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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飛字鵬舉, 相州湯陰人世力農父和, 能節食以濟饑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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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耕侵其地, 割而與之貰其財者不責償飛生時有大禽若鵠飛鳴室上因以爲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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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彌月河決內黃水暴至母姚抱飛坐甕中衝濤及岸得免人異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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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負氣節沈厚寡言家貧力學尤好左氏春秋孫吳兵法生有神力未冠挽弓三百斤弩八石學射於周同盡其術能左右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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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死朔望設祭於其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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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義之:「汝爲時用其徇國死義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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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和四年真定宣撫劉韐募敢戰士飛應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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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有劇賊陶俊賈進和飛請百騎滅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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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卒僞爲商入賊境賊掠以充部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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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遣百人伏山下自領數十騎逼賊壘賊出戰飛陽北賊來追之伏兵起先所遣卒擒俊及進和以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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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王即位飛上書數千言大略謂:「陛下已登大寶社稷有主已足伐敵之謀而勤王之師日集彼方謂吾素弱宜乘其怠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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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潛善汪伯彥輩不能承聖意恢復奉車駕日益南恐不足繫中原之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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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願陛下乘敵穴未固親率六軍北渡則將士作氣中原可復。」書聞以越職奪官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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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年除兼荊南鄂岳州制置使飛奏:「襄陽等六郡爲恢復中原基本今當先取六郡以除心膂之病李成遠遁然後加兵湖湘以殄羣盜。」帝以諭趙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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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曰:「知上流利害無如飛者。」遂授黃復州漢陽軍德安府制置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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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渡江中流顧幕屬曰:「飛不擒賊不涉此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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抵郢州城下僞將京超號萬人敵」,乘城拒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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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鼓衆而登超投崖死復郢州遣張憲徐慶復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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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趣襄陽李成迎戰左臨襄江飛笑曰:「步兵利險阻騎兵利平曠成左列騎江岸右列步平地雖眾十萬何能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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舉鞭指王貴曰:「爾以長槍步卒擊其騎兵。」指牛皋曰:「爾以騎兵擊其步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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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戰馬應槍而斃後騎皆擁入江步卒死者無數成夜遁復襄陽劉豫益成兵屯新野飛與王萬夾擊之連破其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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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奏:「金賊所愛惟子女金帛志已驕惰劉豫僭僞人心終不忘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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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以精兵二十萬直擣中原恢復故疆誠易爲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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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陽郢地皆膏腴苟行營田其利爲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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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候糧足即過江北剿戮敵兵。」時方重深入之舉而營田之議自是興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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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數見帝論恢復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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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手疏言:「金人所以立劉豫於河南蓋欲荼毒中原以中國攻中國粘罕因得休兵觀釁臣欲陛下假臣月日便則提兵趨京據河陽陝府潼關以號召五路叛將叛將既還遣王師前進彼必棄汴而走河北京畿陝右可以盡復然後分兵濬經略兩河如此則劉豫成擒金人可滅社稷長久之計實在此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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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答曰:「有臣如此顧復何憂進止之機朕不中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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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召至寢閤命之曰:「中興之事一以委卿。」命節制光州. 飛方圖大舉會秦檜主和遂不以德瓊兵隸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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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年以復河南大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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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表謝寓和議不便之意唾手燕雲復讎報國之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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授開府儀同三司飛力辭:「今日之事可危而不可安可憂而不可賀可訓兵飭士謹備不虞而不可論功行賞取笑敵人。」三詔不受帝溫言奬諭乃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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兀朮有勁軍皆重鎧貫以韋索三人爲聯拐子馬」,官軍不能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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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役也以萬五千騎來飛戒步卒以麻札刀入陣勿仰視第斫馬足拐子馬相連一馬仆二馬不能行官軍奮擊遂大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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兀朮大慟曰:「自海上起兵皆以此勝今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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兀朮益兵來部將王剛以五十騎覘敵遇之奮斬其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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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時出視戰地望見黃塵蔽天自以四十騎突戰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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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指日渡河而檜欲畫淮以北棄之風臺臣請班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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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奏:「金人銳氣沮喪盡棄輜重疾走渡河豪傑向風士卒用命時不再來機難輕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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檜知飛志銳不可回乃先請張俊楊沂中等歸而後言飛孤軍不可久留乞令班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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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奉十二金字牌飛憤惋泣下東向再拜曰:「十年之力廢於一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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檜逐趙鼎飛每對客嘆息又以恢復為己任不肯附和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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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檜奏德無常師主善為師之語惡其欺罔恚曰:「君臣大倫根於天性大臣而忍面謾其主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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兀朮遺檜書曰:「汝朝夕以和請而 岳飛 方為河北圖必殺飛始可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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檜亦以飛不死終梗和議己必及禍故力謀殺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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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諫議大夫万俟與飛有怨風禼劾飛又風中丞何鑄侍御史羅汝楫交章彈論大率謂:「今春金人攻淮西飛略至舒蘄而不進比與俊按兵淮上又欲棄山陽而不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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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累章請罷樞柄尋還兩鎮節充萬壽觀使奉朝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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檜志未伸也又諭張俊令劫王貴誘王俊誣告張憲謀還飛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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檜遣使捕飛父子證張憲事使者至飛笑曰:「皇天后土可表此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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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命何鑄鞠之飛裂裳以背示鑄盡忠報國四大字深入膚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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既而閱實無左驗鑄明其無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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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命万俟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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禼誣飛與憲書令虛申探報以動朝廷雲與憲書令措置使飛還軍且言其書已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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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坐繫兩月無可證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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或教禼以臺章所指淮西事為言禼喜白檜簿錄飛家取當時御札藏之以滅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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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逼孫革等證飛受詔逗遛命評事元龜年取行軍時日雜定之傅會其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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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暮獄不成檜手書小紙付獄即報飛死時年三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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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棄市籍家貲徙家嶺南幕屬于鵬等從坐者六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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檜死議復飛官万俟禼謂金方願和一旦錄故將疑天下心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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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紹興末金益猖獗太學生程宏圖上書訟飛冤詔飛家自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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檜惡岳州同飛姓改為純州至是仍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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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丞汪澈宣撫荊故部曲合辭訟之哭聲雷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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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詔復飛官以禮改葬賜錢百萬求其後悉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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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廟於鄂號忠烈淳熙六年謚武穆嘉定四年追封鄂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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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9.0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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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飛字鵬舉, 相州湯陰人世力農父和, 能節食以濟饑者


有耕侵其地, 割而與之貰其財者不責償飛生時有大禽若鵠飛鳴室上因以爲名

 

未彌月河決內黃水暴至母姚抱飛坐甕中衝濤及岸得免人異之

 

少負氣節沈厚寡言家貧力學尤好左氏春秋孫吳兵法生有神力未冠挽弓三百斤弩八石學射於周同盡其術能左右射

 

同死朔望設祭於其冢

 

父義之:「汝爲時用其徇國死義乎。」

 

宣和四年真定宣撫劉韐募敢戰士飛應募

 

相有劇賊陶俊賈進和飛請百騎滅之

 

遣卒僞爲商入賊境賊掠以充部伍

 

飛遣百人伏山下自領數十騎逼賊壘賊出戰飛陽北賊來追之伏兵起先所遣卒擒俊及進和以歸

 

康王即位飛上書數千言大略謂:「陛下已登大寶社稷有主已足伐敵之謀而勤王之師日集彼方謂吾素弱宜乘其怠擊之

 

黃潛善汪伯彥輩不能承聖意恢復奉車駕日益南恐不足繫中原之望

 

臣願陛下乘敵穴未固親率六軍北渡則將士作氣中原可復。」書聞以越職奪官歸

 

四年除兼荊南鄂岳州制置使飛奏:「襄陽等六郡爲恢復中原基本今當先取六郡以除心膂之病李成遠遁然後加兵湖湘以殄羣盜。」帝以諭趙鼎

 

鼎曰:「知上流利害無如飛者。」遂授黃復州漢陽軍德安府制置使

 

飛渡江中流顧幕屬曰:「飛不擒賊不涉此江。」

 

抵郢州城下僞將京超號萬人敵」,乘城拒飛

 

飛鼓衆而登超投崖死復郢州遣張憲徐慶復隨州

 

飛趣襄陽李成迎戰左臨襄江飛笑曰:「步兵利險阻騎兵利平曠成左列騎江岸右列步平地雖眾十萬何能爲。」

 

舉鞭指王貴曰:「爾以長槍步卒擊其騎兵。」指牛皋曰:「爾以騎兵擊其步卒。」

 

合戰馬應槍而斃後騎皆擁入江步卒死者無數成夜遁復襄陽劉豫益成兵屯新野飛與王萬夾擊之連破其衆

 

飛奏:「金賊所愛惟子女金帛志已驕惰劉豫僭僞人心終不忘宋

 

如以精兵二十萬直擣中原恢復故疆誠易爲力

 

襄陽郢地皆膏腴苟行營田其利爲厚

 

臣候糧足即過江北剿戮敵兵。」時方重深入之舉而營田之議自是興矣

 

飛數見帝論恢復之略

 

又手疏言:「金人所以立劉豫於河南蓋欲荼毒中原以中國攻中國粘罕因得休兵觀釁臣欲陛下假臣月日便則提兵趨京據河陽陝府潼關以號召五路叛將叛將既還遣王師前進彼必棄汴而走河北京畿陝右可以盡復然後分兵濬經略兩河如此則劉豫成擒金人可滅社稷長久之計實在此舉。」

 

帝答曰:「有臣如此顧復何憂進止之機朕不中制。」

 

又召至寢閤命之曰:「中興之事一以委卿。」命節制光州. 飛方圖大舉會秦檜主和遂不以德瓊兵隸飛.

 

九年以復河南大赦

 

飛表謝寓和議不便之意唾手燕雲復讎報國之語

 

授開府儀同三司飛力辭:「今日之事可危而不可安可憂而不可賀可訓兵飭士謹備不虞而不可論功行賞取笑敵人。」三詔不受帝溫言奬諭乃受

 

兀朮有勁軍皆重鎧貫以韋索三人爲聯拐子馬」,官軍不能當

 

是役也以萬五千騎來飛戒步卒以麻札刀入陣勿仰視第斫馬足拐子馬相連一馬仆二馬不能行官軍奮擊遂大敗之

 

兀朮大慟曰:「自海上起兵皆以此勝今已矣!」

 

兀朮益兵來部將王剛以五十騎覘敵遇之奮斬其將

 

飛時出視戰地望見黃塵蔽天自以四十騎突戰敗之.

 

方指日渡河而檜欲畫淮以北棄之風臺臣請班師

 

飛奏:「金人銳氣沮喪盡棄輜重疾走渡河豪傑向風士卒用命時不再來機難輕失。」

 

檜知飛志銳不可回乃先請張俊楊沂中等歸而後言飛孤軍不可久留乞令班師

 

一日奉十二金字牌飛憤惋泣下東向再拜曰:「十年之力廢於一旦。」

 

檜逐趙鼎飛每對客嘆息又以恢復為己任不肯附和議

 

讀檜奏德無常師主善為師之語惡其欺罔恚曰:「君臣大倫根於天性大臣而忍面謾其主耶!」

 

兀朮遺檜書曰:「汝朝夕以和請而 岳飛 方為河北圖必殺飛始可和。」

 

檜亦以飛不死終梗和議己必及禍故力謀殺之

 

以諫議大夫万俟與飛有怨風禼劾飛又風中丞何鑄侍御史羅汝楫交章彈論大率謂:「今春金人攻淮西飛略至舒蘄而不進比與俊按兵淮上又欲棄山陽而不守。」

 

飛累章請罷樞柄尋還兩鎮節充萬壽觀使奉朝請

 

檜志未伸也又諭張俊令劫王貴誘王俊誣告張憲謀還飛兵

 

檜遣使捕飛父子證張憲事使者至飛笑曰:「皇天后土可表此心。」

 

初命何鑄鞠之飛裂裳以背示鑄盡忠報國四大字深入膚理

 

既而閱實無左驗鑄明其無辜

 

改命万俟禼

 

禼誣飛與憲書令虛申探報以動朝廷雲與憲書令措置使飛還軍且言其書已焚

 

飛坐繫兩月無可證者

 

或教禼以臺章所指淮西事為言禼喜白檜簿錄飛家取當時御札藏之以滅迹

 

又逼孫革等證飛受詔逗遛命評事元龜年取行軍時日雜定之傅會其獄

 

歲暮獄不成檜手書小紙付獄即報飛死時年三十九

 

雲棄市籍家貲徙家嶺南幕屬于鵬等從坐者六人

 

檜死議復飛官万俟禼謂金方願和一旦錄故將疑天下心不可

 

及紹興末金益猖獗太學生程宏圖上書訟飛冤詔飛家自便

 

檜惡岳州同飛姓改為純州至是仍舊

 

中丞汪澈宣撫荊故部曲合辭訟之哭聲雷震

 

孝宗詔復飛官以禮改葬賜錢百萬求其後悉官之

 

建廟於鄂號忠烈淳熙六年謚武穆嘉定四年追封鄂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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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 악비열전은 여러 버전이 있군요.

본문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내용의 번역본이 있어 올려드립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청년 악비 정충(精忠)의 뜻을 세우다

북송 말년인 1103년,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항금(抗金) 장군 악비(岳飛)가 상주(相州) 탕음현(湯陰縣 지금의 하남성 안양)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부모님도 청빈하게 사셨다. 하지만 이렇게 평범한 가정에서 오히려 천고(千古)에 이름을 떨친 대 영웅을 배출했다.

악비는 비록 집안이 가난해서 풍족하게 살진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아주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에게는 품덕(品德 인품과 덕행)이 고상한 부모님이 계셨고 또 무예가 고강한 사부님도 계셨다. 이들이 모두 그의 성장의 길에 도움을 주었다. 가령 ‘송사(宋史)’의 기록에 따르면 부친 악화(岳和)는 평소 자신이 입을 옷과 먹는 음식을 절약해서 늘 이웃을 돕곤 했다. 그는 이렇게 인정 많고 정의감이 두터워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던 아주 선량한 사람(大善人)이었다.

가령 이웃 농가의 농작물이 악(岳)씨 집안 경작지에서 자라면 악화는 그것을 관리해 수확한 다음에 돌려주었다. 또 만약 급히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상환을 요구하지 않았다.[1]

악비가 출생할 때 지붕 위로 한 마리 신기하고 거대한 새가 날아갔는데 몹시 장관이었다. 부모님이 이것을 보고는 장차 아들이 큰 업적을 남길 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것을 믿었다. 그래서 이름을 ‘악비(岳飛)’라 짓고 또 나중에 자를 ‘붕거(鵬舉 대붕처럼 큰일이란 뜻)’[2]라 했다. 이 이름을 보면 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희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모친인 요씨(姚氏) 역시 극히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악비가 출생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이때 갑자기 황하 제방이 터져 탕음현에 큰 홍수가 발생했다. 이 갑작스런 뜻밖의 상황에도 모친은 급한 가운데 지혜를 내어 악비를 품에 안고 큰 항아리로 뛰어들었다. 두 모자는 이렇게 항아리 속에 앉아 물결에 따라 떠내려갔고 나중에 강변에 도착한 후 구조되었다.[3]

위기에 처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고 절처봉생(絕處逢生 역주: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다)의 지모(智謀)를 발휘한 것은 모두 전장에서 반드시 갖춰야 할 소질이다. 악비는 병법(兵法)은 물론 실전(實戰)에서 모두 자신만의 깨달음이 있었고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용감한 모친에게 물려받은 유전자가 아닐까?

소년 시절 악비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비범한 능력을 드러냈다. 그는 내성적이지만 성격이 돈독했고 역사서와 병법(兵法) 공부에 힘을 들였다. 특히 ‘춘추좌전(春秋左傳)’과 ‘손오병법(孫吳兵法 역주: 손자와 오기의 병법)’에 자못 심득이 있었다. 그는 또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닌 무학(武學)의 기재였다. 스물이 되기 전에 약 3백 근의 활과 8석의 궁노(弓弩)를 당길 수 있었다.[4]

물론 아무리 좋은 원석이라도 갈고 닦지 않으면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없다. 악비는 현지의 호걸(豪傑)이자 역사적으로 유명한 무술가였던 주동(周同)을 스승으로 삼아 뛰어난 무공을 깊이 있게 연마했다. 특히 좌우 두 손으로 모두 활을 쏠 수 있는 절기(絶技)를 익혔다. 나중에 악비는 이 절정의 무예를 수하 장수들에게 전수해주었고 송나라 군대의 실전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주동(周同)이 사망하자 악비는 몹시 비통해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늘 제물을 마련해 스승의 무덤 앞에 찾아가 제사를 올리곤 했다. 악화가 그의 효심을 알고는 크게 칭찬했고 또 아들에게 무예를 연마하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제때 일깨워주었다. “만약 장래 네게 나라에 보답할 기회가 있다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사생취의(捨生取義) 할 수 있겠느냐?”[5]

공자는 일찍이 “10가구가 사는 읍(邑)에는 반드시 나처럼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악화야말로 공자가 말한 충의(忠義)로 나라에 보답하는 현인(賢人)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송나라는 내우외환이 겹쳐 있었고 북방의 금나라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악비가 난세를 만났으니 바로 그가 나라를 위해 힘 쓸 때가 온 것이다. 선화(宣和) 2년(1120년) 송과 금 두 나라는 ‘해상맹약(海上盟約)’을 맺고 공동으로 요(遼)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송나라 장군 유겹(劉韐)이 ‘용감한 전사’를 모집하자 막 스물이 된 악비가 자원해서 용사(勇士)가 되었다.

본시 전투란 극히 위험한 일이라 언제든 생명을 잃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군인은 남북을 옮겨 다니며 싸우다보니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란(戰亂)의 시대를 사는 군인들은 거의 가족과 연계가 단절되었다. 악비는 비록 종군(從軍)할 뜻을 세우긴 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멀리 떠나지 말라”는 옛 가르침 때문에 고민했다. 자신이 고향을 떠난 후 연로한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아들의 대의(大義)를 잘 알던 모친이 나섰다. 이것이 저 유명한 ‘악모자자(岳母刺字 악비 모친이 글씨를 새겨 아들의 뜻을 격려한 이야기)’란 미담이다. 모친은 악비를 도와 ‘충과 효 둘을 완전히 할 순 없다’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즉 몸소 아들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란 4글자를 쓰고는 자수바늘로 한 점 한 점 새긴 후 먹물로 칠했다.[6] 이때부터 악비는 전장에 나가 적을 죽이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나라에 보답할 신념을 더 확고히 했으며 평생을 행군과 전투 중에서 보냈다.

《송사》의 또 다른 기록에는 악비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기 위해 옷을 벗고 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심문하던 관리는 그의 등에 새겨진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커다란 4글자가 살 속 깊이 새겨진 것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7]

‘정충보국’이든 ‘진충보국’이든 모두 악비의 충의(忠義)로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줌에는 차이가 없다. 부모님의 정성스런 가르침 덕분에 그는 나라의 치욕를 잊지 않았고 강산을 되찾을 포부를 품었으며 역사적으로 깊은 감동을 준 충의(忠義)문화를 남겨놓았다.

나중에 장상(將相 장군과 재상)의 지위에 오른 후 악비는 자신의 종군 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나라에서 연운16주를 평정하려던 초기 나는 막 성년이 되어 종군을 시작했다. 나는 나라를 위해 온 마음과 힘을 다 쓸 것을 맹세했고 내 집에 대해서는 일찍이 잊어버렸다.”

이 말은 전장을 누빈 악비의 일생을 개괄한 것이자 악비 부모님의 고심한 가르침이 응결된 것이다.

주석:

[1] 《송사(宋史)》365권:父和,能節食以濟饑者。有耕侵其地,割而與之;貰其財者不責償。

[2] 《宋史》卷365:飛生時,有大禽若鵠,飛鳴室上,因以爲名。

[3] 《宋史》卷365:未彌月,河決內黃,水暴至,母姚抱飛坐甕中,沖濤及岸得免。

[4] 《宋史》卷365:少負氣節,沉厚寡言,家貧力學,尤好《左氏春秋》、孫吳兵法。生有神力,未冠,挽弓三百斤,弩八石。

[5] 《宋史》卷365:父義之,曰:“汝爲時用,其徇國死義乎。”

[6] [清]錢彩《說嶽全傳》第22回。

[7] 《宋史》卷365:初命何鑄鞠之,飛裂裳以背示鑄,有“盡忠報國”四大字,深入膚理。

[8] 《鄂國金佗稡編》卷14《乞終制劄子》:國家平燕雲之初,臣方束發,從事軍旅,誓期盡瘁,不知有家。

초기 3차례 전투에서 병법을 활용해 적을 무찌르다

처음 군에 들어가 금나라와 싸울 때 악비는 비록 직위는 낮고 미천했지만 비범한 무공과 재능으로 송나라 노장 종택(宗澤)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문관 출신인 종택은 악비의 작전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네의 용감한 기지와 무예 재능은 고대의 훌륭한 장수들을 훨씬 뛰어넘네. 하지만 자네가 야전(野戰)을 좋아하는 것은 만전(萬全)의 계책은 아닐세.”[1]

이에 대한 악비의 대답은 일반적인 지혜를 훨씬 뛰어넘었다.

“진세를 잘 갖춘 후에 전투하는 것은 용병에서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영활하게 운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깊은 생각과 임기응변에 달려 있습니다.”[2] 악비는 병법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이전에 쌓은 전공(戰功)은 오랫동안 사막을 누벼왔던 백전노장 종택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찬탄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렇다면 악비는 어떤 식으로 병법의 묘를 발휘해 예상치 못한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송사(宋史)》에는 악비가 초기 출전했던 한차례 전투가 나오는데 바로 ‘매복전(埋伏戰)’으로 고향인 상주(相州)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당시 도준(陶俊)과 가진(賈進)을 우두머리로 하는 도적들이 이 지역에서 화근이 되자 조정에서 여러 차례 병력을 파견해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때 고향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악비가 자청해서 임무를 맡아 2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몇천 명에 달하는 도준의 대군을 상대했다.

군사를 이끌고 급히 오백 리 길을 달려 상주에 도착한 후 악비는 서둘러 전투에 나서는 대신 방비를 엄하게 하며 지략을 이용해 적의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그는 우선 30명의 부하들을 상인으로 가장시켜 많은 짐을 싣고 적들의 주둔지 근처로 접근하게 했다. 과연 도준의 수하들이 이익에 눈이 멀어 30명을 붙잡아 영채로 데려갔다. 적을 유혹하는데 성공한 악비는 또 100명의 병사들을 적진이 위치한 산자락에 미리 매복시켰다. 이튿날 악비는 수십 명만을 데리고 적진 앞을 찾아가 적을 도발했다. 도준은 자신의 세력이 많은 것을 믿고 적을 얕잡아보았다. 결국 가부좌 자세로 말을 타더니 욕을 하면서 출전해왔다.

