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에 대해

임오군란에 대해

작성일 2017.04.1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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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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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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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연체된 봉급에 대해 정부가 불량쌀을 지급해 일어난 난이다.[1] 10년 전 실각했던 흥선대원군과 척화파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중전과 외척 민씨 제거 및 비리 척결, 그리고 일본과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시켰고, 전임 선혜청 당상 김보현, 당시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 선혜청 창고지기인 민겸호 수하의 착복 비리와 부정 축재 사실까지 드러나며 관련자들이 살해됐다. 성공하는 듯했던 난은, 중전 민씨를 놓친 데다가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군이 개입하며 진압됐다. 흥선대원군은 톈진으로 끌려가고 척화파들은 제거됐으며, 청나라와 결탁한 중전 민씨가 충주에서 환궁하면서 민씨 외척들이 조정을 완전 장악했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들도 조정의 중책을 맡게 됐으며, 난의 진압을 축하하기 위해 과거 시험이 열리며 이완용서재필 등이 출사하는 계기가 됐다.

배경[편집]

1873년 탄핵 등으로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점점 증가하는 서구 세력의 위협으로 백성들의 민심은 아직 쇄국에 머물러 있었고 흥선대원군 역시 최익현 등 척화파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계 문제가 대두돼 다시금 척화파들이 여론을 등에 업으려던 찰나,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됐다.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는 관직에서 밀려나고 투옥되는 등, 고종 부부 측의 척족(戚族)(=성이 다른 일가)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온건개화파=시무개화파), 개화파(급진개화파=변법개화파)가 정치 전면에 나섰다. 민씨 정권은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양 열강과의 불평등 통상조약을 연이어 맺었는데, 이는 척화파는 물론 민심의 반동을 불렀다. 삼정의 문란 때문에 가뜩이나 위태로운 조선에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증폭됐고, 흥선대원군 등 척화파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해 이재선 역모사건을 기도하는 등 끊임없이 정권 재창출을 노렸다.

민씨 정권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자기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내외로 자기 척족들과 개화파 관료들을 대거 기용하는 한편,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총책임자는 민영환의 부친, 민겸호 대감이었다. 1882년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 5영을 무위영장어영 2영으로 축소하면서 대량 해고 시키고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민씨 척족들의 사병과 다름없는 별기군과 달리 차별했다. 훈련도감 출신 구식 군인들은 당시 일본군을 모델로 신설된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낮춰 부르며 증오했는데 특히 봉급 연체를 초래한 정부 재정 위기의 원인이 민씨들의 탐욕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와 선혜청 전임 당상이자 전 호조판서 김보현(당시 경기 관찰사)이 원흉으로 지목됐다.

경과[편집]

7월 19일[편집]

7월 19일(음력 6월 5일), 전라도에서 세곡(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선이 쌀을 싣고 도착했다. 대동법 실시 이후 정부 예산을 집행해온 선혜청은 도봉소(都捧所)에서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밀린 봉급 중 1개월분의 급료만 우선 지불했다. 그나마도 와 모래를 섞어 정량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음이 드러나자 병졸들이 동요했다. 정당한 그들의 항의에 지급 담당관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만 믿고 적반하장 식의 강압적으로 나오자, 격분한 병졸들이 마침내 소요를 일으켰다. 옛 훈련도감 포수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을 필두로 한 군병들은 선혜청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른바 도봉소 사건(都捧所事件)이었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곧 체포령을 내려 김춘영·유복만 등 주동자 네다섯을 포도청에 넘겼다. 그들은 혹독한 문초를 당했고 그 중 둘은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졌다.[2] 소요에 가담했던 군병들은 김장손(金長孫)·유춘만(柳春萬 : 유복만의 동생)을 중심으로 투옥자 구명을 위한 통문을 작성했다.

7월 23일[편집]

7월 22일(음력 6월 8일), 흥인군 이최응이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해 소요를 초기에 진압하도록 고종에게 주청했다. 이를 알게 된 가담자들은 더욱 격분했으나 일단 이튿날 김장손과 유춘만이 자신들의 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집으로 가 작성한 통문을 보이고 억울한 사정과 단호한 조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경하는 달랑 직필 서신 한 통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가라며 발을 뺐다. 할수없이 민겸호의 자택으로 향한 그들은 다짜고짜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했으나 민겸호는 부재중이었고 대신 가재도구를 죄 때려부쉈다.[3][4] 이판사판이 된 그들은 우선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민씨들에게 밀려 10년 가까이 실각했던 흥선대원군에게 이는 재집권의 좋은 기회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밀린 봉급의 완전 지급을 약속하며 일단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그들을 대기토록 하고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불러 심복 허욱(許煜)과 긴밀히 협력토록 했다.

