908
 1,708
614,790
116,694
 -
1,370
1,599
10,137
8,353
6,841
2,887
2,028
4,235
383,762
103,060
-
1,666
3,929
8,292
9,071
5,060
5,731
2,267
 2,360
518,565
60,448
13,858
252
13,629
23,099
9,365
7,640
4,540
3,135
 400
 합   계 12,005 220,351 430,067 853,408 643,138 768,934 525,193 654,931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4) 조선정책
70년대 전반에는 현대의 초대형 조선소 건설, 후반에는 지금의 삼성중공업과 대우중공업의 조선소 건설로 국제 경쟁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시설 확대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계획조선제도 및 연불수출제도의 실시 등 정부의 각종 지원책이 조선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우리나라 조선공업은 이러한 정부 지원에 힘입어. 세계적인 조선 불황으로 시설의 감축 및 도산하는 업체가 증가해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60년대만 해도 전근대적인 조선 불모지 상태였던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불과 10여 년 사이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1979년에 수주량기준으로 세계 2위 조선국으로 발돋움하였으며 공업한국의 상징으로 부상됨으로써 조선입국이라는 정책 의지가 짧은 기간 내에 구현되었다.
(가) 조선공업진흥계획

정부는 선박의 국내 자급률 향상과 국산화율 제고 및 선박 수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1970년 2월에 「조선공업진흥계획」을 수립하였으며 동 주요 시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제품 수급에 있어서는 1970년에 56,200GT의 선박을 건조하여 이중 2만GT은 수출하고 36,200GT는 국내 공급한다. 자급률은 전년의 18.5%에서 23%이상으로 제고시키며 선박용기관 중 소형엔진과 船外幾는 국내 생산으로 완전 충당하고 중형엔진은 수요의 28%이상을 자급토록 한다.
② 대한조선공사의 최대선 건조 능력을 10만GT급 규모로 확대하는 한편 중소조선업체의 시설을 경제단위화함으로써 국제 경쟁력을 배양한다.
③ 대한조선학회로 하여금 10개종의 표준선 설계도를 제정 보급토록 함으로써 건조기간의 단축과 선가 절하를 꾀하며 관련 공업을 육성시킴으로써 국산화율을 제고시킨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를 위한 자금 지원으로 재정자금 11.9억 원과 기계공업육성자금에서 8.8억원을 합쳐 총 20.7억 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별도로 산업금융채권 판매대전을 재원으로 3천만 원을 설비 근대화에 투입하였다.

(나) 장기조선공업 진흥계획

조선공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며, 전후방 관련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종합조립산업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위하여 가장 적합한 산업 중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당시에 서구 제국의 조선공업은 노임의 급등, 시설의 노후 등으로 사양화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역시 노임 등의 문제로 압박을 받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풍부한 저임의 노동력과 조선공업에 양호한 입지조건 등 기본적인 요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1973년 3월에 조선공업 육성에 관한 거대한 내용을 담은 ?장기 조선공업진흥계획?을 수립하였다. 조선공업의 육성계획의 목표는 1980년까지 국내수요 선복을 자급하고 320만GT(10억 달러)의 선박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1980년과 1985년의 건조 능력을 각각 545만GT, 920만GT이 되도록 하며, 수출선의 점유비는 1980년에 9.4%, 1985년에 17.2%로 제고되며 또한 1980년에 70만GT, 1985년에 120만GT로 추정되는 국내 수요 선복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기존 조선소의 시설을 확장하고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연간 생산 능력 15,000GT, 최대선 건조 능력 6천DWT인 원양어선 조선소 2개소, 연간 능력 25만GT, 최대선 건조 능력 10만DWT인 중형조선소 2개소, 연간 능력 75만~100만DWT의 능력을 보유하는 대형조선소 5개소 등 합계 9개 조선소를 건설하고, 1981년부터 1985년 간 중형조선소 2개, 대형조선소 3개를 추가로 건설하고, 이외에도 수요에 따라서는 원양어선 조선소도 건설토록 되어 있었다.
또한 일정한 지역에 조선소를 집단화하면 정부지원시설, 훈련기관, 문화시설의 공동 이용에 따른 투자 절감과 효율의 극대화 등을 이룰 수 있어 대형조선소의 건설단지로서는 입지조건이 양호한 거제도를 중심으로 충무지구를 조선공업 지구로 정하고 이 지역에 1985년까지 초대형 조선소(연간능력 150만GT) 3개, 대형조선소(연간능력 100만GT) 3개, 중형조선소(연간능력 25만GT) 2개를 건조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 계획에 따라 정부는 1973년 5월에 거제, 충무조선공업단지를 설정?공고하였고, 동년 7월에는 동지구의 기준 지가를 공고함으로써 본격적인 실천으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웅대하게 설계된 장기 조선공업진흥계획은 그 초기 단계인 1973년 말의 유류파동 이후 불어닥친 세계적인 조선 불황으로 인해 그 일부는 보류되면서 계획이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① 연불수출제도 실시
1973년의 유류파동 이후 조선 불황이 심각해지자 일납불 수출 형태를 취하여 왔던 선박 수출은 세계적으로 연불 수출 형태로 바뀌게 되었으며, 연불 수출 조건도 착수금 비율, 융자기간, 금리조건 등에서 점차 선주에게 유리해졌다. 이러한 연불 수출은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적정 조업량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1976년에는 이전의 한국외환은행 대행체제에서 수출입은행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연불 수출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7년에는 이전의 6년 간 지원총액인 1,258억 원에 가까운 1,152억 원을 지원했으며, 이후에도 연불 수출 자금 수요는 더욱 증가했다.
수출지원금융은 선박 수출에 집중되다시피 하여 전체 대출의 80%~90%를 차지하고 있었다. 1976년 3월29일 연불 수출 금융지원기준을 발표, 중화학공업 연불 수출에 대한 선별 지원을 강화했다. 지원 기준은 융자대상 품목을 선박, 철도차량, 플랜트, 산업기계로 축소하고 연불 조건은 선수금 20%이상(선박은 30%이상)으로 했다. 또 대출 금리는 연 7% 이상으로 하고 융자비율은 연불 수출 선적 전후 융자소요액의 80%로 정했다.(표 5 참조)

<표 5>80년대 연불 수출자금 대출집행실적

연 도 수출자금
(A)
선  박 (B) 플랜트 선박,
플랜트(C)
기  타 점유비(%)
B/Ax100 C/Ax00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296,280
 504,413
 634,486
 667,903
 831,293
 840,124
 612,850
 484,349
 533,282
 409,631
 251,691
 445,589
 492,652
 473,114
 741,735
 675,138
 362,054
 362,790
 438,312
 400,407
  37,996
  44,965
 135,340
 185,599
  89,138
 161,340
 247,541
 107,975
94,002
   7,24
 289,687
 500,554
 627,992
 658,713
 830,873
 836,478
 609,595
 470,765
 532,314
 407,649
   6,593
   3,859
   6,494
   9,190
     420
   3,646
   3,255
  13,584
     968
   1,982
   84.9
   88.3
   77.6
   70.8
   89.2
   80.4
   59.1
   74.9
   82.2
   97.7
   97.8
   99.2
   99.0
   98.6
   99.9
   99.6
   99.5
   97.2
   99.8
   99.5

자료 : 한국수출입 은행

 
 
