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관해서

중국에관해서

작성일 2006.04.2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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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관해서 상세한 설명 부탁드려요

역사나 사회현상 문화 등등 우리나라와의 관계등등 많은 것들좀

알려주시길바래요 ㅠ 수행평가거든요; ㅋㅋㅋ 무튼 내공 드릴께요! 부탁드립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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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 :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
인구 : 1,298,848,000 명
면적 : 9,572,900 km2
수도 : 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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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의회형태 : 인민공화제, 일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국가주석/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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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언어 : 중국어
독립년월일 : 1523BC
화폐단위 : 위안(yuan/Y)
국가(國歌) : Yiyongjun Jinxingqu ("March of the Volunteers") [국가듣기]

 

정식 이름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

아시아 동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나라입니다.

 

개요

국기
국가
지도
수도는 베이징[北京]이다. 동서길이는 5,000km, 남북길이는 5,500km이며, 국경선은 총길이 2만km이다. 남쪽으로는 베트남·라오스·미얀마, 남서쪽으로는 인도·부탄·네팔·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북쪽으로는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 및 러시아, 몽골과 접해 있으며, 둥베이[東北:옛 이름은 만주] 지역 남쪽으로 북한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에서부터 황해, 동중국해, 타이완[臺灣] 해협(중국과 타이완 사이의 약 160km 너비의 해협), 남중국해로 둘러싸인 해안선은 1만 4,000km에 이른다. 1949년이래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본토를 자신의 영토의 일부로, 중국은 중국대로 타이완을 자신의 영토의 일부로 주장하고 있다. 타이완 섬을 중국의 23번째 성(省)으로 보는 데에는 두 정부의 의견이 일치한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전국은 중앙정부에 직속된 31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성이 22개, 소수민족 자치구가 5개(네이멍구[內蒙古]·광시좡족[廣西壯族]·닝샤후이족[寧夏回族]·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시짱[西藏:티베트]), 직할시가 3개(베이징·상하이[上海]·톈진[天津]), 특별행정구가 1개(홍콩)이다. 당대(唐代:618~907) 이래 현재와 같은 경계를 유지해온 성은 통일국가의 가장 중요한 면모로 존재했다. 중국의 성 하나가 다른 큰 나라 또는 중간 크기의 나라와 규모 및 인구가 비슷하며, 성은 국가 다음가는 행정단위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총면적 9,572,900㎢, 인구 1,288,892,000(2003 추계).

자연환경

지형

중국은 지형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남서부지역은 평균고도가 해발 4,060m 이상인 티베트 고원, 동쪽과 남쪽은 벼랑을 이루는 고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북서부지역도 대체로 고지대를 이루고 있지만 광범한 분지가 발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부지역은 사실상 중국 전체의 저지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곳곳에 고지가 흩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고도가 해발 450m를 넘는 곳이 거의 없다.

동부지역

둥베이 평원은 중국의 북동쪽에 있고 서쪽으로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 북동쪽으로 샤오싱안링 산맥[小興安嶺山脈]으로 경계지어지며 총면적은 35만㎢ 가량 된다. 기본 조경은 삼림-스텝, 스텝, 초지-스텝, 경작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의 흑토지대에서는 광범위한 경작이 이루어진다.

둥베이 평원의 남동쪽, 한반도의 북쪽은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장광차이링 산맥[張廣才嶺山脈], 완다 산맥[完達山脈]들이 대산계를 구성하며, 평균고도는 460~900m이다. 굴곡이 심한 경사면은 삼림으로 뒤덮여 있고, 경작지는 곡상(谷床) 평탄면에 한정되어 있다. 화베이 평원[華北平原]은 면적에 있어서 둥베이 평원에 필적할 만하며 대부분의 지역이 고도 45m 이하이고 굴곡이 없이 편평하다. 황허 강[黃河], 화이허 강[淮河]이 황투 고원[黃土高原]에서 운반해온 막대한 양의 침전물들이 쌓여 이루어졌다. 주변 지역보다 높은 지대를 이루며 흐르는 수로들은 그 자체로서 지역간 자연경계를 이루며, 강과 강 사이에 호수와 늪이 있는 저지대를 형성한다. 특히 낮고 편평한 지역에서는 지하수면이 1.5~2m가량 오르내리는 일이 잦아 초지 늪을 형성하며, 어떤 곳에서는 염류토(鹽類土)를 형성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주했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중국 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경지면적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화베이 평원과 서부 사막지대 사이에서 황토로 뒤덮인 산지와 불모의 산맥들로 이루어진 황투 고원은 중국문명의 요람이다. 표면의 평균고도는 1,200~1,500m이다. 황토가 45~200m의 두께로 평원의 대부분을 덮고 있어서 지표수에 의해 쉽게 침식된다.

산둥[山東]구릉지대와 바다가 접한 면은 절벽과 바위들로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이 구릉지대는 자오라이 평원[膠萊平原]에 의해 두 지역으로 나뉜다. 동쪽 지역은 비교적 낮아 평균고도가 450m 이하이며, 다만 몇몇 산봉우리와 산등성이만 750m까지 올라가고 드물게 900m 정도 되는 곳도 있다. 서쪽 지역은 동쪽보다 약간 높다. 가장 높은 산은 역대 왕조가 중원(中原) 지배의 상징으로 봉선(封禪)을 행했던 타이산[泰山:1,500m]이다. 화북과 화중의 자연경계를 이루는 것이 친링 산맥[秦嶺山脈]이다. 구조적으로는 쿤룬 산맥[崑崙山脈]의 서쪽 끝으로 산시 성[陝西省]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평균고도는 대략 2,600m이다. 이 산맥의 주요분수령은 북쪽에 있다. 산맥의 남쪽 사면은 매우 복잡한 수계(水系)에 의해 깊은 굴곡을 이루며, 이곳을 흐르는 물줄기는 모두 한수이 강[漢水]으로 흘러들어간다. 쓰촨 분지[四川盆地]는 양쯔 강[揚子江]상류를 따라 19만 4,000㎢ 가량 이어지며 북동쪽으로 비교적 평탄하지 않은 양쯔 강 중하류 평원과 접해 있다. 청두 평원[成都平原]을 제외하면 이곳에는 산이 많다. 경작지의 부족으로 구릉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경작할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침식 속도가 느리다.

중국 남동부의 경계지역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해안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그 바로 뒤 산맥들로 어우러진 배경이 아름답다. 중국 남동부는 일반적으로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뚜렷한 지형학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높은 산은 해발 1,500~2,000m로 솟아 있는 것도 있다. 짧고 흐름이 빠른 강들 때문에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들이 형성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좁게 이어진 평야가 주요거주지이며, 이곳에서 쌀이 생산된다. 후베이 성[湖北省]에서 이창[宜昌] 동쪽으로는 양쯔 강을 따라 너비가 일정하지 않은 평원들이 발견된다(→ 양쯔 평원). 이곳이 바로 양쯔 강 중하류 평원인데, 평원은 삼각주지역과, 주요지류와의 합류점에서 특히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오랜 기간 강이 운반해온 침전물들이 쌓여 이루어진 충적평야이다. 평원의 지표면은 계곡의 경사면을 따라 계단을 이루는 하안단구를 형성했다. 장쑤 성[江蘇省], 후난 성[湖南省], 광둥 성[廣東省]과 광시좡족 자치구를 가로지르는 난산 산맥[南山山脈]은 여러 산맥들로 이루어졌으며, 주봉은 1,500m가량 된다. 산맥 남쪽 대부분의 지역도 산지이다. 주장 강[珠江]삼각주지역이 이 근방에서 유일하게 넓은 평원이며, 화남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기도 하다. 홍콩을 비롯해 여러 보호만(灣)이 있는 해안지역은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이루고 있다.

남서부지역

티베트 고원에서 바라본 히말라야 산맥, 가운데 오른쪽 봉우리가 ...
구이장 강[桂江] 지류를 따라 이어지는 카르스트, 광시좡족 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
윈구이 고원[雲貴高原]은 윈난 성[雲南省] 북부와 구이저우 성[貴州省] 서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협곡 규모의 골짜기들과 깎아지른 듯한 산들이 특징적이다. 서쪽으로 높은 산들이 있으며, 그중 뎬창 산[點蒼山]은 높이가 3,700m나 된다. 주요강이 흐르는 계곡에서는 고도가 400~500m 정도로 낮다. 동쪽에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하여 석회 조경 내에 와지·용식분지·복류가 형성되어 있다. 티베트 고원은 거대한 대산괴로 중국 전국토의 1/4을 차지한다. 비교적 편평한 고원 북쪽 부분은 창탕[羌塘]으로 불린다. 창탕 고원은 해발 4,500m에 동서로 1,300㎢가 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 창탕 고원 북쪽 경계는 쿤룬 산맥으로 이어진다. 티베트 고원의 서쪽과 남쪽 경계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봉은 티베트와 네팔의 경계 부근에 솟아 있는 에베레스트 산이다. 차이다무 분지[柴達木盆地]는 티베트 고원에서 가장 낮고 가장 넓은 분지이다. 분지 북서부지역은 높이가 2,600~3,000m가량 된다. 분지 내에는 자갈·사토·점토사막·준사막·염류가 많은 황무지가 대부분이다.

북서부지역

타림 분지 티베트 고원의 북쪽에 있고 북쪽에는 톈산 산맥[天山山脈], 서쪽에는 파미르 고원, 남쪽에는 쿤룬 산맥 등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56만㎢의 면적에 이르는 이 분지 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황폐한 불모지 가운데 하나인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분지는 해발 760~1,400m이다. 타림 분지 북쪽에는 또다른 큰 함몰분지인 준가얼 분지[準爾盆地:190~450m]가 있다. 준가얼 분지는 면적 69만㎢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고, 북동쪽으로 알타이 산맥과 경계를 이룬다. 분지의 동쪽과 서쪽은 트여 있다.

주위를 둘러싼 산의 산록에는 오아시스가 이어져 있고, 분지 중앙에 스텝과 사막지대가 있다. 톈산 산맥의 중국 쪽은 평균높이 3,900~4,500m의 평행한 여러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산맥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로 연결되며, 국경선으로부터 동쪽 방향으로 1,600km가량 이어져 있다. 서쪽이 가장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낮아진다. 강수량이 충분한 서쪽 지역에는 32km 이상 이어진 거대한 빙하가 형성되어 있다. 터커쓰 강[特克斯河]과 그 강의 지류들처럼 수량이 풍부한 큰 강들이 이곳에서 발원한다. 고산성 목초지가 우세한 이 지역은 중국에서 가장 좋은 목초지 가운데 하나이다.