뒷배를 얻은 병졸들은 곧 조직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일부는 동별영(東別營)의 무기고를 약탈하고 포도청을 파옥해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하는 한편, 일부는 의금부를 습격해 척사론자(斥邪論者)인 백낙관(白樂寬) 등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또 일부는 전직 선혜청 당상 김보현이 관찰사로 있던 경기감영에 쳐들어 갔고 나머지는 강화유수(江華留守) 민태호를 비롯한 외척 수구당들의 집을 습격했다.

작은 배로 탈출한 일본 공사관원

대원군은 민심을 얻기 위해 일개 해직자 소요를 위정척사 운동으로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날 저녁 대원군의 수하들과 병졸들이 일본 공사관을 포위·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 공관원 전원은 제물포 항으로 도피했고 공사관은 불탔다. 민씨 척족의 사병과 다름없던 별기군과 충돌한 그들은 곧 별기군마저 제압하고 별기군 병영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 소위를 비롯 일본인 열 세 명을 살해하는 등 정변을 조직적으로 전개시켰다.

7월 24일[편집]

7월 24일(음력 6월 10일) 흥선대원군의 명이 떨어졌다. 이에 병졸들은 돈녕부 영사 흥인군 이최응과 호군(護軍) 민창식(閔昌植)을 살해한 후, 중전 민씨 제거를 위해 창덕궁 궐내로 난입했다. 궁녀복으로 변복한 중전 민씨는 일단 궐 뒷문으로 나가 무예별감 홍계훈에게 업혀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대신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이 궐에서 발각돼, 심하게 구타를 당한 끝에 중희당(重熙堂) 아래서 살해됐다.

처음엔 단순 해직자 소요에 지나지 않던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무위대장 이경하가 직접 동별영에 가 부하들을 진정시켜 보려했지만 허사였다. 뒤늦게 조정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미 죽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 및 도봉소 당상 심순택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 신정희(申正熙)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을 임명했다. 한편 개화당이자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 정변을 알렸으나, 이미 일본 공관원 전원은 제물포로 피했다.

고종은 대원군의 복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부대부인(府大夫人,고종의 모친) 민씨와 장남 이재면을 데리고 입궐했다. 훈련도감 출신 난 가담자 200 명이 대원군을 호위했다. 다시 조정을 장악한 대원군은 고종에게 자책교지(自責敎旨)를 반포시켜 군란을 정당화하고, 5영의 복구와 통리기무아문의 폐지, 그리고 삼군부 설치를 발표했다. 이재면에게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케 해 밀린 봉급의 지급은 물론 군사와 예산을 장악하려한 대원군은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의 민씨 척족들을 파직하고 척화파를 임명했다.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난 가담자들에게 해산을 명하는 한편, 대대적인 사면령도 내렸다. 그럼에도 난 가담자 중 일부가 중전 민씨 처단까지 해산을 거부하자 대원군은 중전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국모 상(喪)을 공포해 해산을 관철했다.

청과 일본의 개입[편집]

청나라 제독 정여창

7월 24일(음력 6월 10일) 민씨 외척들은 당시 영선사로 청나라에 체류 중이던 김윤식어윤중 등에게 급보를 보내 청에 원조를 요청했다(요청을 수신한 것은 8월 2일/음력 6월 19일)

8월 1일 (음력 6월 18일) 주일 청국 공사 여서창이 '일본 병선이 조선으로 가니 중국 병선을 앞서 파견해야 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타전함에 따라 이튿날 북양대신 이홍장의 직무대리 장수성이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출동을 명령했다.

8월 7일 (음력 6월 24일) 북양대신 직무대리 장수성(중국어 정체: 张树声병음: Zhang Shusheng,1824-1884)[5][6][7]은 오장경에게 덩저우의 회군(의용군) 3천 명을 조선에 파병토록 지시했다.

8월 10일(음력 6월 27일정여창의 함선 3척과 병력 4~500 명, 그리고 이홍장의 사신으로 마건충이 1차로 제물포에 도착했으며, 같은 날 이홍장의 참모 설목상이 제안하고 장수성, 그리고 영선사 김윤식의 찬성으로 흥선대원군 납치안이 답변확정됐다.