② 계획조선의 추진
계획조선이라 함은 정부의 재정 및 금융지원에 의해 선박을 건조하는 것으로 그 실수요자를 정부에서 선정하여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을 말하며, 1974년 4월의 「외항해운육성방안」과 1976년 3월의 「해운?조선 종합육성방안」에 의해 197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해운진흥법」의 개정으로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여 제도화 시켰다.
1974년에 계획된 100억 달러 수출, 수송체제 확립을 위한 「외항해운 종합육성방안」은 1976년~1981년까지 6년 간 외항선 350만GT을 증강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중에 22.5만GT는 계획조선으로 국내에서 건조하고 125.2만GT는 수입(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 포함)토록 되어있었다. 이러한 계획조선사업은 1976년 3월에 「해운. 조선 종합육성방안」에 의해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화되었으며 선복증강계획도 다소 조정되었다. 당시의 여건이 해운업에 있어서는 선복량의 절대부족으로 18%(운임기준)의 낮은 적취율과 수지 악화를 초래하였으며 3차 5개년 계획 기간 중 외항선의 국내 건조는 2%인 반면 수입은 98%로 대부분 중고선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업계는 대폭적으로 시설 확장을 하였으나 조선 불황으로 수주량이 급감하여 조선의 육성을 위해서라도 대책이 필요한 시기였다.(표 6 참조)
해운?조선 종합육성정책의 기본 방향은 첫째, 우리 화물은 우리 손으로 둘째, 우리 선박은 우리 조선소가 건조 셋째, 해운업/조선업/화주의 연계육성 넷째, 후방 관련공업의 개발 촉진 다섯째, 해운?조선의 국제경쟁력 강화 등 5가지로 외항선은 수요의 75%, 내항선은 전량 계획조선으로 확보함으로써 조선 불황 시에도 최소 건조량을 유지하도록 목표를 세웠으나 1976년 9월에 계획조선 세부시행계획에 의하여 이들 목표가 조정되었다. 이 계획은 지원 자금의 확보 문제로 당초 해운?조선 종합육성방안의 계획치보다 축소 조정되었다.
계획조선은 표준선형의 개발에 의한 국산대체, 국내 조선소의 생산성 향상 및 설계능력 제고, 각 조선소의 안정적인 가동률 유지를 위한 업무량 확보, 국적선 적취율 제고에 의한 해운의 국제수지 개선 및 운송권 확보라는 여러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책 지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선박건조에 소요되는 자금의 대부분을 국민투자기금 또는 계획조선자금 등의 내자와 외화대부, 전대차관, 상업차관 등의 외자로 조달했다. 따라서 자기 자금부담율은 컨테이너선이 8%, 기타선이 10%에 지나지 않았으며, 금리도 11%로서 일반대출보다 저리였다. 둘째, 강판 가격의 인하, 물품세, 직물류세, 석유류세 등 내국세의 면제 등을 실시하여 선가의 8% 인하 효과를 거두었다. 셋째, 주요 정책 물자의 수송권을 확보하고 적정 운임율을 보장했다. 제1차 계획조선에 의해 건조된 선박 중 벌크캐리어 선주에게 5년 간 수입비료원료 수송권을 부여했고 운임율도 시장 운임율에 비해 높은 가격으로 계약토록 지원했다.
<표6>. 한국 조선/해운 종합진흥계획의 大綱(1976년 32차 경제장관회의)
A. 자금조달 원칙
자기자금부담비율 10%(FULL CONTAINER선 8%)
 차
 입
 자
 금
구       분 내           자 외         자
재       원 국민투자기금, 산은 기계공업육성자금 외자대부, 轉貸借款
융자 금액 자기자금과 외자를 제외한 금액 외자재구입자금 전액
융자 비율 선종별 국산화율에 따라 상이  
B. 선박수급계획
구   분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합  계
수요 1. 내  수
2. 수  출
(금액:백만$)
532
600
320
540
440
350
534
560
450
748
750
600
820
880
700
925
1,140
910
3,567
3,770
3,010
합    계 1,132 980 1,094 1,498 1,700 2,065 7,337
 공급 1. 국내건조
계획조선
기타내수선
수출선
2. 수  입
684
74
10
600
448
642
192
10
440
338
785
217
8
560
309
1,010
246
14
750
488
1,126
222
24
880
574
1,389
223
26
1,140
676
4,952
1,100
82
3,770
2,385
C. 1차~6차 계획조선의 연도별 발주 및 소요자금계획
구   분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합 계


외항선(천GT)
내항선(천GT)
어   선(천GT)
74
-
-
175
10
7
200
10
7
225
10
11
200
10
12
200
10
13
-
-
-
1,074
50
50
합  계 74 192 217 246 222 223 - 1,174
자 금 내자(백만원)
외 자(천$)
6,867
-
24,359
64,365
67,521
105,250
74,254
68,100
73,800
48,000
75,600
41,600
29,600
-
352,001
327,315
합  계 6,867 56,195 120,146 108,304 97,800 96,400 29,600 515,312
주 : 1. 1975년은 실적치임.
      2. GT당 선가( 외항선 800$, F/C 1,200$, 내항선1,000$, 어선 2,000$)
D. 선복증강계획
구    분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77~’81
외 항 선   500 500 500 700 750 850 3,300
계 획 조 선
수         입
용         선
74
176
250
175
100
25
200
100
200
225
150
325
200
200
35
200
200
450
1,000
750
1,550
내 항 선 계 획 조 선 *5 10 10 10 10 10 *50
어     선   27 30 24 38 60 65 217
계 획 조 선
기         타
수         입
-
5
22
7
10
13
7
8
9
11
14
13
12
24
24
13
26
26
50
82
85
합    계 532 540 534 748 820 925 3,567
계획조선사업은 1976년 1차 연도에는 외항선 8척을 건조했으며, 2차 연도부터는 외항선과 함께 내항선, 어선 등도 계획조선에 포함하였다. 이후에도 동사업은 꾸준히 지속됨에 따라 우리나라 해운?조선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표 7 참조)
<표7> 70년대 계획조선 발주량 추이
 구 분 외 항 선 내 항 선 어    선 합   계
천GT 천GT 천GT 천GT
1차(’76)
2차(’77)
3차(’78)
4차(’79)
8
17
18
17
68
177
246
205
-
14
18
44
-
8
7
21
-
155
78
101
-
14
7.6
12.7
8
186
114
162
68
199
260.6
238.7
자료 : 해운항만청
 
 
(5). 관련 기관
(가) 선박연구소 설립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진흥을 위해 정부출연연구소로 설립한 선박연구소는 조선 및 해사 관련 산업과 그 관련 분야의 과학기술 및 경제에 관한 조사, 연구, 개발업무를 종합적으로 수행하여 선진 기술을 도입, 소화하고 자주적인 기술 개발을 수행하여 그 기술을 업계에 보급함으로써 조선공업과 관련 산업 및 방위산업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동 연구소는 1973년 10월 한국 과학기술연구소의 부설 연구 기관으로 발족, 1976년 11월에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선박연구소로 되었다.

(나) 한국조선공업협회 설립

두 차례의 유류파동으로 인한 선복수급 불균형과 과잉 조선설비능력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던 당시의 심각한 조선환경하에서 정부 당국의 주도로 1977년 7월 19일 사단법인 한국조선공업협회를 설립하였으며 정부의 조선 시책 수립을 위한 자료의 수집, 제공은 물론 전 세계 조선정보를 소상히 파악하여 업계에 알리고 업계와 정부간 원활한 의사소통을 기하여 조선공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설립목적을 두었다. 창설 시 회원사는 현대중공업(주), (주)대한조선공사, 삼성조선(주), (주)현대미포, 코리아 타코마조선공업(주), 동해조선(주), 대동조선(주), 대선조선(주), 부산조선공업(주), 신아조선공업(주)의 10개사였다.

 


 