하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보거다 산맥 해발 1,900m에 있는 톈츠 ...
푸젠 성[福建省] 내지와 이웃의 장시 성[江西省], 저장 성[浙江省]을 ...
중국에는 유역면적이 100㎢가 넘는 하천이 5만 개 이상으로, 매년 총 유거수(流去水)의 95%가 바다로 직접 흘러들어가고 약 5%는 대륙 내에서 소실된다.

주요하천으로는 황허 강, 양쯔 강, 시장 강[西江]등이 있는데, 모두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황허 강은 북쪽 쿤룬 산맥에서 발원하여 산둥 성 북쪽의 보하이 만[渤海灣:즈리 만(直隸灣)이라고도 함]으로 흘러들어간다. 양쯔 강은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강이고 유출량이 9번째로 많은 강으로,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하여 화중지방을 가로질러 흐르고 상하이 북쪽의 동중국해로 흘러들어간다. 세 강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시장 강은 윈구이 고원에서 발원하여 광둥 성에서 주장 강 삼각주 지역을 거쳐 남중국해로 흘러들어간다.

3개의 주요분수령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남서부에 있는데 이것은 인도양으로 흘러들어가는 브라마푸트라 강, 살윈 강, 이라와디 강의 급수원 역할을 한다. 2번째로 큰 분수령인 북서부의 내륙고원은 중국 전체의 30%를 차지하지만 전체 유거수의 5%도 되지 않는다. 로프노르 호[羅布泊:타림 분지 동쪽 부분에 있는 호수]로 흘러드는 타림 강이 유일한 하천이다. 전국 총유거수의 85%가 전국토의 3/5을 지나 흘러들어가는 동쪽의 태평양 분수령은 중국의 수계(水系)를 지배한다. 동부지역은 북쪽의 황허 강과 남쪽의 양쯔 강 사이의 분수선에 의해 2부분으로 나뉜다.

토양

중국에서 손꼽히는 쌀 생산지인 후난 성[湖南省]의 계단식 논
중국에서는 기후·식생, 그리고 바다와 떨어진 정도에 따라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토양대가 형성되어 있다. 동부와 남동 해안지대는 습윤·준습윤 기후와 연관하여 삼림지대를 이루고 있고, 북부와 북서부의 내륙지방은 반건조·건조 기후와 연관하여 사막·준사막·스텝 지대를 이룬다. 이 2개의 광대한 토양대 사이에 점이지대로 삼림-스텝 지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삼림토가 점차로 초원토와 섞여 있다(→ 토양학). 화북 해안을 따라 염류·알칼리 토양의 좁고 긴 지대가 있다. 이러한 토양은 좋지 않은 배수조건과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 집약농경이 행해진 곳에서는 토양에 대한 반대작용이 촉진되어 질소와 유기물질이 보편적으로 부족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삼림 벌채, 과도한 목축, 목초지의 파괴로 인해 토양침식이 일어난다. 논에 물을 대고 침식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이곳의 농부들은 계단식 경지를 만들었다(→ 계단경작).

기후

양쯔 강과 황허 강 경계 남동쪽의 기후는 온난하고 습윤하여 다른 지역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 경계는 대체로 0℃ 등온선과 일치하므로 1월평균기온은 양쯔-황허 경계선 부근에서 0℃이고, 남동지역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져 해안 근방에서는 22℃가량 된다. 매년 평균강우량은 남쪽이 762㎜(해안지역은 2,000㎜ 이상) 이상이고, 경계선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줄어들어 북동부와 허베이 평야[河北平野] 전체를 통틀어 254~762㎜ 범위 내의 강우량을 보인다. 무상(無霜) 기간도 경계선의 북쪽과 남쪽이 다르다. 남쪽지역은 240~365일 계속되고, 북쪽지역은 100~240일이며, 티베트 고원에서는 45일에 불과하다. 남동지역과 북서지역의 여름은 무더워 고원과 저지대에서 평균 24~29℃의 기온을 보인다. 북동부는 16~24℃로 따뜻하고, 남동부는 4~10℃로 서늘하다.

식물과 동물

티베트와 쓰촨 성[四川省]의 대나무숲에만 서식하는 멸종위기종인 자이언트팬더(giant panda)
북반구에서 나타나는 자연식생의 모든 유형이 중국에서 발견된다. 남중국해의 해안지역에는 맹그로브 습지가 있고 하이난 섬[海南島]과 윈난 성 남부에는 우림이 있다. 그밖에 열대와 온대 침엽수, 상록활엽수, 낙엽수가 주를 이루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사막·스텝·초지·사바나도 있다.

풍부한 식생과 다양한 지형으로 인해 중국에는 대단히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멸종한 동물들이 살아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양쯔 강에 서식하는 철갑상어류[Pse-phurus gladius], 동부와 화중지방에 사는 양자강악어, 서부의 자이언트샐러맨더 같은 것들이 있다. 자이언트팬더가 살고 있는 지역인 티베트와 쓰촨 지역은 가장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코코넛(코코스야자)을 수확하고 있는 하이난[海南] 섬 주민들
중국 북부의 원앙

취락형태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후룬베이얼 초원[呼倫貝爾草原] 에서 풀을 뜯는 양떼를 ...
산지와 구릉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농촌 취락은 상당한 크기의 밀집 촌락들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가 큰 촌락들 역시 대부분 도시적인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심지어 수천 명 규모의 인구를 가진 촌락도 마찬가지이다. 화베이 평원에서는 촌락들이 상당히 고르게 분포되어 있고 도로나 오솔길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화중과 화남의 향촌에는 논이 많다. 화중지방의 촌락들, 특히 양쯔 강 하류의 촌락들은 화북지방의 촌락들보다 규모가 크다(→ 양쯔 강 삼각주). 이 촌락 내에는 약간의 점포들이 있는데 그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용하고 있다. 촌락 내의 교통수단으로는 주로 배가 이용된다.

도시의 모습은 근대 공장제 공업과 교통수단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크게 변했다. 공업과 광산업 중심지 주변에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다. 비교적 큰 도시들 가운데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주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 간쑤 성[甘肅省]의 성도인 란저우[蘭州], 네이멍구 자치구에 있는 바오터우[包頭]는 도시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다.

국민

닝샤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인촨[銀川]에 있는 한 시장에서 배의 무게를 ...
중국은 많은 인종과 어족(語族)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중국 내의 다양한 민족 가운데 한족(漢族)은 세계에서 단일민족으로서는 최대 규모(중국 인구의 93%)이다. 중국 내의 여러 민족들이 쓰는 언어는 크게 시노티베트어족·알타이어족·인도유럽어족·오스트로아시아어족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로, 가장 중요한 중국어 방언은 베이징 관화(官話)이다. 중국에서 중요한 종교는 불교·도교·이슬람교 및 로마 가톨릭교이며 그리스도교도의 수는 확실하지 않다.

한족 외에 만주족과 후이족도 베이징 관화를 사용하고 한자로 표기한다. 후이족은 7세기에 이슬람교가 중국에 전해졌을 때 이 종교에 귀의한 중국인들의 후손이다. 그들은 중국 내 여러 곳에서 한족과 섞여 살고 있는데 그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닝샤후이족 자치구에서만 후이족으로 구분되고 있다. 만주족은 스스로를 17세기에 중국을 침입한 만주 8기(八旗)의 자손으로 칭하고 있다. 이들은 한족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화북과 둥베이 지역에 주로 살고 있지만 인민공사(人民公社) 이상의 단위에서는 전혀 독립된 자치지역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다. 동북지역의 한인(韓人)들은 지린 성[吉林省]동쪽에서 자치현을 이루고 산다.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소수민족들은 남부와 남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좡족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로 구성된 소수민족이며 대부분 광시좡족 자치구에 거주한다. 그들은 주로 벼를 재배하여 생계를 잇고 애니미즘적인 형태의 종교를 신봉한다. 티베트족들은 티베트 고원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가금(家禽)도 사육한다. 티베트족의 종교는 17세기 이래 티베트 불교(라마교)였다. 먀오야오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쓰는 민족들은 구이저우 성에 모여 있다(→ 마요족). 그들 대부분은 한족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종족 특성들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에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구분할 수 있다.

멜론을 팔고 있는 위구르족 상인(앞)과 한자와 위구르어로 된 ...
알타이어족 계열의 소수민족은 북서부와 북부에 사는 소수민족들로 대표된다. 이슬람교도들인 위구르족은 투르크계 소수민족 가운데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투르크제족). 그들은 주로 관개농업을 하며,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타림 분지와 준가얼 분지에 이어져 있는 오아시스 도시들 이곳저곳에 분포되어 있다. 같은 이슬람교도인 카자흐족키르기스족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내에 거주하는 투르크계 소수민족으로, 중앙아시아에 살던 민족의 후예이다. 그들은 목가적인 유목민들이며 아직도 부족의 흔적이 보인다. 몽골족은 중국에서 가장 널리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민족이지만 대체로 네이멍구 자치구에 거주하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목축과 함께 농작물 재배를 하고 있다. 몽골족들은 대부분 티베트 불교도들이다. 중국에 있는 일부 소수민족의 언어는 시노티베트어족이나 알타이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서쪽 끝의 타지크족은 타지키스탄 국민과 관계가 깊고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어군에 속한다.

복잡한 자연환경 때문에 중국의 인구분포는 상당히 불균등하다. 서부와 북서부는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 중국 동반부와 대조를 이룬다. 전체인구밀도는 1㎢당 109명이며, 전체인구의 1/5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 1990년 출생률은 1,000명당 약 21명이었고, 사망률은 1,000명당 6.3명이었다. 자연증가율은 14.7명이고 이민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다. 15세 이하의 인구가 전체의 1/3을 차지한다. 중국은 산아제한을 위해 한 자녀만 낳는 가족에 대해 우대정책을 실시하여 한 자녀만 둔 가족에게는 주택·의료, 그밖의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우선권을 주었다. 1962~82년의 인구조사를 보면 이 정책 실시 후 인구성장률이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지극히 강압적인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1949년 이후 내륙지방과 변경지대에 이주를 장려한 중국 정부의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인구이동). 이 기간에 이주해간 전체인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1980년까지 이주해간 인구가 네이멍구 자치구,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와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칭하이 성[靑海省]주민의 약 25~3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이주가 끝난 후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한인 비율이 전체의 10%에서 40%로 높아졌다. 대도시의 성장을 억제한 결과 대약진운동의 실패 후 2,000만 명의 도시민이 농촌으로 이주했고, 1968년 이후 10년 동안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1,700만 명의 청년들이 하방(下放)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 다음 10년 동안 '하방 청년'들이 도시로 되돌아와 도시의 전체인구가 다시 크게 증가했다.