양측 군사가 잠시 교전한 후 악비는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후퇴하며 적들을 매복병이 있는 곳으로 유인했다. 약속한 장소에 이르자 악비가 돌아서며 선봉에 나서 용맹하게 적을 무찔렀다. 앞뒤 송나라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져 적군을 협공했다. 이 와중에 도준 등 적장이 죽으니 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며 순식간에 진영이 혼란해졌고 크게 패했다. 악비는 이처럼 병법을 활용한 첫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로 기적적인 효과를 보았다.

정강(靖康) 원년(1126년) 송과 금이 태원(太原)에서 전투를 벌이자 악비는 명을 받고 백여 명의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적진을 정탐하러 나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갑자기 금나라 대군과 맞닥뜨렸다. 근거리에서 서로 부딪치려는 순간 아무도 진법을 운용해 병력을 배치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악비가 순간적인 결단력으로 용감하게 소리를 지르며 금나라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장수가 앞장서며 솔선수범하자 나머지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고무되었고 모두 악비와 함께 용맹하게 적을 죽여 놀라운 실전능력을 보여주었다.

원래 용맹하기로 유명한 금나라 병사들이 뜻밖에 악비군대의 사기에 놀라 저절로 전열이 흩어졌고 싸우기도 전에 저절로 패했다. 반면 악비는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함으로 가는 곳마다 무공을 이용해 적을 쓸어버리고 또한 적을 제압하는 효과에 도달했다. 이는 병법 중의 심리전술을 활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강의 난(역주: 정강의 치라고도 하면 1126년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패해 화북을 잃고, 황제인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의 포로로 잡힌 사건을 말함)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악비는 강왕(康王) 조구(趙構 훗날 남송의 고종)를 중심으로 한 근왕부대에 투신했고 종택의 휘하에서 온힘을 쏟았다.

당시 종택의 군대는 곧장 변경(汴京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향해 진격했는데 도중에 금나라 병사들이 배치한 겹겹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악비 역시 그중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겨울이 되자 송나라 군은 하남 활주(滑州) 일대에 주둔하며 금나라 병사들과 황하를 마주하고 대치했다. 강물이 단단히 얼자 악비는 곧 다른 장수들과 함께 얼음 위에서 말을 타거나 활 쏘는 연습을 하면서 황하를 건너 적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한번은 악비가 백여 명의 기병과 얼음위에서 무예를 연마할 때 갑자기 대규모 적군이 건너편에서 습격해왔다. 악비는 신속한 판단력으로 병사들을 격려하며 “적이 비록 숫자는 많지만 우리 군의 허실을 모른다. 우리는 마땅히 저들을 쫓아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즉시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3]

말을 끝낸 악비는 기병들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때 금나라 진영에서 한 대장(大將)가 큰 칼을 휘두르며 악비에게 도전했다. 악비는 태연하게 응전하며 무기를 뽑아 대항했는데 뜯밖에도 적장의 대도(大刀)를 한 치 넘게 깊이 잘라버렸다. 악비는 또 무기를 뽑아 들고 단칼에 적장을 베어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대장이 죽으니 나머지 금나라 병사들은 전투의지를 상실했고 1백여 명의 송나라 군사들이 승기를 잡고 추격에 나서 적군을 대파했다.

이처럼 뛰어난 악비의 군사적인 책략은 한나라 초기의 대장군이자 병선(兵仙)인 한신(韓信)을 떠올리게 하는데 한신 역시 ‘배수전’을 칠 때 병법의 활용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지모를 활용해 극히 적은 병력으로 최소한의 손실로 적군을 대파했다. 원래 역사적인 명장(名將)들은 모두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다!

주석:

[1] 《宋史》卷365:戰開德、曹州皆有功,澤大奇之,曰:“爾勇智才藝,古良將不能過,然好野戰,非萬全計。”因授以陣圖。

[2] 《宋史》卷365:飛曰:“陣而後戰,兵法之常,運用之妙,存乎一心。”

[3] 《鄂國金佗續編》卷4:先臣麾其下曰:“敵雖眾,未知吾虛實。及其未定擊之,可以得志。”@#

4차례 종군한 ‘국사(國士)’

1127년 연호가 정강(靖康)에서 건염(建炎)으로 변했다. 강왕 조구가 고종(高宗)이 되어 새로 제위에 올랐고 이때부터 정식으로 남송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0대였던 새로운 천자는 금나라에 대해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태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젊었던 악비는 황제에게 간절하면서도 감동적인 한 통의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등극하신 것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곳이 생기고 나라에 주재자가 생긴 것으로, 송나라를 망하게 하려던 금인(金人)들의 음모를 이미 완전히 격파하신 것입니다.”[1]

근왕(勤王)의 군대는 날로 강력해졌고 금나라 병사들은 해이해져 전투를 소홀히 했으니 그야말로 군대를 이끌고 북벌(北伐)에 나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황잠선(黃潛善), 왕백언(汪伯彥) 등이 황제를 부추겨 도읍을 남쪽으로 옮기고 지역에 안주하게 했다. 악비는 고종이 동경(東京)인 개봉을 회복해 항금(抗金)의 대업을 주관하길 원했다. 그는 또 그때가 되면 “장수들이 한마음이 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가” “중원 땅 회복은 시간문제”[2]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당시 악비의 나이는 겨우 25세였고 관직은 불과 7품의 하급 무관에 불과했다. 하지만 방대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써서 당시의 시대 병폐를 정확히 지적하는 간언을 올렸다. 그의 비범한 충성심과 용기, 담력과 식견은 많은 이들을 탄복시켰다. 하지만 조정에는 여전히 주화파(主和派) 간신들이 황제를 꼬득여 절개를 꺾고 투항하게 했으며 주전파 충신들이 뜻이 있어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잠선 등은 “하찮은 관리가 직분을 뛰어넘어 부적당한 말을 했다(小臣越職,非所宜言)”[3]는 이유로 악비의 관직을 박탈했다. 군영에서 쫓겨난 악비는 어쩔 수 없이 “혈혈단신으로 곤경에 처해 객지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4]

20세에 머리를 묶고 종군(從軍)에 나선 후 악비는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가 삼년상을 치른 후 다시 종군했다. 하지만 위임장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군대를 떠나야 했다. 이렇게 두 번을 떠난 후 3번째 종군에서 직언(直言)으로 상서를 올렸다는 이유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것이다. 비록 악비의 초기 군 생활은 마난(磨難)의 연속이었지만 마음속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던 악비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8월 그는 의연히 북상해 항금의 최전선인 대명부(大名府 지금의 하북성 대명현 동남부 지역)로 달려갔다. 이곳에 의병을 모집하는 하북(河北) 초무사(招撫司 역주: 전란으로 흩어진 백성을 모으고 위로하는 관청)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무사에서 조구령(趙九齡)이란 사람이 악비를 맞았다. 그는 항금 명신 이강거(李綱舉)가 천거한 관리로 북송 말기 악비의 작전능력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를 ‘천하기재(天下奇才)’[5]로 평가해 수장인 장소(張所)에게 힘껏 추천했다.

장소 역시 재주를 사랑하고 아끼는 대장이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비록 권력자들의 죄를 얻어 관직에서 쫓겨난 몸이었지만 장소는 정중하게 ‘국사(國士)의 예로 대우했다.’[6] 여기서 ‘국사’란 나라에서 가장 우수하고 출중한 동량이 되는 재목을 말하는데 흔히 존경의 뜻으로 ‘국사무쌍(國士無雙 역주: 비교할 대상이 없는 천하제일의 인물이란 의미)’이라 불렀다. 역사적으로 용병의 신(神)이자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의 대장 한신(韓信)과 같은 사람만이 이런 존칭을 감당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장소는 악비를 전신(戰神 한신을 말함)의 환생으로 보았고 금나라를 토벌해 나라를 구할 가장 중요한 위치에 그를 천거했다.

그렇다면 장소는 어떤 식으로 국사인 그를 대우했을까? 우선 그는 악비의 진짜 능력에 대해 간절히 알고 싶어 물었다. “당신 혼자 얼마나 많은 적병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악비가 대답했다. “용기란 믿을 게 못되며 용병에선 지략을 정하는 게 우선입니다.(勇不足恃也,用兵在先定謀)”[7]

악비의 말뜻은 자기 혼자만이 지닌 무예만으로는 최상의 장수가 될 수 없고 오직 지모(智謀)만이 승부를 결정짓는 관건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병법(兵法)에서 “가장 우수한 병사는 지모를 자랑하고 그 다음이 전투능력을 자랑한다.”고 했다. 《송사》에는 악비가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 난지(欒枝 역주: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부로 진문공을 도와 성복 전투에서 초나라에 승리했다.)가 나뭇가지를 전차 뒤에 묶어 흙먼지를 일으켜 초나라 군사들이 진나라가 패해 도망치는 것으로 속인 후 크게 이긴 것을 예로 들었다. 또 초나라의 막오(莫敖 역주: 재상에 해당하는 초나라의 최고위 관직) 굴하(屈瑕)가 나무꾼의 계책을 답변확정해 교(絞)나라를 물리친 것을 예로 들며 전장에서 모략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장소가 그의 말을 듣고는 숙연하게 공경하고 찬탄하면서 “당신은 절대 행오(行伍 군대의 대열 여기서는 평범한 사병을 말함) 속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8]라고 했다.

정충보국(精忠報國)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악비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수록 서로 의기투합했다. 악비는 장소에게 격앙된 어조로 자신의 견해를 말했고 잃어버린 하북(河北) 땅을 되찾으려는 뜻을 밝혔다. 본래 북송의 도성인 개봉(開封)은 하북의 울타리가 있어야만 안정될 수 있는 곳이다. 만약 장소가 병력을 내어 출정한다면 그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이며 만 번을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이렇게 상세한 대화를 나눈 후 장소는 악비야말로 쉽게 만날 수 없는 천하의 기재임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에 평민 신분에 불과했던 그를 파격적으로 발탁해 수무랑(修武郎 역주: 송나라 때 52개 무관 관위 중 44번째 직위) 중군통령(中軍統領)을 맡겼고 또 아주 빨리 무경랑(武經郎 역주: 무관 중 40번째 관위)으로 승진시켰다.

비록 한신과 같은 대장군(大將軍)은 되지 못했지만 악비는 종택 이외에 또 다시 진정으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4번째 군 생활을 펼치게 되었다. 타고난 신력(神力)과 충성심으로 악비는 신속하게 많은 군공을 세웠고 송나라 군영에서 삼군을 통 털어 용맹이 으뜸인 대영웅이 되었다.

예를 들면, 수 만 명에 달하는 금나라 병사들과 맞서 싸울 때의 일이다. 선임인 왕언준(王彥准)이 휴전을 준비하면서 용맹한 악비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수하에 거느린 소수의 인마(人馬)만을 거느리고 홀로 출전했다. 그는 수하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우리가 비록 인원수는 적어도 승리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9]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악비 자신도 금나라 병사들과 목숨을 건 격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 십여 군데 상처를 입었지만 끝내 금나라 병사들을 압박해 물러나게 했다.

송나라의 유송년(劉松年)이 그린 《중흥 4장수 악비(岳飛), 장준(張俊), 한세충(韓世忠), 유광세(劉光世)의 그림》 중 일부. 가운데가 악비다.

또 건염 3년(1129년) 악비는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개봉성 남쪽 남훈문(南薰門)에서 자칭 50만 대군을 자랑하던 금나라의 왕선(王善), 조성(曹成) 군대를 물리쳤다. 당시 성 밖에서 금군의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퍼지자 송나라 군은 모두 겁을 먹었고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악비만은 미리 대책을 마련했다는 듯 확신을 갖고 말했다. “내가 제군들을 위해 적을 깨뜨리는 것을 보라!” 그러면서 단기필마로 선두에 서서 왼손으로는 활과 화살을 잡고 오른 손으로 철창(鐵槍)을 들고 용사들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이들이 적군 가운데를 종횡무진하면서 약 5~6시간 격전을 벌이자 과연 금나라 군사들의 대열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대오가 흩어져버렸다.[10]

악비의 작전은 무공, 모략, 담략과 식견은 물론이고 충의(忠義)에서도 모두 으뜸이었고 북송과 남송을 통틀어 전쟁의 신으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이 병사들의 선봉에 서서 주변 인물들을 감화시켰고 또한 자기 주변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용사들을 모으니 남송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정예인 악가군(岳家軍)이 조성되었다.

주석:

[1],[2] 出自《鄂國金佗稡編》卷10《南京上皇帝書略》:陛下已登大寶,黎元有歸,社稷有主,已足以伐敵人之謀。⋯⋯將帥一心,士卒作氣,中原之地指期可複。

[3] 出自《鄂國金佗續編》卷17。

[4] 出自《鄂國金佗稡編》卷11《乞以明堂恩奏張所男宗本奏》。

[5]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九齡一見,便識公爲天下奇才。

[6],[7],[8] 出自《宋史》卷365:詣河北招討使張所,所待以國士,借補修武郎,充中軍統領。所問曰:“汝能敵幾何?”飛曰:“勇不足恃,用兵在先定謀,欒枝曳柴以敗荊,莫敖采樵以致絞,皆謀定也。”所矍然曰:“君殆非行伍中人。”飛因說之曰:“國家都汴,恃河北以爲固。苟馮據要沖,峙列重鎮,一城受圍,則諸城或撓或救,金人不能窺河南,而京師根本之地固矣。招撫誠能提兵壓境,飛唯命是從。”所大喜,借補武經郎。

[9] 《鄂國金佗稡編》卷4:先臣預戒士卒曰:“吾巳兩捷,彼必並力來。吾屬雖寡,當爲必勝,計不用命者斬!”

[10] 《鄂國金佗稡編》卷4:春正月,賊首王善、曹成、張用、董彥政、孔彥舟率眾五十萬,薄南薰。⋯⋯時先臣所部才八百人,眾皆懼不敵。先臣謂曰:“賊雖多不整也,吾爲諸君破之。”左挾弓矢,右運鐵矛,領數騎橫沖其軍。賊軍果亂,後騎皆死戰,自午及申,賊眾大敗。

건강 수복과 악가군 최초의 대첩

“봄바람 십 리를 지나니 온통 푸른 냉이와 보리로구나(過春風十里,盡薺麥青青)” ‘양주만(揚州慢)’이란 노래에 나오는 이 가사는 이민족이 양주(揚州) 고성(古城)를 침입한 이후 황폐해진 스산한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남송 초기 양주뿐 아니라 강남(江南) 강산의 절반이 모두 금나라 병사들의 철기 발굽아래 전쟁의 겁난을 겪고 있었다. 이런 난세(亂世) 속에 성장한 대장 악비는 슬픈 곡조 중에서 남다른 성조(聲調)를 표현했다.

“過春風十裏,盡薺麥青青。”一曲《揚州慢》,唱出外族入侵時古城揚州的蕭條景象。南宋初年,不僅是揚州,江南半壁江山,都在金兵鐵蹄下遭受著戰火浩劫。亂世中成長起來的大將岳飛,在一片哀音中譜出不一樣的聲調。

이때는 고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황권이 미약했고 간신들의 부추김에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에서 양주로 도읍을 옮겼다. 이는 남송이 더 이상 원래 국토를 수복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불과 1년 후 금나라가 갑자기 송을 공격해왔다. 당시 공격에 나선 병마의 기세가 몹시 흉흉했고 직접 양주를 공략해 황제를 포로로 잡을 속셈이었다.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황급히 도망쳐야 했고 다시 항주(杭州)로 피난 갔다. 결국 버려진 양주성은 금나라인들에게 멋대로 노략질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두 차례 종산을 지키며 외로이 금에 맞서다

북방에서는 동경인 개봉(開封)을 지키던 사령관이었던 명신(名臣) 종택(宗澤)이 사망한 후 그의 후임이 겁 많고 전투를 두려워하던 두충(杜充)이 임용되었다. 금나라 사람들이 병력을 철수해 북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제일 처음 떠올린 생각이란 금군이 돌아가는 길에 혹시라도 개봉을 공격할지 모른다며 두려워했다. 이에 거짓으로 근왕(勤王)을 면분으로 전군을 성 남쪽아래에 버려두고는 항주로 가서 고종을 만났다.

장소(張所)와 종택에서 악비에 이르기까지 충직한 장수들은 정강(靖康)의 치욕을 잊지 않았고 여전히 중원을 수복해 붙잡혀간 두 황제를 되찾고 나라를 구할 웅지를 품고 있었다. 악비는 자기 목숨만 생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두충의 행동을 목격하고 여러 차례 그에게 권고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건염(建炎) 3년(1129년) 금올출(金兀朮)이 대군을 이끌고 남침해 건강 북쪽 가까이까지 접근했다. 두충이 황급히 4만 여 병력을 보내 응전했고, 악비에게도 금군과 백병전을 펼칠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두충이 금나라에 항복하면서 대부분의 송군(宋軍)이 싸우다가 또는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일부는 힘껏 싸우다 전사했다. 이에 강남의 정세가 위기에 빠졌다.

결국 송군은 오직 악비 부대만이 외롭게 남아 어두워질 때까지 악전고투를 벌였다. 고립무원이라 식량공급마저 끊기자 악비의 군대는 어쩔 수 없이 종산(鍾山 지금의 남경 자금산)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튿날 동이 트자 악비는 다시 한 번 금군과 큰 전투를 벌였다. 비록 피투성이가 된 채로 분투했지만 여전히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물러나 종산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원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용맹하게 싸우던 악비의 부대에도 점차 전투를 꺼리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어떤 병사는 강력한 금군 앞에 절망을 느껴 몰래 도주하기도 했다. 게다가 날씨마저 입추(立秋)에 접어들면서 삭풍이 불고 먹구름이 잔뜩 끼어 진영의 분위기를 더 어둡게 했다. 하지만 악비는 이에 영향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떨쳐 일어나 출전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독려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를 흘려가며 말했다. “우리는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충의(忠義)로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 적을 죽여 공을 세우고 청사에 이름을 남기자. 만약 너희가 투항하거나 도망친다면 결국에는 목숨도 잃고 명예도 훼손될 것이다. 오늘 전투에서 우리는 오직 죽기를 각오할 뿐이니 멋대로 떠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1]

악비의 비분강개해 격앙된 말과 영웅적인 기개가 전장에 있던 병사들에게 전염되자 전군의 사기가 크게 일어났다. 여러 병사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직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종산 위의 웅지는 이렇게 격렬했지만 금올출이 지휘하는 금나라 군대는 그 수가 10만에 달했다. 이들은 그동안 줄곧 이곳저곳을 노략질하면서 건강, 항주를 차례로 함락시켰고 고종은 신하들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배를 타고 바다로 피난을 가야 했다. 과연 악비의 외로운 부대는 대송의 이 위기국면을 어떻게 만회할까?

의흥으로 군사를 옮기고 지역을 편안히 하다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악비는 우선 부대를 광덕종촌(廣德鍾村)에 주둔시켰다. 식량과 말먹이를 준비하기 위해 악비는 모친과 상의한 후 가산을 전부 털어 병사들이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게 했다. 난세의 군대란 늘 백성을 약탈해 살아가게 마련이었지만 저 유명한 악가군(岳家軍)의 첫 번째 군기는 바로 “얼어 죽을지언정 남의 집을 부수지 않고 굶어죽을지언정 백성들을 노략질하지 않는다”[2]는 것이다. 이 군기는 이때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악비는 엄한 군령을 수립해 병사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현지 백성들은 평상시처럼 정상적으로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매매할 수 있었다. 악비의 어짊과 백성에 대한 사랑은 많은 이들의 존중과 추대를 받았다. 흩어졌던 병사들도 갈수록 많이 충심으로 귀부해왔다. 사람들은 또 이 군대를 가리켜 ‘악야야군(岳爺爺軍 악비어르신의 군대란 뜻)’이라 존칭했다.

이렇게 되자 악비의 군대는 인원이 신속하게 불어나 약 1만여 명으로 확충되었고 송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거듭났다. 악가군이 처음으로 규모를 갖추게 되었지만 식량문제는 반대로 더 악화되었다. 아마도 하늘이 악가군을 도왔음인지 어떤 사람이 대군을 의흥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다. 의흥 지현(知縣)이 악비가 인근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각 서신을 보내 깊은 정으로 그를 초대했다. 또 자신만만하게 “의흥에 있는 식량만으로도 1만 대군이 10년 이상 먹을 수 있도록 공급할 수 있습니다.”[3]라고 말했다.

건염 4년(1130년) 봄, 악비는 정식으로 의흥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수개월 안에 악가군이 경계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히 했으며 도적들을 평정하자 작은 성에 불과하던 의흥은 전란 중에 안전하고 즐거운 낙토로 변했다. 이때 곽길(郭吉)이란 이름의 도적이 있었는데 악가군이 온다는 말이 퍼지자 소문을 듣자마자 달아났다.

또 척방(戚方)을 우두머리로 하는 떠돌이 도적들 역시 악가군에 패해 궤멸되었다. 하지만 악가군은 단 한 번도 백성들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그러자 이 지역 관리와 백성들은 편안히 휴양하면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고 각자 맡은 업종이 전보다 더 흥성하고 번영해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인근 군현의 백성들마저 악가군이 집과 나라를 보호해준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속으로 동경하면서 앞다퉈 고향을 떠나 의흥으로 이주해왔다. 사람들은 모두 악비의 백성 사랑이 친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악가군은 군기가 몹시 엄정하다고 칭찬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신 것은 쉽지만 공께서 나를 보호해주신 것은 어렵다!”[4]고 했다.

또 악비의 호국보민(護國保民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을 보호함)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위한 ‘생사(生祠 역주: 살아 있는 인물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사당)’를 건립했고 지현이 손수 글씨를 써서 비문을 새겼다. 남송 이후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악비의 생사는 악왕묘(岳王廟)로 변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하고 향불을 올리는 명소가 되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극히 보기 드문 현상이다.

악가군이 의흥을 진수(鎭守)할 때 강남 여러 곳의 관군과 의병들이 점점 집결했다. 금올출은 수륙양면 두 전선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당하자 마침내 건염 4년 초 병력을 퇴각시켰다. 퇴각하는 길에 그가 상주(常州)를 지날 때 악비의 부대가 의흥에서 기습해 4번 싸워 4번을 이겼다. 금나라 병사는 사상자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번 전투는 송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통쾌하게 만들었고 금나라 병사들에게 반격하려는 악비의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길에 금사사(金沙寺)를 지날 때 악비는 붓을 휘둘러 제사(題詞)를 적어 고찰에 웅장한 일필(一筆)을 남겨놓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뛰어난 공을 세워 금나라 오랑캐들을 멸하고 국토를 회복한 후 두 분 폐하를 맞이하여 반드시 대송을 진흥시킬 것이다. 그때 다시 이곳에 들러 돌에 공적을 기록한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5]

한세충과 연대해 건강을 되찾다

상주에서 세운 전공(戰功)은 악비의 명성을 멀리까지 퍼지게 했으며 조정을 흥분시켰다. 당시 작은 지방정권에 만족하고 있던 고종이 일편단심 나라에 충성하고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청년장교를 처음 주목했다. 악비의 투지를 격발시키기 위해 고종은 친히 조서를 내려 오랫동안 사막에서 싸워왔던 한세충(韓世忠) 장군과 공동 작전을 펼쳐 건강(建康)을 수복하라고 했다. 남송의 용감무쌍한 두 장군은 서로 합작해 금나라에 맞서 공동으로 송군의 불굴의 견인함과 뛰어난 전투능력을 펼쳐보였다.