(1) 개 요
1976년에 매출액과 부가가치가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에 불과했던 국내 조선공업은 이후 연평균 30%이상의 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1985년에는 매출액 3.3조원, 부가가치1.3조원으로 제조업에 대한 비중이 4% 이상으로 괄목할만한 양적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특히 고용 인력 면에서는 1976년 대비 3배 이상의 고용 창출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유류파동의 여파로 1980년대에는 세계 해운?조선시장의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물량 확보를 위한 저가수주가 지속됨에 따라 경영수지 악화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로이드 통계를 기준으로 세계조선 수주량은 오일쇼크로 인한 장기 불황이 1983년부터는 벌크 캐리어를 중심으로 회복의 기미를 잠깐 보인 것을 제외하면 1988년까지는 1,000만GT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로 저조했다. 그러나 1989년부터는 선주들의 발주량이 증가하며 상승 국면을 보였다. 또한 선가면에서도 1986년 상반기를 바닥으로 하반기부터는 상승세로 반전되었다.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 조선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3저(저환율, 저유가, 저금리) 등의 혜택은 1986년 하반기부터 약 1년여 정도에 그쳤다. 1987년에는 해운시황이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발주 물량이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발주 물량의 대부분이 한국으로 몰려옴에 따라 한국의 세계시장 점유비는 30.2%를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조선업계 일부에서는 초긴장 상태가 되었으며 한국 조선산업은 재도약기를 맞는 듯 했다. 이러한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과격한 노사분규가 시작되는 한편 원화 절상이 가속화되면서 한순간에 대일 경쟁력이 열위로 돌아서며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87년부터 조선산업은 노사분규로 인한 납기지연, 인건비 상승 그리고 이에 따른 원가상승과 3저 효과의 퇴조에 이어진 원화 절상 등으로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한편 국내 조선업계는 1980년대 초 정부의 조선산업육성책에 의해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등 대형 조선소의 2개 도크가 속속 완공되면서 국제 경쟁 대열에 합류했으나 이상과 같은 불황의 지속과 세계조선가 하락, 초기 단계의 금융비용과 감가상각 부담 그리고 1987년부터의 원화 절상과 노사분규 발생 등이 겹쳐 결국 1989년에 ‘조선산업합리화조치’를 맞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89년은 국내 조선업계의 커다란 지각변동과 함께 대외적으로는 통상문제로 시달렸던 해이기도 하다. 세계 조선시장에서 우리 조선산업의 비중이 1/4수준으로 커짐에 따라 미국, EC 등 선진 조선국들로부터 압력이 점차 심화되었다.
1970년대만 해도 일본과 함께 세계 조선시장을 주도했던 EC제국이 한국의 등장과 함께 시장점유비가 감소하자 자국의 경쟁력 회복과 점유비 확대를 위해 협상을 요구해 왔다. 1989년 3월에 EC는 선가개선을 위한 선가모니터링 실시, 시장분배조정 등을 요구하며 한국과 일본에 협상을 요구해 왔다. 이어 1989년 6월에는 미국조선공업협회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본, 서독, 노르웨이 등 4개국의 조선업계에 대한 정부보조금 지급 및 면세 혜택 등을 불공정무역 관행으로 간주하여 미 통상법 301조에 의거 제소함에 따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후 미국과의 쌍무협상이 수 차례 진행되었으나 결국 이 문제는 OECD WP6 다자간 조선협상으로 옮겨져서 수년간의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2) 업체 현황
1970년대 전반에 시작한 조선소 건설계획은 1983년 1월에 대우조선의 제2도크, 동년 3월에 삼성중공업의 제2도크 건설공사가 각각 완공되면서 우리나라의 장기간에 걸친 조선소 건설은 일단락 되었으며, 이러한 시설의 증가로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1980년대 초부터 일약 세계 2위 조선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조선소 건설이 마무리된 1983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조선업체는 대형 조선업체 4사, 중형 조선업체 7사, 소형 조선업체 223사 및 대형 수리 전문조선소인 (주)현대미포조선소와 (주)부산수리조선소 2사가 있었으며, 국내 전체로는 234개 사에 달했다. 대형 4사인 현대중공업(주), 대우조선공업(주), (주)대한조선공사, 삼성중공업(주)과, 중형 7사인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주), 대동조선(주), 대선조선(주), 동해조선(주), 신아조선공업(주), 인천조선(주), 부산조선공업(주) 및 2개 수리조선소를 포함하여 13개 사가 한국조선공업협회의 회원사였다.(표 1 참조)
한편 1980년대에는 장기간의 세계 조선 불황으로 일본은 합리화 조치로 건조 능력을 감축하는 한편, 유럽의 많은 조선소들이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신규 설비의 증설은 없는 가운데 일부 소형 조선업체의 수만 변화를 보였으며, 생산성 향상과 자동화를 위한 일부의 시설개체 등에 의해 건조 능력은 점차 증가하였다.(표 2 참조)
<표1>  1980년대 조선업체 추이
구       분 1975 1980 1983 1986 1989
신 조 선 대    형
중    형
소    형
3
6
129
4
6
142
4
7
221
4
6
90
4
6
108
 수  리  전  문 1 1 2 2 2
  합        계 139 153 234 102 120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조선자료집
주)   : 1986년이후의 소형조선소 수는 한국조선공업협동조합 조합원사에 한함.
  <표2>  조선시설 (1983말)
A. 신  조
구 분 기     본    설    비
Dock 및 선대 의장안벽전장(M) 운반탑재최대능력(M/T)
대 형 현  대 B.D 7기, B.B 1기, S.L 2기 4,915 450 x 4
대  우 B.D 2기, F.D 1기 3,105 900 x 1
조  공 B.D 3기, B.B 4기, M.R.W 3기 1,684 100 x 3
삼  성 B.D 2기 1,248 250 x 1
소  계   10,952  
중 형 타코마 Hyd. S/L 1기 415 60 x 1
대  동 B.B 4기, M.R.W 4기 150 70 x 1
대  선 B.B 1기, M.R.W 4기, F.D 1기 739 100 x 1
동  해 B.B 2기, M.R.W 1기, F.D 1기 190 60 x 1
신  아 B.B 2기, M.R.W 3기 510 60 x 2
인  천 F.D 2기, B.B 2기, M.R.W 1기 380 300 x 1
부  산 B.B 2기, M.R.W 3기 420 90 x 1
소  계   2,804  
합  계   13,756  
B. 수  리
 구   분 Dock 및 선대 의장안벽전장(M) 운반탑재최대능력(M/T)
 현대미포           R.D 4기            3,333 80 x 1
 부산수리           R.D 1기               170 110 x 2
 합    계              3,503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주)   : 한국조선공업협회 회원사에 한함
이러한 시설의 증가에 따라 종업원수도 1984년까지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이후 조선 불황의 장기화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각 조선업체들은 적극적인 감량경영과 설비자동화를 추진함으로써 1988년까지는 감소세를 보였다. 그러나 수주량의 증가에 따른 조업량 증가로 1989년부터는 다시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9년 말 한국조선공업협회 회원사의 종업원 수는 50,903명이며 이 중 대형4사의 종업원 수는 39,935명으로 전체의 78.5%를 점유하고 있다.(표 3 참조)
<표3> 연도별 종업원추이
구    분 기  술  직 기  능  직 사  무  직 합    계
>1978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4,198
     5,155
     7,107
     8,408
     9,872
     9,775
    10,531
     8,995
     9,550
     7,851
8,086
    32,362
    30,092
    40,737
    51,135
    49,711
    60,453
    56,629
    47,986
    43,780
    37,892
39,645
    3,962
    3,441
    3,813
    5,174
    5,218
    5,415
    5,320
    4,805
    3,818
    3,461
    3,172
    40,522
    38,688
    51,657
    64,717
    64,801
    75,643
    72,480
    61,786
    57,148
    49,204
    50,903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회원사에 한함)
주)   : 기능직에는 하도급인력 포함