8월 12일(음력 6월 29일) 일본군 대대 병력 300 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약 20일 전, 공관을 미리 탈출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 및 공사관원들은 즉시 정변을 본국에 타전했었고 이에 일본이 파병한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였다. 그러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10배에 달하는 병력 차이로 인해 적극적으로 자국민 보호나 난 진압 과정에 제 역할을 못했다.

8월 13일 (음력 6월 30일) 현실을 인지한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대원군의 쿠데타 정권을 인정하는 비밀 훈령을 작성했다.

8월 18일 (음력 7월 5일) 하나부사 공사에게 훈령이 도착했다.

8월 20일(음력 7월 7일) 회군 대장 오장경이 정여창의 배를 타고 영선사 김윤식을 대동해 회군 3천 명으로 남양만(현 경기도 화성시)에 상륙했다.

8월 25일(음력 7월 12일한양에 입성한 오장경은 흥선대원군을 초청해 불러놓고는 억류시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톈진으로 배에 태워 보냈다.

8월 29일(음력 7월 16일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던 난 가담자들은 청국군의 공격을 받아 170여 명이 체포되고 11명이 사형됐다.

8월 30일(음력 7월 17일) 조선 정부와 일본 제국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결과 및 평가[편집]

일개 군 해직자 소요 사건으로 시작돼 척화파 쿠데타로 발전한 이 사건의 결과, 대내적으로는 척화파가 완전히 물러나고 다수파이자 외척인 온건개화파(수구당)가 정권을 잡아 청나라 양무 운동 모델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됐으며 소수 급진개화파(개화당)들이 근대화에 채찍을 가하는 형태가 됐다. 이는 또다른 불씨를 낳게 돼 결국 갑신정변으로 이어졌고 정변 실패 후 민씨 척족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해 궁궐은 수구파 일색이 된다. 별기군은 해체된 채 개화파들의 주청으로 병조 산하에 훈련원을 둬 다시 신식 군대를 양성하려 했으나, 故 민겸호의 아들인 민영환을 위시한 민씨 외척들은 1884년 해방영(海防營)[8]을 통해 다시 군권을 장악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청과 결탁한 민씨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더욱 청에 의존하면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됐다. 청나라는 원세개의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키고 군사 고문을 보내 조선 군대를 감시하고, 마건상(馬建常,마젠창)과 묄렌도르프를 내정 및 재정 고문으로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섭했다. 특히 청나라 조정의 사주를 받은 묄렌도르프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시켜 조선 경제를 교란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로 청국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청의 북양 대신과 조선 국왕을 동격으로 놓는 등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문화했다. 거기에 영약삼단(另約三端)이란 족쇄를 조선 조정에 채워 마음대로 외교 활동도 할 수 없게 했다. 영약 삼단의 내용은 이렇다.
①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한다.
③ 조선 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그렇다고 일본을 몰아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8월 30일 (음력 7월 17일) 임오군란 때 일본인 사상자 및 공사관 등 일본 재산에 대한 손해배상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이 체결돼 조선 반도는 청일 양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민겸호와 김보현 피살 당시 일화[편집]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9] 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소리치는 등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됐다.[9][10]

임오군란이 터지자 김보현은 경기 감영에 있다가 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예궐을 서둘러 승정원에 들렸다.[11] 조카 김영덕이 승지로 입직하던 중이었는데 가지 못하게 말렸다.[11]

오늘의 사변을 알지 못하고 들어가시렵니까?[11]

그러자 김보현은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나오면서 말했다.[11]

내가 재상의 위치를 갖추었고 또 직책까지 맡고 있는데, 국가에 변이 생기면 비록 죽는다고 해서 회피하면 되겠느냐?[11]

그런 뒤 입궐하려다가 돌층계에서 맞아 죽었다.[11] 흥선대원군을 보자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를 외면했다. 입궐 직전 김보현은 당일부로 경기도관찰사에서 해임돼 명예직인 지중추부사로 전임됐던 차였다.

민겸호의 사체는 원한에 찬 난병들에 의해 총칼로 다시금 난도질 당했다.[9] 그들은 김보현 역시 박살하고, 시체를 발로 차며 입을 찢어 엽전을 집어넣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마구 쑤셔 넣는데, 돈이 가슴으로 튀어나왔을 정도였다 한다.[11] 그의 시체는 민겸호의 시체와 함께 한성부 궁궐 개천에 버려졌다.[11] 그때 큰 비가 내려서 물에 개천이 가득찼으며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11] 매천 황현에 의하면 '이런 시기에 시체가 개천에 수일 동안 버려져 살이 물에 불어 허옇게 흐물거렸는데, 마치 고기를 썰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고 한다.[11] 삼정의 문란의 근본 원인들이었던 이들의 죽음을 놓고 백성들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말로라며 조롱했고 어린아이들조차 시신들을 쳐다보며 비웃었다고 황현은 기록했다.