경제

주로 정부에 의해 중앙집중식으로 운영되는 중국의 경제는 현재 비약적인 발전 중에 있다. 1999년의 국민총생산(GNP)은 9,802억 달러로 10년 전보다 약 3배가량 늘었다. 이것은 주로 농업·광업·공업 분야에서 이룩된 것인데, 특히 공업 분야에서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는 주장 강 삼각주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 해안지역, 양쯔 강 하류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 해안지역, 베이징·톈진·랴오닝[遼寧] 지역 내에 있는 보하이 만 근처의 세 곳을 들 수 있다. 중국 경제는 1970년 후반 이래 소비에트식 경제체제에서 탈피하여 자본주의식 경제체제를 도입하고 있다. 농업은 집단경제가 해체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소규모 비농업 사영(私營) 부문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으며, 정부 시책도 중공업에서 경공업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특히 2001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의 회원국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국내경제를 세계자유무역체제에 편입시키며 무역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자원

동북부의 랴오닝 성[遼寧省] 푸순 [撫順]에 있는 탄전에서 노천 ...
중국의 금속 자원으로는 무엇보다도 세계 매장량의 약 3.5%를 차지하는 철광석, 약 2%를 차지하는 구리·납·아연, 매장량이 풍부한 안티몬·크롬·코발트·텅스텐 광상을 손꼽을 수 있다. 1980년 중반에 확인된 화석연료 매장량을 보면 석탄 26억 6,000만t(세계총매장량의 3%), 천연 가스 4,240억㎡, 재생탄 990억t으로 모두 합쳐 세계전체매장량의 11% 이다.

중국의 수력발전 잠재력은 세계 최고로 평가된다. 수력발전 용량의 대부분은 남서부에 치중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석탄 공급이 빈약하지만 에너지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첫 수력발전소가 세워진 북동지역의 잠재력은 매우 적다. 겨울 동안은 유량이 줄어 많은 발전소가 정규 용량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가동되는 반면 여름에는 홍수가 발생하여 전력 생산이 자주 중단된다. 이와 같이 수력발전이 남서부와 북동지역에 치중되어 있어 중부지역에는 전력이 부족하다. 중부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발전이 정체된 중부 및 서부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1993년부터 싼샤[三峽]댐 공사를 진척시키고 있다. 이 댐이 예정대로 2009년까지 완공되면 세계 최대의 댐이 될 것이며, 석탄을 연료로 이용하는 발전소 15개에 맞먹는 전력을 생산하는 수력 발전소가 생길 것이다.

농업

광둥 성[廣東省] 주장커우[珠江口]의 농수로
허난 성[河南省]의 황허[黃河] 평원에서 수확한 밀을 건조시키고 있는 ...
중국 전체면적의 10%만 경작이 가능하다. 이 가운데에서도 절반을 조금 넘는 지역에는 관개시설이 되어 있지 않고, 나머지는 대체로 논과 관개답으로 나뉜다. 개혁·개방 이전까지 약 80%의 인구가 농촌에 살았으며, 그 중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았으나, 2000년대 들어 농촌 인구는 68%로 줄었다. 공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도시에서 노동자가 많이 필요하게 되자 중국 정부는 노동력이 공업 부문으로 이동하도록 정책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그 결과 매년 이농 인구가 6,0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주요 쌀 생산국의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수확량이 많은 것은 쌀이다. 다른 주요 작물로는 밀·고구마·옥수수·감자·사탕수수·콩 등이 있다. 수수·사탕무·종자면·양배추·기장·토마토·평지·땅콩·보리 등도 상당량 재배되고 있다. 목초지는 중국 전체면적의 약 30%에 달한다. 또한 중국은 돼지·닭·달걀의 주요 생산국이며, 상당량의 양·소도 길러 소가죽·양모·비단이 많이 생산된다. 중국은 해양과 민물에서 오랜 어로(漁撈)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어획량의 65%는 태평양에서, 나머지는 내륙 하천에서 잡은 것이다. 중국은 상당량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고, 1970년 초에 비해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는데도 여전히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매년 삼림 벌채량의 1/3가량이 산업용으로 사용되지만 나머지는 연료로 사용되고 있어 목재의 일부는 수입된다. 삼림의 무차별적 파괴를 우려하여 재조림 정책이 정력적으로 추진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여 여전히 삼림자원은 빈약한 실정이다. 중국에서 사용되는 목재는 대부분 헤이룽장 성, 지린 성, 쓰촨 성, 윈난 성에서 생산된다.

공업

산시 성[陝西省]의 시안[西安]에 있는 방적공장에서 작업 중인 한족(漢族) ...
수놓는 먀오족[苗族] 처녀들
차이다무 분지[柴達木盆地]의 유정탑(油井塔), 티베트 고원 북동부
중국 제1의 야금 중심지인 랴오닝 성[遼寧省] 안산[鞍山]의 한 ...
후베이 성[湖北省] 우한[武漢]의 우한 철강회사
중국의 전반적인 공업 생산은 매년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측면에서 공업은 다른 모든 분야를 능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금속공업과 기계설비 부문은 가장 중점적으로 육성되고 있다. 철강회사는 2000년 현재 바오산철강이 1,700만t을 생산하여 세계 9위인 것을 비롯해 25위 안에 모두 3개의 중국 회사가 포함될 정도로 발전해 있다. 주요 제조업 분야로는 비료·농약·섬유·정유·선철·식물성기름·원당·플라스틱·전자제품 등이 있다. 또한 정부 당국이 화학산업에 주력하여 화학비료·플라스틱류·합성섬유의 생산이 크게 신장되었는데, 화학산업이 성장한 결과 중국은 질소비료의 세계 주요 생산국이 되었다. 소비재 부문에서는 직물과 의류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중국의 중요한 수출품목이 되고 있다. 화학섬유의 비중이 점차 높아져가고 있어 직물 분야는 전체 공업생산량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컴퓨터·정보통신 분야의 첨단기술을 보유한 외국기업을 적극 유치하면서 산업구조도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자본·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너지 생산은 급속히 신장되고 있으나 여전히 수요에는 못 미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에너지 가격을 낮게 책정한 정책 때문인데 이 정책으로 인해 산업시설의 보존이 잘 되지 않고 있다. 석탄은 중국 에너지 소비의 약 70%를 충족시키고 있다. 인적이 닿지 않는 북동지역과 앞으로 중요하게 될 해안 석유층에는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다. 그러나 아직은 석유생산의 약 절반가량이 북동지역의 대유전인 다칭[大慶]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상하이와 광저우[廣州] 지역에는 핵 발전소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에 걸쳐 내륙지방의 공업을 육성하려 했으나 여전히 공업시설의 상당부분은 중국 동해안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상하이 한 곳에서 중국 전체공업생산량의 10%가 생산되고 동해안 지대에서 전국 공업생산의 60%가량이 생산된다. 이러한 개발의 지역편중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낙후된 서부지역을 개발하려는 대단위 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금융

금융기구는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 주요한 재정 및 금융 통제기구는 국무원이 통제하는 중국 런민은행[人民銀行]과 재정부이다. 서구의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이 담당하는 여러 기능들을 맡고 있는 런민은행은 화폐를 발행하고 통화를 조절하며 예산집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런민은행은 대외무역과 기타 해외업무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지만 이러한 기능들을 실제로 담당하고 있는 곳은 많은 해외지사들을 가지고 있는 중궈은행[中國銀行]이다. 중국의 경제개혁은 은행의 경제적 역할을 크게 증대시켰다. 기금을 늘리고 이것을 기업과 개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하여 건설을 촉진시키고 경제발전을 유도했다. 해외에서 자본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하게 되었다. 중국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국제연합(UN)의 몇몇 프로그램에서 차관을 도입했으며, 홍콩을 해외자본의 공급원이자 자본 유입의 주요한 통로로 이용해왔다. 그러나 국영기업의 부실에 따른 금융기관의 동반부실 문제와 WTO가입에 따라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될 외국 금융기관과의 경쟁 등 중국 금융기관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

무역

1980년대까지 중국의 대(對)공산권 무역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았다(→ 국제무역). 70% 이상이 비공산권 선진국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나머지는 비공산권 개발도상국과 행한 무역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들어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가 몰락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중국으로의 귀속 이전까지 주요 무역 파트너였던 홍콩은 국내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식량수급 부문에서 본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타이완[臺灣]도 중국의 주요 무역대상국의 하나이다. 주요 수입품은 산업설비와 자본재, 특히 기계류와 자동차 등이며, 주로 미국·일본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 수입의 거의 절반, 수출의 약1/4 정도가 동·동남아시아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수출품의 경우는 약 70%가 공산품들이며 그 중 섬유·의류 제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밖의 수출품으로는 농산품·화학제품 및 콜타르·석유를 포함한 추출성 제품 등이 있다. 2001년 WTO가입과 함께 중국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운용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서 정부가 주도적으로 경제를 운용하며, 5개년계획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끌어가고 있다(→ 경제계획). 공업부문을 예로 들면 공업에서 총가치생산의 60% 이상을 생산하는 기업들을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몇몇 중요한 개혁조치들이 취해져서 중앙정부의 역할이 축소되고 사기업에 주도권이 주어지고 시장 전략이 답변확정되었다. 도시 경제개혁의 기본 추진방향은 중국이 국제경제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갖게 하는 것, 기업들이 손익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것, 국가가 자원의 분배를 지도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직접 감독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 투자대상을 야금업이나 기계설비업에서 경공업 쪽으로 이동하는 것, 개인의 노력에 대한 물질적 동기를 부여하는 것, 경쟁적 사기업 부문의 발전을 허용하는 것 등이다. 1980년대 농촌개혁은 토지를 재임대하여 토지 집중을 합법화하는 것, 농업에서 국가가 할당한 생산 책임량을 계획에 따라 수매하는 체계를 없애는 것, 농민들에게 시골이나 소도시에서 사적 고용기회를 찾아보도록 권장하는 것 등이다.

이 모든 개혁에서 공통되는 점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거대한 정부 관료기구에 의해 경제를 운용해나가는 것으로는 이러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1989년말 무렵부터 잠시 동안 중앙집중적인 계획과 국가가 운영하는 대규모 기업에 중점을 두기도 했으나,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시장경제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개혁조처에는 국영기업의 부실과 이에 따른 은행의 부실채권 문제가 한몫을 했다. 그 동안 국가의 보호를 받아온 국영기업은 경쟁력이 떨어져 매출이 줄고 부실화되었다. 중국 정부는 국영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경쟁 원리를 도입했다. 2001년 장쩌민 주석이 개인 기업가도 공산당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에서도 보여지듯이, 중국은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기업가를 우대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향진기업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향진기업이란 농촌의 발전을 위해 농촌지역에 세워진 기업을 뜻한다. 향진기업은 초기에는 국영기업의 하청업체 역할을 수행했으나 개혁·개방 이후 자율성을 바탕으로 국영기업과 경쟁하며 이윤을 창출하는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1992년 현재 향진기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은 중국 전체 노동력의 17.9%, 농촌 노동력의 23.8%를 차지하고 있고, 향진기업의 생산량은 중국 전체 생산량의 31.6%, 농촌지역 생산량의 69.6%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정부 통제하에 있는 전중국노동조합연맹은 40만 개 이상의 노동조합을 포괄하고 있고,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다. 그들은 서구식 노동조합처럼 임금이나 노동조건에 관해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당을 보조하고 생산을 촉진시키는 의무를 지고 있다.