(3) 조선 실적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1980년대의 세계경제는 저성장 체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미국경제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세계경제의 축이 다원화함에 따라 점차 보호무역주의의 폐해가 우려됐다. 1980년대 들어 1987년까지의 세계경제는 2.4%의 저성장세를 유지했다. 70년대 연평균 5~6%의 성장률을 보이던 세계 무역량이 1981년에 1.0%. 1985년에 3.1%로 크게 낮아졌다. 선진국의 선도산업이 중공업 중심에서 반도체 등의 첨단산업화로 이행되면서 해상 물동량의 감소를 더욱 촉진시켰다. 특히 80년대 초반에는 해상물동량이 격감, 1980년은 전년대비 -2.9%, 1981년 -4.0%, 1982년 -3.4%의 감소를 기록함에 따라 1980년대 장기간의 극심한 해운?조선 불황을 초래했다.
1983년에는 저선가를 겨냥한 선주들의 투기성 발주로 잠시나마 활기를 찾았다. 일본의 산꼬(三光)기선이 3~4만DWT급 벌크캐리어 125척을 발주하자 각국 선사들도 경쟁적으로 신조 발주를 시작하였으며, 일본의 도크가 채워지자 우리나라에 주문이 몰리게 되었다. 1983년의 우리나라 신조선 수주실적은 무려 179척에 410만GT로 80년대를 통해서 가장 많은 수주량을 기록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에서는 수주가 폭주하여 미포조선의 4, 5, 6호 수리도크를 신조도크로 사용할 정도였다.(표 4 참조)
<표4>  우리나라의 신조선 수주실적
구 분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척
천GT
백만$
  104
1,690
1,772
   108
1,853
2,333
    85
1,355
1,779
  179
4,098
3,034
  121
2,556
2,430
   65
1,368
  794
   98
3,509
1,660
  137
3,701
1,994
   83
3,042
1,906
  147
3,472
3,389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그러나 이러한 발주의 급증은 세계 조선 불황을 더욱 침체시키고 기간을 연장시키는 방향으로 작용되었다. 이와 같이 시황이 침체된 상황에서의 과잉발주의 배경은 첫째 세계 조선 능력 과잉에 따른 과당경쟁으로 선가가 대폭 하락하였으며, 둘째는 일본의 상사금융과 같은 파격적인 조건 완화로 투기발주 여건을 조성하였다는 점이었다. 결국 저선가 수주는 조선업계의 채산성을 악화시켰으며, 해운시황의 여전한 침체로 선주들이 고의적으로 선박 인수를 지연시키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이로 인한 비용의 증가는 경영을 더욱 압박함에 따라 세계적으로 문을 닫는 조선소가 속출하였다. 더욱이 1985년에는 세계적으로 발주가 급감하여 조선업계는 원가 수준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라도 조업량을 확보하기 위해 수주하는 등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게 되었다.
조선공업에 3저의 영향이 미친 것은 1986년 후반부터였다. 그 해의 우리나라 상반기까지의 수주량은 27척에 65만GT로 1985년 수주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짐에 따라 전년에 이어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VLCC를 중심으로 선주들의 유조선의 발주가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엔고의 영향으로 일본의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됨에 따라 많은 신조 상담건들이 우리나라로 몰리게 되어 동년 하반기에만 71척에 286만GT를 수주하였다.
세계시장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던 일본 조선업계는 G5의 환율개입으로 1986년에 150엔/$대를 기록하면서 경쟁력이 급격히 저하됨에 따라 20여 개의 중소형업체가 도산 또는 휴업했고 IHI사가 60%이상의 설비 감축을 하였다.
이러한 한국의 대일 경쟁력 우위상황은 1987년도에도 이어졌다. 로이드통계에 의하면 1987년 일본의 수주량기준 세계시장점유비는 34.7%(477만GT)로 대폭 감소한 반면, 한국의 점유비는 30.2%(416만GT)로 일본을 바짝 추격하였다. 특히 이러한 수주의 호전으로 수주잔량면에서는 1987년 9월말부터 일본을 제치고 세계1위에 올랐다.(표 5 참조)
엔고의 영향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기자재가 많은 관계로 우리나라의 원가도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업계와 정부는 외화가득률을 높이기 위하여 1986년에 1차로 58개 품목의 기자재의 국산화를 위하여 각종 금융, 세제상의 혜택을 부여했으며, 이러한 연차별 국산화 지원책이 진행되면 연간 1억 달러의 외화절감효과가 기대되었다. 또한 정부는 1986년 7월1일부터 시행된 공업발전법의 합리화업종으로 지정하여 320마력이상 6,000마력미만은 쌍용중공업이, 6,000마력이상은 현대엔진(주)과 한국중공업이 전담하여 생산토록 하였다. 엔고는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기자재산업의 발전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한편 1986년 하반기부터는 국내업체간의 과당경쟁을 방지하려는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여 수주 선가상승을 촉진시켰다.
세계 조선시황은 1988년까지는 불황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황은 아니었다. 세계 발주량은 1,300만GT대 이하에 머물렀다. 다만, 80년대 전반을 지나면서 해운시장은 해체의 진전에 따라 선복수급불균형이 어느 정도 개선되어 왔으며, 조선시장에 있어서도 세계적으로 조선시설이 감축됨에 따라 수급이 개선되어 왔기 때문에 그동안 시장을 짓눌러 왔던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많은 부분 해소되어 왔다. 따라서 1985년을 바닥으로 세계 조선시장이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며, 끊임없이 떨어지던 세계조선 선가도 1986년 후반부터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표5>  세계 수주량과 한.일 시장점유비 추이
구 분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한국(%) 9.0 8.1 9.7 19.2 14.7 10.4 24.1 30.2 23.3 16.7
일본(%) 52.7 48.6 49.7 56.5 56.8 49.3 43.6 34.7 39.1 50.2
세계
(천 GT)
18,969 16,900 11,357 19,423 15,581 12,906 12,664 13,768 11,841 19,306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이와 같이 조선시황의 바닥 탈출과 일본의 경쟁력 약화로 우리나라 조선업계는 모처럼 희망을 찾게 되었으나, 1987년 후반부터 예기치 못했던 노사분규의 발생으로 납기 지연과 임금 상승, 이에 따른 비용 상승과 경쟁력 약화 그리고 3저 효과의 퇴조에 이어진 원화 절상 등으로 재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표 6 참조)
3고(고환율, 고유가, 고금리) 현상으로 요약되는 국내 조선산업의 어려운 경영 여건은 1988년에 더욱 악화되었다. 우선 원화절상 폭이 전년도의 2배에 달하는 15.2%에 달하면서 6~7%의 선가인상 요인이 되었으며, 원화 약세기조 위에서 수주한 선박들의 선가로는 채산성이 크게 떨어지는 등 경영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1987년 이후 과격한 노사분규로 조업을 중단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이로 인한 공기지연으로 자금부담이 가중되었으며, 인건비 또한 연 20%이상으로 인상되었다. 그리고 강재가격을 포함한 기자재가격도 상승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비용이 증가되었다.
<표6>  조선업체 노사분규 영향
구     분 1987 1988 1989
   조업중단일수(일)
   매출감소(억원)
   손실액(억원)
        60
     1,156
       350
        160
      1,512
        791
      175
    4,208
    1,018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회원사 기준)
한편 1989년도에 들어와 세계 조선시황은 이전의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 호황 국면에 접어들었다. 원유를 중심으로 해상물동량이 증가하고 선복수급의 불균형이 대부분 해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신조선 수요가 증가하여 1989년의 세계조선 발주량은 1,931만GT에 달하면서 1990년대의 전망을 밝게 해 주었다.
세계 조선산업의 지난 30년을 돌이켜 보면 확장기, 구조조정기, 대체수요기의 3단계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제1단계는 1960년부터 1974년까지의 기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팽창하는 교역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선박의 수요가 발생하였으며, 따라서 해운?조선산업은 성장산업의 하나였다. 세계 전체 건조량은 1960년대 전반에 1,000만GT 내외에서 1970년대 중반에는 3,000만GT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대폭 증가했다.
제 2단계는 1974년부터 1988년까지의 구조조정기이다. 동기간에는 세계적인 신조선 수급불균형으로 선가가 하락하고 많은 조선소들이 폐쇄되었으며, 유럽 조선소들의 종업원수가 5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대폭 감축되는 등 조선 능력이 대폭 감소되었다.
제 3단계인 1989년 이후 세계 조선산업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설비 감축 등 구조조정이 마무리되었고 해운 시황도 호전됨에 따라 공급 부족을 우려한 선주들의 발주가 1989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연간 발주량이 2,000만GT를 상회하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4) 조선 정책
정부는 조선업계의 업무량 확보와 해운업계의 경영 개선 차원에서 조선업계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1985년에 포항제철의 철광석 및 원료탄 수입을 위한 광탄선의 발주 등을 포함하여 이전의 20만~30만GT 수준에서 80만GT이상으로 확대하였다. 또한 1986년에는 조선공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수출입은행에서 지원하는 선박의 연불수출금융조건을 OECD신용양해 기준으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기자재공업의 육성을 위하여 모기업과 수급기업간의 상호 분업적 협력관계를 효율적으로 추진코자 도급의존도가 크고 산업구조 고도화를 위해 긴요한 품목을 계열업종으로 지정하여 110개 품목의 조선용 기자재에 대한 계열화를 조성하는 한편 기계류 부품국산화시책의 일환으로 1986년에는 58개의 조선용 기자재를 국산개발 대상품으로 선정하여 개발 추진하였으며, 대형조선소가 개발된 기자재를 상호 구매토록 유도함으로써 국산화를 촉진시켰다.
한편, 제도적으로는 그동안 조선공업을 보호해 온 조선공업진흥법이 1986년 6월 30일 폐지되고 1986년에 공업발전법이 제정, 시행됨에 따라 국내 조선공업도 다른 공업분야와 같이 자율 경쟁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가) 조선공업진흥법 폐지
>정부는 이전의 조선공업진흥법을 포함한 산업별 관련법규를 폐지하는 한편 1985년에 공업발전법을 제정하여 이듬해인 1986년 7월1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동 법의 제정은 과거의 정태적 비교 우위 관점에서 시장경제원리에 기반을 둔 산업구조조정을 진행해온 공업 정책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동태적 비교 우위에서 시장경제원리에 기반을 둔 산업구조 조정정책을 추진한다는 정책방향의 전환에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면 산업구조조정을 촉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술혁신으로서 산업의 수명주기(life cycle)로 볼 때 기술혁신에 따라 유망유치산업으로서 발전을 계속하여 성장단계 및 성숙단계를 거친 후 사양화되는 단계에 접어든다고 할 수 있는 바, 산업구조 고도화를 위해서는 단계별로 볼 때 첨단산업 등 유망유치산업의 육성, 성장단계 및 성숙단계산업의 국제경쟁력 유지 및 강화, 구조적 불황 또는 사양단계 산업의 합리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업발전법은 민간업계의 노력만으로는 국제경쟁력 확보가 어렵다고 보고 산업에 대해서 정부가 한시적으로 개입하여 구조조정을 촉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며, 과거에 정부가 모든 산업 분야에 대하여 산업합리화 내지는 산업조정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여 대상 분야를 국제경쟁력 열위에 있는 유망유치산업과 구조적 불황산업으로 한정하였다.
