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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전 이란-이라크 전쟁

작성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2024-05-18 16:12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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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전 이란-이라크 전쟁 

강대국들이 마음대로 자로 그어 논 국경선은 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1979년 이란혁명이 일어난다. 이란혁명은 자원민족주의로 인한 1973년 제1차 오일쇼크와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를 가져오면서 중동지역에 파장을 끼친다. 이란혁명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슬람 근본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냉전체제에서 벗어나 아랍 본연의 모습을 찾고자 했다. 이란혁명을 친미에서 반미로 돌아섰고 종교적으로는 세속주의에서 근본주의로 회귀한다. 이란 혁명은 1979년 중동의 질서를 뒤흔든 사건이 되었다.

 

복잡한 이라크 속사정

이라크는 1930년대 영국에서 독립해 이라크 왕정을 세운다. 독립 후에도 왕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라크 군부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면서 젊은 장교들은 범아랍민족주의 운동을 한다. 아랍이 뒤처지고 제국주의에 휘둘리는 것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랍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뭉쳐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7년 범아랍민족주의의 운동의 여파로 바트주의가 조직화된다. 시리아, 이라크 바트당이 창당된다. 바트는 부흥, 르네상스라는 뜻이다.

 

1958년대 압둘카림 카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전복시킨 후 왕과 왕족을 물론 자신의 측근들까지 잔인하게 살해한다.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도 범아랍주의를 내세워 통합을 주창한다. 1958년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가 아랍연합공화국 결성을 추진한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먼저 아랍연합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라크 바트당은 아랍연합공화국 가입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라크 권력을 쥔 압둘카림 카심은 연합 가입을 반대한다. 카심은 바트주의자가 아니었고 이집트 나세르와 연합은 실속이 없다고 생각해 연합을 거부한다. 오히려 공산당과 결탁을 한다. 

 

바트당의 슬로건은 통일, 자유, 아랍식 사회주의로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특히 중시하는 것은 과거 북아프리카부터 레바논, 아라비아, 이란에 이르는 아랍제국을 통합하고 싶어 했다.  유럽의 파시즘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강조한다. 정치적 폭력의 유효성을 믿고 있었다. 선거를 통한 정권이 아니라 엘리트 장교들의 폭력으로 세워진 정권이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들이 바트당의 신념이었다. 

 

1963년 바트주의를 신봉하는 장교단은 쿠데타를 실행한다. 압둘 살람 아리프가 쿠데타를 주도해서 카심 장군을 살해한다.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성향의 범아랍주의 정파들의 연립정부가 수립된다. 새로 권력을 잡은 아리프 장군은 바트주의자는 너무 과격하다고 하면서 바트당을 숙청한다. 

 

1968년 이라크 바트당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장군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면서 바트당이 집권하게 된다. 쿠데타 과정에서 공을 세운 청년, 사담 후세인을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이 이인자로 임명한다.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 육군사관학교 지원에서 탈락했다. 군 경력은 없었고 군인 출신이 아닌 것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란, 이라크 전쟁 초기(2년) 이라크가 유리했었을 때 스스로 원수 지위에 올라 항상 군복을 입고 군중 앞에 섰다. 내가 입안한 작전마다 성공하고 있다고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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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 초반 작전 입안에 참여는 했지만 다 실패한다. 이란의 반격이 시작되고 이라크 전세가 불리해지자 사담 후세인은 군복을 입지 않는다. 

이때부터 양복을 입고 대중 앞에 섰으며  이라크 곳곳에 걸렸던 군복 입은 후세인 사진, 초상화는 교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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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 어필하고 싶어 훈장을 많이 달고 나온다. 사담 후세인은 자신은 현대판 살라딘이라고 말을 하면서 이라크를 넘어 아랍국가들의 지도자를 꿈꾼다.

※살라딘(살라딘 앗딘 유수프)은 이슬람을 이끌고 십자군을 격파한 영웅이다. 

