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작좀 부탁드립니다(내공100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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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점
이것으로 느낀점은 자연을 파괴 하지 말고, 가족을 사랑 하자 입니다.
이 괴물도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연 파괴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 영화를 감상한 후로 저는 이 일이 실제로 실현되면 어쩌나 생각 했습니다.
다들 '영환데 뭐,, 별 일 있겠어?' 하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날이 있습니다.
공룡도 탄생했던 이 지구에 우리의 파괴로 괴물이란 상상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 하나쯤 뭐,,' 이런생각으로 모두가 파괴한다면 이 세상에는 괴물 같은 존재가 우리 인간을 파멸 시킬 것 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가족을 구하는 이 가족애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하면 괴물 정도는 이길수 있다.(?)
라는 생각 보다.
가족이 뭉치면 어떤 무엇보다도 강한 힘이 생긴다는 것, 그만큼 우리 가족이라는 것은 끊을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괴물'은 시간과 그 시간을 관통한 한국 사회에 관한 영화로 읽힌다.
'괴물(The Host)'이 단지 괴수가 아닌, 숙주 생물체로 상정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강 다리에 거꾸로 매달린" 괴물의 상징성 또한 이 영화에 대한 논의를 그저 스펙터클한 CG에
한정지을 필요가 없게끔 만든다. 이 영화는 '디워(D-War)'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으니까.
나 스스로가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에 별반 흥미가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튼 이 부분을 제외한 영화의 '내용과 의미' 부분으로 한걸음 시선을 옮긴다면
'괴물'에 대한 호평과 악평의 혼재를 벗어나, 보다 "좁혀서 많이" 얘기할 수 있는 건덕지가 생긴다.
우선 한강에 나타난 괴물의 존재.
다른 곳도 아닌 한강이라는 상징성은 곧바로 '한강의 기적'과 맞닿는다.
최소한 이 작품을 시계열적인 공간과 사회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다면 그렇다.
한미관계의 역학구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주한미군의 독극물 방류로 인해
괴물이 탄생했다는 설정부터, 음습하게 한강다리에 '거꾸로' 매달린 괴물의 풍경까지 그러하다.
무슨 소리냐면, 이건 이른바 '한강의 기적'에 대한 비유와 풍자라는 얘기다.
당국의 대처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를 개인과 공권력의 관계로만 볼 수도 있지만
보다 명확하게는 '숙주'를 그냥 놔두고는, 그로 인해 피해받았고 그에 대항하는 이들에게 대한
철저한 침묵과 격리, 압제로 대응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그간의 한국사회의 모습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설정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류의 리얼리즘으로 이어지지 않은 건
물론 봉준호의 스타일이겠지만,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여튼 한강 다리에 거꾸로 매달린 괴물의 모습과, 그것을 탄생케 한 미국의 존재,
이에 대처하는 당국의 풍경- 이런 것들은 당대의 실체라기보다 '시간의 산물'이며,
그 시간의 엇갈림과 응축이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 이 영화가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간적인 엇갈림들이란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비로소 이해 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캐릭터는 명확한 시대의 전형성을 띠고 있는데,
이 가족은 '희봉/강두/남일-남주/현서'로 구획 되어진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희봉이 전전/전후세대, 현서가 지금의 세대라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남는 것은 강두(송강호 분)와 남일(박해일 분)-남주(배두나 분)의 관계인데,
남일-남주의 연관성 있는 명명에 비해 강두는 이들과 분명 다르다. 배다른 남매가 아닐까,
억측해 봤는데 실제로 아니더라도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강두/남일-남주의 경계가 확실해 보인다.
(강두와 남일의 사이는 언뜻 봐도 친밀하지 않으며, 남주는 강두와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강두의 태생적 시대가 새마을 운동의 그것이라면,
남일과 남주의 배경은 80년대를 경유하지 않고선 설명할 길이 없다.
'운동권'과 '양궁'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 이렇듯 이들에게 각각의 시대성을 부여하면,
희봉의 "현서야, 네가 죽어서 우리가 드디어 다 모였다"는 말의 이면적 의미를 잡아낼 수 있다.
이들이 모일 수 있는 전제는 '현재'란 시간을 관통해야만 하며, 그 표상이 바로 '현서'란 얘기다.
이는 이들이 왜 그토록 현서의 구출에 목숨을 거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별로 다정해 보이지 않는 가족의 목숨을 건 행보가 설명되지 않는다.
희봉 가족이 탈출해 매점에서 야식을 챙겨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현서가 나타나는 것은
그리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건 그래서 단순히 '꿈'이나 '상상' 신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다.
