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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 (양진성 옮김, 문파랑)

작성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2024-05-01 15:12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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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몽 라디게 - 육체의 악마 (1923년)

 

나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에 내가 열두 살이었다는 사실이 내 잘못이란 말인가? 이렇게 특별한 상황에서 내가 겪은 혼란은 그 나이에 겪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겉보기에야 어떻든 아무리 강력한 경험을 한다고 해도 갑자기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른이라도 혼란스러웠을 경험을 하면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 그런 경우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내 친구들이 갖고 있는 당시의 추억도 어른들의 추억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나를 비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린 소년들에게 전쟁이 무슨 의미일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전쟁은 우리에게 4년간의 기나긴 방학일 뿐이었다.

우리는 마른 강변에 있을 F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이성교제를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으셨다. 하지만 관능이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맹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서 나는 아버지가 그러신다고 해서 관능을 떨쳐버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거기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나는 몽상가는 결코 아니었다. 훨씬 더 순진한 다른 사람들에겐 꿈처럼 보일 수 있는 것도 나에겐 고양이 앞에 놓인 유리 덮개로 덮인 치즈만큼이나 현실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유리 덮개는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고양이는 유리 덮개가 깨지면 그 순간을 이용해 치즈를 낚아챈다. 아무리 그 덮개를 깬 사람이 자신의 주인이고, 그 때문에 손을 베었다고 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p.10-11)

 

나는 교실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빈정거리며 나를 돈주앙이라고 불렀다. 친구들은 몰랐지만 나는 그 작품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무척이나 우울해졌다.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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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쥐앙 - 몰리에르 (이화숙 옮김, 기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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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후안 - 몰리나 (전기순 옮김,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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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J로 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내 남동생과 여동생들은 전쟁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전쟁이 너무 길게 느껴졌던 것이다. 동생들은 전쟁 때문에 바닷가에도 갈 수 없었다. 또 늦잠을 자던 동생들이 신문을 사러 여섯 시에 일어나야 했으니 말이다.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8월 20일쯤 되자 이 어린 괴물들은 희망을 되찾았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피난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으려고 어른들과 함께 늦게까지 식탁에 앉아 있었다. 교통수단은 이제 남아 있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니 먼 길을 자전거로 여행해야 했다. 남동생들이 어린 여동생을 놀려댔다. 여동생의 자전거 바퀴는 지름이 겨우 40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넌 길거리에 혼자 버려두고 가야겠다."

그러자 여동생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나 열심히 자전거를 닦아놓았는지! 동생들은 더 이상 게으름뱅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내 자전거까지 손봐주겠다고 했다. 동생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새로운 소식을 들으려고 애썼다. 그런 모습에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마침내 동생들의 그런 애국심이 어디서 생긴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자전거 여행 때문이었다. 그것도 바다까지! 동생들은 평소에 보던 것보다 더 멀리 있는, 더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동생들은 더 빨리 피난을 떠날 수만 있다면 파리도 불태워 버렸을 것이다. 유럽이 위험에 처하는 것, 그것만이 아이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이들의 이기주의는 어른들의 이기주의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여름에 시골에 내리는 비를 지극히 싫어하지만 농부들은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빌지 않는가. (p.20-21)

 

어떤 전조도 없이 재앙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 사건과 카이요 재판의 폭풍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숨막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나의 기억도 전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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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 테일러 (유영수 옮김, 페이퍼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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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놀랍기도 하면서 불쾌했지만, 마르트의 약혼자가 편협한 사람이라는 점은 오히려 내게는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더 위축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자가 <악의 꽃>을 즐겨 읽는 사람이었다면 두 사람의 신혼집은 [연인의 죽음]에 나오는 집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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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 보들레르 (박철화 옮김, 동서월드북)

<121. 연인의 죽음>

무덤처럼 깊숙한 긴 의자와

은은한 향기 깃든 침구를 우리는 갖게 되리.

우리 위해 아름다운 이국의 하늘 아래

선반 위에서 야릇한 꽃들이 피어나리.