한세충은 황천탕(黃天蕩)에서 불과 8천의 수군으로 10만 금병과 맞서 48시간이나 대치했다. 이는 중국 전쟁 역사상 모든 이들이 칭송하는 신화가 되었다. 같은 기간 육로에서 작전을 맡은 악가군 역시 마찬가지로 비범한 전과를 올렸다. 청수정(清水亭)의 격전에서 악가군은 금군 장수 170여 명을 죽이고 갑옷, 활 및 화살 등 3천여 건을 포획했다. 이는 금군이 강남을 도하한 이래 처음 겪은 큰 패배였다.

건염 4년 5월 초, 금올출이 건강에서 철군을 준비했다. 악비는 적의 동향을 간파하고 미리 선수를 쳤다. 그는 사전에 건강 남쪽 우두산(牛頭山)에 복병을 매복시킨 후 금병이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악비는 백여 명의 흑의(黑衣) 병사들을 파견해 적진에 몰래 잠입하게 했다. 금나라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못해 당황해서 무조건 찌르고 죽이고 하다가 결국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금나라 병사들은 나중에야 자신들이 같은 편을 서로 죽인 것을 발견했고 이후 순찰과 경비를 강화했다.

악비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정예병력을 파견해 몰래 순찰하던 금나라 병사를 포로로 붙잡아 적들이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게 했다. 결국 적들은 악비의 뛰어난 계책에 말려 끊임없이 많은 장수와 병사를 잃었다.

나중에 금올출은 요행히 한세충의 수군을 격파하고 건강에서 강을 건너 도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안(靜安)에서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던 금나라 병사들을 사기가 충천한 악가군이 공격해왔다. 이들은 우두산에서 달려와 계속 금나라 병사들과 분투했다. 정안 전투에서 악비는 병사들을 이끌고 적병 3천여 명을 죽이고 3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 갑옷과 다른 치중(輜重 군수품)을 만 단위로 획득해 다시 한 번 크고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악비와 한세충의 협공 하에 금올출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이후 강남 일대에서 더는 금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이때부터 금나라 사람들이 함부로 강남을 엿보지 못했다. 겨우 반달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악비는 순조롭게 건강을 회복했고 백성들을 편안히 했다.

건강은 본래 강남에서 ‘인후와 같은 요충지’로 예전부터 전략적인 의미가 아주 큰 곳이었다. 때문에 건강을 수복한 전투는 악가군 최초의 휘황한 전과가 되었고 악비 역시 조정에서 위아래로 큰 칭찬을 받았다.

주석:

[1] 出自《鄂國金佗稡編》卷4:先臣灑血勵眾曰:“我輩荷國厚恩,當以忠義報國,立功名,書竹帛,死且不朽。若降而爲敵,潰而爲盜,偷生茍活,身死名滅,豈計之得耶?⋯⋯今日之事,有死無二,輒出此門者斬!”⋯⋯眾皆幡然,懽呼曰:“惟統制命!”

[2] 出自《宋史》卷365:軍號“凍死不拆屋,餓死不擄掠”。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5:令、佐聞先臣威名,同奉書以迎,且謂邑之糧糗,可給萬軍十歲。

[4] 出自《鄂國金佗續編》卷30: 人莫不謂:“父母生我也,易;公之保我也,難。”

[5] 出自《鄂國金佗稡編》卷19《廣徳軍金沙寺壁題記》:然俟立奇功,殄仇敵、複三關、迎二聖,使宋朝再振,中國安強。他時過此,得勒金石,不勝快哉!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강남 평정

어려서 군문(軍門)에 들어와 건강을 수복하기까지 악비는 8년간 전장을 누볐고 몸소 2백여 차례의 전투를 치른 후 마침내 정예부대를 이끄는 청년장수가 되었다. 금병(金兵)이 물러난 후 과거 송군의 패잔병들이 도적으로 전락해 계속해서 강서(江西)와 양호(兩湖 호북과 호남) 지역에서 난을 일으켰다. 악비의 군대는 잠시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도적떼 평정에 투입되었다.

소흥(紹興) 원년(1131년) 정월 10일 악비는 조정의 명을 받고 강회초토사(江淮招討使) 장준(張俊)을 따라 이성(李成)을 토벌하러 나섰다. 이성은 자칭 ‘이천왕(李天王)’으로 금나라 병사들이 남침한 혼란한 시기에 강회(江淮)지역을 침범했다. 그 후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구강시 일부)에 주둔했는데 병력이 몇 십 만에 달했으며 강남을 석권하려는 뜻이 있었다. 때문에 남송 조정에서는 그를 뱃속의 큰 우환처럼 여겼다. 장준은 혼자서는 적을 상대할 수 없다고 여겨 지략과 용기가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악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조정에 건의했던 것이다.

신묘한 계책으로 이성을 평정

2월 악비는 신속하게 진군했고 장준을 따라 홍주(洪州)에 주둔했다. 이후 적의 효장(驍將 용맹한 장수) 마진(馬進)이 선봉으로 나서 십만 병사를 이끌고 연달아 영채를 설치하고는 송나라 군사와 강을 마주하고 대치했다. 당시 적의 사기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큰 적을 마주한 장준이 장군 막사에서 회의를 열자 여러 장수들이 앞다퉈 의견을 제출했고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눠 공격하기로 했다. 행군 작전의 구체적인 조치에 대해 말하는데 악비가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마진의 성격이 “탐욕스럽고 뒷일을 고려하지 않는” 특징에 근거해 기병(奇兵 기습공격)으로 이길 수 있다고 건의했다.

그의 계획은 먼저 3천의 기병을 파견해 장강 상류에서 강을 건너 완전히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다. 또 악비와 악가군이 선봉을 맡길 원했다. 악비는 강을 건넌 후 부대를 이끌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마진 영채의 우익(右翼)에 맹공을 퍼부었다. 또 다른 송나라 군대가 반대쪽에서 협공하자 과연 마진은 크게 패했고 5만의 적들이 포로로 잡혔다. 마진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황급히 도망쳤지만 악가군의 계속된 추격을 받았다.

마진이 어느 흙다리 앞에서 이르러 강을 건너려는데 뜻밖에도 갑자기 다리가 무너지면서 퇴로가 막혀버렸다. 어쩔 수 없게 된 마진이 5천 병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이때 악비가 다시 한 번 뛰어난 활솜씨를 보여주었다. 단 한발로 적의 선봉장을 죽이자 뒤이어 악가군 용사들이 용맹하게 나서자 적의 무리들이 흩어져버렸고 마진은 균주(筠州)로 달아났다. 이튿날 마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총동원해 송군(宋軍)과 결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악비에겐 이번에도 따로 계획이 있었다. 그는 겨우 200명의 소수 병력을 이끌고 ‘악(岳)’자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성 밖에서 다가왔다.

적병들이 보니 악비의 세력이 미미한지라 경솔하게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양측이 교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사방에서 수많은 송군이 나타나 도처에서 공격해왔다. 병력과 형세가 갑자기 역전되자 크게 놀란 마진의 부대는 전투의지를 상실했고 8천의 인마가 전부 항복을 원했다. 이 과정에 마진은 줄곧 패배했고 여러 차례 매복에 걸려 5천 병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힘마저 잃었다. 그의 주변에는 겨우 10여 명만 남았다.

한편 적의 대장 이성은 이 소식을 듣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송군과 결전에 나섰으니 장준에게 크게 패했다. 악비는 승기를 타고 추격에 나섰고 강서 무령(武寧)에 30리에 걸친 진영을 설치하고 수수(修水) 강변에서 수만의 적병과 최후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막 큰 싸움이 벌어질 무렵 신(神)의 도움이 있었다. 갑자기 불어난 수수의 강물이 강을 건너려던 이성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악가군이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의 도움까지 받게 되자 적군은 싸우지도 않고 무너져버렸다.

정사(正史) 사료의 기재 따르면 “북을 울리거나 화살 한발 쏘지 않고 한 읍(邑)이 떨어졌다.”[1] 이성은 겨우 몸만 빠져나가 제(齊 역주: 금나라의 괴뢰정부)나라 정권에 의탁했다.

편지 한통으로 장용의 항복을 받다

다음 토벌 대상은 5만의 병력을 가진 장용(張用)이었다. 그는 악비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용맹하기로 유명했는데 흔히들 ‘장망탕(張莽蕩 역주: 망탕은 행동이 거칠고 사납다는 의미)’이라 불렀다. 그의 아내 역시 호가 ‘일장청(一丈青)’으로 무예실력이 비범한 두령이었다. 그들은 종택이 개봉을 지키고 있을 때는 나라를 위해 힘을 다했으나 두충이 부임한 이후 산에 들어가 도적이 되었다.

출정하기 전에 장준이 이번에도 악비의 도움을 청했다.

“악공(岳公)이 아니면 적을 이길 수 없소!” 그러면서 “병력은 얼마나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악비는 칼로 베듯이 단호하게 “이 적은 저 혼자 가서 맨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2]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장준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3천의 병마를 주어 악비를 돕게 했다. 악비는 이번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장용에게 사람을 보내 친필서신을 전달했다. 서신에서 악비는 장용에게 고향사람의 자격으로 충고하면서 자신은 싸우고 싶지 않으며 투항하면 나라의 중용을 받아 공명과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력을 잃고 포로로 잡히거나 또는 목숨마저 잃고 명예도 사라진다고 했다.[3]

악비는 구구절절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적장을 정으로 움직이고 이치로 일깨워주었다. 사실 예전 전투에서 장용은 악비 휘하의 장수에게 패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간절한 편지까지 받고 보니 어디서 싸울 용기가 나겠는가? 장용은 곧 아내와 상의한 후 편지를 가져온 사자에게 절을 하며 “악공은 제게 부친과 같은 분이니 어찌 투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악비는 이렇게 단 한명의 병사도 잃지 않고 수만의 적병을 거둬들였다.

이 뛰어난 전공(戰功)에 대해 장준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감탄했다.

“악공의 모략(謀略)은 우리 누구도 당할 수 없네!”

군공(軍功)을 조정에 보고할 때가 되니 악비가 당연히 첫 번째가 되었다.

조성을 평정하고 맹장 양재흥을 얻다

소흥 2년(1132년) 양호(兩湖) 지역에 떠돌이 도적들이 소란을 피우자 조정의 새로운 우환이 되었다. 악비는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령관(主帥)으로 출정했다. 적을 잡자면 우선 그 왕을 잡아야 하는데 떠돌이 도적들 중 10만의 병력을 지닌 조성(曹成)의 세력이 가장 강대했다. 악비는 첫 번째 평정 대상으로 조성을 택했다. 악가군이 직접 온다는 소식을 들은 조성은 차마 방심하지 못하고 직접 군사들을 독려해 작전에 나섰다. 또 악비 진영에 사람을 파견해 군정을 염탐하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기민한 악가군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적의 첩자는 체포되어 곧장 악비앞에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악비는 장계취계(將計就計)하기 위해 첩자 앞에서 일부러 연기를 했다. 심문 도중 거짓으로 일이 생긴 것처럼 꾸며 막사를 나와 군사들에게 군량미 상황에 대해 질문했다. 악비가 막사 밖에서 군사적인 업무에 대해 토론하고 있을 때 막사 안에 있던 첩자는 자연히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되었다.

군사(軍士)가 다급하게 악비에게 말하는게 들렸다.

“곧 식량이 떨어지는데 아직 보급이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악비 역시 “빨리 재촉해보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철군할 수밖에 없다네!”라고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는 마치 소문이 ‘새나가면’ 안된다는 듯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악비는 장군막사로 돌아오면서 일부러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치 방금 말실수를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첩자를 심문했고 나중에 ‘양민(良民)’으로 인정해 풀어주었다. 이 염탐꾼은 곧장 적진으로 돌아가 긴급하게 보고했다. 조성이 듣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다음날 출병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악비는 이미 풍성한 저녁잔치를 열어 군대를 먹이고 한밤중에 몰래 적진에 다가갔다. 이튿날 날이 새자마자 악가군이 갑자기 나타나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한 적들은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전군이 무너졌다.

하지만 조성은 달아나 또 수만의 병력을 모아 계령(桂嶺)의 세 관문(關隘)을 지키며 저항했다. 악비는 일반적인 병법(兵法)에 따라 진세(陣勢)를 펼치는 대신 8천 병사에게 좁은 관문의 입구를 공격하게 했다. 순식간에 벼락처럼 전고(戰鼓)가 울리며 병사들의 드높은 함성소리가 하늘을 흔들었다. 적들은 악가군의 용맹한 모습에 질려버렸고 마치 새나 짐승처럼 흩어져버렸다. 결국 이 전투에서 조성이 패배했고 나중에 한세충(韓世忠) 장군에게 투항하면서 끝났다.

조성을 평정하는 전투 중에 악가군 역시 보기 드문 패배를 겪었다. 조성의 대장이던 양재흥(楊再興)이 전투 중 맹렬한 반격에 나서 악비의 친동생 악번(岳翻)과 또 다른 장수를 잃은 것이다. 조성이 투항한 후에도 양재흥은 여전히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악비의 애장인 장헌(張憲)에게 패배했다. 당시 양재흥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자 장헌은 그를 죽여 원수를 갚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스스로 포박을 자처하며 살려주기를 청했다. “나는 사내대장부니 마땅히 나를 데려가 악공을 만나게 해주시오!”[4]

비록 적이고 또 친동생을 죽인 원수였지만 악비는 원수를 갚는 대신 오히려 양재흥의 비범한 모습에 감탄했다. 나라의 대의(大義)를 위해 악비는 사적인 원수를 내려놓고 그를 풀어주도록 했다. 그리고는 “내가 그대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는 마땅히 충의로 나라에 보답해야 할 것이오!”라고 훈계했다. 양재흥은 악비의 넓은 흉금과 정신에 감동해 즉각 그렇게 하겠노라고 응답했다. 이때부터 그는 악가군에서 가장 용감한 또 하나의 맹장(猛將)이 되었다.

이렇게 채 2년이 못되는 기간에 악비가 이끄는 군사들은 동과 서를 토벌하면서 쉬지 않고 각 지역 도적들을 평정했다. 이에 그의 성망과 실력은 이미 당시 노장들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높아졌다. 하지만 악비가 원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중원으로 북상해 금나라를 물리치고 두 분 황제를 모셔오는 준비에 불과했다. 악비의 웅대한 뜻은 바로 천하 평정에 있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언제쯤 천하를 평정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악비에게 언제쯤 동서로 떠돌며 정벌하는 생활을 끝낼 수 있을지 물었던 것이다. 그러자 악비가 대답했다.

“문신이 돈을 아끼지 않고 무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천하가 태평해질 것입니다.”[5]

주석:

[1]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

[2] 出自《鄂國金佗稡編》卷5:俊召先臣語曰:“非公無可遣者。”問:“用兵幾何?”先臣曰:“以飛自行,此賊可徒手擒!”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5:吾與汝同裏人,忠以告汝:南薰門、鐵路步之戰,皆汝所悉也。今吾自將在此,汝欲戰,則出戰;不欲戰,則降。降則國家錄用,各受寵榮;不降則身隕鋒鏑,或系累歸朝廷,雖悔不可及矣。

[4] 出自《三朝北盟會編》卷151:再興曰:“我是好漢,當執我見岳飛。”遂受縛。飛見再興,解其縛曰:“我與汝是鄉人,汝好漢也,吾不殺汝,當以忠義報國家。”再興受命歸之。

[5] 出自《宋史》卷365。

동정호 전투에서 양요를 평정하다

밖으로는 금나라 오랑캐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여러 도적떼를 평정한 남송의 대영웅 악비는 충의를 위해 나라에 몸을 바쳤다. 남과 북으로 원정하고 싸우면서 그는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소흥(紹興) 5년(1135년) 악가군(岳家軍)이 양요(楊么)를 평정한 동정호 전투는 악비의 군사일생에서 가장 놀라운 걸작이었다.

당시 우승상(右丞相) 장준(張浚)이 악비 군중에서 독군(督軍)을 맡고 있었다. 출전에 앞서 그는 악비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잠시 군사를 멈추고 내년에 다시 좋은 계획을 세워봅시다.”

남송에 이름이 비슷한 장준(張浚)과 장준(張俊)은 모두 항금의 장수이자 조정대신이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장준(張浚)은 묘유의 변(苗劉之變 역주: 1129년 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彥이 고종을 핍박하려던 반란) 때 근왕(勤王)의 공을 세워 고종에게 재상 겸 추밀사(樞密使)에 중용된 인물로 전국의 군대를 총괄했다.

반면 장준(張俊)은 ‘중흥 4장수(역주: 남송을 부흥한 4대 명장으로 한세충, 유기, 악비, 장준을 말한다)’의 하나로 일찍이 악비의 상관이었으나 나중에 악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간신 진회(秦檜)에게 붙어 억울한 사건을 만드는데 동참해 악비를 죽인 죄인의 하나다.

이렇게 망설이는 독군을 앞에 두고 악비는 신심을 가득 담은 말로 대답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8일 내로 적을 깨뜨리겠습니다!”[1]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반군이기에 남송의 재상을 이렇게 걱정스럽게 만들었고 악비는 또 어떤 기묘한 계략으로 강적을 신속하게 물리칠 수 있었을까?

남송의 우환이 된 동정호의 양요

양요(楊么)는 일찍이 도적 종상(鍾相) 부자의 소위 ‘거사’에 가담한 적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모두 역모를 꾀한 도적들이었다. 북송 말년의 종상은 유명한 무당으로 “귀천을 똑같이 대하고 빈부를 고르게 한다(等貴賤 均貧富)”는 기치 하에 백성을 미혹시키며 재물을 끌어 모았다. 고종이 하북 병마대원수로 있을 때 종상이 3백명의 민병으로 소위 ‘근왕(勤王)’병을 조직했다. 고종이 등극한 후 이 부대는 종상의 사적인 부대로 변했다.

건염(建炎) 4년(1130년) 3월 왕으로 자립한 종상이 전투에 패배해 사망하자, 양요는 다른 수령들을 집결시켜 30여 개의 수채(水寨 수적들의 영채)를 만들고 수만 명에 달하는 수군(水軍)을 조직해 계속해서 조정에 대항했다. 이 난세의 도적들은 사치스런 탐욕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법집행’을 구실로 멋대로 살인방화를 저질렀다. 가장 심각한 것은 양요에게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을 마음마저 있었던 것이다.

《송사(宋史)》의 기록에 따르면 금나라 괴뢰정부였던 제(齊)나라의 이성(李成)이 여러 차례 모의해 군사를 합칠 준비를 했다. 당시의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모두 공동의 적을 상대로 적개심을 불태우며 금의 침략에 저항할 즈음 양요의 이런 행동은 민족의 대의를 망치는 것이다. 양요는 남송 조정에 있어 금나라, 제나라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우환이었다. 고종의 군신들은 양요 무리에 대해 “뱃속의 해악이니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를 세울 수 없다”[2]고 했다. 때문에 여러 차례 병력을 동원해 토벌하거나 초무(招撫)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지난 4년간 송군(宋軍)은 속수무책으로 당혹한 국면에 빠져있었다.

양요가 이렇게 다년간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동정호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다. 그는 “육지 경작과 수전(水戰)” 책략을 사용해 봄여름에 수위가 높을 때는 관군이 출병할 수 없으니 논밭을 경작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가을과 겨울 수위가 낮아지면 반군이 식량을 수거해가고 물에서 관군을 상대하는 것이다. 아울러 양요의 영채(營寨)에는 천명 이상을 태울 수 있는 약 30척의 거대한 전투선과 수백 척의 작고 빠른 배들이 있어서 수상작전에서 신출귀몰해 거의 패배한 적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양요를 평정하는 어려운 임무를 악가군에게 넘긴 것이다.

소흥 5년 4월 악비는 담주(潭州 지금의 호남 장사)에서 군대를 출발시키며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악가군은 대부분 서북 출신이라 육상전투에는 뛰어났지만 수군과 싸워 이기는 것은 하나의 큰 고험이었다. 하지만 악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용병에 고정적으로 정해진 법이란 없다. 오직 어떻게 병사를 사용할 것인가만 볼 뿐이다.”[3]라고 했다. 하물며 나라가 어려운데 대장(大將)의 신분인 악비가 어찌 쉽게 물러설 수 있겠는가?

8일 기한의 신묘한 계책

양요 작전의 특징에 근거해 악비는 우선 그와 반대로 행동했다. 일단 가을과 겨울에 병력을 동원하는 관례를 바꿨다. 악가군은 봄여름 작전을 통해 반군의 경작계획을 깨뜨려 근본적으로 적의 식량공급을 단절시켰다. 이어서 악비는 군대를 파견해 여러 곳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적이 식량을 운반하지 못하게 하여 적군의 군심을 어지럽게 했다.

둘째,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투항권유와 공격을 결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양요가 도리를 잃어 돕는 자들이 적으니 악비가 인의(仁義)의 군대가 나선다면 많은 수령들이 자발적으로 귀부할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양요의 병력을 약화시킨 후 적의 수군은 수군으로 맞선다면 승산이 크게 올라갈 것이다.

처음 투항권유 소식이 반군의 수채(水寨)에 전해지자 정세를 파악한 몇몇 수령들이 몰래 투항해왔다. 그중 황좌(黃佐)라는 이름의 적장(敵將)은 즉각 수하에게 말했다.

“나는 악(岳)원수의 호령이 산과 같아 무시할 수 없다고 들었다. 만약 그를 상대한다면 우리는 모두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없으니 지금 빨리 투항하느니만 못하다. 악 원수는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니 반드시 우리를 선처해주실 것이다.”[4]

그리고는 즉각 무리를 이끌고 담주로 와서 항복을 청했다.