그들이 공존하는 것 자체가 '현서'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러니까 여기서 현서의 존재는 엇갈린 시간들을 이어주는 역할에 다름 아니다.
현서의 납치도 이에 관한 은유 아닐까. "얼룩진 시간의 산물이 현재를 공격한다"는 비유적 상징성.
그뿐이 아니다.
쫓기다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괴물에게 채여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일과 남주의 뜬금없는 재등장도 이와 관련지어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남일은 운동권 선배의 씁쓸한 배신을 경유해 386이 어떤 변천을 겪어왔는지를 보여주고서,
남주는 활시위를 겨누다가 괴물에게 채여서 역시 사라진다. 남일은 당국에게, 남주는 괴물에게.
거기서 일순간 '정치적 압제'와 '자본의 폭력'을 떠올린 건 아마도 나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깨어나 다시 활동할 수 있는 힘은 결국
괴물이라는 시간의 산물과, 현서라는 현재적 구심점의 양 축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립적 구도로도 읽힐 수 있는데, 과거와 현재의 상이한 시간이
괴물과의 대결을 통해 구심점인 '현재'를 이어나간다는 설정은 통속적일 순 있어도 무의미하진 않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연대의 모습은
봉준호가 말하고자 하는 희망이 이른바 '거대 서사로서의 시간'에 있는 게 아니라
개별적 삶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다소 씨니컬한 형태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바이러스는 없었다는 TV뉴스에 분개하지도 않고, 관심 없다는 듯
발로 꺼버리는 강두의 모습은 봉준호의 씨니컬함의 한 표현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렇게 강두는 현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켜낸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그 시간의 혼선과 단절을 넘어 비로소 다시 진정한 '아버지'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극 초반의 강두처럼 철저히 '잠탱이'고,
그런 잠탱이 아들을 지키는 강두의 모습은 다시 희봉과 닮아있다.
그렇다면 괴물의 거대 시간과 서사를, 그 안에 담긴 사회적 관계를
극복하는 희망 또는 방법은 다시 이 '조그만 현재'로써의 아이인 것인가.
아마 그건 '살인의 추억'에서도 시원스레 결말을 내지 않은 봉준호가,
'괴물'을 통해 다시 한번 관객에게 던지는 나름의 녹록찮은 물음일 것이다.
느낀점
이것으로 느낀점은 자연을 파괴 하지 말고, 가족을 사랑 하자 입니다.
이 괴물도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연 파괴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 영화를 감상한 후로 저는 이 일이 실제로 실현되면 어쩌나 생각 했습니다.
다들 '영환데 뭐,, 별 일 있겠어?' 하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날이 있습니다.
공룡도 탄생했던 이 지구에 우리의 파괴로 괴물이란 상상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 하나쯤 뭐,,' 이런생각으로 모두가 파괴한다면 이 세상에는 괴물 같은 존재가 우리 인간을 파멸 시킬 것 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가족을 구하는 이 가족애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하면 괴물 정도는 이길수 있다.(?)
라는 생각 보다.
가족이 뭉치면 어떤 무엇보다도 강한 힘이 생긴다는 것, 그만큼 우리 가족이라는 것은 끊을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괴물'은 시간과 그 시간을 관통한 한국 사회에 관한 영화로 읽힌다.
'괴물(The Host)'이 단지 괴수가 아닌, 숙주 생물체로 상정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강 다리에 거꾸로 매달린" 괴물의 상징성 또한 이 영화에 대한 논의를 그저 스펙터클한 CG에
한정지을 필요가 없게끔 만든다. 이 영화는 '디워(D-War)'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으니까.
나 스스로가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에 별반 흥미가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튼 이 부분을 제외한 영화의 '내용과 의미' 부분으로 한걸음 시선을 옮긴다면
'괴물'에 대한 호평과 악평의 혼재를 벗어나, 보다 "좁혀서 많이" 얘기할 수 있는 건덕지가 생긴다.
우선 한강에 나타난 괴물의 존재.
다른 곳도 아닌 한강이라는 상징성은 곧바로 '한강의 기적'과 맞닿는다.
최소한 이 작품을 시계열적인 공간과 사회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다면 그렇다.
한미관계의 역학구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주한미군의 독극물 방류로 인해
괴물이 탄생했다는 설정부터, 음습하게 한강다리에 '거꾸로' 매달린 괴물의 풍경까지 그러하다.
무슨 소리냐면, 이건 이른바 '한강의 기적'에 대한 비유와 풍자라는 얘기다.