 

마지막 정열 앞다투어 불태우며

우리 두 심장은 거대한 두 개의 횃불처럼 타오르리,

두 겹의 불꽃 비추리,

양면 거울인 우리 두 마음 안에서.

 

장밋빛과 신비한 푸른빛 도는 그 저녁

우리는 서로 다시없는 쾌감을 나누리,

이별을 아쉬어하는, 안타까운 긴 흐느낌처럼.

 

얼마 뒤 한 천사가 문 열고 들어와

즐겁게, 정성껏,

흐려진 거울과 죽은 불꽃을 되살려내리.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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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행복은 원래 이기적인 것이 아니던가!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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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이기주의자 - 웨인 다이어 (오현정 옮김,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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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아침, 나는 골목으로 나가 우체부 아저씨가 결석 통지서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통지서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 다른 편지들은 우편함에 집어넎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자주 써먹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학교 수업을 빼먹은 것이 마르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마르트는 수업을 빼먹고 놀러다니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처음에 마르트와 함께 자유의 매력을 한껏 음미했지만, 그후에는 혼자서 그 기분을 맛보고 싶었고, 나중에는 거의 취미생활처럼 그 일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라는 약물에 중독되고 말았다.

한 학년이 끝나갈 때가 되자, 나는 그간의 게으른 행동에 대해 아무런 벌도 받지 않은 사실에 겁이 났다. 차라리 퇴학을 당해 이번 학년을 비극으로 결말지었으면 하고 바랐다.

늘 같은 생각만 가지고 한 가지만 바라보면서 살면, 그 일을 너무나 원하는 나머지 그 바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물론,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를 가장 괴롭힐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학교 수업은 내게는 늘 형벌과 같았다. 마르트와 자유는 수업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르네를 덜 좋아하게 된 것도 단지 그 애와 있으면 학교 생각이 나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척 힘이 들었고, 내년에 다시 학교에 돌아가 멍청한 친구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정말로 몸이 아파왔다.

참 안된 일이었지만 르네도 나 때문에 못된 버릇을 갖게 되었다. 르네는 나만큼 약삭빠르지 못해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나는 이제 나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우선은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했다. 학생주임 선생님의 편지를 가로채기에는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보니 차라리 내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느 수요일이었다. 그 다음날은 휴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파리로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내가 저지른 일보다도 그 때문에 나흘 동안은 집안이 시끄러워질 거라며 걱정하셨다. 나는 마른 강변으로 갔다. 마르트도 그곳으로 오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를 만났다면 나의 사랑은 더욱 강해져 나는 아버지와 싸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허함과 슬픔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고 나서 이제 폭풍우가 불겠구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떨군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버지가 보통 돌아오시는 시간보다 점더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부르시길 기다리며 정원을 돌아다녔다. 여동생들은 조용히 놀고 있었다. 뭔가 눈치를 챈 것이었다. 남동생 한 명이 흥분하여 아버지께서 방에 드러누우셨다며 가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버럭 고함을 치며 위협을 하셨으면 나는 반항했을 것이다. 그건 별로 안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으시다가 화도 내지 않고 평소보다도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눈물이 눈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모릿속에서 벌떼처럼 윙윙거렸다. 나는 무력한 내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아버지 앞에서는 그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 하라는 대로 할게요."

"아니다, 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나는 항상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두었으니 계속 그렇게 하려무나. 너는 또 내 결정을 후회하게 만들겠지만...."

어렸을 때는 여자들처럼 눈물이 모든 것을 용서해준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눈물조차 요구하지 않으셨다. 관대한 아버지 앞에 있자니 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까지 수치심이 느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고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새로운 고통이 생길 때까지만이라도 이 거짓말이 아버지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뿐만 아니라 나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려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산책을 하는 것처럼 피곤하지 않게 공부하면서 장시 마르트를 떠올리 수 있는 자유도 갖고 싶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안 된다고 하시지는 않겠지만 집에서 학교 공부를 게속한다면 그림은 마음대로 그려도 좋다고 하셨다.