 

1957년 후세인은 20세 나이로 바트당에 입당했다. 혁명을 주도한 당은 이라크 바트당과 공산당이었는데 권력투쟁 과정에서 공산당의 수뇌부를 암살하기 위해 바트당이 조직을 결성했을 때 사담 후세인이 있었다. 암살대에 가담했다가 암살 작전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망명한다. 1963년 2월 카심 총리를 축출하고 바트당과 연합한 아리프가 정권을 잡은 후 후세인은 이라크로 돌아온다. 

 

귀국 후 존재감은 미미했다. 아랍 바트주의 창시자, 바트당을 창시한 미셸 아플라크가 사담 후세인을 발탁하고 1964년 바트당 이라크지부 서기에 임명한다. 이라크 바트당은 범아랍민족주의 노선을 축구하고 후세인은 통일된 범아랍국의 리더가 되겠다고 꿈을 꾸기 시작한다. 후세인의 롤 모델은 나세르와 히틀러였다. 후세인은 권모술수와 정보를 휘두르는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트당 집권 과정에서 상대 정파에 대한 정치테러를 계획하면서 군부 바트당 권력자들 눈에 들었다. 1968년 쿠데타 후 바트당 혁명위원회 부의장에 임명된다. 정부 각료는 아니지만 알바크르 대통령 집권 이후 정보기관, 비밀경찰을 지휘한다. 갓 30세가 된 사담 후세인은 철저하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한다.

 

 

1979년 후세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당 반대파들을 뽑아 숙청할 수 있었다. 이라크는 시아파 아랍계가 인구의 50%가 넘지만 군부 엘리트들은 수니파 아랍인들이었다. 시아파 아랍계는 군부권력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라크 인구의 약 20% 수니파 아랍인들이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 공포정치가 필요했다. 반란 세력이 어디서 출몰할지 몰라 감시를 지속했고 실제 쿠르드족은 1960년대 분리, 독립을 추진했다. 정보기관을 활용해서 반정부운동을 감시, 차단하면서 반대파들을 숙청해 나간다. 

알바르크 대통령의 총애를 얻으며 후세인은 권력을 쥐게 된다. 후세인은 야심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사람들을 군, 정부 요직에 심어두면서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인력의 핵심은 자신의 고향사람이 많았다.

 

이라크 바트당은 집권 후 이전 범아랍권 통합을 외쳤던것을 버리고 독자적인 이라크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한다. 이라크는 찬란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가 이라크였다. 이라크  남 중부를 중심으로 건설된 바빌로니아제국의 적통이다라는 것을 내세운다. 이슬람 종교를 내세우면 통일될 수 없었다. 이슬람 수니파, 시아파, 기독교 등이 있어 종교는 통일될 수 없고 아랍 민족을 내세우면 쿠르드족이 걸리고 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 찬란한 바빌로니아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라크를 결집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후세인은 이라크 군부독재의 기틀을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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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대통령에 취임한다. 알바크로 대통령은 정권 말기 건강이 좋지 않았다. 후세인은 대통령직 사임을 강요한다. 알바르크 대통령은 건강상 이유로 사임한다. 1979년 사담 후세인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집권하자마자 바트당 반대파 당원 수백 명을 숙청한다. 

이라크 권력은 개인에 집중되어 있고 가문 중심 족벌 체제도 존재했다. 바트당, 군부, 정부, 비밀경찰 등 주요 요직에는 동향 출신 인물로 구성하고 서로 혼인 관계를 맺어 연결되었다. 1980년 대통령 취임 후 1년도 안 되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개인 숭배를 강요한다.

 

이라크 곳곳에 함무라비의 적통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함무라비 국왕으로부터 바빌로니아를 계승 받는 후세인의 모습 초상화를 걸어둔다. 

우상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하심 왕가의 후예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 하심 왕조의 왕묘를 웅장하게 개장한다.  요르단 3대 국왕 후세인 1세를 자신(사담 후세인)의 종형이라고 칭한다.  후세인 1세와 사담 후세인은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바빌로니아 적통 계승자로 자신을 우상화한다. 나중에는 자신을 종교 지도자로 격상시킨다. 