과연 악비는 황좌를 몹시 아꼈고 즉석에서 칠품(七品) 관직을 수여하고 또 그 무리들을 위로하면서 환대했다. 이 자리에서 악비는 그와 나란히 앉아 등을 어루만지며 양요를 평정할 첫 번째 전투를 부탁하면서 아주 정중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자네는 사리와 순역(順逆)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니 만약 적을 죽여 공을 세운다면 제후에 봉해지는 것이 문제겠는가? 나는 자네를 동정호 반군 속으로 돌려보낼 생각이니 제압할 수 있다면 포획하고 투항을 권할 수 있다면 투항하게 만들면 어떻겠는가?”[5]

황좌는 반군 수령으로서 공을 세워 죄를 속죄할 기회를 얻었으니 자연히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격으로 죽음으로 보은할 것을 맹세했다. 그는 즉각 몸을 움직여 악가군의 선봉이 되었다. 이렇게 전투에 나선 처음 두 달간 악비는 거의 병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다만 포로들에게 상을 내리고 석방해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가게 했다. 또 이를 이용해 반군의 사기를 꺾고자 했다.

현지의 한 관리가 악비가 직무를 소홀히 안다고 의심해 조정에 보고하려 했다. 장준(張浚)은 비록 악비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의 품행을 굳게 믿었기에 그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악비는 충효의 인물이니 용병술이 깊고 멀리 생각하는데 어찌 함부로 논의할 수 있단 말이냐?”[6]

그러나 장준은 여전히 큰 적을 앞에 두고 내년에 다시 좋은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악비는 내년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고 8일 내로 적을 격파하겠노라고 장담했다. 장준이 믿지 못하며 연달아 적을 격파할 묘책이 무엇인지 캐물었다. 악비는 그제야 비로소 “수구(水寇 물 도적)는 수구로 공격한다”는 계획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악비는 “수전(水戰)이 적의 장기이자 우리의 단점이라면 단점으로 장점을 공격하기란 물론 아주 어렵습니다. 만약 적의 장수를 이용해 적군을 이끌게 한다면 적군의 협력을 박탈하고 적군의 심복을 이간시켜 양요를 고립시킬 수 있습니다. 때가 되어 관군을 파견해 공격하면 반드시 8일 내로 적군의 여러 수령을 체포할 수 있습니다.”[7]

적으로 적을 물리친 악비의 신산(神算)

악비의 계획을 들은 장준은 비로소 안심하고 싸움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황좌도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양요의 수하들 중 가장 용감한 장수인 양흠(楊欽)의 투항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악비는 친히 군영을 나와 그를 접견하고는 양흠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이 자신에게 하사했던 금으로 된 허리 띠와 전포(戰袍)까지 모두 양흠에게 선물로 주었다. 양흠은 악비의 이런 간절하고 성대한 예우에 깊이 감동했고 투항이 너무 늦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나중에 그는 악비의 유력한 조수가 된다.

양흠은 먼저 동정호를 돌면서 여러 반군 두령들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이렇게 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요는 이미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 후 양흠은 또 2가지 아주 중요한 계책을 제안했다. 하나는 물을 빼서 강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었다. 반군의 법보(法寶)인 거대한 전투선은 반드시 한 길이 넘는 물에서만 통행할 수 있었다. 그러자면 동정호수의 제방을 수리해야 했는데 양흠이 바로 댐과 둑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두 번째는 수초로 길을 막는 것이다. 양요의 전투선은 바퀴에 의해 움직이는데 호수 바닥에 수초가 가득해 바퀴에 감기기만 하면 배를 움직일 방법이 없게 된다. 움직임이 불편한 전투선은 악가군의 가장 좋은 전투장소인 육지와 별 차이가 없게 된다.[8]

악비가 양흠이 투항하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 “양흠이 투항하러 왔다면 도적들 내부의 심복이 이미 붕괴된 것이다!”라고 한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양흠의 제안은 어느 것 하나 양요의 급소를 적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큰 싸움이 벌어진 당일 악비는 군사들에게 큰 뗏목을 타고 항구마다 모두 막게 했다. 또 사람을 파견해 작은 배로 물이 얕은 곳에서 적을 모욕하면서 일부러 양요를 화나게 만들었다. 양요는 과연 계략에 걸려들었고 경솔하게 병력을 동원해 싸움에 나섰다. 거대한 함선이 수초에 걸려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적의 위력이 사라져버렸다. 악가군 용사들은 이 틈을 타서 용맹하게 공격했다. 양요는 포위를 돌파하려 했지만 뜻밖에도 각 항구마다 이미 악가군이 지키고 있어 도주할 곳조차 없었다.

양요는 ‘정충악비(精忠岳飛)’란 깃발이 꽂힌 많은 전선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급한 나머지 물에 뛰어들어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악가군 우고(牛皋) 등에게 생포되었고 결박되어 악비 앞에 끌려와 최후의 처벌을 받았다. 동정호 전투가 끝나가자 반군의 잔당들이 어찌 정의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남은 적들도 산이 무너지듯 잇따라 패배했다.

조서를 받들어 전투를 완벽하게 끝낸 악비는 불과 두 달만에 한 지역을 할거하던 강력한 세력을 평정했다. 전체 과정에서 늘 목격자였던 장준은 악비에 대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후의 계책은 신묘하구나!(岳侯神算也)”[10]

주석:

[1]出自《宋史》卷365:會召浚還防秋,飛袖小圖示浚,浚欲俟來年議之。飛曰:“已有定畫,都督能少留,不八日可破賊。”

[2]出自《建炎以來系年要錄》卷86。

[3]出自《宋史》卷365:飛所部皆西北人,不習水戰,飛曰:“兵何常,顧用之何如耳。”

[4]出自《宋史》卷365:賊黨黃佐曰:“嶽節使號令如山,若與之敵,萬無生理,不如往降。節使誠信,必善遇我。”

[5]出自《宋史》卷365:飛表授佐武義大夫,單騎按其部,拊佐背曰:“子知逆順者。果能立功,封侯豈足道?欲複遣子至湖中,視其可乘者擒之,可勸者招之,如何?”

[6]出自《宋史》卷365:浚曰:“嶽侯,忠孝人也,兵有深機,胡可易言?”

[7]出自《宋史》卷365:飛曰:“王四廂以王師攻水寇則難,飛以水寇攻水寇則易。水戰我短彼長,以所短攻所長,所以難。若因敵將用敵兵,奪其手足之助,離其腹心之托,使孤立,而後以王師乘之,八日之內,當俘諸酋。”

[8]出自《鄂國金佗續編》卷28:欽樂爲用,獻策雲:“麼所恃者舟檝如望三州、大小德山之類,非一丈水不可行。洞庭湖水舊不及丈,麼置堰閘,十餘年間,所以彌漫。欽本任閉塞之責,盡知其詳。乞二十人往開堰水入大江,使舟船不能動。又麼船皆用車輪,乞以青草數千百萬束散之湖中,其輪必有窒礙。”王從之,兩月果破賊。

[9]出自《宋史》卷365:黃佐招楊欽來降,飛喜曰:“楊欽驍悍,既降,賊腹心潰矣。”

[10]出自《宋史》卷365。@*#

1차 북벌에서 양양 6군을 되찾다

중국 역사상 북벌(北伐)전쟁을 말하자면 진(晉)나라 때 조적(祖逖)이 호방한 의기를 펼친 적이 있고 또 촉(蜀)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기산(祁山)에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북상해서 금나라와 싸워 옛 강산을 회복하려한 악비의 장렬함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이렇게 천고에 전해진 영웅의 일화가 있었기에 ‘북벌’에 단호한 의지로 나아가 나라를 통일한다는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악비는 금나라 병사들을 몰아내고 정강(靖康)의 치욕을 설욕하려는 웅대한 뜻을 품었기 때문에 평생 4차례에 걸쳐 6년간 북벌에 나서 일대명장(一代名將)으로서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사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첫 번째 북벌은 소흥(紹興) 4년에 시작해 같은 해에 끝난다.

제나라의 공격에 양양을 잃다

소흥 3년(1133년) 10월 양한(襄漢 역주: 양수와 한수로 둘러싸인 양양을 말함)의 수비에 실패했다. 제나라 괴뢰 정권에 의탁한 도적 이성(李成)이 금나라 군의 도움을 받아 양양 6군을 점령했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하남과 호북의 등주(鄧州), 수주(隨州), 당주(唐州), 양양(襄陽), 영주(郢州), 신양군(信陽軍) 등의 지역에 해당한다. 이는 남송의 장강 방어선에 큰 구멍이 생긴 것과 같아 송나라 조정이 깜짝 놀랐다.

양양은 자고로 병가(兵家)에서 아주 중시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재상 주승비(朱勝非)의 말처럼 “나아가면 적을 압박할 수 있고 물러나면 경계를 지킬 수 있었다.”[1] 과연 제나라 괴뢰황제 유예(劉豫)는 계속해서 남하할 뜻을 품고 암암리에 동정호의 도적 양요와 협력해 송을 공격하고자 했다.

내우외환의 위태로운 시기에 악비는 도적을 평정한 공으로 두 번째 고종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고 또한 아주 좋은 예우를 받았다. 단순히 관직이 오르고 상을 받은 것에 불과한 게 아니라 고종이 직접 쓴 ‘정충악비(精忠岳飛)’에 수를 놓은 깃발을 하사받았다. 악비의 큰아들 악운(岳雲)은 아직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열다섯 소년임에도 마찬가지로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악비의 뜻은 높은 관직이나 두터운 녹봉에 있지 않았다.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를 맞아 그는 양양을 되찾고 다시 양요를 몰살할 계책을 제출했으며 스스로 임무를 자청해 북상해서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다.

“상류(上流)의 이해관계를 아는 데는 악비만한 인물이 없습니다.”[2] 악비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은 그가 유일하게 출정할 장수로 선정되게 했다. 그러나 악가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고작 3만 5천명에 불고했다. 반면 제나라 군사는 약 10만에 달했다. 남송은 지금껏 먼저 나서서 적국과 전투를 치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종과 신하들은 이번 첫 원정을 대단히 중시했다.

이에 고종은 정식으로 악비를 총사령관(統帥)에 임명하고 많은 양식을 하사하고 지원군을 보냈다. 또 악비가 보증한 장헌(張憲) 등 악가군 세 장수들에 대한 포상도 앞당겼다. 주승비는 또 특별히 승리하기만 하면 ‘절도사’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며 악비를 격려했다. 이에 대한 악비의 대답은 “악비는 의리를 따질 뿐 이익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한 성을 공략할 때마다 작위를 하나씩 내린다면 이는 보통 사람을 대하는 것이지 국사(國士)에 대한 방법이 아닙니다.”[2]라고 했다.

대군(大軍)이 호탕하게 출정에 나선 첫 전투는 최남단인 영주(郢州) 공격이었다. 다년간 꿈꿔왔던 소원이 마침내 현실이 되자 악비의 내심 역시 강물처럼 격동했다. 출정하던 배가 장강 중심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여러 장수들에게 비분강개한 어조로 맹세했다.

“비(飛)가 적의 장수를 잡지 못하고 옛 영토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 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다.”[4]

소흥 4년 5월 초 닷새 악가군 병사들이 영주 성 아래에 다가오자 맞선 것은 바로 ‘만인의 적’으로 불린 형초(荊超)였다.

첫 전투에서 여러 성을 석권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장헌이 악비의 명령을 받고 적진을 찾아가 투항을 권고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악비 진영에서 또 남은 군량이 두 끼에 불과하다는 긴급소식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악비는 오히려 신심(信心)이 가득했고 내일 적을 격파하면 된다고 했다.

6일 여명이 트자 악가군과 제나라 군대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악비는 직접 군중(軍中)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적의 대포에서 발사한 거대한 돌이 갑자기 눈앞에 떨어졌지만 악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계속해서 침착하게 전투를 독려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칭송하는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렵다(撼山易,撼岳家軍難)”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총사령관이 이처럼 생사를 도외시하며 전투를 독려하자 악가군 장수와 병사들도 자연히 용기를 내서 출격했고 곧장 성을 올라가 적군을 물리쳤다. 영주 전투는 악가군이 7천 명의 적을 죽이고 적장 형초가 절벽에서 투신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후 악가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장헌과 서경(徐慶)이 이끄는 부대는 수주를 공격하고, 악비는 직접 주력부대를 이끌고 양양으로 향했다.

이때 양양을 차지한 인물은 악가군의 오랜 적인 이성(李成)이었다. 그는 악비가 불과 하루 사이에 영주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하고 놀란 나머지 황급히 도망쳤다. 악비는 17일 순조롭게 승기를 잡았고 양양을 회복했다. 하지만 수주 전투에서는 지주(知州) 왕숭(王嵩)이 성안에 숨어 감히 싸우려하지 않았다. 장헌의 군대가 연달아 며칠간 공격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때 우고가 자발적으로 장헌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오직 3일 치 식량만 있으면 된다고 장담했다. 누가 알았으랴! 이 3일치 식량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우고는 장헌 등과 힘을 합쳐 성을 공략했고 적병 5천 명을 죽였다. 악가군의 대공자(大公子) 악운은 그동안 줄곧 장헌을 따랐는데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인 젊은 장수로 성장했다. 전투에 임할 때 그는 80근에 달하는 2개의 철추창(鐵錐槍)을 흔들며 맹렬히 공격에 나서 가장 먼저 성벽을 올라가는 큰 공을 세웠다.

파죽지세와 같은 악가군의 공격에 유예는 깜짝 놀랐다. 그는 황급히 사람을 파견해 금나라와 연합해 다른 주현(州縣)을 방어하게 했다. 6월 증원군을 얻은 이성이 신야(新野)에서 30만 대군을 준비해 악가군과 일전을 겨루려 했다. 악가군 장수들이 앞을 다퉈 참전을 청하자 악비는 적군의 배치를 관찰한 후 웃으며 말했다.

“이성이 이렇게 어리석을 줄은 몰랐다. 보병(步兵)은 험한 지형에서 이롭고 기병은 넓은 평야에서 이로운 법이다. 지금 이성의 진법을 보면 좌측 강변에 기병을 배치하고 우측 평지에 보병을 배치했으니 몇 십 만 대군이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에 악비가 채찍을 휘둘러 지휘하면서 병력을 파견했다. 왕귀(王貴)는 보병을 이끌고 우측에서 이성의 기병을 공격했고 우고는 기병을 인솔해 좌측에서 이성의 보병을 공격했다.[5] 호랑이 같은 두 장수가 명령을 내리며 양측에서 협공을 가하자 이성의 군대는 금새 일패도지(一敗塗地)했고 더는 양양을 넘볼 힘조차 상실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유예는 급히 금나라에 구원 병력을 요청했다. 금나라의 장수 하나가 이성과 합류했고 또 수만 인마를 긁어모아 등주(鄧州)에 주둔하면서 진영을 정돈하고 악가군을 기다렸다.

두달 만에 소수 병력으로 많은 적을 물리쳐

금과 제가 연합해 송에 저항한다는 첩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고종은 심지어 병력을 물릴 생각까지 하면서 악비에게 “자중에 힘써” 일단 이미 얻은 전과를 지키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악비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각오로 즉각 왕귀와 장헌에게 명령을 내려 두 갈래로 등주를 향해 달려가게 했다. 7월 15일 등주성 밖 30리 떨어진 곳에서 수만에 달하는 적의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다. 금나라 장수는 겨우 몸만 빼서 달아났고 2백여 명의 장수들이 포로로 잡혔으며 무수히 많은 전투마와 무기를 획득했다.

수주와 등주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악운은 ‘영관인(贏官人)’이란 명예를 얻었다. ‘영관인’은 뛰어난 군공을 세워 관직을 얻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란 뜻으로 악운에 대한 찬사이다.

17일 성을 지키던 적장 고중(高仲)이 험준한 지형을 의지하며 완강히 버텼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적군을 휩쓸었던 악가군은 창과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치열한 접전에도 계속해서 맹공을 퍼부었다. 특히 악운은 장수가문의 호랑이 같은 풍모를 발휘해 두 번째로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가 대군이 순조롭게 4번째 성지를 공략할 수 있게 했다. 이 공으로 그는 ‘영관인(贏官人)’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등주 결전에서의 승리는 전세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고 나머지 두 군은 비교적 쉽게 회복할 수 있었다. 23일 악비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출격시켜 같은 날 당주와 신양군을 함락시켰다.

한편 악비는 이번 북벌에서 신묘한 무용(武勇)과 지모(智謀) 뿐만 아니라 공평무사하고 공명(功名)에는 담담한 덕행을 체현해냈다. 특히 나이 어린 악운은 여러 차례 큰 전공을 세웠지만 악비는 아들의 첫 번째 수주전공만 상부에 보고하고 나머지는 감추며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악운이 전쟁 속에서 다른 장수들의 노고를 이해하는 동시에 전장에서 보다 많은 경험과 단련을 쌓게 하려는 뜻이었다.

이외에 송나라 장수 유광세(劉光世)는 원래 악비를 원조하라는 성지를 받았지만 전투가 시작된 후 3일째 되는 날 부장(部將)인 역경(酈瓊)을 보내 불과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천천히 출전하게 했다. 하지만 군공(軍功)을 보고할 때 악비는 오히려 지원군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역경은 이에 부끄러움과 함께 크게 감격했다. 왜냐하면 부장(部將)의 입장에서 마음을 쓰며 자신의 공로는 전혀 자랑하지 않는 악비의 넓은 흉금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출정에서 악비는 6개 군을 수복했는데, 소수의 병력으로 아군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금과 제나라 연합군에 맞서 불과 2달 만에 거둔 뛰어난 성과였다. 이 때문에 악비는 불과 32세란 젊은 나이에 한 지역을 책임지는 ‘절도사’의 지위에 올라 조정에서 5번째이자 최연소 대장(大將)이 되었다. 이번 북벌은 또 남송이 생긴 이래 최초의 정식 출정에 빛나는 대첩을 거뒀기 때문에 그 의미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전부 남송의 둘도 없는 국사(國士) 악비의 공이었다.

주석:

[1] 出自《建炎系年要錄》卷75:一日,宰執奏事朱勝非言:“襄陽上流,襟帶吳蜀。我若得之,則進可以蹙賊,退可以保境。”

[2] 出自《宋史》卷360:上問:“岳飛可使否?”鼎曰:“知上流利害無如飛者。”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9:(先臣)乃謝使者曰:“爲飛善辭丞相:岳飛可以義責,不可以利驅。襄陽之役,君事也,使訖事不授節,將坐視不爲乎?拔一城而予一爵者,所以待眾人,而非所以待國士也。”

[4] 出自《鄂國金佗稡編》卷6。

[5] 出自《鄂國金佗稡編》卷6:先臣笑謂貴等曰:“止此賊屢敗吾手,吾意其更事頗多,必差練習,今其踈暗如故。夫步卒之利在阻險,騎兵之利在平曠;成乃左列騎兵於江岸,右列步卒於平地,雖言有眾十萬,何能爲?”於是舉鞭指貴曰:“爾以長槍步卒,由成之右擊騎兵。”指皋曰:“爾以騎兵,由成之左擊步卒。”

홀로 전진해 2차례 북벌에서 탁월한 공을 세우다

분노한 머리털 빳빳이 곤두서

난간에 기대어 서니

내리던 비도 잦아드누나⋯

怒發沖冠

憑闌處

瀟瀟雨歇⋯⋯”

만강홍(滿江紅)이란 제목의 이 사(詞)는 천고에 널리 회자되는 악비의 작품이다. 악비는 제1차 북벌에 성공한 직후 붓을 들어 이 글을 남겼다. 양양(襄漢) 수복이란 불세출의 공적을 눈앞에 두고 그가 생각한 것은 오히려 망국의 치욕과 아직 이루지 못한 사업(事業)이었다.

문장(文)은 천고에 유전되는 시사(詩詞)를 남기고 무예(武)로는 군대를 총괄하는 작전으로 남북을 통일했으니, 역사상 문무쌍전(文武雙全)의 풍류 인물들 중에서도 악비는 수위(首位)를 다툴 정도로 절대적으로 뛰어났다. 정벌 도중 악비는 금수강산을 두루 유람하면서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감동적인 문장들을 남겨놓았다. 어쩌면 이렇게 정해진 운명일지 모르지만, 악비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며 고생을 낙으로 삼으면서도 애초 세운 큰 뜻을 잊지 않았다.

효를 충으로 바꿔 공(公)을 위해 사(私)를 없애

양양을 수복한 후 악비는 악주(鄂州)로 주둔지를 옮겨 회서(淮西 역주: 회수 서쪽의 안휘성과 호북성 일대)를 지원하고 양요(楊么)를 평정하는 등 한 시도 쉴 틈이 없었다. 소흥 5년(1135년)에 이르자 나라에 보답하려는 애국심에 자기 몸을 돌볼 겨를이 없던 장군은 피로가 누적되어 고질이 되었다. 또 모친이 사망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고 이렇게나마 겨우 짧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북벌의 계획이 긴박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악비는 반드시 떨쳐 일어나 항금(抗金)의 전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건강(建康)을 수복한 이래 악비는 장기간 남방에서 전투를 치렀다. 일찍이 도적 조성(曹成)을 쫓을 때는 양광(兩廣 광동 광서 일대) 깊숙이 들어갔다가 장려(瘴癘 역주: 아열대성 기후에서 잘 생기는 일종의 전염병)에 걸려 병의 뿌리를 심어놓았다. 그 후 6년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무더위 속에 행군해야 했고 또 서독(暑毒 심한 더위)에 걸려 늘 눈병이 발생하곤 했다. 양요를 평정한 후 악비의 눈병은 “두 눈이 충혈 되고 침침해져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사지가 무력해질”[1] 정도에 도달했다. 악비는 군대에 관한 큰 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쓸만한 장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소흥 6년(1136년) 3월 모친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원래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악비로서는 충격이 아주 컸다.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눈병이 더 심해졌다. 하루 종일 여러 겹의 두터운 장막으로 햇빛을 차단하고 어두운 실내에서 지내며 물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당시 예법(禮法)에 따르면 악비는 당연히 모친을 위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3년간 상을 치러야했다. 당연히 이 기회를 이용해 병든 몸을 조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高宗)이 여러 차례 조서를 내리며 재촉하는 바람에 악비는 결국 개인적인 효도보다는 나랏일이 더 중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악주 군영으로 다시 복귀해 병든 몸을 이끌고 제2차와 제3차 북벌을 주도했다. 돌아가신 모친에 대한 최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악비는 친히 영구(靈柩)를 등에 지고 고향까지 먼 길을 걸어가 안장했다. 또 나무로 모친의 상을 직접 조각해 마치 살아계실 때처럼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올리며 애도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로 낙수까지 진출

제2차 북벌은 상식을 뒤집어 가을에 시작했다. 원래 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로 금나라 군사들의 말이 살찌고 건장해 침입하기 좋은 때였다. 기존 전투경험에 따르면 이때 송군(宋軍)은 방어에 주력할 시기였다. 하지만 악비는 적의 허를 찔러 두 갈래로 병력을 나눠 북상하며 잇따라 승리하자 제(齊 금나라가 만든 괴뢰정권)나라와 금인(金人)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한 갈래는 우고(牛皋)가 이끄는 좌군(左軍)이었다. ‘연의(演義)’이야기 에서는 흔히 제1의 ‘복장(福將)’이라 불리는 우고는 선봉에 서서 신속하게 제나라가 차지한 진여(鎮汝)를 공략했다. 그 후 군사를 동쪽으로 지휘해 영창(潁昌)과 채주(蔡州) 등의 적군을 소탕하고 제나라가 비축한 대량의 식량과 사료 및 군수물자들을 불태웠다.