새로운 해석[편집]

2006년 7월 1일, 명성황후(대한 제국 건국 전이므로 아직 중전 민씨)의 피난 행적이 적힌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가 발견됐다. 당시 중전 민씨를 호종한 누군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일기에는 1882년 7월 27일(음력 6월 13일)부터 1882년 9월 12일(음력 8월 1일)까지 51일간 일행의 숙소와 일정, 중전의 건강 상태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청나라군이 서울에 입성한 8월 29일(음력 7월 16일)의 기록에는 '명성황후가 사람을 시켜 경성에 붙은 방문을 베껴오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중전 민씨가 직접 청의 개입을 유도했다는 기존의 학설에 반례가 될 수 있다. 음력 7월 26일 일기에는“중궁전하(명성황후)를 위한 탄원서를 청국 오장경 제독에게 전했는데, 곧 받들어 모셔오라는 희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중전 민씨의 환궁은 오장경과 연락이 된 후 였음을 알게 한다.[12]

현재 이 자료는 대전광역시 한밭도서관 대전광역시향토사료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2008년 12월 2일 은진 송씨 제월당가 기탁유물 특별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민간에 공개됐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98%A4%EA%B5%B0%EB%9E%80


임오군란

최근 수정 시각: 2017-04-19 22:06:15+0900


壬午軍亂

1. 개요2. 군란 이전의 상황
2.1. 쌀의 전쟁
3. 군란(軍亂)의 격화4. 궁궐 기습 및 민 왕후의 피신5. 대원군의 섭정과 청군 파병6. 사건의 결말7. 트리비아
7.1. 대원군은 언제부터 개입했는가?7.2. 누가 청군을 불렀는가? - 왕후는 아니다
8. 참고






1. 개요[편집]

한반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살고 있는 궁궐이 백성들에게 직접 습격당한 사례[1]

1882년(고종 19년) 음력 6월 별기군(일본식 신식군대)과의 차별대우에 항의하여 구식군대가 조선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군란(軍亂)을 일으킨 사건. 조선판 방산비리열정페이가 국가 단위로 발생된 최악의 사례.

이후 전개 되는 역사가 매우 스펙타클해서 중요도가 경시되지만조선 왕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시발점이라 볼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2. 군란 이전의 상황[편집]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강화도 조약을 맺은 조선왕조는 이후로 미국대영제국프랑스독일제국이탈리아 왕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과 각각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급진적 성향의 개화파와 보수적인 위정척사파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이에 맞춰서 조선왕조는 일본의 후원하에 '별기군(別技軍)'이라 불리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여 일본인 교관(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과 조교의 지도하에 훈련을 실시했다. 그로 인해 흥선 대원군 시절까지 우대를 받아왔던 구식계통 군인들은 오히려 별기군에 밀려서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급료 지급이나 혜택 등도 원활하지 못하는 등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나마 훈련도감을 비롯하여 특정 군영에 소속된 구식군인(무위영과 장어영의 군사)들은 별기군만큼 후한 대우는 받지 못해도 꼬박꼬박 급료를 지불하여 불만이 심하지 않았지만 어느 군영에도 소속되지 못한 잉여 군인들은 그야말로 방치되고 만다. 이에 그 배후로 일본의 후원을 등에 업은 별기군과 그들을 적극적으로 우대하는 조정에 대해 증오감을 품게 된다.

2.1. 쌀의 전쟁[편집]

때마침 1882년 선혜청[2](宣惠廳)에서 전라도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하게 되어서 음력 6월 5일 구식계통 군인들에게 분배해주고 밀렸던 늠료(급료)도 지급하게 되었는데, 이 조미(漕米)가 선혜청 관리들간의 농간으로 인해 불씨가 되었다.