한편, 조선산업에 있어서는 설비 근대화와 조선기술의 발전을 목적으로 제정되어 많은 성과가 있었던 조선공업진흥법의 폐지로 각종 지원제도가 폐지되는 한편 업계의 자율화가 확대되었다.
  (나) 조선산업 합리화 조치
1987년 이후 세계 조선 경기가 점진적으로 회복, 수주량의 증가와 선가 상승으로 조선업계의 경영 상태가 점차 개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의 장기 불황 여파로 일부 조선업체는 차입금에 의한 대규모 시설투자와 운영자금의 차입 확대 등에 따른 재무구조의 악화로 금융비용 부담이 과중하여 정부는 재무구조의 개선 없이는 향후에 조선 경기가 회복되어도 자력에 의해서는 경영 정상화가 어렵다고 판단하는 한편 대량의 실업사태와 지역경제 및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여 1989년 8월27일 산업정책심의회의 의결을 거쳐서 조선산업의 합리화조치를 시행하였다.
정부는 조선산업을 합리화업종으로 지정하여 업계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경영을 합리화하도록 하되 합리화 대상 업체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하여 자구 노력을 하는 업체와 주거래은행이 제3자 인수 등을 통하여 경영정상화를 추진하는 업체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대상 업체는 계열기업의 처분, 자산의 매각, 통?폐합 등 자구 노력에 의해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경우와 제3자 인수 등을 통해 경영 정상화를 추진하는 경우 이에 필요한 지원으로 계열기업 및 자산의 처분 등 자구 노력에 대한 조세 지원, 기업합병에 따른 등록세, 취득세 등의 면제, 제3자 인수 시 자산 부족액에 대한 원천징수 의무 배제, 계열사의 출자한도 초과에 대해 예외를 인정키로 하였다. 또한, 합리화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1993년 말까지 조선시설의 신?증설을 억제하고 선박 수출 추천제도의 시행으로 저가수주 및 과당경쟁을 방지토록 하였다.
동 합리화조치의 관련법령은 조세감면규제법 제46조, 제46조의 2, 제47조, 제48조, 법인세법 시행령 제11조의 2, 제43조의 2, 증권거래세법 시행령 제3조 및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7조의 4이며, 당시에 대우조선, 인천조선, 조선공사 등 3개 사가 합리화지정을 신청하였다.
(다) 해운산업합리화
우리나라 외항해운업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육성 정책에 따라 급속한 신장을 보임으로써 1980년대 초반에 보유선복량 기준으로 세계 13위의 중진해운국으로 발돋움한 바 있다. 그러나 선사의 난립과 과당경쟁, 과도한 타인자본 의존으로 인한 기업 체질의 허약성 및 중고선의 과다도입으로 인한 국제경쟁력의 취약 등 성장이면에 내포되어 있던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1980년대 초반부터 불어닥친 세계적인 해운 불황을 맞이하면서 경영수지 및 재무구조면에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일부 선사가 도산하거나 해외에서 선박이 억류되는 사태 등이 발생하는 상황 하에서 불황 극복을 위한 해운업계의 자체 노력은 한계점에 달해 정부 차원의 특별지원대책으로서 해운산업합리화계획이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1983년 12월 23일「해운산업합리화계획(안)」을 확정시켰으며, 1984년 5월12일에는 동 계획이 산업정책심의회 의결을 거쳐 대상 선사 66개사 중 외국자본과 합작관계에 있는 3개 사를 제외한 63개 선사를 대상으로 해운업계의 재편작업을 시작하였다. 합리화 조치의 주요 내용은 63개 참여 선사의 4개 분야, 20개 그룹선사로의 통폐합과 참여 선사에 대한 금융세제지원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선사의 통폐합은 6개 그룹선사가 통폐합에 의한 합병으로, 14개 그룹선사가 2년내의 합병을 전제로 하는 운영선사 형태의 통합으로 추진되었으며 선사의 통폐합에 따른 인원 감축 및 점포망의 정비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합리화 참여선사에 대한 금융지원을 전제로 선박 구입과 관련된 금융기관 대출원리금을 시황호전시(최장 5년)까지 상환유예 또는 대환해 주도록 했다.
한편 정부는 1984년 5월에 확정하여 추진해온 합리화 추진 계획의 조정안을 산업정책심의회에서 1985년 7월 19일자로 확정함으로써 국내 해운 정상화를 위한 합리화의 제 2단계 조치를 강구했다. 즉 상환기일이 도래하는 금융차입원금(지급보증 포함)은 최장 3년 거치 후 5년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대환하고 이자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정상 지급하되 주거래은행이 기업 정상화를 위하여 불가피하다고 판단할 경우 매연도 말에 원금가산, 대환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단기 차입금에 대해서도 동 차입금이 과다하여 기업 정상화가 어려울 것으로 주거래은행이 판단하는 경우 은행지급보증 또는 은행대출로 대환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합리화 참여 선사에 대한 금융 지원에 한해서는 담보 적용에 있어 특례를 인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금융 지원은 종전의 전 해운사에 대한 지원에서 첫째 합병 완료업체 둘째 자구 노력 성실 이행업체 셋째 회생 가능업체에 국한하는 선별?제한적 지원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지원 선사의 선별, 구체적인 지원 대상자금이나 지원 조건은 주거래은행이 관련 여신은행과 협의하여 시행토록 하고 1985년 말까지 합병을 완료하지 않거나 자구 노력이 부진한 업체에 대하여는 주거래은행이 금융지원을 중단하며 해운항만청에서도 필요한 행정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금융 지원의 효율화를 기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조정된 합리화 추진계획은 운영선사의 조기 합병을 유도하기 위한 주력 선사의 지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1) 개 요
한국 조선산업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국제 간 협력의 필요성이 증대되어 1990년 10월 OECD WP6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산업 중에서는 처음으로 선진국과의 공식 회의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1989년 세계조선 발주량이 1,930만GT로 대폭 증가한 이후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1992년을 제외하고 연간 발주량이 2,000만GT를 상회하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1993년 엔화 강세 영향에 힘입어 일본을 제치고 사상 최대의 수주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각 조선소는 채산성이 개선되는 등 「조선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표현까지 나오게 되었다. 또한 국내 조선업계는 1993년도에 수주량 기준으로 세계시장 점유비가 37.8%를 기록함으로써 일본의 점유비 32.3%를 추월하며 1위의 자리로 올라섬에 따라 다시 한번 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세계 조선 시황의 호전 및 낙관적인 전망과 함께 조선산업 합리화시의 한시적 조치였던 조선시설의 신?증설 억제 조치가 1993년 말에 해제됨에 따라 1994년 삼성중공업이 제3도크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현대중공업, 한라중공업, 대동조선이 연이어 도크의 신?증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96년도에 들어와 엔화의 절하, 우리나라의 인건비 상승, 기자재가격 상승 등의 요인으로 일본의 경쟁력이 급격히 회복됨에 따라 우리나라 조선업계는 상대적으로 수주에 많은 애로를 겪게 되었으며, 세계 공급능력의 확대 등에 따른 경쟁의 격화로 세계조선가 또한 하락세를 지속함에 따라 경영 수지가 악화되고 있는 등 또다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은 1996년 OECD에 가입했으나, 1997년 초 일련의 대기업들이 부도를 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금융기관이 부실화되었고 그러한 가운데 동남아 외환사태가 발생하여 한국경제에 대한 우려감이 증폭되어 대외 신임도가 급속하게 하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기업의 부도로 기업에 자금을 대출해준 금융기관의 경영 상태가 심각히 악화되고 해외차입금리가 상승하거나 단기외채 만기 연장이 어려워져 갔으며 외국 금융기관들은 우리 금융기관에 공여한 외환자금을 경쟁적으로 회수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행은 외환시장의 극심한 혼란을 보유외환으로 방어하려고 해보았으나 실패하고 결국 1997년 12월 3일 우리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이행각서를 제출하고 IMF가 제시한 대외개방확대 및 구조조정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
IMF 체제는 조선업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라중공업을 시작으로 대우중공업, 대동조선 등이 경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8년 벽두부터 외국 선주는 한국조선소에 발주를 꺼렸으며 발주하는 경우라도 무리한 조건을 제시해 수주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일부 선주들은 원화 절하에 따른 반사이익을 선가에 반영해 주기를 요구하고 외국계 대형은행의 지급 보증을 요구하는 선주들이 늘어 지금까지 통상 관례인 0.3%~0.5%의 10배인 5%까지 무리하게 요구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심지어는 선박건조 계약 시 통상 선박가격의 20%인 선수금도 10%이하로 낮추고 나머지는 인도 시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동 년 3월부터 점차 회복되기 시작해 하반기 들어서는 부진했던 수주량이 급속히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회복은 당시 2000년까지 일감을 확보한 일본 조선업계가 선가 하락을 우려하여 더 이상 적극적인 수주를 하지 않았고 세계에서 경쟁력 있는 상선을 건조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였던 점, 그동안 한국이 외국 선주와의 사이에서 쌓아온 신뢰, 급격한 원화 절하로 인한 가격 경쟁력 상승 등이 IMF체제 시작 후 반년도 되지 않아 회복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기자재를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점, 범용상선 부문에서 일본과 대등한 기술력 등 그 동안 토대를 착실히 다져온 점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한국조선업은 IMF체제를 계기로 세계 1위 조선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한편 경영 위기에 처했던 조선소들도 대우중공업은 대우조선해양으로(2001년 12월), 한라중공업은 삼호중공업으로(1999년 10월), 대동조선은 STX조선으로(2002년 1월) 개명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 조선시황 호황 등에 힘입어 현재 정상적으로 조업에 임하고 있으며 안정적인 일감을 확보해 놓고 있다.