하지만 이것은 적을 속이기 위한 의병(疑兵)이었고 진짜 주력부대는 악비가 이끄는 대군이었다. 우고가 첫 전투에서 승전을 알린 후 악비는 군대를 서북쪽으로 진격시켰다. 8월부터 시작해 왕귀(王貴) 등이 괵주(虢州), 상주(商州)를 수복하고 여러 차례 큰 전과를 올렸다. 괵주 관할인 노씨현(盧氏縣) 전투만 해도 단 한 차례 전투로 15만석의 식량과 사료를 획득했다. 괵주와 상주는 두 곳 모두 군사적인 요충지로 북쪽으로는 북방의 의군(義軍 남송을 지지하는 의병)과 연결할 수 있었고 동쪽으로 하남(河南)을 취하거나 서쪽으로 관중(關中)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거의 제나라 전체 통치구역을 2개로 분할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전공을 보고받자마자 고종이 즉각 조서를 내려 악비를 칭찬하고 격려했다.

악비의 대군은 계속해서 직접 순주(順州)를 공격했다. 얼마 전에 귀순한 악비의 맹장 양재흥(楊再興)은 전쟁 중 초인적인 용기로 무적의 전투력을 과시했다. 장수현(長水縣)에서 그는 몇 천 명의 제나라 군대와 격전을 벌여 5백여 명을 죽이고 1백여 명을 생포했다. 이튿날 양재흥의 군대는 또 2천의 적군을 상대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진영을 펼쳤다. 양군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치열한 공방전 가운데 양재흥은 생명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봉에 서서 강을 건너가 적군을 또 다시 궤멸시켰다. 악가군(岳家軍)이 줄곧 맹공을 퍼붓자 이양현(伊陽縣)을 포함한 순주의 여러 현들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외에도 악가군은 또 하나의 큰 수확을 거뒀다. 바로 제나라의 말 목장을 빼앗아 1만 필이 넘는 말을 획득한 것이다. 이 일은 장기간 군마(軍馬) 부족에 시달려왔던 송군의 기병 역량을 크게 강화한 것이라 몇 개 주현(州縣)을 수복한 것에 못지않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처럼 심한 눈병과 모친을 잃은 이중의 고험 하에서도 악비는 의기소침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병사들을 이끌고 아름다운 반격작전에 성공했다. 때문에 당시의 명신(名臣) 이강(李綱)이 직접 편지를 써서 “10여 년간 없었던 일이며 진실로 기쁘다”[2]면서 악비의 군공을 칭찬했다.

소흥 6년(1136년) 9월 하순 악비는 악주로 회군했다. 이때 눈병이 다시 심해져서 군중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휘하 장수들이 대신했다. 하지만 전선의 상황이 긴박했기 때문에 악비의 휴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제나라 군사들이 잇따라 패배하면서 금나라 귀족들의 비난을 받게 된 유예(劉豫)는 어쩔 수 없이 모험을 걸어왔다.

자칭 70만 대군을 총동원해 장강(長江)을 건너 회서(淮西)를 침범하려 했다. 비록 이 지역을 방어하던 송나라 수비군의 저항이 있었지만 마음을 놓지 못한 고종은 잇따라 조서를 내려 안질을 앓고 있는 악비더러 신속히 병력을 보내 원조하게 했다.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한 제3차 북벌

고종의 긴급 명령을 받은 악비는 즉각 전군에 출발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앞서 북벌 과정에서 수복한 지역의 병력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악비의 대군이 막 강주(江州)를 건널 때 회서전투에서 송나라가 승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악가군은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하고 병력을 되돌려야 했다.

한편 이때 제나라 군대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유예는 이때 악가군의 북방 방어력이 약해졌다고 보고 성동격서(聲東擊西) 책략을 썼다. 즉 수만의 병력을 집결해 상주(商州), 괵주(虢州), 등주(鄧州), 당주(唐州) 등으로 공격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악가군은 일당십 일당백의 정예 병력이라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몇 배나 많은 적군을 쓸어버렸다. 당주 근처에서 왕귀는 1만의 병력으로 유예의 동생 유복(劉複)이 이끄는 제나라의 10만 주력군을 크게 물리쳤다. 또 괵주에서는 구성(寇成)이 적군 5백 명을 포로로 잡았고 등주에서는 장헌(張憲)의 1만 군사가 천 명의 적과 5백 필의 군마를 획득했다. 당주에서는 우고가 8천의 보병으로 적장을 죽이고 천 명의 포로와 3백여 필의 전마를 얻었다.

총사령관 악비는 악주로 돌아온 후에도 안질이 호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앉아서 쉴 겨를도 없이 즉시 전선으로 달려가 대군과 회합했다. 이때 왕귀의 군대는 이미 제나라 군대가 통제하고 있던 채주(蔡州 지금의 하남성 여남현)까지 접근해 있었다. 악비는 왕귀, 우고 등의 장수들과 2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열흘 치 식량을 휴대한 채 채주로 진출했다. 제3차 북벌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악비가 직접 채주성의 방어 상황을 살펴보니 성을 둘러싼 해자가 넓고 깊은데다 성벽 역시 빈틈이 없었다. 그런데 성벽 위에는 검은 깃발만 나부끼며 지키는 군사들이 없어 뭔가 수상했다. 악비가 시험 삼아 군대를 보내 성을 공격하자 검은 깃발이 흔들리면서 한 무리 적병이 성벽위에 나타나 응전했다. 공격을 멈추자 그들은 또 신속히 후퇴했다. 악비는 이곳은 방어가 아주 엄밀하고 튼튼한 성곽이라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해 즉각 철군명령을 내렸다.

사실 유예는 이성(李成) 등의 적장을 미리 인근에 파견해 매복시켰다. 악가군이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것을 기다렸다고 아군의 사기가 떨어질 때 포위공격을 하려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계책은 악비의 혜안(慧眼)을 벗어나지 못했고 공들여 세운 계책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참다못한 제나라 군사들이 출동해 추격에 나섰으나 오히려 악가군의 반격으로 전군이 붕괴되었다. 나머지 잔병들도 수십 리를 달아났다. 적병과 말들이 모두 지쳐 있을 때 사방을 둘러보니 ‘악(岳)’자가 적힌 깃발에 둘러싸였다. 악가군이 사면팔방에서 물밀 듯이 닥쳐 단번에 적군을 섬멸해버렸다. 악비는 적군 장수들은 후방으로 호송해서 조사를 받게 했고 나머지 일반 사졸들은 상을 주거나 풀어주었다.

악비는 이들을 풀어주기 전에 직접 나서서 훈계했다.

“너희들은 모두 중원의 백성이자 나라의 자손들이다. 불행히도 유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번 전투에 참여했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을 석방하니 집으로 돌아가 고향 친지들을 만나거든 그들에게 조정의 은덕을 알려 주어라. 대군(大軍)이 북상해 중원을 수복할 때가 되면 너희들이 다시 와서 관군에 호응하도록 하라.”[3]

이렇게 패배한 적군의 목숨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잃었던 나라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자 포로들은 악비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환호하면서 떠나갔다.

제3차 북벌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악가군 단독으로 작전에 참여해 또 한 차례 큰 성과를 거뒀다. 아울러 신속하게 전세를 뒤집어 악가군의 강대한 위력을 널리 과시했다. 악비는 고질적인 눈병으로 고생하면서 외부의 지원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영웅적인 기개로 전투에 임했다. 이런 의지와 담력이 있었으니 그 누구인들 감격하고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석:

[1] 出自《鄂國金佗稡編》卷13:《乞宮祠劄子》《乞宮祠劄子》。

[2] 出自《梁溪全集》卷128:《與嶽少保第二書》。

[3]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公厚以錢布勞所俘之軍,告之曰:”汝皆中原百姓,國家赤子也,不幸爲劉豫驅而至此。今釋汝,見中原之民,悉告以朝廷恩德。俟大軍前進恢複,各率豪傑,來應官軍。” 其俘皆歡呼而反。

직접 출전해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치다

악비에 관한 연의(演義)나 전설(傳說)에서는 네 번째 북벌전쟁에 관해 늘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하곤 한다. 악비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이 전쟁에서 평생 가장 휘황찬란하고 가장 장렬한 공적을 세웠다. 언성(郾城)과 영창(潁昌)대첩, 소상하(小商河)로 길을 잘못 들어간 것, 주선진(朱仙鎮) 대전 등 그 어느 것이나 말만으로도 듣는 사람의 피를 끓게 하며 마치 그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큰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의 제4차 북벌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소흥 6년(1136년)에 있었던 제2차와 제3차 북벌에서 악비가 발동한 제4차 북벌 사이에는 약 4년이란 긴 시차가 있다. 그렇다면 이 기간에 과연 어떤 일이 발생했기에 북벌이란 큰 계획이 자꾸 뒤로 늦춰졌던 것일까?

4년간 칩거하며 초심을 잊지 않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악비는 고종(高宗)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대신이 되었다. 소흥 7년 악비는 조정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양마론(良馬論)’을 천명하며 자신을 ‘멀리 달릴 수 있는 재목(致遠之材)’으로 비유했다. 황제로부터 보다 많은 권한을 위임받아 북상(北上) 항금(抗金)을 지속하길 희망한 것이다. 고종은 이때 그의 의견에 크게 찬동하면서 악비를 정2품 태위(太尉) 겸 선무사(宣撫使)에 봉해 남송의 다른 노장들과 같은 반열에 서게 했다.

[역주: 양마(良馬)와 열마(劣馬)는 고종이 악비를 만나 어떻게 해야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별할 수 있는지 묻자 그에 대한 악비의 답변이다. 간단히 말해 좋은 말은 많이 먹고 좋은 물과 좋은 사료를 줘야 하고 신경도 많이 써야 하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2백리를 달려도 지치지 않고 더욱 힘을 낸다. 반면 나쁜 말은 사료도 적게 먹고 기르기에 까다롭진 않지만 백 리도 못가서 지쳐버린다. 여기서 악비의 의도는 자신이 평소 관리하기는 까다롭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멀리까지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좋은 말처럼 훌륭한 인재임을 말한 것이다.]

3월 고종은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단독으로 악비를 만난 후 정중하게 당부했다.

“짐이 중흥(中興)의 일을 모두 경에게 맡기니 장준(張俊)과 한세충(韓世忠)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군사들은 그대의 지휘에 따르게 하겠노라.”[1]

즉 송나라의 대다수 병력을 악비 한 사람에게 맡겨 조정에서 으뜸가는 대장이 된 것이다. 악비는 여러 지역의 군대들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는 것을 오랫동안 한스럽게 여겼는데 고종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그동안 쌓인 적폐(積幣)를 모두 해결해 준 것과 같았다. 송나라 역사상 무장에게 이렇게 큰 대군의 지휘를 맡긴 것 역시 초유의 일이었다. 이 역시 악비로 하여금 고종의 신임과 자신을 인정해준 은혜에 대해 감격하게 했다.

이에 앞서 송나라 장수 유광세(劉光世)가 직위에서 쫓겨나면서 그가 거느리던 회서군(淮西軍)이 마땅히 악비에게 소속되어야 했다. 원래 악비는 이미 고종에게 금나라 토벌 계획을 올리면서 2~3년 내로 중원을 통일하겠노라고 맹세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승진은 도독(都督) 장준의 질투를 불러일으켰고 게다가 항금(抗金) 사업에 대한 간신 진회(秦檜)의 방해공작이 겹치면서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악비가 유광세의 부하들을 접수하는 것에 반대했다. 또 그의 공이 너무 커서 주군(主君)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구실로 고종에게 명령을 회수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각 군(軍)을 총괄해 직접 황룡(黃龍)을 공략하려던 악비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악비는 분노를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임금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기왕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할 수 없다면 그는 물러나서 모친에 대한 효를 다하는 길을 선택했다. 악비는 연달아 3차례에 걸쳐 물러날 것을 청했으며 또 고종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여산(廬山)으로 돌아가 돌아가신 모친을 위해 효도를 다하려 했다.

고종이 비록 미혹에 빠져있긴 했지만 악비야말로 구하기 힘든 장수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곧장 여산으로 사람을 파견했다. 다시 돌아와 대국을 주관하라는 요청이었다. 6월 악비는 다시 군영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종일관 북벌의 의지를 잊지 않았고 본부(本部) 병력만으로 고군분투해서라도 금나라를 정벌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주청은 끝내 고종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해 8월 남송 조정을 진동시킨 큰 사건이 터졌다. 회서군사들이 아무도 관할하거나 통제하는 사람이 없자 내부에서 많은 모순이 잇따르는 와중에 부장(部將) 역경(酈瓊)이 반란을 일으켰다. 4만 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齊)나라에 투항해버린 것이다. 수만 명에 달하는 송나라 병사들이 하룻밤 사이에 적군으로 바뀌니 남송 방어선에 큰 구멍이 뚫렸다.

악비는 이 소식을 들은 후 곧장 건강으로 달려가 회서에 둔병할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후임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라를 위한 순수한 충정에 우러나온 그의 제안은 고종 앞에서 다시 한 번 빈 문서로 변했다.

이와 동시에 호시탐탐 나라를 팔아 영화를 누리기 위한 기회를 노리던 간신 진회가 마침내 소흥 9년 정월 굴욕적인 송나라와 금나라의 강화협약을 맺었다. 이에 북벌은 더욱 더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를 맺으면 편안해질 거라는 고종의 환상은 불과 1년도 못되어 깨져버렸다. 줄곧 송을 멸망시키려던 금올출(金兀朮)이 송나라를 침략한 것이다.

조서를 어기고 출정해 홀로 적진 깊이 들어가다

소흥 10년(1140년) 5월 금올출이 단독으로 조약을 깨고 질풍노도처럼 침략해왔다. 고종은 그제야 금올출을 체포하거나 죽이면 큰 상을 내린다는 조서를 내리면서 악비 등의 장수들에게 출전을 명령했다. 다년간 항금 대업을 잊지 않고 말과 무기를 준비해온 악가군에게 마침내 결전의 시각이 온 것과 같았다.

그러나 고종은 거듭 “대군은 수비를 유지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작전 목표도 광주(光州)와 채주(蔡州)로 한정했으며 심지어 악비에게는 병력을 후퇴시켜 되돌리라는 조서까지 내렸다. 아마도 이것이 제4차 북벌이 성공 직전에 실패하게 된 회한을 미리 보여준 것인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악비에게 성지(聖旨)를 전달한 사람이 줄곧 항금을 주장하던 이약허(李若虛)였다. 그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의연히 조서를 고쳐 군주의 명령을 어겼고 군사를 이끌고 먼길을 나서는 악비를 직접 전송했다.

당시 송나라와 금나라의 주전장이자 악가군이 달려가려던 목적지는 바로 개봉(開封)이었다. 당시 금올출은 막 순창(順昌)에서 패해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고 영창(潁昌), 회녕(懷寧), 응천(應天) 3부(府)가 협력해 개봉을 방어하면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악비는 출전한 지 불과 반달 만에 개봉부 외곽을 깨끗이 청리해버렸고 마침내 송금(宋金) 결전 으뜸가는 주역이 되었다. 또한 바로 이 승리로 인해 그는 적군을 공격하는 주력이 된 동시에 각 지역마다 일부 병력을 배치해 지키게 해야 했다. 게다가 다른 송나라 군사들은 금나라 병사들과 교착상태에서 대치하거나 또는 일부러 전투를 회피하면서 악가군을 도와줄 수 없었다.

악비는 다시 한 번 단독으로 그것도 병력이 분산된 불리한 조건 하에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싸워야 했다. 이에 악비는 전진을 멈추고 개봉 부근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금올출은 이 기회를 노리고 즉각 악비가 주둔하고 있던 언성과 왕귀(王貴)가 주둔한 영창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반격에 나섰다. 이것이 북벌 중 가장 유명한 언성대전과 영창대전이다.

한 달이 넘는 정비 기간을 거치며 금올출은 용호대왕(龍虎大王)과 개천대왕(蓋天大王) 등 여러 갈래의 대군을 집합시켜 병력을 총동원해 본인이 직접 나서 언성을 공격했다. 금군의 선봉인 1만 5천여 정예 기병들이 이미 흉흉한 기세로 성 아래까지 쳐들어왔다. 언성 안에 있던 악가군은 오직 ‘배외군’(背嵬軍 악가군 정예 부대)과 일부 ‘유혁군’(遊奕軍)만 쓸 수 있었다.

언성 혈전과 영창 지원

다년간 정강(靖康)의 치욕에 대해 신하로서 큰 한을 품고 있었던 악비는 마침내 설욕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강적을 마주한 그는 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는 배외군 사령관이자 큰 아들인 악운(岳雲)에게 성을 나가서 적과 맞서라고 명령했다. 원래 엄격했던 아버지였던 악비는 큰 전투를 앞에 두고 아들에게 직접 군사명령을 내렸다.

“너는 반드시 전투에서 승리해야만 돌아올 수 있다. 만약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네 목을 칠 것이다!”[2]

젊은 나이에 이미 영관인(贏官人)이란 명예를 얻은 악운은 즉각 원수의 무거운 사명을 받들어 자신이 자랑하는 철추창(鐵錐槍)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금군은 기병이 위주라 기마전에 뛰어나 좌익과 우익에 ‘과자마(拐子馬)’와 중갑 철기병인 ‘철부도(鐵浮圖)’를 배치했다. 반면 송나라 병사들은 보병 위주였다. 언성은 지세가 평탄하고 넓어서 기병을 운용하기 유리한 곳이다. 때문에 악가군이 승리하기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악비가 악운에게 특히 엄한 명령을 내린 이유이다. 이 한차례 싸움은 진정으로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힘겨운 전투였다.

악운은 기병을 이끌고 피로 목욕을 할 정도로 분전했고 금나라 대군도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수천에 불과한 악가군이 금나라 병사들의 여러 차례 공격을 모두 막아냈고 금나라 병사들의 시신이 들판을 덮었다.

하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아서 수십 차례 전투를 치른 후에도 포위한 금군의 숫자는 십수 만에 달했다. 이때 악비 휘하의 맹장 양재흥(楊再興)이 단기필마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의 대장인 금올출을 생포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백 명의 적군을 죽였고 자신도 수십 곳에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가장 격렬한 순간 금올출이 또 금군 정예 기병인 철부도를 내보내니 기병들이 달리면서 일어나는 누런 먼지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였다.

강대강으로 부딪히는 혈전 외에도 악가군에는 기병을 제압할 수 있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 악비는 즉시 보병에 명령을 내려 손에 긴 칼을 잡게 했다. 전투 진영에 들어간 후 절대 위를 보지 말고 오직 적 기병이 탄 말의 다리만 집중하게 했다. 말이 다치면 말 위에 탄 기병은 전투 능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공과 지략을 배합했기 때문에 악가군은 불패(不敗)의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악비는 전선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악가군의 몇몇 장수들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즉각 정의로운 말로 엄하게 제지했다.

“안 된다! 지금은 너희들이 공을 세워 제후에 봉해질 순간인데 어찌 후퇴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면서 친히 4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영으로 뛰어들고자 했다. 이때 한 장수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적을 얕보시면 안 된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악비는 채찍을 휘둘러 그의 손을 치우게 하고는 엄하게 말했다. “이것은 네가 알 바가 아니다!”[3]

사령관이 선봉에 서서 직접 적진을 향해 돌격하자 이를 보던 장수와 병사들의 사기가 몇 배로 증가했고 모두들 생사의 관념을 내려놓고 그야말로 일당백이 되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이날 전투는 날이 어두워질 때에야 비로소 금나라 군의 퇴각 신호가 떨어졌다. 이 한 차례 전투에서 악가군은 또 한 번의 대승을 거뒀고 약 200여 필의 전마(戰馬)를 노획했으며 그 외 무수한 적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휴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악비는 언성에서 패배한 금올출이 분명히 더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 영창을 다음 공격 목표로 삼을 것으로 예측했다. 때문에 즉각 악운에게 정예 병력을 이끌고 영창으로 달려가 구원하도록 했다. 이에 자욱한 먼지를 날리며 악가군은 계속해서 전진했고 북벌 전쟁에서 또 하나의 쾌거를 역사에 남겼다.

주석:

[1]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太上知公之可大任也,獨召公至寢閣,命之曰:“中興之事,朕一以委卿。除張俊、韓世忠不受節制外,其餘並受卿節制。”

[2] 出自《鄂國金佗稡編》卷8:先臣遣臣雲領背嵬、遊弈馬軍,直貫敵陣,謂之曰:“必勝而後返。如不用命,吾先斬汝矣!”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8:先臣時出略戰地,望見黃塵蔽天,眾欲少卻。先臣曰:“不可,汝等封侯取賞之機,正在此舉,豈可後?”時自以四十騎馳出。都訓練霍堅者扣馬諫曰:“相公爲國重臣,安危所系。奈何輕敵?”先臣鞭堅手麾之曰:“非爾所知!”

영창 및 주선진 대첩과 12차례 금패

언성(郾城)대첩은 남송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휘황한 전적(戰績)이었다. 원래 북벌을 반대했던 고종조차 이 소식을 들은 후 격동해서 악가군을 치하하고 포상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송과 금 두 나라가 15년 동안 대치하면서 백여 차례 전투를 치렀지만 평지에서 금나라 기병과 싸워 대승을 거둔 기적을 창조한 악비는 “충의(忠義)가 신명(神明)에 통하고 위엄과 은혜로 사졸들에게 믿음을 주는”[1] 신장(神將)이 되었다.

악가군에게 참패한 후 금올출은 더는 언성을 넘보지 못했다. 그는 곧 12만 대군을 언성과 영창 사이에 있던 임영현(臨潁縣)에 집결시켰다. 두 성 사이의 연계를 끊으려는 시도였다. 악비는 병력 수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적의 주요 목표는 영창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악운에게 일부 배외군을 주어 구원하게 한 것이다.

사람도 말도 피로 물든 치열한 혈전

당시 영창을 지키던 장헌(張憲)은 병력을 이끌고 임영으로 나와 금올출과 결전하려 했다. 이때 남달리 용맹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양재흥(楊再興)은 3백의 기병을 이끌고 인근 소상하(小商河)에서 적진을 정탐하고 있었다. 소흥 10년(1140년) 7월 13일 이날 그는 비장하고 참혹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양재흥 등은 갑자기 닥친 금군 주력부대와 조우했다. 불과 3백 명으로 십여 만의 적을 상대해야 했으니 그 전투가 어떠했으랴?