이유인즉 그 조미에는 식용 쌀이 아닌 겨와 모래가 섞여 있고[3] 양도 기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자, 구식 군인들은 집단으로 조미 수령을 거부한 뒤 선혜청으로 가서 불만을 따졌다. 여기에 지급 담당자가 병조판서이자 선혜청 당상(堂上)인 민겸호의 직계하인으로 알려졌고 이 하인이 군인들에게 자극을 주는 언동까지 하자, 결국에는 군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선혜청 관리들을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사실 사태는 이렇게 악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맨 처음 구식 군인들이 선혜청 관료들을 두들겨 팼단 말을 듣고 음력 6월 9일 고종이 보인 반응이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4]이 아뢰기를,

“추수 후의 농사 형편을 물론 미리 예견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기전(畿甸)은 틀림없이 흉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도하(都下) 백성들의 우환이 실로 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전에는 이러한 때면 매달 양곡을 발매(發賣)하여 기근을 구제하였습니다만, 지금 선혜청(宣惠廳)에 무슨 저축된 곡식이 있습니까? 다만 전날 군자감(軍資監)에서 급료를 내줄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감(都監)의 군졸들이 받은 곡식이 섬이 차지 않는다면서 두 손으로 각각 1섬씩 들고 하는 말이 ‘13개월 동안 급료를 주지 않다가 지금 겨우 한 달분을 분급(分給)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가? [5] ’라고 하면서 해당 고지기를 구타하여 현재 생사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어 대청 위에 돌을 마구 던져 해당 낭관(郞官)이 도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작은 문제이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13개월이나 급료를 내주지 못한 것도 이미 민망스러운 일인데 게다가 섬이 차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도봉소(都捧所)에서 획송(劃送)하면 중간에서 축나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크게 기율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즉시 무위영 대장(武衛營大將)에게 말은 전하여 엄하게 조사한 다음 법률을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군사들의 가슴속에 억울함이 쌓인 데에 연유한 듯합니다.

신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함께 일체(一體)라는 뜻으로 지난날에 진술을 올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위소의 군사가 받는 것은 완전하고 훈련 도감의 군사가 받는 것은 이처럼 완전하지 않았으니, 어찌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탄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10년을 양성하여 하루 동안에 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 사이에 후함과 박함의 차이가 없지 않아 평일에 원망이 쌓였다면 어찌 우려할 바가 없겠습니까?

근래에 전하께서 행차할 때마다 군사들에게 건호궤(乾犒饋)[6]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해영(該營)[7]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주지 못하였으니, 이는 유명무실한 문서일 뿐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먹여줄 것을 바라는 식량은 아홉 말의 쌀에 불과한데 이것조차도 일년이 지나도록 충분히 주지 않아서, 스스로 의식(衣食)을 마련하여 분주히 복역하면서도 감히 군령을 어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기율이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 군졸들이 군령을 어기지 않는 것은 역시 가상한 일이다.”

하였다. 홍순목이 이어서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발하고 상납(上納)을 엄하게 감독하며 반의(班儀)를 신칙(申飭)할 것을 진주(陳奏)하고, 또 증 도승지(贈都承旨) 강항(姜沆)과 증 좌승지(贈左承旨) 권길(權吉)은 충절이 남달리 뛰어나니 모두 순차를 뛰어넘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하며,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의 봉사손(奉祀孫)을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좀 더 쉽게 풀어보자면...

홍순목: 올해는 흉년인데, 나라 곳간도 다 비었어요. 당장 어제만 해도 군인들이 월급 때문에 고지기를 두들겨 팼답니다.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렸고 1개월치 월급을 줬는데 그 양조차도 개판이랍니다. 

고종: 월급 13개월을 안준것도 쪽팔린 일인데 그나마 준 한달치도 제대로 못 주었다니 이게 말이 되냐? 

홍순목: 산지에서 쌀을 수송하다보면 상하는 것은 흔한 일이래요. 다만 심각한 사안이라 엄중히 조사 시켰습니다. 근데 진짜 원인은 그게 아니고, 차별대우 때문인 것 같아요. 무위소 군인들은 제대로 받으면서 훈련도감 군인들은 제대로 받지를 못했으니 똑같이 하루를 위해 10년 훈련하는 애들 입장에서 열 안 뻗치면 그게 더 이상하죠. 월급 1년이나 넘게 안 받고 스스로 의식 해결하면서 군령을 안 어겼으니 오히려 군기가 제대로 잡혀있습니다.

고종: 그러게나 말이야. (그동안 반란 안 일으킨게 신기하구만.)


그런데 이후 별다른 조치가 없었거나, 아니면 전달 되지 않은 것 같다(!). 선혜청 제조 민겸호가 고종의 말을 처듣지 않고 주동자들을 구속해버리면서 사건이 커져 버렸다.(...) 다만 이 대목에서도 위에서 "해당 군영(해영/該營)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주지 못하였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줄 쌀이 없었을 수가 있다! 심지어는 이 대목이 사건이 터진 이후 민망하니까 변명으로 붙여둔 기록이란 시각까지 있다. 