 

이란 이라크 갈등의 시작

후세인 집권 시절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란은 시아파 종주국이다.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이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이란에 동정적인 사람이 많다. 이란에 동정적인 시아파들이 득세한다면 이라크 분열이 우려되기 때문에 후세인은 시아파를 철저히 탄압한다.  이란과 이라크는 민족이 다르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을 계승한 아리아민족이고 이라크는 아랍민족이다. 

 

이란-이라크는 국경문제로 오래된 역사가 있다. 이란 혁명 전 팔라비 왕조 시절 석유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친서방국가여서 서방에서 많은 무기를 들여와서 군사력이 막강했다. 이란 혁명이 일어나서 계속된 시위 투쟁으로 이란 사회가 혼란해진다. 1980년 봄이 되면서 국경에서 분쟁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1975년 이란-이라크 간 국경 분할을 다룬 알제협정은 이란이 국력이 강했을 때 맺은 협정이기 때문에  군사적 열세였던 이라크에게는 불평등한 협정이었다. 

 

후세인이 정권을 잡고 나서 1980년 9월 17일알제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는 이란을 침공한다. 이란 혁명으로 인해 유능한 이란 장교들이 투옥되었기 때문에 이라크는 이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라크는 단기적 군사작전으로 목표를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란은 군사적 혼란을 수습한 후 반격에 나섰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란-이라크 전쟁이 8년간 지속된다. 초기에는 샤트알아랍수로 확보를 위한 영토 확장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가 종교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종교적 기치를 내세운 이란은 우리 시아파가 당하고 있다고 외친다. 이라크 내 시아파가 약 60%였고 시아파, 수니파들의 중동국가들이 이란 -이라크 전쟁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이란은 전쟁을 명분으로 삼아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을 확산시킨다. 하지만 중동에 존재하는 국가들은 왕정국가들이며 혁명을 싫어한다. 시리아를 제외한 중동국가들은 이라크를 지원한다. 

8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국제 사회가 양국에 무기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혁명 이후 반미로 돌아 선 이란에게 반미국가들이 지원한다. 이란을 지원한 중요한 나라는 북한이었다. 전쟁중반 미사일 공습으로 공격이 시작된다.

 

이라크가 이란보다 스커드 미사일 보유량이 많았다. 스커드 미사일이 부족한 이란에게 결정적인 미사일 공급, 개발에 북한이 도움을 준다. 북한은 이집트, 중국의 기술 도움을 받아서 R-17 엘브루스 소련 미사일을 복제 생산해 이란에 약 100발을 공급한다. 이란은 이라크가 쏜 미사일 잔해를 다 수거해서 북한에 주면서 연구하라고 한다. 이때부터 이란이 제공한 부품으로 북한은 탄도미사일을 연구 개발하여 발전시킨다.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란을 지원한다. 

1986년 이란-콘드라사건은 폭로되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레이건 행정부 당시 남미 공작 자금이 필요했던 CIA는 몰래 이란에 무기를 팔아 생긴 수익금으로 남미 친미 성향 니카라과 반란군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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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란 팔라비 왕조시절 이란은 최대 무기 수입국이었다. 팔라비 왕조는 석유로 돈을 벌어 당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 전투기 F-14 톰캣을 수입했을 정도였다. 팔라비 왕은 무기 수입과 비밀경찰을 유지하는 데 주요 지출을 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을 계기로 상황이 반전된다. 이라크가 무기 수입의 큰 손으로 떠오른다. 1980년대 전 세계에서 무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가 된다. 무기 수입 초기에는 주로 소련과 무기를 거래했다. 중동에서 영향력을 키우려고 소련은 무기 판매에 열을 올린다. 초반 이라크는 소련제 무기를 대량 수입한다. 1972년 이라크-소련 우호협력협정을 체결한다. 15년 동안 소련 무기를 수입하며 소련 무기 생산기술 이전을 약속한 협정이었다.

 

소련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다. 정한 날짜에 무기 인도를 하지 않고 핑계를 대기 시작한다. 후세인은 1970년 중반부터 무기 수입국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서방국가에 접근한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브라질, 남아공 등에 접근해서 각종 무기를 수입한다. 