이때 3백 용사들의 답은 당연히 죽을 때까지 끝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양재흥이 휩쓰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적들이 쓰러졌다. 이들은 두려운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고 적군과 맞서 사투를 벌였다. 결국에는 하늘 가득 화살이 날리는 가운데 양재흥의 몸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변했다. 모든 병사들이 전력을 다해 죽기 직전까지 끝까지 싸웠고 전투는 이들이 모두 죽은 후에야 끝났다. 이 전투는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악가군은 단 한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는 악가군의 강인하고 절대 굴복하지 않는 군혼(軍魂)을 보여준 것이다.

이들은 비록 전투에 패배했고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장수를 포함해 2천여 명에 달하는 금병의 목을 베었다. 당시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작은 계곡은 온통 핏물이 흐르는 강으로 돌변했다. 금병들의 시신이 강물의 흐름을 막을 정도였다. 나머지 금나라 병사들이 이 모습을 보고는 담이 오그라들면서 계속해서 장헌의 대군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금올출은 오직 8천명만을 남겨 임영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영창으로 달아났다.

14일 장헌의 대군이 도착해 임영에 남아 있던 금군을 쓸어버리고 3백인의 시신을 거뒀다. 그들이 양재흥의 시신을 화장할 때 무려 두 되가 넘는 화살촉이 나오자 악가군 전 장병이 큰 감동을 받았다.[2] 그가 악비에게 귀부할 때를 회상해보면 양재흥은 과연 원수의 두터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짧지만 장렬한 일생을 통해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사명을 완수했다.

같은 날 영창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금올출의 3만 철기병과 수만의 보병이 성 밖 무양교(舞陽橋)에서 진을 펼치니 그 폭이 10리가 넘었고 진영에서 울리는 징과 북소리가 울려 그야말로 천지가 진동할 지경이었다. 악운이 이 진식(陣式)을 보고는 직접 8백 배외군을 이끌었다. 좌우익은 보병으로 기병을 엄호하면서 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쌍방은 수십 차례 교전을 펼쳤다. 악운은 앞뒤로 10여 차례 적진에 뛰어들어 무수히 많은 적들을 죽였다. 이 와중에 백여 곳에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악가군들도 수많은 적을 죽였고 “사람과 말이 모두 피로 물들었다.”[3] 당시 악비의 부장이었던 왕귀(王貴)가 기가 꺾여 전투에 앞서 겁을 먹었지만 다행히 악운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군심(軍心)과 사기를 안정시켰다. 결국 전군(全軍)에서 단 한 사람도 도망가거나 낙오하지 않았다. 정오에 이르자 마침내 금올출의 군대가 무너졌다. 악가군은 적 5천여 명을 죽이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외에 획득한 전마와 무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악비와 전 장병들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신념으로 객관적인 조건이 모두 불리한 상황에서 한 차례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금병은 악가군의 실력에 쓴 맛을 본 후 진심에서 우러나와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긴 어렵다!(撼山易,撼嶽家軍難!)”라는 천고의 찬사를 남겼다.

12차례 금패에 무너진 10년의 공든 탑

두 차례 대전을 거치며 금올출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하자 용맹을 떨치던 금군도 투지가 사라졌다. 많은 적장들이 암암리에 악비측에 투항했다. 생각해보면 일찍이 십 수 년 전 종택(宗澤)이 3차례나 “황하를 건너라!”고 외친 적이 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악비는 어쩔 수 없이 두충(杜充)을 따라 개봉 방어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옛 영토를 회복하려던 악비의 꿈이 실현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람이 어찌 한껏 고무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는 곧 더욱 큰 자신감으로 병사들에게 맹세했다.

“이번에 금인들을 죽여 황룡부(黃龍府)까지 곧장 쳐들어가 제군들과 함께 통쾌하게 마시리라!”[4] 여기서 황룡부란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 감금되어 있던 금나라 지명으로 지금의 길림성 장춘에 해당한다. 당시 악비의 자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3일 후 악비는 병력을 재정비해 군사를 이끌고 개봉을 급습하러 갔다. 가는 길에 수천의 적군을 만났지만 모두 악가군에 패했고 살아서 달아난 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금올출은 다시 한번 10만 대군을 결집시켜 개봉 남서쪽에 위치한 주선진(朱仙鎮)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때 전군(前軍)으로 나선 5백 명의 배외기병은 개인의 생사는 돌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섰다. 송과 금 두 나라 병사들이 부딪치자 금병이 곧 일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전선이 붕괴되었다. 금올출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황하를 건너 하북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강력한 악가군이 계속해서 승전고를 울리자 송 조정의 주화파 특히 간신 진회(秦檜)는 점점 불안해졌다. 이에 그는 고종이 금병을 두려워하고 장수를 꺼리는 심리를 이용했다. 악비의 군사들만 저렇게 활약하면 통제가 어렵다는 구실로 고종을 부추겨 군대를 퇴각하라는 성지(聖旨)를 내리게 했다. 악비는 언성, 영창대첩에서 승리했을 때 이 조서를 받았다. 그는 병사들의 고귀한 생명으로 바꿔온 전과를 차마 그냥 버릴 수 없어 상소를 올리며 극력 철군에 반대했다.

그러나 대군이 주선진에 도달했을 때 악비는 하루 사이 12차례나 고종이 내린 철군하라는 금패(金牌) 명령을 받았다. 조령(詔令)에서는 아주 엄하게 악가군은 악주(鄂州)로 물러나고 총수인 악비가 직접 조정에 들어와 황제를 알현하라고 했다. 여기서 금패란 송나라 황제가 긴급 조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가장 빠른 전달 방식을 말한다. 조정에서 악비가 있는 곳까지 12차례나 성지를 내린 것을 보면 고종과 조정 신료들의 화의(和議)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알 수 있다.

손만 뻗치면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직강산과 간신에게 기만당한 천자라는 두 가지 갈림길 앞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려던 악비로선 선택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악비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마침내 군주의 명령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조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신(臣)의 10년의 공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이는 신이 임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은 권신인 진회가 폐하를 그르치게 했나이다!”[5]

원래 많은 적들을 소탕했던 정예부대로서 원치 않는 철군을 하려니 아쉬움이 컸다. 철군 도중 수많은 백성들이 옷을 붙들고 발을 구르며 길을 가로막고는 울면서 악비에게 호소했다.

“저희가 향분(香盆)을 머리에 이고 식량을 나르면서 원수의 군대를 맞이한 것을 적병들이 다 압니다. 지금 원수께서 떠나시면 저희는 모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6]

여기서 향분이란 백성들이 왕사(王師)를 환영할 때 사용할 향불을 피우는 그릇을 말한다.

또 한 서생은 직접 악비를 찾아와 간언했다.

“설령 중원백성들은 염두에 두시지 않는다 해도 설마 지금까지 이룬 전과(戰果)를 모두 포기하실 수 있겠습니까?”[7]

악비는 말을 세우고 슬픔에 목이 메여 백성들에게 조서를 보여주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이는 조정의 뜻이니 우리가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8]

성지를 보고 난 백성들이 더는 군사를 되돌릴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곡소리가 들판에 울리며 피난민으로 가득했다. 악비는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해 닷새를 더 머물기로 결정하고 현지 백성들이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도록 엄호했다. 한편 금병은 악가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권토중래의 기회로 삼아 중원을 차지하고 현지 백성들을 도륙하며 보복했다. 천지를 흔들었던 악비의 북벌은 송군(宋軍)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악몽과 같은 중원의 이 소식을 들은 악비는 비분강개하며 말했다.

“획득한 모든 군(郡)들이 하루아침에 다 끝났구나! 사직강산을 중흥하긴 어렵겠구나! 건곤세계(乾坤世界)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겠구나!”[9]

주석:

[1] 出自《鄂國金佗續編》卷4:《郾城戰殺金將鄂爾多貝勒大獲勝捷賜詔獎諭仍降關子錢犒賞戰士》。

[2]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4:楊再興、王蘭以五百騎直入虜陣,殺數千人。再興與蘭皆戰歿,高林亦戰死,聞者惜之。獲再興之屍焚之得箭頭二程式。天大雨,溪澗皆滿溢,虜騎不得進,官軍乃得還。

[3]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潁昌之戰,人爲血人,馬爲血馬,無一人肯回顧者。

[4] 出自《鄂國金佗續編》卷14:《忠湣諡議》。

[5] 出自《鄂國金佗稡編》卷8:先臣嗟惋至泣,東向再拜曰:“臣十年之力,廢於一旦。非臣不稱職,權臣秦檜實誤陛下也!”@*#

간신들의 모함으로 파직

북벌의 실패는 악비의 평생 꿈을 파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목숨마저도 빨리 앗아갔다. 전장(戰場)의 악비는 금나라 군사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하고 세상을 압도하는 영웅이었지만 관장(官場)에 돌아와서는 혁혁한 전공 때문에 오히려 온갖 질투와 시기를 받아야 했다. 한창 나이인 39세에 오로지 나라만을 생각했던 악비는 권신(權臣)들의 모해를 받아 영원한 유감을 남겼다.

오늘날 악비의 묘역이나 악왕묘(岳王廟) 앞에 가면 어디서나 악비를 박해해 죽인 간사한 몇몇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상(像)을 볼 수 있다. 가장 흔한 것은 5명으로 각각 진회 부부, 만사설(萬俟卨), 장준(張俊), 왕귀(王貴)이다. 이중에서 진회는 남송 제일의 간신으로 악비를 살해한 주범이지만 나머지 4명은 대체 어떤 나쁜 짓을 저질러 악비를 억울하게 죽게 했을까?

간사한 재상과 권신이 결탁해 충신을 모함

남송을 지키는 든든한 장성(長成)으로 불리던 악가군(岳家軍)은 12차례에 걸친 금패의 독촉을 받고 침울하게 철수해야 했다. 악비는 비분(悲憤)과 실망으로 군사업무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과연 회서(淮西)전투가 다시 터졌고 악비는 명을 받아 아군을 구원하러 나섰다. 하지만 뜻밖에도 전방 장수들에 대한 통제가 허술해진 송나라 군사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처음에는 승리했지만 나중에 패배로 끝났다. 악가군은 이동하느라 힘만 들이고 아무 공도 세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끌고 구원에 나서지 않았다는 모함을 받게 되는데 이 일은 나중에 악비의 ‘죄를 입증할 증거’가 된다.

회서전투 이후 금나라는 송을 멸망시킬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고 송나라 황제 역시 국토의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일신의 안일함을 추구했다. 두 나라 군주의 뜻이 일치하니 다시 평화회담이 재개되었다. 나라에 전쟁이 없어지자 고종에게 금나라는 더 이상 큰 우환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다른 걱정이 슬슬 올라왔다. 즉 다른 많은 황제들처럼 무장(武將)을 꺼리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동안 전권을 휘두르며 나라를 팔아 이익을 취해왔던 재상 진회 역시 주전파 장수들 특히 악비가 눈엣가시가 되어 제거하고자 했다. 이것은 단순히 주전파와 주화파 또는 충신과 간신의 근본 대립일 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 왜냐하면 일찍이 소흥 10년 금올출이 진회에게 보낸 밀서에 “그대는 매일 평화를 청하지만 악비는 일편단심 중원을 수복하려 하오. 그는 또 내 사위를 죽였으니 이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소. 반드시 악비를 죽여야만 평화회담을 재개할 것이오.”[1]

때문에 진회는 전력을 다해 고종과 무장들 사이의 관계를 이간질했고 또 온갖 방법으로 무장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소흥 11년(1141년) 4월 고종은 송 태조의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본받아 악비, 한세충, 장준 등 세 대장을 수도인 임안(臨安)으로 불러 매일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면서 관작(官爵)을 올려주었다. 겉보기에는 세 장군에 대한 승진인사였지만 사실은 이들의 손에 든 병권을 빼앗은 것이다.

당시 악비와 한세충은 모두 충의(忠義)로 이름이 났고 항금(抗金)사업의 실패에 대해 가슴 아파했지만 유독 장준만은 부귀영화를 위해 진회에게 달라붙어 다른 두 장군에 대한 모함에 동참했다. 장준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자 진회는 다음 수순으로 노장 한세충을 흔들려했다.

5월 상순 악비는 장준과 악비에게 성지(聖旨)를 받들어 원래 한가군(韓家軍 한세충의 부대)이 주둔한 초주(楚州)로 가서 군무를 시찰하게 했다. 출발 전에 진회는 악비에게 넌지시 이번 일은 한세충에게 죄명을 만들어 그 군대를 해체하려는 뜻임을 밝혔다.

하지만 충정(忠正)하기 그지없던 악비인지라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한세충과 함께 일을 했는데 만약 무고한 그에게 죄를 묻는다면 이는 진실로 그를 저버리는 것이오!”[2]

그는 이에 한세충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진회의 악독한 계획을 알려주었다. 이 일 때문에 악비는 진회로부터 더 깊은 미움을 받게 된다. 한가군 진영에 가서도 악비는 장준에게 한세충의 부대를 해산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히 권유했다. 또 퇴각할 목적으로 초주에 방어성 건설을 제안한 장준의 주장을 극력 반대했다. 이렇게 되자 그와 장준 사이의 오해도 한없이 심해졌다.

간신의 모함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다

한편 진회 입장에서는 이제 장준이 자신과 한패가 되었고 한세충은 실권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화협정을 저지할 인물은 오직 악비만이 남았다. 게다가 악비가 강직하고 올바른 행동으로 한가군을 와해시키려던 진회와 장준의 음모를 타파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원한이 전부 악비에게로 전이되었다. 진회는 암암리에 자신의 수하인 만사설(萬俟卨) 등 간관(諫官)을 사주해 악비를 탄핵하게 했고 그가 회서전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며 무고했다. 또 군대를 시찰할 때 초주의 방어를 포기하라며 “큰소리를 쳤다”고 했다.

이때 남송 조정에서는 흑백(黑白)이 뒤집히고 도처에서 간신의 전횡으로 충신을 쫓아냈다는 의론이 분분했다. 8월 악비는 다시 한 번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고 마침내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제는 조용하고 한적한 가운데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면관(免官)’은 진회의 한 가지 수법에 불과했고 그의 진정한 목적은 악비를 살해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악비처럼 큰 공을 세운 공신(功臣)을 주살하자면 반드시 “용서하지 못하고 죽여야 할(殺無赦)” 죄명이 있어야 했다. 예부터 모반죄가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악비는 평생을 나라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그의 신상에선 그 어떤 역모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에 진회와 장준은 유력한 ‘내부 공범’이 필요했다. 내부에서 악비를 고발해야만 남들이 믿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가군의 도통제(都統制)로 악비의 오른팔이었던 왕귀가 자연스레 이들의 목표가 되었다. 왜냐하면 과거에 왕귀의 부하가 민가에 난 화재를 이용해 절도를 하다가 악비에게 발견된 적이 있었다. 당시 왕귀까지 연루되어 처벌로 곤장 1백대를 맞은 적이 있다. 또 영창대전에서 왕귀는 일시적으로 겁을 먹고 군영에서 큰 잘못을 저질러 하마터면 악비에게 목이 잘릴 뻔했다. 때문에 저들은 왕귀야 말로 악비를 가장 미워할 사람이니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왕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악비는 대장으로서 용인술에서 반드시 신상필벌을 분명히 해야 했다. 만약 이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면 그럼 미워할 게 너무 많아질 것이오!”[3]

하지만 교활한 장준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남들이 모르는 왕귀의 사생활을 캐내고 압박하자 결국 그는 악비를 배반한 공범이 되었다. 이외에도 그들은 또 군중에서 줄곧 악비를 미워했던 왕준을 찾아냈다. 이렇데 두 왕씨가 연합해 장헌(張憲)이 왕귀와 함께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키고 조정을 압박해 병권을 악비에게 되돌리려 한다고 무고했다. 이 모반사건은 또 악비의 큰아들인 악운(岳雲)까지 연루되었다.

진회는 곧 황제에게 장헌과 악운을 대리시(大理寺)로 압송해 철저히 조사하고 악비를 불러들여 심문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고종이 이 말을 들은 후 처음에는 놀라워했지만 의심이 생기자 곧 허락했다. 이에 장헌과 악운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심한 구타로 온몸에 성한 피부가 없었지만 이들은 시종일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겁난은 악비도 피하기 힘들었다.

세상의 귀감이 된 진충보국(盡忠報國)

한편, 악비는 조정의 명령이 내리기 전 집에서 손주를 돌보며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항금의 실패와 막연한 앞날 때문에 그의 마음은 여전히 낙담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그는 만강홍과는 전혀 다른 심경으로 ‘소중산(小重山)’이란 사(詞)를 써서 이 시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어제밤 날이 추워지니 귀뚜라미 울음소리 그치질 않고,

강산을 되찾을 천리몽에서 놀라 깨어나니, 이미 삼경이구나.

일어나 홀로 계단을 거니니,

인적은 없는데 창밖엔 희미한 달빛만 비추누나.

공명을 위해 머리가 세도록 했건만,

고향의 송죽은 늙어 귀로를 막는구나!

근심을 풀어보려 거문고를 타고 싶어도,

지음이 적으니, 줄이 끊긴다한들 누가 있어 들어주랴?

昨夜寒蛩不住鳴

驚回千里夢,已三更

起來獨自繞階行

人悄悄,簾外月籠明

白首爲功名

舊山松竹老,阻歸程

欲將心事付瑤琴

知音少,弦斷有誰聽

선인들은 가야금 줄이 끊어지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아마도 이때 악비는 마음속으로 이미 미래의 결말을 예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당시 장헌과 악운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일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소흥 11년 9월 자신을 조서를 가져 온 사자를 만난 후에야 진회의 행실에 대해 알게 된다. 하지만 악비는 악가군은 청렴결백하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입증하기만 하면 모든 의혹이 저절로 풀릴 거라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친필 서신 몇 통을 지니고 황급히 길을 나섰다.

밤에 역참에 투숙할 때 수행원들이 모두 이번 여행은 길조보다는 흉조가 많다면서 악비더러 임안에 가서 조사를 받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악비는 단호하게 “가지 않을 수 없다”[4]고 했다. 연속으로 3차례나 권고했지만 말을 바꾸지 않았다. 악비가 어찌 진회의 흉계 내지는 자신이 직면한 위험을 몰랐겠는가?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는 거리낌이 전혀 없었고 천지에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또 죽음을 의연히 여기는 기개를 지녔기에 의연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10월 악비가 임안에 도착한 지 얼마 후 진회는 곧장 사람을 파견해 조서를 고치고 그를 속여 대리시로 데려가 정식으로 감옥에 수감했다. 악비는 사방에 발이 드리워있고 분위기가 음울하고 이상한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가?”[5]

그러자 옥리(獄吏)가 나와 직접 알려주면서 또 그를 데려가 조사를 받게 했다.

악비는 “내가 나라를 위해 반평생 심혈을 쏟았건만 어찌하여 오늘 이곳에 오게 되었단 말인가?”[6]라고 탄식했다. 하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심문하기 전에 옥리는 또 곤장을 두들기며 매서운 소리로 크게 호통을 쳤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똑바로 서라!”

악비는 그제야 자신이 더 이상 국경을 호령하던 사령관이가\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소리(小吏)의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죄수임을 알았다.

이에 분연히 크게 탄식했다.

“내 일찍이 10만 대군을 이끌었으나 오늘에야 옥졸(獄卒)의 신분이 존귀함을 알겠구나.”[7]

주심관(主審官)인 어사중승(御史中丞) 하주(何鑄)의 조사를 받으면서 악비는 의연하고 당당했으며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변론하는 대신 옷을 벗어 주심관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등에 깊이 새겨진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4글자를 보여준 것이다. 부모님의 도타운 가르침이 아직도 귀에 선하고 고종 역시 일찍이 정충악비(精忠岳飛)란 군기를 상으로 내려준 적이 있었다. 이렇게 효성스럽고 충성스런 악비가 어떻게 모반행동을 했겠는가?

주석:

[1] 出自《鄂國金佗稡編》卷8:金人謂檜曰:“爾朝夕以和請,而岳飛方爲河北圖,且殺吾婿,不可以不報。必殺岳飛,而後和可成也。”

[2] 出自《鄂國金佗稡編》卷20:先臣歎曰:“飛與世忠同王事,而使之不辜被罪,吾爲負世忠!”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8: 貴不欲曰:“相公爲大將,寧免以賞罰用人。苟以爲怨,將不勝其怨矣!”

[4] 出自《鄂國金佗續編》卷28。

[5] [6]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6:良久,秦檜密遣左右傳宣:“請相公略到朝廷另聽聖旨。”候宣詔即時前去,卻引到大理寺,侯駭然曰:“吾何到此?”才入門,到廳下轎,不見一人,止見四面垂寬。才坐少時,忽見官吏數人向前雲:“這裏不是相公會處,後面有中丞,請相公略來照對數事。”侯點頭雲:“吾與國家宣力,今日到此何也?”

[7]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6:有卒執杖子,擊杖子作聲而叱曰:“叉手正立!”飛辣然聲喏而叉手矣。既而曰:“吾嘗統十萬軍,今日乃知獄吏之貴也。”

일대명장의 천고기원(千古奇冤)

‘정충보국(精忠報國)’은 악비의 생명 깊은 곳에 새겨진 맹세이자 사명으로 이를 목격한 모든 이들을 감동시켰다. 주심관이었던 하주(何鑄)는 원래 악비를 탄핵했던 인물이지만 이때에 이르러 냉정한 시선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악비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하주는 증거부족을 이유로 진회에게 악비는 무고하다고 보고했다. 또 이 사건을 계속 심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진회는 뻔뻔하게 이는 “황상의 뜻이오(上意)”라고 했다. 하주가 계속해서 “제가 어찌 악비를 위해 인정을 호소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강적이 다 사라지지 않았으니 무고하게 대장을 살해하면 군심(軍心)을 잃을까 우려되니 이는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1]라고 간언했다.

진회는 말문이 막히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심복 만사설로 교체해 사건을 계속 심리하게 했다. 만사설이란 위인은 진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악비에게 극심한 고문과 심문을 능사로 했다. 그는 허장성세로 일부러 악비를 큰소리로 질책하면서 악운, 장헌과 어떻게 모반을 꾀했는지 물었다. 동시에 악비가 과거에 썼던 시 중 “한문하재부귀(寒門何載富貴 미천한 가문에서 어찌 부귀를 실으랴)”를 가져다 진작부터 역심을 품고 있었노라고 무함했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나라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나라의 사법(司法)을 장악하고 있다해도 절대 충신을 모함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내가 저승에 가서라도 당신들과 끝까지 대질할 것이오!” 악비는 이렇게 늠름하게 이치에 근거해 강력히 따졌지만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회와 같은 패거리로 전혀 이치가 통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했다.