운송

장쑤 성 쑤저우 부근의 대운하를 지나고 있는 화물용 ...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청두[成都] 평원의 수로 위에 놓인 ...
오랫동안 황허 강[黃河] 이북과 중국 서부를 잇는 통로로 ...
주로 증기기관을 사용하고 있는 철도는 화물수송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수송능력이 아직 수요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특히 석탄 선적에서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모든 철도는 철도부와 지역행정기관을 통해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둥베이 지역의 주요 철도망과 만리장성(萬里長城) 안쪽의 대규모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전에는 교통이 불편했던 일부 농촌지역에 새로 철도를 놓았다. 예를 들어 간쑤 성 란저우에서 서쪽으로 차이다무 분지의 유전까지 철도가 놓였다.

간선도로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중요성을 갖는 국가·성·구 도로, 현이나 공사(公司)에서 운영하며 2차적 중요성을 가진 지방도로, 공장·광산·국영농장·산림관리기구·군대에서 운영하는 특수 목적의 도로들로 이루어져 있다. 10만km가 넘는 내륙수로는 수상운송에 이용되는데 그 대부분이 화중지방과 화남지방에 편중되어 있다. 지류까지 합하면 양쯔 강이 전국 수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며, 수송화물량으로는 하천에 의한 총수송량의 1/3을 차지한다. 여름에 양쯔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 하구에서 충칭[重慶]까지 최대 5,000t가량의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중국에서 2번째로 중요한 강인 시장 강에는 1,000t가량의 배가 우저우[梧州]까지 들어간다. 헤이룽 강[黑龍江], 쑹화 강[松花江], 우수리 강은 지류를 합쳐 총연장 2만km의 수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 유일의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수로인 대운하는 하이허 강[海河], 황허 강, 화이허 강, 양쯔 강 및 첸탕 강[錢唐江] 분지들을 지나 베이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총 1,760km의 길이로 이어져 있다. 대운하는 오랫동안 관리가 소홀하여 이용되지 못하다가 다시 수상 운송에 이용되게 된 것인데, 지금은 석탄과 식량 등을 남북으로 대량 수송할 때 중요한 운송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연해항운은 크게 북부 해역과 남부 해역의 두 항해구역으로 나뉜다. 북부 해역은 상하이[上海]를 운항 중심지로 하면서 샤먼[廈門]에서 북쪽으로 북한 국경선까지 이어져 있다. 남부 해역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샤먼에서 남쪽으로 베트남 국경선까지 이어져 있다. 19세기초부터 주요 항구로서 자리잡아온 상하이는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상징이 된 도시로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

중국 민간 항공은 주로 항로를 확대하는 것, 베이징과 다른 주요 도시들 및 먼 변경지대, 내륙지방 등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것, 경제 부문의 필요성에 비추어 특수 목적의 비행기를 개발하는 것, 대규모 수송기의 수를 늘리는 것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 이전에 이미 개설된 중국과 러시아·북한·몽골·베트남·미얀마를 연결하는 국제항로 외에 중국의 주변국들과 미국·서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에도 항공 수송로가 잇달아 개설되고 있다.

1949년 직후에는 전신·전화 등의 통신시설이 유선이었으나, 1970년대에는 무선통신의 사용이 증가되었다. 극초단파나 인공위성을 이용한 송신도 이제는 흔히 사용된다. 대도시들에는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무선 텔레타이프라이터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80년대에 와서 중국의 통신서비스는 전반적으로 크게 개선되었으며 홍콩의 첨단 통신 시스템에 힘입어 더욱 향상되었다. 1990년대 들어 시장 개방이 가속화되고 사업상의 통신 수요가 급증하면서 통신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2001년 6월말 현재 중국의 인터넷 사용 인구는 2,6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이며, 전자상거래 업체 1,100여 개, 전자상거래 규모는 4,000만 달러이다. 중국 정부는 2001년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4%인 정보통신산업의 생산액을 2005년까지 7%로 높여 기간산업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정치·사회

중국은 공산주의 공화국이다. 중국공산당은 주요 정치·경제·문화 기구를 장악하고 중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의사결정권은 6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상임위원회에 있다. 상임위원 6명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210명의 위원과 138명의 후보위원으로 구성)에서 선출된다. 주요 당 간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 고위직을 점하고 있다. 1982년 중국 헌법에 따르면 최고 정부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이다. 2,900명 이상의 대표로 구성되는 이 입법기구는 성·자치구·직할시·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되며, 5년 임기가 법률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 전인대에서는 상임위원회를 선출하여 상설기구로 하고 의전상 중국을 대표할 주석을 선출한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으로 전인대는 국무원 총리를 임명하며, 국무원 총리는 다시 전인대가 중국의 집행기관인 국무원의 위원들을 지명하는 일에 조언한다. 국무원에는 총리, 12명 이상의 부총리, 50명 이상의 각부 장관과 각 위원회 주임들이 포함된다. 정부 행정은 모두 중국공산당이 표방하는 정책에 부합되어야 한다. 1970년대 후반이래 온건 실용주의파가 주도하는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의사결정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확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0년대 내내 중국은 러시아에서 만들거나 설계한 낡은 장비들을 중국에서 설계하고 서구의 기술로 만든 장비들로 교체함으로써 군대를 현대화하려고 노력했다. 중국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핵무기를 갖추었다. 거의 300만 명의 병력을 가진 인민해방군은 중국 육·해·공군을 모두 포함한 단일한 조직체이다. 전국의 군대는 7군구(軍區)와 20개 이상의 성군구(省軍區)에 배치되어 있다. 문화대혁명(1966~76) 이전에 존재하던 사법기관이 현재 부활되었다. 사법부는 다시 국무원의 관할을 받게 되었고, 대행 기관들과 각급 법원이 재건되었다. 다양한 법과 법전들을 답변확정함으로써 이러한 체계의 법적인 틀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고 정치지도자들의 의도가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 이 사법기구들의 실제 기능은 여전히 제약받고 있다.

정부는 농촌에 의료시설을 제공하고 공중위생을 정비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특별히 강조 해왔다. 도시의 의사들에게 농촌으로 내려가 그곳의 인민들에게 봉사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의료진들은 농촌지역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보건과 위생에 대해 강조한 결과 콜레라·페스트·장티푸스·성홍열 같은 질병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최근에는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고혈압·암과 같은 병들이 건강상의 새로운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중국인의 평균수명은 1970년대의 60세에서 1997년 70세로 늘어났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이데올로기와 정치훈련에 역점을 두었던 중국의 교육체계는 이제 과학과 기술을 습득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취학연령의 약 95%가 6년제 초등 의무교육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곳을 졸업한 학생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중등교육을 받는다. 교육의 중요성이 최근 다시 강조되고 있지만 성인 인구의 약 70%만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1985년에 정부는 1990년까지 의무교육을 3년 연장하고, 장학금을 수여하며, 다른 나라와 학문적인 교류를 증진시키는 내용을 포함한 개혁안을 발표했다.

베이징에 있는 국가교육위원회가 직접 운영하는 6개의 대학교는 중국 고등교육체계에서도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고등교육). 그중에는 비(非)기술계로는 최고인 베이징대학교·푸단대학교[復旦大學校]·칭화대학교[靑華大學校]가 있다. 이밖에 모든 성에는 성립대학교(省立大學校)를 비롯해 여러 기술·종합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그리고 홍콩에는 역내(域內)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홍콩대학교가 있다. 중국의 초등학교를 나온 학생 가운데 0.2%도 안 되는 인원이 정규대학에 들어간다. 1977년 이후 전국적인 시험을 치러 입학을 결정하고 있으며, 학비는 대개 국가에서 지급하고 있다.

문화

중국에는 다양한 인종의 문화가 섞여 있어 생생한 민속유산을 남기고 있다.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 이전에 한족 마을에서는 종교 의례가 많이 행해졌으며, 특히 단오절·음력설 같은 명절의 행사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 등이 행해졌다. 그리고 관혼상제에 관련된 의례들은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몽골족들은 봄에 환생을 의미하는 '사강사르'라는 명절을 지키며, 음력 12월 23일에는 불의 신에게 대희생제를 올린다. 후이족은 라마단 1개월 동안 해뜰 무렵부터 해질 무렵까지의 단식을 철저히 지킨다. 티베트족들은 티베트력 마지막 달 29일에 악령을 쫓아내는 '구톨'(dgugtor)이라는 축제를 벌인다. 중국의 문화유산 중 중요한 것으로는 문자·음악·무용·연극 등이 있다. 음악 및 그에 관련된 의례는 봉건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위계에서 지배자의 궁전 내 활동의 구조를 제공한다. 옛날 종교무용에서 기원한 연극은 악령을 쫓아내고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을 환기시키고 수확·사냥·전쟁 등을 하러 나가는 준비로서 행해졌다. 현재 상연되는 월극(劇:광둥 극)과 경극은 역사적·현실적 주제들을 기교 어린 노래와 춤으로 구성한 원대(元代)의 가극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중국의 중요한 공예는 도자기·보석세공·금속세공(금은 상감과 칠보세공을 포함)·직물·칠기 등이며, 모두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도자기에 바르는 유약은 중국에서 BC 2000년말 이전에 발전했고, 도자기는 6세기 이래로 발전했다. 명대 도자기는 흰 바탕에 청색무늬를 그린 '청화백자'가 특징적인데, 꽃이나 추상적 무늬에서 회화적 무늬로 점차 변했다. 청동주물은 중동지역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BC 1000년경에는 이미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기술은 고대 서구의 기술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회화와 서예는 전통적으로 엘리트들의 영역이었다. 6세기 이래 여러 미술가들의 이름이 역사기록과 거듭되는 모사품들에 의해 알려져 있다. 산수화가 활발하게 그려지던 시기는 송대(宋代:960~1279)부터 명대(明代:1368~1644)까지이다. 1949년 이후 중국 화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농촌과 공장의 모습들을 그렸다. 조소와 조각이 시작된 것은 주대(周代:BC 1111경~255) 또는 그 이전부터이다. 여러 예술 분야 가운데 특히 조소는 한대(漢代)에 불교가 도입되고 육조시대(六朝時代:220~589)와 당대에 널리 확산되면서 크게 진작되었다. 부처와 보살의 상(像)과 벽면 부조가 수천 개씩 만들어져 간쑤 성 둔황[敦煌]과 같은 특출한 유적지의 동굴벽화들과 함께 중국 종교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중국미술).