관계가 돈득해지기 전에는 약속을 한 번만 어겨도 시야에서 멀어진다. 나는 마르트 생각을 지나치게 한 나머지 그녀 생각을 점점 덜하게 되었다. 방안에서 벽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빙빙 도는 것처럼 내 머릿속도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더 잘 보려고 할수록 점점 더 보이질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심지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

나는 다른 어떤 일에 바빠서 마르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할 때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끔씩은 이런 생각 때문에 우울해지곤 했다.

'쳇! 너무 좋아했지. 하지만 침대를 골랐다고 거기서 잘 수 있는 건 아냐.' (p.61-66)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우리가 행복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마르트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와 함게 있을 때 말을 붙이는 것은 혼자 있으면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엾은 소녀에게 그 침묵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 방법은 아무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 마음을 여는 데 있어서 침묵은 어떤 말이나 몸짓을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서툰 방법이었다.

내가 점점 더 달콤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가자 마르트는 내가 점점 더 싫증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르트는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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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 존 그레이 (김경숙 옮김,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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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의 불행이 다른 이들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p.88)

 

조금 전, 마르트의 집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처럼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과 달리 사랑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게다가 나의 상상력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욕구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우리의 첫 사랑의 순간에 대해 마르트에게 나쁜 기억을 남겨주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졌다. 마르트의 남편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므로 마르트는 나보다는 행복했다. 하지만 끌어안고 있던 팔을 푸는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보니 불안한 마음이 씻겨 내려갔다.

마르트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나는 성화에서처럼 그녀의 얼굴에 정말로 후광이 드리운 것을 보고 너무 놀라 감히 손을 대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이 조금 가시자 또 다른 두려움이 다가왔다.

지금까지 소심한 태도 때문에 생각도 못하고 있던 행동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되자, 마르트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남편에게 속해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사랑의 맛을 제대로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랑의 기쁨을 매일 조금씩 더 알아나가야 했다.

그렇게 진정한 기쁨을 알게 되기 전에, 진짜 남자로서의 고통이 먼저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질투였다.

나는 만족스러워하는 마르트의 얼굴을 보며 육체관계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르트가 더욱 원망스러웠다. 나는 나보다 먼저 그녀의 몸을 깨워준 남자를 저주했다. 그리고 마르트가 처녀일 거라고 생각한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녀의 남편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 단순히 유치한 공상으로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지금 같은 때에 그런 바람을 갖는 것은 직접 살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죄였다. 지금이 전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행복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전쟁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나 대신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처럼 전쟁이 나의 증오를 대신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우리는 함께 행복을 눈물을 흘렸다. 마르트는 왜 자기가 결혼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냐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때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내가 고른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었을까? 마르트는 부모님 밑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자크의 아내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내 아내가 되어 있지도 않을 것이다. 자크가 없었다면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나보다 더 나은 남자를 찾으면서 날 만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자크를 증오하지 않는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배신하고 있는 그 남자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마르트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우리의 행복을 범죄로 여길 수가 없다.'

우리는 또 어른이 아니어서 아무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함께 울었다. 마르트를 빼앗긴다면! 마르트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바로 내 여자다. 그러니 그녀를 빼앗길 사람도 나뿐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벌써 전쟁이 끝날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도 끝이 날 것이다. 우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오겠노라고 맹세했지만, 나는 원래 반항적인 기질이 없는 사람이어서 마르트의 처지에서라도 그런 식으로 남편과 헤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르트는 왜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주었다. 이제 한 십오 년쯤 지나면 내 인생은 이제 막 피기 시작할 것이며, 지금의 마르트 나이쯤 되는 여자 아이들이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그럼 난 너무 괴로울 거야. 네가 날 떠나면 난 죽어버릴 거야. 하지만 네가 내 곁에 남아 있다면 그건 마음이 약해서겠지. 네가 날 위해 행복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괴로울 거야." (p.94-98)

 

