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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선정 올해의 인물 - '박정훈 대령'

작성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2024-05-17 11:02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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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은 박정훈 대령을 ‘2023 올해의 인물’로 꼽았다.

 

2023년 12월7일 ‘항명’ 재판 1차 공판을 마치고 나오는 박정훈 대령(52·사진)에게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거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진실이 규명되고 정의가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라고 그는 답했다. 

‘정의’와 ‘진실’을 중히 여기는 공직자가 2023년을 기억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징이라는 사실은, 거꾸로 두 가치가 빛바랜 시대라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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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령은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조사하던 해병대 전 수사단장이다. 28년 차 군인인 그의 삶은 수사 외압 의혹이 일던 지난 7월31일을 기점으로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박정훈 대령은 채 상병 순직 조사 결과를 왜곡하고 축소하려는 움직임에 정면으로 맞선 군인이다. ‘정의’와 ‘진실’을 중히 여기는 공직자가 2023년을 기억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징 인물이라는 사실은, 거꾸로 두 가치가 빛바랜 시대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8월2일 예정대로 사건을 경찰에 넘긴 뒤 박정훈 대령은 보직해임, 징계, 구속영장 청구, 기소 등을 겪었다.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불복했다는 혐의다. 박 대령은 여전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 대령을 지켜보는 건 어쩌면 낡을 대로 낡아버린 정의와 진실이라는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2023년 7월20일 해병대 1사단 소속 채 아무개 상병이 경북 예천에서 수해 실종자를 수색하던 중 순직했다. 같은 날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은 영안실에 안치된 채 상병의 시신을 마주했다. 박정훈 대령에게는 육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채 상병 또래의 아들이 있다. 수해 실종자 수색 작전에 투입됐다 주검으로 돌아온 스무 살 해병 앞에서 박정훈 대령은 “너의 죽음에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약속하고 다짐했다.

 해병대 군사경찰 최선임 장교인 수사단장이 직접 사건 현장을 확인하고 조사에 나서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박정훈 대령은 7월24일부터 7월28일까지 경북 포항과 예천을 오가며 조사를 지휘했다. 함께 사건을 조사한 최 아무개 1광역수사대장은 당시 박 대령이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각종 조서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등 수사 상황을 현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8월9일 군검찰 진술)”라고 기억했다. “박정훈 대령이 성역 없이 정직하게 수사했다(8월2일 군검찰 진술).” 7월28일 사건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개정된 군사법원법과 신설 법령에 따라, 군은 사망사건 조사 중 범죄 혐의를 인지하면 ‘지체 없이’ 사건을 이첩해야 한다. 해병대 수사단은 7월30일 국방부 장관 보고와 7월31일 언론 브리핑을 마친 뒤 8월2일 경북경찰청에 사건을 이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7월31일 낮 12시께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이 돌연 전날 결재를 번복하고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

박정훈 대령은 7월31일 오전 11시께 윤석열 대통령이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격노한 뒤부터 수사 외압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8월2일 해병대 수사단은 예정대로 경북경찰청에 사건 조사기록을 넘겼다. 조사 결과 축소와 왜곡이 우려되고 국방부 조사본부로의 이관 건의가 묵살된 상황에서, 박 대령은 법에 따라 빨리 “경찰에 이첩하는 것만이 정직한 해병대를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같은 날 국방부는 박정훈 대령을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하고 수사단장 보직에서 해임했다. 두 달 후인 10월6일에는 그를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박정훈 대령은 ‘채 상병 사건’ 이후 어금니가 하나 빠졌다. 최근 상담심리 치료도 받기 시작했다. 박 대령의 30년 지기인 ㄱ씨는 “박정훈 대령이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 대령은 ㄱ씨에게 “내가 충성을 바쳤던 군이 어떻게 나에게 등을 돌릴 수 있나”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17159112498772.jpg2023년 11월4일 채 상병 사망의 진상규명과 박정훈 대령의 명예 회복을 촉구하며 경기도 화성시 해병대사령부 앞을 출발한 해병대 예비역들이 11월5일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부근에 도착해 해병대 군가를 부르고 있다. ​​​​​​


그런 박정훈 대령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박 대령이 군검찰 조사나 법정에 출석할 때면 임관 동기인 해병대사관 81기 예비역을 중심으로 선후배 해병 동료들이 매번 그와 함께했다. 사건 초기에는 ‘혼자 보내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컸다. '일단 옆에 있어야겠다' 싶었다. 그 뒤로 사건의 내막을 찾고, 기회가 될 때마다 박정훈 대령에게 직접 물었다. 수사 외압 의혹 관계자들의 진술이 뒤바뀌고 외압 정황 증거가 드러나는 것도 목격했다. “박 대령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을 점점 가지면서 지금까지 왔다(김태성 해병대사관 81기 동기회 회장).”

 9월1일 박정훈 대령이 강제구인돼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갈 때만 해도 구속영장이 기각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박 대령도 구속 기각이 결정된 뒤 “기적 같은 일이고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기적 같은” 구속 기각 뒤 박정훈 대령은 “특히 고 채 상병의 억울함이 없도록, 수사가 잘 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라고 강조했다. 모든 건 채 상병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채 상병과의 약속을 지키는 게 박정훈 대령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한 군 관계자만 보아온 군 사망사건 유가족들에게는 낯선 모습이었다. 9월4일 박정훈 대령이 ‘보직해임 집행정지 신청’ 심문을 받으러 가는 길에 고 이예람 중사의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고 윤승주 일병의 매형, 고 황인하 하사의 아버지 등 군 사망사건 유가족이 동행했다. 유가족들은 채 상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는 명예로운 군인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그에게 힘을 주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이날 고 이예람 공군 중사의 아버지 이주완씨는 박 대령의 손을 잡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라고 말했다. 12월7일 ‘항명’ 재판 1차 공판 때도 고 이예람 중사의 아버지·어머니를 비롯한 군 사망사건 유가족들은 방청석을 지켰다.

17159112517337.jpg2023년 9월4일 고 이예람 공군 중사의 아버지 이주완씨(왼쪽 악수하는 이)와 박정훈 대령(오른쪽).



12월7일 그는 자신을 응원하러 중앙지역군사법원을 찾은 선후배 해병 동료 앞에서 이렇게 약속했다. “이제 첫발을 내디딘 것 같다. 우리 해병대의 모습처럼 정의와 진실을 위한 길을 가려 한다.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시면 지치지 않고 꼭 승리하겠다.” 박정훈 대령의 싸움은 새해에도 계속된다.

17159112538268.jpg9월5일 박정훈 대령(오른쪽)이 항명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국방부로 들어서고 있다.


<기사:이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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