당국의 대처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를 개인과 공권력의 관계로만 볼 수도 있지만
보다 명확하게는 '숙주'를 그냥 놔두고는, 그로 인해 피해받았고 그에 대항하는 이들에게 대한
철저한 침묵과 격리, 압제로 대응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그간의 한국사회의 모습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설정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류의 리얼리즘으로 이어지지 않은 건
물론 봉준호의 스타일이겠지만,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여튼 한강 다리에 거꾸로 매달린 괴물의 모습과, 그것을 탄생케 한 미국의 존재,
이에 대처하는 당국의 풍경- 이런 것들은 당대의 실체라기보다 '시간의 산물'이며,
그 시간의 엇갈림과 응축이 표현되고 있다고 보면, 이 영화가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간적인 엇갈림들이란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비로소 이해 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캐릭터는 명확한 시대의 전형성을 띠고 있는데,
이 가족은 '희봉/강두/남일-남주/현서'로 구획 되어진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희봉이 전전/전후세대, 현서가 지금의 세대라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남는 것은 강두(송강호 분)와 남일(박해일 분)-남주(배두나 분)의 관계인데,
남일-남주의 연관성 있는 명명에 비해 강두는 이들과 분명 다르다. 배다른 남매가 아닐까,
억측해 봤는데 실제로 아니더라도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강두/남일-남주의 경계가 확실해 보인다.
(강두와 남일의 사이는 언뜻 봐도 친밀하지 않으며, 남주는 강두와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강두의 태생적 시대가 새마을 운동의 그것이라면,
남일과 남주의 배경은 80년대를 경유하지 않고선 설명할 길이 없다.
'운동권'과 '양궁'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 이렇듯 이들에게 각각의 시대성을 부여하면,
희봉의 "현서야, 네가 죽어서 우리가 드디어 다 모였다"는 말의 이면적 의미를 잡아낼 수 있다.
이들이 모일 수 있는 전제는 '현재'란 시간을 관통해야만 하며, 그 표상이 바로 '현서'란 얘기다.
이는 이들이 왜 그토록 현서의 구출에 목숨을 거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별로 다정해 보이지 않는 가족의 목숨을 건 행보가 설명되지 않는다.
희봉 가족이 탈출해 매점에서 야식을 챙겨먹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현서가 나타나는 것은
그리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건 그래서 단순히 '꿈'이나 '상상' 신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다.
그들이 공존하는 것 자체가 '현서'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러니까 여기서 현서의 존재는 엇갈린 시간들을 이어주는 역할에 다름 아니다.
현서의 납치도 이에 관한 은유 아닐까. "얼룩진 시간의 산물이 현재를 공격한다"는 비유적 상징성.
그뿐이 아니다.
쫓기다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괴물에게 채여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일과 남주의 뜬금없는 재등장도 이와 관련지어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남일은 운동권 선배의 씁쓸한 배신을 경유해 386이 어떤 변천을 겪어왔는지를 보여주고서,
남주는 활시위를 겨누다가 괴물에게 채여서 역시 사라진다. 남일은 당국에게, 남주는 괴물에게.
거기서 일순간 '정치적 압제'와 '자본의 폭력'을 떠올린 건 아마도 나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깨어나 다시 활동할 수 있는 힘은 결국
괴물이라는 시간의 산물과, 현서라는 현재적 구심점의 양 축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립적 구도로도 읽힐 수 있는데, 과거와 현재의 상이한 시간이
괴물과의 대결을 통해 구심점인 '현재'를 이어나간다는 설정은 통속적일 순 있어도 무의미하진 않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연대의 모습은
봉준호가 말하고자 하는 희망이 이른바 '거대 서사로서의 시간'에 있는 게 아니라
개별적 삶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다소 씨니컬한 형태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바이러스는 없었다는 TV뉴스에 분개하지도 않고, 관심 없다는 듯
발로 꺼버리는 강두의 모습은 봉준호의 씨니컬함의 한 표현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렇게 강두는 현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켜낸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그 시간의 혼선과 단절을 넘어 비로소 다시 진정한 '아버지'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극 초반의 강두처럼 철저히 '잠탱이'고,
그런 잠탱이 아들을 지키는 강두의 모습은 다시 희봉과 닮아있다.
그렇다면 괴물의 거대 시간과 서사를, 그 안에 담긴 사회적 관계를
극복하는 희망 또는 방법은 다시 이 '조그만 현재'로써의 아이인 것인가.
아마 그건 '살인의 추억'에서도 시원스레 결말을 내지 않은 봉준호가,
'괴물'을 통해 다시 한번 관객에게 던지는 나름의 녹록찮은 물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