(2) EU와의 통상마찰
1997년말 아시아 경제 위기 발생 이후 EU, 일본, 미국 등은 IMF 자금의 조선산업에 전용금지를 주장하고 나섰으며 EU 조선업계는 2000년 말 폐지된 운영보조금(선가의 9%)연장 및 한국의 크루즈선 시장 진출을 저지할 목적으로 한국의 선가 수준 및 조선소 구조조정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통상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1999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통상 압력이 개시됨에 따라, 동년 12월 양측 민?관 합동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협상을 거친 결과, 2000년 6월에 합의의사록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후 수 차례의 회의를 통해 이견 차이를 좁히려 노력했으나 결국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2001년 7월 EU집행위 전체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WTO 제소와 연계하여 보조금 지원 재도입에 관한 council regulation을 답변확정했다. 다만, 현재 WTO제소에 대해서는 전 회원국이 지지하고 있으나 보조금 재도입과 관련하여서는 각 국의 입장이 상이한 상태이다.


(3) 조선 능력의 증강
1989년부터의 세계 조선시황 호전과 낙관적인 전망 그리고 조선산업 합리화 시에 한시적 조치였던 조선시설의 신?증설 억제 조치가 1993년 말에 해제됨에 따라 1994년에 들어와 삼성중공업이 제3도크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몇 개의 조선소에서 경쟁적으로 도크의 신?증설을 추진하였다.
삼성중공업은 1993년 12월에 초대형유조선을 건조할 수 있도록 제2도크의 길이를 330m에서 390m로 60m를 연장한데 이어 1994년 10월에는 길이 640m, 폭 97.5m, 깊이 12.7m인 제3도크의 건설을 완공함으로써 대형 유조선의 건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현대중공업도 1995년 8월과 11월에 길이 360m, 폭 70m, 깊이 12.7m인 제8호 및 제9호 도크를 각각 완공하였다. 또한 인천yard에서 주로 3만~4만DWT급을 건조해온 한라중공업도 전남 영암군의 88만평 대지 위에 삼호조선소를 건설, 1995년 10월에 길이 500m, 폭 100m, 깊이 13m인 제1도크의 2호기 goliath crane 가동식을 가진데 이어 1996년 1월에는 길이 400m, 폭 70m, 깊이 12.7m인 제2도크의 3호기 goliath crane 가동식을 거행함으로써 대형선박의 건조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한라중공업의 기존 인천조선소를 1996년 10월에 폐쇄하였다.
한편 대동조선은 경남 진해의 22만평 부지에 길이 320m, 폭 74m, 깊이 11m인 도크를 1996년 5월에 준공함으로써 중형조선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신증설 이후 우리나라 조선업체별(한국조선공업협회 회원사) 설비는 표 1와 같다.
또한 이와 같은 도크의 신증설은 우리나라 조선 인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1992년까지 다소의 감소 추이를 보여오던 종업원 수는 1993년부터의 대량 수주와 1994년 이후 일부 조선업체들의 도크 신증설로 다시 증가세로 반전되었다. 2001년 6월 말의 현재 인력은 1992년 말에 비하여 60%이상 증가하였으며, 특히 하도급 인력의 증가는 3배 이상으로 확대되었다.(표 2 참조)
2001년 말 한국조선공업협회 9개 회원사의 종업원 수는 총 86,682명이며 이중 대형5사의 종업원 수는 74,939명으로 전체의 86%를 점하고 있다. 또한 순수 조선부문에 종사하는 인력은 전체 63,950명인데 이 중에 기능직이 27,183명으로 43%를 점하고 있으며, 기술직 10%, 사무직 8%, 하도급 등의 기타인력 40%를 각각 점하고 있다. 1992년 대비 기술직은 49%증가, 기능직은 19%증가, 사무직은 73%증가한데 비해 하도급은 4배 이상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는 각 조선소들이 건조량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자체 인원보다는 인력 조달에 유연성을 가질 수 있는 하도급 인력을 많이 보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표 3 참조)
<표1>  회사별 설비현황 (2001년)
회사명 설비명 LxBxD(m) 회사명 설비명 LxBxD(m)
현대중공업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
(영도)






(울산)


(마산)
B.D No.1
B.D No.2
B.D No.3
B.D No.4
B.D No.5
B.D No.6
B.D No.7
B.D No.8
B.D No.9
S.L

B.D No.1
B.D No.2
F.D No.1
F.D No.2

B.D No.1
B.D No.2
B.D No.3

R.D No.1
B.D No.2
B.D No.3
B.D No.4
B.B No.1
B.B No.2
B.B No.3
B.B No.4
B.B No.1
B.B No.2
B.B No.3
S.L(Hyd)
B.B No.1
B.B No.2
B.B No.3
383 x 80 x 12.7
503 x 80 x 12.7
642 x 92 x 13.4
380 x 65 x 12.7
260 x 65 x 12.0
260 x 43 x 12.0
170 x 25 x 11.0
360 x 70 x 12.7
360 x 70 x 12.7
120 x 20

529 x 131 x 14.5
349 x 81 x 14.5
271 x 51.5 x 14.3
216 x 38.8 x 15.4

283 x 46 x 11.0
390 x 65 x 11.0
640 x 97.5 x 12.7

106 x 18 x 7.5
232.5 x 35 x 9.0
301.8 x 50 x 11.5
301.8 x 50 x 11.5
170 x 24
115.1 x 12.8
60.5 x 24.2
60.5 x 24.2
185 x 33
130 x 22.4
130 x 17.2
100 x 17 x 9
150 x 20
150 x 17
50 x 30
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대동조선

대선조선







신아
B.D No.1
B.D No.2

R.D No.1
R.D No.2
R.D No.3
R.D No.4

B.D No.1

R.D
F.D
B.B No.1
B.B No.2
B.B No.3
S.W No.1
S.W No.2

B.B No.1
B.B No.2
500 x 100 x 13
400 x 70 x 13

380 x 65 x 12.5
380 x 65 x 12.5
380 x 65 x 12.5
300 x 76 x 12.5

320 x 74 x 11

109 x 19 x 7.7
142.4 x 24.7 5x 14.35
102.6 x 16
102.6 x 18
173 x 40
110 x 3.6
110 x 3.7