“내 이제야 비로소 이미 국적(國賊)인 진회의 손에 떨어졌음을 알았노라. 나라에 보답하려는 나의 충심이 물거품이 되었구나!”[2]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단식으로 항의하며 영웅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온갖 시달림 끝에 원한을 품고 죽다

만사설은 온갖 구실을 다 찾아내 죄명을 꾸며냈지만 최종적으로 전혀 설득력 없는 3가지 ‘하늘에 사무치는 큰 죄(彌天大罪)’만 찾아냈다.

첫째 장헌과 왕귀가 지닌 악비가 썼다는 모반편지는 오히려 자신들에 의해 소각되었다.

두 번째로 회서(淮西)전투에서 병력을 운용할 때 시간을 끌며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악비가 했다는 몇 마디 반란 의도가 담겼다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회서전투에서 패배한 후 “나라에 큰일이 났는데도 관아(황제)에서는 또 덕을 닦지 않는구나!”라고 하며 황제를 비판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내가 서른두 살에 절도사가 된 것은 자고로 드문 일이다.”[3]라고 말해 송 태조가 서른에 절도사가 된 일과 비교하며 태조를 본받아 황제가 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석 달 이상 조사를 했음에도 대리시 관원들은 줄곧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악비가 투옥된 일은 남송 조야(朝野)를 진동시켰고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앞다퉈 상서를 올리며 악비를 구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진회 일당으로부터 잔혹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당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피해 은둔해 있던 한세충(韓世忠)은 의분(義憤)에 못이겨 직접 진회를 찾아가 질의했지만 황당무계한 답변만 들어야 했다.

이번 사건이 비록 명확하진 않지만 “그 일이 아마 있었을지도 모른다(其事體莫須有)”는 것이다. 한세충은 이 말에 분노해 “막수유(莫須有)란 세 글자로 어떻게 천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4]라고 반문했다.

곧 연말이 다가왔기 때문에 진회 등 간신배들은 걱정이 많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악비를 죽여 논란을 잠재우고 평화회담을 성사시켜야 했다. 소흥(紹興) 11년 섣달 29일 진회는 혼자 화실(畫室)에 앉아 악비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귤을 먹을 때도 깊이 생각에 잠겨 귤껍질을 만지작거리며 손톱으로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의 아내 왕(王)씨가 이 모습을 보더니 앞으로 나서서 냉소하며 말했다.

“영감은 어째서 결단하지 못하시오? 호랑이를 잡기란 쉽지만 놓아주긴 어렵습니다!”[5]

이 수다스런 부인의 음험하고 악랄한 수단은 진회를 능가했다. 그녀는 마침내 남편을 사주해 일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즉시 악비를 처단하게 했다. 그녀의 한마디 말이 악비의 명을 재촉하는 마지막 부적인 최명부(催命符)가 된 것이다. 이 말은 진회의 ‘막수유’와 마찬가지로 지난 천 년간 악명이 자자한 말이 되었다. 진회는 결국 최종 결심을 내렸고 직접 편지를 써서 대리시에 보냈다.

만사설 등은 마지막으로 악비를 심문한 후 그에게 공소장에 지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악비는 자신의 생명이 곧 끝날 것을 예감하고 붓을 들어 8글자 절명사(絕命詞)를 적었다. “하늘의 태양이 환히 보고 계신다, 하늘의 태양이 환히 보고 계신다(天日昭昭 天日昭昭)”

곧이어 악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천일조조(天日昭昭)와 영원한 영웅의 혼

《악국금타졸편(鄂國金佗稡編)》과 《조야유기(朝野遺記)》에 따르면 진회는 황제의 윤허를 건너뛰고 직접 감옥에 편지를 보내 비밀리에 악비를 처형시킨 진정한 원흉이다.

반면 《건염이래습년요록(建炎以來習年要錄)》에서는 악비가 고종의 조서를 받은 후 사사(賜死)되었고 또 죽은 후 참혹하게 효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악비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주장이 서로 다르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독약인 짐주(鴆酒)를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또는 감옥에서 옥졸의 구타로 늑골이 부러져서 죽었다고 한다.[6]

이유야 어찌되었든 항금(抗金)의 명장 악비는 천고의 원한을 품고 학살당했으며 이루지 못한 꿈을 품은 채 갑자기 사망했다. 곧 새해가 왔지만 천하는 더 이상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국토는 쪼개지고 장수의 별(將星)이 떨어지자 대송(大宋) 백성들은 목 놓아 울었다!

이 억울한 옥사에 연루된 악비의 가족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타향으로 유배되었고 악가군의 여러 장수들 역시 험난한 운명에 처했다. 사료에 따르면 악비는 일찍이 같이 감옥에 들어간 장헌과 악운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맨살을 드러낸 채 족쇄가 채워져 온몸에 혈흔이 낭자한 모습으로 고통스레 신음하고 있었다.[7] 그 후 두 사람도 참수되었고 악비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일당천의 용맹한 두 장군이 간신이 휘두른 도살의 칼날 아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때 악운의 나이는 불과 22세로 한창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 보는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또 ‘복장(福將)’으로 불렸던 우고(牛皋)는 2차 평화회담에 불만을 품었다가 무참히 살해되었다. 소흥 17년(1147년) 상사절(上巳節 역주: 삼월 상순 첫 번째 사일巳日을 말함.) 우고는 어느 잔치에 참석했다가 뜻밖의 중독을 당해 집에 돌아온 후 사망했다. 향년 61세였다. 당시 사람들은 연회를 베푼 전사중(田師中)의 짓으로 보았는데 그는 악비를 배반한 장준(張俊)의 수하였다.

그러나 영웅의 비극적인 결말이 꼭 역사의 종결은 아니다. 악비가 임종 직전에 남긴 ‘천일조조’는 바로 그가 하늘을 향해 표현한 가장 깊고 간절한 호소였다.

악비가 사망한 후 외순(隗順)이란 선량한 옥졸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악비의 시신을 등에 업고 성을 빠져나와 구곡총사(九曲叢祠) 부근에 묻었다. 또 두 그루 귤나무를 심어 매장 장소를 표시하고는 ‘가의란 사람의 무덤(賈宜人墳)’이라고 적어 사람들의 이목을 속였다. 그는 충신양장(忠臣良將)은 언젠가 반드시 누명이 벗겨지고 간사한 악당들은 끝내 도덕의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오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이런 의로운 행동 때문에 악비의 시신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고 영령(英靈) 역시 편히 쉴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진회는 어느 날 서호(西湖)에 놀라갔다가 악비의 신령이 나타난 것을 보았고 악비가 매섭게 질타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쳤으니 내가 이미 하늘에 보고 드렸다. 천제(天帝)께서 사람을 파견해 너를 잡아갈 것이다!”

곧이어 진회는 병으로 급사했다. 나중에 왕씨가 남편을 위해 도사를 청해 법사(法事)를 하는데 도사가 저승에서 온갖 형벌을 받고 있는 진회의 모습을 보았다. 이때 지옥의 진회가 도사에게 한마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번거롭더라도 부인에게 전해주십시오, 동창에서 악비를 모살하려던 음모가 이미 드러났다고!”[8] 다시 말해 곧 왕씨에게 큰 재앙이 닥친다는 의미였다.

비록 고종이 치세한 기간에 진회는 고위직에 머물며 역사자료를 멋대로 뜯어고쳐 자신의 죄상을 덮어 감추려 했지만 그는 함께한 악인들과 함께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 무수한 욕을 먹었다. 필기(筆記)소설 중에는 진회 등이 지옥에서 악보를 받는 참상을 기록한 것이 있고 또 악비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영웅 앞에서 영원히 참회하는 모습을 남겼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유취만년(遺臭萬年 더러운 이름을 영원히 남긴다는 의미)이다.

고종의 뒤를 이은 효종(孝宗) 시기에 이르러 악비는 명예가 회복되고 시호(諡號)도 무목(武穆)으로 정해졌다. 또 이후 점차적으로 역대의 군왕과 백성들 사이에서 공경 받고 추도되는 대영웅(大英雄)이 되었다.

악비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부모를 모심에는 효도를 다했고 나라를 위해서는 충성을 다했으며 군영(軍營)에서는 기율을 엄명하게 했고 지극히 공평무사했으니 가히 전통도덕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강한 무예와 뛰어난 지략으로 가는 곳마다 적을 무찔러 뛰어난 공을 여러 차례 세웠으니 남송 항금(抗金)전쟁의 제1인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고 호연지기(浩然之氣)로 가득해 문자를 통해서도 강산을 되찾으려는 거대한 포부를 드러낸 천고의 절창(絶唱)을 남겼다. 한마디로 말해 악비는 역사상 흔치 않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국사(國士)였다.

정충의 신장(神將) 악비는 서른아홉 짧은 인생을 통해 한편의 벽혈단심(碧血丹心 정의로운 피와 순수한 충성심)의 영웅의 역사를 기록했다.

주석:

[1] 出自《宋史》卷380:檜不悅曰:“此上意也。”鑄曰:“鑄豈區區爲一岳飛者,強敵未滅,無故戮一大將,失士卒心,非社稷之長計。”

[2]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7:侯向萬俟卨、羅振曰:“對天明誓,吾無負於國家!汝等既掌正法,且不可損陷忠牙!吾到冥府,與汝等面對不休!”⋯⋯侯知眾人皆是秦檜門下,既見不容理訴,長籲一聲雲:“吾方知已落秦檜國賊之手,使吾爲國跽主,一旦都休!”道罷,合眼任其拷掠。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24。

[4] 出自《宋史》卷365:獄之將上也,韓世忠不平,詣檜詰其實,檜曰:“飛子雲與張憲書雖不明,其事體莫須有。”世忠曰:“‘莫須有’三字,何以服天下?”

[5] 出自《朝野遺記》:秦檜妻王氏素陰險,出其夫上。方岳飛獄具,一日,檜獨居畫室,食柑,玩皮以瓜劃之,若有思者。王氏窺見,笑曰:“老漢何一無決耶?捉虎易,放虎難也。”檜掣然當心,致片紙付入獄。是日,嶽王薨於棘寺。

[6] 關於岳飛死因,《三朝北盟會編》卷207載“侯中毒而死,葬於臨安菜園內”;《朝野遺記》載獄卒令岳飛沐浴,伺機將他“拉脅而卒”。

[7]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7:言罷,隨獄吏前行至一處,見張憲、嶽雲露頭赤體,各人杻械,渾身盡皆血染,痛苦呻吟。

[8] 出自《錢塘遺事》卷2:《東窗事發》。

남송 전신(戰神)의 충과 효

송금 두 나라의 교전의 봉화는 이제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시비(是非)와 성패(成敗)의 은혜와 원한마저 역사의 장하(長河)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당시의 대영웅(大英雄) 악비가 떠난 지도 이미 8백년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악가군(岳家軍)의 전투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언급하고 있고 충의(忠義)의 영웅은 여전히 사람들의 추도 속에 기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악비는 일찌감치 중화민족의 혼(魂)이 되었기 때문이다. 악비를 언급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로 ‘악모자자(岳母刺字)’의 일화다. 악비의 모친은 아들의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글자를 새겨넣었고 이는 악비 평생의 이상이자 이미지가 되었다. 그는 또한 부모님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킨 지극한 효자였다.

“안으로 부모를 모시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못하면서 어찌 밖으로 군주를 사랑하는 충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1]

고대에 충효(忠孝)는 사람들이 가장 중시하는 도덕관이었다. 악비는 집안에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이라야만 밖에 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하는 의로운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악비는 성년이 되어 평생 말 등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군대 막사나 전쟁터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동시에 부모를 모시는 효성 역시 지극했다.

부모를 극진히 섬겨 효를 충으로 옮기다

악비의 후손들이 조상이 남긴 일들을 회고하면서 악비의 효도를 언급하기만 하면 “선신(先臣 선조인 신하. 여기서는 악비를 가리킴)께서는 천성이 지극히 효순(孝順)하셨다”[2]라 한다. 이렇게 천성과도 같은 효순은 악비가 모친을 봉양한 일화에서 완벽하게 보여준다.

악비가 군대에 들어간 초기 모친은 그가 마음 편하게 고향을 떠나 나라를 위해 종군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당시 고향마저 전란의 위기에 처해 있어 악비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처자를 남겨 모친을 봉양하게 한 후 혼자 출정했다.

나중에 하북(河北 송나라의 북방 행정구역)이 함락되자 악비는 모친과 연락이 끊겼다. 다년간 모친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찾아다녔지만 도대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모친이 인편을 통해 고향 소식을 전해왔다.

“천자를 모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늙은 어미는 걱정하지 말거라.”[3]

그런데 편지 어디에도 자신의 근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자식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악비는 사람을 보내 몰래 전투지역을 지나 모친을 모셔오게 했다. 앞뒤로 모두 18차례에 걸쳐 찾아간 끝에 악비 모친은 마침내 악가군이 주둔한 악주(鄂州)로 모셔올 수 있었다.

밤낮으로 그리던 모친을 본 악비는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다른 한편 부끄러움을 느꼈다. 모친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며 눈물을 흘렸고 아들로서 옆에서 지켜드리며 효도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모친은 그동안 수많은 우환을 겪었기 때문인지 아들을 만난 후 온몸에 병이 생겨 음식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생활조차 힘들어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악비는 비록 군사업무에 바쁜 와중에도 매일 저녁만 되면 모친의 처소를 찾아가 직접 약을 맛보고 음식 수발을 들곤 했다.

악비는 이외에도 모친을 돌봄에 있어 아주 소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소홀함이 전혀 없었다. 사계절 기후 변화에 따라 옷이며 그릇 등을 갈아드렸고 침실에서는 모친을 방해하지 않도록 말과 행동에 조심했다. 혹여 쉬시는 데 방해가 될까 염려했다. 또 만약 전투에 나가게 되면 반드시 남은 가족들에게 모친에 대한 봉양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엄격히 요구했고 만에 하나 부족한 점이 발견되면 일일이 훈계하거나 처벌했다.

옛날 사람들은 효(孝)를 사람이 되는 기초로 보았고 또한 모든 선(善) 중에서도 으뜸으로 보았다. 때문에 늘 최선을 다해 노인을 공경하고 효도를 다했다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악비의 마음속에서 그의 모친은 단순히 자신을 낳아준 사람일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의(大義)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때문에 악비는 어디서든 늘 모친에 대한 효를 잊지 않았고 모친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다.

약 2년의 시간이 흘러 악비가 양요(楊么)의 반란을 평정한 후 모친은 악비의 군영에서 서거했다. 당시 악비는 눈병으로 크게 고생할 때였지만 악몽과도 같은 모친의 사망에 자신의 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놓아 대성통곡했다. 사흘 밤낮을 끊임없이 울면서 모친에 대한 침통한 애도를 표현했다. 이렇게 하고 나자 악비는 얼굴이 수척해졌고 눈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할 수 없이 하루 종일 두터운 차단막을 치고 어두운 곳에서 휴양해야만 했다.

악비는 또 조정에 글을 올려 모친에 대한 효도를 다하기 위해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몸이 호전되자마자 그는 고종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큰아들 악운과 함께 모친의 영구를 고향으로 운반했다. 악주에서 강주(江州) 여산(廬山)까지 천리나 되는 먼 길이었지만 악비 부자는 질퍽거리는 도로와 뜨거운 태양에도 불구하고 맨발로 걸어서 시신을 모셨다.

보다 못한 여러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악비를 대신하고자 했지만 이렇게나마 직접 모친을 모시려는 악비의 마음을 꺾진 못했다. 이렇게 아들과 함께 번갈아가며 모친의 시신을 업고 고향으로 향하는 악비를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친을 편히 안장한 후 악비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은거하며 3년 상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나중에 전투상황이 긴급해지자 고종은 끊임없이 조서를 보내고 사람을 파견해 악비더러 다시 나와 종군하길 원했다. 악비는 부모님의 생전 가르침을 떠올리며 마침내 다시 악주의 군영으로 돌아가 북벌의 대업(大業)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직접 모친의 모습을 조각한 목상(木像)을 만들어 마치 살아계실 때 했던 것처럼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를 올렸고 아들로서 마지막 효도를 다했다.

나라 위해 충의로 목숨을 바친 장군

효도에는 최선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라(孝當竭力,忠則盡命)는 부모님의 가르침 아래 효자 악비는 한평생 나라를 위해 보답할 뜻을 세웠다. 금나라 병사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던 난세에 그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행동은 바로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인생에서 그의 꿈은 북벌에 나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포로로 잡힌 두 황제를 맞아들여 정강(靖康)의 치욕을 깨끗이 설욕하는 것이었다. 이 꿈을 위해 그는 평생을 고된 전투와 근심 및 고생 속에 살았고 결국 자신의 목숨마저 대가로 치러야 했다.

어떤 이들은 아마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나라를 위해 정충(精忠)의 뜨거운 피를 바친 악비가 왜 고종이 12차례 금패의 재촉 때문에 군사를 되돌려 귀환하면서 눈부신 북벌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어야 했는가? 그 대답은 바로 악비가 지극히 효성스럽고 충성스런 사람이었기에 임금에게 충성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선택은 단순히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 복종일 뿐만 아니라 전체 국가 정세를 고려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그에게 이런 충의지심(忠義之心)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들의 탄복과 감탄을 더욱 자아냈던 것이다.

처음에 군사를 물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악비는 즉각 반대 상소를 올렸다. 북벌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으니 금나라를 물리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악비는 승기를 타고 직접 주선진(朱仙鎮)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악비의 철군으로 평화회담을 앞당기려 했다. 다른 부대에도 철군하거나 또는 현지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12차례나 금패를 내려 악비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런 조치는 다른 부대의 가담을 사전에 원천봉쇄한 것으로 악비 역시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악가군 단독으로 적진 깊이 들어가 잇따른 승전보를 올릴지라도 지원부대가 오지 않으면 장기간 버틸 수 없었고 수만에 달하는 악가군의 생명마저 위험한 지경에 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앞에는 강력한 금군이 웅크리고 뒤에는 진회라는 간사한 재상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북벌은 성공을 눈앞에 두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의 뜻이라 이를 어기기는 힘들었다. 악비는 만약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진군했을 때의 두려운 후과를 잘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북벌구국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악비는 현지 백성들의 안위를 고려해 특별히 5일을 머무르며 백성들의 피난을 도와주었다.

나중에 금군이 돌아와 중원을 도륙했다는 말을 듣고 악비는 침통하게 말했다.

“획득한 모든 군(郡)들이 하루아침에 다 끝났구나! 사직강산을 중흥하긴 어렵겠구나! 건곤세계(乾坤世界)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겠구나!”[4]

악비가 비록 군신간의 도리를 엄격히 준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원칙을 버리고 무조건적으로 황제의 뜻에 영합한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고종이 간신들에 둘러싸여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개인적인 이해득실이나 영욕(榮辱)은 돌보지 않고 오직 임금을 위하여 힘껏 간언했다. 남다른 지혜와 용기로 악비는 충신으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모든 사명을 진정으로 완수했다.

가령 고종이 처음 즉위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천도(遷都)를 상의할 때 악비는 겨우 7품 무관이란 미천한 신분임에도 직접 상소를 올려 천도에 반대했다. 또 이 일 때문에 관직을 잃고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송금 두 나라의 평화회담에 대해 악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력히 반대했으며 또 황제에게도 직언했다. “금나라 사람들은 믿을 수 없고 화친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5] 아울러 간신 진회를 통렬히 비판해 고종이 대답할 말이 없게 했다.

평화회담이 성립된 후 고종은 주화파 간신들이 분칠한 태평에 깊이 빠져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상을 내렸다. 이때에도 악비는 고심 끝에 상소를 올려 “소신의 생각으로는 오늘의 일은 위태로울 순 있어도 편안할 순 없고 근심할 순 있어도 축하할 순 없습니다.”[6]라고 했다.

또 제4차 북벌 전에 고종이 전세가 완화되었다고 여겨 악비에게 철군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악비는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의연히 ‘황명을 어기고’ 군사를 몰아 북상했다. 그 후 언성과 영창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직접 황룡부까지 쳐들어가려는 꿈의 실현을 눈앞에 두게 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소년시절부터 강직하고 곧은 성격이라 언행에서 화복(禍福)을 꺼리지 않았다. 군국(軍國)의 대사를 앞에 두고 그가 고려한 것은 늘 대송 전체의 기반이었고 또 있다면 수많은 송나라 백성들의 안위였다. 악비는 단순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방면에서 황제에게 바른 말로 간언하기도 했다. 바로 그의 이런 충성스런 마음과 정의로운 목소리 때문에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귀감으로 여겼고 이후 역대의 제왕과 신하들이 악비에 대해 깊은 존경과 그리움을 품게 만든 것이다.

주석:

[1] 出自《鄂國金佗稡編》卷14,《乞終制劄子》。

[2] [3] 出自《鄂國金佗稡編》卷9,《行實編年六‧遺事》。

[4]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7:《嶽侯傳》。

[5] 出自《宋史》卷365:會金遣使將歸河南地,飛言:“金人不可信,和好不可恃,相臣謀國不臧,恐貽後世譏。”檜銜之。

[6] 出自《鄂國金佗稡編》卷14,《辭開府劄子》。

담백하고 절약했던 악비의 풍모

한미(寒微)한 가문에서 태어나 군대에서 일어선 악비는 여러 차례 혁혁한 전공을 세워 단번에 송나라에서 가장 젊은 사령관이 되었다.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면 두터운 봉록과 공명 및 권세로 인해 종종 사람을 크게 변하게 만든다. 하지만 악비는 끊임없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위대한 공훈을 세웠음에도 오히려 생활이 아주 소박하고 수수했다.

금군(金軍)의 말발굽아래 잃어버린 강토를 되찾고 포로로 잡혀간 두 분 황제를 모셔와 정강(靖康)의 치욕을 깨끗이 씻기 전에는 악비는 그 무엇으로도 신하의 한을 풀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담은 것은 나라와 백성이었고 평생 생각한 것은 절도사나 제후에 봉해져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라 북벌에 성공해 강산을 되찾는 구국의 대업이었다. 때문에 그는 공명에 대해서는 초개처럼 여겼고 항금(抗金) 전투에서 밤낮으로 분주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사(詞)에서 쓴 것처럼 “서른이 되도록 쌓은 공명은 먼지와 흙에 불과하고 8천리 원정길에는 구름과 달뿐(三十功名塵與土,八千裏路雲和月)”이었다.

한번은 고종이 절도사 부(府)와 저택 건설을 준비할 때 악비는 극력으로 받지 않겠다면서 정중히 사양했다.

“아직 적을 멸망시키지 못했는데 어찌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이 천하는 언제쯤 태평해질까요? 라고 묻자 악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문신들이 돈을 사랑하지 않고 무신들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게 되면 천하는 태평해질 것입니다.”[1]

강직하면서도 간결한 이 말 속에서 그의 인생관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또한 평생 그의 언행에서 준칙이 되었다.

