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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고 장영희교수의 기고문

작성자 익명 작성일 2022-08-28 09:24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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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인 장영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연세대 박사과정에 진학하려 했으나, 면접장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아요. 박사 과정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라며 거부당한 뒤, 미국의 뉴욕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서강대에서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장애인이라고 차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하부터 장영희 교수의 기고문-----


나는 서강대 교수이며, 서강대 교수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께서 알아주셨으면 한다.


사실 나는 그냥 서강대 교수가 아니라 뼛속까지 "서강인"이다.


서강대 학부를 졸업했고 석사 학위도 서강에서 받았으며


지난 10여년 동안 서강에서 젊고 반짝이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인생의 반 가까이를 서강에서 보낸 셈이다.


과거의 어떤 추억을 되돌아보든지, 그 무대는 언제나 서강이다.


노고산, 로욜라 도서관, 알바트로스 탑, 그리고 그밖의 정겨운 건물들.


물론 캠퍼스보다는 서강이라는 이름의 그 의미가 내 삶을 뒷받침해준 것이겠지만 말이다.


서강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칼럼을 쓰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톨릭 신자로 유아 세례를 받았지만, 종교적인 이유에서 서강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서강대학교는 가톨릭 예수회 재단의 학교이다.)


사실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원시적이고 비문명화된" 70년대 한국에서, 서강대학교는


신체 장애가 있는 학생들의 입학을 허용했던 유일한 대학이었다.


학창시절의 내게 있어 상급 학교 진학이라는 것은 인생의 고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의 진학도 보통일이 아니었지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야했을 때에는


고등교육을 향한 모든 문이 굳게 닫혀있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운 좋게도─아니, 아이러니컬하게도─나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었고,


실력으로만 보자면 원하는 학교를 마음대로 골라서 갈 수 있는 입장이었으나


그 어떤 학교도 신체 장애인 학생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대학에 원서를 낼지 결정도 하기 전에,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나의 아버지는


각 대학을 돌아다니며 입학처장을 만나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모두 정중한 거절만이 되돌아왔다.


심지어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였던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마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 딸을 당장이라도 받아주고 싶네만, 다른 교수들이 찬성하지 않을 거야."


몇 군데 다른 대학을 찾아가 똑같은 대답을 들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간 곳이 서강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영문학과 과장이셨던 브루닉 신부님께 똑같은 부탁을 드렸고,


신부님은 아버지의 말에 그 큰 눈을 경악으로 둥그렇게 뜨고는,


"뭐라구요? 당연히 입학 시험을 볼 수 있죠!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


하고 되물으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 때 상황을 회고하시며


신부님이 마치 아버지를 정신나간 바보 아니냐는 듯 반문하셨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신나간 바보라도 너무 행복하셨다고...


이렇게 나는 서강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었지만,


그래도 나의 대학시절은 좋은 사람들─특히 스승님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 때는 영문과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에도 많은 미국인 신부님들이 교수로 계셨었다.


브루닉 신부님은 처음부터 서강을 내게 집처럼 포근한 공간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다.


신부님의 전공이 어느 분야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희곡 쪽이 아니었나 싶다.


학교에서 영어 연극을 공연하는데에도 열심이셨지만,


강의실에서의 신부님은 그야말로 "연극적"이셨다.


한번은 영문학 시간에 프랜시스 톰슨의 <천국의 사냥개>에 대해 강의하시다가


"나는 밤낮으로 그를 쫓는다/ 나는 시간의 복도를 따라 그를 쫓는다"하고 낭송하시며


온 강의실을 사냥개 흉내를 내며 킁킁거리고 돌아다니시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내 마음 속 미로와도 같은 길을 따라 눈물의 안개 속에서도"


나를 쫓아다니며 보살펴주는 사냥개의 모습이다.


불그스름한 얼굴에 언제나 밝은 미소를 띤 신부님은 학생들에게 인사할 때도 "연극적"이셨다.


연극 <라 만차의 사나이>에서 돈키호테 역을 맡았던 남학생을 부르실 때면


느닷없이 허공으로 창을 던지는 제스처를 쓰기도 하셨다.


브루닉 신부님은 나를 세례명인 마리아로 부르셨는데,


나를 보시면 두 팔을 벌리며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하고


당시 유행하던 패티 김의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신부님은 당시 우리말을 배우고 계셨지만 환갑에 가까운 나이라 많이 힘들어 하셨다.


한번은 강의하시다 말고 "한국어에는 도저히 발음이 불가능한 단어가 2개 있다"고 하셨다.


교통순경과 욕심꾸러기.


그리고는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나 당신이 생각하시는 욕심꾸러기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셨다.


부와 권력을 탐하는 욕심꾸러기는 나쁘지만


배움과 사랑과 꿈을 탐하는 욕심꾸러기는 좋은 욕심꾸러기라는 것이었다.


브루닉 신부님은 온화하고 다정하신 분이었지만,


나는 딱 한번 신부님이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해에 체육이 전교생 교양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는데


(하반신 장애인인 나는 체육 수업에 참여할 수가 없었으므로)


담당 체육 교수님은 내가 한 시간도 빠짐없이 수업을 참관해야만 학점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체육관은 언덕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하는 캠퍼스 외곽에 있어서


사실 나에게는 체육관까지 가는 것이 "체육"을 넘어 에베레스트 등정보다 더 힘들었다.


게다가 비가 오기라도 하면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마침내 교수님께서는 비오는 날에는 체육관에 오지 않아도 결석으로 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해 여름은 장마가 일찍 시작한데다 1달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가 왔다.


나는 3번 수업 참관을 빠졌는데 그 때문에 FA를 받았다.


(FA는 출결불량 F로 서강에 아직도 존재하는 학점제도이다.)


FA 학생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나는 충격을 받아 멍해졌다.


성적표에 F학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신부님은 너무 화가 나서, 앉아 있던 의자에서 튀어오르다시피 하셨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How could he…" 만 연발하셨다.


나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신부님의 눈에 고인 눈물을.


어쨋든 신부님은 나중에 개인적으로 나의 체육 교수님을 만나 말씀을 나누셨고,


교수님은 내게 F 대신 D를 주셔서 결국 무사히 마무리가 지어졌지만,


나는 아직도 신부님 눈에 고여 있던 그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출산율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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