처음에는 지대공 미사일은 소련제 SA-2(S-75 드비나), SA-3 (S-125 네바)를 구입해서 사용해보니 성능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크로탈, 롤랜드 대공미사일을 구입해서 사용한다.

크로탈 R440 개량형 크로탈 NG를 기술제휴해서 개발한 것이 대한민국 천마미사일이다.

 

이라크는 소련 전투기 MIG-25PD,  MIG-21MF, MIG-29A를 보유하고 있고 프랑스 전투기 미라주F-1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공대공미사일 R550매직, 대함미사일 엑조세를 가지고 있고 브라질 보병전투차 EE-9 카스카베우를 가지고 있었다. 155mm 곡사포 오스트리아 GC-45, 남아프리카 공화국 G5를 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무기 보유가 걸프 전쟁 무기 보급과 지원 체계에 대혼란을 초래한다. 북한은 야포, 소화기용 탄약을 이라크에 판매했다. 보병 소화기용 탄약은 거의 30%가 북한제라는 말이 있었다. 이라크 보병용 소화기는 소련, 중국, 북한, 루마니아, 유고, 다양한 국가 제품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라크 주력 전차 소련전차 T-54, T-55를 가지고 있었는데 소련 배송이 느려서 속타고 있던 이라크에게 중국이 손을 내민다. 중국은 T-54, T-55를 중국 59식 전차로 라이선스로 생산하고 있었다. 라이선스생산 초기 중국 59식 전차는 소련 전차와 성능이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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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76년까지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으로 무기 기술자가 대거 숙청된다.  갈수록 품질 성능이 떨어지면서 중국 59식전차는 소련 전차 T-54, T-55에 탑재된 적외선 탐조등 주포 안정화 장치가 없었진다. 중국은 소련제와 성능은 똑같지만 가격은 2/3이라고 세일즈를 한다. 이라크는 엄청 구입했다.  비상시 다른 전차 부품으로 교체를 해야 하는데 부품이 맞지 않았다. 그러자 중국은 59식 말고 개량한 69식 전차를 사라고 한다. 중소국경분재 당시 노획한 소련 전차 T-62를 분석해 69식 전차를 개발했다. 이라크는 구매했고 처음에는 성능이 좋았지만 2달이 지난 후 성능이 떨어지면서 전차가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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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는 소련 전차 T-62를 도입했다. 가격은 비쌌고 배송은 느렸다. 이때 북한이 손을 내밀었다.  소련전차 T-62를 개량한 북한 전차 천마호가 이라크에 판매되었다. 이라크군의 평가는 중국제 보다 낫다였다. 소련은 자신들의 무기를 카피해서 세계적으로 판매되고 있자 심각하게 느낀다. 소련 전차 T-72는 제공하지 않았지만 이라크에게는 제공한다. T-72은 2A46 125mm 활강포가 탑재되어 세계 최강의 전차포로 평가되었다. 이라크는 소련과 폴란드에서 생산된 T-72를 대량 구매한다.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에 소련 전차  T-72가 배치된다.

 

T-72 2A46 125mm 활강포는 수명이 100~120발이었다. 서방 전차는 전차포 수명이 최소 500~1,000 발이었다. 엔진 수명이 서방 전차의 1/3 수준이었다. 실제 걸프전에서는 1/5이었다. 8년간 전쟁을 하면서 이라크는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지보수가 엉망이었다. 이라크의 인적 요소도 문제가 있었다. 유능한 장군 발탁이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사담 후세인에게 충성하는 충성파 장군들만 득세했고 뛰어난 지휘관은 부족했다. 

걸프전에는 서방언론은 이라크 군사력이 세계 4위라고 보도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간의 지지부진한 싸움이었고 그 과정에서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란-이라크전쟁은 국지전으로 미사일 공격을 계속하면서 서로 경제적 피해, 인명피해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을 멈출 명분을 찾고 있었다. 