180 x 37
180 x 35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표2>  연도별 종업원 추이(명)
구분 기술직 기능직 사무직 하도급 합  계
조선 전체 조선 전체 조선 전체 조선 전체 조선 전체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4,418
 4,039
 4,215
 4,528
 4,672
 6,161
 6,633
 6,728
 6,222
5,998
6,341
6,608
 7,967
 6,756
 7,095
 7,336
 9,040
11,775
12,679
11,726
12,077
10,425
10,420
10,930
25,381
24,185
22,920
21,714
22,504
26,921
28,472
27,348
26,313
26,473
26,045
27,183
34,701
33,518
32,450
31,637
36,979
39,236
40,478
40,370
38,088
36,320
36,215
36,434
2,604
2,793
2,987
4,212
3,733
3,424
3,844
3,064
2,805
3,746
4,038
4,834
4,062
5,301
5,499
7,198
9,211
7,333
7,419
6,481
6,219
6,234
7,181
6,901
6,456
5,620
6,124
7,675
10,086
13,665
14,944
12,998
13,185
12,427
18,149
25,325
7,360
7,582
7,778
10,549
15,371
18,986
20,777
19,222
19,321
18,665
25,960
32,417
38,859
36,637
36,246
38,129
40,995
50,171
53,893
50,138
48,525
48,644
54,573
63,950
54,090
53,157
52,822
56,720
70,601
77,330
81,353
77,799
75,705
71,644
79,776
86,682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표3>  회사별 조선부문 인력(2001년 말)
구분 기술직 기능직 사무직 하도급 합계
현 대
대 우
삼 성
한 진
삼 호
미 포
대 동
대 선
신 아
2.597
969
603
723
349
765
433
61
108
9.656
6.016
3.710
1.662
2.201
2.678
830
215
215
942
1.394
1,363
157
538
302
62
35
41
4.294
5.558
5.426
1.663
2.795
2.828
1.884
267
610
17.489
13.937
11.102
4.205
5.883
6.573
3.209
578
974
합계 6,608 27,183 4,834 25,325 63,950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9개 회원사


  (4) 조선 실적
1990년대에 들어와 세계 건조 능력이 증가함에 따라 비교적 높은 세계 발주량에도 불구하고 신조선가는 1992년을 피크로 1999년까지 하락세를 보였으나 2000년부터는 다소 상승세로 돌아서고 있다.
한편 , 1993년 상반기의 급속한 엔고로 우리나라에 비해 20%~30%정도 가격경쟁력에서 열위에 있던 일본조선업은 자재의 해외조달 확대와 합리화 노력을 지속하였다. 또한 1995년 하반기부터 엔화가 약세로 반전된 반면, 우리나라는 인건비와 기자재가격 상승 등의 비용 증가로 일본의 경쟁력이 급격히 회복되었다. 따라서 1996년도에 들어와 우리나라 조선업계는 수주에 많은 애로를 겪게 되었으며, 특히 일본이 설비 규제를 완화하는 등 세계 공급 능력의 확대에 따른 경쟁의 격화로 세계조선가 또한 하락세를 지속함에 따라 경영 수지가 악화되고 있어 또다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97년 들어 세계 조선시장 호황을 맞이해 한국 조선업 역사상 처음으로 1,000만GT를 돌파하여 1,373만GT를 수주했다. 1999년 들어서는 급격한 원화 절하 및 기술력 향상에 힘입어 일본과의 가격 경쟁력 격차를 더욱 벌일 수 있었으며 1,184만GT를 수주해 1993년에 이어 두 번째로 수주량 면에서 세계 1위가 되었다. 2000년 들어서도 세계 전체 발주물량의 45% 이상을 수주해 2년 연속 수주량 면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다.(표 4 참조)
<표4> 세계 수주량과 한일 시장점유비 추이
구분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한국(%) 23.8 25.7 17.3 36.7 22.6 30.4 28.8 37.6 33.0 40.9 45.8 32.4
일본(%) 46.3 40.5 40.7 33.3 47.6 34.9 39.1 42.1 41.1 30.0 28.5 39.9
세계
(만GT)
2,407 1,991 1,280 2,265 2,502 2,553 2,341 3,648 2,674 2,894 4,514 3,650
자료 : lloyd's


(5) 국제 협력
(가) OECD 조선전문위원회(WP6)

조선산업이 처음으로 각 국 정부간의 외교적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62년이었다. 당시 OECD 산하기구인 공업위원회가 제출한 불황 산업 구제를 위한 정부의 조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영국, 프랑스,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 벨기에의 6개국이 조선산업을 불황 산업으로 회신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동 위원회는 불황 대책의 검토를 위해 ‘조선업특별 작업부회’를 설치, 세계 최대의 시장점유비를 갖고 있는 일본이 참가하지 않은 검토는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답변확정되어 일본의 참가를 전제로 1차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동 부회는 차기회의부터 ‘공업위원회 제5작업부회’로 개칭되었다.
제1회 부회는 1963년 5월에 룩셈부르크를 제외한 EEC 가맹국과 북구 3국, 미국, 영국, 캐나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과 OECD 미가맹국이었던 일본의 1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동회의에서는 조선업에 대한 규제가 취해져야 한다는 의견이 반복되었으며, 조선 불황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각 국 조선업 현황, 조선업에 대한 정부 및 공적지원 실태를 파악하고 각 국 정부에 제안하고 있는 기본적 대책의 이해득실에 대한 평가를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조선산업이 국제적 문제로 올려진 시초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1964년 4월에는 일본이 정식으로 OECD에 가입하였다.
OECD이사회는 보다 효율적인 불황 대책을 제안할 수 있도록 제 5작업부회를 해산하는 한편, 1965년 6월에 소수의 정예 대표로 구성한 조선특별작업부회(ad hoc working party on shipbuilding → 후에 이사회 제5작업부회)를 설치하였으며, 1966년 4월에는 현재의 ‘이사회 제6작업부회(조선)’로서 재발족하였다.
이후 동 작업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주요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 협정들은 여타 OECD 협정과 마찬가지로 신사협정으로서 구속력은 없으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협정에 합의한 이상 이를 준수할 책임이 있다.
첫 번째로 ‘선박수출신용양해(understanding on export credits for ships)’를 1969년 4월에 합의하여 몇 차례 개정을 거쳐 시행하고 있다. 동 양해의 주요 내용은 정부가 간여하는 선박수출금융의 지원 조건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 ‘조선산업의 정상적 경쟁조건에 대한 장애의 점진적 제거를 위한 일반협정 (general agreement for the progressive removal of obstacles to normal competitive conditions in the shipbuilding industry : 일반협정)’을 1972년 6월에 제정하여 조선산업에 대한 각 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 등 지원 조치를 점진적으로 제거해 나갈 것을 합의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조선산업의 정부정책에 대한 일반지도원칙(general guidelines for government policies in the shipbuilding industry : 일반지도원칙)’을 1976년 5월에 제정하였으며, 그 내용은 가맹 각 국 정부는 공정과 연대?국제책임의 정신에 입각하여 향후 수급 균형을 고려한 조선 능력 삭감 도모, 능력 삭감을 방해하는 정책의 배제, 선가 면에서의 공정경쟁 유지 도모, 능력 확대로 인한 불균형 조장 조치 배제 등과 규칙에 의하여 자주적으로 불황 대책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각 국 정부 지원 조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함으로써 투명성 제고에 노력하고, 유럽과 일본이 각각 건조 수요 및 공급 능력 전망을 수행하고 이를 상호 검토하여 향후 시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함으로서 세계 조선시장의 운영을 조율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와 같이 OECD조선부회는 1976년에 제 1차 회의를 개최한 이래 명실공히 세계 조선업에 관한 주요 선진국의 국제적인 논의의 장으로 자리를 잡아왔으며, 현재의 가맹국은 AWES회원국, 한국, 일본, 미국의 17개국과 EU집행위의 1개 기관으로 되어 있다.