거친 차와 의복으로 검소하게 살다

악비의 손자 악가(岳珂)가 쓴 《악국금타졸편(鄂國金佗稡編)》에는 악비의 일상생활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매번 식사 때면 고기반찬이 2가지를 넘지 않았고 집안에서는 소박하고 거친 옷만 입었으며 사용한 그릇이나 도구도 기본적인 요구만 만족시키면 충분했다. 정교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첩을 두어 시중드는 일은 더욱 없었다.[2]

악비의 이런 생활은 일반 평민과 다르지 않으니 어디에 조정 일품(一品) 대신의 모습이 있는가? 하지만 악비는 필경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런 일상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타파’하려는 사람이 늘 존재했다. 그렇다면 악비는 이에 대해 어떻게 했을까?

한번은 학정(郝政)이란 장군이 악비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특별히 아주 맛있는 ‘만두’를 올렸다. 하지만 악비는 한 개만 맛보고는 나머지는 전부 거두어 저녁에 쓰라고 부하에게 분부했다. 학정은 악비가 이렇게까지 절약하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몹시 부끄러웠다.

또 한번는 악비가 여러 장수들과 식사를 하는데 원래 정해진 메뉴는 볶은 돼지고기에 국수뿐이었다. 그런데 주방에서 요리를 올릴 때 닭 한 마리가 추가되었다. 악비가 “왜 닭 한 마리를 더 죽였는가?”라고 묻자 주방장이 대답했다. “같은 주(州)의 어느 관리가 보내준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악비는 앞으로는 이런 선물을 더이상 받지 말라고 분부했다.[3]

사천지방에서 다년간 금나라에 맞서 싸워왔던 오개(吳玠)란 장군이 평소 악비의 뛰어난 용병술에 탄복해 특별히 절세가인(絶世佳人)을 찾아내 푸짐한 혼수품과 함께 악비에게 보냈다. 이 ‘훌륭한 선물’에 대해 악비는 기뻐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자를 돌려보내도록 했다.

이때 한 장수가 악비에게 권했다.

“장군께서는 섬서(陝西)지역에서 전장(戰場)을 개척할 준비를 하시는데 왜 그녀를 남겨 오 사령관과 친분을 맺지 않으십니까?”

이에 대해 악비는 “오 사령관이 사람을 대함이 후하긴 하지만 아직 나라의 치욕을 설욕하지 못했고 두 분 황제께선 북쪽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계시네. 지금이 어디 장수가 즐거움을 누릴 때인가?”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자 더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개는 거절당한 것을 알고도 오히려 악비를 더욱 존경하고 탄복했다. [4]

악비는 이렇게 대외적으로 원칙을 견지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엄격하게 집안을 다스렸다. 어느 날 아내가 비단으로 된 명품 옷을 입은 것을 본 악비가 권고했다.

“포로로 잡혀가신 황후마마와 비빈(妃嬪)들은 북방에서 간고하게 어렵게 살고 있다고 들었소. 당신이 기왕 나와 고락을 같이 하고 시름을 함께 한다면 이렇게 좋은 옷을 입는 것은 적당하지 않소.” 아내는 이 말을 듣자 즉각 화려한 옷을 벗고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5]

악비는 자녀들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 못하고 독서는 한가한 시간에 하되 학습과 농사 모두 힘써야 한다.”는 내부규칙을 정했다. 악비의 말로 표현하자면 “농사의 어려움을 몰라서는 안 된다.”[6]

명리에 담백하고 은총을 회피

당시 장수들은 서로 공(功)을 다투거나 심지어 승진을 위해 전공(戰功)을 과장해서 허위로 보고하곤 했다. 하지만 군사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악비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매번 상을 받을 때마다 그는 늘 자신에게는 공이 없다는 이유로 두세 번씩 고사했고 때로는 예닐곱 번씩 고사하면서 절대 함부로 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는 형식적인 겉치레가 아니라 ‘국사(國士)’를 자처한 악비의 천성에 따른 것이었다.

첫 번째 북벌에 앞서 재상 주승(朱勝)이 악비에게 이번 전투에 승리하기만 하면 ‘절도사’ 승진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악비는 “저는 의리로 책임질 뿐이지 이익에 이끌리진 않습니다. 양양(襄陽) 수복은 임금께 충성하는 일입니다. 만약 절도사가 되지 못한다 하여 좌시하며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성(城) 하나를 수복하면 하나의 관작을 주는 이것은 보통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지 국사를 대하는 방법은 아닙니다.”[7]

고종 역시 일찍이 악비에게 내린 조서에서 “겸허하고 삼가는 충실을 지녔고 단순히 예를 차리기 위한 거짓이 아님을 진실로 알겠노라”[8]며 칭찬했다. 즉 악비의 겸손하면서도 성실한 품성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충의(忠義)로 목숨을 바치는 대애(大愛)정신을 칭찬한 것이다. 군자는 의리에서 깨닫는다는 말처럼 악비의 뜻은 강산의 통일에 있었고 사명은 충신양장(忠臣良將)이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국가대의를 위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었으며 공명(功名)이나 이록(利祿)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또 행군하고 전투할 때 의지하는 것은 전체 병사들의 목숨을 건 치열한 분전이라 여겼다. 마치 그가 매번 관직을 사양할 때마다 “제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모두 장수들이 목숨을 바쳐 얻어온 것이지 제게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9]라고 한 말과 같았다.

이렇게 스스로에게는 인색한 악비였지만 남에게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하급 관리에서 문관에 이르기까지 또 모든 병사들이 “조금이라도 공을 세운 게 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상을 받지 못한 것을 발견하면 조정에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상을 청했고 혹여 그가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할까 근심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소년 영웅만은 예외였다. 그는 바로 십대부터 악비를 따라 종군한 큰아들 악운(岳雲)이었다. 장수 가문의 용감한 후예 악운은 양양 6군을 수복한 전투에서 두 차례나 가장 큰 공을 세워 ‘영관인(贏官人)’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또 양요(楊么)를 평정한 전투에서도 최고의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악운의 전공에 대해 악비는 오히려 숨기며 보고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관원들은 모두 악운을 위해 “공평하지 못하다고 불평했다.”

악비는 병사들이 포탄과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장을 죽이고 적진을 격파해야만 뛰어난 공을 세웠다고 인정해왔다. 그런데 만약 악운이 너무 빨리 승진하게 되면 어떻게 여러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또한 젊은이들은 마음이 들뜨거나 조급해지기 쉽기 때문에 너무 일찍 공명을 얻으면 나태하고 교만한 마음이 생겨나 큰 그릇이 되지 못할까 우려한 것이다. 때문에 설사 조종에서 먼저 악운의 관작을 올려주려 했음에도 악비가 극력 사양했다.

악비의 고매한 인품을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악가군에 한 막료(幕僚)가 있었는데 첫 전투에서 전공을 보고하면서 조정에 악비의 모친을 ‘위국부인(魏國夫人)’에 봉하고 둘째 아들 악뢰(岳雷)에게 ‘문자(文資 문관)’의 관직을 수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임명장이 내려온 후 악비는 깜짝 놀라서 절대 사사로운 일로 조정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며 고종에게 명령을 거두고 또 막료를 처벌해달라고 간청했다. 이 일은 조정 안팎에서 미담으로 전해졌고 사관(史官)들은 악비에 대해 “고대 어진 장수의 풍모가 있다”[10]며 칭찬했다.

(계속)

주석:

[1] 《宋史》卷365:帝初爲飛營第,飛辭曰:“敵未滅,何以家爲?”或問天下何時太平,飛曰:“文臣不愛錢,武臣不惜死,天下太平矣。”

[2] 《鄂國金佗稡編》卷9:奉身儉薄,不二胾(指切成大塊的肉)。居家惟禦布素服,食器用取足而已,不求華巧。旁無姬妾。

[3] 事見《鄂國金佗續編》卷27。

[4][5][6] 事見《鄂國金佗稡編》卷9。

[7] 《鄂國金佗稡編》卷9:乃謝使者曰:“爲飛善辭丞相:岳飛可以義責,不可以利驅。襄陽之役,君事也。使訖事不授節,將坐視不爲乎?拔一城而予一爵者,所以待眾人,而非所以待國士也。”

[8] 《鄂國金佗稡編》卷9:上常賜詔曰:“卿每拜官,必力懇避。誠知懐沖遜之實,非但爲禮文之虛也。”

[9] 《鄂國金佗稡編》卷9:每辭官,必雲:“某所之戰,皆將士竭力,在臣何功?”

[10] 《建炎以來系年要錄》卷84:中外翕然稱美,謂有古賢將之風。

뛰어난 지략을 지닌 대송의 신장(神將)

스물에 머리를 묶고 종군한 이래 19년 사이에 장상(將相)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악비는 평생 12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지만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다.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풍부한 실전경험에 근거해 악비는 남송 전장(戰場)에서 가장 저명한 장군이라 할 수 있다. 악비와 그가 거느린 악가군(岳家軍)은 또한 중국 역사상 기적과도 같은 전설이 되었다.

그러면 악비는 왜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었고 악가군은 가는 곳마다 적을 휩쓸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은 악가군의 영혼이라할 수 있는 악비 개인의 뛰어난 지모와 완벽한 지휘방식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악비는 젊은 시절 병법(兵法)을 숙독해 무예에 정통했고 종군한 후에는 또 적은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에 맞서거나 지모로 강적을 상대하는 작전능력을 단련했다. 비록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가 쓴 병서(兵書)는 없지만 우리는 악비 평생의 언행을 통해 그의 병법 이념과 “산을 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흔들기는 어려운” 비밀을 탐구해볼 수 있다.

몇마디 말로 병법의 오묘함을 다하다

초기 군대에 들어왔을 때부터 악비는 곧 여러 유명 장수와 신하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악비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간단한 몇 마디 말로 비범한 지모와 뛰어난 군사적 안목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종택(宗澤)은 악비에 대해 지혜와 용기・재주에서는 이전 시대 양장(良將)들을 뛰어넘지만 전투에서 ‘짜임새’가 좀 부족하다고 여겼다. 때문에 평소 자신이 지니고 있던 진도(陣圖)를 전수해주려 했다. 이에 대해 악비는 오히려 “진(陣)을 펼친 후에 전투가 있으니 병법의 법칙과 운용의 묘(妙)는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陣而後戰,兵法之常,運用之妙,存乎一心)”[1]라고 말했다.

16자로 병법(兵法)의 정수를 밝혔으니 옛날 병법에 얽매이지 말고 전황(戰況)에 근거해 합당한 전술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활하게 임기응변하면서 고정된 방법이 없는 것이야말로 병법의 요결(要訣)이다. 악비는 진세(陣勢)를 아무리 잘 펼친다 해도 단지 일반적인 용병의 도(道)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만약 오묘하면서도 합당하게 운용하려면 관건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임기응변 하는가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처럼 진지하면서도 명철한 견해는 당대의 노장마저 괄목상대하고 탄복하게 했다.

나중에 악비가 또 하북 초토사(招討使) 장소(張所)에게 찾아가자 ‘국사(國士)’의 예로 대우받았다. 장소는 악비의 작전능력을 유심히 관찰한 후 그에게 물었다.

“그대 혼자 얼마나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악비는 정면적인 대답은 회피하면서 “(개인의) 용기는 믿을 게 못되며 용병이란 먼저 지모를 정하는데 달려 있습니다.”[2]라고 대답했다. 즉 모략전(謀戰)의 관점을 제출해 필부(匹夫)의 용기는 기이하다고 하기 부족하며 모략과 전술을 운용해야만 의외의 수로 적을 제압하거나 심지어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기적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고대 전투를 사례로 들고 주해를 달았다.

먼저 춘추시기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전투에서 진나라 대부 난지(欒枝)는 전차 뒤에 나뭇가지를 묶은 후 군사들더러 후퇴하게 했다. 나뭇가지가 끌리면서 먼지가 날리는 모습이 마치 대군이 패배해 퇴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를 통해 적병을 험지로 유인한 후 초나라 군을 크게 물리쳤다.

또 다른 사례로 초나라 군사가 교(絞)나라를 공격할 때의 일을 들었다. 초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이끌고 교나라 성문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교나라 군사들이 성안에 머물며 움직이지 않자 초나라는 나무꾼들을 이용해 교나라 군사를 유인해 성을 나오게 한 후 산속에 병력을 매복해 두었다. 교나라 군사들이 이 계략에 걸려 성을 나와서는 다투어 나무꾼들을 붙잡은 후 숲으로 압송해 부역하게 했다. 초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적의 퇴로를 끊은 후 순조롭게 교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전투 사례는 모두 지략(智略)을 높이 평가하고 적의 행동에 대한 사전예측을 중시한 것으로 악비의 작전이념을 잘 보여준다. 장소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그대는 일반 병사의 대열에 있을 사람이 아니오!”[3]라며 엄숙하게 존중해주었다.

악비는 또 용병에서 다섯 가지 일(五事)인 인신지용엄(仁信智勇嚴)을 언급했다.[4] 이 다섯 가지 일은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나오는 장수의 도(道)와 같지만 순서가 다르다. 악비는 이 다섯 가지를 통해 장수가 병사를 통솔하는 방법을 개괄했다. 다시 말해 인덕(仁德)을 우선으로 하되 사람을 쓸 때는 믿음(信)으로 하며, 지모(智謀)를 중시하고, 용기로 작전하며, 부대를 다스리는 것은 엄하게 했다.

[역주: 원래 손자병법에는 “장수란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을 갖춰야 한다”고 나온다. 악비는 이 다섯 가지를 그대로 인용하되 중요성에 따른 순서를 바꿔 지혜(智)보다 인(仁)을 앞에 내세웠다. 악비 병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진충보국(盡忠報國)과 강산의 회복이야말로 악비가 전투에 나선 초심이었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대인(大仁)・대의(大義)였다. 출전을 앞둔 악비는 병사들에게 “충효(忠孝)로 노력하고 절의(節義)로 가르쳤다”[5] 매번 나라와 가문의 원수를 언급할 때면 만면에 눈물을 흘리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악가군의 병사들은 모두 그의 이런 비장하고 강개(慷慨)한 기개에 감염되어 모두들 국가대의를 위해 싸우길 원했다.

용인술 방면에서 악비는 또 하나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 자기 동생을 죽인 양재흥(楊再興)은 물론이고 심지어 적진에 있다 투항한 장수들까지 모두 성심으로 대우했고 과거의 허물을 따지지 않고 중용했다. 이렇게 덕성과 명망이 높고 지모 또한 뛰어난 장군을 따르니 그 어떤 병사인들 감격하고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전장에서 분투하며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엄격한 용병으로 송나라의 장성을 구축

악비 본인의 충성과 의리를 제외하고 무적의 군대로 불린 ‘악가군’도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이 부대는 전성기에 약 10만에 달했고 장룡복호(藏龍臥虎 숨어 있는 뛰어난 인재)라 할 만한 많은 영웅들을 배출했다. 악가군의 성공은 악비의 군령(軍令)이 엄격해서 엄명(嚴明)한 군기로 다스린데 있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일 중 마지막 ‘엄(嚴)’에 해당한다.

‘엄(嚴)’의 내포에 대해 악비는 일찍이 “공이 있으면 큰 상을 주고 공이 없으면 무거운 벌을 가하는 것이 명령을 엄하게 하는 것이다”[6]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악비는 또 군대를 다스릴 때 ‘육법(六法)’을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악가군이 상승군이 된 비결이다. 다시 말해 선발을 중시하고 훈련을 열심히 하며 상벌은 공정하게 하고 명령은 분명하게 하며 기율을 엄하게 하고 고락을 같이하는 것이다.(重蒐選・謹訓習・公賞罰・明號令・嚴紀律・同甘苦)[6]

우선 선발을 중시한다(重蒐選)는 것은 병사를 선발할 때 양보다는 질을 추구해 오직 정예병만 선발한다는 뜻이다. 한번은 조정에서 실전경험이 없는 노약자들로 구성된 수천 명의 병사들을 악비 부대에 보낸 적이 있다. 악비는 이중 쓸 만한 병사 천 명만 선발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산시켰다. 이렇게 선발된 천 명은 또 밤낮으로 고된 훈련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정식 악가군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군대의 훈련을 열심히 하는 것(謹訓習)은 악비가 군대를 다스린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휴전기간에도 악가군은 개인별로 중무장을 한 채 말을 타고 언덕을 달려서 내려오거나 해자(垓子)를 뛰어넘는 연습을 했다. “일이 없을 때도 마치 일이 있을 때와 같았다.” 훈련은 마치 실전에서 적을 죽이는 것처럼 했고 만약 이 과정에 실수가 생기면 악비로부터 심한 꾸중과 처벌을 받았다.

예를 들어 한번은 악운이 훈련 도중 실수로 말에서 떨어지자 악비가 분노해 꾸짖었다. “큰 적을 만났을 때도 이렇게 할 테냐?”[7] 악운은 이 일 때문에 하마터면 목이 잘릴 뻔 했다. 나중에 곤장 백대로 징계를 낮춰주었다.

이처럼 엄격한 선발과 각고의 훈련을 거쳤기 때문에 악가군의 전투력은 다른 일반 부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병사 개개인이 무예에 정통했기 때문에 신묘한 능력을 발휘했고 전투에 나가 적을 죽이니 어디를 가든 승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위명(威名)이 널리 퍼졌다.

가령, 소상하(小商河)전투에서 양재흥은 불과 3백의 기병으로 십만이 넘는 금병과 싸워 2천 여명의 적을 살상했다. 또 영창(潁昌) 대전에서는 8백의 배외군(背嵬軍)이 금군 주력에 큰 타력을 입혔고 ‘사람과 말이 온통 피로 범벅된’ 비장한 장면을 연출했다.

셋째, 상벌을 공정히 함(公賞罰)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분명히 하고 “수천만 명을 대하는 것이 한사람과 같다”[8]는 뜻이다.(역주: 누구나 지위나 신분 등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의미)

예를 들면 악비의 오른팔인 장헌(張憲)의 수하 중에 한 무명소졸이 막야관(莫邪關)을 점령할 때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 그러자 악비는 즉각 금속 벨트와 귀한 은그릇을 부상으로 주고 즉시 군관(軍官)으로 승진시켰다.

반대로 부장인 왕귀(王貴)가 영창대전에서 적에게 겁을 먹고 싸우지 않으려 했을 때는 현장에서 목을 베려 했지만 다른 여러 장수들이 간청한 후에야 겨우 죽을죄를 면했다. 악비는 이처럼 병사들을 대할 때 관직의 높고 낮음이나 개인적인 친소관계는 따지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대우했으며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베풀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비로소 군심(軍心)이 진심으로 복종하고 위아래가 한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명령을 분명히 하고 기율은 엄정히 한다(明號令・嚴紀律)는 말은 다시 말해 한번 내려진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 하고 금지한 것은 어기지 말아야 하며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훈련과 전투 외에도 악비는 병사들의 덕행(德行)에 대한 요구가 아주 엄해서 백성들에게 추호라도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예를 들어 백성들의 농사나 장사를 해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엄중처벌했고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한번은 어떤 병사가 백성의 마(麻)를 강탈해 양초(糧草)를 묶는데 사용했다. 악비가 이 상황을 알고는 즉시 목을 잘랐다. 설령 백성들이 악가군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땔감을 팔 때 자발적으로 가격을 낮추려고 하면 악가군 병사들은 단호히 거절하면서 “어찌 푼돈 때문에 목이 잘리는 위험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9]라고 말했다.

이에 악가군이 가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군대가 있는 줄도 몰랐고 일상생활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민간에서 한마디 유명한 말로 악가군의 군기를 찬양했다.

“얼어 죽을지언정 가옥을 허물지 않고 굶어 죽을지언정 약탈하지 않는다.(凍殺不拆屋,餓殺不打擄)”[10]

끝으로, 악비는 늘 일반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同甘苦) 악비는 이렇게 공명정대하고 군기가 아주 엄정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스스로 절검하며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예를 들어 악비는 늘 일반 병사와 같은 수준의 식사를 했다. 만약 술이 부족하다면 차라리 물을 섞을지언정 모든 병사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했다.

또 야외에서 주둔할 때 만약 노숙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역시 절대 관사에서 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 병사들의 가족들도 각별히 돌봐주었다. 어떤 병사가 장기간 수(戍)자리에서 돌아가지 못하자 악비는 처자를 병사의 집에 파견해 재물과 음식을 주며 그 가족들을 위로하게 했다. 또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직접 찾아가서 살펴보았고 손수 약을 지었다. 또 불행히 군영에서 사망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위해 통곡하며 음식을 물리쳤고 고아들의 양육을 돕게 했다. 이처럼 악가군 병사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빈틈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송나라 사람들은 강인하고 충성스런 남송의 명장들 중에서도 유독 악비를 으뜸으로 꼽는데 악비야말로 남송 중흥(重興)의 으뜸명장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끈 10만의 악가군 역시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11]

여기서 다시 한번 악비가 이룬 전과들을 되짚어보자.

건염(建炎) 연간에는 건강(建康)을 수복해 이때부터 금나라 병사들이 함부로 강남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

제1차 북벌에서는 양한(襄漢) 지역의 6군을 수복해 남송 최초로 기존에 상실했던 대규모 영토를 되찾았다.

제2차 북벌에서는 이수(伊水)와 낙수(洛水)까지 장거리를 진군해 남송 최초로 대규모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제4차 북벌에서는 언성과 영창에서 두 차례나 금병의 주력을 격파해 적의 심장부인 황룡부(黃龍府)까지 직접 쳐들어가는 꿈이 가능하게 했다.

악비의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 방식은 단순히 송나라 최강의 군대를 배양한데 그친 게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항금(抗金) 전장에서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신장(神將) 악비는 명실상부 대송(大宋)의 수호신이자 중화민족의 천고영웅인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여전히 악비의 정충(精忠)과 무공을 찬양하고 있고 아울러 그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계속 전해지고 있다.

(시리즈 완결)

주석:

[1][2][3][9] 出自《宋史》卷365。

[4][6] 出自《三朝北盟會編》卷207,《嶽侯傳》。

[5] 《鄂國金佗續編》卷21:與將校語,必勉之以忠孝、教之以節義。

[7] 《鄂國金佗稡編》卷9:先臣以其不素習,怒曰:“前驅大敵,亦如此耶?”

[8] 《鄂國金佗續編》卷30:小善必賞,小過必罰,待數千萬人如待一人。

[9] 《鄂國金佗稡編》卷9:有卒市薪,項愛其不擾,欲自損其直二錢以售之。曰:“吾可以二錢易吾首領耶?”

[10] 出自《鄂國金佗稡編》卷9。

[11] 《獨醒雜志》卷7:紹興六帥,皆果毅忠勇,視古名將。嶽公飛獨後出,而一時名聲,幾冠諸公。身死之日,武昌之屯至十萬九百人,皆一可以當百。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게 뭔데

송사 악비열전 질문드립니다.

... 송사 악비열전은 여러 버전이 있군요. 본문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내용의 번역본이 있어 올려드립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청년 악비 정충(精忠)의 뜻을 세우다 북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