1988년 7월 전쟁 수행 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는 강화협상을 요청했고 1988년 8월 유엔 결의안에 따라 휴전을 수용하면서 8년간의 전쟁을 끝낸다.

 

이라크는 전쟁 중 화학무기 사용 교리를 개발하고 능력을 키웠다. 이라크의 화학무기 공격으로 수천 명의 이란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당시 국제 사회는 비난 여론이 없었다. 

알제협정을 깨고 이란을 침공한 이라크, 이란 모두 샤트알아랍수로 전체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이라크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는다. 걸프 전쟁의 시작점이 된다. 

 

석유가격은 떨어지고 국가운영은 어려워지고 부채 상환이 불가능해진다. 전후 재건이 필요한 시기에 재건 비용이 부족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소련은 국력이 저하되면서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냉전시대 중동국가들의 갈등 속에서 전면전으로 가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과 소련의 통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소련이라는 컨트롤 타워가 없어진 것이다. 이라크는 외부적 통제할 힘의 부재와 내부적 경제적 압박을 가지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사회적 위기로 다가온다.

 

후세인의 정권 유지는 불안해지고 있었다. 후세인을 지지하는 세력이 되는 군부는 전쟁으로 인해 팽창했다. 현역 100만 예비군 48만으로 총 148만 병력을 가지고 있다. 전쟁 이후 경제가 파탄나서 전역시키면 일자리가 없어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고 사회적 불안감이 올라갈 것이다. 후세인의 독재가 가능했던 이유가 경제적 부유함에 있었다. 이제는 경제 위기로 후세인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유

1961년 쿠웨이트는 독립했다. 후세인은 유전으로 잘사는 쿠웨이트로 시선을 돌린다. 루마일라-라트카 유전은 서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쿠웨이트와 이라크 국경지역에 있다. 전쟁 이후 재건 및 부채 상환 비용이 필요한 이라크는 석유가격이 하락하면 경제 수입이 감소하는데 국제 유가가 너무 낮았다. 이때 쿠웨이트는 석유를 증산하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저금리 차관 및 무상 원조를 제공한다.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진 부채는 약 140억 달러였다. 이라크입장에서 아랍국가들이 지원을 했고 아랍국가들을 대신해서 이란과 싸운 것이었다.  전쟁 후 이라크가 이런 주장을 했을 때 중동의 다른 국가들은 이라크에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쿠웨이트는 동조하지도 않고 빛도 탕감해주지 않았다. 이라크는 말을 듣지 않는 쿠웨이트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라크는 군사적 압박을 통해 쿠웨이트를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쿠웨이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90년 8월1일 쿠웨이트 침공 전날 이라크의 최후통첩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중재한 이라크-쿠웨이트 협상이 이루어진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100억 달러를 달라고 요구한다. 쿠웨이트는 거절한다. 후세인은 다시 한번 화가 폭발한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릴 대상이 필요해서 쿠웨이트 아니면 이스라엘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은 요르단을 통해서 가야 하기 때문에 요르단에 장교를 파견해서 지형 정찰 등 침공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돈을 주면 이스라엘을 쳐서 아랍 민심을 잡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쿠웨이트는 말을 듣지 않았고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치기로 결심한다. 

 

1990년 7월15일 미 중앙정보국 CIA 정보에 따르면 이라크 쿠웨이트 국경에 이라크 군대가 3만 5천 명이 집결해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오판한다.

미국은 쿠웨이트 공격을 위한 군대로 생각하지 않았고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아랍국가 간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서방인의 인식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중동국가의 적은 이란이었고 후세인과는 계속해서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고 회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상원의원 대표단 등이 후세인을 만나 회유를 시도했다. 

후세인은 쿠웨이트는 원래 이라크 땅이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콘드라사건을 언급하며 서운함을 드러낸다. 이에 미국은 이라크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으며 중동지역 분쟁에 대해서 개입하지 않겠다고 답한다. 미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라크 입장에서는 미국이 중동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쿠웨이트를 쳐도 되겠다고 판단한다. 

1990년 8월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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