(나) 다자간 조선협상

1989년 10월부터 시작된 다자간 조선협상이 타결되었다. 동 협상은 1994년 7월 회의에서 협상 참가국 수석대표들이 타결에 합의함에 따라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5년 간의 협상을 마무리하는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1994년 12월 21일 협정의 최종의정서(final act)에 대한 각 국 정부 대표가 서명을 했으며 이후에 의회 비준 등을 포함한 협상국의 국내적인 절차를 거친 후 협정에 서명한 모든 국가가 승낙서를 OECD 사무국에 기탁하게 되며, 이후 1개월이 지나면 협정이 발효하게 된다.(다만, 1996년 1월 1일 이후 발효 예정이었으나, 각 국의 의회비준지연 등으로 발효가 현재까지 안되고 있음.)
타결 결과에 대해 모든 국가가 불만을 가진 마이너스 썸게임("-" sum game)이었다는 평도 있으나, 아무튼 동 협정은 조선산업을 규율하는 새로운 틀로서 조선산업은 물론 전후방 산업인 해운 및 조선기자재 산업까지도 포괄하는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① 협상 배경

미국조선공업협회(SCA : shipbuilders council of america)는 1989년 6월에 한국, 일본, 서독 및 노르웨이 정부에 대해 조선보조금 지급을 이유로 미국 통상대표부( USTR : 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에 미 통상법 301조에 의해 제소를 하였다. 한국 등 피제소 4개국은 각각 USTR에 소명자료를 제출하였으며 이에 대해 USTR은 조선보조금 문제는 미국의 일방 처리보다는 다자간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SCA에 대해 제소를 철회할 것을 권고했다. 철회 조건은 다자간 협상을 개시하되 1990년 3월 말까지 원만한 합의를 이루지 못할 경우 통상법 301조에 의한 조사를 재개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SCA가 1989년 7월 21일 제소를 철회하는 한편 미국 정부는 각 국 정부와 다자간 협상의 형식 및 협상 장소 등을 논의하여 OECD에서 협상을 진행키로 합의하고 세계에서 유일한 조선전문 협의체인 이사회 직속의 조선전문위원회(WP6)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미국은 종전까지 WP6의 회원국이 아니었으나 SCA가 USTR에 4개국을 제소함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89년 6월초에 WP6의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② 협상 경과

198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 있는 OECD본부에서 다자간 조선협상이 개시되었다. 협상참가국은 OECD WP6회원국가인 미국, 일본,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EC집행위 및 EC회원국인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 그리스, 아일랜드와 WP6 회원국이 아닌 한국을 포함하여 17개국이었으나 협상과정에서 EC는 집행위가 대표권을 갖고 본 협정에서 1개국으로 참가한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함으로서 협상 참여국은 7개국이 되었다.
협상의 주요 의제는 핵심쟁점으로 첫째, 계획조선 등 간접지원 철폐방안 둘째, 수출신용의 분쟁해결 절차 셋째, 수출신용의 Pure Cover 문제 (정부가 순수하게 보증만을 하는 경우의 대출조건) 넷째, Jones act문제 다섯째, 피해가격 제도의 경기순환 고려 방안 여섯째, 피해가격 제도의 제소관련 쟁점 일곱째, 피해가격의 패널 검토 기준 등 7가지로 정하여 중점적으로 논의하였고 기타 쟁점에 대해서는 전문가 회의를 개최하여 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또한, UR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UR의 ‘반덤핑 협정’ 및 ‘보조금 및 상계관세 협정’의 내용을 대폭 수용했다.
수많은 난관과 파란만장한 논란 끝에 1994년 7월 17일 회의에서 Jones act에 대한 절충안의 합의를 끝으로 약 5년 간이라는 대장정의 대미가 장식되었다. 1994년 12월 21일 수석 대표회의를 개최하여 협정의 최종의정서에 서명하였으며, 이후 한국, EU 및 노르웨이는 1995년 12월에, 일본은 1996년 6월에 OECD사무국에 각각 비준서를 기탁함으로써 협정 발효 절차를 모두 마쳤으나, 협상의 주도국이었던 미국이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함으로서 현재까지 미발효되고 있다.

(다) 한/일 조선수뇌간담회

한국의 조선산업이 1970년대 후반 이후 급성장하여 1980년대에는 세계 점유비가 20%를 상회하는 서유럽 전체 건조량과 맞먹는 세계 제2위의 조선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한국이 제외된 상태에서 WP6에서의 서유럽과 일본간의 논의는 그 의미가 크게 상실되었다. 따라서, 서유럽과 일본은 WP6의 논의에 한국이 참여하여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일본이 한국과 접촉하기로 합의하였다.
우선 일본의 제의에 따라 민간차원에서 1982년에 한국과 일본의 대형 조선소 최고 경영자로 구성된 ‘한?일 조선수뇌간담회’가 개최되었다. 현대중공업의 정주영 명예회장과 일본 KHI의 우메다 회장의 공동발의로 제1차 회의가 부산에서 개최된 것이다. 동 간담회는 1984년까지는 연간 2회씩 교대로 개최하였으나, 1985년부터는 한국과 일본이 교대로 년 1회 개최하고 있으며 1994년 11월에는 15차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된 바 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은 1997년 17차 회의(제주도) 이후 당분간 회의 개최를 중단하기로 했다.

(라) 한/유럽/일/미 민간조선회의

80년대에 들어 한국의 세계 조선시장 점유비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일본은 절반정도의 점유비를 유지하는 반면 서유럽조선협회(AWES)의 점유비는 더욱 감소추세를 보였다. AWES 점유비는 1975년에 38.2%에서 1980년에 22.6%, 1986년에 12.2%로 급감하였으며 정부의 보조금 지원에도 불구하고 한?일과의 경쟁력 차이는 더욱 확대되었다.
따라서 유럽측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그 일환으로 한국과 일본에 협의를 요청, 한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과 유럽의 쌍무회의가 1988년부터 개최되었다. 한국으로서는 유럽의 대한국 통상 압력 완화 및 적절한 대처를 위하여 현대중공업 주관으로 1988년 10월에 한?유럽간 쌍무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한 바 있다.
이러한 쌍무회의는 이후에 일본의 제의에 의해 한?유럽?일 3자간 회의로 확대되어 1989년에 제1차 3자회의를 동경에서 개최하게 되었으며, 당시의 유럽측에서는 지역별 <market sharing> <reference price> 제도의 실시를 제안하는 한편, 실효를 거두기 위한 <monitoring> 으로서 위원회 성격의 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약화된 경쟁력을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한국과 일본에서는 생산은 영업 활동의 결과를 반영하는 것으로 지역별 생산은 시장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사전의 지역별 배정은 어려우며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회의를 거듭하면서 유럽측에서도 이 문제는 비현실적이라는 인식을 하는 한편 1989년에는 미국의 SCA가 한국, 일본, 서독, 노르웨이를 미 통상법 301조에 의거 USTR에 제소하여 새로운 통상 문제의 이슈로 등장함에 따라 1991년부터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이 회의는 일본과 유럽의 제안으로 1994년 9월에 미국이 추가로 참가함에 따라 한?유럽?일?미 민간조선회의로 변경되었으며, 주요 조선국들이 대거 참여하는 유일의 민간차원 협의체로 되었다.
한편, 한?미 민간조선회의는 미국의 301조 제소에 따른 다자간 조선협상에 대한 상호 협력 및 양국간의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하여 한국의 제의로 1991년 제 1차 회의를 미국에서 개최하였으며 매년 양국이 교대로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1994년 9월에 4자 회의가 출범함에 따라 중단되었다.

(마) 아/태 조선전문가회의

아시아?태평양지역 각료회의(ASPAC)의 해양협력계획의 일환으로 1971년에 개최된 아?태해양협력계획 전문가회의에서 조선 및 선박 행정에 관한 문제가 상정된 바, 이 회의와 유사한 성격의 회의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후 ASPAC의 활동이 정지됨에 따라 일본의 주도 하에 정치색이 배제된 아시아태평양조선전문가 회의(Asia and Pacific Shipbuilding Experts Meeting : APSEM)로 1973년에 제1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조선의 제 분야에 있어서 아?태지역 각 국 정부의 전문가간에 자유롭고 솔직한 의견 교환과 정보 교환으로 조선 분야의 지역 협력을 원활하게 하는 한편 참가국의 조선산업 및 관련 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1979년까지는 격년으로 일본에서 개최되었으나, 1981년도에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되었으며, 1982년도에는 필리핀에서, 그리고 이후부터는 일본과 기타 국에서 매년 교대로 개최하여 오고 있으며 참가국은 아태지역 22개국 및 1개 기구(UNDP)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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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4&dirId=409&docId=34862559&qb=7KGw7ISgIOyCsOyXhSDshLjqs4QgMeychA==&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RvAoRc5Y7u0ssbBG5ERssc--057865&sid=UDioUNWUOFAAAGj4D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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