3. 군란(軍亂)의 격화[편집]

폭행사건을 일으킨 군인들은 잡혀가서 뭇매질을 당하게 됐는데, 그들이 사형을 당한다거나 흥선 대원군의 형인 이최응이 고종에게 군란(軍亂) 진압을 요청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투옥된 군인들이 모두 죽을 것이란 소문에 구식 군인들은 폭발했다.

이에 구식계통 군인들과 이에 동조한 시민들은 마침내 민겸호의 자택을 습격하고 운현궁에 있는 흥선 대원군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흥선 대원군은 사태를 휘어잡기 위해 성난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했고, 그의 심복 허욱(許煜)을 군인으로 변장시켜 비밀리에 구식 군인들의 지휘를 맡게 하였다.

음력 6월 9일, 허욱의 지휘하에 구식 군인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여 포도청과 관가를 습격하여 위정척사파 및 흥선 대원군 지지파 인물들을 석방시키고 일부는 중전 민씨(명성황후)의 오빠인 민겸호, 민태호 등 민씨 일가 친척과 개화파 인물 자택을 습격/파괴하였다. 하루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이들은 경기감영을 장악하여 감영의 무기고를 부순 후, 일반 백성들까지 무장시키고 개화파 인물에 이어 원흉과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주(駐) 조선 일본 공사관과 하도감까지 습격하여 별기군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소위를 비롯한 별기군 조교들을 습격 살해하고, 별기군 부대까지 급습하여 별기군 일부를 살해하는 등[8]으로 사태가 끝나는 듯 싶었다.

4. 궁궐 기습 및 민 왕후의 피신[편집]

구식군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날인 6월 10일, 대원군의 지원하에 폭동을 일으킨 군민들과도 합세하였다. 이들은 우선 대원군의 형이었지만 고종과 민 왕후를 지지하였던 전 영의정 흥인군 이최응과 민창식의 집을 습격해 현장에서 이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단숨에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이닥쳤으며 막아서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궁성으로 들어선 군인들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으며 민겸호[9]와 김보현을 붙잡아 살해하고 중전 민씨를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 때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궁녀옷을 입고 궁녀로 변장하여 궁궐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구식 군인과 마주치게 되어서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무예별감으로 있던 홍계훈이 자신의 누이동생 홍 상궁이라고 속이면서 그의 도움으로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충주목사 민응식의 자택으로 피신하였다.

5. 대원군의 섭정과 청군 파병[편집]

사태를 겪게 된 고종은 사태 진화를 위해 결국 흥선 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구식 군대의 호위하에 부대부인 민씨, 장남 이재면과 함께 입궐하게 되었으며 고종은 대원군의 장남이자 형인 이재면을 무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원군을 섭정시키게 됨으로서 다시 흥선대원군의 섭정 통치가 시작되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섭정 통치를 하면서 왕후 민씨 지지자들을 모두 귀양보내거나 처벌을 시키고 구식군대에 대한 우대를 강화하기로 하였으며 이전에 자신을 지지했던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여 조정 관료로 격상시키는 등 고종이 시행했던 부분을 전면 개정하게 되었다. 영의정 홍순목은 원래부터 대원군의 핵심 인사였으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부 구식 군인들이 왕후의 시신을 공개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자 대원군은 왕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왕후에 대한 국상(國喪)을 선포하였다.

6. 사건의 결말[편집]

이후 청나라는 자국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 대원군이 청군의 군영을 방문한 틈을 타서 그를 텐진(天津)으로 납치 감금함에 따라 섭정 통치는 끝나게 되었고 명성황후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을 납치한 3일 뒤인 음력7월16일, 청군은 또한 구식 군인들이 많이 사는 왕십리와 이태원을 습격하여 170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참수하였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자국 공사관과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된 일본은 조선에 즉각적인 배상책임과 보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피해를 보상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있는 자국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켜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임오군란은 구식군대의 반란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 끝은 결국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국제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일수호조규 속약, 제물포 조약 등 청과 일본의 이중 외압의 심화를 불러왔으므로 본격적인 조선의 식민지화의 시작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대 백성 사과문[10]과 함께 개화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 사건을 끝으로 기존의 개화 반대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유림들은 이후 대세를 바꿀수는 없다고 느꼈는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고종도 유림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문묘 종사를 받아들여 김집조헌 등이 문묘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조선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7. 트리비아[편집]