중국문학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학문적인 유산이다. 이것은 문화접촉을 통해 한국·일본·베트남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문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서체가 전해져 후에 이들 나라의 문자로 변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필가들이 한자를 사용해 많은 글을 짓기도 했다. BC 500년경에 만들어진 시선집인 〈시경〉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전 중의 하나로서 305개의 구전가요와 의례용 시가들을 싣고 있다. 당대는 한시의 황금기라고 하며, 이때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이 배출되었다. 후대에 중요한 산문작가로는 나관중(羅貫中)·포송령(蒲松齡)·오경재(吳敬梓) 등이 있다. 특출한 20세기 작가로는 여성 문제를 주제로 한 장편소설과 평론들을 지은 딩링[丁玲]과 현실주의 소설가 마오둔[茅盾]이 있다(→ 중국문학).

역사

허베이 성[河北省] 북부 옌산 산맥[燕山山脈]의 높은 산마루를 따라 ...
1927년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저우커우뎬[周口店]의 동굴에서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Homo erectus pekinensis]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에 인간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시기가 3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준다. 중국문명의 요람은 황허 강임이 분명하다. 이 지역을 발굴한 결과 최초의 중국문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유물들이 허난[河南]·산둥·산시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최초의 왕조는 (殷:또는 商, BC 18~12세기)이라고 할 수 있다. 은은 중국 청동기문화의 기반 위에 선 왕조로, 서쪽으로는 산시[山西], 남쪽으로는 양쯔 강, 북쪽으로는 허베이 남부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렸다. 은대에 들어와 달력이 사용되었고 문자가 도입되었으며 청동기 제조술이 발달했다. 그 기원이 불분명한 는 BC 1111년에 은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다. 주는 그뒤 여러 차례의 군사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주는 정복에 의해 획득된 새 영토를 통치하고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요지에 동족 또는 이족 공신들을 제후로 봉했다(봉건제). 제후들에게는 일정한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게 하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의무를 지웠다. 주의 말기에는 흉작과 천재가 이어져 민심이 불안정해진데다 후계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에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BC 771년 수도를 함락당했다. 이로써 서주(西周)는 멸망하고 주 왕실은 동도(東都) 성주(成周)로 도읍을 옮겨 동주(東周)를 다시 일으켰지만 옛날과 같은 위세는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이때부터 제후들이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동주는 약 500년간 존속했으며,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전국시대 이후 우경(牛耕)의 출현으로 농업생산력이 현저히 증대되었다. 또한 상공업도 발달했으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상과 문화가 꽃피었다. 공자(BC 551~479)는 이 시대에 태어나 그후 중국문명의 규범이 된 사회적인 개념을 제정했다.

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秦)은 BC 221년 중국을 통일했다. 시황제(始皇帝)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으며(군현제),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도량형,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나아가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들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했다. 장대한 능묘와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고, BC 214년에는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했으며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또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 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대에 설정된 중국 국경이 후대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신성한 국경으로 여겨졌다.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대규모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되어 시황제 사후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國運)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등의 연합세력에 패하여 결국 멸망했다(BC 206). 항우를 물리치고 패권을 차지한 유방(즉 高祖)은 BC 202년 (漢)을 세웠다. 진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다. 한의 제7대 황제 무제(武帝:BC 141~87)는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유교를 관학으로 정해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다. 이 체제는 그후 2,000년간 중국 각 왕조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대에는 종이와 지진계의 발명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AD 220년 한이 붕괴하자 혼란과 분열의 시기가 뒤따랐는데, 이 시기를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또는 육조시대라고 일컫는다. 군벌들이 들끓었고 화북지역은 다수의 비한족(非漢族) 침입자들에게 유린당했다.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 남부와 북부에 전파되었다.

(隋:581~617)에 의해 중국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수는 중요한 행정개혁을 이루었으나 무모한 군사적 원정을 계속하여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단명하게 끝났다. 618년 수를 이어 이 들어섰다. 당은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하여 전문관료제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돌궐, 투르판, 철륵(鐵勒), 서돌궐을 차례로 격파하고 토번(吐蕃)을 정복하는 한편, 서역의 요지에 전진기지들을 설치하는 등 한대 이래 보기드문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 환관의 전횡 등으로 국력이 쇠하고, 크고 작은 병란·민란 들이 일어났다.

당이 붕괴되자 또다른 분열기(907~960)가 시작되어 군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960년 마침내 이 70년 만에 전국을 통일했다. 송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답변확정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그러나 국초 이래의 문치주의는 한편으로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내치(內治)와 외교상에서 폐해가 누적되어 힘이 약해진 송은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남부로 수도를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쯔 강 이남에 자리잡은 남송은 국토가 북송때보다 반으로 줄었으나 경제력면에서는 북송시대를 능가했다. 남송은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에 의해 멸망당했다.

은 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이·일의 4한국(四汗國)을 포괄하는 몽골 제국의 종주국이고 또 중국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로서 세조 쿠빌라이 칸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황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으나, 중국의 문명·제도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거대한 중국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면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다. 원은 계속해서 한족을 차별하여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음으로써 한족이 세운 명에게 98년 만에 타도되었다(1368).

도 원대의 이민족 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조는 중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전제적인 명대에 들어와 반외세 감정이 절정에 달했는데 사실상 중국은 세계 각지의 세력들과 담을 쌓는 쇄국정책의 길을 걸었다. 사적인 해외무역과 해외여행은 엄금되었다.

1644년 만주를 근거지로 하는 만주족(옛 이름은 여진족) 왕조인 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청은 만주와 중국의 문명을 함께 섞어가면서 그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는 중국에게 있어서 비운의 연속이었다. 아편전쟁(1839~42)·태평천국운동(1851~64)·청일전쟁(1894~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1898년의 변법자강운동은 청정부에 어떠한 변화의 바람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1900년의 반외세·반그리스도교를 표방한 의화단사건은 열강의 군대가 중국 땅에 진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조는 1911년에 붕괴되고 쑨원[孫文]의 지도 아래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정치적인 배신과 지역 군벌주의에 의해 공화국은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을 재통일하려고 노력했다. 1920년대에는 장제스[蔣介石]의 노력하에 중국공산당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어느 정도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곧 공산당 세력과 갈라섰고 이들 공산당은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군대와 정부를 조직했다.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세력은 남부 허난 성에서 북부 산시 성에 이르는 9,700km의 대장정(1934~35)에 성공하면서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때 마오쩌둥[毛澤東]은 공산혁명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쩌둥을 대신하는 협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공산당은 국민당 군대와 연합국 군대와 동맹하여 항일전선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자 공산당은 세력을 재조직하여 일본군의 무기를 탈취하고 장제스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섰다. 그결과 1946~49년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달아났다(→ 국공내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1958년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 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중국 지도부 내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와 그 운동을 지지하는 과격파와 반대하는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1966년 마오쩌둥은 과격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혁명의 열기를 부추기고자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결과 혼란과 폭력만이 뒤따라 과격파들은 조락하게 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아내 장칭[江靑]이 이끄는 4인방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저지른 실수라고 비판되었으며, 4인방은 1981년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온건한 지도노선 아래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급진주의와는 영원히 결별하는 새로운 당헌을 제정했다. 이후 중국은 경제 현대화에 진력하여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1989년 경제발전에 따른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이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비극적인 톈안먼[天安門]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당시 총리이던 자오쯔양[趙紫陽]을 퇴진시키고 장쩌민[江澤民]을 등용했다. 장쩌민은 1989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0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1993년 국가주석직에 차례로 오르는 등 덩샤오핑의 후원 아래 국가 최고지도자로 성장했다.

대외적으로 중국 당국은 톈안먼 사건 이후 악화된 서방국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1990년 6월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반체제인사 팡리즈[方勵之] 교수 부부의 출국을 허용하는 한편, 그 해 9월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개최해 대외 이미지 재고에 힘썼다. 그리고 1992년에 톈안먼 사건을 '반혁명폭란'에서 단순한 '정치풍파'로 재평가하고 이듬해에는 이 사건을 주도했던 학생지도자를 가석방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중국은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및 개혁·개방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은 가운데 높은 경제성장 가도를 달렸다.

1997년 2월 덩샤오핑이 사망했으며, 그 해 7월 1일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는 홍콩이 1842년 난징[南京] 조약으로 영국에 할양된 지 155년, 1898년 조차된 지 99년 만의 일이었다. 중국은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초대 행정장관에 퉁치화[董建華]를 임명했다. 1999년 12월 20일에는 마카오가 포르투갈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유럽 국가에게 빼앗긴 땅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 중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1년 WTO 가입과 2008년 하계 올림픽 대회 유치를 이루어냄으로써 강대국으로 급속히 발돋움하고 있다(→ 중국사).

Macropaedia

한국과의 관계

역사적 변천

중국은 고조선을 포함하여 그 나라의 동쪽에 있던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전국시대(BC 475~221)의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BC 194년 한의 제후국인 연(燕)의 위만(衛滿)이 조선에서 위만조선을 세웠다. 이 나라는 그후 한 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무제는 그곳에 4군을 설치했으며, 그중 낙랑군만이 40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중국에서 후한 이후 삼국·남북조를 거쳐 수·당에 이르는 동안, 한반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발전했다. 고구려는 남북조의 나라들과 교류하면서 중국 세력을 견제했으며, 북방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의 세력을 다졌다. 589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수와 제휴했다. 백제는 왜(倭)와 교류하면서 수와는 표면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삼국은 중국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중국과 인접한 고구려는 수·당의 침략을 받았다. 수 문제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멸망했다. 당 태종은 645년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으나, 고구려는 안시성(安市城)에서 이를 물리쳤다. 그후 고종은 663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이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 후 당이 고구려 옛 땅에 대한 야심을 보이자, 신라는 676년 당의 군사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삼국은 유학생과 유학승을 중국 등지에 파견하여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중국과 신라의 교류가 매우 성하여 중국 산둥 반도 등의 지역에 신라인 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생겼으며, 그밖에 신라소(新羅所)·신라원(新羅院)·신라관(新羅館) 등이 세워졌다.

중국이 5대(五代)의 혼란을 거쳐 송·원으로 발전하는 동안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흥기했다. 중국이 5대10국의 혼란을 겪을 당시에 세워진 고려는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중국식 관제와 교육제도를 확립했다. 또한 문화의 유입 등을 목적으로 5대의 나라들과 교류했으며, 이러한 관계는 그 이후의 송과도 계속 이어졌다. 고려는 북방에 있는 거란·여진 등의 민족과도 지속적인 교섭을 가졌다. 13세기초에 들어서자 몽골족이 점차 강성해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침략했다. 몽골족은 1231년 1차 침략을 시작으로 1258년 양국이 강화를 맺을 때까지 수차례의 공격을 감행했다.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으며, 변발 등의 풍속이 성행했다. 원은 고려에 무리한 공물과 공녀를 요구했다. 문화적으로는 원으로부터 주자학·화약제조법·인쇄술·목화씨 등이 전래되었다.