이럴 수가! 젊음에 너무 민감했던 나는 달리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마르트의 젊음이 시들고, 내 젊음이 꽃피는 날, 나는 마르트를 떠나게 될 것이다. (p.99)

 

조용한 죽음은 혼자 있을 경우에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둘이 함께 하는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무신론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슬픈 것은 삶을 마감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삶이라면 함께 사는 것과 함께 죽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p.102)

 

친구도 애인이 된 순간부터 약속 시간을 몇 분만 늦어도 참기 힘들어진다. (p.103)

 

나의 통찰력은 순진한 마음보다 더 위험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다른 아이드로다는 덜 순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형태만 다를 뿐이었다. 왜냐하면 나이가 몇 살이든 순진함을 벗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p.111)

 

우리의 행복은 모래성과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밀물이 들어오는 시각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나는 그저 물이 되도록 천천히 차오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p.130)

 

귀족이나 궁궐 예절은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평민들의 예절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평민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대접을 해준다. 그러나 궁궐에서는 나이든 공작 부인이 어린 왕자에게 예를 표하는 일도 전혀 놀라울 게 없다. (p.132)

 

마르트는 그런 크고 작은 일들로 고통을 받았지만 그녀는 똑똑한데다 사랑에 깊이 빠져 있어서 행복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진정한 시는 '저주받은' 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확실한 진리라 해도 때로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법이다. (p.133)

 

사랑만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없다. 사랑에 빠지면 게을러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고 게으름뱅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일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의 적은 일이다. 사랑은 어떤 일도 참고 봐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은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가랑비처럼 친절한 게으름뱅이다.

청춘이 어리석게 느껴지는 것은 게으르게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제도의 맹점은 많은 학생수 때문에 특출나지 않는 중간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늘 전진하는 정신에 게으름은 끼어들 틈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기간 동안 나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은 갑자기 출세한 사람이 책상에 앉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것처럼 미숙한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p.140)

 

시랑은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어한다. (p.141)

 

권력은 부정한 방법으로 쓸 때에만 드러나기 마련이다. (p.151)

 

이성만으로 알 수 없는 어떤 이유가 마음속에 있다고 해도 이성보다 우리 마음이 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없고, 자신의 모습만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나르시스가 아닐까? 우리를 삶 속으로 이끌고, 풍경이나 여자, 시 앞에서 '잠깐!'하고 외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유사의 본능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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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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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숨을 죽인 채 까치발을 들고 문이 살짝 열린 곳까지 걸어갔다. 목소리가 똑똑하게 들려왔다.

"아내는 아기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불쌍한 녀석! 그 아기야 말로 제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나는 절망을 억누르고 있는 이 홀애비를 보면서 결국 세상 모든 일은 저절로 질서를 찾아가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마르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고, 내 아들은 아주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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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 노자 (문성재 옮김, 책미래)

제29장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故物, 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强或羸, 或挫或隳,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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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라디게(Raymond Radiguet, 1903년 6월 18일 ~ 1923년 12월 12일)

프랑스의 소설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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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근교에서 출생이며, 출정 병사의 아내와 소년의 연애를 냉정하고 관능적인 필치로 그린 소설 《육체의 악마》(1922년) 로 일약 시인 아르튀르 랭보와 비견할 신성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멘토가 되어준 장 콕토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모더니스트 작가로 활약했으나, 그 해에 "나는 사흘 후면 신(神)의 병사(兵士)에게 총살을 당할 거야"라고 콕토에게 말한 얼마 후 병사하였다.

1924년 유작 《도르젤 백작의 무도회》가 출판되었으나 《클레브의 아낙네들》 등 고전적 심리소설을 모방하여, 이른바 전후 풍속의 난잡함에 고의적으로 반항한 점에 독자성이 있으며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단순하고 이지적인 연애심리의 분석이 체스 선수 같은 명석한 의식과 과정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전작을 능가하는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외에 시집 《타오르는 뺨》(1920년) 외에 희곡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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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 (원윤수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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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 (윤욱일 옮김, 동서월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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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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