7.1. 대원군은 언제부터 개입했는가?[편집]

사건의 전개 및 수습과정에서 흥선 대원군의 행보에 대해 의혹이 있다. 우선 구식 군대 장병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 자체는 봉급 문제와 민겸호 등의 잘못된 일처리에서 나온 것이므로 대원군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대원군이 사건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가 다소 의심스럽다. 대원군의 정계 복귀는 봉기를 일으킨 군민들이 대원군을 찾아가서 일을 처리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대원군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이 때 군민들이 '그래도 왕실의 큰어른이니 일을 해결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에 먼저 자발적으로 대원군을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마침 기회를 잡으려던 대원군이 먼저 사람을 보내서 자신에게 오게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7.2. 누가 청군을 불렀는가? - 왕후는 아니다[편집]

군란의 과정에서 민 왕후가 은신처를 제공한 윤태준을 통해 고종에게 밀서를 넣어 청에 군대를 파병해줄 것을 요청해서 대원군이 청으로 끌려갔고, 이 때문에 조선에 외국군대가 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교과서를 포함해 공식 정설로 박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2006년 발견된 임오유월일기이다. 이 일기는 음력 6월 10일 궁에서 탈출한 이후 6월 13일부터 환궁하기 직전인 8월 1일까지의 날씨와 동정, 주변 인물들의 행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2달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동안 정신없는 루트로 이동하였다.

창덕궁 → 서울 종로구 관훈동 → 경기도 광주부 적취리[11] → 광주부 조현리(새오개)[12] → 경기도 이천군 이천읍 → 경기도 여주군 단현리 → 충청도 충주진영 음성현 감곡면(장호원)[13] → 충청도 충주진영 노은면[14] → 충청도 음성현 감곡면 →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15] → 충청도 음성현 감곡면 → 경기도 안성군 → 경기도 용인현 양지면 → 경기도 용인현 용인읍 → 경기도 용인현 포곡읍 신원리 → 창덕궁 환궁


왕후가 대원군의 나포를 알게 된 것은 청의 포고문을 본 다음이다. 더구나 경기 감영에 자신의 생존을 알린 것이 음력 7월 4일, 한양의 상황을 알아 보게 사람을 보낸 것이 7월 15일인데 흥선대원군이 청군에 억류된 것이 7월 13일, 끌려 간 것이 7월 15일이다. 홍계훈은 충주진영까지 동행하여 양주 군수에 입명되었으며, 여비 500궤미를 내놓은 조충희는 전라남도 영광군수에 임명되었다. 서울과 충주를 계속 왕래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북청 물장수(보부상) 이용익이 바로 이때의 공로로 천거 된 인물. 

흔히 청군에 파병을 요청한 날짜로 언급되는 음력 6월 19일과 청군이 도착한 6월 27일,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한 6월 29일의 기간동안에는 공식적으로 왕후는 죽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즉, 왕비는 청군을 부르긴 커녕 자신이 대원군에 의해 국장이 선포되어 죽은 사람이었다는 사실 조차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청군은 왕후 민씨, 혹은 민씨 일파가 요청하여 파견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당장 박시백 화백은 자신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떠한 통보도 없이 영선사 김윤식만이 중차대한 파병을 홀로 요청할 수 있는가?"하면서 민씨와의 소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쫓겨다니며 한성의 정보를 알아보기에도 급급했던 민씨가 김윤식과 소통이 가능했다는 것은 희박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고종이야말로 청에 밀서를 보낼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닌가. 실질적으로 청에 파병을 요청한 주도자로 그나마 가장 유력한 후보는 고종이다. [16]

무엇보다 파병을 부탁한 김윤식과 어윤중은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이미 영선사로 청에 체류중이었다.[17] 이들이 체류 중에 임오군란의 발발을 전해듣고는 청군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이들이 온건개화파이자 친청파로 꼽히는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확실한 왕비의 측근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근왕파였다. 

김윤식이 근왕의 목적으로 청에 파병을 청한 것은 확실하다. 그는 대원군의 위험성과 함께 난당(亂黨, 주동자)의 소탕,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에 청국이 조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청국정부는 김윤식의 의견에 따라 조선을 간접 지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고 오장경(吳長慶)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곧 출동하게 하였다.

8. 참고[편집]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 8권부터 임오군란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오니 참조하면 좋다. 그리고 이 작품을 드라마화 한 장사의 신 - 객주 2015과 명성황후(드라마)도 임오군란에 대한 묘사를 적절히 하고 있다.