중국의 명·청대는 조선시대에 해당된다. 조선 초기에 원만하지 못했던 명과의 관계는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사대주의 경향으로 나타났다. 조선에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이 지원병을 보내면서 숭명사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1616년 여진족인 누르하치[奴兒哈赤]는 후금을 세웠다. 뒤를 이은 태종은 1627년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어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을 통해 서양의 학술과 문명을 접할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가 청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으며, 청의 경세치용(經世致用) 학문은 조선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9세기말 일본은 운요 호[雲揚號]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한편 극동에서의 러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청은 조선에게 조미수호조약을 맺게 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켰다. 청은 그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뒤 청일전쟁(1894~95)에서 청이 패배하여 조선은 청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 되었다. 결국 청에 이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행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본토 및 만주 등지에서 무장독립군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조선독립운동은 쑨원 중심의 광둥 정부 관계 인물들의 지지를 받았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중국 혁명지도자들과 조선의 독립운동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쑨원이 죽은 뒤 광둥 정부는 국민정부로 바뀌었다. 국민정부는 그후 좌·우파로 분열되었는데, 조선의 독립운동도 그 영향을 받았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45) 등에서 중국의 반일감정이 조선의 독립운동과 맞물려 중국은 조선의 독립지원을 공개적으로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김구(金九)·김약산(金若山)의 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김구는 난징[南京]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으며, 김약산 중심의 좌파 단체들은 중일전쟁 때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우익 3당이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요구하여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개편, 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켰다.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연안파[延安派]는 따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을 배경으로 항일전에서 활동하여 그 세력을 넓혔다. 종전 후 한국 광복군은 해산되어 귀국했으며, 조선의용군도 각기 개인적으로 귀국하여 건국 이후 국군으로 개편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중국과 한국

중국은 1949년 10월 정권을 수립한 이후 모든 친미국가를 적대국가로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고수해왔다. 그러므로 한국과의 외교는 단절되었으며, 북한 위주로 한반도 정책을 결정했다. 1973년 한국은 대공산권 문호개방을 원칙으로 하는 6·23선언을 발표하여 중국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74년 1월 한일대륙붕협정을 체결하는 등 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8년 말 중국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개혁실용주의 노선과 대외개방정책이 적극 추진되자 중국의 대외정책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어 1979년 1월 덩샤오핑은 한국과의 우호관계조성 가능성을 시사했다. 또한 그해 7월 구체적으로 한국과 체육 교류의 용의가 있음을 나타냈다. 1980년 4월 대한민국 올림픽 위원회(KOC)에 대해 언급했다. 1982년 8월에는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식량위원회(WFP) 세미나에 한국이 참가했다.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최초의 접촉은 1983년 5월 중국의 민항기가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하면서 이루어졌다. 중국은 중국 당국 관계자를 파견하여 사태수습을 위한 교섭을 벌였다. 이는 국제민항기구 또는 제3국을 통한 간접적인 해결방법을 무시한 것으로, 중국측은 이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중국과 한국의 교류는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1990년까지의 접촉은 주로 체육·관광·친척방문 등의 교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1984년 2월 중국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를 위해 한국 선수가 최초로 중국을 방문했다. 1984년 3월 자오쯔양 총리는 친척상호교류를 허용했다. 그후 두 나라 이산가족들의 초청방문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84년 4월 중국 농구선수단이 한국을 방문했으며, 같은 해 10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한국 선수단이 참가했다. 그후 두 나라는 체육교류를 통해 상호 접촉을 확대시켰다. 중국은 1986년 9월 20일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했으며, 1988년 9월 17일에는 서울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다. 한국은 1990년 9월 22일 베이징 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했다. 경제교류도 활발히 전개되어 1985년 한국은행은 대중국 투자를 허가했으며, 1988년 10월 중국 광저우 교역회는 한국기업을 초청했다. 1989년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으며, 그해 7월에는 베이징 국제박람회에 참가했다. 1988년 10월 한국은 중국 관광금지를 해제했으며, 1989년 6월 한중 해운 정기 직항로가 개통되었다. 같은 해 8월 중국은 한국의 상하이 취항을 허가했으며, 1990년 중국행 우편 직송이 개시되었다.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 중국은 한국 기업의 베이징 사무소 설치를 허가했고, 1990년 10월 20일 한중 무역대표부 상호설치합의서에 조인했다. 1991년에 들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한층 발전했다. 그해 1월부터 중국은 한국 기자에게 비자를 발급해주었으며, 1월 30일 KOTRA는 베이징에 대표부를 개설했다. 그해 4월 2일 중국 류화추[劉華秋]외교부 부부장이 이상옥 외무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같은해 10월 최초로 한중 외무장관회담을 가졌으며, 11월 제2차 외무장관회담이 있었다. 1992년 2월 민간차원의 한중 무역협정이 발효되었으며, 4월 제3차 외무장관회담이 있었다. 그동안 간접교역과 여러 방면에 걸친 교류의 확대는 양국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식적·정치적인 관계 수립에 있어서는 제약이 많았으며, 중국과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북한이 한국과 중국간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데 주요방해요인으로 작용했다.

1992년 8월 24일 양국은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성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양국 국민의 이익과 염원에 부응하여 1992년 8월 24일자로 상호 승인하고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한다. ② UN 헌장의 원칙들과 주권 및 영토보전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불간섭, 평등·호혜·평화공존의 원칙에 입각하여 항구적인 선린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에 합의한다. ③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④ 양국간의 수교가 한반도 정세의 완화와 안정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 ⑥ 1961년의 외교관계에 관한 비협약에 따라 각자의 수도에 상대방의 대사관 개설과 공무수행이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고 빠른 시일 내에 대사를 상호 교환하기로 합의한다. 한국과 중국 양국이 공동 서명해 발효시킨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대동성명'은 반세기에 걸친 양국간 반목의 역사를 끝맺는 역사적인 문서로 평가받았다. 실제적으로 한중 수교는 양국간 경제협력이 정상적인 방향으로 확대·발전되는 중대한 전환점으로 작용해 교역·투자·산업협력 등 전 분야에 걸쳐 큰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중국은 짧은 시간 안에 한국의 주요 교역대상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수교 3일 후인 8월 27일 주중 한국대사관과 주한 중국대사관이 각각 개설되었고, 그해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방문해 양상쿤[楊尙昆]국가주석과 제1차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해 10월 30일 정부간 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2월 4일에 투자보장협정이 이루어졌다. 1993년 6월 26일 해상운송협정이 체결되었고 그해 11월 19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참석을 계기로 김영삼 대통령과 장쩌민 국가주석 간의 제2차 한중 정상회담이 시애틀에서 이루어졌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공식 방중으로 제3차 한중 정상회담과 한중 외무장관회담이 열렸으며, 그해 6월 6일에 한중 산업협력위원회 설치협정이 체결되었다. 11월 14일에는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양국 정상간의 회담이 자카르타에서 열려 북한 핵문제 등 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1995년 11월 13일 장쩌민 국가주석의 방한으로 한반도 내 긴장완화 및 경제협력 방안 등에 관한 양국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1996년 11월 16일 세계식량정상회의 참석차 로마를 방문한 이수성 총리와 리펑 총리 간 한중 총리회담이 있었다. 그해 11월 24일과 이듬해 11월 24일에는 APEC 참석을 계기로 한 한중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와 밴쿠버에서 각각 열렸다.

경제·기술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진 한국의 대(對)중국 무상원조는 1994년과 1995년에 각각 220만 달러와 394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1997년 12월 현재 대중국 투자 규모는 누계건수 4,629건, 누계금액 55억 5,000달러에 이르고 있다. 한중 산업협력위원회·무역실무위원회·경제공동위원회·환경공동위원회 등이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왔으며, 1997년 12월말 기준 중국 내 한국 상사수는 총 1,349개이다. 1996년 기준 대한수입액은 113억 7,706만 8,000달러이고 대한 수출액은 85억 3,856만 8,000달러를 기록했다. 1997년 현재 교민현황을 보면, 교민수 196만 1,075명에 체류자수 2만 4,428명이다.

중국과 북한

1949년 북한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50년 10월 중국은 6·25전쟁에 참전했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1953년 비밀군사협정을 통해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그후 1950, 1960년대에 상호관계는 때로 멀어지기도 했으나, 기본적인 관계의 틀은 변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화궈펑[華國鋒]에 의해 반소(反蘇) 노선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의 전략적인 지위가 점차 중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북한의 대남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북한에 대한 정치·군사·경제 분야의 지원을 활발히 전개하여 1971년 8월 무상군사원조협약 등을 체결했다. 중국은 북한의 통일노선을 지지했으며, 주한미군의 철수 및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어 1975년 4월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했으며, 1978년 화궈펑과 덩샤오핑이 각각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1978년 말 중국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개혁실용주의 노선과 개방정책에 따라 중국의 대외정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한국에 대한 기존의 인식변화로 과거에 쌓아온 북한과의 관계가 변화되었다. 중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남북한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입장과 상반된 것이었다.

1992년 8월 한국과의 수교로 중국은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한중 수교로 북한과의 마찰이 불가피해지 상황에서, 중국은 한반도 내에서의 계속적인 영향력 유지를 위해 북한과의 관계를 조율해 나갔다. 한중 수교 이후에도 북한·중국 간 교역은 꾸준하게 유지되었으며,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를 선언한 북한에 대해 국제적인 제재 움직임이 거세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중국은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는 등 북한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윗글 내용출처 : http://www.empas.com

 

 

 

 

** 중국의 사회현상 이라고 딱 잘라서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면 수도없이 너무 많아요!!

최근 이슈가 되는 몇개만 퍼와서 올립니다.**

중국사회에서 언어의 '異化현상'



  古代化

  언어의 발전양상은 시대변화와 더불어 바뀐다. 90년대 중국의 사회언어에는 역사 회귀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그동안 중국내에서 사용되지 않던 번체자가 연해지역에서 내륙지역으로, 남방에서 북방으로 퍼졌다. 국가언어문자공작위원회가 국내 29개 성(省)과 시(市)의 한자사용상황을 조사한 결과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번체자의 남용인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은 언어의 고대화 현상이다. 예를 들어 '황비(皇妃)이발소' '황태자 신발가게' 등이다. 심지어 '황군(皇軍)술집' '남패천(南覇天)가무청' '지주(地主)술집' 등 간판을 내걸어 대중들의 화두가 되기도 했다.