쌀 섞임을 당했습니다. 첫 댓글의 중요성

[1]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이 불탄 것은 그 주체가 한양 백성들인지, 왜군인지 논란이 있어 일단 배제한다. 더구나 선조와 만조백관이속이 모두 도망가 텅빈 궁성이었다.[2] 조선왕조 때 대동법 시행에 따라 쌀, 포(布), 전(錢) 등을 출납했던 관청.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3] 당시 민씨척족은 조창과 경창을 장악해서 막대한 양의 쌀을 빼돌렸다. 지방에서 수도로 쌀을 올릴 때 쌀은 빼돌리고 대신 겨와 모래를 채워 수량만 맞춘 것이다. 이 방법을 화식이라 한다.[4] 2년 후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 개화파 홍영식의 아버지로 갑신정변에 죄책감을 느끼고 음독자살한다.[5] 13개월이나 급료를 안줬으면 구식군인들이 어떻게 생활을 유지할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을수 있는데, 당시 구식군인들은 평소에는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한달에 며칠정도 근무하는 시스템이었으며 따라서 급료의 지불여부에 생계가 달려있지는 않았다.[6]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일을 호궤(犒饋)라고 한다. 건호궤란 음식대신 돈을 주어 위로하는 일을 뜻한다.[7] 군졸들이 소속된 해당 병영[8] 일본 공사관 직원 세 명이 이들에게 살해되었고,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는 기밀 문서를 소각하고 남은 직원들과 도망갔다.[9] 민영환의 아버지로 내시로 위장하고 궁궐에서 튈려고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은 까닭에(...) (수염을 깎는 대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녔다고 한다.(...)) 그의 최후 때 궁궐에서 쫓기다가 대원군이 입궁하는 걸 보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대원군은 나같은 늙은이를 우습게 보던 분이 이제와서 그 늙은이에게 목숨을 구걸하냐며 냉소를 비쳤다. 사실 위에서 보듯 군란을 일으키게 한 원흉인 만큼 죽을만 하긴 하다.[10] 조선왕조 사상 가장 절절한 대백성 사과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드물게 한페이지를 가득 체워 수록했다.[11] 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노상동과 적취리가 합쳐져서 상적동이 되었다.[12]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새오개[13] 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성당 부근. 감곡성당은 군란 14년 뒤인 1896년 조선 땅에서 18번째, 충북에서 최초로 생긴 성당이다. 당시에는 현재 이천시에 있는 장호원까지 모두 충주에 속했다.[14] 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15] 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근군과 지평현이 합쳐져서 생긴게 양평군이고, 상동면은 양동면으로 개칭되었다.[16] 하지만 이 가설 역시 물증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원군이 그렇게 놀고 있을리도 없고...[17] 민씨 일파가 임오군란의 발발을 청에 있는 김윤식 등에게 전해서 파병을 요청하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 단계까지 나가면 그냥 소설일 뿐이다.
https://namu.wiki/w/%EC%9E%84%EC%98%A4%EA%B5%B0%EB%9E%80

임오군란에 대해 알려주세요

임오군란에 대해 자세히, 최대한 자세히 알려주세요! 부탁드려요 급합니다! 임오군란(임오년에 일어난 군인들의 난) 배경 1. 5군영이 2영으로 축소되어 직업군인의 생계가...

임오군란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국내, 국외의 정세변화에 대해 상세하게,자세히 알려주세요~ 급하거든요ㅠ_ㅠ 내공 걸어요! 1. 본문에 앞서 1880년(庚辰 고종 17) 8월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임오군란에 대해 질문!

안녕하세요, 올해 고2 되는 학생인데 임오군란에 대해 배우다가 궁금한 게 생겨서요 .. 1.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가 분열했다고 배웠는데, 임오군란은 군인들의 항거잖아요?...

별기군과 임오군란에 대해 알려주세요...

... 6학년이랍니다.' 별기군과 임오군란에 대해 알아오라는 착한 선생님의 명령을 받았거든요.. 좀 알려주세요..ㅜㅠ 어려운건 아니고요...6월11일 까지요..제발요.....

임오군란에 대해..(오늘까지) 8282!~

임오군란의 원인, 과정, 결과, 주요인물 써주세요 내용 충실하게요!!! 제발 부탁드려용... 임오군란 1. 임오군란의 배경 -일본에 의해 개화청책을 실실하게 된다. -별기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