  奇異化

  80년대 이후부터 언어가 이상하게 쓰이는 기이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일부 청년작가들의 작품에 '구두가 미쳤다, 나무가 혈관 속에 들어간다(皮鞋 了, 樹走進血管里)' '와와와, 진짜(眞)! 통(痛)! 쾌(快)!' 등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등장해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게 유행했다.

  그리고 개혁개방과 더불어 광고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성어(成語)를 발음이 같은 글자와 바꿔 광고문구로 사용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톈창디지우(天長地久)'→'天嘗地酒', '허칭허리(合情合理)'→'盒情盒理', '인이웨이룽(引以爲榮)'→'飮以爲榮' 등이다.

  이는 특히 초등학생들의 언어교육에 매우 나쁜 영향을 미쳤다.

  애교화

  부드러움은 언어가 지닌 기품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는 절대 언어의 애교화와는 다르다. 90년대이래 중국 사회언어에는 애교화 추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소녀들 사이에 더욱 그런 현상이 심했다.

  '마미( )=어머니' '러우나(柔娜)=부드럽다' '친친(親親)=키스' '하우하우칸라(好好看 !)=잘 봐요!'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과장·과대화

  개혁개방이후 상품경제의 발전과 사람들의 가치관념이 변화되면서 언어의 극단적인 과장현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대전(大全) 계열=대할인(大酬賓·大削价),대증정(大奉獻·大贈送) 등 △초호화(超豪)계열=초우수품(超級精品)·초청결(超級潔覇)·초광각(超廣角) 등 △패왕(覇王) 계열=주패왕(酒覇王)을 비롯해 건전지에 電覇王,에어컨에 凉覇,광천수에 泉覇라고 쓰는 것 등이다. (北京日報)
 
 
 
 

1. 한류열풍의 소용돌이

소위 한류열풍중국대륙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녁에 텔레비젼을 켜면 약 40여개의 채널중 7~8개 채널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습니다.

대장금이 방영되던 시절, 홍콩의 저녁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집집마다 가족들이 모여앉아 대장금을 봤습니다. 다음날 점심시간 삼삼오오 모여앉아 식사를 하면서 어제 본 대장금을 얘기했습니다. 못본 사람은 대화에 끼어들지를 못했습니다. 먹거리 파는 곳에는 한국음식이 진열대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옷가게마다 대장금식 한복이 걸려있습니다.

중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홍콩만큼은 못하지만 대장금 방영시절엔 야간잔업지시를 망설여야만 했습니다. 야간을 지시하면 보는 눈들이 찢어집니다. 거리를 걷다보면 여기저기서 대장금 주제곡이 흐릅니다. 중국 번안곡도 있습니다.

DVD가게 입구에는 어김없이 한국영화, 드라마 코너가 마련돼있습니다. 유명가수들의 뮤직비디오와 CD도 진열돼있습니다.

물건을 사러 백화점에 가면 "일본인 아니면 한국인?"이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라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중국인종업원도 꽤 됩니다. 예전에는 거의 "일본인이냐?"라는 질문을 받아 속이 불편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발전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류열풍의 결과입니다.

2. 한류열풍중국의 변화속도를 높인다.

오늘날 중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는 매스컴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중국온지 3년밖에 안됐는데도 매일매일 바뀌고 있는 것을 느낄만큼 중국은 역동적입니다. 중국에 들어온지 10년정도 되시는 선배들의 얘기를 듣노라면 그 변화는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삶의 모습입니다. 중국의 젊은 층은 이제 거의 전세계의 모든 젊은이와 같은 사고를 하고,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처럼 말입니다.

어떤 모습일까요? 역시 전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겁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누가 비교적 자신들의 색깔을 그 속에 녹여 넣었는지, 혹은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어떤 점이 들어있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겠습니다.

한국의 경우 미국과 일본이 주류를 이루고 거기에 한국고유의 색깔이 가미돼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영국 거기에 일본 그리고 중국고유의 색깔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류열풍과 함께 한국의 색깔이 베어들어가고 있습니다.

평가는 긍정적입니다. 한국의 이미지가 근면, 예의, 세련됨,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의지 등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의 이미지는 중국내 많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경제권을 중심으로 사회, 문화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보다 빠른 속도로 세계와의 폭을 좁혀갈 것입니다.

3. 한류열풍중국인의 인식을 바꾼다.

한류열풍에게 감사해야할 것중 하나가 바로 중국인의 대한국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중국인은 한국을 그저 조그만 나라, 50년대 조선과 전쟁한 나라, 미국의 꼬봉, 일본을 복사한 나라 정도로 알고 있던- 혹은 기분나쁘지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지금 중국인은 한국하면, 잘사는 나라, 월드컵4강, 세련된 나라 등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미국드라마를 보며 자란 저로서는 미국과 미국인, 미국것이 절대선이였습니다. 그 영향은 지금도 알게모르게 제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중국인이 그렇습니다. 무협영화에 가까운 중국드라마를 제외하고는 현대물(현재는 많이 좋아짐)은 인기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일본드라마 몇 편이 인기를 끌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방을 온통 한국 드라마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중국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면 한국사람들은 다 잘생기고, 예쁘고, 세련되고, 잘살고, 멋있다고 부러워합니다. 한마디로 근사하다고 저렇게 되고 싶다고들 합니다. 물론 주인공의 인공적 삶이지만 말입니다.

조그만 전자부품을 만드는 제조공장에 근무하고 있는 저조차도 3년전 보다는 일하기가 훨씬 편해졌습니다. 그저 외국인을 경계하던 눈빛들에서, 이제는 먼저와서 한국말로 인사하고, 이영애가 예쁘냐 전지현이 예쁘냐 묻기도 합니다.

한국식당은 중국인들로 넘칩니다. 한국 옷은 비싸게 팔립니다. 거리엔 장나라, 안재욱 등의 노래가 흐로고, 장동건, 차태현, 전지현 등의 포스터가 걸려있습니다. LG에서 만든 비누와 치약을 쓰고, 삼성에어컨과 냉장고를 삽니다. 삼성핸드폰은 젊은이들이 받고 싶은 최고의 선물(사기에는 비싸므로)입니다. 벤츠, 베엠베(BMB), 툐요타들 사이로 EF소나타가 달립니다.

중국에도 반미감정과 반일감정이 있습니다. 그 정도는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그 반사이익을 한류열풍을 등에 업고 한국이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한류열풍을 한순간의 현상이 아닌 중국내의 한 문화로 정착되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한 세대안에 한국의 국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윗글 내용출저 : jemin&jane

 

 

*** 중국의 문화 ***

중국의 문화  

중국은 문예활동을 인민에 봉사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함을 방침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창작활동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982년 중국 정부는 문예사상의 ‘견지(堅持)와 발전(發展)’을 주장하고 작가는 4가지 기본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여 작가들의 자유화 경향을 제어하였다. 즉 허용된 자유라는 것은 중국 공산당 체제 내에서의 자유이지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었다.
 
1983년 사상과 문화의 오염을 막는다는 명분의 정풍운동(整風運動)이 다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바이화[白華]의 ‘오왕금과월오검(吳王金戈越五劍)’, 쉬징짜이[徐敬再]의 ‘굴기적시군(掘起的 試群)’이 비판되었다. 또한 1987년에는 류빈엔[劉賓雁]과 왕뤄왕[王若望]이 비판을 받고 당적을 잃었다. 톈안먼사건 이후에도 일부 작품들이 자산계급(資産階級) 자유화사상에 물들어 있어 당과 사회주의를 불신하고 있다고 비판되었다. 결국 중국의 문예활동은 정치적 면에 종속된 것으로 자유로움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도전이 많아지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에 중국의 화단은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 서구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입하면서 신사실주의(新事實主義), 전위예술 등의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고 있다.
 
문화혁명 이후 서양음악은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되었다. 모든 음악작품은 공연이 금지되었고 정권이 지정하는 공연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행으로 인민들의 음악생활도 다채롭게 변모하였는데 특히 배우기가 쉽고 이해하기 쉬운 유행음악들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최근에는 가라오케 노래방[歌廳]들이 대도시에 급증하고 있다. 또한 교향악 부문도 1980년대 중반 인민들 사이에 열풍적인 반응을 일으켜 매번 중앙악단의 공연 때 매진되는 일이 흔하였다.
 
또한 중국인은 중국 고유의 경극(京劇)을 즐기는데, 이 경극은 극본, 연기, 음악, 노래, 소도구, 분장, 의상 등의 예술적 요소를 다채롭게 결합한 총체적 예술로 사실적이기보다 상징적 원리에 의해 세련화된 예술이다. 이 역시 문화혁명 때에는 소련의 사실주의적 문예정책과 봉건주의적 잔재를 제거한다는 목표로 많은 부분이 변질되었지만 개혁 이후에는 문화혁명기에 금지당한 내용들이 다시 상연되고 표현면에서도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태극권 등 기공수련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으며 특히 불교와 도교 원리에 기공이 결합된 법륜공은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의 강한 탄압을 받고 있다. 스포츠면에서는 육상·체조 등에서도 세계 최고수준의 기량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대중교통 수단의 낙후성과 중국인들의 경제수준 (차를 구입하기에는 역부족), 자동차산업의 열악함, 그리고 평탄한 지형 등의 이유로 중국 어디에서나 자전거가 '중국서민의 발'이 되고 있다. 

윗글 내용출처 : http://100.naver.com/

 

 

******중국과 한국의 역사관계**********

일단 외국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중국의 속국으로 보는 이유는 옛부터 우리나라가 중국을 어미의 나라로 모셨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감히 상국의 나라인 중국의 말을 거스르지 못했죠. 중국은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게했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중국의 허락 없이는 왕이 될수도 없었죠. 이런 역사가 게속되어지다 보니,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한국중국의 속국으로 볼수 밖에 없죠. 그러다면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은 그야말로 동물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일본같은 나라는 경쟁상되도 되지 않았기때문에 일본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물론 한국또한 일본을 한낮 왜구로 보고 극히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약하고, 문명또한 늦게 발달한 일본이 강대국이 된이유는 빨리 서양의 근대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중국은 자국의 문화에 크게 자긍심을 가졋기 때문에 나라개방이 늦져졌기 때문입니다.지금은 한국이 막 일본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고, 중국은 이제 막 일어서기 시작했죠.
거기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중국의 속국이라한는데 우리는 반도체산업이 세계1위며, 조선업은세계2위, 자동차업은 세게3위, 생명공학,첨단과학기술력은 세계3위,
국가 민주체제는 세계1위,특허제출도 5위건 안에들고, 무역규모또한세계11위,아이티산업 세계3위권등등 우리나라는 나나리 발전하는 이제는 국민소득2만달러를 향해달리고 있는 독립국가입니다.

 

윗글출처 : naver : ID: rudfks0310

 

******* 중국 & 한국  관계  2  ********

 

1) 근세 이전

한국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접하여 있으므로 여러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계속하여왔다. 기록상으로는 BC 3∼BC 2세기에 연(燕)나라의 진개(秦開)가 고조선의 요동(遼東)을 정벌하였다고 적혀 있어 한족(漢族) 세력이 이곳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족의 망명인인 위만(衛滿)은 고조선의 준왕(準王)을 대신하여 위씨조선(衛氏朝鮮)을 세웠다(BC 194). 위씨조선은 한무제(漢武帝)와 싸워 멸망하고 그 고토(故土)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고대국가들은 중국을 통해 한문화와 불교문화를 수입하여 국가통치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었고, 특히 신라는 당(唐)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당(唐)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당나라 문화를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후 고려의 광종(光宗)은 중국식 과거제를 답변확정·실시하여 문치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는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중국의 연호로 사용하였으며 귀족사회는 한문학(漢文學)을 교양의 근본으로 삼았고, 승려들도 송(宋)으로 유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3세기에 몽골[蒙古]의 세력이 강대해져 고려를 침입하여 이에 항쟁하고자 수도를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고 40년간 완강히 대항하였다. 그러나 1270년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와 화해하여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고 이후에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다. 원·명(明) 교체기인 고려 말에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서로 대립하였으며, 이는 조선 왕조를 개창(開創)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 왕조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국시로 삼아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공물을 보냈다.

조선 유교주의자들의 통치원리는 배불숭유(排佛崇儒)를 지도원리로 하였기에 중국에 대한 사대 경향은 더욱 심하여갔다. 조선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명이 구원군을 보내와 일본 격멸에 도움을 주었다. 만주족에 의한 2번의 호란(胡亂:1627, 1636)을 당하자 조선은 굴복하여 그들이 세운 청(淸)나라를 섬겼고, 이 시기에 유럽의 과학지식과 문명이 중국을 통해 들어와 조선 학자들에게 실학(實學) 학풍이 퍼져나간 계기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정치간섭을 심하게 하여 대원군의 납치, 중국 관제의 실시 강요, 청군(淸軍)의 서울 주둔 등을 행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1864∼1895) 이후 청나라가 조선에서 손을 떼고, 두 나라의 관계도 청산되어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조국광복에 불타는 애국지사들은 중국 본토와 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1919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후 6·25전쟁에는 중공군(中共軍)이 대량 투입됨으로써 한국 민족의 분단이 지속되고 있다.

2) 최근세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전후 냉전체제로 인해 양국은 1950년대 이후 정치적 적대관계와 경제적 단절이 계속되었다. 개방과 개혁이 이루어진 1970년대 후반 들어 간접교역의 형식으로 양국은 경제 분야에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1980년대를 넘어서서 중국의 개방이 더욱 확대되면서 양국 경제교류도 점차 늘어갔다.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가 춘천에 착륙하는 사건이 나자 중국은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이후 비정치적인 부문에서 양국 교류가 활기를 띠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중국 민항기가 한국의 비행정보구역(飛行情報區域)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고, 1984년 3월에는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모국 방문과 한국인들의 중국 친지방문이 허용되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에 중국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1988년 10월에 한국인들의 중국 관광금지가 해제되었다. 한국의 끈질긴 외교 교섭에도 중국은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을 고수하여 민간교류만 허용하였다. 1990년 10월에 무역대표사무소가 개설되었고, 1991년 10월과 11월에 1·2차 한·중 외무장관 회담이 이루어졌다. 1992년 2월에 양국 무역협정이, 그리고 7월에는 투자보장협정(投資保障協定)이 발효되었다. 그해 4월에는 3차 외무장관 회담이 이루어졌고 8월 24일 양국은 수교의정서(修交議定書)를 교환하고 정식 수교를 이루고 민간 차원의 교류에서 정식적 국가 간의 교류로 바뀌었다.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 리펑 총리, 장쩌민 총서기와 회담을 가졌다. 그 일정 중에 한·중 통상장관회의를 열어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대한 세제지원(稅制支援)과 8차 5개년 계획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1993년 5월에는 첸치전[錢其針] 외교부장이 방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시애틀에서 정상회담을 가져 북한 핵문제와 다각적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였다. 19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북한 핵문제의 대화를 통한 해결과 긴밀한 협의, 한반도 비핵화 실현 지지를 논의하고 이중과세(二重課稅) 방지협정 및 문화협정을 체결하고 통신협력양해각서(通信協力諒解覺書)를 교환하였으며 산업협력위원회(産業協力委員會)를 설치할 것을 합의하였다. 10월에는 리펑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12월에는 한·중 양국의 최대 현안 중의 하나인 서울~베이징 간의 직항노선이 개설되었다. 1995년 10월 장쩌민 국가주석이 방한하였고 1998년 11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1995년 2월 17일 북한에 대한 경수로제공을 전담할 다국적 컨소시엄인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참여문제와 관련 불참키로 결정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대한 역할을 스스로 제한하였다.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대북한제재에는 반대하였다. 중국은 1997년 4자회담 참여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8월 뉴욕 4자회담 예비회담과 12월 제네바 본회담에 참가하였다. 중국은 최근 들어 한국의 대북(對北) 포용정책과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화해·교류 및 협력관계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고,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3) 교류관계

개혁·개방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과 중국간의 교역은 20억 달러 미만이었다. 1991년 중국의 경기회복으로 교역액은 44억 달러까지 이르렀고, 양국 무역대표사무소 설치와 무역협정 체결 등으로 경제교류가 본격화되면서 급격한 증가 현상을 보였다. 1993년에는 90억 8000만 달러로 늘었다. 무역수지를 보면 한국은 계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1993년도에 들어서 대중국 수출이 51억 5000만 달러로 전년도에 비해 94%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수입이 39억 3,000 만 달러로 증가율 5%에 그쳐 12억 2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도 들어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고 중국의 수입억제로 상반기 무역수지는 3억 3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총 무역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1989년의 1.7%에서 1993년도에는 5.5%를 차지하여 중국이 미국·일본에 이은 한국의 제3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교역 품목의 구조는 전형적인 산업간 분업형태를 보인다. 즉 대중국 수출은 중화학 공업제품이 중심이 되어 있어 철강·금속제품, 기계류 및 운반용 기계, 섬유, 화공제품 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입은 농수산물, 섬유류, 광산물 등의 품목이 대종을 이룬다.

정식수교와 한국의 산업구조조정(産業構造調整)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여 중국이 한국의 2대 투자대상국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1985년 홍콩을 통한 우회적인 투자가 시작된 후 1989년 9건, 1990년 35건에서 1991년 107건으로 급속히 늘었고, 1993년에는 630건 5억 7,030만 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3년까지의 직접투자 누계는 1,043건 10억 430만 달러에 달하였다. 1998년에는 191건 1억 1100만 달러로 줄었으나 2000년에는 415건 2억 3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수교 후 초기에는 투자 대상지역이 보하이만[渤海灣] 주변과 둥베이3성(東北三省)에 편중되었으나 최근에는 상하이·장쑤성[江蘇省]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교역 확대를 위해 중국의 공업화에 소요되는 자본재의 확대와 소비변화에 부응하는 시장개척을 중시하고 있으며, 경쟁력이 약화된 업종의 투자를 조장하고 중국의 전략육성산업이면서 협력 가능성이 높은 항공기, 자동차, 전자교환기(TDX), 원자력발전 등을 우선 협력분야로 선정하여 산업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과는 1970년대까지 줄곧 밀접한 관계와 지원을 해왔다. 그러나 1978년 이후 개혁·개방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로 북한과도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까지도 북한과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1989년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고 장쩌민 총서기가 1990년 3월 평양을 방문해 한국과의 경제적 교류로 소원해진 관계를 재차 긴밀한 관계로 바꾸려고 하였다. 그러나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하면서 급속도로 관계가 소원해져 1993년 3월 예정되어 있던 김정일(金正日)의 중국 방문이 취소되었다. 1992년 12월 중국이 북한에 대해 경화결제(硬貨決濟) 요구에 따라 더욱 그 관계가 냉각되었지만 북한 핵문제와 경제난이 가중되어 북한이 중국에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관계개선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7월 북한의 ‘승전 40주년’ 행사에 중국 대표단이 방북하였고 중국의 경제인들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 중국이 북한의 최대 교역국으로 올라서게 되는 등 여전히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크다. 1996년 8월 북경에서 한중 어업협정 체결을 위한 실무회담을 개최하였다. 2000년 현재 한국은 일본·미국·홍콩에 이어 중국의 4번째 교역국으로, 대한(對韓) 수입은 186억 1000만 달러, 수출은 128억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화학공업제품, 섬유, 전자 및 기기, 철강, 금속제품 등의 공업용 원부자재 등이고 주요 수출품은 철강, 금속, 섬유, 전자 및 기기, 농림수산품 등이다.

 

윗글 내용출처 :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A&qnum=488562

 

****** 중국 & 한국 관계 3 ********

 

안녕하세요? 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어떤 관점으로 말씀해 드려야 할지 고민되는 군요.

우선, 지리적 관계로 보면 중국과 한국은 국경이 인접해 있는 가까운 나라이지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중국과 한국은 많은 교류가 있었으면 향유하는 문화 또한 비슷했지요..

하지만 전에는 중국은 강국이고 한국은 약소국이니 일종의 군신관계를 맺어 중국을

숭상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 입니다.

또한 같은 동북아시아에 위치하며 기상상태가 우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거대한 국토를 가지므로 크게 동쪽과 서쪽의 기후는 상이하게 다릅니다.

동부는 대륙성 기후를 서부는 해양성 기후를 나타내지요...

지리적 관계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다음으로 경제적 관계에서 살펴 볼까요~~

경제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밀접합니다. 무역의 상당부분을 중국과의 교역으로

충당하고 있으니 중국이란 나라는 우리에게 경제적 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요...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한국의 경제를 따라 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현지에 회사를 건립하고 있으며, 서로 공동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직 공산주의의 체제에서 벗어난지가 10여년 남짓이지만 경제적 향상은 요즘처럼

세계가 불황상태에 빠져 있는 때에도 매년 경제 향상을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회 문화적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의 문화와 한국의 문화가 서로 동화되고 비슷해 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류 열풍' 이란 단어를 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요...

그것이 바로 중국과 한국의 문화 관계를 말해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고 협동하는 공생의 관계라 할수 있겠지요...

이상으로 답변 내용을 마치며 즐건 하루 되세요~^^

  김승진 님의 글입니다.

 

 

윗글 내용출처 :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LAG&qnum=5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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